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머리 동산 천주교 공원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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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성당 120년사

2020. 4. 9.

<이 포스팅은 서귀포성당 120년사에 수록될 내용이므로 본문 인용 시 허락이 필요합니다.>


"내가 죽으면 서귀포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가시머리 동산에 묻히고 싶다."


아일랜드 성골롬반회 출신으로 무려 22년동안 서귀포성당에서 사목을 했던 라이언 신부는

1971년 11월 20일 목포의 성골롬반병원에서 선종 당시 유언을 하였다.


<가시머리 동산 자락에 자리잡은 홍로마을(1950년대 사진: 서홍동마을사)>


서귀포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마친 라이언 신부(Thomas Daniel Ryan. 신부)의 시해를 모신 장의차는

서귀포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가시머리 동산의 천주교 공원묘지로 떠났는데,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모여 서귀포를 사랑했던 나 신부와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위, 아래 : 라이언 신부의 장례행렬(1971.11.25)>


서귀포가 내려다 보이는 가시머리 동산의 공원묘지는 오래 전에 조성되었다.



1921년부터 홍로성당 신자들에 의하여 조성되기 시작한 가시머리 천주교 공원묘지에는

현재 가장 오래된 묘소로 1923년에 사망한 李 루가의 묘소 등 60여기가 있다.



가시머리 공원묘지는 타케신부로 부터 시작되었다.


1902년 6월 17일 하논성당을 홍로 지역으로 옮긴 타케신부는 

신축교안으로 흩어졌던 교우들을 찾아 모아 성당 부근에 주거지를 마련해 주면서,

교우들이 집단 취락지를 이루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소위 성당동네를 조성하였다.



성당 경내에는 작은 집을 여러 채 지어

무의탁 노인과 신축교안으로 부모나 남편을 잃는 고아나 과부들을 살게 하였으며 

전답을 매입하여 이를 신자들에게 경작하게 하면서 임대료를 받아 이들의 생활을 돕게 하였다.



이리하여 새로이 이곳으로 전입하는 가정과 입교자도 생겨나면서 점차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당동네에서 본당 출신 첫 사제였던 고군삼 베네딕토가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는 등 어린이 신자들도 늘어나게 된다.


 

또 한 타케 신부는 성당 동네에 거주하는 신자 사라 할머니를 비롯하여 몇몇 무의탁 할머니들을 도와주기 위해

서귀포시 동홍동 1773-1번지 일대의 밭을 매입하고 경작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밭은 타케 신부가 이임하고 나서 관리가 어려워 나대지가 되었으나

1921년부터 신자들이 이 밭에 죽은 이들을 매장하기 시작하여 가시머리 동산 묘지로 불리게 되었다.

 

<라이언 신부 선종 1주기 묘역 방문>


그리고 전해오는 말에는

타케 신부가 서홍동의 용천수 지장샘의 풍부한 수량을 이용하여

새로운 방식의 논농사를 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온주밀감나무를 도입하여 홍로 농민들에게 분양해 주었던 사실들은

홍로성당 교세 회복과 교회의 정착에 기여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이 가시머리 동산의 밭을 매입하였던 타케신부와 

고국 아일랜드를 떠나  이 곳에 묻히고 싶다고 서귀포를 사랑했던 라이언 신부.


이렇게 오늘 가시머리 동산의 천주교 묘역에서 바라본 서귀포 전경은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