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논본당 설립자 김원영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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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념사업

2020. 5. 15.

<이 글은 서귀포성당 120년사 내용입니다.>

 

김원영(金元永, 1869~1936)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1869년 5월 18일 충청도 공주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2년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말레이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유학 갔다가 1892년에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편입하였다. 189931831세에 한국인 중에서는 사제 중에서 9번째로 서품되었으며,

1899422일 뮈텔 주교에 의하여 페네(Peynet) 신부와 함께 제주도에 부임하였다.

 

본당 주임이었던 페네 신부는 제주에서 열병이 걸려 병 치료를 하다가 두 달도 안 되어 그해 715일 배를 타고 목포를 다녀왔으며, 이듬해 초에는 서울로 상경하는 등 선교 활동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좌였던 김원영 신부는 190054일 라쿠르(M. Lacrouts, 한국명 구마슬) 신부가 제주본당에 부임할 때까지

사실상 제주지역 선교를 책임졌던 것으로 보인다.

 

1900612일 한논본당을 설립한 김원영 신부는 젊은 나이에 서품을 받아 주임신부가 되었으며, 전교서 수신영약(修身靈藥)’을 저술하는 등 의욕적인 전교 활동으로 하논성당의 교세는 비약적으로 증대하였다. 김원영 신부는 한논본당 설립 1년 만에 신자가 138, 예비신자는 600여 명을 기록할 정도로 산남지역 천주교회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제주의 지역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없이 호교론적 교리서 수신영약을 저술하여 제주의 퇴폐풍습들을 비판하면서 신당 파괴와 신목(神木) 제거 등 엄격한 교리를 내세우는 김원영 신부의 포교 방법은 지역 토착 유지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논본당의 교세 확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천주교 교리에 위반하는 지역 유지들의 축첩과 같은 행태를 비난하고 각종 송사에서 교민들을 보호하게 되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교회와 토착세력들과의 대립과 갈등은 ‘1901년 제주민란또는 이재수의 난이라고 알려진 신축교안발발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김원영 신부는 19014월 피정 차 서울로 올라갔는데 신축교안이 발생하면서 제주도 한논본당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김원영 신부는 일단 목포 본당에 머물면서 제주에 들어갈 것을 허락해 주도록 뮈텔(Mutel) 주교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뮈텔주교는 교안의 원인이 되었던 김원영 신부의 신변을 걱정하여 요청은 받아주지 않았고, 이에 그는 새로운 부임지가 결정될 때까지 목포에서 제주의 교안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김원영 신부는 19019월 경기도 양감에서 임시로 신자들을 돌보라는 명을 받았다가 8개월 뒤인 19025월에는 황해도 봉산군 은파에서 사목을 하였다. 그리고 1905년에 경기도 행주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경향신문>의 편집 실무자로도 활동하다가 19179월에는 경기도 갓등이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그 후 19335월에는 황해도 신계본당(신계군 고면 태을리)으로 부임하여 193511월 황해도 정봉(신계군 고면 정봉리)에 새 성당을 신축하고 본당을 이전하였다. 김원영 신부는 1936년 가을 성직자 피정을 위해 상경하였다가 건강이 악화로 주교관에서 휴양하던 중 107일 선종하여 서울 용산성당 성직자묘역에 안장되었다.

 

김원영 신부의 저술로는

수신영약(1901), 회장필지(1912), 미사 참예하는 묘한 법(1921), 회장피정(1931), 신공보화(1931) 등이 있으며, 서귀포성당 110주년 성지순례단은 2010520일 용산성당 성직자묘역을 방문,

초대 주임 김원영 신부 묘소에 참배하고 기념미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