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논본당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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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성당 120년사

2020. 4. 18.

<이 포스팅은 서귀포성당 120년사 편찬을 위한 글이므로 인용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한논본당의 설립

 

한논본당1900612일 김원영 신부에 의하여 정의군 하논(현재, 서귀포시 호근동 194번지)에 설립되었는데, 신자는 20(예비자 34)이었다. 당시 한논본당 주변에는 하논마을과 북쪽의 호근마을을 포함하여 거주민은 대략 300가구가 분포하고 있었다. 1904년에 작성된 삼군호구가간총책(三郡戶口家間摠冊)에는 당시 호근리(하논마을 포함)에는 민가 267호이고 인구는 1,150(남자 566, 여자 584)이며, 기와집은 없고 초가 1,053호가 있었다. 신축교안이 일어나기 직전 조사한 한논본당의 교세 통계표에는 신자 50, 예비신자 70명 등 총 120명의 하논마을 교민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으므로, 하논 지역에는 200명 가까운 주민들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하논성당 복원도: 110주년 기념사업>

    


산남지역 최초의 한논본당은 하논마을에 4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하여 설립하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뮈텔주교의 문서에는 한논본당 김원영 신부의 서한이 소장되어 있어 당시 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해 볼 수 있다. 한논본당 부지와 본당 및 사제관으로 사용할 초가집을 구입하였던 김원영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매입 경위를 밝혀 놓았다.


저는 페네 신부님이 안 계신 동안에 두 말 두 되지기 보리밭 한 뙈기를 145냥에 샀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페네 신부가 서울로 올라가시며 집이나 과원을 좀 사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성칠이라는 신문교우를 통해 그의 집 가까이에 있는, 위에서 말한 밭을 살 수 있었습니다. 위치는 외교인들을 개종시키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밭 위와 아래에 300가구의 많은 외교인들이 살고 있고 생수도 가까이에 있으며, 100보가 못 되는 거리에 신문교우들이 살고 있습니다.”(뮈텔문서 1900-38, 1900322)


저는 라크루 신부님의 배려로 논이 많아서 하논(大畓)으로 불리는 정의군의 마을로 교우들과 상주하기 위해 며칠 후 떠날 것입니다. 저는 교우 집 하나를 빌려 본당 집을 살 때까지 거기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뮈텔문서 1900-75, 1900610)


<하논성당 복원 사업 당시 찾아낸 하논성당터>



이렇게 한논본당 부지는 하논마을의 주민 최칠성의 집 가까이에 있는 밭을 매입하였으며, 이 부지에서 가까운 초가집을 구입한 후 성당을 신설한 것으로 보인다. 김원영 신부가 언제 본당으로 쓰일 초가집을 매입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없어서 분명하지 않다. 이와 관련 김원영 신부가 매입한 토지에 대하여는 1902. 9. 4일자 타케 신부의 편지 기록을 살펴보면, “한논집 울안에 130, 홍로 체사비아르밭 100, 신바오로밭 200, 색달리 230, 성당집 근처 100을 구입하여 신자들이 경작하도록 했다.”

  

그 후 한논본당은 신축교안을 거치면서 민군에 의해 성당 건물이 파괴되었고, 신자들이 희생되면서 교회가 피폐 되자, 타케 신부가 1902717일 홍로본당으로 이전하면서 하논성당 시대는 마감되었다.



<제주교구장과 부교구장 주교 및 교구청 직원 하논성당길 순례 : 2018.11월>


그 후 60여 년이 지난 2010년 서귀포성당 설립 ‘110주년 뿌리 찾기사업으로 한논본당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기록 미비와 직접 증언이 없어 본당터를 고증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도내 종교, 역사학자들이 참여해 찾아낸 한논본당터는 서귀포시 호근동 194번지(2필지) 13,712(4,147)이며, 국유지(산림청 소관)로 등재되어 있다.


사업추진위원회에서는 한논본당의 명칭을 하논성당으로 통일하기로 정하고, 한논본당 초가집 복원을 추진하였으나, 하논분화구가 개발금지 지역 지정으로 복원에 걸림돌이 되었지만,  하논성당순례길조성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2013420일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에 의하여 제주교구 공식 순례길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