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무 아리랑

오솔 2019. 2. 26. 06:19




118. 



      “ 김○○ 인사 업무담당 이사는 지난 7월 15일 트윈빌딩 동관 31층 회의실에서 그룹 회장실 소속의 임직원 120명을 대상으로 행동규범 실천사례를 발표했다.


이날 발표는 김 이사가 지난 2월 경영이념 선포 3주년 기념행사에서 < 인간 존중의 경영 > 부문에서 수상한 것과 관련하여 회장 직할조직에서 산전CU 인사 업무부분의 조직활성화 성공사례에 대한 강의를 요청해온 데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김 이사는 한 시간 반 동안의 발표를 통해 산전CU의 혁신활동을 통한 조직 활성화와 업무경쟁력을 확보하기까지의 사례들을 상세히 소개했다. “





      1993년 8월호 사보 '금성산전'에 실린 기사다.  '에이플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그 달이다. 







“ 지난 2월 19일 트윈빌딩 동관 대강당에서 개최된 그룹 경영이념 선포 3주년 기념식에서 인사 업무담당 김형철 이사가 < 인간존중 부문 >의 장려상을 수상했다. 김 이사는 91년부터 산전CU의 사무혁신을 이끌어오며 조직 내에 혁신 마인드를 확산하고 상하간에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를 위한 제도를 도입함으로서 조직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또한 혁신 프로젝트를 지속, 확산, 반복 실시하여 ‘ 우리것 화 ’ 하였으며 인사 업무부문에 있어 산전CU의 인재개발 제도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다. 그리고 과감한 권한이양과 동기부여로 부하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진작시키고 정착한 공로가 인정되어 장려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


       1993년 ‘ 금성산전 ’ 사보 4월호의 기사다.  수상 후 구자경 회장과 단상에 나란히 서있는 사진이 함께 실렸다.  내가 금성산전,금성계전,금성기전 3개사를 통합하는 '에이플랜 팀'을 맡기 넉 달 전이다.

 

윗 기사에서 사무혁신과 ‘ 우리것 화 ’ 는 < 산전CU OVA >이며, 상하간의 커뮤니케이션은 < 임원 자기관리 시스템 >을 창안하고 시행을 해온 것을 말했다.  인재개발을 위한 신제도는 < 산전CU CDP >의 < 교육 의무 이수제도>이다.


 

93년 2월 19일. 그룹 경영이념 선포 3주년 기념식장.  ‘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 ’을 그룹의 경영이념으로 선포한 지 3 년이 지났다.

 

그룹 회장실에서는 3주년을 맞이하여 경영이념의 확산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했다. 경영이념 실천 우수자를 2개 부문으로 나누어 포상했다. 지난 해 가을부터 회장실에서 대상자 신청을 받아 서류심사를 한 뒤 실사팀이 대상자의 회사로 직접 나가서 현장 확인과 심사를 거치는 등 선발 과정은 치밀했다.

최종 선정된 수상 대상자는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부문에서 우수상 수여자가 11명, 장려상이 18명, '인간존중의 경영' 부문에서는 우수상은 없고 장려상만 14명이었다. 

 

트윈빌딩 동관의 지하 대강당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그룹의 회장단, 고문, 각 CU장과 각사의 전임원이 강당을 메웠다. 행사는 장중하면서도 경쾌했다. 고객의 소리 시청, 경영이념 실천 우수자 선발 경과보고에 이어 시상이 있었다.

구자경 회장이 단상의 중앙에 섰다. 수상자들이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한사람씩 올라가서 수상 패를 받은 다음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구 회장은 일일이 포즈를 취해 주었다. 긴장 해서 얼른 내려간 수상자를 손짓을 하며 다시 단상으로 불러올리기도 했다.  기념 촬영은 수상자를 위한 회장의 배려였다.






  

기념식이 끝나고 동관 3층 이벤트 홀로 자리를 옮겨 수상자를 위한 축하 리셉션이 있었다.  그룹의 회장단, 고문, 각 CU장, 그리고 사장과 수상자들이 참석한 다과회였다. 나는 인사를 받느라 바빴다. 고문단 중에 구태회 창업고문도 참석했다. 구 고문은 10대 국회 부의장을 끝으로 6선 국회의원의 정치 역정을 마감했다. 나는 9년 동안 8대 국회부터 10대까지 3대를 보좌했다.


“ 김 이사, 성공 했어요. 축하해. ”

허리가 굽은 한분이 눈에 띄었다.  나를 보자마자 멀리서 축하객들 사이를 뚫고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참이었다. 김영태 '금성STM' 사장이었다. 축하인사는 짧막했다.


‘ 내가 성공했어요... ’  어느 누구 어떤 축하보다도 내 가슴을 찡하게 했다. 애정 어린 눈으로 나를 지켜보아온 김 사장의 관심이 그 한마디에 농축되어 있었다.  ‘ 성공 했어. ’라는 표현에는 10여 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연이 있다.  김 사장과 나 둘 만이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곡절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1979년 내가 '산전CU'에 몸을 담게 된 단초는 김 사장에게 있었다. 1971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국회 구태회 의원 비서실에 근무했다.  구 의원의 10대 국회의원 당선을 끝으로 나는 기업체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9 년여 몸 담았던 곳, 사회의 첫 출발점이었던 국회의원 회관, 무임소 장관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떠나 럭키금성(현 LG)로 옮길 때에 김 사장은 그룹 회장실의 재경,기획을 총괄하던 전무였다.  김 전무가 나를 '금성계전'에 추천했다. 여의도 정치판에서 입법부 국회부의장실 공무원이던 내 신분을 기업인 회사원으로 바뀌는 관문을 열어준 장본인이었다.

 

럭키금성 구자경 회장이 구태회 의원의 장조카였기에 내가 기업으로 진출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룹의 수많은 방계회사 중에 금성계전은 김 전무가 판단해서 결정해준 회사였다. 1979년 5월 어느날 연락이 왔다. 다녀가라기에 인사차 들렀던 나에게 김 전무가 말했다.

‘ 계전은 한창 커 가는 좋은 회사예요. ’

이 한마디로 나는 산전의 일원이 되었다.  나는 '금성계전'이라는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일찌기 아는 바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 내가 읊조리고 있는 '김상무 아리랑' 가사의 원류가 바로 이때 발원을 잉태했다. 1979년 5월 25일이었다.


당시 금성계전은 5 년 된 신설회사였다. 신설회사가 그러하듯 성장은 눈부셨다. 조직도 힘이 있고 활력이 넘쳤다. 산업용 전기기기 제조회사로 매년 50%내지 70% 매출 신장이었다. 본사는 충무로 3가의 최신식 고층 건물인 극동빌딩 17층에 있었다. 공장은 오산과 청주 두 곳으로 2천 명이 근무했다.

나는 회사원으로 적응해나갔다. 출퇴근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전에 비해 러시아워 짐짝 노선버스를 갈아타며 9시 정해진 시간에 출근한다는 것부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직장을 옮긴다는 것, 환경이 바뀌는 어려움은 감수해야 했다.


1982년 2월에 김영태 전무가 금성계전의 부사장으로 부임했다. 3 년만의 해후였다. 나를 계전으로 추천한 장본인과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기이하면서 운명과도 같은 재회였다. 김 전무가 아닌 부사장으로 나는 과장에서 갓 승진한 신출내기 부장으로서 총무부장이었다. 

그러나 김 부사장은 ‘ 점령군 부사령관 ’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계전은 김 부사장 말처럼 ‘ 한창 커가는 좋은 회사 ’는 분명 아니었다.

 

이 당시 금성계전은 중전기 일원화의 정부정책으로 초고압 사업을 효성그룹으로 넘겨주어야 했다. 이미 80억 원의 투자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10.26 박정희 시해사건 이후 전두환 정부의 5공 초기 갑작스런 정부의 정책의 변화에 발목이 잡힌 셈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엔고, 2차 오일 쇼크의 여파가 밀려왔다. 고금리에다 기업의 투자마인드도 바닥을 헤맸다. 

경영실적은 갈수록 나빠졌다. 80년,81년 매출은 312억으로 제자리 걸음이었고 당기순이익은 12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청카피 한 장도 아끼자는 등 윤욱현 사장 명의의 경비절감운동 회람이 돌았다.


1981년 여름 어느날, 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김영태 사단'이라고 알려진 이헌출 부장을 팀장으로 한 감사팀이 들이닥쳤다. 경영 실태를 파악한다며 두어 달 본사와 공장을 휘젓고 다녔다. 관리부문의 부서장들은 문서 창고에서 먼지를 털어 꺼낸 전표철, 기안 품의서 장부를 들고 긴장된 얼굴로 회의실에 진을 친 감사팀에게 불려 들어갔다. 특히 자금을 다루는 재경부서는 죽을 맛이었다.


감사의 뒤끝은 참담했다. 두번이나 사장을 역임하며 창업 공신이나 다름 없는 윤욱현 사장이 물러났다. 터주대감 임원으로 기세등등했던 윤봉순 상무와 회사의 돈줄을 쥐고 있던 이성원 재경본부장도 하루 아침에 옷을 벗었다. 

그 자리에 최선래 사장과 김영태 부사장이 한 팀이 되어 계전에 부임했다. 사장과 부사장이 한꺼번에 오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초강수의 조치로 보였다.  이를 두고 삼삼오오 돌아앉아 ‘ 점령군이 왔다 ’고 했다.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사장 명의의 긴급조치가 수없이 발동되었다. 관리자는 아침 여덟 시 출근에 밤 열시 이전 퇴근 금지였다. 10원 짜리 전표까지 모든 결재는 부사장까지 올렸다. 점심 저녁식사는 전원 회사 지정식당이었다.

새로온 경영진은 경영진대로 새 틀을 짜는 데 골몰할 때 기존 조직은 뒷치닥거리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관리자들은 계속되는 전령군의 쇼크요법에 다들 나가떨어질 지경이었다. 회사에 온지 3 년만에 겪는 살얼음판은 나로서는 의외였다. 갑자기 점령군까지 맞이하는 상황이 나를 어지럽게 했다. ‘ 계전은 한창 커 가는 좋은 회사야. ’라는 당시 김 전무의 말이 새삼 무색했다.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금성전선 기계사업부 안양공장 현장을 둘러보고 오는 참이었다. 회사로 다시 들어가기엔 늦은 저녁시간이라 강남의 불고기집에 마주 앉았다.

“ 운명입니다. 부사장님과 계전에서 만나 뵐 줄은.... ”

“ 글쎄 말이야. 누가 아나? ”

김영태 부사장은 한 쪽 눈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 그런데 어째서 절 여기로 보냈습니까. ”

나는 따져 물었다.

“ .................... ”

김 부사장은 빙긋 빙긋 특유의 미소로 일관했다. 심각하게 말하는 내 표정에 김 빼기라도 하듯 느긋했다.

“ 잘 나가는 회사라고 보내셨는데 점령군이 왜 필요합니까? 부사장님은 왜 여기 오셨습니까? ”

몇달 동안 마음 속으로 곰씹었던 말이 드디어 처음으로 터져나왔다. 김 부사장은 조용하게 한마디 했다.

“ 김 부장, 좀 있어봐. 회사란 다 그런 거야. ”


다음해, 3월 1일자로 나를 심사부장으로 발령했다. 홍기태 자금부장이 총무부로 가고 유창섭 심사부장이 자금부로, 내가 총무부에서 심사부를 맡는 삼각 이동이었다.  전격적이어서 ‘ 포클랜드 작전’으로 통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포클랜드 전투가 치열할 때였다.


내가 인사를 담당하는 부장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일언반구 없었다. 심사부장으로 회사 경영에 숫자를 다루는 일은 나에게 전혀 의외였다.  회사에 온 지도 얼마 안 될 뿐더러 경영기획과 심사분석은 나하고 어울리지 않는 분야였다. 기하에 집합, 미적분 수학은 했어도 상업시간에 주판 틔기며 차변 대변, 대차대조표에 지겨워했던 중학교 학창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내가 심사부장이라는 순간 머리가 앗찔하면서 스트레스를 주었다.


김영태 부사장한테 항의를 했다.

“ 회사에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은데 어쩌자고 심사부를 맡으라고 하십니까.  숫자로 홈 파는 일은 못하겠습니다. ”

" ................. "

김 부사장은 빙긋빙긋 웃기만 했다. 나의 불평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 후 굽은 상체를 굽혀 앞으로 바짝 당겨앉으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 어이, 김 부장, 너 언제까지 총무만 하고 있을 거니? ”

“ ............... ”

나는 머쓱했다.

“ 잘 모르면 배워서 해야지. 내가 도와줄게. 한 번 해봐. ”


그 순간 나에 대한 배려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회사 인생을 시작했으면 제대로 해야 지.’ 김 부사장이 나한테 하는 충고였다. 나는 그 날 늦게 퇴근하면서 신촌 로타리에 내려 홍익서점을 둘렀다. 주섬주섬 경영기획, 심사, 회계, 경리에 관한 책 여덟 권을 샀다.



 

김 부사장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 금성계전 5개년 장기전략 >을 수립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말은 내가 익히 들어왔으나 기업이 '전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5개년의 장기 계획을 짠다는 말은 당시로서 생소한 시기였다. 84년부터 88년까지 장기계획은 금성계전으로서 비전이었다.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종업원들의 사기를 희망으로 환원시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 전략 수립 과정은 지지부진했다. 나는 김 부사장을 찾아갔다.

 

“좀 갔다 와야겠습니다.  현업에 밀려 도저히 집중 할 수가 없습니다”

“꼭 회사 밖으로 나가야 되겠어?”

“인포멀 그룹 활동도 아니고... 이건 아닙니다.”

“허허, 어쩔 수 없네.”


나는 각 사업부의 기획부장, 기술 개발부장들을 이끌고 산정호수에 들어갔다. 몰고 들어갔다는 표현이 오히려 합당했다. 사업부의 기획부서 실무자까지 포함해 모두 십여 명이었다. 우선 닷새의 일정 계획이 목표였다. 나는 행선지를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다. 당일 날 새벽 극동빌딩 마당에 대기한 마이크로버스에 일행을 실었다. 

 

목적지인 산정호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부장 세 사람을 소집했다. 김영중, 이원규, 이정훈 부장은 나보다 모두 고참이었다.

“ 우리기 여기까지 온 이상 뭔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냥 온 게 아닙니다. 회사에서 너무 질질 끌었어요. 지지부진했던 걸 여기선 닷새면 됩니다. 충분해요. ”

부장 세 사람은 말없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 몇 가지 지켜주실 일이 있습니다. 피곤하니 빨리 끝내자 하지 마십시오. 식사 중에 반주 한잔 하자 하지 마십시오. 고스톱하자 하지 마십시오. 회사에 걸려오는 전화 없도록 하세요. 그래서 행선지를 미리 알려드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온 이상 나를 따라 주십시오. 아래 실무자들이 우릴 보고 있습니다. ”

긴장감이 흘렀다.


호텔 2층 중앙 홀에 칠판을 세 개를 설치했다. 토론을 한 내용들이 사방의 벽을 메웠다. 그야말로 전선의 전략 사령부를 방불하게 했다. 다들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서너 시간 밖에 잠 잘 시간이 없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장들이 솔선해서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과장들이나 실무자들도 오히려 흥이 났다.

뭔가 머리에 그려지고 만들어져 가는 작업 성과가 눈에 보이고 서서히 손에 잡혔다. 우리가 잠자지 않는 시간만큼 회사의 내일이 더 빨리 열리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심전심이었다. 나는 나대로 먼저 일어나고 늦게 잤다. 그날 그날 작업의 최종 정리는 심사부장인 나의 몫이었다.


나흘 째 되는 날 최선래 사장이 소문도 없이 산정호수까지 먼길을 찾아왔다.  김용철 과장이 표현했 듯 ‘ 대단한 사건 ’이었다.  점심으로 갈비탕에 커피 한 잔 그리고 테라스에서 산정호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고 최 사장은 돌아갔다. < 금성계전 5개년 장기전략 >을 수립에 대한 사장으로서 관심과 격려였다. 

 

엿새째 되는 날 당초 약속대로 심사부서를 제외하고 모두 서울로 돌려보냈다.

“ 김 부장님이 좋아하는 소주 한잔, 이 부장이 좋아하는 고스톱 한번 못해 미안합니다. 서울 나가서 한 잔 사지요. ”

나는 세 부장에게 감사했다. 

“ 좋아요. 동아 꼴뱅이에, 일출봉 가서... 우리 한잔 합시다. ”

부장 세 사람은 나를 위로했다. 나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일행들보다 이틀을 더 있다 산정호수를 나왔다. 심사부의 김종식 과장, 이상갑 사원들과 최종 정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 금성계전 5개년 장기전략 >. 이 ‘작품’은 전사 간부 워크샵을 통해서 보고하고 공유했다. 김영태 부사장의 지시로 이헌조 그룹 기획조정실 사장한테 직접 가서 별도로 보고하기도 했다. 이헌조 사장은 계전 부사장을 역임했기에 5개년 장기 전략의 의미를 이해했다.

 

자존이 싹틀 때 피곤한 줄을 몰랐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었다.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누군가가 리더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 보여주었다. 그것이 산정호수에서 건진 우리들의 소득이다. < 금성계전 5개년 장기전략 >이 ‘작품’이 아니라 그 과정이 더 큰 작품이었다. 한 해가 지난 뒤 1년 연동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다시 산정호수를 찾았다. 두어 사람의 변동이 있었다.

 ‘ 산정호수 시절 ’은 그 때 참가했던 누구에게도 기억이 생생하다. 모두 그 때를 회상했다. 회사 생활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장의 그림으로 남았다.


이어 일본 능률협회의 컨설팅으로 NBP( New Business Plan )을 착수했다. 심사부장이 사무국장이었다. 경영을 정상화시키고 2 년 후 김영태 부사장은 금성사 부사장으로 전출하였고 이후 나는 2년 8개월 동안 심사부장을 했다. 그때까지 가장 장기간 재직한 심사부장이었다.

세월이 10여 년 흐른 이날. ‘ 김 이사, 성공했어! ’, 이 한마디는 김 사장과 나 만이 아는 암구호 같은 축하였다.


 

얼마 후, 구자경 회장이 수상자 부인 10여 명 전원을 초청했다. 트윈빌딩 5층의 중국식당인 도리원에서 점심식사에 불렀다. 남편들에 대한 내조에 감사하다는 표시였다. 그룹의 구태회 명예회장, 허준구 회장이 모두 참석했다.

이날까지 집사람은 내가 그룹 경영이념 선포 3주년 기념식에서 수상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회사에 일어난 일에 시시콜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118화 끝)


 


대하 역사 논픽션 '김상무 아리랑'의 연재를 속개하셨습니다.
그 역사의 한자락에 몸담았던 저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비록 성공했다 자부할 수는 없어도, 치열했고 긍지 넘치던 시절이었습니다.
함께 한 모든 동지들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