에스파니아

상운 2006. 2. 19. 22:49

 

 

똘레도 (Toledo) 전경

 

 



 

똘레도는 

두말 할것 없이 스페인에서 가장 웅장한 30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따호강 위의 작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도시는 고대 로마로 부터

고트.이슬람 정복시대. 카도릭을 거치면서 역사적 문화적 유산이 많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도시이기도 하다.

 

똘레도라는 이름은 원래 "성으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뜻이다.

 

역사는 15세기말 카도릭 세력이 이곳을 진입 할때까지 400년 동안

이슬람교도가 이 도시를 지배하였고 

오랜동안 

그런 비운을 겪었기 때문에

이도시를 말할때 이슬람 문화는 빠지지 않고 등장게 된다.

 

 



 

똘레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데하르 양식 건축물 들이다.

 

무데하르는 이슬람 지배가 끝난 뒤에도 스페인에서 살었던 이슬람교도들을 일컫는 말이며

무데하르 양식이란 스페인에서 발달한 이슬람과 서구문화가 결합된 건축 양식을 말한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볼수 없는 스페인 특유의 양식이다.

 

똘레도의 전성기는 13세기에 산 페르난도 3세 그리고 알폰소 10세에 의해

많은 발전을 이루게되는데 카도릭 국왕 부처때에 이르러 도시의 면모를

갗추게 되면서 외적으로도 크게 팽창을 이루게된다. 

 

그러나

1492년 국왕부처는 스페인내의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고

거의 모든 공업과 상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의 추방은 곧 경제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 되엇다.

 

 


                                                 

  똘레도의 좁은 골목길

 


더구나 1561년 펠리페2세는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중요도를 잃기 시작하여 쇠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똘레도는 오랫동안 수도로서 영화를 간직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중세의 모습을 볼수있게 되였고

 

 중세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아름다운 풍경은 

도시전체가 박물관이 된듯 유적이 가득하고 이색적이다.

 

답답하리 만치 좁은 골목 길. 고딕식 성당. 유태인교회.그리고 왕궁과 성벽들.

 

이곳에 오면 중세인이 된듯 착각을 잠시 하게끔 만들게 되는데

온통 중세의

모습과 분위기를 간직하도록 정부의 크나큰 뒷바침의 노력이리라.

 

 


 

맛 있게 점심식사를 한 똘레도에서 오래된 식당.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는것은 종교적인 위상이다.

 

5세기 이후로 수많은 종교회의가 개최되였고 15세기경 완성된 똘레도 대성당은

지금도 스페인의 수석성당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19세기 이후로 사관학교가 설치될만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인구 3만의 도시에서 10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한다고 하는 이 똘레도는 과거 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것이 있다면 종교적인 힘일 것이다.

 

무수한 종교회의를 치룬 이곳은 3면이 따호강에 둘러쌓여 섬처럼 보이는데

서쪽끝이 산마르띤 다리에서 동쪽끝의 알깐따라 다리까지

따호강이 흐르기 때문이다.

 

 

 

<산마르띤 다리>

 



산마르띤 다리는 서쪽지역에 건축용 화강암 및 석탄등이 많이 생산되여

운반할 통행로가 필요해 14세기경 건축되엿다고 한다.

 

원래는 이 다리 옆으로 아랍시대 만들어졌던 다리가 있었는데

1203년 홍수로 인해 완전히 파계되였으며 그 흔적으로 "까바의 목욕탕"이라고

불리우는 전설과 함께 오늘날 까지 아랍다리의 교각이

그 모습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단다.

 

다리가 마르틴성인 교구와 가까우므로 이름을 "산마르 틴"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다리는 따호강 위를 마드리드와 똘레도를 이어 준다. 

 

이교각을 축조할때 중간 아치를 잘못 설계하여 성당 건축하는데

운반할 무거운 대리석 마차가 통과하면 위험하게 되엿다고 한다.

 

이에 설계와 시공을 책임진 건축가는 크게 낙담을 하고 고민을 하게되였는데

부인의 지략으로 아무도 모르게 밤에 불을 놓게 되고

화재로 소실된 다리는 새로히 완벽하게 재설계 완성되여 무사히 하중을 충분히 감당해서

공사를 마쳤다는 일화와 함께 오늘날까지 내려 온다고 한다.

 

 



 

<까바 목욕탕에 얽힌 전설>

 

비시고도 왕조 시절의 이야기다.

 

홀리안 이라는 백작에게 "폴로린다 라 까바" 라는 딸이 있었는데

마지막 왕이었던 "로드리고"는 까바라는 여자를 흠모하여

목욕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다 범 하게까지 되였다고 한다.

 

이에 까바는 아버지에게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고

세브타 라는 곳에 있었던 아버지 홀리안은 대노하여 왕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아랍 사람들에게 스페인 점령을 용리하게 할수 있게 길을 열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랍인은 이 루트를 통해 쉽게 스페인을 정복하고 침공에 성공하였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전해져 내려 오는 전설이라 하겠다.

 

 

 

 

 

<똘레도의 대성당>

 

 




이 성당은 이슬람 왕국시절에는 회교사원이 있었던 곳이였는데

11세기경 수복되여 "알폰소" 8세와 히메네스 데 라다"대주교가 개조 축조 하였다고 한다.

 

15세기경에 완성된 고딕양식의 전형적인 이 건물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는데

프랑스식 성당 건축양식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마르틴" 건축가에 의해

건축되였다고 한다.

 

상부의 아치형 지지대와 신랑에 적용된 부분은 독창적이라고 한다.

 

 




성당의 정면 모습은

2개의 탑이 양쪽에서 서로 대칭을 이루도록 설계되여 있었는데

한쪽 종탑만 완성되여 약 1.800키로그램 대형종이 설치되여 있고

 

다른 한쪽탑도 기반부 공사만을 끝낸후 원래 설계와는 다르게

팔각형의 원형지붕으로 마무리를 지었다고 한다.

 

양쪽 탑 사이로 3개의 출입구로 형성된 성당 정면부를 볼수 있는데 가운데가

"용서의 문" 오른쪽의 문을 "심판의 문" 왼쪽에 있는 문을 "지옥의 문" 이라고 한다.

 

특히 중앙문 상부의 부조물은 "제의 수여"를 나타내며 문짝 가운데 있는 기둥에는

사도들의 모임을 주재하는 예수님 상이 조각되여 있다고 한다.

 

 

 

 

 

 

프라도 미술관  (Museo del prado)

 

 



1819년 개관한 프라도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스페인의 국립 박물관이다.

 

도리아 이오니아 건축양식을 가미한 신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이건물은

건축당시엔 자연사 박물관으로 계획 되였으나 페르난도 7세에 의해

왕립 미술관으로 바뀌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중세에서 18세기에 이르는 6.000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데

16.17세기의 것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스페인의 대표화가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이 많이 있다.

 

 

 

 

벨라스 케스  (Diego de velazquez)

 

 



1599~1660년의 스페인의 화가다.

 

 

세빌리아에서 출생했으며 프란시스코의 제자로서 마드리드로 나와

빠체코 문하에서 작품생활을 전념하였고

24세에 펠리페 4세의 초상을 그려 궁중화가 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2번이나 유학을 하였고 궁중화가로서 초상화. 종교화. 푸경화.등을 그렸다.

 

그의 화법은 진중 정확한 사실적 묘사와 섬세한 색채의 표현과

인상주의적인 경향이 특색이였으며 화려하고 다양한 붓놀림과

미묘한 색의 조화를 이용하여 형태.질감.공간.빛.분위기의

효과를 내는데 성공하였다.

 

벨라스케스 작품중에는 실제의 사진을 방불케 할만한 탁월한 리얼리즘에 입각한

그림들을 많이 볼수 있는데 특히 그는 광선에 비치는 사물의 본질을

포착함으로서 인상주의를 넘어 20세기 예술의 대담성을 열어 주었다.

 

그의 대표작으로서는 시녀들. 대장깐. 브레다의 항복.등이 있다.

 

 


 

궁정 시녀들 (Las Meninas)

 

세게의 미술 비평가들이 뽑은 최대의 명작이라고 하는 그림이다.

 

중앙에는 어린공주가 있고 그녀 옆에는 하녀가 쟁반에 마실것을 들고

무릅을 꿇고 있는데 공주는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밖을 바라본다.

 

왼쪽에는 그림을 그리는 벨라스케스 자신의 모습이 있고

오른쪽에는 두 난쟁이와 조용히 업드린 개가 있다.

 

뒤쪽의 거울에는 그녀의 부모인 필립 4세와 마리아가 비친다.

또 열려 있는 문앞에는  귀족인듯한 한 남자의 모습도 보인다.

 

 

이 작품은 자연스럽지만 M.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우울하고 바로크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각 인물의 성격과 이미지. 따로 떨어진 공간을 한데그려 놓고도

전혀 분리 되지 않는 느낌을 준다.

 

그림속의 공간은 창과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해 나누어져 있고

또 얼굴이 크고 비굴해 보이는 난쟁이들. 위엄을 갗추고 있으나 어린 공주.

궁정화가로서 자부심을 보이는 화가등.

 각각의 인물 묘사도 사실적이고 뛰어나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쌀이 실내를 비추는 모습이나 거울을 이용한 수법등은

P.루벤스의 영향을 받았다. 

 

벨라스케스의 후기작품으로 사실주의적인 화풍이 두드러지며

 페리페 4세의 개인사무실에 걸려 왕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불카노의 대장간 (La fragua de Vulcano)

 

 

 

 

프란시스코 데 고야  (Francisco de goya)

 

 

 




1746~1828년 스페인의 화가다.

 

믿 그림을 그리다가 멘크스에게 인정을 받아 1798년 카룰로스 4세의 궁정화가가

되였다가 후에 프랑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18세기의 최대화가인 벨라스케스로 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정열적 성격과 리얼리티에의 날카로운 추구는

 

그의 예술을 로코코 풍조와는 매우 다르게 하였으며 나폴레옹군 침략의

비참한 살육의 역사를

정확히 묘사한 점은 이를 잘 말해 준다.

 

전화나 요려한 육체묘사를 보여주는 나체의

마야와 같은 걸작이 남아 있다.

 

 



 

초기의 목가적인 우아함에 비해 50세에 가까워서 부터는

반 환상적이며

격한 광폭성과 잔인한 표현으로 전률을 느끼게 하는 작품을 남겼다.

 

망명후 청각을 상실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까를로스 4세의 가족.오수나 백작 가족.

마야 부인으로 알려진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과"옷을 벗은 아름다운 여인"

등이 있다.

 

 



( 카를로스 4세의 가족 )

 

 

엄격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우 솔직하고 냉소적으로

묘사되였다고 해서 유명한 작품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질서 없이 서 있는 모습이 결코 왕가의

권위나 위엄은 느껴지지 않는다.

왕비 마리아 루이스가 실세를 잡고 정치를 하던 당시 40세의 왕카를로스 4세에게서

파워 있는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화폭에서도 중심에 서야할 왕이 옆으로 비스듬이 서 있고 왕비가

당당하듯 화폭의 중심을 찾이하고 있다.

 

옆에는 아들의 부인이 될 여자의 뒷머리 모습만 보이는데

당시 이여자를 며느리깜으로 탐탁히 여기지 않던 마리아 루이스의 심정과.

 

왕비는 마음속에 다른정부 고도이 재상을 두고 있으며.

이런 왕실의 다정하지 않은 모습을 고야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야가 54세때 그린 "카를로스 4세 가족"은 당시 궁정사회의 인습과 무기력 퇴페를

극명하게 나타낸 걸작으로 꼽힌다.

 

당시 상류사회에서는 총리 "고도이"가 왕비의 애인일것이라는 입소문이 번졌고

카를로스 4세는 사냥과 총 만들기에 정신이 빠져 정치는 말할것도 없고

젊은 아내의 욕망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미인과는 거리가 먼 왕비 마리아는 젊은 육체의 본능적인 욕망은 남달라 

미남인 고도이를 만나 한눈에 반하게 되고 특별한 관게를 맺게 된다.

 

그러나 1808년 나포레옹의 스페인 침공을 계기로 유발된 민란으로

카를로스 4세는 퇴위 되고 고도이는 체포 됐다가 망명길에 오른다. 

    

 

 





 

1798~1805년에 평민 출신의 궁정수석 화가 고야가 남긴 유일한 누드화다.

 

이 두그림은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 유명세는 작품 자체의 예술성 보다는

고야가 엄격한 카도릭 사회에서 누드라는 비도덕적 내용을 담아

  종교재판까지 회부되였다는 외설성 때문이다. 

 

또한 작품속의 젊은 여인의

정체를 둘러싼 많은 추측과 가설이 이 그림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스페인 왕정복고와 이에 뒤 따른 박해의 물결 가운데 고야는

그의 집에 압수될가 두려워 귀먹어리의 집을 손자 "마리아노"에게 상속까지 했다고 한다.

 

같은 인물과 포즈로 옷 입은 모습과 나체의 모습을

똑 같이 그려 대단한 화제의 작품이였던 것만은 일화로서도 증명이간다.

 

 



<아들을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

 

 

귀먹어리의 집 벽에 그려진 고야의 검은 그림가운데 하나로

1820~1823년의 작품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농업의 신 "사투르 누스"가 자신의 아들에게

모든 권력을 빼았길것이라는 가이아의 예언이 실현될것을 두려워한 남어지

아들을 잡아먹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공포 절망 분노 등을 상징하는 듯한 처절한 화면구성이 놀랍다.

고야의 정신적 내면적 파동이 이렇한 표현주의적 작품을 표출한것이 아닐까?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의미하고 있는

어두움을 잘 나타낸 그림이라 하겠다.

 

 



< 고야의 양 산 >

 

어두운 그림보다는

비 온뒤 개인날 처럼 밝은 색채로 생기가 넘쳐 난다.

 

 

                                                                                  <서양 미술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