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교안(이재수의 난)의 발생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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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성당 120년사

2020. 6. 5.

1901. 5월 5일 ~ 6월 11일 사이에 제주에서 발생하였던 신축교안(辛丑敎案, 이재수의 난 또는 1901년 제주민란)은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교안 가운데 최대규모였다. 

 

<서귀포성당 주변, 1950년대>

서귀포의 한논본당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여 가던 천주교회는 사회세력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각 마을의 주민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마찰을 빚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위압적인 행동을 일삼는 교민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은 교회의 이런 모습을 폐단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폐단은 왕실에서 파견한 봉세관의 과도한 세금 징수 폐단과 결합하여 교안이 일어난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00. 2월 효돈 하효리에서 신자와 마을 주민 사이에 발생했던 폭행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하논성당에 잡혀 왔던 오신락이 죽음은 교ㆍ민 사이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악화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논란을 일으켰던 오신락 사건은 결국 교회의 월권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을 증폭시킴으로써, 이후 일반 주민들이 반교회 정서를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0155일 대정현에서 중앙의 조세 수탈에 저항한 민회(民會)가 열리면서 민란은 시작되었다. 봉세관의 조세 수탈을 시정 하기 위하여 일어난 민란은, 510일 봉세관 강봉헌은 배편으로 도망쳐버린 데다 514일 교회 측의 한림민회소 습격에 이은 대정성 진입 과정에서 일어난 발포사건을 계기로 민군과 교회 측의 대결로 치달았다.

 

<박찬식 박사의 책, 1901년 제주민란>

장두로 나섰던 오대현(吳大鉉)이 체포되자, 대정군 관노(官奴)이며 인성리 이강(里綱)이었던 이재수(李在守)가 강우백(姜遇伯)과 함께 장두로 나서게 되었다. 민군은 동서진으로 나뉘어 도민들을 규합, 세력을 강화해 제주읍성 남쪽 황사평에 주둔하였다. 이로부터 제주읍성으로 쫓겨 들어간 교민들과 민군 사이에 상호 접전이 이어졌는데, 528일 민군에 의해 포위된 제주성이 주민들에 의해 결국 성문이 열렸다. 성내로 진입한 민군은 제주성을 장악하고 교민들을 관덕정 앞에 잡아다 놓고 집단 살해 하는 참극으로 귀결되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군함 2척이 제주 해상에 출동하고 조정에서 찰리사(察理使)와 군인들이 제주에 도착하여 1901611일 이재수 등 민군의 지도자들을 체포 서울로 압송하여 감으로써 교안은 진정되었다. 그 후 190110월 민란의 주도자 이재수오대현강우백 세 장두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교수형에 처 해졌다.

<이 글은 서귀포성당 120년사에 수록할 내용이므로 인용시 참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