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사학의 얄량한 떡밥

대수맥 2012. 8. 1.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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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半島의 온조백제溫祚百濟가 웅진熊津으로 천도遷都했을 무렵의 관제官制를 기록한 [주서周書와 양서梁書]의 내용은 동일同一해야 하는 게 당연한 상식常識이다.   그런데 야릇하게도 전혀 다르게 묘사描寫한다.


1) [주서周書]는 오방군현五方郡縣에 중앙귀족中央貴族을 임명하는 전형적인 군현제郡縣制이다.

  

2) 반면에 양서梁書는 22개 지역에 왕실王室의 자제종친子弟宗親을 파견해 다스린 담로제檐魯制이다.   이는 혈족血族들을 지방에 분거分居시키는 봉건제封建制와 군현제郡縣制가 분리分離되기 이전의 초기 통치형태이다.  



따라서 두 사서史書는 반도半島의 온조백제溫祚百濟가 시행한 군현제郡縣制와 중토中土와 반도半島 연안沿岸 경영지들을 통치統治한 비류백제沸流百濟의 담로제檐魯制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1) 내해內海를 제어制御하던 중토백제中土百濟의 담로제檐魯制는 흉노匈奴의 24 혈족血族 중심 만기제萬騎制와도 닮은 북방적 요소要素가 다분한 해양통치집단海洋統治集團의 특유한 거점지배방식據點支配方式이다.


2) 이는 <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이나 △△왕*○○후侯]와 같이 [지명地名+왕후제王侯制]를 채용採用하고 있는 관명官名을 보아서도 더욱 뚜렷하다.



이들 관명官名이 5C 무렵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명백하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공격으로 두 백제百濟가 무너지면서 남천南遷한 온조백제溫祚百濟가 비로소 그 지역에 웅거雄據하고 있던 중토백제中土百濟의 잔여세력殘餘勢力인 담로檐魯들과 만나 같은 처지임을 공감共感하여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웅진도읍熊津都邑 기간에 이들을 포용包容하기 위해서는 종전의 신분身分을 그대로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고(무령왕武寧王의 매지권買地卷에 관한 의문疑問이 풀리는 대목이다) 바로 이시기에 이런 현상이 집중적으로 투영投影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데 백제百濟는 이 때문에 기력氣力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5C 말에 갑자기 사라진 까닭도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얼마만큼의 국세國勢를 회복한 백제百濟가 이들을 서서히 좌평佐平으로 흡수시켰기 때문이다.   이 무렵의 좌평佐平 임명기록을 보아도 확연하다.


그동안의 실세實勢였던 해씨解氏와 진씨眞氏가 소멸消滅하고 담로檐魯가 사라지는 시점時點에 맞추어 신흥귀족新興貴族 계층으로서 [사씨沙氏*목씨木氏*국씨國氏*백씨苩氏 등 팔성대족八姓大族]이 갑자기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환골탈태換骨奪胎한 백제百濟가 처음부터 반도백제半島百濟이었다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우리 측의 [백제본기百濟本紀] 기록에서는 사라진 반면에 한족漢族 사서史書에서만 파편처럼 등장한다.  


허나 실수였는지는 모르지만 웅진熊津 남천南遷 후 탐라왕(耽羅王-담로왕檐魯王)의 귀화歸化 기사記史가 난데없이 등장함으로서 위와 같은 추정推定을 역설적逆說的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무령왕릉武零王陵 매지권買地卷]은 이 사실을 매우 극적劇的으로 설명해 주는데 [릉지대금陵地代金]으로 지불支拂한 <箋一萬文右一件>이 주목된다.   무령왕武寧王은 전1만문箋一萬文으로 제기된 송사訟事를 해결하려고 <士王*土伯*士父母*上下衆官>에게 2천석二千石을 더 주어 릉지陵地를 매입買入하고 [매지권買地卷]으로 밝혀놓으면서 이 계약契約은 율령律令에 따르지 않음을 알렸다. 


이로 보아 1만문一萬文으로 능지陵地를 매입買入했으나 적다고 송사訟事가 계속되는 가운데 왕王이 갑자기 죽자 왕실王室에서 다급하게 2천석二千石을 더 주어 매듭짓고 앞으로 이 건件에 관해서는 율령律令을 배제排除하기로 한 듯 하다.


후일의 갈등을 막으려고 [매지권買地卷]을 세웠으니 매입買入한 쪽의 소유권所有權 보호라는 측면側面이 당연히 강하므로 [부종율령不從律令]에서 율령律令의 주체主體는 토왕측土王側이 그동안 시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김원룡金元龍]씨는 <매지권買地卷이 지신地神으로부터 묘 터를 산다는 계약서契約書로 중국中國에서 도입導入된 풍습>으로 보았으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설명이 안 된다. 


1) 지신地神과 송사訟事로서 싸울 수는 없다.


2) 지신地神에게 율령律令이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


3) 중국中國의 경우에도(후한後漢 광화光和 원년元年 AD 178*건녕建寧 원년元年 AD 168) 계약년월일契約年月日*매매당사자賣買當事者*매매지賣買地의 위치와 대금貸金*매주賣主의 권리 등이 기재된 다음 <他如天帝律令*有私約者當律令>이라고만 부기附記되어 있다(안준남岸俊男  유적遺跡*유물遺物と고대사학古代史學  125P-127P).   일본日本 대재부궁大宰府宮 출토出土 매지권買地卷도 동일하다.



그렇다면 백제百濟의 왕王에게 릉지陵地를 팔면서 전일만문箋一萬文과 2천석二千石을 받아내고 송사訟事까지 벌였던 토왕土王 등의 집단은 누구였을까?  왕王조차 율령律令을 배제시킨다는 부기附記까지 할 수밖에 없었음을 볼 때 결코 단순한 지신地神이 아니라 율령律令의 전통까지 지니고 있던 만만치 않은 세력이다.


결국 웅진熊津의 원주집단原住集團으로서 중토백제中土百濟의 담로왕檐魯王라고 보아야 그동안의 의문疑問이 쉽게 풀린다.   무령왕武寧王의 세력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전역戰役으로 기반을 잃고 이주移住한 처지에서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箋一萬文右一件 乙巳年8月12日嶺東大將軍百濟斯麻王以前件箋送士王 土伯士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故立卷爲明 不從律令   <무령왕릉武零王陵 매지권買地卷 내용>



이와 같은 견지見地에서 추정해볼 때 왜倭의 <담로주淡路州> 또한 백제百濟가 처음 관장管掌하게 된 왜지倭地를 경영하는 총본부總本部로서 본래 해상세력海上勢力이었으므로 바다로 인해 동떨어진 <섬>이 가장 알맞은 천혜天惠의 방어역량防禦力量을 갖춘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해內海의 해상교통海上交通 중간기지中間基地에는 어김없이 비류계沸流系 송양왕松讓王의 다물(多勿-다무루)에서 진화進化한 [담로계魯系 지명地名-다무로]들이 하나의 연결을 이루면서 존재한다(중토中土 연안沿岸과 내해內海의 교통로交通路 상上에 있는 담수淡水*단계亶系 명칭名稱들 - 우리의 탐라耽羅 등 담로제擔魯制 근거지 - 왜倭의 담로주淡路州).   담擔*담檐*담淡*단亶*단單은 모두 <tan*dan>으로 소리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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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의 내해內海 장악은 어느 시기부터 실마리가 잡혔을까?   필자筆者는 고이계古爾系와 쌍벽雙璧을 이루는 왕계보王系譜 혈통血統을 만든 [초고肖古 시대 - 고이古爾 시대] 무렵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1) AD 220년대에 중토中土의 삼국三國이 왕王을 칭稱하면서 건업(建業-건강建康이라고도 하며 남경南京이다)을 중심으로 삼은 손권孫權은 강남江南의 시라계尸羅系 세력을 압박한다.   [삼국지三國志 권47 오주전吳主傳 황룡黃龍 2년  AD 230년 조條]에 <장군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에게 갑사甲士 1만을 주어 이주夷州와 바다에 있던 단주亶州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단군조선계檀君朝鮮系 어군語群을 공유共有하고 있던 명칭名稱을 한자漢字로 표기表記한 게 틀림없는 <단주亶州> [1]와 이족夷族 세력의 근거지라는 <이주夷州> [2]는 [강남 서족徐族 집단]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당시 이들은 거의 수만에 육박하였다).


[1] 무현鄮縣 동북 연안인 단주산亶州山 부근 -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98 명주冥州 무현조鄮縣條

[2] 절강성浙江省 태주台州 지역 -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98 태주台州 린하이현조(이주夷州 사면斜面은 계곡으로 그 정상頂上에 월왕越王의 낚시돌인 조석釣石이 있다는 기록)



2) 다음 해 2월 결국 그렇다 할 공功을 세우지 못하고 서족민徐族民 수천 명만을 끌고 간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은 노怒한 손권孫權에 의해 처형處刑된다(衛溫諸葛直皆以違詔無功下獄誅).  


   바로 그달에 손권孫權은 다시 반준潘濬에게 5만이라는 대병大兵을 주어 무릉(武陵-항주沆州의 무림武林이라는 게 현재의 통설通說이다)의 만이蠻夷를 치게 한다.   이들이 기록에 항주沆州 동북 임평호臨平湖로 강제 이주시킨 걸로 나오는 서徐 언왕偃王 계열의 동방족東方族 세력이다.


3) 이렇게 궁지에 몰린 시라계尸羅系 집단이 혼란에 빠져있던 시기에 같은 단군조선檀君朝鮮 계열로서 소서노召西奴 족단族團의 해상경영능력海上經營能力을 그대로 내려받아 한창 기세氣勢를 올려가고 있던 백제百濟가 손을 뻗쳤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며


그 결과가 내해內海의 도서島嶼 장악을 비롯한 중토中土와 한반도韓半島 연안沿岸을 잇는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라는 과업課業의 기반을 일차적으로 완성한 고이왕古爾王의 [서해대도西海大島 수렵기록狩獵記錄-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이렇게 포장을 들추면 금방 나타나는 지속적으로 이어진 역사적인 사실을 한적漢籍에서는 깡그리 무시하는 입장에서 돌연히 나타난 강남해민江南海民이나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왜곡歪曲시킨 남방의 월인越人 집단이나 그 밖의 원주原住 세력으로서 슬그머니 비틀어 묘사描寫하고 있다.


렇다면 과연 서족徐族을 중심으로 하여 백제百濟와 손을 잡은 중토中土 강남 연안 세력들은 그 후 어찌되었을까?   이와 관련된 이상한 기록이 시기에 맞게 등장하고 있다.



1) AD 260년 손권孫權의 뒤를 이은 <경제>가 서徐 언왕偃王의 묘廟가 있다는 구주衢州에서 무이산맥(武夷山脈-서족徐族들이 확장한 지역은 어김없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을 넘어 복건성福建省 동북부에 건안군建安郡을 설치하고 구주衢州에서 사로잡은 시라계尸羅系 세력들을 중심으로 원풍原豊에 전선교위典船校尉를 설치했다.


2) AD 269년 위魏를 빼앗은 진晋 무제武帝가 즉위(卽位-AD 265)하는 과정에서의 혼란을 틈타 빼앗긴 북방지역을 회복하여 신창군新昌郡을 설치한다(禽殺晋所置守將).   그야말로 막바지에 이른 각축전角逐戰이었다.


3) AD 274년 회계會稽의 <장안후>와 손잡은 시라계尸羅系 세력이 다시금 정국政局의 [해결사]로서 표면으로 부상浮上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연이은 사태를 보면 [회계會稽 지역의 반란 ➡ 오吳의 그 지방 관리官吏 대숙청 ➡ 이듬해부터 16년 동안 동이제국東夷諸國의 존재가 표면으로 등장하면서 진晋에게 협조 ➡ 오吳의 돌발적인 몰락沒落과 멸망]이라는 도식圖式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절강성浙江省 회계會稽의 <장안후>가 천자天子가 된다는 요언妖言이 퍼지고 린하이와 회계會系 태수太守가 글로 국정國政을 농단弄斷하여 뒤숭숭해지자) 7월에 사자使者 25명을 주군州郡으로 보내 반란자들을 처단했다.   遣使者25人分至州郡科出亡叛  <삼국지三國志 오지吳誌 봉황鳳凰 3년 조條>



아무튼 [진서晋書 권3 무제기武帝紀]를 보면 AD 276년-AD 291년 사이에 <귀화歸化*내부來附*조헌朝獻>으로 표현한 동이제국東夷諸國의 실체實體는 무려 190여국이나 되는데 어느 대목에도 누구라는 걸 밝히지 않고 뜬 구름 잡듯이 아리송하게 해 놓았다.    그렇게 해야만 할 만큼 꺼리는 게 무엇이었을까?



※ 특히 오吳의 멸망과 그 지역의 신속한 안정에 결정적으로 기여寄與한 동이東夷 78국國의 협력이 이루어진 AD 282년에 복건성福建省에 명목상의 진안군 신라현新羅縣이 설치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한족漢族 사서史書가 원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색칠해 놓은 기록에 덧붙인 [일제日帝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의 조선사朝鮮史 제1편 제3권]이 <조선朝鮮에 관한 中國史料-그들이 인식시키려 한 반도조선半島朝鮮을 말한다>로 못 박은 이래 『이들이 한반도韓半島의 마한馬韓 54국國과 진한辰韓 12국國이다-실제 한족漢族의 기록상으로는 190개국이다』라는 괴이한 해석의 표면을 벗기면


확연히 드러나는 강남江南 지역 동방세력의 여전한 자립성自立性 유지라는 정체성正體性의 발견이다(방문 회수만 해도 190회인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엔 단 5회 내외일 뿐이다).   그리고 그 실체實體야말로 바로 [시라계尸羅系 서족집단徐族集團]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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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입증立證하기 위한 관련 기록의 분석이 필요할 듯하다.   


❶ AD 276년 최초로 동이東夷 8국國이 진晋에 붙자 당황한 오吳가 이전에 서족徐族의 일부 세력을 강제로 이주移住시켜 억압하고 있던 임평호臨平湖 [1]를 서둘러 개방開放한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해답은 아래에 나온다.



임평호臨平湖는 초예옹새(草穢壅塞-초야草野에 거주하는 예족濊族이 막는 요새지要塞地)로 한漢 말末이래 이곳의 장로長老들이 이르되 호수를 열면 천하가 태평해지고 막으면 크게 소란해진다. 고들 말한다.   <삼국지三國志 오지吳誌 천새 원년元年 7월 조條  AD 276>



바로 이 때 진晋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양호羊祜가 올린 [오벌책吳伐策]의 핵심이 장화張華에 의해 무제武帝에게 진언陳言되어 대부분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되었는데 요지要旨는 대량大量의 곡물穀物을 어디엔 가로 전달해주는 방책方策이었다(진서晋書 장화전張華傳).    이후 오吳가 망한 AD 280년까지 동이東夷 35국國이 오吳에게서 등을 돌렸다.


❸ 오吳를 멸滅한 그 해에 진晋은 전격적으로 [호조제戶調制]를 실시하면서 유독 동이제국(東夷諸國-그들의 기록대로라면 이인夷人이다)에게만 특혜特惠를 주거나 해상활동海上活動 등을 묵인黙認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는 무엇을 말함일까?  


❹ 그리고는 어떤 납득할만한 설명도 없이 AD 282년 구주衢州의 신라해민新羅海民들을 복건성福建省 장정長汀에 이주移住시켜 신라현新羅縣을 설치했다는 기록만 보인다.   이 무렵 근원根源이 서족徐族이며 이를 숨기려는 한인漢人들에게는 월인越人 혹은 이인夷人으로 표현된 신라新羅 세력과의 잠정적으로 묵인黙認된 경계였거나 그 지역으로 물러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 항주沆州 동북방인 여항호(余杭湖-서徐와 상통相通하는 여余라는 이름으로 필자筆者의 추정을 증명해준다)로 양주楊州와 항주沆州를 잇는 강남운하江南運河 남단南端의 수로요충지水路要衝地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시사점示唆點은 삼국지三國志를 편찬編纂한 진수陳壽와 장화張華의 끈끈한 관계이다.   바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歪曲이라는 꼼수가 기록으로서 합법화되고 관련 부분에 대한 일방적인 해석으로서 통설화通說化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1) <장화張華>는 [박물지博物志]에서 강남의 끈질기고 확실한 동방 세력에 관한 존재를 말소抹消하려고 의도적으로 서徐 언왕偃王이 남천南遷이 아닌 북주北走했다는 왜곡歪曲의 실마리를 던졌다.


2) 멸망한 촉蜀의 관리로서 문체文體 때문에 장화張華에 의해 곤경(困境-아비의 상중喪中에 일어난 사건)에서 벗어난 <진수陳壽>는 삼국지三國志의 우리나라 삼한三韓의 기록을 수록收錄했는데 장화張華와 의논하였을 게 당연하다.


3) <장화張華>는 출세出世를 시기한 순욱荀勖의 견제로 고향인 범양(范陽-역현易縣) 근처 유주제군사(幽州諸군사-북경北京) 안북장군으로 나가 동북방을 관할하여 이쪽의 상황에 누구보다 밝았기 때문이다.


4) 이 과정에서 은혜를 잊지 않은 <진수陳壽>가 [서언왕徐偃王의 북주北走로 왜곡歪曲한] 장화張華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오吳의 몰락을 초래한 강남 동방제국東方諸國의 존재와 활동은 마땅히 오서吳書에 記載되었어야 함에도 통째로 빠져버리고 엉뚱한 이름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5)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장화張華와의 인연 때문에 내해內海 연안의 동방제국東方諸國 실체實體를 왜소화矮小化*형해화形骸化시키는데 손을 맞추어 지역개념으로 묶어 마치 다른 민족처럼 오해하게 만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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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의 해상교통로海上交通路 장악으로 말미암은 동해연안에서의 확고한 영향력 완성과 전성기全盛期는 아마도 <성왕聖王-위덕왕威德王> 시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무렵의 기록을 서로 맞추어 보면 조각난 퍼즐이 원형原型대로 복원復原되기 때문이다.



동진*송*제*양 때 강좌에 백제가 웅거하고 중원을 차지한 후 후위에도 사자를 보내 번으로 봉함을 받았다.  自晋宋齊梁據江左後魏宅中原竝遣使稱蕃兼受封拜   <주서周書 권49 백제전百濟傳>


그 본거지가 강의 좌우에 있다(장강長江 하류下流인 진강鎭江과 그 건너편인 양주攘州를 말한다).   <북사北史 권94 백제전百濟傳>


백제왕 여창餘昌을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임명했다.   <북제서北齊書 권8 무평본기 2년  AD 571년 정월조正月條>

 


1) 동청주東靑州는 산동성山東省 치소治所인 청주(靑州-임치臨淄)의 동쪽인 산동반도山東半島 지역이다.   북제北齊는 이 무렵을 전후前後하여 이미 이 지역의 여씨余氏와 서씨徐氏 세력이 백제百濟의 경영과 영향력아래 놓여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2) 이들은 결코 한반도韓半島에서 건너 간 새로운 집단이 아닌 하夏 이전以前부터 꾸준하게 이어 온 동방족東方族의 한 갈래이었다.   백제百濟는 이들을 이용하여 위로(魏虜-북위北魏)를 격패擊敗시켰으며 이를 잘 알고 있던 북제北齊는 마침내 회유책懷柔策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후 수당隋唐 시기에 백제百濟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衰退하는 가운데 이윽고 한강漢江 유역을 점령하고 당항진唐巷津을 차지해 서해西海 교통로 상上에 교두보橋頭堡를 마련한 신라新羅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이런 원인을 만든 계기가 있었다.



1) 수隋가 진陳을 멸滅하자 대대적인 해란海亂이 발생하는데(무주 왕문진*회계 고지혜*소주 심현희*낙안 채도인*장산 이릉*요주 오대화*영가 심효철*여항 야보영*교지 이춘 등이 스스로 대도독大都督을 칭稱했다) 중심지역이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이었다(수서隋書 권2 개황 10년 11월 조條  AD 590).   참으로 끈질긴 민족의 저력底力이었다.


2) 이 난亂은 개황 18년에 겨우 진정되어 이 때부터 억압이 시작되었는데 <오월인吳越人은 왕년往年의 폐습弊習대로 소재처所在處에서 사사로이 큰 배를 만들어 취결聚結하여 (우리를) 침해侵害하니 강남江南에서 3장(9m) 이상 선박을 가진 자들은 모조리 입관(入官-입대入隊)토록 조칙詔勅을 내리고...>라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3) AD 604년 1월부터 대고구려전對高句麗戰을 빌미로 철저하게 강남江南의 식량을 수탈收奪하고 선박船舶을 징발徵發했는데 AD 610년 돌연히 <유구인琉球人 1만 7000여명을 강남江南에 데려와 벼슬을 내리면서  頒賜百官 이후부터 유공자有功者는 봉작封爵을 내려 계승繼承토록 한다>는 칙령勅令이 발포發布된다.   불안不安의 온상溫床인 강남江南 서족徐族에 대한 압박정책壓迫政策이었다.


4) 결국 수양제隋煬帝는 끝내 불안의 온상溫床이었던 양주揚州에서 피살被殺되고 다시 고구려高句麗 전역戰役을 개시開始한 당태종唐太宗도 이런 골칫거리를 없애기 위해 이 당시 그에게 바짝 다가 온 신라新羅를 의식한 조치를 취한다.    신라新羅는 실로 오랜만에 강남江南의 살붙이들과 다시 연결되는 계기를 맞았다.



이렇게 서로 호흡이 맞자 당태종唐太宗은 고구려(高句麗-AD 642)와 백제(百濟-AD 644)에게 신라新羅의 입당入唐 루트(거의 대부분 강남江南 지역을 경유經由하였다)를 막지 말라고 당부하고 백제百濟와의 단절斷切이 어느 정도 성숙成熟한 기회를 노려 재빨리 백제百濟를 치고 있다.


백제百濟와 친밀親密한 왜倭의 견당사遣唐使 <진수연길상津守連吉祥>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억류抑留되었다가 백제百濟 멸망 다음해 5월에 풀려나 돌아간 사실이 주목되기 때문이다(목궁태언木宮泰彦  일화문화교류사日華文化交流史 1955  70P-71P).   앞으로 이 대목은 조금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아무튼 본격적으로 내해연안內海沿岸 지역에 관여關與한 이 시기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기회만 있으면 신라新羅가 왜 강남江南의 서족徐族에게만 그토록 관심을 보였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그동안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다음의 기록을 특히 주시注視해야만 한다.  



1) 전통적인 학설學說은 [신라왕통新羅王統 삼성교체론三姓交替論]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편王歷篇]에서는 제22대 지증왕智證王 조條에 <이상을 상고로 하고 이하는 중고로 한다.  已上爲上古已下爲中古> 그리고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조條에 <이상을 중고라 하여 성골이고 이하는 하고라 하여 진골이다.  已上中古聖骨已下下古眞骨>라 하여 전혀 다른 골품계보骨品系譜가 언급되고 있다.


2) 이에 따라 성골聖骨의 시조始祖 [1]가 되는 제23대 법흥왕(法興王-AD 514-AD 539)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이름은 원종이고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諱原宗智證王元子>라고 했으니 내물왕奈勿王의 후손後孫으로 김씨왕계金氏王系라야 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1]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을 보면 <성골聖骨은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한다.   그렇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성골聖骨이 되려면 반드시 일계一系의 혈통血統이 유지되는 골(骨-뼈대)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 이후의 신라新羅 왕통王統은 일반적으로 삼성교체三姓交替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끝의 임금까지를 진골이라 일렀다.   당唐 영호징의 <신라기>에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이라 한다>고 했다.  國人謂始祖赫居世至眞德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永(末)王 謂之眞骨 唐令狐澄『新羅記』曰 “其國 王族謂之第一骨 餘貴族第二骨”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진덕왕眞德王 조條 말미末尾>


책부원귀엔 성이 모요 이름이 태이다.  冊府元龜姓募名泰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법흥왕法興王 조條 각주脚注>


신라왕新羅王의 성姓은 모慕이고 이름은 진秦이다.   <양서梁書 권54 신라전新羅傳에서 신라新羅 사신使臣의 말>


법흥왕法興王은 모진慕秦이다.   <통전通典 권285 신라전新羅傳>



<이병도李丙燾> 씨氏는 이를 오해라고 했지만 어불성설語不成說임이 밝혀진다.   아무려면 제 나라 왕王의 성명姓名조차 모르거나 설사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법흥왕法興王은 분명하게 김씨金氏가 아닌 모씨慕氏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대목이 보인다.



신라인新羅人은 원래 백제인百濟人으로 스스로 바다로 도망가서 신라왕新羅王이 되고 그를 계승한 김진평(金眞平-증손자曾孫子인 진평왕眞平王이다)은 개황 14년(AD 594)에 사신使臣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수서隋書 권81 신라전新羅傳>



이상한 기록이지만 이 당시의 상황을 눈여겨보면 잊혀졌던 조각들이 잘 맞추어진다.   모씨慕氏인 법흥왕法興王 때 신라新羅에 정변政變이 일어난 것이다.    즉 신라계新羅系 서씨족단徐氏族團의 일원一員으로 그동안의 백제百濟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강남江南 모씨족牟氏族의 진출이었다.


모진慕秦의 세력집단은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모씨牟氏인 동성왕東城王이 살해(弑害-AD 500년) 당하자 갈 길을 잃은 잔여족단殘餘族團의 협조를 얻어 아마도 경남慶南 함안咸安 지역으로 진입進入하였던 듯하다.   다음의 기록이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원래 아시랑국阿尸良國 일명一名 아라가야로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이 멸滅한 땅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권32 함안군咸安郡 건치연혁조建置沿革條>



허나 이 시기엔 아직 신라新羅가 이곳에 진출하지 않았으며 모진慕秦이 여기에서 웅거雄據하고 있다가 근처의 임나任那 왜倭 [1]라고 불리던 집단과 합쳐 신라新羅로 진격한 것 같다.  


아래의 기록이 합리적으로 설명되면서 지증智證 마립간麻立干 이후 AD 158년부터 342년 동안 계속되던 왜인倭人이라 불리던 세력의 침공이 이때부터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1] 분명히 강남江南 모씨牟氏 세력과 관계가 있다.   옛날에도 이들이 신라新羅에 진입進入하는 과정에서 [석씨昔氏]로 바뀌어졌음은 임나인任那人으로 알려진 <강수强首>의 아비가 <석체昔體>임에서도 알 수 있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며 서울에 누런 안개가 사방으로 자욱하게 끼었다.  夏4月 暴風拔木龍見金城井 京都黃霧四塞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22년 4월 조條>


왕이 날이군에 갔다.   이 고을 사람 파로에게 딸이 있어 벽화라 하였는데...미행으로 그 집에 가서 상관하였다.   행차가 고타군을 지나다가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노파가 말하기를 무릇 용이 고기 옷을 입는다면 고기잡이꾼의 손아귀에 드는 것이다...


王幸捺已郡 郡人波路有女子名曰碧花...再三微行王其家幸之 路經古陀郡宿於老嫗之家...嫗對曰 夫龍爲魚服爲漁者所制...<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22년 9월 조條>


왕이 죽었다.  王薨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22년 11월 조條>



따라서 이후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이 날이군捺已郡의 벽화碧花라는 여인의 미색美色에 빠져 야행夜行을 일삼다가 홀연히 죽고 나서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이 64세의 나이로 자리에 올랐음은 아무래도 실권實權을 잡은 법흥왕法興王 세력에 의한 허수아비로 보인다. 


이 때에서야 신하臣下라고 불린 세력들의 갑작스런 주청奏請에 의해서(군신상언群臣上言*금군신일의今群臣一意) 제대로 된 국명國名도 없이 <사로斯盧나 사라斯羅>로 불리던 나라 이름을 [신라新羅]로 확정하고


처음으로 왕호王號를 사용하였으며 법흥왕法興王에 이르러 시호諡號 제도를 시작하는 등(諡號智證 新羅諡法始於此) 국가통치체제와 기구의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지는 상황도 예사롭지 않다.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한 시기는 이외에 단 한번 기림基臨 이사금泥斯今 10년 條 기록(AD 307  석탈해昔脫解의 후예後裔)이 나오는데 모두 모씨계慕氏系 집단이 도래渡來하여 왕통王統을 이은 때였다.   그런데 [진서晋書 권15 지리지地理志 건안군建安郡 태강太康 3년 조條(AD 282)]는 복건성福建省 진안군 8현縣 가운데 하나로 신라현新羅縣이 등장한다.


[절강통지浙江通志 산천조山川條  권9-권12]를 살펴보면 <주산군도舟山群島 건너편 상산현 新羅鼇山*천태현 新羅山*임해현 新羅嶼*溫州縣 新羅浮山*양평현 新羅山> 등이 즐비하다.   따라서 신라新羅는 서씨족단徐氏族團의 고을나라 이름이며 <AD 282 중토中土 강남지역-AD 307 기림基臨 이사금泥斯今-AD 502 지증智證 이사금泥斯今>으로 모씨족牟氏族의 이동 및 왕계王系 장악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권30 미정잡성조未定雜姓條]는 더욱 기막힌 사실을 전해주는데 <임나공任那公은 임나국주任那國主 牟留知王의 후예後裔이다>라고 선언宣言했기 때문이다.   법흥왕法興王 세력이 쉽게 임나인任那人들과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왜인倭人이라 불린 집단의 침범도 이 때부터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편王歷篇]의 제22대 지증왕智證王 조條에서 등장하는 <이상已上을 상고上古로 하고 이하已下는 중고中古로 한다.  已上爲上古已下爲中古>라는 왕계王系의 단절斷切을 은유隱喩하는 이상한 기록이나 이러한 뚜렷한 가름타기에 따라 법흥왕法興王이 성골聖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는 사실들이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이해된다.   정권교체政權交替가 일어난 것이다. 



1) 모진慕秦 즉 법흥왕法興王은 자신의 세력이 시라계尸羅系가 정주定住하고 있었던 강남江南에서 이동해 왔을 때 일시정착日時定着하면서 백제百濟의 모씨牟氏들과 왜倭라고 불린 집단들을 결집結集하여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한 함안咸安 아시촌阿尸村을 소경小京으로 삼는다(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5년 置小京於阿尸村).


2) 모씨慕氏 왕통王統을 확립한 법흥왕法興王 3년 처음으로 친히 성소聖所인 나을신궁奈乙神宮에 제사祭祀를 지낼 때 다시금 용龍이 우물에서 나왔다(親祀神宮 龍見楊山井中).   용龍은 해상세력海上勢力의 성수聖獸이다.   그래서 같은 혈통血統이었던 진흥왕眞興王 14년에도 새 궁宮을 짓는데 누런 용龍이 나타나 그곳에 황룡사黃龍寺를 짓는다.


3) 법흥왕法興王은 즉위卽位한 뒤 기존의 저력底力과 경험을 토대로 한 병부兵部 설치  始置兵部*율령律令 반포頒布  頒示律令*공복제정公服制定으로 신분身分과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위계질서位階秩序 확립  始制百官公服朱紫之秩


   *영토확장과 사벌주沙伐州 군주軍主 설치  以大阿湌伊登爲沙伐州軍主*모든 관원官員의 으뜸이며 가장 측근側近으로 임명한 상대등上大等 신설(新設-나중에 왕통王統이 달라진 문무왕文武王이 전례前例를 무시하고 처음엔 임명하지 않은 이유와 연결된다)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란 연호年號를 사용하는 등(始稱年號 云建元元年) 강력한 군사강국軍事强國으로 도약跳躍하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카인 진흥왕眞興王 시기에 그동안의 허약한 국세國勢에서 갑자기 강맹强猛한 군사국가로 변신變身한 배경이 이해된다.



※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상대등上大等은 왕王의 총신寵臣이며 측근側近이 앉는 종신직終身職인데 그런 이유 때문에 통상적通常的으로 왕王이 바뀌면 인물이 바뀐다.   법흥왕法興王은 과거의 서불한舒弗邯을 없애고 처음으로 이 관직官職을 설치했다(拜伊湌哲夫爲上大等摠知國事 上大等官始於此如今之宰相).


  이후 진흥왕眞興王은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 체제를 유지 - 진지왕眞智王 원년元年의 이찬伊湌 居柒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 진평왕眞平王 원년元年 때 이찬伊湌 노리부弩里夫를 -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원년元年부터 대신大臣 을제乙祭가 보필輔弼하다가


  5년 무렵 이찬伊湌 수품水品이 - 진덕여왕眞德女王 원년元年 이찬伊湌 알천閼川이 - 무열왕武烈王 2년 이찬伊湌 금강金剛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는다(이 당시 김유신金庾信은 원로元老인 대각찬大角湌이었다).


  무열왕武烈王 7년 금강金剛이 죽자 이찬伊湌 김유신金庾信이 잇는다. - 이후 문무왕文武王은 2년에 별안간 이찬伊湌 문훈文訓을 중시中侍로 삼아 국정國政의 무게중심에 올려놓는데 어찌된 일인지 상대등上大等은 기록에서 사라지다가 20년에 이르러 비로소 김군관金軍官이 임명된다. - 그리고 신문왕神文王 원년元年에 서불한舒弗邯 진복眞福이 - 효소왕孝昭王 3년에 문영文潁이 임명되어 다시 정상 궤도軌道를 찾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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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학자學者들은 무열왕武烈王 7년에 상대등上大等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문무왕文武王 13년까지(AD 673년 7월 1일에 죽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국정國政을 총괄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15년간 그 자리에 있으면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터인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문무왕文武王은 즉위하자 곧바로 국정운영을 중시中侍에게 맡기고 있으며 유신庾信이 죽은 후 7년간의 공백空白 뒤에 비로소 상대등上大等을 임명한다.   또한 [김유신전金庾信傳]은 <향년 79세로 죽었다> 하여 1년 뒤(AD 674)로 늘려 잡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묘한 기록들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1) 유신庾信이 석문전石門戰에서 참패慘敗하여 몰래 숨어서 경주慶州로 왔는데(大將軍等微行入京) 문무왕文武王은 <❶ 신라군新羅軍의 패배가 이러하니 어쩔 것인가?>라 물었다.   그러자 유신庾信은 <❷...다만 내 아들 원술元述은 왕명王命을 욕보이고 가훈家訓을 어겼으니 목을 쳐야 합니다>라 답하고 왕王은 다시 <❸ 그는 다만 비장裨將이어서 중한 벌을 내리는 건 불가不可하다>하고 한마디로 일축一蹴한다.



아주 묘한 문답問答인데 매우 신중하게 해석해야만 할 구절句節이다.   이 무렵부터 이미 왕王과의 틈이 벌어져 있음이 감지感知되기 때문이다.   하기야 아비와 친했던 인물이 권력을 쥐고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즉 위의 대화는 이렇게 풀어야 한다.


왕은 <❶ 석문전石門戰의 참패慘敗를 은근히 질책하고 있으며> 그러자 78살의 노회老獪한 유신庾信은 <❷ 패배의 모든 책임은 원술元述이 져야 한다>라는 책임회피성 발언發言을 하고 이에 성질이 난 왕王이 다시 <❸ 그는 다만 비장裨將일 뿐이다>라며 쏘아붙인다.  


얼핏 보면 관용寬容같지만 [패전敗戰의 책임자는 비장裨將인 원술元述이 아니라 전장戰場을 지휘한 당신이잖소?]라는 불쾌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포용包容하는 척하며 직격탄直擊彈을 날려 등 뒤에 비수를 꽂은 다음 왕王 14년(AD 674)에 돌연히 이상한 기록이 등장한다,



2) <정월正月에 별이 황룡사黃龍寺와 재성(在城-월성月城) 사이에 떨어졌다>*<왕王은 관원官員에게 기양(祈禳-특정인을 악귀惡鬼로 보아 죽도록 푸닥거리를 하는 것이다)하라고 명命하였다>는 기록이 연이어 나타난다.


3) 바로 그 해 6월 중순 어스름한 밤에 별안간 <군복차림의 무장군인武裝軍人 수십 명이 유신庾信의 집에서 나와 울며가는 것이 보였는데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김유신전金庾信傳>란 괴이한 일이 벌어진다.  


  그야말로 달밤의 기습奇襲이었다.   이 때 피격被擊된 그는 스스로 <나는 곧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뒤 10여 일만에 죽는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이 사실을 감추려고 [김유신전金庾信傳]의 기록을 묵살黙殺하면서 1년을 앞당겼다.


4) 문무왕文武王은 매우 후厚하게 장례葬禮를 치루어 주었으나 이상하게도 미망인(未亡人-유신庾信의 누이)은 탁발여승으로 몸을 숨기고 자신과 친척에게 내린 하사(매년 1000석)를 모조리 절에 시주한다.


5) 그리고 나서 문무왕文武王이 공교롭게도 김유신金庾信이 살해殺害된 그 날에 딱 맞추어 갑자기 죽는다.   김유신金庾信 계열인 김해金海 김씨金氏 일파一派들에 의해 피살被殺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그 해 5월(유성이 삼성좌의 큰 별을 범하다.  流星犯參大星) - 6월(천구가 서남방에 떨어졌다.  天狗落坤方)에 기묘한 현상이 겹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5) 결국 문무왕文武王의 뒤를 이은 신문왕神文王 원년(元年-AD 681) 8월 8일에 갑자기 김유신의 남은 일족(一族-김흠돌金欽突 등)들도 반란叛亂의 명목으로 거의 다 죽임을 당한다.  


이런 정황을 감안했을 때 왜 신문왕神文王 시기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등장했는지? 어째서 대나무가 낮에는 둘로 갈라지고 밤엔 하나로 합쳐지는지?  기묘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풀려진다.   하여튼 갈등葛藤의 중심에 서 있던 김유신金庾信이 지니고 있던 상대등上大等이란 관위官位는 문무왕文武王에 이르러서는 명목名目뿐인 지위地位로 전락顚落했음이 뚜렷하다.



...용이 답하기를 <한손으로는 쳐도 소리가 없으나 두 손으로 하면 소리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천하가 태평할 것입니다.   지금 선대 임금께서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시고 유신도 다시 천신이 되어 두 분 성인의 마음이 합하매 이같이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나를 시켜 바치는 것입니다>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 今王考爲海中大龍 庾信復爲天神 二聖同心 出此無價大寶 令我獻之”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만파식적萬波息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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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무렵 최초로 강남江南의 시라계尸羅系 세력들과 연결을 시도하는데 왕王 8년(AD 521)에 사신使臣을 구태여 남조南朝인 양梁에 보낸 일이다(遣使於梁貢方物).   이 교통로交通路를 빌어 원주지原住地에 남아 있던 집단들과 기쁜 마음으로 만났을 것이다.


5) 왕통王統을 수호守護하려는 속셈에서 나온 조치로 자신부터 성골聖骨이라 함으로서 위 대代와는 엄격히 분리하였으며 이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진흥왕眞興王이 거칠부居柒夫에게 국사國史를 편찬編纂시킨다.   아마도 <김씨金氏>라는 왕성王姓은 이 과정에서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혈통血統은 역사적으로 진평왕眞平王 무렵 [성골남진聖骨男盡] 했음에도 억지로 같은 핏줄인 선덕善德과 진덕眞德을 여왕女王으로 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발버둥치다가 결국 [성골여진聖骨女盡]하여 끊어지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진골眞骨에게 물려준 걸로 보아 더욱 분명하다.    왜 갑자기 성골聖骨이 등장했는지?   그토록 오래된 수수께끼가 풀리는 대목이다.


5) 법흥왕法興王 당시 양梁에 간 사신使臣이 한 말을 적은 기록에 <그 나라 습속習俗으로 도성都城을 건모라建牟羅라 하고...>라는 구절이 있다.   [모라牟羅]는 강남江南 서씨족徐氏族들이 마을을 일컫는 이름이다.


6) 신문왕神文王 시대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설화說話가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無關하지 않다.   모씨慕氏 왕통王統이 끊어진 뒤 진골眞骨의 시초로 자리를 이은 무열왕武烈王이 태종太宗이라는 의미심장한 칭호稱號를 받은 이래 이 무렵에서야 왕계王系의 안정을 되찾은 듯 한 뉘앙스를 짙게 풍기기 때문이다.


   그가 자리를 굳건히 한 다음 서둘러 한 일이 선대先代를 섬기는 오묘제五廟制를 개혁한 것이다.   즉 ❶ 김씨金氏 시조始祖인 태조대왕太祖大王 김미추金味鄒 ❷ 제25대 진지대왕眞智大王 ❸ 진지眞智의 아들로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존追尊한 김용춘金龍春 ❹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 김춘추金春秋 ❺ 제30대 문무대왕文武大王 김법민金法敏이었다.


   한마디로 모씨계慕氏系 묘제廟制를 일소一掃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돌연히 만파식적(萬波息笛-거친 물결을 잠재우는 대나무 피리)이 등장하고 있다.   헌데 묘하게 모두가 바다와 연관이 있으며 이를 바친 주체主體도 용龍이고


   피리를 불면 모든 위험(걱정거리)들이 사라진다(용龍이 임금만이 차는 옥玉 띠를 바쳤다는 이야기는 왕권王權의 교체交替가 완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용龍은 해상세력海上勢力의 신수神獸라는 점은 이미 밝혔다.



   그런데 신문왕神文王이 용龍을 아래로 두고 마음대로 부리고 있다(용龍이 나타나 자신의 것을 진상進上한다*옥玉 띠의 장식으로 붙잡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문무왕文武王이 <죽어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겠다>고 말한 부분도 해상세력海上勢力 결집結集의 모범이었던 모씨계(慕氏系-모씨慕氏+모씨牟氏+경주慶州 석씨昔氏)를 경계한 것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



바다 일을 보는 파진찬 박숙청이 <동해 가운데 한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해 떠와서 파도에 밀려 왔다 갔다 한다> 하니 이상히 여겨...이견대로 가서 산을 굽어보고 사람을 모내 알아보게 하였다.   산은 거북 머리 같은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어 낮에는 둘로 갈라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다른 말로는 산도 역시 그랬다고 한다).  


왕이 감은사에 와 묵으며 이튿날 오시에 하나로 합쳐지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7일 동안 캄캄하다가 그 달 16일이 되어 바람이 잔잔해지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배를 타고 들어가자 용이 검정 옥띠를 바치니 함께 앉아서 묻기를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고 맞붙는 까닭이 무엇인가?>


용이 <비유하자면 한손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뼉을 쳐야 나는 것과 같습니다.   대도 합한 연후에 소리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으시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칙사가 대를 꺾어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이 갑자기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태자인 리공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치하하면서 천천히 살펴본 뒤 <옥띠에 달린 여러개의 장식은 모두가 진짜 용들입니다>   왕이 <네가 어떻게 그걸 아는가?> 묻자 <장식 하나를 따서 물에 잠가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왼편 둘째 옥 장식을 따서 개울에 넣으니 즉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곳에는 연못이 생겨나 때문에 용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海*關官波珍湌朴夙淸奏曰 “東海中有小山 浮來向感恩寺 隨波往來” 王異之...以其月七日 駕幸利見臺 望其山 遣使審之 山勢如龜頭 上有一竿竹 畫爲二 夜合一[一云 山亦畫夜開合如竹] 使來奏之 王御感恩寺宿 明日午時 竹合爲一 天地震動 風雨晦暗七日 至其月十六日 風霽波平


王泛海入其山 有龍奉黑玉帶來獻 迎接共坐 問曰 “此山與竹 或判或合如何?”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 今王考爲海中大龍 庾信復爲天神 二聖同心 出此無價大寶 令我獻之”


王驚喜 以五色錦彩金玉酬賽之 勅使斫竹出海時 山與龍忽隱不現 王宿感恩寺 十七日 到祗林寺西溪邊 留駕畫饍 太子理恭[卽孝昭大王] 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窠 皆眞龍也” 王曰 “汝何*<以>知之?” 太子曰 “摘一窠沈水示之” 乃摘左邊第二窠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   <삼국유사三國遺事 권卷2 기이紀異2 만파식적萬波息笛>



7) 진평왕眞平王에 이르기까지 줄곧 남조(南朝-양梁*진陳)과 주로 교류交流를 하였으며 5년에 처음으로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여 전문적인 해상선단海上船團을 양성養成한다(이는 해양세력海洋勢力답게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6년에 바로 시행한 선박船舶의 적극적인 이용利用에 관한 특별한 조치가 시초이다.  又制舟楫之利).  


이어 9년에는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이 신라新羅를 좁다고 하면서 바다 길을 빌어 해외海外로 떠났는데 두 사람이 뜻을 두고 염원念願한 지방이 이상스럽게도 [오吳와 월越 지역]이었다.



<대세와 구칠>이 해외로 떠났다.   대세는 내물왕의 7세손으로 이찬 동대의 아들이다.   자질이 뛰어나고 젊어서 이역에 뜻을 두고 담수란 중과 사귀면서 말하기를 <신라와 같은 산골 속에 파묻혀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못물 속의 고기가 바다가 큰은 줄 모르고 조롱 속의 새가 산림이 넓은 걸 모르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서 오나라나 월나라로 가서 스승을 찾아 명산에서 도를 구해 신선의 도를 배운다면...이야말로 천하에 장관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가 듣지 않자 동무를 찾는데 마침 <구칠>을 사귀어 남산의 절에 있을 때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고인 물에 낙엽이 떠 있었다.


대세가 <그대와 더불어 서역을 유람할 뜻이 있으니 잎사귀 하나씩을 배로 삼아 여기에 띄워 어느 게 먼저 가는지? 보자>   대세의 것이 앞서자 웃으며 <나는 갈 것이다> 하니 구칠이 성을 내면서 <나도 사내자식이다.   어찌 나만 못 갈 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그의 뜻을 알고 가만히 속내를 비추니 <이것이 바로 내 소원이다> 하면서 서로 동무가 되어 남해로부터 배를 타고 떠났는데 그 후 그들이 간 곳을 모른다.


大世*仇柒二人適海 大世奈勿王七世孫 伊湌冬臺之子也  資俊逸 少有方外志 與交遊僧淡水 曰 “在此新羅山谷之間 以終一生 則何異池魚籠鳥 不知滄海之浩大 山林之寬閑乎! 吾將乘桴泛海 以至吳*越 侵尋追師 訪道於名山 若凡骨可換 柛仙(神仙)可學 則飄然乘風於泬寥之表 此天下之奇遊壯觀也


子能從我乎? 淡水不肯 大世退而求友 適遇仇柒者 耿介有奇節 遂與之遊南山之寺 忽風雨落葉 泛於庭潦 大世與仇柒言曰 “吾有與君西遊之志 今各取一葉 爲之舟 以觀其行之先後” 俄而大世之葉在前


大世笑曰 “吾其行乎!” 仇柒然曰 “子{予}1)亦男兒也 豈獨不能乎!” 大世知其可與 密言其志 仇柒曰 “此吾願也” 遂相與爲友 自南海乘舟而去 後不知其所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평왕眞平王 9年 7월 조條>



모두가 얼핏 보면 좀 생뚱맞고 이해가 안가는 대목들이지만 비정상적인 왕통교체王統交替라고 본다면 의외로 반듯하게 풀리는 기록들이다.   이들 족단族團이 <모씨慕氏>임은 [화랑세기花郞世紀 모랑전毛郞傳]에서 법흥왕法興王이 백제공주百濟公主와 사통私通하여 낳은 자식의 이름을 <남모南毛와 모랑毛郞>이라 하였음에서도 능히 입증立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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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민족東方民族의 해상제어능력海上制御能力은 결코 우연발생적偶然發生的이 아니다.   살아온 환경을 슬기롭게 극복한 모범적인 사례事例의 연장延長일 뿐이다.   즉 민족 성장의 기반인 만주滿洲와 요동遼東 지역을 관통貫通하는 많은 대하(大河-흑룡강黑龍江*송화강松花江*압록강鴨綠江*요하遼河*대릉하大凌河*난하灤河 등)들은 일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내륙산간지대內陸山間地帶와 평야平野와 해안지역을 깊숙한 곳까지 하나로 연결시키면서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수상교통水上交通의 이점利點이 최대한 발휘되는 여건與件을 갖추고 있다.


2) 모든 강江들이 샛강들과 실타래처럼 얽혀 다양한 지역들을 서로 이어준다.   이와 관련하여 일찍부터 등장하는 <하백河伯>의 존재는 주목을 요한다.


3) 중류中流 아래로 수심水心이 깊어지고 수로水路가 길며 하류下流에는 많은 하상도서河上島嶼로 이루어진 만灣이 발달되어 있다.   따라서 통항거리(通航距離-압록강鴨綠江 750km*송화강松花江 1890km*흑룡강黑龍江 1892km*눈강嫩江 707km)가 길고 큰 규모의 선박船舶이 드나들거나 많은 배가 동시에 운항運航할 수 있는 중요한 내륙운송로內陸運送路로 기능한다.


4) 하구河口는 대체로 나팔과 같이 생겨 바다를 향해 벌려져 있어 해안선이 아주 복잡한 리아스식으로 연안沿岸에 크고 작은 만灣과 섬들이 줄을 이어있다(요동반도遼東半島와 산동반도山東半島는 대장산군도大長山群島-묘도군도로 이어진 징검다리 지역이다).


5) 연안항해沿岸航海의 길목인 서해西海 북쪽의 서한만西韓灣과 발해만渤海灣 그리고 요동반도遼東半島는 만주滿洲와 요동遼東 북쪽에서 흘러드는 여러 강江들의 하구河口가 집중되어 있어 내륙수로內陸水路와 바다 길을 가장 완전하게 이어주는 요충要衝이다.



따라서 일찍부터 그 강江들을 연결하는 샛강들을 이용한 보다 빠른 운송수단과 운항기법運航技法의 발전과 수상활동능력水上活動能力의 발달을 기초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사실은 그 후에 동방족東方族들이 남진南進해 주로 정착분포定着分布한 지역들을 살펴볼 경우 전반적으로 지형조건地形條件들이 매우 닮아 있다는 걸 보아도 금방 이해가 가능하다.



1) 발해만渤海灣 지역으로 흘러들어가는 구강(九江-대양하大洋河*벽류하碧流河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지대地帶에서의 정착지定着地 개척


2) 북중국北中國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지역들을 얽혀서 흐르는 많은 강줄기로 형성된 지방에서의 정주지定住地 개발


3) 황하黃河와 산동반도山東半島 그리고 장강長江에 이르는 이름난 수향지역(水鄕地域-회사지역淮泗地域)을 중심으로 확산擴散된 동방족東方族의 터전


4) 장강長江 남쪽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을 비롯한 강남江南 지방의 물줄기를 기반으로 꽃피운 강남해민江南海民들의 존재



이 같은 사실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이어간 고구려高句麗의 기록에서도 등장하는데 한족漢族의 기록에서도 [대수맥大水貊과 소수맥小水貊-又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國因名之爲小水貊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魏書 권30 동이전東夷傳 고구려高句麗]이라는 세력집단의 중추적中樞的 활동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스란히 백제百濟와 신라新羅 등의 활동과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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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한족漢族들이 중토中土 동방지역을 점유占有한 예족濊族에 대하여 각별하게 <물과 연관시켜 기록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실이나 백제百濟조차 반도半島에 진입進入하는 과정을 보면 처음부터 수계(水系-북한강北漢江과 남한강南漢江 수계水系*금강錦江 수계水系*섬진강 수계水系 등)를 중심으로 거점據點을 확보해갔던 역사적인 상황으로 보아서도 충분한 입증立證이 된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공백空白으로 남아있었던 이유는 단지 상고上古 이후 전全 시대에 걸쳐 연안沿岸 세력집단의 모범으로 등장하고 있던 강남江南 동방민족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거나 전혀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시라尸羅 세력의 존재 방식과 백제百濟의 담로제檐魯制 운영은 내해內海를 중심으로 양兩 영안沿岸에 펼쳐진 영역領域을 슬기롭게 다스리려면 마땅히 그랬어야만 하는 최선의 방편方便이었던


해상통치海上統治의 봉건군국제封建郡國制임을 보여주는 본보기임에도 이를 놓친 학자學者들의 태도에도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우리가 밝혀내야 할 과제課題이다.




4. 결론結論을 겸하여



우리는 이쯤에서 한 가지 매우...매우 중요한 사실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즉 북방초원北方草原을 주름잡던 [기마유목사회구성집단騎馬遊牧社會構成集團]에게 초원草原에서의 기마騎馬이었다면 바다에서의 [말]은 <배>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이 정착定着하여 발전한 거주지居住地의 이름은 특성에 따라 두 가지로 뚜렷하게 남겨진 화석化石이 되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바다의 말인 배를 활용한 해상세력海上勢力 [1]의 [말 ➡ 마을]과 육지陸地를 내달린 기마집단騎馬集團 [2]의 [골 ➡ 고을]이다.


[1] 우리말 [물]의 원형原形인 <무르*미르*물*밀>에서 나온 파생어派生語로서 [앞에 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냇물을 곁에 두는 물가의 거주지>란 뜻인 [무라*모라*모루*미루*마라]가 <물*(아래 ㅏ)*몰>의 형태로서 전화轉化한 것이다.   그래서 이웃 마을로 놀러가는 걸 지금도 <마실 간다>라고 하는 사투리가 쓰인다.


[2] 육상陸上의 거주지 또한 대부분 앞에 넓은 들을 바라보며 산골짜기를 뒤로 두는 <산골의 마을>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뜻인 [고루*구루]가 <골*굴>이라는 모습으로 전화轉化한 것이다.  


   여기에서 [골+짝+지칭어指稱語인 이 ➡ 골짜기]란 말도 생겨났는데 현실적으로 산줄기나 비탈면이 하나라면 골이 생길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도 주름잡힌 가운데 움푹한 곳을 골(골판지*골이 패이다 등)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열국列國의 건국설화建國說話에는 유난하게 해상세력(海上勢力-백제百濟*가라加羅*석탈해石脫解)과 기마집단(騎馬集團-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백제百濟 등)이 서로 복합되어 잘 조화調和를 이루고 있다.


특히 기마습속騎馬習俗이 몸에 배인 민족은 바다의 <말>인 [배]에서 뭍으로 올라서면 곧바로 육지陸地에서의 기마騎馬로 전환轉換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내해內海의 역사지도歷史地圖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물가 마을]이라는 의미인 [모라계] 지명地名이 대부분 양兩 연안沿岸에 밀집密集되어 있음을 새삼 발견한다.



[모라계 지명]은 [물]과 관련된 <미*마*밀*물*모라*모루*모리*모로> 등과 한자 차음된 [물勿*수水*모牟*밀密*미彌] 등이다.   [미]는 미역*미루나무*미나리*미꾸라지*미더덕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마]는 장마*논의 큰 웅덩이에서 자라는 마름*마르다 등에서 흔적이 나타난다.



1) 중토中土 산동반도山東半島 아래 지역에 지금도 살아있는 변卞과 평양平壤의 옛 이름인 변나경弁那京(오늘의 서경西京은 변나경弁那京이어서 변한弁韓이라 했다. 한다 - 고려사高麗史 서설序說에 인용된 주관육익周官六翼)의 친연성親緣性


2) 산동반도山東半島 남쪽인 랑야대瑯耶台를 중심으로 한 남부와 성양제현城陽諸縣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모라계 지명들과(모루牟婁*무루無婁 등 -김상기金庠基  동방사논총東方史論叢  1974  379P) 경주慶州의 옛 이름 건모라(建牟羅-큰 마을) 그리고 일본日本의 무라(촌村 즉 마을)의 상호연관성相互聯關性


3) 이와 관련하여 산동반도山東半島 랑야대瑯耶台 동북방 등주登州 막야도莫耶島는 주목을 요한다.    내해內海에서 반도半島와 중토中土를 이어주는 교통섬의 하나로서 [맥계貊系 언어]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단군조선계檀君朝鮮系 어군語群들이 상호相互 친밀성親密性을 유지하면서 밀접하게 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4) 이 지역들에 아직도 남아있는 모씨牟氏*모씨毛氏*몽씨蒙氏(이곳에는 모씨 족이 많이 살아 모야도慕耶島라고도 불렀다-등주부지登州府志 권3과 소야승년小野勝年  입당구법순례행기の연구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2  1964  64P)와 동방민족의 역사적 인명人名과 지명地名에 자주 등장하는 모牟*모冒*모慕*모謨*모毛라는 단어의 공유共有



아무튼 [모라계 지명地名]은 내해內海의 양兩 연안을 주요 영역으로 삼아 분포하는데 반도半島에서는  대동강大同江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黃海道와 한강漢江을 수계水系로 한 경기도京畿道 지방 그리고 서남 해안지역에서 주로 등장하다가 남해안을 빙 돌아 경주慶州 지방에서 다시 나타난다.



5) [보타현지普陀縣志 권8 부록附錄]에 <도두道頭는 오늘날 부두를 말하는 이 지방의 방언方言이다...>라 했는데 한반도韓半島의 제주도 도두동渡頭洞과 김해金海 도두포渡頭浦가 서로 맞닿는다.   그리고 이 양쪽 내해內海 연안지역들에서 쓰는 방언方言 가운데 [도]는 진한인辰韓人들까지 똑같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실마리이다.


   [자네 그래?*너 왔어*우리 간다]처럼 <~도>라는 접속어接續語를 동일하게 쓴다는 이야기이니 [중토中土의 연안沿岸-내해內海의 교통로 상上에 위치한 섬들-한반도韓半島 연안沿岸]을 경영한 세력들의 언어言語와 풍습風習조차 일치一致한다는 분명한 입증立證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부를 때는 모두 <도>라고 한다.  相呼皆爲徒   <삼국지三國志 진한전辰韓傳> 


그곳에 선주先住하던 아도간(我刀干-나도 간)*여도간(汝刀干-너도 간)*피도간(彼刀干-저도 간)*오도간(吾刀干-당신도 간) 등 9간干이 수로首露를 왕王으로 추대推戴했다.   <가락국기駕洛國記>



이상과 같이 긴 이야기를 전개展開했지만 결론은 아주 짧고 분명하다.   결국 두 연안沿岸의 세력집단(중토中土 동부 해안의 백제계百濟系와 신라계新羅系 집단 ⇔ 한반도의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동일 실체實體를 가진...그리고 내해內海를 토양土壤으로 하여 연안沿岸을 압도壓倒하면서 자란 한 나무에서 갈라진 두 개의 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