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사학의 얄량한 떡밥

대수맥 2012. 8. 13. 22:39

 

 

 

 

[첨부자료] 삼국대륙설의 출발점...반론.hwp

[앵무새 죽이기] 삼국대륙설의 출발점...반론

 

 

[앵무새 원문原文]

 

1990년 한배달 가을호에 보면 자칭 역사연구가 오재성의 [장보고는 반도인이 아니다]는 글이 실려있다.

 

이 글에서 오재성은 "우리 민족은 두 신라가 있었는데 이를 하나로 보려고 하니 역사의 바른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신라는 중국 동부 대륙에 있는 서신라, 그리고 반도에 있는 동신라가 있다고 주장한다. 동신라는 본래 고구려 영토였는데 독립해서 신라가 되었다는 알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서신라가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중국 사서에 적혀 있다고 말한다. 중국 사서에 분명히 적혀 있다면 왜 오재성만 그것을 읽은 것일까? 이병도가 못 읽은 것은 그렇다 치고, 신채호나 최남선, 정인보도 못 읽었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을 알고나면 오직 오재성만 그것을 읽은 이유를 알게 된다. 자, 일단 뭘 가지고 그러는지 읽어나 보자.

 

한문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이쯤에서 입속에 든 밥알을 쏟아냈을 것이다. (이 표현은 재야사가 임승국이 즐겨쓰던 것인데, 나도 한번 써봤다.) 찬찬히 보자. 위의 두 개는 신경쓸 필요도 없다. 그 두 개와 연결된다는 맨 마지막 사료만 보자.

 

新羅國弁韓之苗裔也.

 

이 글을 오재성은 [신라는 변한을 이었으며 묘의 후예들이 세웠다]라고 독해했다. 우선 빨갛게 표시한 부분의 한자가 저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매우 간단해서 그냥 이렇게 읽으면 된다.

 

신라국은 변한의 묘예이다.

新羅國 弁韓 苗裔

 

이 묘예苗裔를 오재성은 [묘족의 후예]라고 해석했는데, 묘예苗裔는 그냥 후손, 후예라는 뜻이다. 즉 위 문장은,

 

신라국은 변한의 후예이다.

 

라는 말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국어사전에도 나온다. [먼 후대의 자손]이라고. 네이버의 중국어 사전에서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러니, 당대 조선의 천재들 중 아무도 못 읽은 사료를 혼자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고도 의기양양해서 [한족의 동이 기록에서 구리의 후예들이 강회 지역에 신라를 세웠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예고]

 

인터넷 상에 끊임없이 돌아다니던 떡밥 중 하나인 [스웨덴 고고학자 부부] 운운의 내용이 어디에서 처음 출발한 것인지 알아낸 것 같다. 다음 주 중에 확인하고 그 떡밥의 실체를 알려주도록 하겠다.

 

 

[앵무새들의 합창]

 

<파파울프> 결국 엉터리 하나가 지 맘대로 해석한 내용이 자자손손 거짓과 기만을 만들어 가는 것이군요. 저도 얼른 제가 쓴 글들을 되돌아 봐야 겠습니다. 잘 못 쓴것들이 어디가서 어떤 악영향을 만들고 있을지 모르니...

<악질식민빠> 우왕ㅋ굳ㅋ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7/02/2006070270253.html

 

언제나 빠지지 않는 덕선생님 (...)

<초록불> 파파울프님 / 파파울프님 글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오재성의 경우는 박창범 교수의 섣부른 천문학 연구를 만나지만 않았으면 그냥 사그라들었을 겁니다. 악질식민빠님 / 아주 징글징글합니다.

<우아한냉혹> 사대주의자들이나 국수주의자들이나 극과극이지만 하나는 통하네요 한반도를 무지하게 싫어한다는점 =ㅅ=; 중국대륙이 그리 좋은가.......

<Shaw> 저 얘기가 90년에 나왔었단 말입니까. 털썩.

<OK牧場> 대륙삼국이 사실이라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왜 불평하는 것인지-_-

<초록불> haw님 / 스웨덴 고고학자 떡밥은 현재 확인된 바로는 1986년에 뿌려진 것이더군요. 중앙도서관에 신청해 놓았으니 복사본 오는대로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을파소> 환○ 앞에서는 오타도 못 내겠군요. 오타도 근거로 삼을테니까요.

<야스페르츠> 오오!!! 어느 독일인 학자 '하우스돌프'에 이어서 또 하나의 떡밥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입니까!!! 완전 기대!!!

<한단인> 음..생각보다 그 기원이 대단히 짧군요. 90년대라..

<초록불> 한단인님 / 90년에 처음 등장한 썰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 오독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출발점이라는 이야기지요.

<브람스> 어제 KBS 일요스페샬에서 작년 태안앞바다에서 해저발굴한 12세기 고려청자에 대한 방송을 하더군요. 강진에서 청자를 구워 개경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배가 침몰하여 엄청난 청자들이 바다속에서 900년을 잠자고 있었던게지요. 그에 관련된 목간들도 함께 발견됐고...

 

'이것은 분명 일제와 식민사관에 물든 사람들이 고도로 치밀하게 꾸며놓은 것'이라고 자위하는 ○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네비아찌> 브람스님//환○들은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기보다는, "강진은 반도에 있고 개경은 대륙에 있었으니까 강진에서 배를 타고 개경으로 가려고 한거다."라고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ladyhawke> 다행이 역사학적 지식이 불필요한 부분이라 저도 원문 읽는 중에 발견할 수 묘예가 왜 묘족의 후예지? 하고 갸웃 하면서 쭉 읽어보니 역시 그 부분이 문제였군요. 사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죠.

<나루나루> 묘족의 후예 건은 DC 역갤에서도 한때 유행했지요. 묘족의 후예 덕분에 '환○들은 한문을 못 이해한다' 라는 것이 자리잡게 되었다나...orz

<정성일> 이병도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매우 잘 알지만 대부분은 싫어하는 역사학자입니다. 이병도는 신라의 역사중 내물이사금 이전을, 백제는 고이왕 이전을, 고구려는 태조왕 이전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마치 남당유고를 검토라도 한 듯 정확히 들어맞고 있습니다.

 

본인 또한 이병도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병도가 식견이 높은 것인지, 남당 유고류를 살펴본적이 있는지 쪽집게처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삼국사기의 기년이 잘못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었는데...

아래글은 남당 박창화 선생의 유고와 삼국사기의 기년을 비교한 글입니다. 초록불님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왕 재위기간.

1, 溫祚王(온조왕) 재위 46년, B.C 18~A.D 28

2, 多婁王(다루왕) 재위 50년, 28~77년

3, 己婁王(기루왕) 재위 52년, 77~128년

4, 蓋婁王(개루왕) 재위 39년, 128~166년

5, 肖古王(초고왕) 재위 49년, 166~214년

6, 仇首王(구수왕) 재위 21년, 214~234년

7, 沙泮王, 沙沸王(사반왕) 234년

8, 古爾王(고이왕) 재위 53년, 234~286년

 

백제왕기 기년

 

仇知王(구지왕), 재위 39년, 188년 - 226년

肖古王(초고왕), 재위 29년, 226년 - 254년 (20년이 적음)

仇首王(구수왕), 재위 11년, 254년 - 264년 (10년이 적음)

古爾王(고이왕), 재위 23년, 264년 - 286년 (30년이 적음)

 

고구려사초 기년 vs 고구려본기 기년

 

芻牟大帝 재위19년 BC37 ~ BC19 동명성왕 재위19년 BC37 ~ BC19

光明大帝 47년 BC19 ~ AD28 유리명왕 37년 BC19 ~ AD18

大武神大帝 37년 28 ~ 64 대무신왕 27년 18 ~ 44

閔中帝 5년 64 ~ 68 민중왕 5년 44 ~ 48

慕本帝 6년 68 ~ 73 모본왕 6년 48 ~ 53

神明仙帝 40년 73 ~ 112

太祖皇帝 35년 112~ 146 태조대왕 94년 53 ~ 146

次大帝 20년 146 ~ 165 차대왕 20년 146 ~ 165

新大帝 15년 165 ~ 179 신대왕 15년 165 ~ 179

故國川帝 19년 179 ~ 197 고국천왕 19년 179 ~ 197

山上大帝 31년 197 ~ 227 산상왕 31년 197 ~ 227

東襄大帝 22년 227~ 248 동천왕 22년 227 ~ 248

中川大帝 23년 248 ~ 270 중천왕 23년 248 ~ 270

西川大帝 23년 270 ~ 292 서천왕 23년 270 ~ 292

烽上帝 9년 292 ~ 300 봉상왕 9년 292 ~ 300

美川大帝 32년 300 ~ 331 미천왕 32년 300 ~ 331

 

남당 유고(신라사초) 기년 vs 삼국사기 기년

 

1 혁거세 (재위 61년)BC57- AD4

2 남해 (재위 21년) 4- 24

3 유리 (재위 34년) 24- 57

4 탈해 (재위 24년) 57- 80

5 파사 (재위 33년) 126 ~ 158 (재위 33년) 80- 112

6 지마 (재위 33년) 159 ~ 191 (재위 23년) 112- 134

7 일성 (재위 21년) 192 ~ 212 (재위 21년) 134- 154

8 아달라(재위 31년)213 ~ 243 (재위 31년) 154- 184

9 벌휴 (재위 13년) 244 ~ 256 (재위 13년) 184- 196

10 나해 (재위 35년) 257 ~ 291 (재위 35년) 196- 230

11 조분 (재위 18년) 292 ~ 309 (재위 18년) 230- 247

12 첨해 (재위 15년) 310 ~ 324 (재위 15년) 247- 261

13 미추 (재위 25년) 325 ~ 349 (재위 24년) 261- 284

14 유례 (재위 15년) 350 ~ 364 (재위 15년) 284- 298

15 기림 (재위 7년) 364 ~ 370 (재위 13년) 298- 310

16 흘해 (재위 8년) 370 ~ 377 (재위 47년) 310- 356

17 내물 (재위 26년) 377 ~ 402 (재위 47년) 356- 402

18 실성 (재위 16년) 402 ~ 417 (재위 16년) 402- 417

 

<초록불> 특별한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남당유고는 소설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롱쿠스> '황제'라는 단어가 대체 뭐길래??

 

 

○○○○○○○○○○ ∞∞∞ ※ ∞∞∞○○○○○○○○○

 

 

[필자筆者 견해見解]

 

정말 한심하다 못해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할 정도이다. 이렇게 우리 동방민족의 역사 발전과정에 캄캄한 문외한門外漢이 역사 분석이랍시고 지저귀고 앉아있으니...그래서 저들의 [앵무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텍스트는 필자筆者가 여러 번에 걸쳐서 올린 [대륙백제나 신라의 기원] [한자발음의 비밀] 등에서 되풀이 설명하였으며 이 글에 관한 의견도 그런 부분에서 연속성이 있으니 참고해주길 바란다. 다만 [묘苗]와 관련하여 조금 덧붙일 대목을 여기에 소개한다.

 

 

1. 묘예苗裔란 어휘語彙의 역사적인 등장 배경과 원래의 의미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한 이유

 

 

언어言語 특히 중요한 형태소形態素를 가지고 있는 소리글자에서 진화한 어휘語彙는 지금의 변화되고 완성되어진 의미意味 만을 가지고 섣부르게 단정하거나 함부로 비교판단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한 언어군言語群들은 발현發顯되는 처음부터 자기완성적인 역사성을 띠고 있어 소리글자의 진화과정을 모범적으로 알려주는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는 동시에 산 증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에 이르러 화석화化石化되었거나 일반화 혹은 전형적인 표현으로 정형화定型化 된 관념을 가지고 그 당시의 역사 흐름이나 그 글자가 처음 만들어졌을 무렵의 상황을 비교해서는 큰 잘못을 범하기 때문이다.

 

한자漢字의 경우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각하다. 따라서 그 당시의 사회문화적 맥락脈絡을 주도하고 있던 실체實體들의 삶 속에 녹아 있던 생활상과 사유思惟들을 바탕으로 삼아 이루어진 초기 부호글자의 소리 값을 밑거름으로 정립定立되어진 용어用語들을 비교 검증 할 때는 특히 주의를 요한다.

 

 

즉 [앵무새]가 위 원문原文에서 떠든 것처럼 경솔하고 치졸하며 매우 경망스러운 잡소리로 제 얼굴에 먹칠하는 분석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이러한 사례事例들은 필자筆者가 앞서 설명글로서 제시提示한 [한자 발음의 비밀...반론] 편篇에서 하나하나 예시例示를 들어가면서 자세하게 언급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릇 현재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쓰고 있는 일상적인 어휘語彙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 소리글자가 태어났을 무렵의 특별한 역사적 환경과 고유한 상황에서 비롯되어졌으며 훗날에 이르러 이 글자를 바탕으로 인신引伸된 글자들이 다양하게 분화 발전 되어 등장하는 가운데 일반화 또는 공유화共有化되어간다는 현상을 간과해서는 바로 [앵무새]와 같은 큰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흔히 쓰고 있는 [후예後裔 -묘예苗裔]란 어휘語彙의 분석에는 각별하고 정밀한 추적이 필요하다. 즉 과연 이 단어는 처음 어떤 연유緣由와 사회적 배경에서 탄생되었으며

 

무슨 과정을 거쳐 한자체계漢字體系 속으로 받아들여져 통용通用되었고 또 어째서 현재의 후예後裔란 말과 같은 뜻으로 완결完結되면서 요즈음에는 [후예後裔]가 일반화되고 [묘예苗裔]의 용례用例는 보통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되어지는가? 의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여기저기의 고대古代 기록들에서 의외로 적지 않게 발견된다.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가능한 하나의 연결고리로서 존재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앵무새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미친 광대놀음은 접어두고 이제 부터 우리들 자신이 먼저 위에서 설명한 사실들에 맞추어 기록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1) [苗miáo]라는 소리글자는 순舜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 글자가 나타나기 전에도 그 실체實體는 여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요堯와 순舜의 교체에 일정한 역할을 할 만큼 무시 못할 세력이었음은 여러 은유된 기록들이 입증해준다. 다시 말해...

 

요순堯舜의 교체기에 <새>로 표현된 중명조重明鳥가 등장한다.

요堯가 그동안 꾸준하게 날아오던 중명조重明鳥가 나타나지 않음을 매우 근심한다.

순舜의 이름이 중화重華인 까닭은 눈동자가 두 개였기 때문이 아니라 중명조重明鳥로 표현된 묘족苗族 집단의 일정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며 그래서 권력을 잡자 스스로도 이름을 [묘苗]라는 부호글자로 삼는다.

이렇듯 중명조重明鳥와 중화重華를 비롯하여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멸몽조蔑蒙鳥와 몽蒙*모牟라는 씨 이름과 묘족苗族은 매우 특별한 관계가 있다.

 

 

2) 이들이 그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회남자]에서 밝혀주고 있다. 동방민족 고유의 특징으로서 상투쟁이였기 때문에 마치 <새싹이나 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 값도 순 우리말인 [모]에서 나왔다.

 

3) 이 세력들의 주요한 기반은 <요堯> 당시의 견강부회牽强附會된 기록에서 보듯이 [중토中土 동남부와 서북방]이었다(요堯가 그들을 벌伐하여 그쪽으로 옮겼다는 기사記史들은 완전히 사기놀음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묘족苗族들의 정착근거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체념적인 고백이기도 하다). 이들 지역에서 뒷날 두각頭角을 나타낸 집단들의 명칭名稱이 공교롭게도 모두 [모나 몽]이라는 소리 값을 지니고 있음은 매우 주목을 요한다. [1]

 

[1]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의 핵심 추종 세력인 산동山東의 몽씨족단蒙氏族團

❷ 후에 신라新羅와 백제百濟 세력의 한 부분으로 된 강남江南의 해상집단海上集團 모씨들(모牟*모慕*모毛 등)

❸ 서북부에서 발흥勃興한 세력들인 모돈冒頓의 모*진시황秦始皇 때의 명장名將인 몽념蒙恬의 몽 그리고 모용선비慕容鮮卑의 모와 몽골(蒙古 -몽씨의 골)의 몽

 

4)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더욱 분명하게도 정체성正體性을 확실하게 보여주는데 바로 [묘민국苗民國과 모민국毛民國 -모두 순 우리말인 「모」를 어간語幹으로 삼고 있다]이란 고을나라 이름이다.

 

5) 이들 족단族團의 중요한 생활언어적生活言語的 소리글로서 등장하는 흔적들의 존재가 주목된다. [묘예苗裔]이란 어원語源을 밝히는데 아주 강력한 시사점示唆點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이 사는 마을을 [모라牟羅 -묘씨苗氏들의 터전]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동방족들의 지명地名과 인명人名 그리고 마을 이름과 물명物名 등 생활용어들을 짓는 습속習俗으로 유추類推해보건대 [묘예苗裔]란 어휘語彙]의 실마리는

 

여러 지역으로 확산擴散된 묘족苗族들에 의해서 처음에는 스스로의 정체성正體性을 간직하고 서로의 실체實體를 증명하거나 친연성親緣性을 확인하기 위해 [묘예苗裔 -우리들은 근본적으로 묘민苗民의 후손後孫이다]라 자칭自稱했음을 알게 해준다.

 

6) 따라서 모두가 순 우리말에서 나온 소리글자로서 원原 음가音價는 [모+이]로 짐작된다. 한자음漢字音으로도 <예裔>가 각별하게 [이 yi]로 발성發聲한다는 사실은 [모씨들의 후손인...상투쟁이들]이란 점을 특별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왜 진한인辰韓人들이 구태여 스스로를 [묘예苗裔]라고 말했는지? 정확한 의미가 이해된다. 원래 그곳에 씨氏의 기원起源을 가진 묘민苗民의 후손後孫이며 또 거기에서 도래到來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은 필자筆者의 [소위 대륙설에 대한...반론] 편篇에 아주 분명하게 설명되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역사적인 동방민족의 발전과 확산 과정으로 이루어진 바탕위에서 만들어진 순 우리말로 된 소리글자로서 사용되다가 한인漢人들이 이를 보고 그대로 받아들여 <묘예苗裔 ➡ 후예後裔]로 원래의 의미를 확장시켜 일반화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묘예苗裔 -같은 겨레라는 뜻이다. 이 무렵 인人의 형태와 소리 값이 변화하는 과정과 매우 잘 맞물린다]가 그 순수한 용례用例를 거의 잃어버렸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에 와서는 후예後裔와 같은 뜻으로 범용凡庸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러한 변화 과정을 잘 말해주는 본보기이지 [앵무새]의 헛소리처럼 처음부터 후예後裔였다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의 뒤집기 쇼가 아니다. 즉 원래의 의미가 희석稀釋된 모범적인 사례事例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결코 아니다.

 

2. 구려九黎에서 삼묘三苗까지 - 화하편향적華夏偏向的 시각視覺의 해소

 

같은 정체성正體性을 지닌다는 관점觀點에서 통찰通察한다면 구려九黎와 삼묘三苗를 애써 구분할 필요는 없다. 처음의 복잡한 씨氏들의 지배방식들이 보다 넓은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좀 더 다듬어진 형태로 통합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9 와 3]일까?

 

 

1) 우리민족은 [ 3 ] 을 기본으로 한 성수체계聖數體系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관습적慣習的 형태나 설화적說話的 구조는 대부분 <3>을 기준으로 한 배수倍數로 확장되거나 원초적原初的 의미소意味素인 <3> 으로 압축된다(삼신할미*9이夷*치우蚩尤의 72나 81형제 등).

 

2) 려黎는 <yi 또는 li>로서 이夷와 같다. 그리고 묘苗는 한족漢族 기록에서도 보이다시피 <우리 민족은 상투쟁이이다>라 하였으니 그걸 유별나게 본 강한 인식을 바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곡식의 싹이나 식물의 어린 새싹이 돋은 모습>을 잘 표현한 묘苗라는 단어를 구태여 골라 사용하고 있다.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묘三苗를 삼모(三毛 -순 우리말인 「모」와 비슷하다)라고 한 까닭도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아무튼 이러한 풍속은 왜倭까지 건너가서 그들의 [방망이 상투]로 변화된다.

 

 

따라서 <9이夷나 9여黎>는 상고上古 시기 북중국北中國이나 동남중국東南中國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불리었던 명칭이며 치우蚩尤 무렵에 이르러 이들을 재통합하여 동쪽과 서부와 남방으로 나누어 경영하는 방식으로 정비한 형태가 <삼묘三苗>라고 보면 된다.

 

이는 훗날 삼한체제三韓體制 안에 흡수되는 데까지 이어지는데 삼묘三苗가 형성된 상황을 한족漢族들이 <요堯가 그들을 쳐서 3 곳으로 쫒았다>라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이다. 아무려면 그 시대에 그 많은 묘민苗民들을 일일이 정주지定住地를 등지게 하면서 세 방면으로 내몰았겠는가? 그럴 정치적 여력餘力과 군사적 능력이 있었을까?

 

그들은 처음이나 그때나 여전히 그 지역에 나누어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삼묘三苗의 지역이 과거로부터 어디였는지? 를 자연스럽게 입증立證해준다.

 

그렇다면 북방의 [환족桓族 사회구성체社會構成體]와 연결되어간 <삼묘三苗의 지속적인 지배자들>는 과연 누구였을까? 바로 <사마천司馬遷>이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

 

 

1) 치우蚩尤 이후에 등장하고 있는 중토中土의 맹주盟主들인데 [소호小昊 금천金天 - 전욱顓頊 고양高陽 - 제곡帝鵠 고신高辛 등]이다. 동부는 소호씨小昊氏를 처음으로 하여 북방으로부터 직접 내려온 전욱씨顓頊氏로 이어졌으며 서방은 고신씨高辛氏이었고 남쪽은 뒷날 요堯마저도 선뜻 제어制御하기를 망설였던 공공씨共工氏와 전욱顓頊의 묘예苗裔들인 환두씨驩頭氏로 연결되는 지배자이었다.

 

2) 바로 이 당시 전욱씨顓頊氏가 <남쪽 통로를 끊어 하늘로 오르는 길을 막았다>는 기록이 아주...아주 중요한 키포인트이다. 다시 말해 이때부터 그동안의 간접적인 영향력 확산의 단계를 넘어 북방에서 내려 온 그가 중토中土의 삼묘三苗에 대한 직접 경영방식으로 바꾸면서 하늘로 표현된 [환국桓國]과의 교통交通을 일원화一元化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려주는 기록들이 있다.

 

전욱顓頊은 그의 직계直系인 희화羲和 주柱와 축융祝融을 남방으로 내려 보낸다.

[신이경神異經]을 보면 <서쪽의 이름이 광狂 또는 전*복*풍이라고 하는 사람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마시지도 먹지도 않고 동쪽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이들 부부는 원래 하늘에서 같이 태어나 밤낮으로 동서로 왔다갔다 달린다. 西方有人焉 不飮不食 被髮東走 已往覆來...名曰狂 一名顚 一名覆 一名風 此人夫妻 與天俱生 狂走東西 沒晝夜>는 기록이 발견된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출신이 하늘이며 서방과 동편을 연결하는 전령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이 매우 주목된다.

[산해경]에 나오는 여러 관문關門을 말하는 특별한 이름을 지닌 성산聖山과 이곳은 물론 중토中土 사방四方을 지키는 천신天神-유독 천신天神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들의 존재가 각별하다.

④ 상고금문上古金文에서 별안간 등장하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란 직책職責이 바로 전욱顓頊의 아들 여축余祝이 도맡은 일이다.

 

⑤ [신이경神異經*태평어람太平御覽*논형論衡*의림意林] 등과 같이 다른 기록에서도 서부와 남방으로 연결되는 관문關門을 연상시키는 천문天門과 지호地戶를 모두 언급하고 있다.

 

 

3) 물론 서쪽은 육로陸路이었겠지만 남방은 해로海路를 통해서도 가능했다. 전욱씨顓頊氏는 이 통로를 제어制御한 듯하다. 반발이 없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결국 공공씨共工氏와의 대전역大戰役이 벌어지고 만다.

 

여기에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치우씨蚩尤氏가 황제黃帝와의 싸움을 끝낸 뒤 운사(雲師 -곽박郭璞 등 한인漢人들은 우사雨師라 풀었는데 우리 역사의 흐름으로서는 운사雲師가 더 설득력을 지닌다) 병예屛翳를 동부와 남방에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사雨師 첩妾과 풍백계風伯系인 대행백大行伯을 서쪽을 관할하는 지역에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를 바탕으로 일어 선 공공共工과 전욱顓頊 사이에 벌어진 자존심의 대결이다.

 

4) 다시 주목할 기록이 등장한다. <공공共工과의 부주산(不周山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아 전욱顓頊의 성산聖山인 부주산父珠山 즉 부알산父●山이라야 한다) 전투에서 하늘을 버티던 기둥이 끊어지고 그 때부터 하늘이 서쪽으로 기울었다>는 기사記史이다. 다음의 지배자가 부상浮上할 차례가 온 것이다.

 

5) 이윽고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고신씨高辛氏가 하늘이 그쪽으로 기울어진 서방의 어른으로서 전욱顓頊의 뒤를 이을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알리며 이름을 내걸었다. 물론 여와씨女媧氏의 행적行蹟으로 표현된 <여와보천女媧補天 -여와女媧가 하늘의 뚫어진 곳을 기워서 막다>을 통해서였다.

 

이 구절句節도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무릇 여자가 가장 능력을 발휘하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혼인婚姻이라는 매개媒介를 통한 타협과 연합관계 형성과 유지였다. 그걸 여왜보천女媧補天이라 표현했는데 그래서 고신씨高辛氏의 아내가 각 지역 실력자의 딸들로서 무려 네 명이나 되었다.

 

 

[제곡고신帝嚳高辛의 부인들]

 

① 전욱고양顓頊高陽의 셋째 아들인 중여衆艅 곤鯀의 딸 간적(簡狄 -적狄이라는 이름으로 동방계열임을 보여준다)

 

② 제일급정비第一級正妃인 진봉씨陳鋒氏의 딸 경도慶都

 

③ 유태有邰氏의 딸 강원姜原

 

④ 추도씨鄒屠氏의 딸 상의常羲

 

6) 하지만 약간은 어설프게 봉합縫合한 패권체제覇權體制는 다시 후일後日에 이르러 갈등葛藤의 요인을 만들었고 자식子息들 가운데에서 요堯가 처음으로 중토中土에서 자립自立하려고 움직인 원인을 제공했다.

 

 

따라서 지금도 남아 있는 한족漢族의 뒤틀린 기록들에 관한 근원적인 배경과 진실을 면밀하게 캐어보면 그 당시의 정확한 역사적 흐름이 그대로 복원復原된다. 중토中土의 지배자들은 모두가 삼묘三苗 지역에서 발흥勃興한 후예後裔들인 [소호小昊 금천金天 - 전욱顓頊 고양高陽 - 제곡帝鵠 고신高辛 ]이었으며 또 그들을 중심으로 패권覇權이 이어졌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 한족漢族들이 [오제본기五帝本紀]에 그대로 옮기는 사기공정史記工程을 하여 제대로 사기를 쳤다. 이렇게 저들의 입맛에 맞게 조각조각 찢어서 수록收錄한 사건史件들을 하나하나 모아보면 원래의 역사전개구조로 이어진 연결고리가 제대로 만들어진다.

 

 

3. 덧붙이는 말

 

우리가 이쯤에서 반드시 올바르게 인식해야 할 점이 있다. 상고上古 역사 인 오제시대五帝時代에 중토中土의 사정은 전全 지역을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장악하여 통치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한족漢族의 원류源流들도 그때서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진입進入하고 있던 단계였으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와서도 중토中土의 중앙부(중원中原 지역이라고 부르는 지대地帶)만 가지고 서로 분할경쟁分割競爭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제五帝]의 본뜻은 다만 세 방향으로 나누어졌던 삼묘三苗의 정주定住 지역 맹주盟主 가운데 한 세력집단이 우뚝 올라서서 다른 지역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국면局面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지배자가 그 시대의 패권자覇權者로서 인정되고 일반적으로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浮上하면서 기록에 남겨지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관점에서 통찰通察할 때 전욱顓頊과 요堯까지도 삼묘三苗를 필요이상으로 의식했을 만큼 눈에 확 뜨인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두각頭角을 나타내고 있었다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물론 그들은 모두가 이전以前의 구리九黎와 인적人的으로나 지역적으로나 구성요소가 동일하였다.

 

만일에 그렇지 않았다면 정복전쟁征服戰爭이라든지 정벌征伐이니 하고 말게 없다. 같은 시기에 적지 않은 씨氏들이 퍼져있음에도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나머지는 패권覇權의 방향에 따라 그저 큰 물결 안에 끌려 들어왔을 뿐인 물풀과도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생각이없다 소설책이라...ㅋㅋㅋ
특별한 생각이 없다.. 소설책이라 생각하고 있다.. 거 참ㅋㅋ 보는사람 맥 빠지게 하네요
너무 옛날에 논파된 떡밥을 들이대는데? 하나 묻지. 귀하의 주장의 근거는 어디서 나왔는가? 적어도 초록불님은 사기에서의 苗裔의 용례를 들어 귀하의 떡밥을 논파하는데, 그에 대한 반박을 한다면 적어도 주석이라도 달아서 귀하의 주장이 어디에 나오는 것인지는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초록불이 논파한글 링크좀요
사기 사마양저열전.
司馬穰苴者田完之苗裔也
- 사마양저는 전완의 먼 후대의 자손이다.

어디 저기서 苗裔가 묘족의 후예로 번역이 됩니까?
설마 사마양저가 누군지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죠?
대수맥이는 뭐하느냐? 죽었느냐? 아니면 반박을 내놓아보거라. 매국식민사학자 대수맥아.
아 글쎄, 반박을 좀 해보라니까. 苗裔라는 말을 묘족의 후예라고 해석한 건 내가 사기에서 든 것만으로도 논파된다니까? 아니면 뭐, 자신이 매식자라는 걸 인정하기라도 하는 거냐? 하긴 넌 우리역사를 왜곡하는 매식자가 맞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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