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뚝첨병

융이 2020. 6. 27. 00:46

입대 전 사진

이 글들이 사라져 보관하고 있던 파일을 열고 다시 올려놓습니다. 내 글들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부모 향제 남편 처자식들이 비참한 5114저주를 받습니다.

 

이 글을 환갑진갑이 다 지난 지금에서 쓰는 이유는 옳은 것이 무었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성공하는 길인 것인가도 정립하지도 못한체 정체성을 잃고 아둥바둥 그냥 저냥 사는데 연연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덧없이 다 성장한 자식들을 바라보며 자식들에게나마 아직도 혼탁한 이 사회를 이대로 물려줄수 없음을 절실히느껴 이제부터라도 내가 살아온 대한민국의 일부분이나마 적어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의 한알이 되고자 기억나는데로 진솔하게 적어나가고자 함이다.

또한 우리사회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분열시켜 파탄에 몰아넣으려는 친북인사들을 앞세워 참전용사들을 살인마와 용병으로 매도한 대한민국의 적법성을 지닌 엄연한 대중매체인 한겨레21에서 근 1년간 시리즈로 대한민국을 농락한 연재물 \"아~ 몸서리 쳐지는 한국군\"이란 기사를 보고 울분을 참지못한 부분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다.

한겨레신문은 그 시절 많은 아픔들을 감내하며 살아가야했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의 모임으로 시작되었었다. 창간당시 나 또한 창간 국민주주이기도 하지만 창간동기가 애국적이었고 순수했고 의로웠던 국민들의 신문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한민국의 모순점과 약점들을 교묘히 파고들어 국민들을 현혹하고 이간하여 침몰시키려는 세력들로 가득차있는듯하다.

물론 이 문제는 일제시대 지배자, 통치자, 관리들에게 아부하며 순종해야만 살아남고 출세하여 행세를 부릴 수 있었던 시절을 겪어온 지도자, 지식인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을 관리함에 일제시대에 배운 통치기술에 따라 국민들을 아전인수식으로 호도하고 관리하는 습성을 지닌 짝퉁민주주의를 펼치고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위정의 바탕을 만들어 놓은 것이 원죄가 아닌가싶다.

내 조국이 병이 들데로 병들어 지도자들은 자신챙기기에 급급하여 나라의 안위따윈 안중에도 없는 이 나라를 고발하여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자는 뜻도있다.

나는 명성황후님을 보필하시던 황후님의 친척이신 민순(閔舜)할머님과 연을 맺으시어 여주에서 서울로 이주하게 된 할아버님(朴舜九)의 3대 장손 집안에서 4남매 막둥이로 태어나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으나 우리부모님의 꿈이며 집안의 희망이며 기둥이셨고 조선호텔 직원이셨던 만18세의 청년 큰형님께서 6.25전쟁이라는 민족의 아픔속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 그들에게 붙들려 인민위원회로, 인민군으로 끌려다니시다 도망나와 국군에 입대하였으나 혼탁한 전쟁통에 어느 누군가의 밀고로 부역혐의라는 무서운 누명을 뒤집어쓰고 서대문형무소에 입감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어느날 부터는 행방불명이라는 폭탄이 우리가족을 송두리체 흔들어놓았다. 이후 부모님들은 큰아들을 찾으시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시고 홧병으로 일찍 피멍으로 물든 가슴에 한을 않고 전쟁없는, 다툼이 없는 천국으로 가시었고 우리 집안은 풍지박살을 맞이하게 되었었다.


내 나이 16살(고1)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내동댕이 쳐진 신세여서 일명 똘만이라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여 00꼬마, 또는 00깡패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대신하며 영웅심과는 거리가 먼 의리와 깡다구와 악으로 청소년기를 거쳐왔다.

나는 이미 이 시절 사람이던 짐승이던 바로 숨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들을 싸움에서 사용할 필요도 이유도 느끼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나와 싸우던 상대들은 데미지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았다. 큰 싸움이던 작은 싸움이던 내게 맞았던 상대들은 꼭 피를 보였었고 내게 살이 끼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에게 맞은지 몇 개월 후 사망을 하여 우스게 소리지만 내게 맞은 결과라며 나를 주위에 경계하라는 일침으로도 받아 들였었다. 살아 오며 몇 번은 사용하고픈 충동을 느껴 본 적이 있었었던 것도 부인하긴 힘들다.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도 우리 집안, 일가 친척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집안이나 친척들은 말없고 고집불통이고 융통성 없이 착하기만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고아가 되어 골치아프고 짐스런 반갑지 않은 어린 상전 쯤으로만 여기고 있었을 뿐이었고 지금까지도 나에 대한 그런 이미지는 별다를 것 없을것이다.

또 한가지 이유를 들자면 자라면서 부모님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 중 \"집안의 체통을 잃지말고 남에게 누를 끼치지 말라\" \"남에게 도움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음도 부인하지 못할 부분이지만, 가진것 없었고 가난하기만했던 집안들 중심의 일원이었기에 모든 친척들에 누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도 자리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고, 한편으론 베품으로 집안을 돌보셨던 내 부모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던 일가 친척들은 중심을 잃고 서로 살아가기 힘들었던 시절에 부담스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내 자신을 느끼면서 가슴 속에 야속함과 미운 마음들도 자리하고 있었던 것도 부인하기 힘들다.

성장기에 부모를 잃고 잘 먹지 못한것이 원인인지 집안에서 제일 외소한 163cm 키와 47kg의 작은 체격으로 남들이 보기엔 외소해 보였지만 가슴둘레 120에 왕자 복근에 눌러도 들어가지 않는 쇠말뚝 같은 근육에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인간 흉기였으며 정신력 또한 누구에 뒤지지 않았다.

나는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 다가오면 그 싸움이 무서웠고 두려웠었다. 그래서 싸우지 않을 방법을 모색도 해보고 좀 망설여지기도 하지고 싸움이 한 두번 이어지고 본 싸움에 들어가면 눈이 뒤집힌다. 힘으로 나를 이길 사람은 많았지만 싸움은 힘만이 아니다.

그것은 싸울때 이 싸움에서 나는 죽는다였다. 그러니 동네 패싸움에서 상대를 죽일려고 싸우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죽음과 연결을 짓고 싸움을 하니 상대방들은 기겁을 하고 줄행랑을 치며 나중에는 아무데 꼬마는 건드리지 마라였다.

그런 생활을 하던 중 훌륭하신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으며 더우기 나에게 외로울 시간을 주지 않았던 내 목숨을 걸고 지켜주고 싶없었던 보석같고 가족같이 소중한 친구들과 은사님들이 계셨다. 이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보물로 생각한다. 그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다 적지 못하겠으나 내겐 그런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신 모든 신에게 감사하며 생활해 왔다. 그 많은 친구들과 좋으신 분들의 도움으로 우주로켓을 만들겠다는 청운의 꿈을 열 학문으로 복귀하여 그들과는 거리가 멀어졌으나 뭐버릇 남주냐는 식으로 불의를 보면 또 발동이 걸리기 일쑤였다.

66년도에 징병대상에 유보 되었다가 68년도 여름에 징집영장을 받고 집결지에 나갔으나 텅 비여있는 집결지에 놀라 당시 수원으로 이전한 도청을 방문하여 김신조 사건으로 복무기간이 늘어난 이유로 징집에 차질을 빛어 연기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다음 해인 69년 3월 10일에야 소위를 달고 입영하는 학군의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뒤 늦게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논산 훈련소 28연대를 거쳐 후반기 금마훈련소에서 LMG와 로켓포 주특기 104를 받아 26사단 75연대 ?중대(경기도 일영)에 배치되었다.

 

당시 이등병시절 마이가리? 대위라나 하던 모자 계급장 위에 공수 뺏지를 올려 달았던 중대장이 매일 잠복시간 되면 4cm정도 굵기에 1m2~30 정도 길이의 반질반질한 껍질 벗긴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 군장검열 하면서 열병한 졸병들에게 \"너, 군인의 길\" \"너, 혁명공약\" \"너, 보초의 수칙\" 하며 암기사항을 지적하는데 우물쭈물하면 가차없이 없디려 뻣쳐 시키고는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의 정확한 가격점을 사정없이 5대를 내리치는데 한대 맟는 모양이 개구리 뻣듯 자빠지는 모습에 옆에서 보는 병사들은 눈을 질끔 감고 몸서리를 쳐대고 하는 생활이 무섭고 두려워 당시 3명의 병사가 탈영한 상태였고 사회에선 맟는 것 보단 때리는데 이력이 나있던 나 또한 탈영할 틈을 였보고 지내던 어느날 신삥 하사들이 전입을 왔는데 장기하사 일반하사가 섞여 있었다,

그 중 어느 일반하사에게 접근하여 '당시엔 장기하사들이 부족하여 강제적으로 장기하사로 만든다는 소문들이 있던 시절'이라 하사관 학교에 가면 말뚝이 안되는가? 훈련 량은 어느 정도인가 언제 어떻게 지원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고 그 때가 마침 지원자들이 부족한 상태라 각 중대별로 3명씩 차출 내려온 시기라는 것을 알게 되여 인사계 선임하사에게 찿아가 신청을 하였는데 중대장이 널 중대요원으로 찍고 있더란 인사계의 말에 더욱 놀라 선임하사에 매달려 제발 하사관 학교로 보내달라며 애원도 하고 보내주지 않으면 탈영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나의 굳은 의지를 밝혔더니 선임하사의 보고를 받은 중대장이 직접 불러 면담을 하면서 아쉽지만 너도 장교도 될수 있는 제원이고 하니 하사관이라도 되어 열심히 군복무를 하라는 격려까지 받으며 작은 체구에도 불구히고 우여곡절끝에 하사관 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강원도 원주 1군 보병하사관 학교 75기 후보생 시절(학교장 오창보 대령), 당시 대대장 백호준 소령?께서 졸업때 쯤 그동안 내가 공들여 지어놓은 하사관 학교 기념관을 관리하는 관리하사관으로 학교에 남을 것을 지시 받았을 때 나는 서울과 너무 먼 원주가 싫어 거부의사를 밝혔더니 \"이 놈 참 군생활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놈\"이라는 핀잔을 들어가며 전방으로 가겠다고 고사하여 26사단 76연대 8중대?(송추 쪽과 사기동 김신조 루트 잠복 중대)로 배속 받아 소대 분대장을 잠시하다 선임 작전계(일반하사)가 제대하자 중대장의 부름을 받아 중대본부 교육,작전계 및 본부내무반장을 맡아 생활했었다.

자그마한 외모를 지닌 내가 하사를 달고 처음 분대장으로 부임했을때, 일병으로서 분대 아니 중대 내 제일 고참이었고 위험인물이였던 32세 남한산성을 거쳐 온 제대 얼마 남겨놓지 않은 제주 출신의 고참을 처음 대면할때 덩치는 크나 그의 악의없는 얼굴과 양순하고 온순한 자세로 보아 싸움꾼이나 사고자가 될수없는 인물인데 어쩌다 사고자가 되었는지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김일병은 의식적으로 분쟁의 장소를 피하고 나와도 대화를 하지 않으려 했고 눈맞춤도 피하려 했던 그가 내게 도전한 것은 당시 소총중대들의 분위기가 그랬듯이 병들의 신삥하사 길들이기에 누군가의 부추김에 총대를 멘듯 하였다.

전입간지 얼마 안되어 북노고산 산악 돌격훈련(아마도 1군 훈련이나 또는 전군 훈련 아주 큰 훈련이었다.) 분대 텐트속에서 였다. 분대텐트에서 분대원들과 휴식들을 취하고 있는데 그 김일병이 내게 다가와...

\"어이 박하사 나하고 이야기좀 해\"하며 반말조로 명령을하는데...

\".........?????\"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안 나는 기가 막혀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앙물고 독이 서서히 오르기를 기다렸다.

준비를 하고 일어나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니 김일병이 선수를 치고 나오는 것이다.

\"야 이 세끼야 뭘 쳐다봐!\"

하며 주먹이 날아오는 것이다. 그는 내 바램대로 싸움꾼이나 운동을 한 친구가 아니었다. 덩치만 크고 망나니기질만 있었지 그는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피하며 그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 엎드린 자세의 김일병에게 무릅으로 명치를 가격하니 그는 맥없이 자빠져 나뒹굴어졌고 분대원들이 일어나 일부는 밖으로 나가 망을 보는 분대원도 있었고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우왕좌왕이다.

나는 발동이 걸린 것이었다. 여세를 몰아 김일병 옆구리를 워커발로 걷어찼더니 \"욱\"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고 있는 그를 더 걷어챠려 할때 분대원들이 몰려들어 나를 감싸안고 참으시라며 구석으로 떼여놨다.

분도 안 풀렸지만 옆에있던 야전삽을 들고 김일병 등짝을 내려쳤고 다시 곡괭이로 만들어 등짝을 찍을 요량으로 야전삽을 들고 온 중대 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너 오늘 임자 잘 만났어. 임마! 사람 잘 보고 골라야지. 오늘로 너와 함께 나도 남한산성간다\"

분대원들이 펄펄뛰는 나를 에워싸고 장교들 다 듯는다며 내 입을 막고 김일병을 데리고 나가고 난리 법섞을 떨고 말도 아니였다.

분이 안 풀린 나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를 데리고 오라하니 또 사고를 칠가봐 눈치를 보는 분대원들을 뿌리치고 찾아 나가려 하니 분대원들이 나를 붙잡고 풀죽은 김일병을 데리고 왔다. 그는 들어오자 마자 내 앞에 무릅꿇고 잘못햇다고 사과를 하는 것이다.

나는 싸움에서 상대를 죽일 수도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군사교육에서도 비슷한 교육을 받아 마음만 먹는다면 싸릿가지라도 가지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경지에 있었다.

 

그를 한참 노려보며 분을 삭인 나는 그와 마주 무릅을 꿇고 \"어떤 이유인지는 묻지 않겠지만 나이도 생각하여 얼마 남지 않은 군생활을 마치고 가족들에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를 위로해 주었더니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며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그를 앉혀두고 밖으로 나와 홀로 먼 하늘을 바라다 본 일이 있었다.

그렇게 신삥 하사 분대장 신고식?을 치룬 그날 소대장, 중대장들은 물론 전 중대원이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사고자와의 일이라는 것과 결과가 잘 해결된 것으로 쉬쉬하고 묻혀 두고 지나갔다. 물론 그 후론 중대내에서 나에대한 예우가 반듯했으며 하사생활에 지장없이 지내게 된 추억도 있다. 아마도 이 일로 훗날 중대본부 내무반장 겸 작전계를 맡을 수 있었던 계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김일병은 얼마 후 제대를 할때 내 손을 잡고 고맙다며 제주도에 오시면 꼭 연락하라고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주고 그렇게 떠났다.

나는 그 후로도 분대나 중대에서나 나를 겨냥하거나 전체에 해가 되는 일만 아니면 일대 일로 계습장 떼고 웃통벗고 한 2번 일을 치룬적은 있으나 전체 기합이나 폭행등은 한번도 행하지 않았었다.

특히 중대본부 내무반장 시절엔 나 보다 나이가 훨신 많은 사고자(28세~32세)들과 마음을 나누고 많은 사랑을 주었고 그들 일부도 무사히 제대시키면서 연대에 온 사고자들을 우리 중대로 많이 보내와 사고자 전문중대라 불평하던 중대원들도 있었으나 내 주위는 사고자들이 나를 보호하듯 든든한 힘이 되어 있었고 나름대로 뿌뜻했던 일들이기도 했었다.

그렇게 생활하던 차에 3소대 부소대장과 사고자 문제로 큰 충돌이 있었고 기왕에 힘들게 고생 할 군대라면 차라리 월남의 전쟁터에 가서 죽더라도 가족들에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과 어쩌면 꿈과 현실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가슴속의 멍들로 생활에 지친 내 모습이 싫었고 삶의 뚜렸한 비전이 없어 삶을 포기 하고 싶었던 잠재의식도 한 몫을 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살아 돌아오기보단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어 가족들에게 집안을 일으키는 힘이 되겠다는 의지가 더욱 작용했던 것 같았다.

일명 용산깡패 성구용과 작전 후 만나 반가움에...

 

정글에 갈갈이 찢겨진 첨병복장과 일반 참전자들과 복장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이 사진을 보며

다시한 번 느끼게 한다.

성구용일병은 당시 26~7세로 나이가 많았었다.

성구용이 송추 사기동에 있던 우리 중대로 전입을 와서 본부 이발병으로 보낸 것이 발단이 되어

3소대 부소대장(중사) 과 마찰이 일어 월남가는 계기가 되었었는데

내가 월남으로 간 후 중대본부 인사계를 비롯 본부요원들 거의가 월남으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유는 내가 월남행을 택한 계기의 원인이었던 3소대 부소대장이 민간인 인명사고를 낸 관계로

중대장이 문책을 받아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야했고

온 중대가 쑥밭이 되어 본부요원들 대부분이 월남으로 왔다는 가슴아픈 사연을 알게되었다.


이름은 잊었지만 아직도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3소대 부소대장은

경상도 출신으로 덩치가 산만했으며 술을 입에 댓다하면 3박4일을 마시고 다녀

나는 그를 3박4일이라 칭하기도 했다. 술을 마실땐 중대 내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하였고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나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그는 술을 안 마실땐 참으로 순박했고 선한 하사관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군복을 벗고 사회 민간 형무소로 가야했다고 들었다...


그 사건으로 중대장 입장을 난처하게 했던 나는 아껴주시고 형님 같았던 중대장에게 죽으려고 작정하며 살아가야하는 서글펐던 내 인생을 마무리 하려 월남으로 보내달라 졸라서 월남전쟁에 참전하는 길을 택하게 된 참으로 요령없고 앞 뒤 계산없고 고지식하던 쌩뚱맞던 하사관이었나보다.

 

그렇게 3년의 군 생활도 1년여를 남기고 강원도 오음리에서 월남 적응훈련을 마치고 머리카락, 손 발톱을 잘라 봉투에 넣으니 죽기를 작정하고 떠나는 길이지만 나의 이 분신들을 가족들이 받을땐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겠구나 하는 허무하고 참담하면서도 특히 하나 밖에 안 남은 나의 형님께 월남 전장으로 간다는 통지도 안보내고 떠나는 입장에서 나까지 저 세상으로 가면 무척이나 외로울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리기도 했다.

선발대로 차출된 나와 일부 인원이 춘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환송식을 하는데 차창밖을 내다 보니 어떤 전우들은 어찌 알았는지 가족들이 나와 이름을 부르며 서로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을 보며 형님 한 분과 누님 가족이 계시지만 참전 자체를 알리지 않았으니 찾아 올리 만무하건만 그래도 혹시 하며 두리번 거리던 내 모습이 처량해 보일 것 같아 눈물을 머금으며 그렇게 청량리역 용산역을 거쳐 아마도 새벽 2~3시경 부산항 제3부두에 도착했다.

 

 

바다구경 이라곤 진흙과 뻘밭인 인천 앞바다만 어릴때 두어번 소풍 가보았을 뿐이고 역과 부두는 당연히 멀리 떨어져 있을것이란 선입견 때문에 3부두에서 내려 앞쪽 무지 커다란 건물쪽으로 일렬로 향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월남까지 타고 갈 수송선이라는 것은 배 앞에 다다라서 배와 연결되어있는 출렁대는 연결다리를 밟고서야 어찔한 느낌과 동시에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열차가 부두까지 들어 올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당시의 내 상식으로는 아니 내 상상력으로는 너무 먼, 큰 배에 넋이 나갈 정도였다.

그 배는 미국 수송선 바레트호로서 25,000t급이라 했다. 우리 26제대 육, 해, 공, 해병대 등 본대들이 다 타면 2,000여명이 탄다고 하니 2,000여명이면 사단 병력인데 입이 벌어질밖에...

나는 배식조 조장을 맞았는데 배식조는 10명 정도로 기억되며 후미 선실 한 칸에 배치되어 미군과 통역관의 식당 관리 및 배식 요령을 익히고 식당입구에서 배식 관리를 하는 한편 우리 선실 관리까지 맡게 되었다.

가정이 없이 지내오던 나였지만 서울토박이인 나인지라 친구들 선배들 덕에 상류들의 집들도 호텔도 다녀 보았지만 이 큰 배는 호텔도 상류층 집들도 나의 짧은 상식을 모조리 부셔버리기에 충분했었다.

많은 환송객들이 부산을 출발하는 우리들을 향해 태극기며 손수건이며 맨손을 흔들며 울부짖는 모습들을 식당 선창으로 내다보며 고국땅과 마지막이랄 수 있는 환송객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고 가족들, 친구들, 떠오르는 지난 기억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메어 숨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전장으로 향하는 병사들의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맡은 임무를 수행하려 애를 쓰며 많은 전우들이 서울구경도 제대로 못한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수송선 내의 모든 시설들이나 식품들에 전우들의 놀람은 나 못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니 \"너희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속의 신사 한국군임을 항상 명심하라\"던 어느 지휘관의 말씀이 생각나 전우들에겐 뭐 별스럽지도 않은 뜻 우리들 임무에 충실하고 미국사람들에 망신 당할 일들을 하지 말자고 독려하며 배식조의 임무를 시작하였다.

식당은 후미쪽에 자리하였는데 지금 기억으로 한번에 약 2백여명 정도가 사용할 정도가 아니었나 싶고 캘리포니아산 쌀이였는데 밥맛은 우리쌀이랑 별다른 차이가 없었고 그 쌀을 아래층의 취사실에서 앃은 쌀을 얕은 사각쟁반그릇에 적당량 넣어 층층으로 된 큰 가마니 칸에 넣어 증기로 쪄대며 엘리베이터로 올려 보내면 우리들은 그 것을 배식하면 되는 것이었다.

고기며 각종 고급으로 된 부식과 후식으로 나오는 사과와 과일들과 아이스크림이 있었는데 당시 아이스크림은 서울에서도 구경도 하지 못하던 요즘 많이 보는 일회용 그릇에 담겨있어 그릇 속에 달려있는 나무스픈으로 퍼먹는 아주 맛있는 후식이였다.

그리고 식당 한켠에는 커다란 스테인레스 보온통에 커피가 담겨있어 식 후에 던져도 잘 깨어지지 않는 누런 플라스틱 머그컵을 들고 보온통 아래의 배출구에 컵을 들이 밀면 받아지는데 우리네와 비교하면 식 후 숭늉을 마시 듯 그들이 준비해 놓은 커피맛은 설탕도 타지 않은 밋밋한 아주 밍밍한 블랙이었으며 나 뿐만 아니라 다방 커피맛에 익숙해서인지 우리 전우들 입에 그리 맞지 않았으나 그래도 미국사람 흉내라도 내듯 주위에서 폼잡고 마시는 전우들도 있었다.

일반 전우들이 아침을 먹으면 바로 줄 끝에 서야 점심을 먹고 바로 또 다시 줄을 서야 저녘을 먹을 수 있고 저녘을 마치고 나서야 청소를 하고 내무검열이 끝나야 휴식을 할 수 있는 그런 하루하루가 지속되었다.

삼일정도 지나서부터 바다는 어느덧 망망대해... 먼 바다여서 인지 배에서 버리는 음식물을 쫒아다니던 갈매기들도 안보인다. 바다에선 날치란 놈들이 우리배와 떼를지어 경주를 하듯 바다위를 제비처럼 날렵하게 날아간다. 어느땐 돌고래들도 나타나 같이 경주를 한다.

한국에선 감히 쳐다보기 힘든 음식들이 모자라서 쩔쩔 매기도 했는데 음식이 점점 적게 올라 오는 것아다. 취사장으로 달려가 항의했더니 그것도 남아 였다.

아닌게 아니라 식사하러 오는 전우들도 줄어들고 적어진 양도 점점 남아 바다에 버리곤 해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데 파도의 롤링으로 배멀미를 한다는 것이다. 식사량 조절은 그 동안의 참전자들을 수송한 결과이리라.

우선 이 수송선의 화장실을 소개하자면 약20m정도의 넓은 사각 공간에 벽쪽으로 쭉 칸이 나뉘어져 있고 그 칸안에 양변기가 있고 양 옆에는 잡을 수 있는 손잡이가 달려있고 한국에선 중 상류층 집에서나 쓰는 화장지(요즘 우리가 쓰는 제일 싼 누런 화장지)가 있고 문이 없이 개방되어 있어 볼일을 보는 광경이 다 보인다.

처음 화장실을 갔을땐 옆칸은 안 보이지만 앞쪽은 서로 마주보며 멎적은 웃음과 고개를 숙이고 볼 일들을 보는 낮선 환경에서 민망스러워 볼 일도 제데로 보기 힘들었다.

날이 갈수록 그런 민망스런 화장실이 만원이다. 바닥엔 토해낸 오물들과 그 위에 쓰러져있는 전우들, 변기위엔 나올 생각도 없이 손잡이를 잡고 힘없이 쳐진 전우들이 늘어만 가는 것이다.

화장실은 물론 선실 심지어 갑판에 까지 올라가 여기 저기서 쓰러지고 토를 하는 전우들이 눈에 뛰게 늘어나는 것이다. 거기다가 화장지까지 바닥이 났는데 화장지 공급이 안된다.(사단 보충대에서 관물검사시 각자들의 따블백에서 수송선 화장지들이 쏟아지는데 그제서야 화장지 보급을 안해주던 사정을 알수 있었음.) 아주 심한 전우들은 기절을 하고 의무실까지 가는 전우들도 있다했다.

나는 다른 전우들 보단 멀미가 늦게 왔고 심하지도 않았다. 세계에서 수심이 제일 깊다는 필리핀 해협이란다. 이곳은 롤링(좌 우로 흔들리는 현상)이 문제가 아니라 피칭(앞 뒤로 흔들리는 현상)을 한단다.

누군가가 배가 바다로 들어 간다며 나를 갑판으로 불러내여 달려가 보았다.



배 앞쪽에 어마어마한 파도가 보이는데 높이가 100여m가 넘어 보인다. 우리가 탄 배가 그 시퍼렇다 못해 검은 물속을 향해 달려가고있었다. 아니 배가 바닷물로 잠수하려 다이빙 하는것 같았다.

우리들은 선실문쪽으로 달려가 문을 잡고 있다 물속에 들어감과 동시에 선실문을 닿고 있다 찰~썩 하는 배를 뒤덮는 파도소리를 듣고 다시 문을 열고 갑판으로 달려 나가면 배는 비행기로 변한듯 바닷물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밑의 바닷물은 점점 멀어지고 바닷물은 보이질 않는다. 그러다 다시 높은 산보다 더 큰 물산이 나타나고 배는 그 물산을 향해 또 달려간다.

나는 그 때 비로서 어지러움증과 구토증세가 나타났으며 하루인가 이틀을 쩔쩔 매던 기억이 난다.

배 앞쪽 선실은 육군을 비롯 많은 인원의 부대가 차지하고 후미 선실은 해병대와 선발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식당 입구가 두 줄로 되어있어 서로 엉키며 해병대와 육군 그리고 공수부대 등이 배식에 있어서 서로 보이지 않는 기싸움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해병대와 공수부대를 한쪽줄을 전용으로 주고 나머지는 육군이 사용하게끔 사고를 막아 보고자 양해를 받아내 그런대로 문제없이 배식은 진행되었었다.

그런데 하루는 배식이 끝나고 식당 및 선실점검을 준비하는데 우리 조원들이 선실로가다 해병대에게 맞았다는 보고를 받고 화가 치밀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보니 해병대원들이 마포걸래 자루를 잡고 턱을 고이고 마치 동네 건달들이 동네 어귀서 먹잇감을 기다리듯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째려보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우리 배식조원들은 선실로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해병들의 관할 구역을 거쳐야 하는 찜찜함 때문에 나는 배식때 가끔 그들의 무뢰함을 눈감아 주기도 또 그들이 사과나 과일 등을 원하면 더 주기도 하며 그들과 불편함을 덜고자 노력했는데 우리 조원을 폭행했다는 보고를 받고 약이 바짝 올라 나의 살기어린 눈초리를 치켜뜨고 그들에게 다가깄다.

그리고 장교를 찾았으나 장교는 보이지 않았고 하사관 몇 명이 보였다. 병들을 비켜 하사관에게 다가가는 순간 병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주위를 보니 우리 조원들이 안 보인다. 엘리베이터 쪽을 쳐다보니 그 안에 몰려들있었다. 배신감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상황이 우리 조원들을 원망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하사관에게 다가가는 순간 한 해병병사가 \"어이 눈깔 없어\" 하며 반말찌거리와 함께 주먹이 날아왔다.

군은 달라도 병이 하사관에게 반말찌거리가 거슬리기도 했으나 거기에 휘말리면 끝이라는 직감에 나는 주먹을 피하며 제일 가깝게 있던 어느 하사관의 멱살을 움켜잡고 해병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 한 발짝만 움직이면 너의 하사관과 나는 월남가서 죽기전에 여기서 죽을 수도 있어 모두 움직이지마!\" 하며 해병 하사에게 한마디 또 던졌다.

\"너 나하고 여기서 죽지 않으려면 나와 단 둘이 갑핀에서 맞짱뜨자.\" 하였더니 자존심이 대단한 이 해병 하사는 따라붙는 해병 병사들에게 따라오지 말라며 내게 멱살을 잡힌채로 갑판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며 이 해병하사는 이미 내게 전의를 상실해
있음을 느꼈으며 잡은 멱살을 풀어주고 누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에 같이 가면서 이 배에 탄 모든 전우들에 배식을 하고 식당 및 선실 검열을 받기위해 너희들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우리들인데 왜 이런 불미스런 행동들을 하느냐, 우리 조원들이 잘못이 있다면 나에게 항의하던지 하지 않고 왜 폭행을 했느냐, 제대장에게 보고하랴는 등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니 이 해병하사가 폭행건에 대해 즉시 사과를 했고 뒤이어 그렇게 하게 된 이유를 설명을 하는데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이유인즉 서로가 잘 아는 담당 구역인데 청소중에도 누구던 지나갈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지내 왔었다는 것이고 그러나 보다 싶이 청소를 하는 꼴을 보고도 미안한 기색 전혀 없이 한 놈 눈치보다 뛰어 가고 조금있다 또 한놈 뛰어가고 청소하는 우리들을 약올리듯 튀어 나와 생쥐 지나가둣 하면 없던 성질도 나오게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다.

왜 떻떻하게 한데 모여 서로 인사하고 한번에 지나가면 서로 오해도 없고 성질 날 이유도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인데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었다.

그는 이어서 지금도 보라는 것이다. 저네들 조장이 혼자 봉변을 당하는데 어느 한놈도 나서서 협조하는놈 하나도 없질 않느냐며 육군은 그렇게 단합이 안 되느냐는 말은 나를 더 궁지로 몰아대는 결정적 한 마디였다.

그렇게 갑판에서 옥신각신 하는 동안에도 육군들은 코빽이도 안 보였지만 선실문을 잡고 여차하면 내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던 해병들은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의리와 명분을 중시 하는 것 같았다. 그런 해병들이 내 마음에 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해병들은 지원병으로 육군보다는 대부분 나이가 어린 편이다. 나보다 서 너살 적었던 그 해병 하사와 나는 그렇게 속마음을 서로 털어 놓고 그에게 월남에서의 분투와 무사귀환을 빌어주며 남은 기간동안 우리 배식조에게 협조를 약속 받고 그들과의 마찰을 수습 할 수 있었다.

 

부산항 출발 6~7일이 지나면서 부터 멀미도 참을수 있을 많큼 적응되었고 그렇게 저녘식사와 검열을 마치고 나면 할 일들이 없던 참전자들은 무료함과 전쟁이라는 두려움에 벗어나렴인지 선실 구석 구석에선 \"섯다\"에 \"땡이다\" 소리들이 수령한 군표가 오가며 요란해진다,

그 와중에도 일부 참전자에 접근하여 안전한 부대 안전한 보직을 내 세워 돈을 요구하는 공판사자?가 내게도 은근 슬적 다가와 제의를 받았으나 지참한 금반지나 돈도 없었거니와 받은 군표로는 택도 없는 금액이라 부글거리는 가슴을 안고 씁씁한 가슴을 달래며 다낭항에 도착했다.

우리 26제대는 심한 파도로 인해 10여일만에 밤에 도착한 다낭항 외곽에 정박해 있었는데 멀리보이는 산에 팬텀기가 내려 꽂으며 폭격하는 장면과 폭음소리는 전쟁터에 왔음을 실감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전쟁이 어떤 것인가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이기도 하여 그 광경들을 나는 잊지 않으려 눈에 담아 두었었다.

이튿날 날이 밝아 선창으로 내다보니 멀리 커다란 병원선이 보이고 팬텀기는 계속 내려 꽂고 있었으며 포성은 잔잔히 들리고 있었다.

다낭에서 해병들의 교대가 이루어지고 퀴논항에 들려서 맹호들이 교대하고 다시 출항하여 출발 13일만에 나트랑에 도착했다.

나트랑에서 내려 땅을 밟으니 그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배에서 분류된데로 길게 늘어선 GMC차량으로 이동 지정된 차량에 올라타니 장갑차가 캄보이하며 백마부대로 향하는데 월남의 공기속에서 울컥하는 비릿하고 비위상하는 냄세가 진동하며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그 냄새가 나를 자극 하기 시작했다.

그 냄새는 \"능막\"이라는 월남사람들의 전통음식 냄세라는 것이란다. 항아리 두개를 겹쳐 올리고 윗 항아리 밑 부분 가운데를 구명내서 올려 놓고 그 안에 생선들을 차곡차곡 앉혀놓고 그 생선들 위에 돌을 올려 눌러놓으면 생선이 썩고 삵혀져 아랫항아리로 떨어진 국물이 능막이란다. 어찌보면 우리나라 젓갈이랑 비슷한것 같은데 냄세와 색갈은 영 아니다였다.

나는 6.25때 미군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딜때 처음맡았다던 인분냄세가 한국의 첫 인상이였다는 어느 글을 본적이 있어 나는 이 \"능막\"냄세가 월남냄세라 생각했고 또 그렇게 불러왔었다.

나중 중대로 배속되어 도로정찰시 어느 가정집을 들여다 보는데 반갑다며 주는 음식을 받아 들었으나 이 냄세때문에 도저히 먹지 못하고 옆사람에게 넘겨준 일도 기억이 난다.

나트랑에서 사단으로 향하던 분위기는 위엄있는 장갑차와 한적한 정글길을 달릴때 주변을 위협사격하던 일을 빼면 평화스러움 그자체였다.

듣던대로 어느 논은 씨를 뿌리고 어느 논은 푸르게 다 자라있었고 어느 논은 다 베어 거둬들이고 있어 전쟁만 없으면 참으로 살기좋은 나라겠구나 생각하였다.

그렇게 긴 여정의 파도를 헤치고 백마 사단에 도착하여 보충대 막사에 들어서니 꼭 한국에선 임시 막사모양 벽도 바르지 않고 판대기를 공기가 통하도록 가로로 바람이 통하도록 비슷하게 올려 지은 막사같지도 않은 판자집 같은 너무 허술한 임시 막사같은 건물에 의아했었고 높은 천장엔 천천히 돌아가는 선풍기가 달려있었다.


사진은 작전 철수 후 갈가리 찢긴 전투복을 갈아입기 전 특유의 연대 막사옆에서 목을 추기고 있는 말뚝첨병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우리 한국에선 산속에 가서나 볼 수 있는 손가락 만한 도마뱀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천정이고 벽으로 돌아다니는데 뱀을 제일 싫어하는 나로서는 잠자리에 내게 떨어지지나 않을까 소스라치기도 잠을 설치기도했다.

월남 교육 받을때 월남인들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은 일부는 월남군속이고 일부는 베트콩으로 구성되어 있다했다. 전쟁중에 살아남으려는 방편일수 있겠으나 안보의식으로 철저했던 우리들로서는 이해가 가지않는 대목이며 월남인들을 이중적 잣대로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었다.

그렇게 점차 모든 환경에 적응을하며 월남 신병?교욱을 받는 동안에도 인사카드를 뒤져 대상자(군 입영 신체검사시 IQ 152를 받아 기록카드에 특A라는 굵고 큰 뻘건 도장이 찍혀있었다. 나는 초등학생 수준의 이 검사를 대수롭지도 않게 생각했었으며 전부 맞었으리라 생각해 20분도 안된 시간에 제일 먼저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왔었다. 그러나 5점짜리 마지막 문제와 2점?인가 3점짜리 이 두 문제가 틀린것을 알았다.)를 가려낸 공판사자는 학벌도 좀 되는 이 서울놈에게 어김없이 찾아왔었으나 가진 것이 없었던 나에게 실망을 안고 돌아섰었으리라.

나는 이 전쟁에서 전사를 한다해도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는 형제와 조카들에 도움이 되어 주리라는 참전 결정을 했던 당시의 마음을 다잡으며 1대대 4중대로 배치를 받아 도착하였다.

중대는 반닌 마을 북쪽 1~2km쯤 지난 1번도로 바로 우측에 자리하였으며 입구 우측엔 공영토건이 각종 건설장비와 몇채의 건물들과 함께 넓게 자리했고 조금 더 들어가니 좌측엔 포대가 있었고 작은 동산을 3중 철조망으로 감싸 않고 봉우리엔 태국기와 월남기가 펄럭이며 중대 OP가 자리잡고 있었다.

 

반닌지역 4중대 전술기지 위치

 

 

2소대는 동남쪽 바다를 향해 위치해 있었다.

보는 사진과 달리 고요한 바다만 보였을 뿐 섬이나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밤에는 수평선으로 불빛이 수평선을 이우었으나 고깃배 불빛으로만 알고 있었다.

 

 

반닌지역

 

반닌지역

 

4중대 전술기지 위치

 

1번 도로상에서 바라본 4중대 자리. 정상 우측 숲이있는곳이 포대자리. 2008년 1월 현재모습. 최진현 전우 촬영.

 

4중대 자리에서 바라본 1번도로 건너편의 풍경. 2010년 2월 현재모습. 최진현 전우 촬영.

 

입구같은데 세월이 흘러선가 나무가 없었는데... 2010년 2월 4중대 자리의 현재모습.

 

 

4중대 정상 OP자리. 2010년 2월 현재모습.

 

4중대 헬기장 터? 당시에는 연못을 본 기억이 없는데... 2010년 2월

 

2소대 우리분대 벙커가 위치하던 곳 같은 낯익은 경관. 2010년 2월

 

우리분대 막사는 중대기지에서 동남쪽에 위치해 있어 멀리 바다가 보이는데 육안으론 잘 안 보이지만 밤이되면 앞 바다 멀리 큰 도시가 있는 것 같이 수평선위에 길게 떠있는 불빛들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물었더니 고기잡이배들이라 하여 그렇게만 알고 지냈었다.

그렇게 4중대 2소대 분대장 보직을 받고 몇일 지나지 않아 우리 중대 또는 일부 병력이 캄보디아로 들어갈 것이라며 그쪽은 정말 위험하다는 정보와 함깨 분대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나 나로서는 확인되지 않는 정보라서 다음소식을 기다리며 중대 분위기 파악에 노력했다,

그런던 중 내가 중대본부 선임하사로 갈 것이라는 소문과 중대 본부 내 고참 행정병들의 반발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별스런 소문들이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중대내를 흘러다녔는데 26사단 75연대시절 00중대 교육, 작전계를 보던 내 경우처럼 한국에서건 월남에서건 중대 행정반에 일반하사 TO는 없다. 하지만 중대장의 판단과 구성원(중대 내 장교)들의 요청에 따라 일반하사가 간혹 있기는 했다.

중대 행정반 병사들은 자신들 보다 윗 계급인 하사가 온다면 달가와 하지 않는다는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고 더우기 나는 어느 누구에게 부탁할 사람도 없었고 부탁한 적도 없어 남의 일인양 넘겨 버렸는데 본부 행정병들의 반발 노력이었는지 시간이 갈 수록 그 이야기는 묻혀버렸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인해 4중대에 있던 월남 생활에, 내 인생에 치명적인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짐작도 못하였고 오늘날 이 나이에 이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될 줄도...

당시 작전 나가기 전 중대장이하 중대원들이 OP근처에서 캔맥주와 과일 등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武運長久를 비는 고사? 비슷하게 의식을 치룬다. 이때 돼지고기를 먹어보게 되는데 맛이 잊혀지지않을 정도로 일미여서 돼지고기맛이 그보다 좋을수 없었다. 월남에서 소고기는 왜 그리 맛이 없는지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돼지고기 맛은 세상에서 제일 맛이 있었다.

아마도 기후탓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월남 물소고기가 맛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월남에서 소고기와 돼지고기값은 우리나라와 반대로 소고기는 쳐다보지도 않지만 돼지고기값이 몇배는 더 비쌌다.

작전병력은 기지방어병력과 작전병력으로 나뉘는데 말년 귀국대기자, 환자 등 열외받을 병력을 제외한 일개소대 20/1 즉 절반만 작전인원이고 나머지 병력은 기지에 남아 기지방어 및 귀환대비 음식장만을 하기도 한다.

*참고 : 전투병 군장

개인화기 M16 1정,
실탄 300발,
탄창 20개,
탄창집,
탄띠,
대검,
철모,
화이바,
수류탄 4발,
크레모어(격발기,전선) 2발,
수통 5개(기지 주변에선 1~2개),
정글도(첨병),
나침반,
작전지도,
연막탄,
조명탄,
방독면,
야전삽,
베낭,
모포,
판초우의,
모기약 2개,
정글화,
유탄발사기(사수),
로켓포 무반동총 신형(사수), 베트콩들은 B-40(적탄통, RPG)을 휴대
무전기(무전병),
방탄조끼(장거리 또는 장기작전에는 미착용),
A급 작업복 1벌(장기작전시),
전투식량(C-RATION) 3일분(3일마다 헬기를 통해 재공급 받음, 식량 또는 소요한 양 많큼의 장비들과 더불어 고향소식과 애인소식, 위문편지들과 함께..).
등등.. 무게 약 40Kg 정도.

나는 4중대로 배속받고 바로 큰 작전에 첫 투입되었는데 연대 연병장인지에 집결하여 더위때문인지 아니면 작전상 빠른 수송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양쪽 문을 다 떼어낸 대기중인 헬기는 조종사 부종종사 양쪽 기관총 사수 총 4명과 완전 전투군장를 한 우리대원들 6명이 타는데 탑승요령은 고국에서 이미 군자산 헬기작전에서 익혔으나 UH1기는 뒷 꼬리날개를 피해 앞 측면으로 탑승을 하고 시누크는 반대로 앞 프로펠러를 피해 뒷쪽 문으로 탑승하는것이 헬기탑승 안전요령이다.

탑승을 하고서는 헬기의 구조상 윗부분은 전선 및 헬기의 주요 부분들이 배치되어 있어 오발 사고 등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총구를 밑으로 향하게 세워총을 하고 얕게 날아가는 양쪽문이 없는 헬기에서 발아래 펼쳐진 마을과 산들을 지날때의 상쾌함과 원심력때문인지 헬기가 45도 이상으로 급선회를 해도 땅으로 쓸려내려가지 않는것이 신기하고 스릴이 있었다.

랜딩지점은 작전 전날 팬텀기가 와서 랜딩지점에 집중 포격을 가해 나무나 수풀 등을 제거하며 주위의 적들을 이미 겁을 주고 산뜻하게 지점을 정리하였다는데 랜딩지점에 도착하니 투입병력들의 안전한 랜딩을 위해 2~300m 거리를 두고 날렵한 건쉽 2대가 마주돌며 랜딩지점 주위를 무차별 사격을 해대고 있었다.

먼저 도착하여 사주경계를 위해 각기 자신들의 위치로 산개하기 위해 뛰어가는 전우들이 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모습이 든든해 보였다. 우리조도 무사히 랜딩하여 내리자 마자 헬기는 기겁을 하듯 떠올라 사라지고 다른 뒷조들의 헬기들이 도착하고 우리의 위치를 찾아 뛰어가며 사주경계를 하는데 아무생각 없었고 눈을 반짝거리며 오로지 적을 찾아 필살의 의지밖에 없고 전장에 온 것을 몸으로 정신으로 전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사주경계를 하며 마주돌며 연신 사격을 해대는 건쉽을 바다보니 로켓을 발사했는지 헬기가 멈칫 제자리에 서더니 포탄이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있었다.

산속 정글에 들어서니 영화 \"정글의 왕자\"에서 보듯한 풍경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두려움 속에서도 신기스러움이었고 더운 나라에서 물문제가 큰 문제였는데 산에서 흘러내리는 골짜기 계곡물은 우리나라와 같이 맑고 깨끗한 물이 아니라 쌀 뜬물처럼 희뿌연 아주 탁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물을 보면서 머리에 스치는 생각은 작전지에서 물을 함부로 먹지말라던 교육내용이 생각이 났고 베트콩들이 약을 풀어 놓은 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고참 분대원중 누군가가 물을 가리키며 산삼 등 각종 나무 뿌리, 낙엽들이 썪은 물이 씻겨 내려오는 아주 좋은 물이라 일러주어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목이 타도 웅덩이 물이나 정글 속 마을의 물들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물들로 마시는 것은 금물이었다.

작전지역에선 음성이던 발소리던 모든 소리는 금기다 모든게 첨병부터 끝까지 약속된 수화로 지시나 대화를 한다.

가끔 도로경계를 나설때 일부 분대원이 한국군 상급부대원들이 팔아먹은 C레이션을 사먹는 현실이 그들에게 창피스럽게 여겨졌지만 C레이션을 사먹는 분대원들을 나무랄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월남인들에게 우리들이 굼주려서가 아니라 당신들을 도우려는 의도란걸 보여주려 빡빡콩(완두콩과 햄으로 만든 캔), 등 우리들이 목이메어 잘 먹지않는 C레이션들을 그들에게 선물 하곤 했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고맙다며 인사하며 받아서는 바로 진열대에 올려 놓는 것을 보곤 당혹감에 젖기도 했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런 괴리들을 보고 느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희들을 지켜주러 온 우리에게 가끔 손짓 발짓으로 분단된 너희나라나 지키라며 따이한 고홈을 이야기 하는 월남인들을 볼때 예의도 없고 안보의식이 낮은 민족이라 생각했었다.

 

당시 월남의 대중교통수단 총아였던 람부레타,

뒤에 보이는 가옥들은 외벽만 있을뿐 내부 벽이 없고 침낭이나 나무로 깐 방들을 둘러싼 천들이 칸을 나누고 있다.

 

다일란지역으로 기억되는데 중대병력이 철도와 찻길이 교차하는 마을 외곽에서 도로경계에 임하고 있을때 C레이션 박스로 지은 허름한 집에서 한 여성이 나와 우리들을 쳐다보며 두리번 거리고 있어 우리들은 긴장을 하며 그 여성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마을 밖 산쪽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혹시 베트콩에게 연락을 취하러 가는것인지도 몰라 숨죽이며 그녀를 주시하는데 그녀는 10여m쯤 가서 1m정도의 싸리가지 같은 나무 뒤로 가서 다시 우리들을 둘러보더니 아랫도리를 겉어올리고 볼일을 보는데 가는 나뭇가지 사이로 보일것이 다보이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수치심도 못느끼는지 그렇게 보여줄거 다 보여주고 일어나 나오는데 우리들은 그녀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돌아서서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못해 서로 진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녀를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제집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지나서 나는 분대원 몇명과 함께 C레이션 박스로 지은 그녀의 집으로 가서 집을 살펴보는데 그들의 가족들은 15평 정도되는 가옥 안은 칸막이가 하나도 없이 횡하고 해먹(달아매는 그물 침대)이 2층으로 몇개 걸려있었고 한쪽에는 2층으로 널판지가 깔려있었다.

문 바로 옆에는 불이 짚혀져 있는 주위에 돌 서너개 위에 솥이 올려있고 널려있는 주방기구들로 보아 표현하자면 열린 주방인 듯 식사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집안은 연기로 가득하고 나이 많아보이는 중년여성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을 다 보여준 여성과 함께 안고 있는 갖난아이 둘을 비롯해 년년 층층으로 아이들 10여명이 바글바글하며 장정 또는 어른 남성이라곤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예측건데 시어머니와 며느리 아님 딸과 어머니가 분명한 듯 한데 두 여성이 같이 아이들을 생산하여 같이 돌보고 있는것으로 추측했다. 월남 가옥들을 들여다 보면 청년들이나 장년들은 보이질 않고 남성이라야 노인들 뿐이었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집안도 민병대 아님 월남군 또는 베트콩으로 활약을 하기에 남성들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젊은 여인은 우리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신의 할 일만 열심히 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고 중년 여인은 반갑다며 좋아하며 맞이하며 찻잔에 차를 끓여 거네 주는데 그 찻잔은 예쁜 도자기 잣잔인데 겉이나 속은 더 이상 금갈 곳이 없어보이도록 금이 나 있었고 금간 틈사이로 새까맣게 때가 끼어있어 찻잔을 받고 비위가 약한 나는 처리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분대원 한 명은 거부감 없이 마시고는 입맛에 맞는 듯 눈짓으로 나도 마실것을 권했으나 거부하기도 미안해서 웃는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혀로 살짝 맛만 보니 홍차맛이었다. 나는 배낭에 있던 C레이션 설탕을 꺼내 타서 중년 여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넘겨주었더니 아이들은 좋아라하며 넙죽 받아 마셔서 위기를 모면하였고 껌 등 과자 몇개와 통조림을 선물로 주면서 그들에게 슬며시 화장실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들은 집안에 화장실이 없으며 집 주위 모두가 화장실이란다.

그들은 화장실은 집안에 냄새가 나지만 자기들은 그런 냄새가 없다고 항변한다. 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우리위치로 와서 그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들의 밥먹는 모습은 거무죽죽한 비릿하고 내겐 역겨운 냄새지만 그들에겐 없어서는 안될 그들의 조미료이며 우리의 젖갈과 같은 전통 음식인 능막에 말은 조그만 사발을 들고 긴 젖가락으로 표정없이 둥둥 떠다니는 풀기없는 월남쌀을 하나씩 세어가며 먹고 또 먹는 듯한 모습이 안스럽기까지했다.

나는 한국군에 대한 월남인들의 생각은 어떠한지가 궁금하였다. 당시 한국이나 월남이나 경제수준이 우리가 조금 앞섰거나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생활상을 접했을땐 C레이션 박스로 집을 지은 50년대 6.25당시 우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수준의 월남사람들의 생활상을 보며 우리보단 조금 떨어진 그들을 느낄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의 식사시간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그들 여성들은 또다시 불을 짚혀 음식장만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곤 어느 분대원이 재들은 하루종일 먹는일만 한다고 흉을 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기억을 더듬어 당시 경계지점을 구글에서 찾아 추정해 보았다.

당시는 사진처럼 큰마을이 아니었고 사진보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차량을 타고 이동하고 지정된 지점에서 임무를 마치면 다시 차량으로 돌아오기때문에

이렇게 멋진 해변이 있었는지 조차 몰랐었다.

 

 

당시 다일란 지역이 이렇게 아름다운 해변에 쌓여있는 지역인지 조차 몰랐었다.

 

 

당시 도로경계지역은 도로 좌측 산쪽을 경계임무를 맡았으며 이 사진처럼 호화로운 집들도

많은 집들도 없었으며 길가에 수십여채의 집들만 있었던 작은 촌에 불과했었다.

 

다일란 지역 전경 구글에서...


또 기억에 남는 것이 대정글 소정글 초원지대를 가리지 않고 헤메다가 큰 물이 흐르고 시야가 트인 경치좋은 대정글을 만나 전투 중이란 사실도 깜밖하고 잠시 이런 곳에 살면 좋겠다 하는 마음의 휴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치좋은 곳 초입에는 어김없이 부비츄렙들이 나타나고 움막이 있고 몬타냐족이라던지 베트콩들이 출현하니 물과 아름다움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느낄수 있기도 했다.

작전 중 정글에서 만나면 힘들게 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월남 붉개미떼들이다, TV속의 동물의 왕국에서와 같이 땅에 무리로 집을 짖고사는 아프리카의 붉개미와는 다르게 정글속 1M정도의 작은 초목 큰 잎사귀를 밑으로 돌돌 말아 그 안에 수천마리씩 때를 지어사는 월남 붉개미떼들을 M16에 착검을 하고 또는 정글도로 넝쿨들을 가지치기하며 정글을 헤쳐가며 길을 내어 전진해야 하는 우리 첨병조들에겐 무지막지한 복병이었다.

그 붉개미집을 건드리면 첨병은 물론 3번째로 다니는 나에게까지 온 몸에 달라붙어 물어뜯는 바람에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와 수건등으로 털어내면 온몸이 울긋불긋 물어뜯긴자국이 따겁고 쑤시기까지하는 고생을 당하기 일쑤였으나 그것도 요령이 생겨나 재빨리 알아차리고 붉개미집을 발견할 수 있는 요령까지 습득할 수 있었다.

정글속 나무잎사귀에 붙어사는 거머리도 있는데 우리나라 연못에 사는 거머리보다 굵고 큰 시커먼 거머리도 뚝뚝 떨어져 기겁을 하기도 했다.

월남의 전투 작전은 우리 한국 지형과 달리 정글의 특성상 횡대 작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지역이라 첨병, 부첨병, 첨병 분대장, 무전병, 소대장, 소대장 당번 등의 순서로 중대 전원이 한 걸음 내지 두 걸음의 차이로 일렬 종대로 따라 다니는 뱀꼬리 작전이였다.

말이 한 두 걸음이지 아주 빽빽한 소정글에서는 앞사람에 바짝 붙어가지 않으면 앞사람을 잃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첨병조는 위험 노출이 1순위여서 죽음의 순서 또한 1순위임은 다 아는바이지만 모든 참전자들은 죽음의 길을 피하고 싶은 것 또한 모두 마찬가지였다. 작전 전체의 효율성과 구성원들의 생과 사를 좌우하는 제일 중요한 보직이 첨병조이며 목숨을 내건 중대 길잡이며 총알받이인 것이기에 당시 우리 중대는 첨병 정하는 방법을 1소대 1분대가 첫 날 첫 번째로 시작하여 다음 날은 2분대 식으로 어찌보면 합리적이고 말성의 소지 없는 방법이였던 것 같았고 그렇게 작전에 임했었다.

그러다 2월인가의 나의 첫번째 대규모 작전 참전이었는데 첫날 오후 2~4시경인것 같았다. 정글을 수색하며 전진을 계속하며 따라가다 지도와 지형을 살펴보니 엉뚱한 곳으로 자꾸 가는 것이었다.

잠시 쉬어 가는 시간에 소대장인가 어느 지휘관에게 지도를 들이대며 섹터를 벗어나 옆 중대 섹터에 한참이나 들어와 있는 상황을 설명하며 내가 첨병조장을 자청하여 뒤로 다시 빠져 우리 섹터를 찾아 어느 지역에서 쉬고 있는데 바로 우리가 다녀왔던 지역에서 옆 중대들이 VC에 당한다는 무전을 접하며 마음속으로 나 자신과 우리 중대의 안전함에 감사하며 그 작전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으며 그 후 4중대는 내가 뛰는 작전은 도맡아 첨병분대장을 맡는 계기가 되었었다.

나는 산에 오르면 등고선이 보이고 지도를 보면 3차원 입체영상으로 지형이 투시되는 요즘 말로 걸어다니는 타고 난 네비게이션이었다. 절대음감같은 절대지형감각을 타고난듯 하다. 지도와 나침판만 있으면 우리산이건 정글이건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어느 순위에 있어도 죽을사람은 죽을 것이고 살사람은 살 것이란 죽기를 작정한 나의 생각 때문이었지 영웅심이나 또는 진급이나 영웅심이 아닌 순수한 마음에서 첨병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무도 별로 없는 우리 한국의 지형과는 너무 다른 하늘도 안 보이고 지형지물을 살필 수 없이 빽빽한 정글속에서 미숙한 독도법으론 어림도 없는 월남 정글속에서 엉뚱한 곳을 헤메는 첨병조가 불안하고 두렵기도 했고 내가 아는 일은 내 자신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이기도했다.




사진은 세계전사에 모습을 드러낸 한국군 고유의 중대전술기지로서

한국군전투력을 확보한 신개념의 중대기지이다. 해병에선 방석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쉽게도 4중대전술기지가 촬영된 사진이 없으나 개념이 같아 이 사진으로도 추억을 살리기에 충분하다.


나의 그러한 돌출 행동으로 하여금 우리 분대원들의 훈장타려 저런다는 볼멘 소리도 들었지만 분대장을 다른 분대원들에게 맡기는 것이 자존심들이 상했던지 나와 같이 첨병으로 동참하겠다고 분대원들도 나서 준 것이 얼마나 고맙고 자랑스러웠던지...

나의 고등학교 후배 동생의 친구라던 화랑 무공훈장의 월남 고참 정종수를 비롯하여 고영덕, 강유원, 무전병 등등.....

아마도 중대장(김장근 대위)은 이러한 나에 대한 고마운 속마음을 남들이 눈치 챘을 수도, 어쩌면 누군가에게 표출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일들로 인해 행정병들과 더불어 일부 하사관들에게 눈에 더 나는 행동이 되었던 것 같다.

월남의 대대급 또는 연대급 사단급 등 큰작전마다 첨병을 담당을 하였던 나는 우리중대 작전섹터(sector)를 검토하며 중대장의 지시를 받고 직선상의 도상 진로대로 다음 보급지점까지 전진하는데 한번은 첨병이 오라는 손짖을하기에 가보니 가시대나무 덩쿨위에서 출렁거리며 나갈길이 없다기에 지도를 펴보니 그곳은 낭떨어지였다.

하늘을 향해 곧게 벋은 우리나라 대나무와 달리 처음보는 덩쿨인데 이 풀은 대나무같이 속이 비고 겉은 딱딱한 대나무였다. 마디마다 억센 가시가 나있고 약지보다 가늘고 서로 꽤고 엉키여 있는 대나무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 대나무 덩쿨 때문에 추락하는 위기를 모면했으나 첨병들과 나는 덩쿨 사이로 보이는 까마득한 공중에서 대나무덩쿨에 발을 구르고 장난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회하여 다시 진로를 찾았으나 그렇게 첨병들은 베트콩의 총탄과 부비츄렙만이 무서운것이 아니었다. 부비츄렙은 마을 입구나 움막주변 또는 그들의 진입로에 설치를 하여 되도록이면 정글에서 발견되는 길은 피해야 하며 부득이 그 길을 택하게 될때는 베트콩의 저격병과 부비츄렙에 모든 신경을 써야했다.

우리중대는 아니었으나 어느 병사가 자신의 경험담을 소재로 정글에서 홀로 살아 돌아오는 방법을 듣게 되었는데 그 전우는 작전 중 아마도 소정글에서 휴식 중 잠시 졸았던지 깨어보니 주위에 전우들이 보이지를 않고 지도나 나침판 등 아무런 자료도 없이 낙오가 되었단다.

우리 한국군은 1번 도로를 끼고 배치되어 있다는 점과 도로가 해안가 가까이 있고 동쪽이라는 것을 생각해낸 그는 부대로 복귀하려 베트콩을 피해 홀로 갖은 고생을 하며 해를 쳐다 보며 방향을 정하고 무작정 산봉우리만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며 바다의 수펑선을 찾아 두리번 거리며 3일만에 기적같이 한국군 부대를 발견하고 부대로 복귀하게 되었단다.

그 후 그 전우는 작전은 뛰지 않고 각 부대를 돌며 안전교육을 하는 직책을 맡아 월남생활을 한 아주 뛰어난 전우도 있었다. 그 경험담을 우리중대까지 와서 전해주었을때 그 병사의 영리함에 감동했고 작전에서도 내겐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또 어는 병사는 진군중 잠시 휴식중 소변을 보러 정글숲을 향해 일을 보는데 정글속에서 부스럭 소리와 함께 삿갓쓴 베트콩이 정면에서 불쑥 나타나 기겁을 하며 M16을 움켜쥐며 안정장치를 풀면서 싱끗 웃었더니 베트콩도 따라웃더란다. 그는 침착하게 그를 마주보며 연발로 옮김과 동시에 그를 향해 사격하여 베트콩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소정글에선 한 발짝 앞에가는 전우를 놓치는 실수가 수없이 일어나기때문에 그런 장소에선 다음전우에게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뒷전우를 확인하며 앞으로 진군한다.

부비추렙들 중 사각 구덩이를 길이 약 50cm 깊이 55~70cm 정도 파서 뾰족한 대나무끝에 독을 묻혀 날카롭게 세밀하게 세워놓고 가는 풀, 대나무 등으로 얼기설기 엮고 흙으로 풀로 위장을 해 놓아 그위를 밣으면 대나무에 찔려 독이 온몸으로 퍼지게 만들어 놓았으나 그것들 대부분이 노련한 첨병들이라면 감지할수 있을 정도로 길보다 높다던가 길가운데 마른 풀이 덮혀있다던가 하는 티가 나기때문에 첨병들은 그 덮게를 치우고 까맣게 독이 묻은 뾰족한 대나무를 다들 볼수 있게 개방을 하여 다음전우에게 수화로 인지를 시키면서 앞으로 전진을 한다.

또한 길과 길사이에 인계줄을 양쪽 나무에 걸쳐 그 인계줄을 건드리면 터지는 수류탄이나 폭팔물을 설치한것도 전에는 건드린 사람이나 그 주위사람들이 살상을 당하였으나 우리때는 한국군의 전술을 익힌 그들이기에 건드린 사람보다는 5~6미터 후방 첨병분대장 부터 소대장 즉 지휘관이나 무전병 등 주요 인물들이 살상하게 설치를 하였으나 그것도 자신들도 다치지 않게 하기위해 나무가지가 부러져 있다던가 천조각이 붙어있다던가 하는 표지가 있어 충분히 발견할수 있어 피해를 막을수 있었고 대부분 대정글 즉 경치좋은 곳에 들어갈땐 꼭 감이 잡히는 그들의 주거하는 곳에는 꼭 설치가 되어있었다.

또한 정글에서 한국군이나 미군등이 사용한 C레이션 빈깡통을 발견하면 그것도 피해 우회하여야 한다. 한국사람들은 깡통을보면 걷어차는 습관을 인지한 베트콩들의 부비츄렙 설치구상이기 때문이라했다. 그러나 나는 깡통 부비츄렙은 보지를 못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월남작전에 대해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었으나 최근 참전전우들의 이야기나 수기를 볼때 나와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첨병과 뒤를 따르던 사람들과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참 잊었던 기억은 그들은 고량주라는 아주 독한 술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처럼 야간에 고성방가하는 사람, 술취해 헤메는 사람들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의아했고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보이지 않아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또 한 기억에 남는 것은 작전이 끝나고 집결제에 가까운 안전한 지점까지 다달했을 즈음 맑고 제법 넓은 개울이 나타나 잠시 쉬고있는데 어는 중사인가하는 전우가 수류탄으로 고기를 잡자는 제안을 하였고 그렁저렁 중대장 묵인하에 수류탄을 물속으로 투척을 했는데 물속이라선지 생각보다 터지는 소리가 약했으며 물이 약 5~6m는 솟구치는 것이었다. 물고기 몇마리 떧는데 한두발을 더 던지니 물고기가 하얗게 떠올랐었는데 그것을 건져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한번은 중대기지 근방 1번도로상에서 도로정찰을 나갔다가 한 300여m 쯤 높은 나무가지에 백로 2마리가 앉아있었는데 한 분대원이 맟춰보라는 충동질에 앉아쏴 자세로 M16을 조준하여 한발을 쏘았는데 두마리가 다 날아가더니 한 마리가 갑자기 땅으로 추락을 하는데 분대원들은 맟췄다며 박수를 쳐대며 그 황새를 두명이 가서 찿아와 보니 머리 뒤통수에 맞아 주둥이만 너덜거리고 있었다. 중대내에서도 사격솜씨가 좋기로 소문나 사격선수로 선발되어 사격연습을 하던 내게 분대원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나를 치켜세워주고 나중에 그들은 그 황새고기를 먹었다는 기억도 난다.

고국에선 분대장은 명중률도 좋지않은 무거운 M1소총이 지급되어 질질 끌고 다니다싶이 했는데 M16은 가볍고 명중률도 좋아 분대원들 앞에서 체면한번 세웠었다.

당시 1971년 1월부터 12월 귀국할때까지 우리 4중대 지역 반닌에는 베트콩들의 활동이 없다시피 조용하게 지냈고 혼바산, 호네오산, 쑤이까이계곡, 망망계곡, 등 작전을 다니면서도 우리 중대는 큰 접전이 없어 인명피해도 전혀 없었다. 인명피해라면 본인이 바위에 낀 이끼를 발견 못해 무거운 장비를 지닌체 미끌어져 내려 꼬리뼈를 다친 것이 피해라면 피해라 할 정도니까...

중대기지 앞 1번도로 건너 동남쪽 3Km 쯤 큰산들 앞 빤히 보이는 자그마한 능선(우리 분대에선 고구마 능선이라 부름) 자락에서 3소대장 손00중위의 미숙하고 경솔한 매복작전함으로 인해 배트콩이 후방으로 침투한 것을 잡지도 못하고 월남 신참인 3소대원 1명이 불미스럽게도 전사하는 아픔을 당해야 했다.

 

 

 

반닌지역 4중대 전술기지 위치와 고구마 능선.
해변가의 양어장은 이 사진처럼 대량으로 생성되어 있지 않았다.
해변가에 조금 형성되어 있었다.


그 날의 매복작전은 정확하다는 정보에 의해 3소대 1개 소대조(약 24명?)와 2소대 1개분대조(9명)로 나뉘어 3소대는 마을에서 연결 된 고구마능선 좌측 하단부를 경계해야 했고 나의 분대는 고구마능선이 끝나고 큰 산으로 이어지는 낮은 산과 큰 산이 이어지는 계곡 정글 속 아주 기분 나쁜 지역이었다.

매복 출동시 중대장(김장근 대위)께서 금일 베트콩들이 마을에서 식량을 마련하여 산속으로 이동한다는 믿을만한 고급정보이니 각별히 주의하라며 훈시하는 모습이 여느때와는 달리 얼굴이 굳어있었고 근심어린 눈빛이 완연하였으며 모든 중대원들도 그날따라 긴장감이 감돌아있었다.

위험성으로 보면 우리 분대는 양 옆이 산으로 에워쌓인 계곡이라 더 위험성이 많아 분대원들의 심기가 좋지 않았는데 매복지점을 향하는 행렬에서 손중위는 우리에게 다가와 다른 곳으로 세지말라며 장교답지 않게 체신머리 없이 히히덕 거리며 약을 올리기도 해 면상을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매복지점을 향하였다.

솔직히 분대 병력이 위험지역으로 매복지점이 정해지면 다른 분대나 소대 대부분 그 곳까지 가지 않고 안전한 곳에서 1박하고 귀대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우리 분대도 정해진 매복지로 가지 않고 중대 부근에서 매복을 하고 새벽에 철수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탕~\" 하는 총성이 울려 모두 업드려 사방을 주시하는데 바닷가 쪽으로 한 200여m 쯤에 밤에는 발견치 못한 조그만한 허름한 건물이 한채 보이고 그 안에서 군복차림의 병사들 두세명이 나타나 우리쪽을 향해 총을 들고 뭐라 하는데 들리지는 않지만 적이 아닌것은 확실해 보였다.

우리소총수들은 분대장의 사격명령이 없으면 먼저 사격하는 법이 없다. 그러던 중 분대원 중 덩치가 제일 컷던 무전병이 \"저 시발넘들 핫바지(월남 민병대를 일컬음)들이다.\" 하면서 일어나 흥분하기 시작했다.

\"저새끼들이 우리들을 향해 총을 쏘면 어쩌자는거야?\"하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누구 맞은 사람있어?\"했더니

\"우리 위로 총알이 지나갔잖아요\"

이 바람에 나도 흥분을 했고 우리들 모두는 흥분을 하여 그들을 불렀더니 처음엔 3~4명 밖에 안보이더니 어느새 7~8명이 되어 우리에게로 다가오며 반갑다는 것인지 미안하다는 것인지 웃으며 손발짓을 하며 다가오는 한명을 그 큰 덩치의 무전병이 우리나라 중학생 수준의 작은 몸매의 핫바지 멱살을 잡고 훅으로 배를 강타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이건 아니다 싶어서 분대원들을 말리고 내가 나섰다.

나도 손발짓을 하며 짧은 영어와 월남어 한국어를 섞어가며 그들의 팀장을 찾았다.

\"헤이 유아얼 캡틴? 켑틴 캄온.\"

하니 내 앞에 서있던 나보다 크고 월남인으론 키가 큰녀석이 제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기에 내 딴엔 그들의 기를 꺾고 분대원들의 사기도 올려줄겸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렸으나 그가 피하는 바람에 빗나갔지만 그의 앞니가 내 주먹에 상처를 냇고 그는 3미터쯤 나가 떨어졌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상처가 남아있다.

싸움도 좀 해 봤지만 여자는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이 강해 여자와 싸워 본적도 여자를 때려 본적 없지만 우리나라 어린 여자아이도 저렇게 나가떨어지지 않을듯 싶은데 스친 주먹에 3미터쯤 나가 떨아지는 꼴을 보니 오음리 교육장에서...

\"여기서 제일 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도 월남사람들 5명은 무난히 처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입증된 셈이 되었다.


우리는 계속 중대와 교신중에 있었는데 그들을 중대로 대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더니 3~40명이 넘어보이게 모여들었고 그들중 권총을 찬 장교인듯한 사람이 내 앞으로 오길래...

\"헤이 유! 비엣남 아미 넘버 텐! 따이한 깨골락 방슝방슝! 유 마이 베이스 고.\"

ㅎㅎㅎㅎ번역이 되는가 모르겠으나 내 뜻을 옮기자면...

'야! 베트군 너희들이 우리 한국군을 죽이려고 총을 쏘았어? 우리 기지로 가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을 인정받아 놓을 요량으로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 잡아당기니 파리 앞다리 비비듯 손에 불이날듯 어찌나 빨리 비벼대는지(내가 만난 월남인들의 사과방법은 동일하였다.) 미안하다는 표현과 시계를 가리키며 부대로 들어가야한다는 듯을 전하는것 같았다. 그들은 인원이 더 불어 1개 중대병력정도가 되여있었다.

 

사진은 도로경계중 사진병이 한컽!

저놈의 철모, 수류탄과 탄창, 방탄복은 왜 그리 무거운지...

더움에 지쳐도 상의 소매도 해충이나 햇볕때문에 걷어올리지도 못한다.

숫자에 밀리기도 하고 그렇게 그냥 머물어 다툼만 하기도 그렇고 해서 중대에 보고하고 그들과 헤여져 중대로 향하며 1번 도로상으로 나왔는데 상항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1번도로상을 분대행렬로 걸어가는데 2~300명으로 불어 난 그들이 9명의 우리와 100미터쯤 거리를 두고 그들은 논뚝길로 같은 방향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부대로 돌아가갰다던 그들이 부대로 향하지 않고 병력을 대거 불러 우리와 대치상태로 이동하는 모양세가 우리에게 이롭게 펼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분대원들과 고민고민 하다 중대에 보고하고 물차지원을 요청하여 물차를 타고 귀대하여 보고를 마치니 중대 박격포나 포대에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포 조준까지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피식 웃고 말았는데...

점심때쯤 되어서인가 매복 후 취침을 하고 있는 나를 중대장 호출이라며 깨우기에 달려갔더니 나와 무전병에게 맞은 두사람을 앞장세우고 월남군 중령과 한국군 대위?(반닌 지역 민사담당관?)가 앉아 월남군 중령이 나에게 당신들이 월남을 도우려 왔지 우리들을 때리려 왔냐며 내게 화를 내며 따지는 것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먼저 총을 쏘았고 우리가 잘못 판단해서 맞받아 총격전이 벌어졌으면 어찌할뻔 했냐며 나는 내 분대원들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취를 취했을 뿐인데 무었이 잘못 되었는가라며 더 큰소리로 맞받아쳤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국군 장교가 나서더니 한 사람은 갈비뼈가 3대나 뿌러졌고 한 사람은 앞니가 3개나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네가 잘잘못을 떠나서 사과를 하던지 아니면 사단장까지 보고를 하겠다는게 그들의 요구이며 주장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도 해안가에 포대가 있는데 그들도 우리위치를 조준하고 있었단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잘못한것도 없었지만 그들에게 폭행한 것 또한 그리 잘한 일이라 생각되지 않았고 사단까지 갈 경우 여러사람들이 당할 문책을 생각하니 내가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마음먹고 정중히 사과를 했다.

그런데 나의 사과로 끝날줄 알았던 일이 무전병의 사과까지 받아야겠다며 무전병까지 부르게 되었다.

중대장실로 들어 온 무전병은 나의 설명을 듣고 펄펄 뛰는 것이다. 상욕을 막 해대며 우리나 저희들이 서로 싸우다 죽지 않길 다행인데 어디다가 사과를 하냐며 사과를 받을 사람들은 우리들이라며 내게도 막 들이대며 자기는 사과를 못하겠고 오히려 사과를 받아야 겠다는 것이다.

듣고 있던 월남 장교가 화가 치민듯 뻘떡 일어나 피해자들을 데리고 나가려 하자 중대장과 한국군 통역장교가 가로 막고 설득하여 앉혀 놓고 우리 무전병을 크게 나무라는 것이다.

옆에있던 나도 무전병에게 일이 사단까지 올라갈 경우 우리에게도 불이익이 올 수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며 그를 달래여 그도 사과를 함으로서 그 사건은 끝이 났는데 중대장실을 나서는 나를 중대 위생병이 \"아니 얼마나 때렸기에 이빨이 몽땅 흔들려요? 내가 세계가 나갔다고 했지만 뽑으면 다 빠질 지경이었어요.\"하는 것이다.

위생병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그렇게 마무리가 된것이 다행이다 싶었고 그 친구들에겐 대단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 사건 초기에 분대원 중 누군가가 섣부른 판단으로 같이 맏받아 사격을 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면 생각하기 조차 싫은 기억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정해진 매복지점까지 안들어가서 생겼다기 보다 가매복 지점에서도 언제고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일을 밝히는 것은 이렇게 위험지역을 벗어나려해도 특히 월남이라는 특이한 전쟁터에선 어떤 곳이 안전하다 장담을 하지 못한다는 뜻도 있어서다.

또 한 번의 지정 정찰지 이탈은, 흔히 있었던 일인것 같았으나 나로서는 처음으로 이탈하는 일이므로 상당한 부담과 모험심이 교차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중대 주변 1번 도로변을 중심으로 한 정찰이였는데 정찰 중 누군가가 해변으로 가보자는 유혹의 제의를 해온것이다.




융통성 없이 규칙대로 움직였던 나를 시험해 보려는 분대원들의 노림수도 깔려있었지만 나도 해변을 가 보았으면 하던 차에 의논끝에 해변으로 가기로 하였다.

중대에서 해변까지 직선 거리는 약 2km 정도 쯤 되는 것으로 기억이되는데 논밭과 잔 수풀(초원지대)들을 지나 해변으로 나가니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서 그리 위험성은 높아 보이지 않았으나 만일에 대비하여 4명은 경계 4명은 물속에서 즐기고있었다.

물속으로 들어가니 그 시원함이란 이루 형용할수 없을지경이었다. 더우기 아무리 나가도 연초록의 맑은 물과 무릅 위 까지 밖에 안차는 해변은 그곳 말고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듯 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흠은 주먹만한 해파리들이 부지기수이다. 그것만 없앨 수 있다면 세계적인 해수욕장이 되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불러서 가보니 얕은 뚝을 쌓은 해변가 주변은 온통 양어장이 바둑판처럼 널려 있었고 주위에 사람 하나 보이지도 않는 폐양어장같이 느껴졌다. 양어장 하나의 크기는 30~40미터쯤 되는 사각형이었고 그 맑은 물 양어장엔 물반 고기반이었다. 고기들은 팔뚝만한게 고등어 같기도 하고 하여간 무언지는 모르지만 등푸른 생선이었다.

성질급한 분대원 둘이 들어가 손으로 고기를 잡으려는데 떠 올렸다가 빠지고 또 빠지고 잡지를 못하는 것을 보고 나도 들어가 보니 물은 무릅밖에 차지 않았다. 꽤를 내여 분대원과 웃통을 벗어 양쪽에서 잡고 건져보지만 모조리 튀어나간다.

고기들은 떼를지어 한쪽으로 몰렸다 또 한쪽으로 도망가고 그것도 실패로 끝나고 나뭇가지를 잘라 오라해서 나뭇가지를 들고 고기때를 향하여 돌격앞으로다.

고기들은 내 다리를 치며 반대편으로 감과 동시에 양손으로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후려치니 나도 물속으로 머리를 쳐박히며 몇 마리가 떳다. 성공을 한 것이다. 분대원들의 환호성이 들리고 물에 뜬 고기를 집어들고 기뻐하던 보습들이 선하다.

그렇게 해서 10여 마리를 잡아 그 자리에서 구워먹으니 맛이 꿀맛이였다. 반닌 해변에서 나뭇가지로 물고기를 때려 잡은 사람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우리 분대원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해변에선 모래구덩이가 많았는데 누군가가 \"도마뱀이다.\"라고 소릴질러 쳐다보니 연대 사단보충대 막사에서 보던 손가락만한 도마뱀이 아니고 내 팔보다 더 큰 누런색 도마뱀이 고개를 바짝 쳐들고 우리들을 감사하다 구덩이로 도망가는데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그 해변엔 그런 도마뱀의 서식처인지 무지 많았는데 월남사람들은 그 도마뱀을 구덩이 앞에다 불을 짚혀 연기에 질식해 밖으로 나오는 도마뱀을 잡아먹는다 들었으나 우리들은 도마뱀까지 먹을 식성들이 못되어 구경만하였다.

이렇게 나는 두번 정위치를 벋어난 적이 있었고 그 해변 구경으로 위안삼으며 반닌 읍내 구경은 커녕 후양지도 한번 가보지 못하고 귀국한 사람중에 한사람이다. 3소대 손중위는 그런 이야기들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런 짓거리는 꿈도 꾸지말라는 충고였겠지만 분대원들 다 들리도록 약을 올리는 행위는 채신머리 없이보였다.

하여간 손중위의 채신업고 기분 나쁜 행위로 우리 분대원들은 잔뜩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아가며 음침하고 께름직한 매복지점에서 3개조로 나누어 정글속에 숨어 길을 목표로 삼아 조명지뢰 크레모아들을 설치하는 화망을 구성하여 一字 매복으로 들아갔다.

 

매복후 어둠이 찿아왔다, 아주 깜깜하지는 않았고 어둠이 내려 깔리기 시작하는가 싶었는데 아주 멀리서 총소리 한방이 들려왔다.

\"탕~~~~~\"

소리는 분명 약 3~400m 거리의 고구마능선을 사이에 둔 3소대 근방이였다.

그러자 잠시 후 따르륵 따르륵.......AK소총의 연발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크레모아나 수류탄 소리는 안들리고 계속

\"드르륵, 드르륵, 따르륵 따르륵...\".



M16 연발소리와 AK소총 소리가 같이 터지기 시작했다. 분명 상황이 벌어졌다.

총소리와 함께 중대와 포대에서 조명탄을 쏘아대기 시작하니 중대에서 2km정도의 우리매복지점은 대낯같이 밝아졌다.

백마 29연대 4중대에는 포병이 같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기억으로는 105mm포와 155mm 포가 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포병은 1번 도로 건너 앞산에 매일같이 귀가 찢어지도록 포를 쏘아 대었으며 지면에 닿기전에 폭팔하는 포를 쏘면 포탄이 지면 위에서 불꽃놀이 하듯 불꽃이 사방으로 멎지게 퍼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중대 화기소대에는 박격포가 있어 기지나 인근에 지원으로 가끔 쏘아대던 기억이 난다.

이 날은 달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무전기가 울려대기 시작했고 무전기에서는 \"삼하나, 삼하나 CP, 삼하나, 삼하나 CP,\"

중대에선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연신 3소대를 불러대는데 3소대는 벙어리다,

3소대를 부르다 드디어 나를 부른다.

바짝 긴장한 나는 소리가 새여나가지 않게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소근거리듯 교신을 한다.

\"CP,CP 둘하나 어디서 상황이 벌어졌는가?\"
\"여기는 CP, 삼하나에 상황인것 같다\"

그러는 사이에 중대장깨서 나타나 삼하나를 부른다.

\"삼하나 CP, 삼하나 CP\"




 


↑앞의 작은산을 우리는 고구마 능선이라 불렀다. 산 좌측이 마을과 연결되는 곳으로 3소대가 당했던 지역이고 우측 끝자락이 높은산과 연결되는 곳으로 우리 분대의 매복지점이다.


역시 3소대는 벙어리고 이제는 간혈적으로 총소리가 들린다. 3소대를 부르다 지친 중대장께서 둘하나를 찾는다.


\"둘하나 CP, 둘하나 CP\"
\"여기 둘하나 CP\"
\"둘하나 삼하나가 감 안잡힌다 삼하나와 교신해 보라\"

CP와 나는 삼하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삼하나 삼하나 둘하나다 나와라 삼하나\"

그렇게 중대와 내가 찾아 대는데도 먹통이다. 중대장은 몹시 흥분했는지 정신없이 삼하나를 불러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총소리도 잠잠해진게 한 10분에서 20분정도 되었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이 아주 오랜 시간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많이 긴장 했었고 흥분 되어 있었다.

그러는 사이 갑지기 풀밭에서 메뚜기 튀어나오듯

\"CP CP 삼하나, CP CP 삼하나\"

드디어 3소대장 음성이 무전기에 잡혔다.

\"삼하나 CP, 삼하나 CP, 상황 보고하라\"
\"CP CP 삼하나, CP CP 삼하나, 붙었다. 붙었다. 붙었다...\"

앞뒤 사정 없고 전후 가릴 것 없이 쪼개진 목소리가 튀어 나와 \"붙었다. 붙었다. 붙었다.\"다 갈팡질팡 무전기가 시끄럽게 빽빽거리기 시작했다. 오합지졸이 이런 군대를 말하는것 갗았다.

중대장이 3소대와 교신이 시작되어 우리조는 상황을 숨죽이며 듣고있었다.

\"삼하나 CP 삼하나 CP 그쪽 상황을 말하라\"

그러자 또 난데없이 알아들을 수없을 정도의 속도로

\"붙었다, 붙었다, 붙었다, 붙었다\"

 

위문공연을 끝내고 여자 연예인들은 중대를 돌아다니며 사진촬영을 해주는데

사진병이 내게로 데려와 한컽.

이 연예인 누군지 아는사람???

붙었다를 연발하는 3소대장의 가벼움과 경망스런 교신에 이맛살이 찌프리며 그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다. 옆에서 긴장감에 휩싸여 였듣던 분대원과 무전병이 몸을 들썩이며 끼득거림을 느끼며 나 또한 중대에서나 평시였다면 배를 움켜쥐고 자빠져 뒹굴 지경이었다...(지금은 집이니까 싫컷 웃자...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본부에서도 근무자들도 옆에 많이 있을 것이고 중대장도 당혹해 하며 3소대장에게 안심시키며 상황을 보고하라 이른다.

\"삼하나 CP 삼하나 CP 침착하라, 침착하라, 침착하게 상황 보고하라\"
\"CP CP 삼하나 붙었다, 붙었다, 붙었다.\"

연신 붙었다다.

\"삼하나, 삼하나 중대장이다. 침착하라 지금 상황이 어떤가? 적은 몇명이고 우리 피해는 없는가?\"

그러다 3소대 무전병이 답답하고 한심했는지 무전병이 응답을 한다.

\"CP CP 삼하나 지금 중대원 1명 맞았습니다. 다스코프(Dustoff) 불러주십시요.\"

\"삼하나 CP 적은 얼마나 되나? 소대장 바꿔라\"

그래도 중대장은 소대장의 권위를 살리려는지 소대장과 교신을 요구한다.

3소대장이 무전병의 침착한 대응에 정신이 좀 들었는지 많이 침착해졌다.


\"CP CP 삼하나 지금 적은 안보이고 소대원 1명이 맞았습니다. 다스코프 보내주십시요\"

\"삼하나 삼하나 CP, 상태가 어떤가 조면탄을 더 뛰워도 되겠는가\"

\"CP 삼하나 조명탄좀 더 뛰워주십시요. 병사는 배쪽에 맞은것 같습니다. 아직 정신은 있습니다.\"


 


다스코프라는 것은 참전용사들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설명을 하자면.

월남에선 미군헬기들을 지원받아 모든 작전을 수행한다. 월남전 당시 헬기들 중에는 건쉽(Gunship)이라 불리우던 좁고 날렵한 공격용헬기(이 건쉽은 M60 기관총은 기본이며 다연장 로켓포 등으로 무장하여 로켓포를 발사하면 반동때문인지 헬기가 그자리에 멈칫 섣다 갑니다.) 작전투입시 한국군을 싫어나르던 UH1이 있고 그 헬기를 개조햐여 열십자를 그려놓고 환자 수송을 하던 헬기를 다스코프(Dust off)라 불렀다.



그런데 이 모든 헬기들은 미군이 운용하는 것이기에 한국군 마음대로 부르면 오는 것이 아니고 또한 야간에는 출동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있었다.

몇시간이나 흘럿을까?

얼마 후 밤에는 뜨지 않는다던 다스코프가 온다는 연락이 왔다. 헬기 착륙때문에 조명탄도 올리지 않는다. 요란한 헬기소리와 함께 그 병사는 헬기에실려 후송을떠났다.

 

우리조는 그동안의 상황들을 무전기를 통하여 다 들어 알고 있지만 옆조들은 전혀 소식을 모를터인데 숨소리 하나없이 쥐죽은듯 고요하게 떨고 있을 전우들을 생각하니 답답하기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랴 지금 우리는 VC들의 길목 한 가운데 놓여있는 처지에다 상황까지 벌어져 그들이 언제 우리 지역에 나타날지 모를 상황인데 잠복지를 이탈하여 옆조를 마실다니듯 다녀 올 처지도 아니니 연결줄에 의지하며 오늘 밤을 무탈하게 보내기를 기도하는 수 밖에...

이제는 조명탄도 한 발 쏘고 꺼질즈음 또 한 발 올리며 그렇게 3소대 상황이 종료되었나 싶은지 두어시간 쯤 지났을까? 우리 매복지 뒷쪽에서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나 숲을 밟고 지나는 무게감이 분명 사람의 무게감이었다. 짐승이라면 저렇게 조심스럽게 밟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적의 일부 또는 첨병일 것이라 생각했다.

조명탄이 꺼질즘 어둑해지려면 두세 발자국 소리가 나고 조명탄이 다시 터지면 조용한 것을 봐서라도 분명 사람의 발자국 소리였다. 우리들은 기겁을 하여 뒷쪽을 경계하며 아무리 살펴도 잔 나무, 잔 수풀들이 우거진 정글속이라 앞을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조명지뢰나 크레모아를 설치한 앞쪽이 아니고 뒷쪽인지 영 불안하고 미칠지경이다.

나는 중대에 상황보고를 하고 옆조에게 신호를 보내려는데 연결줄을 당겨도 당겨지지도 않고 응답이 없다. 자는것은 분명 아닐텐데 4~5m거리에 있는 옆조에게 연락할 수단이 없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발자국 소리에 온 신경을 쓰며 주시하고 있는데 우리조원 한 명이 옆으로 누웠다 뒤로누웠다 하는 바람에 바닥에 깐 판조우의가 나무잎들과 마찰을 일으키며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한사람의 잘못으로 우리가 노출이 되면 전 분대원들이 그야말로 그들의 밥이 될 지경인데 판초우의의 마찰소리는 왜 그리 크게 들리는지...

 

이 모습이 한국군 장기작전 군장과 모습이 동일하다.


그날 나는 머리가 선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한 날이다. 일생에 그렇게 공포에 떨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무서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던 나인데 심약한 사람이라면 오줌도 지릴 판국이였으니 그 분대원의 마음은 어떠하였겠는가.

하지만 연속되는 몸부림을 막으려 그의 머리를 쥐어박기도 해 보았으나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부시럭 대기는 마찬가지였다. 발자국 소리는 우리들 가까히 까지 왔는데 말이다.

나는 결심을 했다. 수류탄을 던지기로... 그러나 한 밤중에 정글에서 수류탄을 던지기란 그리 쉽지 않은 노릇이다.

잘못하면 나뭇가지에 걸려 우리조나 옆조로 튕겨 올 소지가 충분했기에 나는 조원들에게 수류탄을 던질 것이니 마대에 몸을 숨기고 업드려 있으라고 알려 주었으나 옆조들에게는 알릴 방법이 없어 잠시 궁리를 하며 밝게 빛난 조명탄의 불빛에 주위의 수류탄 투척 장소를 물색하였다.

어린시절 야구하던 실력으로 대략 소리나는 지점을 가늠하고 나뭇가지가 적은 공간을 보며 하늘을 향해 던지고 나서 옆조에게 알리는 방법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수류탄 던졌다. 수류탄 터지는 쪽으로 마대에 엄폐하고 무차별 사격하라!!!

나는 소리쳐서 그들에게 노출되겠지만 그들은 한국말을 모를것이고 이 방법이 흩어져 있는 분대원들에게 알리고 보호하는 가장 적당한 방법이라 생각해낸 결과였다.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콩복듯 쏴데는 M16 소리가 작난이 아니였다. 큰 작전을 나가서도 이런 상황은 없었다.

그리 3발을 더 던졌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수류탄에 맞은 것인가? 하는 궁금증과 불안한 마음으로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날이 점차 밝아지며 새벽이 찾아왔다.

숨을 죽이고 있던 우리에게 주변 수색을 철저히 하고 3소대 지역으로 가서 합류하여 귀대하라는 중대장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아마도 불안한 우리 분대에 대한 염려로 3소대에 가서 힘이 되어주라는 의중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큰 소리를 내며 옆조에게 알렸다.

\"철수다. 내가 길로 나갈테니 크레모아 선을 빼라 주위를 잘 살피며 모든 장비 거둬들이고 모여!.\"

하고 유리 조원 한명을 데리고 밤새 소리나던 발자국 소리 지점을 찾아보았는데, 아뿔사! 뒤에도 길이 나 있는 것이아닌가. 만약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였거나 우리들의 낌새를 눈치챘더라면 그날 우리는 이렇게 서있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연결줄은 설치시 정글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대충 줄을 끌어다 서로의 발목 또는 팔목에 연결하다보니 잔 나무 가지들에 얽히고 설켜 무용지물이 되여 있었다.

천천하면서도 재빠르게 그리고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그들의 흔적이나 짐승들 흔적도 찾지 못하고 그 지역을 빨리 벗어나고파 분대원들을 재촉하여 3소대 지역으로 가려하니 가까운 길을 놔두고 3소대지역으로 간다며 분대원들의 불만이 가득하다.

나 또한 밤새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 밟는 발걸음과 싸우느라 한 걸음이 천근인데 이들을 나무랄수 없고 중대장이 원망스러웠다, 바로 귀대하면 좋을텐데...

그렇게 고구마능선을 돌아 3소대 지역에 도달하니 3소대원들이 땅을 파는 작업이 한창이였다.

나는 의아해서 한 3소대원에게 \"철수준비를 하지 않고 무슨 작업들이냐\" 물었더니 소대장 쪽 눈치를 살피며 볼멘소리를 하는 데 하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버렸다.

매복자리를 다시 만드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전날 논 쪽에서 산 밑에 난길을 향해 논바닥에서 일자매복을 섰는데 매복지 뒷편 마을쪽에서 나타난 VC를 소대장과 함께있던 무전병이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고 무전기에 기댄채 총이 조금 떨어져 있던 상황이라 총을 들고 있던 소대장에게 신호를 보냈는데 당황한 소대장이 다급하게 단발로 지향사격을 하였고 이에 놀란 VC가 반사적으로 연발로 쏘아대는 바람에 옆조에서 당황해서 일어나 두리번 거리던 신병이 앞쪽으로 한 발 뒷 쪽으로 한발을 맞았고 VC는 도망을 쳤다는 것이었다.

감사가 나온다 하여 감사를 대비해 매복위치를 원형매복처럼 다시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기가막히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사진은 월맹군 새퍼들


그 때는 건기철이라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음페 엄폐물이 없는 논이라는 개활지에서 원형도 아닌 일자매복을 섰다하니 이건 영창을 가서 수십년을 살아도 시원치 않을 장교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는 인간이였다.

일반하사인 내가 보아도 그 자린 매복 위치도 아니였고 오히려 산쪽에서 길과 마을과 논쪽의 개활지를 바라보게 매복지점을 설정했어야 할 장소였다. 굳이 그 자리라면 당연히 원형매복이 되었어야 하는 매복의 기본 수칙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소대원이 총상을 입고 후송을 간 마당에 저만 살겟다고 밤새 공포에 시달리던 소대원들을 들들 볶아 위장 매복 설치와 허위보고를 할 것을 생각하니 가득이나 미워하던 인물이 더욱 미워지기 시작했다.

미운것은 미운놈이고 3소대 전우들을 생각해서 작업을 마져 도와주고 3소대와 함께 귀대하니 중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후송같다던 그 신참은 헬기안에서 먼 나라 전쟁없는 나라로 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월남에 1년간 근무하는 동안 유일한 전사자가 그 동국댄가 단국댄가 다녔다던 잘 생겼던 3소대 신참 한 명 뿐이다.

나는 그 일들이 아마 죽는 날 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9월인가 다친 허리때문에 작전에서 열외받아 기지에 남게 되었는데 남은 인원들이 무었을 어떻게 하며 지내는지 몰라 본부나 잔류병력들의 일상을 채크하던 중 김치를 담가야 한다는 이야기에 여자라곤 눈을 앃고 찾아봐도 없고 청년들만 모여있는 병영에서 무슨 김치를 어떻게 담그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소대원 2명이 차출되고 본부요원 1명이 물차를 타고 반닌읍에 나가더니 우리나라 배추가 없어 양배추, 무, 파, 고춧가루 등 김치거리를 사왔는데 양배추로 어떻게 김치를 담그냐 물으며 지켜보았더니 양배추을 잘개썰고 무를 잘개 썰어 탄피통에 나누어 소금을 뿌리더니 닫아두는 것이다.

빨리 담지않고 다른 일들을 하기에 물어보니 배추의숨이 죽어야 한다나...

그렇게 1시간여 지나더니 양념에 무쳐대며 맛을 보라며 하나 집어주는데 그야말로 죽여주는 김치가 된 것이었다. 고국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양배추 겉저리가 되었는데 K레이션의 물컹물컹한 누린듯한 김치만 먹다가 시원하고 깔끔한 김치맛에 모여든 소대원들이 맨입으로 여러점들을 집어먹다보니 귀대할 전우들에게 돌아갈 양이 모자라 다음날 더 구입하여 다시 담기도 하였다.

그런데 탄피통에 담궈둔 김치가 다음날 열어보니 탄피통의 국방색 페인트가 우굴우굴 불어 들고 일어나고 요즘같아서는 납중독으로 누가 먹으래도 먹지않을 음식이지만 맛은 끝내주었다. 언제 어디서 김치담그는법을 배웠는지 알수는 없었으나 군대란 무었이던 만들어내는 곳이 아니던가.

더운 기후때문에 3일이 지나면 김치는 식초가 되어있다. 어쨌던 페인트가 녹아내려 납중독이되던 말던 죽기로 작정을 한 전장속의 군인들이 내일의 뒷탈은 아랑곳 없이 맛있게 먹었던 상큼한 김치맛은 아직도 입가에 침을 흘리게 한다.

군에선 계급이나 나이, 학벌을 떠나 고참을 무시하면 큰코를 다친다. 이것은 나의 군생활속에서 터득한 철학이었다. 특히 월남같은 전장(戰場)에선 더욱 그렇다.

그 예를 들어 월남 초기 어느 작전에서 작전 전개중 대정글에서 서너명씩 옹기종기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뭔가가 바람개비 날아가는 소리같이 \"슈룩슈룩슈룩\" 소리가 나더니 \"퍽\" 하는 소리에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일어나려니 옆에있던 분대원이 \"B40\"이닷 하며 일어서려는 나를 낚아채듯 쓰려트려 넘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전 까지 옹기종기 모여있던 중대원들이 보이질 않는것이다. 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려 일어서려는데 다시 \"슈룩슈룩슈룩 퍽\" 소리와 함께 다시 나를 낚아채는 바람에 또 쓰러졌다.

쓰러져서 주위를 살펴보니 어느 사람은 조막만한 둘을 들고 엎어드려 있고 어느 사람은 빗물에 파인 고랑같지도 않은 고랑에 엎어져 모두가 겁에 질린것 처럼 숨어있길래 나는 속으로 얘들 장난하는거 같아 웃음이 나올거 같았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자 주섬주섬 장비들을 챙기며 자리를 떠야 한다며 진군이란다.

 

작전을 마치고 휴식 중 고국에서 중대본부 이발병으로 근무하던 성구용. 일명 용산깡패를 만나 반가움에 한컽.

성구용은 나이가 27~9세로 많았으며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서울서 우연히 만남...

작전을 마친 첨병과 복장부터가 다르다.

나는 영문을 몰라 어라둥절 해 있는데 우리 분대원이 가르키는 3~4m 정도 쪽을 보니 로켓포 같은 물건이 땅에 60도 가량 기우려져 몸통 뒷부분과 꼬리날개가 보이며 밖혀 있었다. 그렇게 옆에 또 한발 두발이 보였는데 나는 그게 왜? 그게 뭔데? 하니 불발된 B40이란다.

B40은 사거리가 100m이내라는 것을 교육을 통해 알고 있었다. 첫발이 불발이면 도망을 가는데 2발이 불발이니 분명 이 근방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거나 그들도 도망을 쳐 다음 작전으로 들어 갔으니 빨리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것이 \"퍽\"이 아닌 \"쾅\"이었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런데도 그것은 옛날에 뭍혔있던 물건으로만 여겨졌지 실제 상황으로 여겨지질 않았었다.

그렇게 고참들은 경험으로 유사시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고 은폐, 엄폐물을 찾아 상황을 주시하는데 반해 신참들은 그것을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벌떡 일어나 두리번 거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참들의 피해가 많은 것이고 3소대 신참도 총소리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두리번 거리다 운없게 베트콩이 난사한 두발을 맞은 것이다.

이렇게 고참들의 경험들은 무시못할 소중한 것들이기에 고참에 대한 의식을 존중하고 중요시 해야 한다.

우리 중대의 또다른 어느 큰 작전 중 불안에 떨며 지세웠던 어느 날 밤, 옆중대가 포위를 당햇다는 것이다. 2개 소대가 당햇다며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그 작전에서 우리 중대는 매복지점에서 우리 포대에서 지원해 주는, 포 VC들이 쏘는 포들이 우리위를 지날 때 \"슝~~~쾅\"이였다. 우리 지역 근방으로 떨어지는 소리는 \"슈룩~ 슈룩~ 쾅'이였고 우리 앞쪽에 떨아지는 소리는 \"대포소리와 앞 지역에서 쾅 소리와 함께 화염이 인다.\" 이렇게 각종 포소리들을 감상?해야 했던 일은 잊을 수 없는 악몽 그 자체였다.

 

어느 포병 출신이 보병작전에는 항상 관측 장교가 따라 다녔다는데 그것은 대대 본부나 연대본부 GOP에 배속되어 따라 다녔지 말단 소총중대에는 분대장, 소대장 또는 중대장이 좌표를 불러주고 포 지원을 받아야 함은 교육 지침에도 나와있고 중대까지 와서 지원하는 관측 장교는 한번도 보도 둗도 못했다.

전장의 형태나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소총 소대나 중대에 지원군이 따라 붙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말은 소총중대 지휘자들을 욕되게 하고 무시하는 망언이다. 내가 참전했던 작전에선 그러헸다.

그동안 4중대는 어느 큰 작전에서 7부능선쯤 초원에서 3명의 VC들이 식량인듯한 자루들을 어깨에 걸머지고 가는 것을 7.5부능선에서 발견한 우리들의 집중사격끝에 누구 총에 맏았는지도 모를 2명사살 1명 도주, 우리들 총에 수없이 맞아 찌그러지고 망가진 권총 1정 노획의 전과가 있었고.

어는 작전 철수 전 날 랜딩지점 수색중 VC3명 도주와 바위 틈 동굴 속에서 울고 있던 갖난 아기와 아기엄마 체포, 그리고 어느 날 내 앞 4~5m에서 B40 두발 불발 등이 있었고...

첨병조에서 움막을 발견하여 소총 2정을 노획하는 전과가 있었는데 당시 이 건으로 나를 훈장상신하였다 들었는데 나중에 사령부의 착오?라며 이세호 주월군 사령관 표창으로 대신받은 것이 내가 받은 유일한 전공이고 내가 참전했던 우리 중대의 실전 상황들이다.

그런데 얼마 전 월남전 파월한국군전사기록들을 보니...

\"박쥐26호작전, 제 4중대는 움막쪽으로 도망오는 적을 제3소대 첨병분대장 김00하사가 단숨에 2명을사살하여다. 이어 제2소대 1분데장 조00 하사가 적을 발견 고00 상병과 포위하여 적 3명 사살 소총 2정을 노획.

27일 592고지 수색중 강00상병이 위장 움막을 찾아 내고 이어 2분대장 박00 하사가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를 보았다, 소대장 황00 중위는 적이 아군 도착 직전에 도피한 것으로 보고 정밀수색을 실시하여 적5명 을사살 하고 소총3정을 노획 하였다,\"였다.

나는 이 자료를 보고 중대 행정병들의 허위 작성한 경위를 확인 할 수 있었고 내가 얼마나 행정병들에게 잘못보였나를 가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의 의지와는 달리 내가 본부로 발령나려는 것을 얼마나 방해하였는지 설명 되는 내용들이며 일부 장기하사 및 소총수들의 주머니를 털어 제 주머니로 몰아간 결과이기도 하다.

당시 전상이던 전공이던 휴가던 모든 행정이 돈으로 해결되던 시절이였고 나는 훈장같은 것엔 신경도 쓰지 않았고 장기하사관들에게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장기하사관들은 전공과 진급을 얻어야 하는 입장이여서 작전 나가기 몇 일 전 부터 AK소총을 어떻게 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50불이면 언제고 구입할 수 있다며 사들고 작전에 임해 잠시 연출을 하여 전공을 올리던 시절이였다.

사회생활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훈장이나 하나 받았으면 하는 속 마음은 있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훈장은 커녕 고국휴가? 작전 후 간다는 휴양지 한 번, 반닌 읍내 구경도 못했으니 요령부족이라 한다면 이해하겟으나 행정반에 미운털이 많이 박혀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알수 있는 것이다.

나는 수용연대 시절부터 각 부대를 옮길때 마다 인사담당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던 것은 기록카드상의 당시로선 드문 높은 학력과 특A라는 커다란 붉은 도장 덕이란 걸 잘 안다.

만약 내게 금전적 여유라던가 주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있었다면 군생활도 편했을 것도 나의 인생의 향로도 활짝 열렸을 것이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조건들이 없었기에 오히려 의타심없이 꿋꿋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이 되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기록으로 인해 피해를 보리라곤 생각지도 않았었다.

자존심만 강하고 고지식했던 나는 짜옹(정확한 뜻은 모르나 뇌물을 당시 우리들은 이렇게 불렀었다.)도 안하던 내가 9,10월 경 큰 작전 중에 꼬리뼈를 다쳐 후송을 보내 달라고 해도, 조기 귀국을 시켜달래도 대기자가 많아 기다리라는 등 갖은 변명들로 미뤄왔고 제대말련 꾀병이라는 소문까지 들으며 몇날 몇일을 고민하다 몸고생 마음고생을 하면서 누구를 대상으로 폭팔시킬 수도 마음을 달랠길도 없었고 모든 중대원들도 미웠고 그땐 정말 죽고싶은 마음뿐이었다.

11월 경인가 분대원들이 도로경계 나갔다가 사다 준 고량주 한수통을 마시고 오밤중에 총을 난사하며 사단장 만나러 가겠다며 물차 운전병을 찾아 다니던 기억을 그 사건으로 피해를 본 당사자(나 때문에 피해자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 그에게는 내가 죽는 날까지 마음의 빛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가 나타나 퍼즐 조각 맞추듯 찾다보니 여기까지 찾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에 나라에까지 와서 총을들고 적들과 싸웠던 이유는 훈장을 받고 명예를 얻고 상을 받고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내 한몸바쳐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위함이었지 남의 희생을 담보로 나의 욕심을 채우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나라에 충성하고 명에 따르며 내 분대원들 나아가 우리 전우들에게 도움이 되는 군인이 되려 임무에 충실하는것 뿐이었다.

이렇게 전우들을 위해 서로 꺼리는 첨병을 자처하여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였는데 행정병들의 파렴치한 행위들을 확인하고 보니 그들이 가련한 생각도 들지만 결국엔 아픈 허리를 사회생활에 지장 받을까봐 숨기며 병원 한번 가보지도 못하고 오리궁뎅이가 되여 아픔의 고통속에 괴로워했던 나날들을 생각하니 그들의 행위가 괘심하기 짝이 없이 미워진다. 그들이 지금도 그때 소총수들에게서 긁어 모은 돈으로 끝발날리며 잘 살고 있는지 자식들 교육은 잘 시켜는지도 궁금하다.

말단 소총중대에 2년 이나 연장근무하며 중대원들 호주머니를 털어 제 주머니로 긁어 모았던 까만 피부에 깡마르고 턱이 뾰족히 나오고 앞니가 튀어나온 부산의 45년생 노00을 비롯하여...몹쓸 놈들.... 나쁜 놈들...

당시 나는 썩을대로 썩은 한국군대 그 속에서 생활하고 지켜봤다.

미군 한 감찰관이 한국군은 하루에 속옷을 200벌씩 갈아 입을 정도로 청결하냐는 죠크는 유명하였던 이야기다.

우리 분대원들 중 도로경계나가면 C레이션을 사먹던 분대원들이 있었다. 보급품을 트레일러채 해 먹는다는 등 각 계층으로 부터 다 뜯기고 말단 소총수들에게 돌아 오는 것은 보급품 부족이란다, 총을 들고 적과 마주 싸우는 우리 소총병들이 불상하고 안타까울때가 많았으나 힘없는 말단 분대장이 어쪄랴 같이 울분을 삭힐 수 밖에...


9, 10월? 경 어느 날 각 분대 막사에 SP Box가 분배되어 전 중대원들의 눈이 튀어 나온 일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새로 부임한 중대장(전관 대위, 월남생활 중 전관 중대장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음)이 각 병사들의 몫을 원칙대로 내 준 것이다.

볼펜이나 노트 담배 등 부질없는 물품을 낯개로 몇개씩만 받아보았을뿐 말로만 듯던 SP Box는 약 50cm×50cm×50cm정도의 육면체 크기로 기억되는데 처음보는 Box였다. 그 안에는 카메라, 달러시계, 담배, 볼펜, 등 등 먹는 것을 제외한 누구나 탐낼 미국제 물건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분대원들의 눈들이 휘둥그레지고 서로 좋은 물건을 챙기려 다툼이 벌어지기도 해 나는 어느 고참을 지정해 알아서 나누어 갖도록 배려를 하고 뒤로 빠진 일들은 그동안 중대에서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빼돌렸는지 짐작이 가는 일이였다.

그리고 그 중대장이 나의 소동으로 사정을 알게 되었고 바로 조기귀국 시켜준 나에겐 감사한 분이 였다는 것을, 또한 나 뿐이 아니라 전 중대원들의 모든 문제를 알뜰히 보살펴준 분이란 것도 당시 서무를 보던 경산의 전우를 만나게 되어 그 전우의 아픔과 함께 내가 몰랐던 이야기도 들으며, 전사기록들을 보며 38년간을 속아 살아왔다는 것들을 알게 되었고 이에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혼바산의 청룡바위

 

 

1대대 지역 봉로만

 

 

1대대 지역 봉로만

 

 

1대대 지역 봉로만

 

 

1대대 지역 봉로만


소총병들은 각 분대별로 막사에서 각기 다른 성품을 지닌 젊음들이 생활하며 옆분대와도 환경이 다르고 옆 소대는 물론, 작전에 임하는 분위기도 중대장, 소대장의 인품에 따라 각기 다르고 특히 본인들의 기준에 따라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판이한데
책상머리에 앉아 잔머리 굴리며 적과 싸움도 해 보지 못하고 꽁가이에, 휴양지에 유람다니듯 관광이나 다니듯 하던 참전자가 제 자신만의 참전 경험이 기준인양, 스텐다드인양 총알받이들의 꾸밈없는 글에 대해 나무라는 꼴에...

이권단체 만들어 잇속이나 챙기려 비리들을 저지르는 무리들을 보고 들을때...

참전자들을 홀대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에서 위정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환갑,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반성은 커녕 제 명령에 목숨을 바쳤던 제 부하들의 공적을 조작하고 도적질 하고 총알받이들의 명예는 아랑곳 없이 제자신의 영달만을 쫒는 놈들을 볼때...

그들의 명성을 팔고 그들의 보호를 받고 쬐그만한 이익을 추구하려 제 전우들에 이 나라 심장에 대못을 박아대는 군상들을 볼때...

지들의 잘못을 숨기고 합리화하기 위해 지난 날들의 부끄러움을 자기얼굴에 침뱃기라며 들추지 못하게 하는 무리들을 볼때...

나는 지난 날들의 젊은 피가 다시 끓어 오른다.


전에 어느 직장 에서 후배가 내가 어떤 모략에 빠졌었던지... 나를 찾아와...

\"박선배, 박선배 말은 다 맞아... 그리고 다 옳아....그런데... 그런데...
아~ 시발... 하여간 박선배는 돈키호테야....\"

ㅎㅎㅎㅎ 나도 잘 알고 있네....ㅎㅎ 시봉.







글을 마치며...


내가 왜 이런 글을 쓰냐면 이런 행태들이 아직까지 이 나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있었던 그대로의 글이다. 이 글은 어떤 대상을 모략하고 그들을 쓰러트리려 함이 아니다.

이 글을 쓰면서 일부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다 늙어 일가를 이루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혹여 누가 미치지 아니할가 하는 마음에서다.

이글은 하늘에 맹세코 거짓이 없으며 허위 날조 투성이인 파월전사기록 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내가 직장생활에서 많이 느낀점은 열심히 일 잘하는 사람들을 질시하고 문제를 야기시키는 사람들 대부분이 실력이 모자라는 사람, 정통성을 인정받기 힘든사람들이 아부와 언변으로 상대를 격하시키고 문제를 야기시켜 실력있는 사람들을 몰아내는 꼴들을 보곤했다.

그런데 이 꼴들을 정리하고 해결하여 공정한 조직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배를 채우려 위상을 높이려 공정치 못한 행태들로 사회를 바르지 않은쪽으로 가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이다.

권투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여 우승을 하였는데, 감독은 물론, 코치, 통신담당, 행정담당, 의료, 팀의 주요 담당들은 금메달을 목에걸고 정작 피터지게 싸웠던 선수는 외면당했다면 그 사회가 공정한 사회인가?

올림픽에 출전한 팀이 선수는 홀대하고 팀의 주요 간부 및 지원팀원들만 강력한 행정력으로 혜택을 받는 꼴이 대한민국 6.25전쟁 참전자분들이나 월남전쟁 참전자용사들을 관리하는 현실이다.

전쟁터란 사람을 죽이는 살육의 현장이다. 사람을 향해 총탄을 퍼부어도 죄의식이란 느껴보지도 못했다. 적을 향해 총을 쏘는 행위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는 일이지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죄의식따위는 느끼질 못했다. 다만 내가 적의 총탄에 맞아 죽는다면 적의 전과를 올려주어 적의 사기를 올려주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패배자이다.

그러나 이 나라 대한민국은 형식을 갖춰 전사한 장병들은 숭고하고 애국적인 영웅들이며 살아 돌아 온 승리자들은 훈장이던 표창이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깡통들에 불과하며 못난 위인들이나 골치아픈 정도의 파렴치한이나 살인마들로 매도된다.

대한민국은 그것이 미안한지 아무런 혜택도 주지않는 무늬만 유공자라며 참전자들 즉 진정한 영웅들과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진정한 영웅들을 홀대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다.

좋은 집안 또는 명석한 두뇌로 좋은 보직 편한 행정직을 맏아 적들과 마주치지 않고 월남전장을 유람다니듯 공판치고 꽁까이 찾아 다니고 잇속만 챙기며 지휘관의 눈에 들으려 전과를 조작하고 보급품을 빼돌리며 말단 전투병들의 몫을, 말단 전투병들을 저희들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던 행정병, 특히 막강 세력들에 아부하며 충성을 바치고 있는 무리들이 참전단체를 만들어 수익사업 등 단체의 영리와 지휘부의 배만 불리지 전 참전자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또한 모든 참전자들을 위하고 이 나라의 틀을 바르게 만들어가는데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다....

죽엄이라는 막장앞에 총을 들고 돌진해야 하는 전투병들의 극한 상황을 가늠 하지도 못할 위인들이, 전쟁후유증이라는 트라우마가 무었이고 어떤 것인지도 알리도 없는 그들이 사회에나와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득권자들의 그늘에서 참전단체를 만들어 한자리 꿰어차고 전투병들이 받아야 할 대우마저 가로채 호위호식하며 저희들이 참전용사라며 위정자들의 놀이개가 되어 진정한 참전용사인 전투병들이 받아야 할 권리마져 박탈하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이기적인 삶들로 부정과 부패로 가득찼던 6~70년대 월남파병용사들의 행정직이나 상급 고급부대원들이나 지휘관들의 부정축재를 돕고 그들의 보호속에 호위호식했던 그들이 환갑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버릇 그대로 그 사회 그대로를 답습하며 살아가는 꼴들을 볼때 왜 대한민국이 정의롭고 화목한 국가가 아닌 혼란과 혼돈의 세상속을 헤메고 있는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알려야 하고 뉘우치게 하고 하루 빨리 고쳐야 한다.

이런 일들이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실력이 모라라고 인정받지 못할 위치의 사람들이 저를 지켜주고 저희 가족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바쳐 전쟁터에 나갔던 저의 이웃을, 저의 친척들을 용병이라 몰아세우며 살인마라 몰아세우며 대한민국을 파멸시켜 자신의 이득을 보려는 이기주위, 기회주의만이 가득한 자들에 먹잇감이 되어간다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뉘우치지도 않고 자신들만을 합리화시키며 잇속챙기기에 혈안이고 나아가 그 욕심의 끝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이 뒤집혀 정글을 누비던 꿈을 꾸다 벌떡 일어나 않아 눈물을 흘려야 하고 내 가족의 생사를 몰라 몸부림치시던 부모님 생각에 벌떡 일어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온통 불의와 부정과 부패만이 난립하는 현실이 안타까와 또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0년 초 모 방송의 지원을 받아 촬영차 전적지 여행을 하던 어느 포병출신 전우가 정글수색도 다녀보지도 못한듯 영상에나와 제 경험담인듯 그 거머리는 살에 붙어 떼어내면 잘 떨어지지도 않고 떼어내면 잇빨(?)이 밖혀있어 고통을 당한다는 거짓말을 하며 허세를 부리는 것을 보며 실소를 했는데 거머리가 잇빨이 있다는 상식밖의 무식함도 역겨운 일이지만 그런 거짓말들로 전체참전자들을 대변하는듯 아부와 허구로 제욕심만 챙기려는 목불인견의 전우들이 있어 가슴아프다.

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부정과 비리의 온상을 키워 온 비리의 원조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당시 참전용사들이 귀국을 하면 때부자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국민들로부터 눈총을 받아 온 원인이기도 하며 용병이니 심지어 학살자라는 누명을 씌우며 날뛰는 친북주의자들의 먹잇감이 되기도한 원인이기도, 국가에서 홀대받는 원인이기도 한 것이 현실이다.

죽엄을 무릅쓰고 눈이 뒤집혀 적을 향해 총을 들고 돌진해 보았는가? 그것이 진정 전투병이고 그래서 모든 나라들은 그 노고를 외면하지 않고 있는데 오직 대한민국만이 당신들 때문에 그 노고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세.


이 글을 보는 참전자들은 수치스럽고 부정적인 면을 그려 참전자 얼굴에 먹칠한다는 시각으로 보지 말고 이 글을 통해 자신들의 뒤를 한 번 돌아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오늘날 까지 살아오며 많은 아픔 많은 상처 많은 배신도 받아보았다. 그러나 또한 사랑과 배려로 많은 도움도 받아보았다.

하지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지금의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한 짧은 수단일뿐 그들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한국사람들이란걸 잘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정이 많고 의협심이 강하고 세계에서 제일 좋은 두뇌를 이어 받은 민족이란걸 살아오며 느끼고 또 느꼈다.

1990년경 수원 기흥연수원에서 직장 각 부서들을 서로 섞어 10여명씩 조를 짜 분임토의를 할때 토의가 자신들의 부서 문제점 및 이해사항등으로 지루해지자 내가 나서서 현실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5년 10년 뒤 우리직장의 환경변화를 예상해 보고 세계적 흐름등을 논의해 보자는 제안에 한 조원이 선배님은 앞으로의 흐름을 어떻게 보는지 먼저 제시해 달라는 말에 나는 현재의 세상이 온라인 세상으로 바뀌어 나가는 것에 각자가 적응해야 할 것과 그 후 한민족이 지구상에 주축이 되리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한민족이 지구상의 주축이라는 말에 눈들이 휘둥그헤지면서 그 예를 들어보라했다. 이에 우리나라 현실이 선진국에 비해 관료주의적 사고와 많은 규제, 제약, 견제들이 걷혀지면 세계 일류국가 못지않는 수 많은 인재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 날 것이고 그 예로 국내에서 보다 외국으로 나가 많은 업적들을 일구워 낸 우리 민족들을 열거하였고 사심에 연연하지도 않고 이기심을 내세우지 않는 어머니 같은 정신의 뚝심있는 여성들이 대한민국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도 해 조원들에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었다.

나는 아픔과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 오며 즐거움과 고마움을 항상 먼저 생각했고 그 마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사회나 직장에서 힘들게 하는 것은 동료들이었고 주위 사람들이었다. 일만 하자면 나도 남들에 뒤질 것이 없었고 아마도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도 항상 즐거움으로 생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견제 심술 심통들이 나를 힘들게 했고 삶에 많은 장애가 되어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착하고 머리좋고 훌륭한 민족을 이토록 힘들게 살아가게 하는 주 원인은 그 좋은 머리로 뜨지도 못할 조그마한 종지로 바닷물을 길으려는 욕심과 야망에 시로잡혀있는 지도자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언제고 큰 그릇의 지도자가 나타날때 그때는 이 나라가 세상의 축이 될 것이란걸 나는 잘 알고있다.

우리 모두 지난 일들을 곱씹어보고 반성할 건 반성하여 이 나라에 이 세상에 우리 후손들에겐 더 좋은 세상, 마음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억들로 채울 수있는 그런 세상. 사싱누각같은 이 나라를 화강암 보다 더 단단한 반석위에 올려 질 수있는 응고제가 서로 되여 튼튼하고 살기좋은 대한민국으로 만들어 주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