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의 특별기고] ‘金大中’ 이름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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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비평

2009.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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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의 특별기고]

 ‘金大中’이름에 얽힌 이야기

 
 
야당지도자 김대중씨가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있던 1980년대, 나는 법조계 친구로부터 농담조로 이런 제안(?)을 받았다. “요즘 법원에서 개명(改名)허가를 받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인데 당신이라면 그 자리에서 해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내 이름이 그분과 똑같은 ‘김대중’이라 그로 인해 기자로서도 피해(?)가 있을 것이니 쉽게 개명을 허가해 주리라는 의미였다.

 물론 나는 웃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군부세력과 싸우고 있는 그분을 존경하고 격려하고 있던 차라 내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영광이라면 영광이지 결코 오명의 대상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치인 김대중’을 처음 만난 것은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야당인 신민당을 출입하게 된 1969년의 일이었다.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곁에 있던 동료 기자들이 재미 삼아 이름의 원조(元祖)를 캐물었다. 그때 나는 이름에 관한 한 내가 원조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30세였던 나는 내 이름의 연조는 30년이지만, 김대중 의원(당시)은 민주당 대변인 시절 ‘김대중(金大仲)’이라고 이름 끝자를 ‘버금 중’으로 썼다가 1960년 초에 지금의 ‘金大中’으로 이름을 바꿔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기에 ‘金大中’의 이름 역사는 10여년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신민당 주변에서는 그가 세 번인가 출마했다가 떨어졌는데 이름을 바꾼 뒤 비로소 당선돼 이름 덕을 봤다는 말이 있었다. 그가 이름을 바꾼 이유도 어느 성명철학자가 ‘金大仲’은 中자에 人(사람 인)이 들어가 세로로 볼때 좌우 동형(同形)을 깼다고 해서 人자를 떼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의원은 자기 이름이 더 오래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즉 자신의 원래 호적에는 가운데 중(中)으로 돼있는데 도중에 버금 중(仲)으로 갔다가 다시 원상회복한 것이니 자기 이름이 오리지널이라고 했다. 내가 그분의 원래 호적까지 살필 필요도 없고 누가 오리지널이건 간에 그분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을 타박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원조’를 양보해도 그만이었다.

 나는 1971년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 대통령후보의 야당 캠프를 담당하며 그의 당선을 위해(기자로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전국을 누볐다. 그는 과연 초인적이었다. 4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하루 5~6군데를 유세하며 강행군했다. 우리 기자단이 녹초가 됐을 때도 그는 기자들을 이끌고 앞장서 국민에게 다가갔다. 그때도 김 후보는 북한문제, 통일문제에 열성적이었다. 유세의 연설 상당부분을 통일의 의지로 채우곤 했다.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투표 전날 우리 수행기자들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연일 강행군으로 거의 막히다시피 한 목소리로 “청와대서 만납시다”라고 말했던 것을…. 유세 도중 김 후보가 자신의 승용차에서 내려 뒤따르던 기자 버스에 동승해 우연치 않게 이름이 같은 ‘김대중 기자’의 옆자리에 앉아 담소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당선되시면 정말 훌륭한 대통령이 되셔야 합니다”라고 덕담을 했을 때 김 후보는 “물론이지요. 우리나라가 통일될 때 내가 남쪽을 대표하는 사람이 돼야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통일이 먼 훗날의 이야기로 여겨지던 때에 ‘남쪽을 대표하는 통일 지도자’라니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를 시공을 초월(?)한 ‘통일 대통령’으로 부각시키려 했고 그것이 그의 정치적 야망에서 집착으로 굳어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김대중씨는 26년이 지난 1997년에 마침내 대통령의 꿈을 이뤘다. 그는 당선 다음날부터 북(北)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대북문제에 보수적이었던 조선일보와의 숙명적(?) 대립이 시작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나는 김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두 번이나 청와대에 불려가 이른바 독대(獨對·단둘이서 만나는 것)를 했다. 기자로서 대단한 영광이고 또 권력자를 옆에서 직접 볼 기회라고 할 수 있지만 그날만은 그런 자리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조선일보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도와달라는 것이었고 구체적으로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두 번째 독대는 김 대통령의 방북 이후의 일이었음)을 지지해달라는 주문이었다. 불행히도 나는 그분의 대북 열정에는 크게 감복하면서도 그의 성급한, 모든 조건과 요소를 배제한 대북지상(至上) 노선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나는 “우리가 비판한다고 ‘햇볕’이 망가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도 있고 찬성도 있는 것이니 대통령께서는 소신대로 밀고 나가십시오”라고 말씀 드린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 이후 조선일보사에 세무조사가 들어왔고 나는 개인적으로 모든 가족의 성원이 계좌추적을 당하는 ‘신체검사’를 톡톡히 받았다. 대통령이란 자리의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문제는 그가 현직을 떠난 이후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햇볕정책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고 북한을 위한 발언을 계속했다. 노무현 정권 때는 그의 지도노선이 잘 먹혀 들어갔고, ‘좌파 10년’은 북한 김정일에 관한 한 밀월시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의 대북정책이 DJ의 ‘햇볕’을 지우는 쪽으로 가자 그분의 발언에는 오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를 찾아오는 야당인사에게 대(對) 이명박 투쟁을 선동했고 강연자리에서 현정부를 몰아세웠다. 그분의 말투에는 그의 ‘햇볕’을 저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적개심이 돋보였고 ‘북한’에 대한 이해와 친근감이 묻어있다. 사물 판단의 모든 기준이 북한인 것만 같았다.

그분은 지금 84세다. 현직으로 할 일이 있고 전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를 연배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햇볕정책에 대한 집착이 너무도 강해 총명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내가 그분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누가 개명이라도 건의하면 어떤 대답을 할지 자신이 없어졌다. 내 이름을 통해 떠오르는 그분의 이미지가 싫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