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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분처상(分處像)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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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관계

2008. 5. 14.

 아래 글은 웹사이트에서 퍼온 글입니다. (오소운)

 

영주 분처상(分處像)의 비밀



9세기 암각상에 예수제자 이름이…18세기 머리 없어진 채 발견

 

▲ 위의 그림은, 중국 둔황 천불동에서 발견된 그리스도상 복원도 (김호동,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예수님이 승천한 뒤 12사도 중 한 사람인 토마가 동방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인도에 와서 고대 동방기독교의 첫 선교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그가 지구의 동쪽 끝 한반도에 왔다간 흔적을 남겼다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놀라게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그럴 법한 일이 일어났다. 1987년 8월 어느날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 분처바위에서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암각상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기독교 관련상이라느니, 심지어 토마상이라느니 하여 충격적인 화제를 던졌다. 특히 기독교계에서는 이 뜻밖의 일을 대서특필하고 흥분에 설레었다. 성역화 논의까지 나오는 가운데, 지금도 찾는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유적을 발견한 지 3년 뒤 필자는 현지의 한 중학교 교장의 안내를 받으면서 영주에서 안동으로 넘어가는 비포장 고갯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길가에서 오솔길을 헤집고 한참 들어가서야 상이 나타났다.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잡은 상은 나무숲 속에 묻혀있었다. 그로부터 4년 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과 함께 다시 가서 좀더 자세한 현장조사와 상 표면에 나타난 명문을 탁본했다. 돌아와서는 탁본과 사진자료에 관한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그를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견해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8년이 2002년 여름, 한 텔레비전 방송국 취재팀과 함께 다시 찾았다. 어느새 길은 깔끔하게 포장되고, 주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관계기관의 협조 속에 1박 2일간의 심층 취재를 마치면서 그해 가을께 문화 한마당에 곁들여 학술모임도 열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 학술모임만 가졌어도 오늘의 이 글은 좀더 명석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토마’, ‘예수화왕(耶蘇花王)’의 글자 새겨


 

 

 

▲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속칭 왕머리) 분처바위에 있는 분처상과 그 좌측에 암각된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 상의 가슴 부위에 양각된 십자가 모양이 보임(필자 제공)

 

분처바위에 있다고 하여 ‘분처상’이라고 한다.

분처상’(혹은 ‘토마의 분처상’, ‘토마상’)이라고 하는 이 암각상은 그 터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속칭 ‘왕머리’라고 하는 왕유동(王留洞: 왕이 머무른 마을이라는 뜻)은 고려 31대 공민왕이 중국으로부터 처들어온 홍건적의 난리(1361년)를 피하기 위해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 해서 붙여진


손·발모양 기독교양식 뚜렷

상은 높이가 족히 5m나 되는 대형 암각상이다. 상면(像面)과 암면(岩面)에는 3점의 음각한 명문이 있다. 그 한 점은 상의 좌측 암면에 네모꼴로 새겨진 4자의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이고, 다른 두 점은 상면의 하단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와 ‘명전행(名全行)’이란 한자 명문이다. 이러한 명문과 더불어 특이한 조형기법과 문양이 확연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아무런 명문도 없는 불국사 출토 돌십자가나 경주 출토 성모 마리아 소상에 비하면 여러 모로 고증이 가능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이 낯선 상에 관한 학제간의 종합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무어라고 단정적인 결론은 내릴 수가 없다. 이 시점에서 논급할 수 있는 것은 보통 불상과는 다르며, 기독교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론과 몇 가지 문제점이다. 이것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상관 지을 수 있는 논의라서 더욱 주목된다.


분처상을 기독교와 연관 짓게 되는 근거는 우선, 조형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일견하여 눈에 띄는 것은 수세인데, 왼손가락 끝은 빗장뼈에 댄 채 손등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외반(外反:바깥쪽으로 돌림)하고 있어 불상의 수인(手印)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수세는 1908년 중국 둔황에서 발견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 즉 경교(景敎)의 인물상(당나라 말 제작, 일부 학자는 그리스도상이라고 주장)에 나타나는 수세와 비슷하다. 수세뿐만 아니라, 상의 구도나 복장의 화려함도 두 상이 서로 유사하여 불상과는 구별된다. 발가락의 노출도 기독교(예수)상의 보편적 기법이다. 특기할 것은 필자의 초보적 관찰로는 상의 가슴 부위에 양각된 십자가 모양이 보인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문양에서도 그 근거가 엿보인다. 상의 옆구리와 하부에 음각된 문양 중에는 목단이나 장미 같은 꽃무늬가 보인다. 그리고 분처상의 고리형 목걸이 문양과 겉옷의 가로줄 문양은 둔황 경교화상의 목걸이나 겉옷 문양을 방불케 한다. 이와 함께 히브리어의 ‘토마’란 글자나, 한자의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은 비록 그 암각 시기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이 상이 기독교와 관련된 상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인근 주민들의 전언도 기독교상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상을 지켜봐 온 주민들은 종래 이 상 앞에서만큼은 물상숭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일치하게 증언한다. 사실 현장에서 그러한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불상이나 기타 상서롭지 않은 대상물만 있으면 예외없이 불공을 드리거나 기복하는 한국인들의 전래 관행에 비춰보면 짐짓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 물상숭배를 불허하는 기독교 같은 유일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짐작해 본다.


 

 

 

▲ 노출된 상의 발가락과 그 밑의 여러 가지 꽃문양.

 


현대 히브리어 사용등은 의문


이상의 몇 가지 근거로 미루어 분처상이야말로 기독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 암각상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나아가 이 상을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를 시사하는 증거유물로 일단 추정해 봄직하다. 그러나 상의 실체를 밝히는 데서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가 포착되고 있다. 그 중 한가지는 명문의 내용이다. 전문가들의 해석에 의하면, ‘토마’란 음각자는 현대 히브리어 문자라고 한다. 여기서의 ‘토마’는 예루살렘의 초기교회 시대인 1세기 중엽에 인도 서남부와 중국까지(중국까지 왔다는 설은 부정됨) 와서 전도활동을 했다는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인 토마일 것이다. 따라서 분처상을 토마상으로 본다면 히브리어, 그것도 현대 히브리어로 글자를 새겼다는 것은 시기성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례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상의 조성 연대가 9~10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발견된 토마 관련유물 중에는 히브리어로 명기된 유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1547년 남인도 서해안의 성 토마산에서 발굴된 석비에는 십자가와 함께 현지어인 펠레비어로만 비문이 씌어있다. 그리고 토마의 시대는 물론, 11세기에 이르러 동서 교회가 결별할 때까지만 해도 고대 히브리어가 상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토마’라는 현대 히브리어 암각문은 상이 조성된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토마‘라는 글자보다 더 문제시되는 것은 이른바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이다. ‘야소화왕’은 예스 그리스도에 대한 존칭이며, ‘인도자’는 사도나 전도자로 풀이된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야소’란 한역(漢譯) 지칭의 출현시기가 문제다. 781년에 중국 시안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하고 있다.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에 서방 카톨릭이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 비로소 쓰게 된다. 한국의 경우, ‘원효문집’에서 예수를 불교식으로 ‘법왕자(法王子)’라고 칭한 실례는 있으나, ‘야소’로 한역하거나 음사한 적은 없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전무하다. 따라서 한자 명문도 히브리어 글자처럼 상이 조성된 후에 보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명전행’이란 명문에 관해서는 가까이에 있는 순흥면 읍내리 고분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全行)’이란 같은 이름의 석장이 등장하는 점을 들어 당대의 명장인 이 전행이 분처상도 제작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400년께 고구려 광개토왕이 영주와 순흥, 안동 등 소백산 내부 지역을 일시 통치하였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황론적으론 그럴 법한 설이다. 그러나 전행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어서 단정은 이르고 숙고가 요망된다. 그밖에 ‘전행’을 ‘전차(향기나는 풀에 버금가다라는 뜻)’라는 석장 전행의 호로 해석하는 이도 있는데, 증거가 미흡하다.

 

 

  상 왼쪽에 새겨진 [도마] 라는 히브리어 글짜

 


고대기독교 전파 중요실마리

한마디로, 분처상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관련이 있을 개연성은 짙지만, 아직 연구가 미흡해 무어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이 글은 연구의 단서일 뿐이다. 분처상의 해명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인 두부가 떨어져나감으로써 실체를 밝히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몇몇 주민의 얘기로는 임란 때 왜군이 상의 목을 잘랐는데, 30~40년 전만해도 두부가 상 앞에서 딩굴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곳 어딘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두부의 수습과 복원이 급선무다. 아울러 관련학계의 진지한 협동연구도 요망된다.


오늘도 분처상은 그 무언가를 증언하면서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다. 무언 중의 유언, 그것이 바로 역사어다. 이 역사어를 알아듣지 못해 생긴 것이 이른바 ‘역사의 비밀’이다. 역사의 비밀은 역사의 심연 속에 일시 가려진 것일 뿐, 영원은 아니다. 그 심연을 파헤치다 보면, 어느날엔가는 그 비밀이 허무해지는 법이다. 분처상의 비밀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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