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의료선교와 교육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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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 자료

2010. 4. 4.

◆노아속회 해설자료(2010. 4. 2.)

 

의료선교와 교육선교

 

1. 한민족 고난의 19세기 말

일찍이 미국인 교육가로서 한국에 20 여년간 살아온 헐버트(H. B. Hulbert) 박사는 한민족에 관하여 이렇게 썼다.

 

― 한인은 숫적인 면에서 중국에 눌려 살고 있으며, 재치의 면에서 일본에 눌려 살고 있다. 그들은 중국인처럼 상술에 능하지도 못하며 일본인처럼 싸움을 잘하는 민족도 아니다. 기질 면에서 보면, 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오히려 앵글로 색슨 민족에 가까우며, 극동에 살고 있는 민족 중에서 가장 상냥하다. 그들의 약점은 어느 곳에나 무지가 연속되어 있다는 점이지만, 그들에게 부여된 기회를 선용하면 그들의 생활 조건도 급격히 향상될 것이다.

<주>:H. B. Hulbert :《대한제국 멸망사》집문당, 1999. 머리말

 

한 때 일본 京都大學 교수였던 조셉 K. 구드리치(J. K. Goodrich, b.1850)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한인의 기질은 확실히 점액질(粘液質)이 많은 중국인과 다혈질인 일본인의 중간에 처하여 있다. 한인의 성격은 첫 인상에 나타나는 허랑(虛浪)하고, 꼼꼼치 못하고, 폭 좁은 편으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냉철하면서도 격하기도 쉽다. 차근차근히 이론도 따지지만 열이 나게 행동도 취한다. 이러한 점에서는 앵글로 색슨족과 같다.

 

<주>:백낙준 저:《韓國改新敎史》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p.10

 

이러한 한인(韓人)이 사는 조선에 19세기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는 서구열강이 복음을 앞세우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먼저 들어온 것이 가톨릭이다. 가톨릭교회는 간 데마다 식민지 개척의 앞장을 섰는데, 우리나라도 그런 방식으로 들어왔다. 특히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함대를 동원하여 조선의 개항(開港)을 강요하다가 강화도에서 대패하여 망신을 당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주지 않고 무조건 신부의 교훈에 따르되, 국가의 법보다 먼저 가톨릭 법을 준수하라 가르쳤다. 그 증거가 1784년에 이 땅에 들어온 가톨릭은 1866년까지 무려 82년 동안 쪽복음 하나 번역 않고, 핍박하는 정부를 전복시킬 궁리만 하였다 황사영(黃嗣永)의의 백서(帛書) 사건이 그것이다.

 

<주>: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는 1801년(순조 1년) 신유사옥 때 천주교신자 황사영이 중국 천주교회 북경교구의 천주교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의 전말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기입한 밀서(密書)이다. 신유박해에 대한 귀중한 사료이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회는 그 박해가 한창인 시절에 미국의 형제들이 목숨을 걸고 들어와 이 나라의 법을 지키며, 약속대로 교육과 의료사업만 하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찬송가를 발행하고, 서양 문명을 전함으로써 이 나라를 개화시켰다. 정부의 호감을 받아 의료사업이 선교사업으로, 교육사업이 선교사업으로 확장되었다. 이 민족은 마침내 미개에서 개화로, 혼미에서 깨어남으로 변화되어, 오늘 100년 만에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계급사회에서 만인평등 사회로, 폐쇄사회에서 개방사회로, 남존여비에서 남녀평등으로, 한자문화권에서 한글문화권으로 들어와, 우리가 육적으로, 영적으로 구원 받고, 사회적으로도 천시 받던 백정이 세브란스의대 교수가 되고, 그 백정의 아버지가 승동교회의 장로로까지 되는 기적을 일군 것이다. 오늘 자료는 백정만도 못한「죽을죄인」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나게 된 그 역사의 전말을「의료선교와 교육선교」란 제목으로 만들어 보았다.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면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들이다.

 

 

다 아시는 대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첫 발을 내어 디딤으로써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부부동반이기 때문에 한양으로 못 들어가고 도로 일본으로 간다. 여장을 풀자마자 언더우드는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 선교사를 찾아가, 닷새 전에 문을 연 광혜원(廣惠院)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그곳을 선교의 거점으로 삼고 사역을 시작한다. 이듬해인 1885년 6월에 입국한 감리교 의료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톤(W. B. Scranton, 1856~1922) 모자와, 1886년에 입국한 엘러스(Annie J. Ellers, 1860~1938; 벙커 부인)도 처음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광혜원은 자연스럽게 한국 개신교 의료선교의 거점이 되어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었다.

 

 

 

 

 

1886년에 미국 장로교 본부는 엘러스 양을 파송하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중요한 부녀가 사업을 맡아보도록" 하였다. 엘러스 양은 오자마자 곧 왕비의 신임을 받고 친근하게 되었다. 후에 언더우드의 아내가 된 의학박사 호톤(L. Horton, 1851~19 21) 양은 국립병원의 부녀과의 책임자가 되어 왕비의 신임 받는 시의(侍醫)가 되었다.

 

2. 광혜원의 시작

 

알렌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있던 날 밤, 우정국 연회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받아 목숨이 경각에까지 이른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치료한다. 백낙준 저《韓國改新敎史》에서 당시 상황을 알아보자.

 

―1884년 12월 5일자 알렌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젯밤은 서울에 있는 외국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밤이었다." 이 날 밤은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사상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밤이었다. 이 날 밤 자객의 칼에 맞은 수구파 대신 중의 한 사람은 민비의 조카뻘 되는 민영익으로서, 얼마 전에 한미조약의 비준을 교환하기 위하여 미국을 다녀 온 사람이다. 민영익은 동맥이 끊기고 머리와 몸에 일곱 군데나 칼에 맞아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때마침 이홍장(李鴻章)의 한국 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 G. von Moellendorff)는 알렌 의사를 황급히 자기 처소로 청하여 왔다. 알렌 의사가 묄렌도르프의 관저에 당도하니 한의(漢医)들이 열네 사람이나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알렌의 치료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알렌은 민 씨의 생명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걱정과 불안 속에 석 달 동안이나 조심하여 치료하였다”고 알렌은 그의 일기에 적고 있다. 이에 대한 보응은 놀라웠다. 왜냐 하면 서양 의술의 신비스런 효과는 왕가의 신망을 얻게 하였고 따라서 공개적인 선교운동의 대로(大路)를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주>: 백낙준 저《韓國改新敎史,》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108p.

 

알렌은 자상을 깨끗이 소독하고, 꿰맨 후 붕대를 감았다. 머리의 출혈 부위는 명주실로 봉합하여 지혈시켰다. 다른 부위의 상처도 깨끗이 소독해 스펀지로 감싼 후 붕대를 감아 출혈을 막았다. 모두 스물일곱 군데를 꿰매고 한 군데는 혈관을 경색(梗塞)시켜 잡아매고 심을 넣어 반창고를 붙였고, 상처마다 거즈를 대고 붕대를 감았다. 이전에 종기나 째던 한의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런 외과의 과감한 치료는 당시 한의사들은 상상도 못했던 의술이었다. 다행히 알렌의 치료는 효과가 있었다. 위험한 고비를 넘기자 알렌은 12월 8일 민영익이 소생했다고 보고하였다. 이후의 일을 앞의 백낙준 박사 책에서 인용한다.

 

― 1885년 1월 27일에 이르러서는 그의 건강상태가 호전되어 사의(謝意)를 표할 수가 있었다. 알렌 의사는 호전(好轉)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늘 민영익 씨가 나에게 10만 냥을 보내면서, 이것은 나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보내는 것이니, 받아서 배불리 먹고 즐겁게 써달라고 하였다. 이 돈은 자기 손님에게 드리는 선물이지, 나의 치료비의 보수는 못 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알렌은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임금님의 시의(侍医)로서 정식 임명을 받았다.

 

 

1885년 알렌은 민영익의 협조를 얻어 당시 주한미국공사관 대리공사 조지 폴크(George C. Foulk, 福久) 중위를 통하여「국립병원 설립안」을 제출한다. 한국정부가 시설을 허락한다면 자신이 직접 환자들을 돌보고, 또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서양의 의술과 위생과학도 가르치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봉사의 대가(代價)는 필요치 않으며, 병원설비와 그 유지를 위해서는 깨끗한 장소에 거대한 주택이 필요하며, 병원유지를 위해서는 난방비와 조수, 간호원, 잡부들을 위한 인건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급식비 등의 경상비와 약품대 300달러가 필요한데, 이러한 여건이 충족될 수 있다면 6개월 이내에 다른 외국인 의사를 데려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병원은「조선정부병원」이라고 명명될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조선의 분위기는 알렌이 선교사라는 것 때문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중에 가장 심한 것은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비방이었다. 알렌은 그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 묄렌도르프는 내가 궁중에 영향력이 있음을 알고, 자기가 의과대학을 창설하고 나를 제 마음대로 부리려는 고약한 계책을 꾸미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이 일(알렌의 국립병원 설립신청 건)을 아는 날이면 이 일을 묵살시켜버릴 지도 모른다.

폴크 대리공사는 이 일을 민영익의 힘을 빌려 밀자고 하여 마침내 성사시켰다. 고종 황제도 알렌에게 전폭적인 호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광혜원 건물은은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 인물로서 청나라 군사에게 살해당한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집을 쓰기로 하고, 600달라 내지 1000달러를 들여 수리하여 1885년 4월 10일에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병원의 설비와 관련하여 알렌은 이렇게 썼다.

 

“그 건물은 전에 홍영식이 쓰던 집이었는데, 그는 최근의 정변에서 살해되었다. 우리가 그 집을 인수받았을 때에 집은 매우 극심한 약탈 때문에 집의 뼈대만 남아 있었다. 한 방에는 사람의 피로 추정되는 핏덩이로 덮여 있었다. 그 집을 병원으로 꾸미는 데는 600달러 내지 1천 달러가 들었는데, 모두 정부에서 지불하였다. 일 년에 약 300달러 상당의 약품대가 소요되고, 경상비는 정부에서 담당할 것이며,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의약품과 시술이 무료로 된다. 약 40개의 침대를 수용할 만한 방이 있고,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할 수도 있다.”

 

그러자 미국 선교사의 활발한 활동을 시기하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일부 양반측에서 “광혜원에서는 치료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 믿겠다고 약속해야 치료해준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한동안 시끄러워 마침내 고종에게까지 알랴졌으나, 왕은 이를 묵살하였다. 병원 개설 1년 후, 알렌은 10,460명의 환자들을 치료했는데, 그 중 800여명이 부녀자였다. 제중원에 대한 한국정부의 지원은 대단하였다. 선혜청으로부터 혜민서와 활인서 두 기관에 보내던 쌀과 돈 등을 제중원으로 보내었고, 제중원에 병설된 여병원(부녀과)에서 의술을 익힐 13세~16세의 총명한 2-3명을 선발해서 보내도록, 황해도․평안도에 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제중원 의학교육에 충당될 인원을 북학파(北學派) 소속의 학도 중에서 차출하기도 하였다. 알렌에게 가선대부라는 직급을 수여하고, 제중원의 미국인 의관․주사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알렌의 약력을 브리태니커대백과사전에서 인용한다.

 

호레이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안련(安連)이다. 1881년 웨슬리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1983년 마이애미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10월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되어 1년간 봉사하다가 이듬해1884) 9월 인천에 도착하여 조선에 상주하는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전도를 개시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교사라는 신분을 숨기고 공사관 부속의사로 재직했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례금을 받음과 동시에 왕의 시의가 되었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1885년 국립병원 설립안을 제출해 승인받아 한성 북부 재동에 왕립병원 광혜원(뒤에 제중원으로 바뀜)이 설립되는 기초를 마련했다. 개원 이듬해 병원부속 의학부가 되자 비밀리에 선교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동료 선교사들과 의견이 엇갈리자 1887년 선교사업에서 손을 떼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0년 해외선교부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했다. 이후 주한 미국공사 등으로 재직하면서 선교사업뿐 아니라 정치에도 관여했다. 특히 러일전쟁이 끝날 즈음에 조선정부는 친러반일정책을 지향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했는데, 절대 중립을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우리 정부는 조선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1905년 주한 미국 공사직에서 파면되자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숨졌다.

 

 

3. 제중원 2대 원장 헤론

 

처음 광혜원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병원은 1885년 4월 23일에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의「제중원(濟衆院)」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알렌이 1887년 9월 그해 신설된 주미한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부임하면서 제중원을 떠나게 된다.

 

 

그 대신 미국 장로교 한국파송 의료선교사로서 존 헤론(John W. Heron, 1858~1890)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게 된다. 헤론을 우리나라에 오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일본에 망명중이던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이다.

 

 

이수정씨

 

이수정은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해 일본식 발음으로「리쥬떼이」로 불렸다. 이수정은 “소년들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망을 품으라!”(Boys, be ambitious for Christ!)로 유명한 북해도 삽뽀로농학교의 윌리엄 클라크(W. S. Clark, 1826~ 1886) 박사의 제자로서, 일본 근대농업의 선구자요 농학박사인 쓰다 센(津田仙, 1837~ 1908)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이듬해 동경제일장로교회 목사 야스가와 도오루(安川亨, ? ~1908)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부터 동경 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강의를 맡았으며, 요꼬하마 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 목사와 함께 성경번역에 착수, 한문 성경에 이두 식으로 토를 단《현토한한신약성서》를 간행하고, 이어서《마가복음》을 우리말로 번역 한글로 출판하였다. 한편 ‘한국이 살길은 예수를 믿는 길’ 밖에 없음을 깨닫고 1884년 3월 미국선교사에게 대필시켜 미국 선교잡지에 「한국의 사정」이라는 호소문을 두 차례 보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 해 12월에는 영어에 자신이 생겨, 한국전도의 중대성과 긴박성을 강조하는 글을 자기 이름으로 직접 써 보냈는데 이 편지가 1885년, 선교잡지(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실렸다. 이 편지를 보고 아시아 선교에 지원했던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배를 탔는데, 그들이 다름 아닌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턴 부부와 그의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이었다. 이수정은 요꼬하마 항구로 이들을 마중 나갔다. 이수정은 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한글을 가르쳤다. 그리고 자기가 번역 출판한《마가복음》을 선물로 주어 초대 장감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입항할 때 한국어 성경을 들고 입항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세계 선교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수정의 글을 읽은 사람은 한 사람 더 있었다. 존 헤론이 그다.

헤론은 일본에서 보낸 이수정의 편지가「세계선교회보」(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실린 것을 읽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미국 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십시오, 조선백성들은 문명을 모르고 어둠 속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헤론은 육신이 병들어 죽어가고 영혼은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가난한 나라에 가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한 민족을 살리는 운동을 해야 한다며, 미 북장로회선교부를 찾아가 한국 선교를 지원했다. 선교부는 깜짝 놀랐다. 촉망받는 유능한 의사가 낙후된 조선에 가겠다니…. 그의 모교에서도 학교 교수로 있으라고 강권했다. 그러나 그의 뜻은 너무나 굳어, 마침내 1884년 26세의 나이로 한국을 향해 태평양 항해에 올랐다. 요꼬하마에서 이수정을 만나 조선말을 배우고 풍습을 익힌 다음 그가 번역한 성경을 들고 1885년 6월 21일 다른 선교사 일행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는 사명감에 불타 지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온갖 전염병이 만연했다. 콜레라, 장티브스, 말라리아 등. 이질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그는 한국 온 지 5년 만에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고종 황제가 4대문 밖인 양화진(楊花津) 땅을 하사하여 한국 최초의 순교 선교사로서 이 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그는 세상 떠나기 전 부인과 두 딸 그리고 많은 환자들 앞에서 이렇게 당부하였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헤론이 별세한 뒤 부인 해티는 캐나다인으로서 미국 장로회 선교사인 친구 게일과 1892년 4월 7일에 재혼하였다. 게일은 당시 30세의 총각, 해티는 33세였다. 게일과의 사이에는 무자녀였다. 1907년 딸들과 함께 스위스로 가서 있다가 돌아와 해티도 병이 들어 1908년 3월 28일 별세, 양화진 전 남편 뒷자리에 묻혔다.

 

제중원은 1894년 정부의 재정부족으로 관제를 폐지하면서 경영을 미국 북장로회에 이관하여 왕립병원이란 구실을 다하였고, 1904년 세브란스 병원을 지으면서 없어지게 되었다. 제중원은 1885년부터 1904년까지 20년 동안 지금의 헌법재판소와 서울역광장 자리에 있으면서 서양의료가 우리나라에 정착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헌법재판소에 가면 제중원이 있었다는 표지(標識)가 있다. 그리고 당시 제중원의 모습은 연세대학교에 가면 볼 수 있다. 대갓집의 가옥을 개조해 썼기 때문에 아주 훌륭한 한옥으로 보존되어 있다.

 

4. 왕비에게 전도한 언더우드 부인

 

한편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호톤 언더우드(Li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는 명성황후의 시의(侍醫)였다. 당시 조선 왕실은 서양의학을 신임하고 있었고, 그래서 황후는 언더우드 부인을 시의로 삼았다. 릴리어스 호톤은 원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나왔다가 언더우드와 결혼하였고, 결혼 후에도 계속 의료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 부인은 항상 복음전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다음은 언더우드 부인이 명성황후에게 전도한 내용이다.

언더우드 부인

 

― 왕비는 크리스마스 전날에 나를 불러서 우리의 위대한 축제가 가지고 있는 그 기원과 의미, 그리고 축하하는 방법 따위를 물었다. '누가 이보다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천사들의 합창과 별들에 대하여, 그리고 말구유에 누운 어린아이에 대하여, 속죄 받아야 할 버림받은 세상에 대하여,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왕비는 깊은 흥미를 느끼며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그는 때때로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임금과 세자에게로 몸을 돌려 지극히 활기차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내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며칠 뒤 왕과 왕비는 많은 것을 묻고는 왠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 조선도 미국처럼 그렇게 행복하고, 자유스럽고 힘이 있다면!"

나는 여기서 미국이 비록 부유하고 강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가장 강하고 훌륭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죄도, 고통도, 눈물도 없는 나라, 무한한 영광과 기쁨만이 있는 나라를 보일 기회를 다시 한 번 얻게 되었다."

 

'아!' 말할 수 없는 비통한 감정(pathos)으로 왕비는 탄식했다.

"전하와 세자와 내가 그곳에 갈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왕비가 천국의 평화와 안식에 대해 한숨을 내쉰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슬프게도 죄인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인은 안 된다고!'

 

왕비는 얼굴을 떨구었고 빛나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리하여 방안엔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고, 깨끗해지며 따라서 이 나라를 신성하게 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왕비는 사려 깊게 내말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으나 그 일로 왕비에게 구원의 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고마 왔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분명하게 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부인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초기 선교사들은 왕 앞에서도 분명하게 복음을 외쳤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영생의 복음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가? 복음이 분명하게 외쳐지지 않는 곳에 분명한 기독교인들이 존재할 수 없다.

 

5. 교육선교에 일생을 바친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아래 글은 조선일보에 실린 김동섭 논설위원의 글이다.)

 

1886년 6월 가난한 한 여인이 딸을 이화학당에 맡기자 주변에서 "처음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엔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말렸다. 그래서 이 여인이 아이를 도로 데려가겠다고 하자 학당장(교장)은 서약서를 써 가까스로 아이를 두 번째 입학생으로 삼을 수 있었다. '당신의 딸 복순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 없이는 서방(西方)은 물론 조선 안에서도 단 열흘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를 서약함.'

 

▶그 교장이 한 해 전 우리나라 첫 여성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들어온 메리 스크랜턴이었다. 그는 서울 정동에 초가집 19채를 사서 여학교를 세웠지만 1년이 가도록 오는 학생이 없었다. "여자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던 세상이었다. 이듬해 5월에야 "영어를 배워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진 관료의 소실을 첫 학생으로 받아 비로소 학교 문을 열게 됐다. 1887년 명성황후로부터 '이화'라는 교명을 하사받았고 10년 뒤엔 8~17세 학생 50명이 다니는 학교로 키웠다.

 

▶목사의 맏딸 스크랜턴은 남편을 사별하고 외아들을 의대로 보냈다. 아들이 조선으로 가는 의료선교사로 지명되자 그도 선교사 신청을 해 며느리 손녀까지 3대가 함께 조선에 왔다. 그는 "배우고 깨우치는 것만이 잘사는 길"이라며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했다. 청결한 음식과 청소 등 위생 개선에도 앞장섰다. 그는 아들과 함께 시(施)병원을 차려 가난한 사람들에겐 치료비를 싸게 받거나 무료진료 했다.

 

▶스크랜턴 모자는 "서울 사대문 바깥으로 나가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음식과 의료혜택을 주고 싶다"며 남대문 밖과 애오개, 동대문에 진료소인 시약소(施藥所)를 세웠다. 이곳들은 각기 나중에 항일 운동 본산지인 상동교회, 아현감리교회, 동대문교회가 됐다. 아현감리교회는 지금도 시약소 전통을 이어받아 의료선교회를 운영하고, '사랑의 쌀'을 나누고 있다.

 

▶메리 스크랜턴은 이 땅에 온 지 24년 만인 1909년 10월 8일 77세로 양화진에 묻혔다.

이화여대와 상동·아현·동대문 교회는 스크랜턴 100주기를 맞아 고손자를 비롯한 후손들을 초대하고 10월 5일부터 일주일 동안 학술대회와 추모예배 등 기념행사를 갖는다. '대부인(大夫人)'으로 불리며 소외된 여성과 서민에게 빛을 준 스크랜턴은 그간 우리 근대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100주기를 계기 삼아 그가 우리 민족에게 바친 사랑의 삶이 널리 알려지길 기대한다.

 

 

 

찬송가 해설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김인식 작사 · W. H. Doane 작곡)

 

작사자 김인식

 

이 찬송은 한국 찬송가역사상 최초로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한 찬송이다. 근대 서양음악의 개척자인 김인식(金仁湜, 1885~1962)이 작사한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양악계의 선구자로서 일찍이 1914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세우고 목회하는 새문안교회에서 집사가 된 사람이다. 김인식은,「예수 나를 위하여」와 같은 명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가장 많이 찬송가를 번역하였지만 그 이름을 남기지 아니하였다.「부름 받아 나선 이 몸」(323장)의 작곡자로서 감리교 장로인 이유선(李宥善, 1911~2005) 교수는 그의저서《韓國洋樂100年史》(113 p.)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유선 장로

 

“그 당시 대부분의 찬송가는 선교사들의 서투른 번역 가사를 사용했는데, 김인식은 번역에 재능도 있어, 많은 찬송가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 후 장로교 찬송가 속에 그의 번역 가사가 많지만, 번역자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던 그 시절 풍습에 따랐던 까닭에, 어느 것이 그의 번역인지 모르게 되었다.”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I. Watts 작사·Gregorian Melody)

 

영국 아이자크 왓츠 목사가 작사하여《찬송과 신령한 노래》에 발표한 찬송이다. 곡조는 로웰 메이슨이 그레고리안 성가 곡조를 편곡하여, 그가「헨델과 하이든협회」에 처음 발표하고, 이어서《시편가》89쪽에「발걸음을 조심하는 이에게 복이 있도다」라는 가사에 맞춰 발표한 것이다. Eb 장조 4/4 박자인데 현 찬송의 두 소절을 한 소절로 압축한 박자로 되어 있다.

 

 

편곡자 메이슨 박사

 

지금은 가사마다 따로 곡조를 붙여 부르지만,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찬송가에 지정된 곡조란 없었다. 운율만 맞으면 어느 곡조로 불러도 상관없었다. 19세기 찬송들을 보면 찬송마다 채택된 곡조가 달랐다. 이 찬송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찬송가위원회에서 발행한《시온의 노래》라는 찬송가에「주 달려 죽은 십자가」곡조「햄부르크」는 377장에 실려 있는데, 거기 붙인 3편의 가사 모두가「장례 찬송」가사들이었다.「주 달려 죽은 십자가」가사에 붙인 곡조는, 우리 찬송가에는 전혀 채택된 바 없는, 곡명 'MOZART. L.M.'이라는 곡조였다. 미국《장로교 찬송가》146장에는 262장「날 구원하신 예수를」곡조를 사용하였고, 미국《감리교 찬송가》1878' 211장에는 우리 찬송가에는 없는「유카리스트」'EUCHARIST' 곡조를 사용하고 있다.「주 달려 죽은 십자가」가사에 메이슨이 편곡한 곡조「햄부르크」'HAMBURG' 를 처음 사용한 것은, 로빈슨 목사가 펴낸《성소를 위한 노래》1879' 312장이 처음이다.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미국에서 발행한《주 찬양의 노래》1884' 169장에서 채택하여《찬양가, 1894》32장에 처음 실렸지만, 오늘의 가사는《찬숑가, 1908》75장에 처음 실림으로써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