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돌담길 그리고 정동길 느리게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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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걷기

2017. 11. 20.



지난 주에는 창덕궁을 다녀왔고 이번 주는  추위가 찾아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둘이서   서울 고궁 중 가보지 않은 덕수궁을 다녀 왔다


먼저 덕수궁을  관람하고  대한문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서울 시청 서소문 청사 13층의 정동 전망대에 올라가  덕수궁 전경을 찍어보고

시립미술관, 정동제일교회,정동극장,이화여고 심슨 기념관, 경교장,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경복궁역으로 코스로 트레킹했다


시청역에서  덕수궁 방향 2번 출구로 나와 대한문으로

대한문은 본래 대안문(大安問)이였는데 1906년에 그이름을 바뀌였다



덕수궁


덕수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 다시 바꾸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덕수궁은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함녕전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형식(翼工形式)의 간결한 건물이다. 1985년 중화전 및 중화문이 보물 제819호, 함녕전이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고종 황제가 마지막 승하 하신 곳이기도 하다



왕실의 상징  일월도

구 한말이라 전등도 장식되어 있다



덕흥전


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하였다. 덕홍전은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깝다. 이 건물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있다.

형광 엘이디 전구로 화사하게 꾸며 놓왔다


덕혜옹주?



석어당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宣祖)께서 임진왜란  중 의주로 가셨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셨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光海君)을 석어당 뜰 아래  꿇어 앉히고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정광헌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동서양 양식을 모두 갖춘 정관헌은  고종께서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시던 곳이며

 한때 이곳에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설계는 사바찐이 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이다. 정관헌의 지붕은 동양식으로 팔작 지붕이 덮여있고,
둘레에는 서양식으로 차양칸이 위치한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정관헌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 전통 문양을 넣었다.






화회나무

붉은  산수유 열매가  남아 있다  








석조전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축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고,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다.

  고종(高宗)께서는   석조전에서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건물 일부가 파괴되어 1955년 육군 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기도하였다.






석조전 서관(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936년 8월 기공하여 1938년 6월에 준공하였으며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화전


고종께서 1897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중화문





광명문 쪽에 단풍이 좀 남아 있다



광명문


1897년에 건립하였으나 1904년에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목조 건물로 당초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미술관 개관 시 흥천 사종과 창경궁 자격루를    진열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조금 늦게  가본  덕수궁은  가을 흔적은 사라지고 겨울 준비로 탈바꿈 하고 있었다  




대한문을 나와 덕수궁과 정동을 한문에 볼 수 있는  전동 전망대로  

서울 시청 서소문청사  (휴일 무료 개방)

우측으로 돌아  엘레베이터를 타고 13층으로   카페 "다락" 으로 찾아간다  

13층 케페 다락에서  덕수궁 전망을 볼 수 있다

흠이 있다면  통 유리이기 때문에  사진 촬영에 제약을 조금 받는다 


전체 전경


중화전

함녕전 과 덕흥전

서울 시청앞 광장

기독교 단체에서  행사가  있는 모양이다  

17mm 광각으로 바꾸어 전체 전경을 찍어 본다



성공회 건물인 듯



그냥 앉아 사진 찍기만   민망하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 시켜 아내와 같이 나누어 마신다   

고종 황제가 즐겨 마섰다는 커피

구한말  세계 열강 속에 어려운  정사 에 하시면서   커피의 쓴 맛이  유일한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나오면서 찍어본 카페는 이런 모습이다 ㅋㅋㅋ


점심먹으러 근처 "정든 다락:이라는 식당으로  

쭈꾸미 복음, 돼지 두루치기와 곤드레 밥  

부담감이 없는 쭈꾸미 복음 

돼지 두루치기도  정갈한 맛이 있다

곤드레 밥에  양념 간장  넣어  비벼 먹는다  향이 기가 막히다    



점심을 먹고  이제는 돌담길을 따라 걸어 본다  


정동길에 대한 좀더 자세한 정보를  이 블로그에서 볼려면 서울 성곽길 3구간(남대문-창의문)을 콕 누르면 된다 

 http://blog.daum.net/ojyouk/8492051



연인들이 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해어 진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것은 현 영국 대사관 건물이 옛날에는  법원이 있어 이혼한 부부들이 이혼 소송 후  

각자의 길로  갔었기 때문이란다  ㅋㅋㅋ     


서울 시립미술관




덕수궁 후문

저기 미국 대사관 까지만 걷기로 한다





돌아서 다시  내려 간다  





정동제일교회  현제 내부 수리중으로  자세히 볼 수 없다  



정동 제일교회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 1885년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러가 창립했다.

1887년 한옥을 구입하여 예배처소로 삼았으나, 교인수가 늘어나게 되자 1897년 12월 26일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로 예배당을 신축했다.

 1918년에는 한국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개화운동부터 반일 민족독립운동을 병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3·1운동 이후부터는 야간학교를 설치하는 등 선교 사업에 힘썼다. 6·25전쟁 때는 예배당 일부와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며 1977년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정동 극장


이 극장은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 1908년에 문을 열었던 원각사(圓覺社)의 복원을 이념으로 하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460여평의 대지 위에 지상 2층과 지하 3층의 철골 트러스(truss) 구조로 만들어졌다.

객석은 400석이고 무대 면적은 70여평이며, 무대 한 가운데는 직경 9미터의 회전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오케스트라 피티 승강 무대는 필요에 따라 75석의 이동객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변무대로 만들어졌다

. 전통예술뿐만 아니라 음악·무용·연극 등 모든 장르의 공연예술을 소화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95년 개관이래 15년간 전통예술의 명인들을 초대한「명인전(名人展)」,

주목받는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아트 프론티어」등과 정동길을 찾는 직장인들을 위한「정오의 예술무대」를 통해

 예술 마니아층에서 일반 관객까지 편안하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왔다.





중명전


1897년 경복궁 집옥재와 같은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계획되었으며, 건립 시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렸다.

경운궁(현 덕수궁) 담장 밖,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 서쪽에 장로교 여선교사들이 세운 정동여학교 터를 인수하여

문화각(文華閣)과 정이재(貞彛齋), 외(外) 화보(貨寶)곳간과 함께 건립되었다.
설계는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미국인 J.H. 다이(Dye)가 하였으며, 1899년 초 준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1층의 서양식 건물로 완성되었으나, 1901년 11월 화재로 전소되어 이듬해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1904년 4월 14일 대화재로 황궁이 전소되자 고종이 이 권역으로 넘어와 수옥헌을 편전이나 알현실로 사용하였다.

이때 황족의 거처가 구비되고 의정부 건물이 신설되는 등 수옥헌의 권역이 확대되었다.
1905년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수옥헌을 에워싸고 강압적으로 조약 체결을 강요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이듬해부터 수옥헌은 중명전(重?殿)으로 불리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노력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특히 1907년 헤이그로 파견한 특사 사건을 빌미로 강제퇴위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고종은 덕수궁 내 준명전(濬明殿)으로 이어하였다.

 이후 중명전은 1912년경부터 외국인구락부로 사용되다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후 형태가 변경되어 재건되었다.

 광복 이후 서울클럽, 민간인 사업체 등에서 사용하였다가 2007년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2010년 실내에 전시물을 갖추어 대중의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동 카페길

 

근대문화유산인 구 신화일보 별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에서 이병헌과 요절한 이은주가 처음 만난 곳이란다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서울 梨花女子高等學敎 Simpson紀念館)은 1915년에 준공된

옛 이화학당의  교사(校舍)로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2 년 대한민국 등록 문화제  제3호 정동 이화여고심슨기념관로 지전 되었다다    

정동 회화나무 수령 500년이 넘은 높이 17m 의 거목  


케나다 대사관








서뭄안대로로 나온다


돈의문터 이다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 :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선인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때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강북삼성병원

강북 삼성병원 주차장 옆 경교장

백범 김구의 숙소이자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이기도 하고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내부 관람은  제 블로그 "서울성곽길 3구간"을 참조로 하세용)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전차 381호  복원중


서울 역사박물관을 지나




건너편

금호아시아나 빌딩

내가 왕년에 20년 동안 몸담고 있었던 그릅 사옥 본관 ㅋㅋㅋㅋ

그 당시는 회현동  남대문  남산 타워 부근이였는데

광화문으로 나와 전철을 타고  부천으로 


부담 없이 덕수궁과 돌담길을    초겨울에 사랑하는 사람과 한번 걸어보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