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관점

대수맥 2009. 1. 13. 11:15

 

 

[머리글]

 

이글은 어느 분들이 요즈음 제가 고민하고 있던 부분에 대하여 아주 간결하고 종합적으로 정리해 올린 걸 보고 틈틈이 가다듬어 참고자료로 보려는 마음에 스크랲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1. 식민사관의 개념

식민사관은 제국주의 성립과정을 뒷받침하는 논리인 근대화론, 사회진화론에서 비롯되었다.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를 합리화하는 이론이었고 근대화론은 문명의 이름 아래 아시아에 대한 지도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논리에 맞추어 우리 역사와 사회를 해석하려는 내용은 모두 식민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1)


2. 식민사관의 형성과정

일제는 일찍부터 우리 역사를 왜곡하여 자신의 침략을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작업에 손을 썼다. 그 목적은 한국인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고,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을 부추겨, 한국인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없애려는 것이었다. 근대 이전인 에도시대(1603~1867)부터 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일본의 한국 연구는 청일전쟁(1894~1895. 청과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싸운 전쟁)이 일어나면서 한국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자 한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 일본의 근대 사학은 국학․한학의 계보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도쿄대학이 중심이 되어 서양 학문의 영향 속에서 탄생하였다. 20세기에 들어 일제가 한국병탄을 합리화하면서 일제의 한국사 연구는 그들의 침략행위를 합리화하는 방향에서 다양하게 펼쳐졌다.

한편 일제 식민세력은 합병 이후 조선 안에서도 조선사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들은 일본 안의 연구방법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식민지배를 위하여 한국의 역사, 지리, 법제, 풍속 등을 연구하였다2)


3. 일제 식민지 정책의 이론과 이론의 비판

식민사관은 크게 보아 몇개의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타율성론으로서, 한국사는 언제나 타율적으로 전개되어 왔으므로 당시의 강점 상황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정체성론으로서, 한국사는 오랫동안 내적 발전이 없이 머물러 있었으므로 근대화를 하려면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타율성론에는 南韓經營論(남한경영론,임나일본부설,일선동조론), 半島的 性格論(반도적 성격론,지리학적 결정론), 黨派性論(당파성론) 등이 있으며, 정체성론에는 封建制 缺如論(봉건제 결여론), 亞細亞的 生産樣式論(아시아적 생산양식론)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정체성론 계열의 논리들은 일부 지식인들에게만 영향을 끼쳤을 뿐이나, 타율성론 계열의 논리들은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5)


[일선동조론]

'일선동조론'은 일본학자 시데하라, 호시노, 기다 등이 주장한 것으로 일본고문헌과 신화적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위장하여 조선과 일본의 양민족이 동원 동족이라고 주장함으로 임나일본부설, 남선경영설에 뒷받침되어 태고이래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였다는 침략적 우월성을 근거로하여 조선은 일본에 흡수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조선강점을 합리화하고 일본과의 합병이나 식민지 지배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하여 1930년대 일본이 펼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근거로 이용되었다.6)

'일선동조론'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 밑에서 강조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를 통해 정책적으로 한층 심화되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한국민에게 강요된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과 민족말살정책도 그 연원은 여기에 귀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제의 침략이 만주와 중국대륙까지 뻗치게 되자 확대·발전하여 만주·몽골의 제민족도 포함시켜 그곳에 대한 침략마저 정당화하려 한 대아세아주의(大亞細亞主義)와도 밀접히 연결되었다.7)


<일선동조론 비판>

일선동조론은 일본이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한 8세기 초에 편찬된 역사서에 의거한 것이다. 또한 일본과 한국의 기원을 설명하는 부분은 모두 신화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신화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신화는 그와 관련된 보다 정확한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과 비교하여 엄정한 비판을 거쳐서 비로소 역사적 사실로 간주해야하는 데 일본은 신화만을 토대로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비역사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선동조론의 허구성은 한국고대사가들이 한국 및 중국 측의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통해 밝혀냈다. 동아시아 선사시대의 경우 주민과 문화는 시베리아 및 중국의 동북부 지방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문명의 원초적 단계에서 한반도가 문화의 선진지역이었고 일본 열도는 그 수혜지역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수수관계는 역사시대인 삼국시대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백제와 일본과는 밀접한 교류를 맺었는데 양국간의 문화교류의 특징은 백제가 문화수출국이고 일본은 문화수입국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가 편찬되기 이전에 한반도와 일본은 하나의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자간의 관계는 일제관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한국이 자국의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형태가 주류였던 것이다.8)


[정체성론]

'정체성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학자는 복전덕삼(福田德三)이라는 학자였다. 그는 유럽의 봉건제도의 개념을 도입하여 한국사에서의 봉건제도 결여론을 주장했는데, 한국이 왕조의 교체 등 여러 정치적․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 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한다. 후꾸다, 카와이, 구로따 등은 일본과 한국사를 비교하여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한국의 사회경제적 발전단계는 일본의 봉건제가 성립되었던 가라꾸라시대보다 오랜 고대말 10세기 경의 후지와라시대에 해당한다고 주장 하면서 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침략미화론으로 이어졌다.9)


<정체성론 비판>

한국사의 구체적인 사실 면에서 한국경제사는 한국적 특수성을 갖추고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겪었다. 한국의 경우 토지사유제가 일찍부터 성립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에 상품경제가 발전했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들이다. 심지어 조선후기 사회․경제상의 변화는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뜻하는 것이었다. 특히 17-18세기 이후의 사회는 근대사회로 전진할 수 있는 내재적 계기와 요인이 비록 결실을 맺지는 못했으나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즉 우리 역사가 선사시대 이래 고대국가, 중세사회를 거쳐서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있기 전까지 내재적으로 면면히 발전해 왔다는 것은 누가보든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했던 것은 제국주의와의 대립에서 힘의 열세로 일시 패배했던 결과일 뿐 결코 숙명은 아니었다.10)


[타율성론]

'타율성론'은 우리 민족에게는 자주적인 역사발전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가 반도라는 특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외세(중국이나 몽골, 만주)의 간섭과 힘에 항상 압도되어 왔다는 반도적성격론(일종의 지리결정론)을 말한다.

이는 한민족의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성향을 부정하고 타율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한민족의 부수된 주변성으로 대표되는 반도적 성격론과 사대주의론에 관한 주장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반도적 성격론'은 미시나가 주장한 것인데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 주변성, 다린성으로 규정하고 한국사의 최대 형성요인이 반도라고 하는 지리적 조건으로 반드시 정치적․문화적으로 대륙에서 일어난 변동의 여파를 받으며 그 주변성 때문에 항상 그 本流로부터는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미시나는 자신의 논리에 따라 한국사의 변증법적 역사발전 자체를 부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반도적 성격은 대외투쟁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외교관계, 국내 정치권 형성, 당벌성, 문화면에서도 나타나, 소위 사대주의라고 하는 성격을 형성케 하였다고 주장한다. 결국 한국사를 보면 중국에게 배우고 북방민족에게 복종하고 최후로 일본에게 안기어 반도사적인 역사를 지양할 때를 얻었다는 것이다.11)


[타율성론 비판12)]

①비교사적 측면

지리적인 조건이 역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결코 역사를 좌우한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조그만 도시국가였던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으로 발전하였으며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세계와 유럽대륙을 휩쓸고 섬나라 영국까지도 점유한 대제국이었다. 반도국가라는 조건이 약소국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숙명이라고 한다면 로마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지리적인 조건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이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지리적 조건은 어느 한계 안에서 역사에 작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이런 지리적인 조건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반도라는 조건이 과학의 진보마저 불가능하게 만들 수는 없다. 따라서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한국은 애초부터 영원히 약소국으로 숙명 지워져 있고 대륙이나 섬에 있는 나라에 의해 타율적으로 그 역사가 이끌리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허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② 한국사의 실제와 반도적 성격론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항쟁이 치열했다. 여진, 거란, 몽고, 청, 일본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이에 굴복하지 않고 강력하게 항쟁하였다. 고려건국이후 한국의 영토가 한반도에 국한된 이후 대외관계사는 일제어용학자들이 말한 것과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비록 영토는 한반도에 국한되었지만 외적의 침략에 대항하여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후에는 일본에서 풍신수길정권이 무너진 것에 반하여 조선에서는 사상․경제․문화 등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③ 결론

반도적 성격론의 이론적 근거는 지리적 결정론이었다. 역사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지리적 조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리적 결정론은 역사적 진리가 아니다. 반도의 작은 국토를 가지고도 대제국을 건설한 국가가 있고, 또 대륙의 넓은 국토를 가지고도 다른 나라에 정복된 예도 있다. 그러므로 땅덩어리의 역사로부터 인간의 역사로, 역사를 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반도에 우리 국토가 국한되어 있더라도 강대국이 될 수가 있다. 또 군사적으로 강대국이 되는 것이 민족이나 국가의 이상일 수는 없다. 오히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여러 면에서 모든 민족구성원이 균등한 권리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국가를 이룩하는 것이 군사적 강대국이 되는 것보다 몇 배나 바람직스러운 일인 것이다. 이러한 이상국가의 건설이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에 의하여 제약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당파성론]

당파성론은 조선의 문화수준이 낮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조선시대 정치사를 “당쟁의 역사”라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평가하였다. 당파성론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형성된 당파성이 한국인의 민족성으로까지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발전하지 못한 까닭은 이러한 잘못된 민족성을 지닌 탓이라고 주장하였다. 당파성론은 1907년 폐원탄(弊原坦)이 저술한 『韓國政爭志』에서 기원한다. 그는 조선시대의 정치사를 ‘정쟁’으로 규정하고 그것은 私的 이해만을 추구하는 사사로운 권력투쟁이라고 비하하고 사색당파의 분립과 대립을 사적인 개인간의 권력투쟁으로 강조했다. 그는 『한국정쟁지』에서 조선시대의 정파는 “主義를 가지고 서로 대립하는 公黨이 아니고 利害를 가지고 서로 배척하는 私爭”이라 규정하고 그 대립상을 “黨爭” 이라 표현하였다. 이러한 조선정치사에 대한 당재론적 관점은 이후 일제관학자들의 한국사 서술에서 확대․재생산되어 조선시대 정치사 부분은 ‘당쟁’으로 점철된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외에 이런 관점에서 일제관학자들에 의해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마침내 당파성이 한국민의 ‘체질’이 되었다는 주장까지 등장하였다. 체질론은 “조선사람의 혈액에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어서 정쟁이 여러 대에 걸쳐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민족의 분열심을 조장하는 당파성론이 체계화되었다.13)


<당파성론 비판14)>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은 일반적으로 조선왕조가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들 믿고 있다. 이러한 조선왕조 정치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망국으로 그 역사가 끝나고 있는 것이 사실인 만큼 이에 대한 반성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파쟁적인 민족성을 부각시켜 민족이 정치적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치는 그 본질 자체가 권력투쟁이며 권력투쟁의 근원은 각 개인의 이익 추구인 것이다. 권력투쟁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정치적 행위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어느 민족의 역사이든 정치사의 내막을 살펴보면 음모와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정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조선시대 지배층인 유학자 양반관료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정치운영원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정치를 이끌었으며 이를 朋黨政治(붕당정치)라 한다. 붕당정치란 여러 당파의 존재를 인정하고 당파간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여론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운영원리를 말한다. 붕당정치론에 의하면 붕당정치가 시행될 때에는 당파 간의 견제 기능이 있었고 주도적 당파의 교체를 통해 비판여론의 수용이 가능했다. 이를 통해서 지배체제가 비교적 건전하게 운영되면서 유지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선왕조가 멸망한 원인은 오히려 붕당정치가 파탄되어 일당독재로 흐르고 말기에는 세도정치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세도정치기에 소수 특권적 별열층이 형성됨에 따라 그들과 대다수의 양반층을 포함한 피지배층과의 괴리 현상이 나타나고 이것이 사회적 통합을 저해했다고 볼 수 있다.


4. 식민사관에 따른 폐해


[당파성론의 폐해15)]

당파성론은 한민족의 분할 통치를 위한 목적이외에도 한민족이 정치의식을 무력화시키려는 지배정책적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 즉 당파성론은 한국인에게 정치혐오증을 불러일으킴으로서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판적 정치의식을 희석화시켜 권위주의적 식민지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 당파성론은 식민사학의 다른 어떤 내용보다도 한국인에게 미친 악영향은 컸다. 왜냐하면 당쟁의 폐단은 한국 근현대의 지식인들에게 있어 식민지화된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당파가 존재했고 당파들 간의 권력투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첨언>

전 여기서 <당쟁>이라는 용어 보다는 <붕당정치>라는 용어가 맞다고 봅니다. 붕당정치라고 하는 것은 당파를 갈라놓아서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조선시대에는 왕이 독재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려고 노력하였고, 그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붕당정치는 한쪽의 세력만을 대변하지 않고, 골고루 의견을 수렴할 수 있었던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도 획기적인 정치제도였습니다.

당시 이와 비슷하다고 하려면 영국의 휘그당과 토리당 같은 게 있었지요. 이는 귀족과 평민을 대표한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붕당정치는 귀족의 입장을 대변하되 상호견제를 통해서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정치적 폐혜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긴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고, 자신들의 생각을 국정에 반영하였지요.

오늘날의 민주정치에서도 국회에 당파가 있죠. 예를 들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등으로서 나뉘어져서 한쪽의 세력의 이득만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새도 보이듯이, 이러한 것들은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하기도 해도 폐혜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러는데, 당시에는 어땠겠습니까... 일본은 이를 뻥튀기 해서 커다란 문제였으며, 식민사학에서도 당파성이라고 해서 따로 다루면서 좋지 않은 것이라고 열심히 홍보를 해 댔습니다.

일본사를 보면 대체적으로 군부독재의 시대였습니다. 이게 일본의 역사입니다. 막부라는 것 자체가 군사정권이며,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자민당 독재 등, 일본 자체의 폐혜가 훨씬 크죠.



[이병도사관]

'이병도사관'이란 명칭이 쓰인 것은 이병도가 우리나라 국사학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던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일제하 '진단학회' 활동성과를 기반으로 해방 후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대학에서의 후계 양성 등 국사학계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던 이병도는 1960년 허정 과도정부 하에 문교장관 등을 지낸 바 있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5·16민족상 외에도 대통령 표창까지 받는 등 국사학계에 미친 그의 공로가 대외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일제하 '조선사편수회' 등의 활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병도사관의 뿌리가 일본의 식민사가들의 깊은 영향하에 성장해 왔다는 사실 역시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병도가 학계의 원로로 자리를 굳혀가던 시기인 1970년대 중반에 그의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이 잡지에 공개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당시 국사학계는 식민사관 논쟁에 휩쓸리게 된다. 그러나 국사학계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식민사관적 잔재에 대한 내부 척결 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대부분 일제하의 활동을 은폐하거나 해방 이후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워 일제하의 활동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이병도사관에 대한 비판>

이병도사관에 대한 비판은 {자유}지 1976년 7월호에 실린 [이병도사관을 총비판한다], [이병도 저 '한국고대사 연구'를 논박한다]는 글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진보적 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비판은 이루어져 왔으나, 그가 일제하에서 진단학회 등 일제에 맞서 학문적인 투쟁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그의 식민사관 정립과정의 활동을 합리화하는 논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 사학계의 독자적인 사학 연구 학풍이 무르익으면서 사학계에서는 '식민사관'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발표된 앞의 글은 당시 이병도의 사학풍을 따랐던 국내 사학계에 충격과 함께 식민사관을 척결해야 한다는 일반인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16)


5. 식민사관에 의해 올바른 사관이 성립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병도사관에서 볼 수 있듯이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엄청나게 변조되었으며, 광복이후에는 서구 문화의 홍수에 밀려서 바른 사관을 잡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고, 분통스러운 것은 이 문제가 언제 바로 잡혀질지 기약이 없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비관적일 수밖에 없느냐 하면, 현재 우리나라 각 대학의 강단에 서있는 사학과 교수들의 대다수가 일제 하에 만들어졌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또 그 밑에서 배운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각 중․고등학교에서 그러한 사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라도 알고 있는 이들이, 과연 국민들 가운데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17)


6. 식민사관 불식의 필요성

韓國史는 조선조 이래 일부의 자기비하의식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런 자기비하는 조선조 말기까지 크게 사학사적으로 대세를 잡지는 못하고 소수의 목소리로 그치고 말았는데,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30여 년 동안 조작적인 식민사관 아래서 체계적으로 한국역사는 「식민지의 역사․파당분쟁의 역사다」라고 주입받은 세대에게는 한국사에 대한 의식이 크게 왜곡되고 말았다. 그러한 세대가 지금 한국사회의 주역 내지는 선도적 역할을 맡고 있는 50~60대의 세대이다. 얼마 전에 국무총리까지 지낸 고려대 총장이었던 김모씨가 “한국은 전쟁과 동란이 많은 반도에서 살아왔다”고 무심코 술회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만한 지식인까지도 그만한 지도적인 인사까지도 일제의 식민사관의 대표적 잔재인 소위 半島史觀에서 아직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 놀라고 해방 이후의 한국사학계의 對日**的 태도와 그 결과 빚어진 식민사관의 온존 내지는 확장에 대해서 놀랐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한국사 인식은 시급히 교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는 가히 E.H.Carr가 얘기한대로 “현재의 거울”이다. 부정적인 한국사 인식을 갖고 있는 한국인이 창조적․긍정적 사고를 전개하는 데에는 커다란 갈등과 무리가 따른다. 현재의 우리가 바람직한 선진․민주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도 그렇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여 민족공동체의 통일을 가져오기 위해서도 그러한 植民史觀 내지는 半島史觀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몇 년 전에 남한의 국사교과서를 건네받은 북간도의 동포가 남조선의 국사교과서는 아직도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읽을 수 없다고 우리 측에게 그 교과서를 반납해 왔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그 국사교과서는 지금도 한국인의 한국사 인식의 지침이 되고 있다. 한시바삐 우리의 역사기술에 있어서 일제의 식민사관을 불식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 사학계와 역사교육학계의 분발이 더욱 요청된다.18)


7. 식민사관을 청산하려는 우리나라의 움직임

우리나라에도 식민사관을 청산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그 예로 민족주의 사관을 들 수 있는 데 민족주의 사관이란 식민사관에 대응하여 우리역사의 자율․주체적인 발전을 강조하고 민족사의 기원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한말 계몽주의가 일제 제국주의의 논리 속에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역사학의 연구로 민족주의 역사가 등장했다.

근대민족주의의 시작인 신채호의 '독사신록', '조선사연구초'는 우리의 상고사를 민족적․주체적으로 보았으며, 박은식의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세계적․평등적 근대적 관점을 내세우고 있다. 정인보는 신채호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입증시켰고, 안재홍는 이를 이론화시키고, 문일평은 이를 대중화시켰다. 그러나, 해방이후 민족주의가 정신적으로 발현되어 물질적 바탕이 부족하여 사회의 변화를 따라 진화하지 못함에 따라 민족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19)


8 식민사관을 청산하기 위한 우리의 자세

식민사관은 그 내용자체에 대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비판만으로 극복된다고 보기 어렵다. 식민사관의 진정한 극복은 식민사관의 내용에 대한 비판 그 자체가 아니라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그리고 그에 기초한 올바른 사관이 정립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한국사 자체의 주체적인 발전과정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애정 어린 관심을 가져야 하며 한국인으로서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뚜렷한 사관을 갖추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20)





<참고문헌>

1. 강경구. [아직도 식민사관이..]. 한국논단, 1989.
2. 김정희.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사관]. 반민족문제연구소.
3. 나혜영. [일제 식민사관의 형성과 성격]. (2004.05).
4. 네이버 백과사전. [植民史觀].
5. 송호수. [한민족의 뿌리 사상].
6. 신용하.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서울:문학과 지성사, 1998.
7. 오성철.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 서울:교육과학사, 2000.
8. 울산경의고등학교. [식민주의 사관의 개념과 청산의 필요성]. 울산경의고등학교. (04-06-14).
9. 임사빈. [식민사관으로 부터의 광복].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86.
10. 정태헌 김인걸. {문화와 생활로 보는 한국사 제9강 : 식민지적 근대의 인식과 21세기의 준비}. 서울:아카넷티비, 2002.
11. comfirevort.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우리나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반박]. 네이버 검색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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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kj1427. [일선동조론]. <네이버 오픈사전 검색자료> (0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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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sinico. [일제시대 식민사관에 대한 일본인 연구자의 역사서술]. <네이버 지식 Q&A 검색자료> (03-04-22).



이글을 모호하게 '어느 분들이'라는 말로 자신의 글이 아니라는 것만을 표시하기보다는 원저자의 구체적을 이름을 밝혀주시면 고맙겠군요. 저는 표절을 싫어하는 학자적 양심이 있는 한 사람으로, 혹시나 이글의 일부를 인용하게 되면 원저자를 밝히고 싶습니다.
한솔님/ 그렇군요. 제가 오래 전에 정리한 글이라 다시 한번 자료들을 찾아 확인해서 올려놓겠습니다.
대수맥님 훌륭하십니다 냉철한비판과 깨끗하신 논증으로 앞으로도 계속 많이많이 동료를 모으시어 오래오래 우리역사의 치밀한내막을 파헤쳐주세요 그동안 멀리 이국에서 소유나오라는 역사전문인들이라면서 정치적 아부성을 띤사람들이 원로 역사협회의 오랜연구자료를 완전무시 하려던 기사들을 보았답니다 어찌나 어이없는 생때로 한국은 그래서 아직 자신의 나라의 역사에 대한자부심과 끊임없는 노력과 단결심이 부족하다라는 것을 이곳에서 매우비교적인면을 보고 쓸쓸함을 가졌던 기억이나는군요 그래서 한국은 여전 자신의 나라에 대한 아니면 조상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 후진국인가 하고요 저도 대수맥분과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사람중에 한사람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조선시대때 현재 영국과 각국의 기본정치제도인 요즘의 언어로 꼭 잡아 이야기 하자고 하면 소위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치밀하게 형성되었던 왕정이라고 할수있다고 자부합니다 노론 과 소론 또는 남 과 북의 파를 가른 정치무대를 두었다는것 명실공히 명명할수있는 엄연한 현대시대에 존재하는 치열한 정치무대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에대해 영원히 자부한답니다. 부디 시랄하고 냉철하면서도 같은민족으로서 서로를 존중할줄알고 단결하여 후세대대로의 연맥을 위하여 바탕을 계속쌓아 가주십시요 감사합니다 유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