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저것...

한라산 2007. 4. 19. 13:44

(4) 율리우스력과(Julian calendar)과 그레고리력(Gregoriancalendar). 그리고 치윤법(置閏法)

 

여름 건초만들기. 1409년 드 베리공이 만들게 한 그림 역서, 위의 반원은 황도 12궁과 새달의 날짜를 계절별로 표기하였다.지금까지 이야기한 천문학은 점성술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달력이라고 부르는 역년(曆年)과 역월(曆月), 역일(曆日)은 시간과 날짜의 순서를 정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천체의 주기 현상을 시간단위로 정하는 것을 이른다.

 

여기에서 천체의 주기현상이란 밤과 낮, 4계절, 달의 크기 변화 등으로 날짜를 정해서 이를 생활에 응용하는 것으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면서 자전하는 현상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을 태양력이라고 하고, 달의 공전주기로 생기는 삭망(朔望/초승과 보름)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을 태음력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이두 기준 모두를 합해서 사용하면 태음, 태양력이라 한다.

 

지구의 자전으로 생기는 밤과 낮, 달의 공전으로 생기는 삭망, 지구의 공전으로 생기는 계절 등은 각각의 다른 주기를 가지기 때문에 이를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하고 정밀한 계산을 필요로 하고, 이런 복잡한 계산을 통하여 이 3자를 결합시키는 것을 역법(曆法)이라 한다.

 

지구의 극 지방을 제외하면 밤과 낮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위도상의 위치에 따라 계절은 다르게 나타나 봄이 되면 꽃이피고, 여름은 무성하게 열매를 맺으며, 가을은 열매가 익어 수확을 이루고, 겨울은 추워서 웅크리고, 다시 봄을 기다렸다가 어느 시기에 씨앗을 뿌리고 김을 메며, 수확을 하는 등의 반복을 수없이 되 풀이하면서 자연과 인간은 경험적으로 순행(巡行)하게 되는데 이런 것을 자연력(自然曆)이라 부른다.

 

고대를 살았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자연력만으로도 생활하는데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날짜를 정해서 거기에 맞추어 의식을 행하는 번거로움 같은 것이 오히려 더 불편한 일이 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양적인 전제군주체제에서는 하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천자가 이를 미리 알아서 백성들에게 씨 뿌리는 시기와 수확하는 시기를 알려줌으로써 권위를 세울 필요가 있었고, 서양에서는 농사와 종교적인 의례를 받들기 위해 날짜를 정하는 필요에서 역법(曆法), 즉 달력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지구의 공전주기를 근거로 태양력을 가장 먼저 만들어 사용한 것은 고대 이집트인 들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해뜰 무렵 동쪽 하늘에 시리우스별이 나타나면 홍수가 시작되고, 다음해 다시 홍수가 오는 반복주기를 계산하여 기원전 18세기 경에 일 년을 열 두 달, 한 달을 30일로 정하고, 마지막 달에 5일을 더해서 365일을 기준으로 달력을 만들었다가 그 후 시리우스별과 태양의 관측을 통해서 일년을 365. 25일로 수정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역법상의 나머지 025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4년 주기로 하루를 더 넣고, 이해를 윤년(閏年)이라 하고 이렇게 윤년이나 윤달(태음력)을 정하는 것을 치윤법(置閏法)이라 한다.

 

이런 이집트의 달력이 로마로 들어가 율리우스력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런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로마력은 신관들이 4년 단위로 마음 데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년의 날짜가 매우 불규칙하여 관리들의 임기와 봉급 등에 지장을 줄 정도로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런데 카이사르(시저)가 정적(政敵)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를 원정했을 때, 그 곳의 간편한 역법을 보고 귀국하면서 수학자를 초빙, 이를 토대로 BC 45년 로마력을 개정하였는데, 이것이 율리우스력이라는 것이다.

 

1역년(曆年)을 365.25일로 하고, 4년에1일의 윤일(閏日)을 2월 23일 뒤에 넣고, 춘분(春分)을 항상 3월 25일로 고정시켰다. 그 다음 대인 아우구스투스 때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로마제국 영내에서 널리 사용되고, 그 후 로마 공교회를 비롯한 전 유럽에 보급되어 16세기 말까지 사용하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쓰다 보니까 이 율리우스력의 1년은 실제보다 좀 길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 일차적인 증거가 카이사르가 춘분은 3월 25일(실제로는 3월 23일)로 정했으나, 기원 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때는 3월21일이 되었고, 8세기에 와서는 3월 17일, 16세기에는 3월 11일로 자꾸 빨라지게 되었다. 이런 착오는 1600년 동안 12일 이니까, 율리우스력에서 1년은 12/1600 = 0,0075 일쯤 길다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착오를 맨 처음 발견한 것은 8세기 영국의 승려이면서 역사가이기도 했던 베데(Bede)라는 인물이었고, 다시 수세기를 지나 13세기에 이르러 파리대학 교수를 비롯한 로저 베이컨 등이 이를 다시 지적해서 일반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춘분을 기준으로 부활절을 정하기 때문에, 로마 공교회가 이를 정식으로 개정할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15세기 말 이고, 실제로 역법(曆法)으로 제정한 것은 16세기 말  교황 그리고리우스13세(1572 ~ 1582)때의 일이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정해진 대로 춘분을 3월 21일로환원 시키기 위해, 1582년 10월 4일 다음의 날을 10월 15일로 정하여 10일을 건너뛰고, 앞으로 착오가 없도록 치윤법을 다시 이렇게 정하였다. 이것을 그레고리력이라 하고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력으로 나타내는기원연수가 4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이다. 단 1백으로 나누어지는 경우, 연수가 100의 배수인 때에는 평년으로, 다시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하고, 윤일(閏日)은 2월 28의 다음날로 한다."는 것 등....

 

이 개력(改曆)에 의해서 1년은 약 365.2425일이 되고, 태양년(회귀년)과의 차는 불과 0,0003일(3000년에 하루 정도)가 되어 1만년에 3일 정도의 차이 밖에 생기지 않게 되어 현재까지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동양지역에서는 19세기 말 이래, 개화(開化)와 동시에 종래의 음력과 그레고리력(양력)을 같이 사용, 공공생활에서는 양력을 사생활에서는 음력을 사용하였다.

 

(5) 태음. 태양력과 치윤법

 

우리나라의 경우 태양력인 그레고리력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것은 을미개혁이라고 부르는 1895년부터이고 그 전 까지는 음력을 사용하였는데, 음력이라고 하지만 태양. 태음력을 사용한 것이다.

 

달의 공전주기만으로 날짜를 계산하게 되면, 1태양년은 365.242196일이고, 1삭망 월(1 달)은 29.530588 일 이므로, 1태양년은12.368267 삭망월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음력에서 윤달을 전혀 넣지 않는다면 12달 하고도 남는 부분, 즉 0.368267 삭망월이 쌓여 32년 또는 33년 지나면약 1년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 보면, 약 16년 후에는 한 겨울이어야 할 1, 2월의 기온이 한 여름의 더위가 되고, 한 여름이 되어야 할 7, 8월에 한 겨울의 추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32년 후에는 완전히 1년이 더 보태진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사계절이 명확한 온대지방에서는 그 혼란이 여간 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보정하기 위해 몇 년에 한번씩 윤달을 넣고 있는데 이것을 태음태양력에서의 치윤법이라고 한다.

 

이 치윤법(置閏法)에서는 3년에 한 달, 8년에 3개월, 11년에 4개월, 19년에 7개월, 334년에 123개월을 넣는 방법이 있는데, 8년법과 19년법이 잘 사용된다. 그 중에서도 19년법이란 19년 동안 7번의 윤달을 두는 것으로서,

 

(19×12) + 7 = 235삭망월로 한다는 것이며 지구의 공전주기 365.242196일×19년=6939.6016일에서달의 공전주기 29.530588일×235월=6939.6882일을 빼면 6939.6016-6939.6882=0.0000866으로서 거의 오차(誤差)가 나지 않아 계절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주기를 중국에서는 춘추시대인 BC 600년경에 발견하여 장(章)이라 하였고, 서양에서는 BC 433년경 메톤이 발견하였기 때문에 메톤주기라 하였다.

 

그러나 태음태양력에서는 일정한 치윤법이 정해진 것은 아니므로 만일334년에 123번의 윤달을 둔다면 이는 4131삭망월이 되므로 365.242196일×334년=121990.89일,29.530588일×4131월=121990.86일이 되어 오차가 거의 없게 되어 보다 계절과 더일치하게 될 수 있다고 한다.

 

(6) 우리 나라의 천문학

 

점성술(astrology/占星術)의 기원은 고대 중국과 바빌로니아에서 비롯되었다. BC 7세기경의 아슈르바니팔 왕의 서고(書庫)에서 나온 설형문자(楔形文字) 점토판(粘土板)에 나타난 점성술 기록과, 사마 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천관서(天官書)라는 장(章)에서 이론이 정리되고, 전한서(前漢書) 이래 천문지(天文志)에 나오는 점성술은 그 방법이나 내용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식(日蝕)이나 혜성 또는 신성(新星)의 출현과 같은 천변(天變)을 지상(地上)의 사건과 결부시켜 장래의 재앙을 예측하는 것으로서 이를 천변점성술이라 한다.

 

일식이나 혜성, 새로운 별이 하늘에 나타나면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천하 및 국가적 현상으로 이해되어, 이를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군주(君主)를 위한 것이었고 한 나라의 최고 기밀로서 민간에 유포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상례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는 이미 나라마다 일종의 점성술사인 일관(日官)이 있어서 천체의 변화를 세밀히 관찰한 것으로 보이며, 사서(史書)에서도 일식과 혜성의 출현 등은 거의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일관(日官), 고구려 일자(日者)라는 관직과 백제의 일관부라는 관서는 모두 이런 천변점성술과 연관되어 있었다고 보여지며, 특히 신라에서 융천사의 혜성가(彗星歌), 월명사의 도솔가 등은 이런 것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궁예 열전을 보면, 헌안왕(47대)의 아들로 "5월5일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 났을 때, 지붕위에 깨끗한 빛이 있어 긴 무지개와도 같이 하늘로 맞닿았다"(以五月五日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일관이 말하기를 중오일(5월5일)에 태어났고, 태어나면서 이가 있고, 이상한 빛이 나타났으므로 장래 나라에 불리한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마땅히 이를 기르지 않는 것이 옳을까합니다. 하자 왕은 중사에게 명령하여 이를 죽이게...(日官奏曰 此兒以重五日生 生而有齒且光陷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則中使 抵其家殺之...)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보면 일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그들의 말 한마디에 왕자의 목숨도 왔다 갔다 할 정도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국보 제 31호 경주 첨성대지금도 경주에 가면 도로변에 있는 첨성대(瞻星臺)를 쉽게 볼 수 있다. 국보 제 31호로 지정된 이 첨성대가 만들어진 것은 선덕여왕(632 ~647)때라고 삼국유사에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가 된다.

 

그러나 기록이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이야기 끝에, "별기에 이르기를 이 왕(선덕왕) 때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다(別記云是王代 鍊石築瞻星臺)"라고 너무도 단편적이고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고, 별기에서 말했다는 그 별기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어서 이에 대한 해석 역시 학자들간에 매우 분분하다.

 

천문대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고, 또한 높은 곳이 아니라 평지에 있으며, 여기에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등, 여러가지로 분석하고 다른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그 구조를 살펴보면 밑에서부터 4.16 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 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고,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으며, 30cm 높이의 돌 362개로 27단을 쌓아 만들었고,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는 것,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으며,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고, 판석은 길이156 cm, 너비 60 cm, 두께 24 cm로 능히 사람이 들어가 앉아서 일을 볼 수 있게 만들어져있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이며,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추분·동지·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고 있으나, 학자에 따라서는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이 있는가 하면, 주비산경(周비算經)이라는 중국의 당나라때  천문 수학서(數學書 / 이순풍 등이 주석(註釋)을 붙인 것으로 혼천설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우주관인 개천설(蓋天說))를 상징적으로 축조한 것이라는 해석을 달기도 한다.

 

신라의 직관표에 천문박사(天文博士)를 두었다고(뒤에司天박사로 고침) 하나, 역시 그 역할에 대한 연구는 첨성대와 함께 앞으로 계속되어야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가 되면 서운관(書雲觀)이 생겨서 천문(天文)·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의 일을 맡아보았는데, 국초에는 업무가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으로 분리되어 태복감을 1023년(현종 14) 사천대(司天臺), 1116년(예종 11) 사천감(司天監), 1275년(충렬왕1) 관후서(觀候署)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사천감이라 하였다. 그 후 1308년(충렬왕 34) 태사국을 병합하여 서운관이라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다시 사천감과 태사국으로 분리, 이후 병합·분리를 거듭하다가 1372년 다시 병합하여 조선시대로 이어져 1392년(태조1)에 서운관을 설치하고, 천문·재상(災祥)·역일(曆日)·추택(推擇)의 일을 맡아보았다.

 

국초의 서운관은 새로운 수도 건설에 진력하여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면서 정도(定都)의 후보지를 계룡산의 신도내를 정하기도 하였고, 한양 천도(遷都)작업에서도 큰 몫을 하였는데, 세종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이름을 바꾸고 천문연구가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나 절정기에 도달할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세종의 치세기간과 거의 때를 같이 하고 있다. 이 세종의 치세기간이 우리 민족 문화의 흥륭기로서 폭 넓은 문화가 이룩되었다는 것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시기 천문학에도 획기적인 변천이 있었는데 세계최초라는 측우기(測雨器)의 제작(1442)을 필두로 간의와 혼의, 자격루, 앙부일귀 등의 관측기구들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역서(曆書)로는 칠정산내외편이 편찬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일년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冬至)에 맞추어 동지사(冬至使)가 중국에 가서 황제로부터 다음 해의 역서를 받아오는데 이를 정삭(正朔)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 정삭은 동지를 기점으로 중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실정과는 맞지않는 것이 당연하다.

 

이에 세종은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 등에게 명하여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간행(1442), 이는 원 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수정 개편한 것으로, 칠정(七政)이란 해와 달, 그리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일곱 개의 혹성(惑星) 운행을 계산한 것으로, 이로써 서울에서 일어날 일식 등의 천문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속편으로 세종은 이슬람력을 도입, 역시 이순지(李純之)·김담(金淡)등에게 명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고쳐서, 활자본으로 세종 26년(1444)에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칠정산 외편(七政算外篇)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1태양년을 365.242188일 (현재는 365.242196일)로 정하여 오늘날과 별 차이가 없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동지(冬至)를 1년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춘분(春分)을 그 기준으로 하였다는 점도 특이한 일이다.

 

그 후 효종때(1653) 김육에 의해서 시헌력이 들어와 1910년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길 때 까지 정식으로 혹은 참고용으로 사용하였다.

출처 : 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글쓴이 : 이길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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