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노아속회 해설자료(2010.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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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 자료

2010. 3. 21.

 

 

 

◆노아속회 해설자료(2010. 3. 19.)◆

 


 나는 사명자(使命者)

 


오늘 속회 공과 주제는「나는 사명자(使命者)」이다. 내가 사명자라는 것을 깨닫고 나에게 명(命)을 내리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얼마인지를 모르고, 자기의 가능성이 무한대함을 깨닫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을 허송하는 사람은, 하루 빨리 자기의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수십억짜리 바이올린을 빵 몇 개와 바꿔 먹은 영국 사람, 석유광산을 모르고 헐값에 판 미국 농부 같은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옛날 평양의 콩나물 장수 백 과부 할머니 같이 근검·절약하여 모은 돈을 교회와 나라 위해 바친 애국신앙과, 일본인으로서 국법을 어겨가며 유대인 6천명을 살려낸 스기하라 같이 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사명자의 마땅한 길이다. (오소운)

 

1. 5달러짜리 바이올린

 

추운 겨울 저녁.

영국 런던 시내의 한 악기점에

남루하게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의 옆구리에는 헌 바이올린이 들려져 있었다.

 

"무얼 찾으십니까?" 주인이 묻자 그는

"저는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어요.

이 바이올린을 팔 수 없을까요?

저는 무엇이든 먹어야 하니까요.

얼마라도 좋아요. 이걸 사주 세요."

 

악기점 주인 벤츠 씨는

5달러를 주고 그 바이올린을 샀다.

 

벤츠 씨는 그 사람이 떠난 후

5달러를 주고 산 바이올린을 무심코 켜보았다.

 

활을 줄에 대고 한 번 당겨보니

놀라운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랄 정도로 풍부한 음색과 선율이었다.

 

벤츠 씨는 급히 환한 불을 켜고

 

 

바이올린을 이리저리 관찰하기 시작했다.

먼지투성이의 바이올린 속을 들여다보고

그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엔 기절할 만한 글씨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 Antonio Stradivari, 1704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1704년 제작)

 

 - Antonio Stradivari, 1704  -

 

악기점 주인 벤츠 씨는

그 바이올린이 행방불명되어

1~2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으려고 애썼던

거장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임을 알게 되었다.

 

악기점 주인은 얼른 밖으로 나가

바이올린을 판 사람을 찾으려 했으나 허사였다.

 

배가 고파서 빵 몇 개 살 수 있는

단돈 5달러에 팔아 버린 바이올린은

무려 10만 달러짜리이었던 것이다.

실로 안타까운 이야기다.

 

그 남루한 바이올린 주인이

바이올린의 가격을 제대로 알아

소정가격에 팔 수 있었다면

그는 이렇듯 비참한 생활을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 만큼이나

깊이 생각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나 또한 그 바이올린 주인처럼

10만달러보다 더 귀중한 나의 삶을

단지 먹고 살겠다는 이유만으로

혹시 5달러짜리로 취급하고 있지나 않은지….

 

2. 보배를 보배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

 

세상에는 약은 것 같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1) 데이비스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과 다이아몬드로 공기놀이하는 아프리카 소녀 이야기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오지에 갔을 때 경험담이다. 소녀들이 공기놀리 하는데 콩알만 한 다이아몬드로 하질 않는가? 너무 부러워 팔라고 하니까 돈은 필요 없고 초콜릿이나 달라 한다. 그 돌을 어디서 구했느냐 하니까, 저기 골짜기에서 주워 왔는데, 뱀이 많아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국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개발된 것이다.

 

2) 석유광산을「냄새 나는 썩은 물만 난다」며 헐값에 판 농부 이야기

 

미국 개척시대에 한 농부가 서부의 넓은 땅을 사서 농사를 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물을 파면 시커먼 물만 나오는데 냄새가 고약하여 싼 값에 팔아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그 땅을 산 사람은 그 냄새나는 물이 석유임을 알고 이를 개발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3. 수백억 재산을 교육 사업에 기증한 콩나물 장수

 

백선행은 이름이 없었다. 출가 전에는 아가, 출가 후는 새댁, 남편을 잃고는 백 과부라 불렸다. 그런 그가 많은 선행을 하여「백선행」으로 불렸다. 백선행은 1848년 11월 19일(음) 경기도 수원에서 아버지 백지용(白持鏞)과 어머니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하여 14세에 가정이 넉넉지 못한 수원의 안재욱(安裁煜)과 약혼하고 16세에 결혼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안 씨에게 모녀의 일생을 의탁하려 하였던 것이었으나 그의 남편이 병약하여 결혼 8개월 만에 사별하는 불운을 만나게 되었다. 남편을 살리기 위하여 백약을 다 썼으나 아무 효험이 없자 자신의 왼쪽 무명지를 잘라 남편 입에 피를 흘려 넣어 1주일간 생명을 연장시킨 열부(烈婦)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과부된 딸이 너무나 어려 다시 개가시켜 팔자를 고쳐줄까도 생각했으나“20세 전 과부는 세 번 시집을 가야 불행을 면한다”는 미신의 공포와 또 딸을 시집보냈을 때 오는 자신의 고독함 등의 이유로 모녀 과부는 한평생 서로 의지하여 살기로 하였다.

 

가. 재산 모으기

 

두 과부는 아침에 밥을 지어 저녁까지 먹고, 해 짧은 겨울에는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버텼다. 나무 한 단, 쌀 한 톨이라도 살뜰히 아꼈다.‘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를 생활신조로 삼고 열심히 일하다보니 과부의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이렇게 악착같이 10년을 버티자 150냥짜리 집 한 채와 1000냥 남짓 현금이 생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상여 뒤를 따를 상제가 필요하다 하여, 먼 조카뻘 되는 사람을 부모의 양자로 삼았다. 장례가 끝나자마자 그 양자는 백선행은 출가외인이라 상속권이 없다면서 어머니와 함께 10년 고생으로 모은 전 재산을 빼앗기게 되었다.

 

백 과부는 매일 오지동이를 머리에 이고 음식점을 순회하여 뜨물과 음식 찌끼를 얻어다가 돼지를 키웠다. 또 봄여름 내내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고치실을 뽑았으며, 물레와 베틀을 사들여 매일 밤이 늦도록 무명과 베와 명주를 짜서 팔았다. 그는 그렇게 많은 명주를 짜고도 고운 옷 한 벌을 해 입지 않았고 화장 한 번을 하지 않았다.

 

그는 모은 돈의 관리도 나름대로 철저하였다. 돈이 조금씩 모이면 헝겊에 둘둘 말아 버선목에 찔러 넣거나 허리춤에 집어넣는다. 돈이 좀 더 많아지면 이불솜 틈에 끼워 넣기도 하고 삿자리를 들추고 방바닥에 깔아 감추기도 했다. 맨손으로 다시 시작한지 10년이 지났다. 이제 그녀는 일 년에 50여 석을 추수하는 중농이 되었다. 이후 그녀의 재산은 불길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근검저축의 생활을 계속하며 해마다 추수한 벼를 가지고 다시 땅을 늘려갔다. 그의 나이 40여 세가 지날 때 그의 재산은 기백석지기로 늘어났다.

 

나. 재산 지키기

평양 부윤(府尹) 팽한주는 악명 높은 탐관오리였다. 박구리에 사는 백 과부가 기백석 추수의 재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죄 없는 여인을 잡아다 하옥했다. 팽한주는 백 과부에게 갖은 누명을 씌운 후, 재산을 바치면 풀어주겠노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러나 20년간 과부로 남 못 당할 곤란과 풍상을 겪은 백 과부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못하는 짓이 없던 팽한주 부윤으로서도 고집 세고 뻣뻣한 백 과부의 재산만은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백 과부는 옥중에서 10여 일이나 고생하다 그대로 방면되었다.

(고 백선행 여사 일생2’, ‘동아일보’ 1933년 5월11일자.)

 

 

 

탐관오리만 백 과부의 재산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과부 혼자 사는 집에는 수시로 강도가 침입했다. 백 과부는 강도의 완력 앞에 맨손으로 저항하다가 뒷머리와 앞이마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때 생긴 얼굴 흉터는 늙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백 과부는 현금을 벽지 안쪽이나 이불 속 등 집안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백 과부를 때려눕힌다고 숨겨놓은 돈을 찾을 수는 없었다. 목에 칼을 들이대도 백 과부는 찌르라고만 할 뿐 돈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백 과부 집에 숱한 강도가 침입했지만, 엽전 한 닢 훔쳐나간 강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위문 간 사람들이 “가지고 계신 돈을 조금 내어주셨으면 이런 곤욕을 보시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하며 위로하면 백 과부는 항상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다 못 나눠주는 돈을 밤중에 달려들어 사람 때리고 중상 입히는 놈에게 어찌 주겠나? 내 목숨이 없어져도 돈만 남아 있으면 그 돈이 좋은 일에 귀하게 쓰이게 될 것을 아는데, 눈을 뜨고 내 손으로 그런 나쁜 놈에게 내어줄 수야 있나.”

 

강도의 침입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백 과부는 목숨보다 귀한‘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문 중문 방문 부엌문 들창 장지 등 집안 곳곳을 굵은 철창살로 에워쌌다. 백 과부는 그 철창살 속에서 돈 궤짝을 부둥켜안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한번 백 과부의 손에 들어간 돈은 좀처럼 세상 구경을 하기 어려웠다.‘수전노 백 과부’,‘철창살 속 암사자’라고 험담하고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백 과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가난한 시절과 마찬가지로‘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돈을 모았다.

 

백 과부 할머니가 번 돈으로 자기 무덤 쓰려고 거간꾼에게 부탁하여 가보지도 않고 대동강변의 만달산을 200냥에 샀다. 시간을 내어 매입한 산을 보러 간 할머니는 땅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였다. 그 산은 나무는 고사하고 풀 한포기 없는 바위 덩어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거간꾼 영감이 와서 그 산을 비싸게 사겠다는 작자가 나타났다며 팔라고 하였다. 할머니는

 

“나 하나 속여 먹더니 또 누굴 속여 먹으려고 그러나. 안 판다.”

하고 딱 잡아뗐다.

 

5배를 준다, 10배를 준다, 값을 올리던 거간꾼 영감은

사겠다는 왜놈 양복쟁이를 데리고 왔다.

“산 값의 30배를 줄 테니 팔아라. 하는데도 안 판다.

 

“나는 남에게 좋은 일만 하며 살았는데, 그렇게 비싼 값으로 남을 속일 수 없다”

는 고집이었다.

 

그러자 일본 시멘트회사 사장 오노다(小野田)는 실토를 했다.

그 바위 덩어리는 모두 시멘트 만드는 석회석이라서 자기는 엄청난 돈을 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사정사정하여 산 값의 100배인 2만 냥에 팔렸다.

 

 

그의 재산은 7, 8배로 늘어나 팔도강산이 다 아는 거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거만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일관하였으며 아랫사람들에게는 후하였을 뿐 아니라 돈 모으는 길을 열어주어 그들이 모두 풍요롭게 생활하도록 도왔다. 또한 그는 돈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고리대금업과 같은 것을 절대 하지 않았다. 그의 돈은 실로 의로운 돈이었다. 그의 슬하에 일점혈육도 없는데 이처럼 극성스럽게 돈을 모은 데는 그 나름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었다. 돈은 깨끗이 벌고 의롭게 써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의 그 많은 돈은, 귀한 일에 쓰겠다는 것이 치부(致富)의 정신이요 철학이었던 것이다.

 

다. 평양 미션스쿨의 대모

 

그리스도를 영접한 백선행은 1908년 환갑을 맞아 첫 선행을 편다.

서울에서 석공을 불러 와 마을의 다 쓰러져가는 나무다리를 헐고 돌다리를 놓아 준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더 이상 ‘백 과부’라 낮춰 부르지 못했다.

 

‘선행(善行)’이라 이름을 짓고 다리는‘백선교’라 불렀다.

돌다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백선행 할머니는 1925년 2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 닥터 무어가 세운 광성보통학교에 전답 1만 4천 평(당시 가격 1만 3천원,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3억 원)을 그 학교의 기본금으로 기증했다.

 

그리고 추가로 13만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30억 원)을 기부하여 광성학교는 그 돈으로 총독부의 조선인의 사립학교 설립 방해를 극복하고 재단법인을 설립할 수 있었다. 또 장로교에서 경영하는 숭현여학교에 전답 2만 6천 평(당시 가격 3만원,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30억 원)을 기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로교 계통의 창덕보통학교에 6천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6억 원) 상당의 땅을, 숭인상업학교에도 1만 3천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3억 원) 상당의 땅을 기부하였다.

 

이 돈으로 이 학교들은 재단법인 설립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평양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들이 거의 모두 백선행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선행은 학교 경영권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18만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80억 원)이라는 거액을 아무 조건 없이 학교에 기부한 것이다. 기부한 학교의 졸업식에 초청되어 가면, 그는 학생들에게

 

"너희는 우리 조선의 아들이요 딸이다. 졸립다고 자지 말고 놀고 싶다고 놀지만 말고, 공부하기 싫다고 책 덮어 두지 말고, 언제나 책과 부지런히 씨름하여라. 윗 학교에 올라가서 어려운 공부를 더 잘해야 우리나라가 잘된다."

 

진정 그녀는 평양 밋션스굴의 대모(大母)였다.

 

독립운동가인 산정현교회의 조만식 장로가 찾아와서 평양에 조선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할 계획을 이야기하자, 백선행은 모두 15만원(150억 원)을 공사비와 재단설립비용으로 내 놓았다.

 

이 공회당은 연광정(練光亭)이 올려다 보이는 대동강가에 위용당당하게 세워진 화강암의 3층 양옥 건물로 329평 대지 위에 연건평 총 324평의 큰 건물이다.

 

 

 

 

개관식에서 사회자였던 조만식 장로는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새 공회당의 명칭을「백선행 기념관」으로 발표하였다.

 

1층은 1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회당, 2층은 500명 수용이 가능한 집회실, 응접실, 회의실, 오락실 등, 3층은 도서관으로 되어 있다. 도서관을 위해 2만여 원을 추가하여 전체 경비는 총 6만6천 원이 들었다. 백선행이 별세할 때까지 사회에 기부한 돈은 모두 31만 6천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316억 원)이었다. 악착같이 아끼고 일하면서 사들인 땅을 거의 모두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라. 한국 최초의 여성 사회장

 

1933년 5월 8일 오후 12시 40분에 백선행은 구리(九里) 자택에서“남편과 합장하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86세를 일기로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장례는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社會葬)으로 하였다. 빈소가 있는 백선행기념관에는 아침부터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는 일제히 휴교하고 전교생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15만 평양시민은 살아생전 고인의 아름다운 행적을 추억하며 한마음으로 영면을 기원했다.

 

 

 

 

4. 백선행 성행기념비 발견

북한은 최근 여성 사회사업가였던 백선행(白善行, 1848∼1933)의 선행을 기록한 기념비를 새로 발굴, 평양 연광정 앞에 있는 백선행기념관 구내에 건립할 방침이라고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가 20일 전했다.

 

조선신보는 "백선행의 소행을 전하여 주는 기념비가 새로 발굴되어 원상 복구된다"며 "이번에 새로 알려진 기념비에는 창덕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들에 많은 토지를 기증하여 민족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새로 찾은 기념비의 크기는 높이 170cm, 너비 43cm, 두께 31cm인데 비의 정면에는 '백선행 기념비'라는 글자가, 뒷면에는 백선행의 소행을 적은 본문이, 좌우 면에는 140여 명의 관여자들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고 신문은 밝혔다.

 

이 비는 교육발전에 기여한 백 씨의 행적을 길이 전하기 위해 1927년 7월16일 창덕(彰德)학교 교직원과 많은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칠골의 비석골(현재 평양 청년호텔 부근)에 있었던 것이라고 신문은 소개했다. 백 씨는 1848년 11월19일 가정형편이 어려운 수원 출신인 백지용의 맏딸로 평양에서 태어나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시집간 지 2년 후 청춘과부가 돼 평생 수절하며 근검절약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

 

그는 1908년 회갑 기념으로 대동군에 다리(백선교)를 놓았으며 1922년 평양에 3층 공회당(백선행기념관)을 건립했고 1923년 광성보통학교에, 이듬해에는 창덕보통학교에 각각 300여 섬지기 농지를 희사하였다. 또 미국 선교사 S.A.모펫이 설립한 신학교(평양신학교의 전신)에 부동산을 기부하여 재단법인을 만들었으며, 평양 숭현학교에도 2만 6천 평의 토지를 기부하였다. (서울=연합뉴스)

 

5. 유대인 6천명을 살린 일본판 쉰들러

         - 출처:'좋은 글'에서 -

 

1940년 여름,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해 오자 많은 유대인들이 리투아니아로 피난해 왔다. 이미 리투아니아의 각국 영사관에도 퇴거명령이 나와 있었다. 유대인들은 다시 여기서부터 다른 나라로 탈출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비자가 필요했다. 그들이 찾은 곳은 일본 영사관이이었다. 절망적인 그들에게는 그곳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스기하라 지우메(杉原千欳, 1900~1986) 영사는 본국 외무성 대신 앞으로 암호전보를 쳤다. 그러나 대신으로부터는 비자를 발급해주지 말라는 답신이 왔다.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독일측 비위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스기하라 영사는 다시 두 차례나 탄원의 전보를 쳤다. 회신은 같았다. 겁에 질린 채 영사관 앞에서 서성거리는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는 이틀 밤을 고민했다. 그는 인도적인 입장에서 저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며 본국 훈령을 거역하고 비자를 발급해 주기로 했다. 그는 리투아니아를 퇴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식사도 걸러 가며,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어, 6천명의 유대인 목숨을 건졌다.

 

전쟁이 끝나자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스기하라는 당연히 외무성에 복직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그에게 사직을 요구했다.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훗날 이스라엘은 스기하라를 기념하는 공원을 만들었고, 미국에서는 그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뉴욕에서 감사의 모임도 가졌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수도 한복판의 큰 거리를「스기하라거리」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스기하라는 1986년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그가 자신의 조국에서 명예를 회복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이 지난 그의 탄신 100주년의 해였다. (아래 주해 참조).

 

<주>

外務省退官後はロシア語をはじめとする優れた語学力を生かし、貿易商や翻訳者として生活を営んだ。そうした中で1969年にイスラエル政府から勲章を授与された後、1985年には同国政府より日本人として初めてヤド・バシェム賞を受賞し、「諸国民の中の正義の人」に列せられる。現在でもエルサレムの丘にそのときの顕彰碑が建っている。また、杉原の生誕百周年に当たる 去る二〇〇〇年十月十日、あのような勇気ある行為をしたにも関わらず、名誉が回復されないまま不遇の晩年を送った故杉原氏とその家族にとって、待ちに待った時がやってきた。この日、故杉原千畝氏とその家族に対し、故杉原氏の名誉回復を象徴する「杉原千畝を讃える顕影プレートの除幕式」が都内外交資料館であったから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