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찬숑가, 1908》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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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찬송가연구원

2011. 5. 7.

 

《찬숑가, 1908》연구

 

글 : 오소운 목사

 

 

 

1) 캄캄한 한국에 비쳐온 찬양의 밝은 빛

한국 역사상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보다 더 절망적인 시기는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구라파의 침략주의 동진(東進) 정책이 극에 달했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일․중․러] 3국의 각축이 치열했던 우리 땅은, 청일전쟁․노일전쟁의 마당이 되었고, 마침내는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비극을 낳았다.

 

그러나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절망 속에 울부짖는 이 겨레에게 선교사들을 보내셨다.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노래를 주신 것이다. 국운이 풍전등화 같았던 그 시절 우리 선열들은 선교사가 작사한 찬송을 이렇게 부르며 하나님께 호소했다.

 

나는 갈길 모르니(421장)

 

1절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2)

 

2절

아무 것도 모르니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 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2)

 

3

아기 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줍소서.

힘도 없이 약하니 나를 도와줍소서.(×2)

 

정말로 갈 길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몰라 어찌해야 좋을지 방황하는, 이기 같이 어린 조선 민족의 슬픔을 이렇게 쉬운 말로 선교사가 쓰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만 더 보자.

 

멀리 멀리 갔더니(440장)

1절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후렴

예수 예수 내 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쉬 떠나지 마시고 부형(父兄)같이 됩소서.

 

이 찬송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애창곡이었다. 어디 이 박사뿐이었으랴. 해외 망명생활에 그들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예수 예수 내 주여 섭섭하여 울 때에

눈물 씻어 주시고 나를 위로하소서.

 

얼마나 처절한 울부짖음인가! 필자는 이런 찬송을 부르며 눈물 흘리는 어른들을 어려서 수도 없이 보며 자랐다.

 

1894년에 발행된 언더우드의《찬양가》를 시작으로, 1895년에 북장로회의《찬셩시》그리고 감리회의《찬미가》가 발간되어, 이 세 찬송가는 판을 거듭하며 해당 지역에서 부르다가, 하나님의 뜻이 있어 마침내 1908년에 장․감 합동으로《찬숑가》를 출판하게 된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란 명목으로 국권이 강탈(强奪)되기 2년 전인 1908년에 무곡《찬숑가》를, 이듬해에 곡조《찬숑가》를 내었던 것이다.

가세가 기울어 패가한 집안에 고고의 소리를 지르며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 같은 이 찬송가는 왜놈들의 학정 속에 울부짖는 이 겨레의 기도요, 호소요, 구원을 갈망하는 절규(絶叫)이었던 것이다.

 

2) 무곡《찬숑가, 1908》

14년 전인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빨리 찬송가 출판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열정으로, 웬만한 절차는 생략한 채《찬양가》를 낸 언더우드는, 장․감 선교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여 연합 출판권을 상실하고 개인출판으로 위로를 받아야만 했다. 이듬해에는《찬셩시》와《찬미가》가 나와 찬송가 출판은 처음부터 3분되었음은 이미 살펴본 대로이다. 그런데 언더우드의《찬양가》사용을 거부한 속내는 교단간의 교리문제와, 선교사들 간의 알력 때문이란 견해도 무시 못한다.

 

이리하여 13년 동안 세 개의 찬송가를 가지고 지역마다 다르게 부르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장․감 합동 찬송가를 내자는 의견이 비등하여 만들어낸 것이 무곡《찬숑가, 1908》이다. 이 책을 낸 목적이 「챤숑가 셔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 전문을 현대 맞춤법으로 문장부호를 첨부 인용한다.

 

“대저 노래라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소리에 말하여 나는 것이라. 그런고로 옛날에도 즐거움을 충만히 얻은 이들이 모두 기쁘게 노래하였으니, 공자도 읊어 노래하고, 다윗도 항상 시로 노래하였으며, 주께서도 시를 노래하셨으니, 이로 보건대 주를 믿는 자들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런고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마음을 같이하며, 기운을 화평하게 하고, 한 곡조로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주의 빛이 한국에 임한 후에, 감리회에서는《찬미가》를 노래하고, 장로회에서는《찬셩시》와《찬양가》를 부르매, 양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한 곳에서 예배볼 기회를 만나면, 찬송하는 노래를 피차에 같이 부르지 못하여 주를 찬송하는데 서로 즐거움이 온전치 못하더니,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기회를 주사, 두 회의 노래를 합하여 한 책을 만들어, 이름을《찬숑가》라 하였으니, 이 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참 아름다운 찬송이로다.

 

양 교단이 선임한 편집 책임자는, 한국어를 잘 하고 음악과 시문에도 조예가 깊은 다음 세 사람이다.

【장로교】

① 배위량 선교사의 부인, 안애리(Mrs. Annie Laurie Adams Baird, 1864-1916)

② 민로아(閔老雅, F. S. Miller, 1866-1952) 선교사

【감리교】

③ 방거(房巨, D. A. Bunker, 1853-1932) 선교사

 

그 당시의 형편을《신정 찬송가》서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905년에 장로파와 감리파의 합동 운동이 시작되어, 그 결과의 하나로 찬미 책을 합하게 되었나니, 배위량 부인과 민로아 목사와, 방거 씨가 위원으로 피선되어, 1906년에 제2차로 연합공의회가 모인 때에 이 책의 되어 가는 형편을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으로 말하면, 이 새로 될 책은 이미 있던 찬미를 토대로 하되, 할 수 있는 대로 개정할 것은 개정하기로 하고, 또 새로 넣을 찬미도 그와 마찬가지 기회를 주도록 하고, 아래와 같은 표준을 세웠으니, 즉 말은 존경어로 구조가 명확하며, 의사가 정당하고, 교리에 적절한 것만 쓰기로 하니라.

 

이 새 찬송가가 횡빈(橫濱) 인쇄소의 화재로 인하야 좀 늦게 나오게 되었으나, 1908년에 6만 부가 나오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 5만 부를 더 박이게 되었느니라.

 

(1) 편집 체제

46판 세로 짜기, 오른쪽 열기, 268장에 현행과 같은 사도신경․주기도문․십계명이 있다. 내표지는 예쁜 괘선을 둘러 세로로 3등분하여 중앙에 [찬숑가]란 제호가 그림자 글씨체로 씌어 있고, 그 아래 「륙만권」이라 횡서로 넣어 발행 부수를 표기하였는데, 이 판부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나갔다.

 

오른쪽에는 「구셰쥬 강 일쳔구팔 년」이라고 주강생 연도로 출판 연도가 띄어쓰기로 실려 있고, 왼쪽에는 「대한 융희 이년 쳣번 출판집」이라 대한제국 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다음에는 찬송가 분류표가 「문제 목록」이란 이름으로 실려 있고, 이어서 가사 첫줄 찾아보기가 실려 있는데, 소트 방식은 아직 우리나라 학계에서 통일이 안 된 시기였으므로 선교사들 임의로 만든 「아하가카」 순서이다. 이듬해 나온 곡조《찬숑가》역시 「아하가카」 순서였는데, 한글학회의 활동이 활발해진 시기에 발행된 4판(1925년)부터는 「가나다」 순으로 정착이 된다.

 

 

이 무곡《찬숑가》는 나오자마자 6만 권이 다 팔려 그 해에 또 6만 권을 발행하였고 1910년까지 225.000부가 발행되었다.

 

(2) 찬송가 교육

한국 초대교회는 새벽밥을 해 먹고, 8킬로 이상을 걸어오는 교인들의 편의를 위해, 주일 낮 예배를 오후 2시에 드렸다. 저녁 집회는 「찬양회」라 하였는데, 집회시간 30 분전에 찬송을 가르쳤다. 양악을 아는 이가 없어서 선교사가 예배 때마다 찬송을 가르쳤는데, 선교사의 서툰 발음과 어른들의 노랫가락 투의 찬송 소리에 아이들은 까르르 하고 웃기도 하였다. 당시 찬송가 부르는 모습을 길선주 목사의 아들로서 NCC(한국기독교협의회) 총무를 역임한 길진경 목사는 이렇게 당시의 일을 써 남겼다.

 

“이름은 소학교였으나 상투에 갓을 쓴 영감 학도 혹은 아저씨 학도들의 우스꽝스런 장난과 해학은 학생들의 허리를 끊어놓을 듯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배운 찬송가를 복습하는 시간이 되면, 성인 학생은 조선 고유의 민요식 혹은 고전 식의 가락으로 부르고, 선교사의 이상한 발음을 흉내내면서 부르기도 하여, 음악 시간이 되면 그야말로 생생한 희극의 장면이 벌어지곤 하였다.”

 

그는 이런 글도 남겼다.

“주일 대예배는 오후 2시에 모였다. 저녁에는 찬송예배라 해서, 계절에 따라 결정된, 집회시간 30분 전에 찬송을 가르쳤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양악을 아는 이가 없어서 선교사가 예배 때마다 지휘했는데, 건물의 ᄀ자로 된 중간에 휘장이 있어서 남자 방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박자가 서로 맞지 않아 찬송 소리가 마치 남녀가 서로 주고받는 화답의 노래처럼 되었다. 찬송을 배울 때에는 선교사가 우리말에 서툰 탓으로 우스운 일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 고유풍의 대중의 노랫가락 투로 불러 찬송의 음률이 저마다 모두 달랐으므로 서양사람의 귀에는 어느 찬송이나 부르는 곡조가 꼭 같게만 들렸다. 이를 교정하느라고 선교사들은 땀을 흘렸다. 그러나, 선교사가 부르는 음절을 받아 부르는 회중의 노래 소리는 그야말로 흉내를 내는 데 지나지 않아 거의 헛수고였는데, 서로 앙천대소한 때도 많았다.”

 

찬송가를 쉽게 배우지 못한 층은 나이 많은 사람들 중에 많았다.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과 젊은 부인들은 그래도 잘 따라 하는 편이었고,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쉽게 배웠다. 학교에 「창가(唱歌)」 과목이 있어서 서양 음악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교인들은 서민층 사람이 많았는데, 한국 선교는 일본과는 반대로 주로 서민층을 선교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악보는 물론 한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글을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찬송을 배우기 전에 먼저 한글은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당시의 찬송가책은 「한글교본」으로 쓰이는 일이 많았다. 이는 찬송가책으로 글을 배워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찬송을 부르면 글 배우는 데에 아주 편리했기 때문이다. 찬송가는 부녀자들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한글교본이기도 했다.

5음 음계에 익숙한 당시 교인들은 파나 시는 솔이나 도로 올려 불렀다. 이를 보다 못한 선교사 중에는 이렇게 권유하기도 했다.

 

“곡조를 여러 가지로 변하여도 관계치 아니하니, 제 나라 곡조를 좇아서 하는 것이 또한 관계치 않소…. 대한 형제의 지은 노래 하나를 써서 알게 하노니, 여러 교우들은 찬셩시 곡조를 아지 못하거든 혹 자기나라 곡조로 부르시오.”

 

이 글은《그리스도신문》의 편집인이었던 게일 선교사의 글이다. 따라서 당시 교회의 찬송가는 서양 곡조에 한국 가락이 섞여 있어서 민속음악 경연장 같았다. 필자의 어린 시절인 1930년대의 찬송 소리를 생각해 보면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난다. 장로회신학대학 홍정수 교수는 그의 논문 [기독교와 한국 전통음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 전통음악에 대해 우호적인었던 선교사들…. 게일․그로브․밴 버스커크와 같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한국사람들이 노래하는 방식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보였고, 그런 방향의 한국 교회음악을 추구했던 사람들로 보인다…. 그로브 목사는 한국에 처음 와서 한국 사람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찬송가를 마음대로 부르는 것에 매우 실망한다. 그러나 3년 후 생각이 바뀐다. 즉 한국사람들은 결코 비음악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도리어) 음악적인 사람들이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반음 없는 노래는 완벽하게 부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연히도 나는 그들이 흠 하나 없이 완벽한 멜로디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노래는 「Auld Lang Syne」의 멜로디였다. 내게 그렇게 감동을 준 노래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을 자세히 분석해보고 나는 이 노래에 반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것은 내게 계시의 큰 파도처럼 다가왔다.”

 

(3) 한국인이 즐겨 부른 찬송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서양식 찬송가가, 한국의 교인들에게 어떠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 알아보려고 애쓴 흔적이 있다. 예를 들어 1898년 7월 6일자《대한 그리스도인 회보》에는 감리교의 찬송가책《찬미가》의 재판 발행을 계기로, 좋아하는 찬송가를 10개씩 골라, 아펜셀라(서울), 됴원시(제물포), 로불(평양), 맥길(원산) 앞으로 보내달라는 신문사의 광고가 실려 있다. 여기에 많은 선교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조직적인 성격의 통계사업으로 생각된다. 모두 100명의 독자가 자신들이 좋아하는 찬송들을 적어 보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주로 5음계로 된 곡조들이고, 파나 시는 경과음으로 나오는 곡조들이다. 편의상 현 찬송가 첫줄로 표시한다. 현 찬송가에 없는 것은 합동 찬송가 장수를 적었다.

 

 

① 예수가 거느리시니(444)…「파」 3회 「시」 5회가 나오지만 바꿔 불렀다

② 나의 죄를 씻기는(184)…완전한 5음계.

③ 주의 말씀 받은 그 날(209)…「파」가 경과음(經過音)으로 나온다.

④ 온 세상이 어두워 캄캄하나(95)…「파」가 경과음으로 나온다.

⑤ 내 주를 가까이(364)…「시」가 두 번 나온다.

⑥ 만세반석 열리니(188)…「시」가 6회 나오지만 「도」로 올려 불렀다.

⑦ 한 복지 있으니 저 먼 델세(합동 491)…완전 5음계다.

⑧ 예수 언제 오실는지(합동 146)…「파」가 2회, 「시」가 2회 나온다.

⑨ 하늘엔 곤찮고 장생불로(합동 493)…완전 5음계,

⑩ 구주여 크신 인애를(170)…「파」가 한 번 나온다.

 

게일 선교사는 그의《과도기의 한국》(Korea in Transit, 1910)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네 곡을 소개하고 있다.

 

① 예수 사랑하심은

② 예수의 피밖에 없네

③ 내 주를 가까이

④ 예루살렘 내 복된 집

 

(4) “한국인은 음치가 아니다”

ㅡ 외국 선교사들의 반성 ㅡ

 

이를 본 선교사들은, 7음 음계는 잘 부르지 못하나 5음 음계는 잘 부르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는, 7음 음계 찬송가를 주로 (채택)한 찬송가책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그로브(高路芙)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국에서의 첫 주일을 맞아 한국인들이 수백 명 모이는 큰 규모의 모임에서 나의 음악적 감수성에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시끄러운 소리로 찬송하였는데….

그 첫번째 경험은 나의 모든 음악적 감각을 모욕했고, 나로 하여금 한국인들이 형편없이 비음악적이라는 결론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그 후로 3년, 내 고통은 여전히 극심하지만, 내가 처음 가졌던 그들의 음악적 본성에 대한 판단은 바뀌어 왔다. 한국 민족은 비음악적이지 않고, 그들은 매우 음악적이며, 본성적으로도 그러한데 단지 우리 식이 아닌 것이다. 그 경험을 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난 그 사람들이 어떤 노래들은 잘 부르고, 어떤 것들은 귀에 거슬리게 잘못 부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로브는 처음에 서양인의 관점에서 한국전통음악을 파악한 점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틀리지 않고 잘 부르는 찬송가가 무엇이며, 그 이유를 파악하게 된다.

 

나는 우연히도 그들이 부르는 어떤 멜로디를 들었는데,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건 정말 내겐 충격이었다. 그 멜로디는 「Auld Lang Syne」이었고, 내가 가르쳐 본 적도 없는 효과까지 내며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열심히 그것을 연구했고 거기에 반음정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찬송가를 가르치는 중에 반음정이 없는 곡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나는 동양과 서양의 음계의 비교하여 적절한 길을 택했다. 서양음계는 7음이 기본음이며, 동양음계는 5음 뿐이다. 생략된 두 음은 서양음계에서 반음정이며 모든 왜곡의 원인이 된다. 한국사람에게 이 두 음(반음)를 강요하면, 그는 살짝 비켜나 교묘한 방법으로 원곡을 왜곡하는데, 당신이 그에게 면밀히 질문한다면, 그가 무엇을 하는지 그가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걸 당신은 알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서양음계를 들어서는 구별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잘못 됐다고 그저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그 나름대로 고치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회중의 노래부르기에 많은 희생이 따른다. 그들 모두는 같은 방법으로 잘못된 것을 고치려 했고, 성과는 지속되었으나 그것은 그 경우가 아니었다. 반음정은 혼란을 야기한다…. 한국인들을 비난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들은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7음을 듣는 곳에서 오직 5음을 들을 능력을 타고 난 것이다. 잘못은 찬송가책에 있는 것이다…. 나는 5음 음계로 된 몇 개의 멜로디를 모을 수 있었다. 나는 미래의 언젠가 5음 음계로 된 찬송가가 출판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로브는 한국인이 7음음계의 서양 찬송가를 부를 때 5음 음계처럼 교묘히 고쳐 부르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통음악이 5음 음계로 되어 있고, 반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그로브는 한국찬송가는 5음 음계로 된 것이어야 한국인이 쉽고 정확하게 부를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안애리의《챵가집》에는 자기가 5음계로 편곡한 「만복의 근원 하나님」까지 싣고 있다.

 

(5) 《찬숑가》의 원본

《찬숑가, 1908》은 무곡이니 만치 곡명(Tune Name)을 기록해 놓아 이를 찾아 부르도록 하였는데, 출처를 일일이 밝혀 놓아, 영어 찬송가를 가지고 있는 선교사들은 이를 보고 곡조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원본 자료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The New Laudes Domini(1894) → 152곡

② The Gospel Hymns Complete(1894) → 72곡

③ The Finest of the Wheat No. 1 & 2(1894) → 6곡

④ Church Hymns Gospel Songs(1898) → 5곡

⑤ Selected Songs for Singing Service(1885) → 4곡

⑥ Young People's Hymnal → 2곡

⑦ Presbyterian Book of Praise → 2곡

⑧ Epworth Hymnal → 1곡

⑨ Songs for Young People → 1곡

 

2. 곡조《찬숑가, 1909》

무곡 찬송가의 보급은 교회가 늘어나면서 한계에 다다랐다. 서양 음악을 배운 사람들이 곡조 찬송가를 가지고 스스로 배워 찬송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출판 자금이 없었다.

 

1) 선교사 사재로 출판한 찬송가

언더우드의《찬양가》출판도 실은 타자기 회사를 하는 그의 형이 돈을 보내와 사재로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피득(彼得․A. A. Pieters, 1872-1958) 목사 내외가 사재를 털어 전액 부담하여 곡조 찬송가를 내게 되었다. 역시 일본 요꼬하마에서 인쇄해 왔고, 예수교서회에서 출판하였다. 출판 자금을 댄 피득 목사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 선교사로서, 한국어로 성구와 시편을 운문화 하여 창작한 장로교 선교사임은 이미 언급한 대로이다. 나중에 곡조《찬숑가》는 휴대하기 간편한 회중용(pocket edition)도 내었고 신약성경과 합본으로도 출판하였음을《신정 찬송가》영문 서문을 통해 알 수가 있다. 1916년 재판을 낼 때에, 피득 목사 부인은 음이 높아 부르기가 어려운 곡을 한 두 음 낮게 이조(移調)하여 출판하였는데, 이 책도 4개월만에 다 팔렸다.《신정 찬송가》의 서문을 보면《찬숑가》가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때까지 이 책 발행을 연합공의회의 찬미위원(The Hymn-Book Committee of the Federal Council)이 맡아보았으나, 1918년에 죠션예수교셔회에 맡기고, 판권만 위원회에서 가지고 있게 하니라. (중략) 22년 간 찬숑가의 발행 부수는 중본(中本) 찬미 부수가 695.000이요, 회중용 부수가 111.000이요, 곡조책 부수가 68.500이니, 총 발행 (회)수가 43회요, 총 부수가 874.500이더라.

 

2) 편집 체제

이 곡조《찬숑가》역시 46판, 오른쪽 열기로 되어 있다. 서양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모든 책이 왼쪽 열기로 되어 있지만, 동양 사람은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모든 나라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책은 모두 오른쪽 열기로 되어 있다. 악보 책을 이렇게 매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보면 거북스럽지만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참고로 한국 찬송가에서 처음으로 왼쪽 열기로 편집한 찬송가는《부흥성가, 1930》가 처음이다.

 

내표지를 보면 무곡과 같은 형식인데, 연도가 1909년 융희 3년이고, 초판은 5.000권 밖에 안 찍었다. 악보 형식은 반복되는 것은 도돌이표나 D. C. al Fine 등으로 줄여 지면을 아꼈고, 가사는《찬양가》와 같이 1절만 악보에 넣고, 나머지 절은 밖에 세로 짜는 형식이다. 후렴은 당시 미국의 관례대로 Chorus라고 표기해 놓았다. 오른쪽 꼭대기에는 영문 가사 첫줄이 있고, 왼쪽 꼭대기에는 아라비아 숫자와 영자로 장수와 곡명(Tune Name)이 기록되어 있다.《찬양가》와 마찬가지로 왼쪽에서 열면, 영문 내표지가 나오는데, CHAN SONG KA라 커다랗게 쓰고 그 아래 작은 글자로, THE HYMNAL OF 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SEOUL 1909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표지 뒤에는 인쇄소 이름이 영문으로 기재되어 있고, 이어서 곧바로 INDEX(가사 첫줄)가 보인다.

 

3)《찬숑가, 1909》의 장점

1884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현 인천)에 첫 발을 디딜 때부터, 약관 25 세의 언더우드와 26세의 아펜젤러 두 선교사는 선의의 경쟁을 하였다. 누가 한국 땅을 먼저 밟느냐 하는 것도 역사적 사건임을 안 두 선교사는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하나, 둘, 셋!’ 하는 구령과 함께 이 땅을 밟았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가득 찬 두 젊은 선교사들과 후에 온 선교사들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하였다. 찬송가 편찬 문제만 해고 그렇다. 언더우드가 아내의 병 치료차 미국에 가며 ‘내가 없더라도 빨리 내 주시오’하고 부탁을 했건만 감리교 측 찬송가 편집 위원인 존스는 별로 진척을 못 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존스가 안식년으로 가서 얼른 돌아오지 못하자, 언더우드는 조급한 마음에 그를 기다리지 않고《찬양가》를 단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표면적인 구실이야 어쨌거나, 감리교는 이의 사용을 거부했고, 장로교 선교사들도 합세하여《찬양가》사용을 거부하여 이듬해《찬미가》와《찬셩시》를 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언더우드보다 뒤에 한국에 와서, 주로 서북지방에서 선교하던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먼저 와 자리잡은 언더우드의 활동에 적지 않은 제동을 걸었고, 한때 언더우드를 비난하는 허위 기사가 미국에 나돌기도 하였다. 이 때 언더우드의 안타까운 심정을 그의 부인이 쓴 언더우드의 전기에서 인용해본다.

 

…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서《Truth》라는 작은 간행물이 발간되었는데,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성공을 지나치게 과장 선전한다는 것이다. 언더우드는 세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세례를 주고, 심지어는 모자를 벗지 않은 사람에게도 세례를 준다는 것이다. 언더우드는 무척 마음이 상했으나 변명할 길이 없었다. 그 후 그 기사를 쓴 젊은이는 선교사들의 예배시간에 공개사과를 하였지만, 인쇄 출판된 모욕적인 글을 읽은 사람들의 마음에 오도된 내용을 지울 수 없어 가슴 아파하였다.

 

선교사들의 경쟁과 교파의식은, 특히 같은 지역에서 선교하는 경우, 과당경쟁이 되어 결과적으로 크고 작은 불협화음을 유발하게 되었다. 마침내 1905년 8월, 서울 감리교여학교(The Methodist Girl's School)에서 열린 선교사들의 성경연구 모임에서는 「연합의 중요성」이 역설됨에 따라 「재한 복음주의 선교회 총공의회」(在韓福音主義宣敎會總公議會)가 결성되었고, (이 회는 후에 「연합공의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양 선교회는 그 해에 선교지역을 나누어 「경기 북부는 감리교 선교지역으로, 경기 남부는 장로교 선교지역으로」 확정지었다.(지도 참고) 이리하여 1895년 감리교회로 시작한 필자의 고향 (용인 아리실) 교회는 1905년에 장로교로 간판을 바꿔 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양 선교회는 장․감 합동으로《찬숑가》를 공동 발행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찬송가의 장점을 들어보자.

 

(가) 번역이 완벽에 가깝다

초기의 세 찬송가(찬양가․찬셩시․찬미가)들은 선교사들의 한국어 실력 부족으로 번역이 서툴었으나,《찬숑가》는 전문가를 책임 편집위원으로 선정하여 작업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도 수정 없이 부르는 좋은 찬송이 많이 수록되었다.

 

(나) 한국 곡조를 채택하였다

이《찬숑가》에는 10장에 한국 곡조로 부르라고 하며, 언더우드가 번역한《찬양가》제2장의 「놉흔 일홈 찬숑고」의 가사에 한국 「구군가」 곡조를 채보해 넣고는, 선교사들을 위하여 창법까지 영문으로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When the Korean Music is used the leader sings one line, the congregation repeating words and tune, then second line, etc.

“한국 곡조로 부를 때에는 지도자가 첫 줄을 선창하고, 회중이 가사와 곡을 따라 부른 다음, 둘째 줄을 부르는 식으로 한다.

 

모두 8소절의 「깡충 리듬」으로 된, 4분의 2박자의 이 곡조는 곡명으로 KOREAN MUSIC or OLD HUNDRED라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한 해 먼저 나온 무곡《찬숑가》에서는 OLD HUNDRED or KOREAN MUSIC 이렇게 서양 곡조 이름 뒤애 한국 음악이라고 했고, 곡조가 없었으므로, 인도하는 선교사은 서양 곡조로 부르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한국 곡조로 부르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새야새야 파랑새야」니 당시 유행하던 「담바구 타령」이나, 「구군가」 곡조로 불렀는데, 한국 음악을 천히 여기는 사람들은 ‘거룩한 찬송을 어찌 천한 노래로 부르느냐’며 잘 따르지 않았다.

 

♬․ 「놉흔 일홈 찬숑고」

(Sweet is the work, my God, my King)

 

이 찬송은 언더우드의《찬양가, 1894》제3장에 「甘心頌恩」이라는 곡명으로 처음 소개한 찬송이다. 언더우드 목사가 영국 아이자크 와츠(Isaac Watts)의 찬송을 번역한 것이다. 와츠의《The Psalms of David, 1719》에 처음 실린 찬송인데, 1절은 후대에 누가 추가했다 한다. 영국에서는 「Truro」 라는 곡명으로 윌리엄즈의《복음 시편가》(Williams󰡑Psalmodia Evangelica, 1789) 실려서 처음 소개되었는데, 미국에서는 존 맥클레란(John Jasper McClellan, 1874-1925․사진)의 곡조로 불린다. 맥클레란은 미드웨스트(Midwest)와 유럽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솔트레이크 시(Salt Lake City)에서 살며 솔트레이크 오페라단의 단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교회에서는 올르가니스트로 봉사하였다..《미군용 예배서》 468장에는 맥클레란의 곡조로 실려 있다.

LM(8888) 운율의 와츠의 찬송 가사 전문을 전재한다. 영어 찬송을 우리 가락으로 한번 불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Sweet is the work, my God, my King,

To praise Thy Name, give thanks and sing,

To show Thy love by morning light

And talk of all Thy truth at night.

 

Sweet is the day of sacred rest,

No mortal cares shall seize my breast.

O may my heart in tune be found,

Like David's harp of solemn sound!

 

My heart shall triumph in my Lord

And bless His works and bless His Word.

Thy works of grace, how bright they shine!

How deep Thy counsels, how divine!

 

Fools never raise their thoughts so high;

Like brutes they live, like brutes they die;

Like grass they flourish, till Thy breath

Blast them in everlasting death.

 

But I shall share a glorious part,

When grace has well refined my heart;

And fresh supplies of joy are shed,

Like holy oil, to cheer my head.

 

Sin (my worst enemy before)

Shall vex my eyes and ears no more;

My inward foes shall all be slain,

Nor Satan break my peace again.

 

Then shall I see, and hear, and know

All I desired and wished below;

And every power find sweet employ

In that eternal world of joy.

 

And then what triumphs shall I raise

To Thy dear Name through endless days,

For in the realms of joy I󰡑ll see

Thy face in full felicity.

 

언더우드는 이 와츠의 찬송을 직접 번역하여 찬양가 10장에 실었는데, 곡조는 MIGDOL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찬송이《찬셩시, 1895》제2장에도 같은 곡조로 채택되었고,《찬미가, 1995》11장에도 이 찬송을 채택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WOODWORTH 곡조를 채택하고 있다.《찬셩시, 1898》제68장에는 또 다시 곡명을 바꾸어 CHANT라 적어놓고 있는데, 이것은 곡명이라기보다, 필자 생각으로는, 「한국 가락」 곧 Korean Chant 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와츠의 이 찬송은 미국 감리교 찬송가 665장에서도 채택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곡조를 EIGNBROOK를 쓰고 있다.

 

1908년에 나온 장․감 연합으로 낸《찬숑가》10장에는, 단선율로 된 우리 「구군가」곡조를 실었다. 필자의 고향 아리실교회에서는 「구군가」 곡조로도 부르고, 「새야새야 파랑새야」 곡조로도 불렀다. 그러다가 「담바구 타령」 곡조로도 불렀다. 장로로서 목회를 하는 아버지(吳連泳 長老)는

 

“담바구 타령은 「담배 노래」이니 예배당에서는 부르지 말라.”

하시며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나는 구군가 곡조보다는 멋이 있는 담바구 타령 곡조를 좋아하여, 집에서는 어머니와 그 곡조로 불렀는데, 아버지는

 

“집에서는 상관없지만, 예배당에선 절대로 그 곡조로 부르지 말아라” 하셨다.

4분의 2박자로 실려 있는 위의 「구군가」 곡조는, 내가 어려서 부른 기억으로는 8분의 6박자이다. 선교사가 채보(採譜)를 잘못한 것이다. 우리 민요가락에 4분의 2박자란 전혀 없다. 내가 어려서 배운 대로 채보한 것은 다음과 같다.

 

부르는 방식은 영어로 기록한 대로 곡조를 아는 이가 선창을 하면 청중이 따라 부르는 「시편가 창법」이었다. 그런데 가사와 곡조를 익히고 나면, 아는 사람 전체가 선창을 하고 모르는 사람이 따라 부르기도 하여, 선창을 못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가사와 곡을 익혔던 기억이 난다. (악보 참조).

언더우드의 <찬양가 제3장> "높은 이름 찬송하고

 

 

 

 

<찬숑가(1909>에 실린 "높은 이름 찬송하고"

 

필자가 한국 민요 식인 3분박으로 편곡한 "높은 이름 찬송하고"

 

 

 

《찬숑가, 1909》에서 위의 한국 곡조로 부르라고 지정된 찬송은 다음 6곡인데 모두 우리나라 대표 운율인 44조, 영어 운율로 말하면 Long Meter(8888)이다.

① 높은 이름 찬송하고(10장)

② 하나님이 천지 내고(11장-OLD HUNDRED or KOREAN MUSIC)

③ 해가 가는 길과 같이(12장-OLD HUNDRED or KOREAN MUSIC)

④ 전능하신 아버지의(13장-OLD HUNDRED or KOREAN MUSIC)

⑤ 여호와의 보좌 앞에(14장-WARE or KOREAN MUSIC)

⑥ 하나님 내 목자시니(40장-OLD HUNDRED or KOREAN MUSIC)

 

나는 「담바구 타령」을 너무 좋아하여 이 곡조로 「감사하세 하나님 은혜」란 제목으로 추수 감사절 노래극을 만들어 책으로 내었는데, 그 노래만 참고로 싣는다.

5) 찬송가 토착화(土着化) 운동의 선구자들

 

한국음악으로 찬송가를 만들어 보려고 생각한 대표적인 선교사는 게일 목사이다. 그는 1895년 한국문화에 관해 논하면서, 한국인의 문화로 한국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한국 가락을 천히 여기던 그 시절, 위의 찬송을 우리 가락으로 부르는 일은 가물에 콩 나듯 했다는 것이다. 번역 찬송가는 시문학적 표현은 물론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노래부르기를 좋아하고 열심히 배워 서양찬송가 곡조도 잘 부르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순수하게 노래(song language)를 음미하여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서양음악은 한국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한국 번역찬송가는 내용의 명료성(clearness), 운율, 억양, 경어에 있어서 결함이 많다. 대부분의 경어의 내용은 좋으나 표현이 분명하지 못하여 어색하여서 부르는 사람이 별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의아할 수가 있다…. 경어 사용에 있어서도 제한된 글자 수 때문에 '하옵쇼셔' 하다가 '히' 나 '하게'로 산만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고상한 표현이 아쉽다.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과 위엄이 표현되어야 하는데, 번역으로는 불가능하다.

 

게일 목사(사진)는 연동교회를 맡아보고 있을 때, 제3대로 장로가 된 광대 출신 임공진(林公鎭․사진)을 교회 앞에 세워, 민요 「양산도」 가락에 맞춰 이런 찬송시를 써서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1. 에에이에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천부가 저 새를 먹여 기르신다.

2. 에에이에 들에 백합꽃을 보라

천부가 저 꽃을 귀히 입히신다.

3. 에에이에 너희들은 낙심말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여라

4. 에에이에 내일 염려 내일 하라

오늘은 오늘에 고생 족하니라

 

(후렴) 염려 말아라 의복 음식 염려 말어라

천부가 너에게 복을 내리신다.

 

연동교회가 자리잡았던 연못골과, 그 이웃 찬우물골(현 효제동) 방아다리(충신동) 두다리목 등은 조선시대 직업서열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제일하층인 나막신장수․배추장수․천민․갖바치․하급 병졸 등의 집단거주지였다. 그래서 초기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 계층 출신이었다. 원산의 유명한 싸움꾼이었던 고찬익 장로도 원래 평안도 안주의 갖바치 출신이었다.

임공진은 비록 천민이었으나 신앙열의는 대단하여 게일 목사가 장로로 추대하자 광대출신인 임공진의 장로(자녀: 2남 1녀) 추대 문제를 놓고 양반교인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모인 1909년 6월 25일 연동교회 제직회에는 원두우․아펜셀라․헐버트 목사 등 장․감 양교파의 선교사들까지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게일 목사는 단호하게 임공진 장로의 신분을 막론하고 장로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해 이원긍․함우택․오경선 세 영수가 천민 출신의 장로장립에 심히 분노하고 마침내 1백여명의 성도를 데리고 나아가 묘동교회를 세웠다. 연동교회 역사상 단 한번 밖에 없었던 이 분열 사건은 1년 간을 두고 진통을 겪었던 쓰라린 아픔이었다. 당시 연동교회에는 상류계급의 양반출신이 있는가 하면 중류계급의 상민출신, 그리고 하류계급의 천민출신이 공존했었다. (연동교회 80년사). 이런 상황에서도 게일은 임공진을 장로로 세웠으니, 그의 국악사랑의 정령은 가히 「매니아 급」이다. 임 장로는 게일의 격려에 힘입어 가야금 병창 등 전통국악에 바탕한 한국적 찬송가 개발에 나섰다. 1917년에는 「조선음악연구회」를 조직, 3년간 찬송가 토착화작업을 모색하기도 했다.

 

게일 목사 아들 유아세례(집례 길선주 목사, 앉은이) 기념, 뒤에 선이그 임공진 장로

 

게일은 한국 최초의 간이《한영사전》을 편찬하고, 1897년 4월 「그리스도신문」의 주간으로 시작해 「기독신보」로 바뀐 뒤까지 10년간 주필로 봉사했다. 안식년에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898년 4월 다시 한국에 왔다. 1900년 5월 연동교회 목회를 시작으로, 1901년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교육을 통해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했으며 1901년 한국성교서회 회장(제3대)과 황성기독청년회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1903)으로 문서 선교활동에 힘썼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으로 두 차례(1908, 1910) 선출되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했다. 1917년 피어선기념성서학원 원장이 됐고, 「조선음악연구회」를 조직, 찬송가 개편을 주도했다. 1917년에는 음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개편에 힘썼다.《텬로역정》(天路歷程․The Pilgrims's Progress)을, 김창직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번역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1922)해 출판하는 등 단행본 저서가 43권에 이른다.

 

한국 음악을 찬송가 곡조로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선교사들은 호의적이었다.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던 곽안련(郭安連, Charles Allen Clark, 1878~1961) 선교사는 평양신학교 교재로 사용하던《목회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어떤 곡은 신성한 것이요, 어떤 곡은 세속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현대인은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즉 그 곡 자체에는 별로 관계가 없고, 그 가사의 뜻과 곡이 어떻게 활용되는 가에 따라서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서는 그대로 내려오는 신비한 악곡이 많은데, 속곡(俗曲)으로, 또는 사신경배용(邪神敬拜用)으로 사용하므로, 이것은 성가에 적합하지 않다고 배격한다. 그러나 그 곡 자체가 신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가사만 고쳐서 후일에는 찬양대에 많이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음악 찬송가화에 앞장 선 게일 목사는 「조선음악연구회」를 조직하여 「찬송가의 한국화」를 모색하였고, 이 흐름은 최초의 음악가인 김인식과 이상준, 그리고 김형준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 최초의 어린이 찬송가인《아동 찬송가, 1936》에 「조선의 꽃」, 「나는 주의 화원에」 등, 좋은 어린이 찬송을 작사 작곡한 이화여전 교수 박경호(朴慶浩, 1899~1979)는 교회에 조선음악을 도입시키려 했던 김형준(金亨俊)을 높이 평가하고, 김형준의 의도대로 조선음악을 교회에서 연주하려 했던 자신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김형준씨는 특히 「기독교인들이 서투르게 부르는 구미식 찬송가보다는, 차라리 동일한 의미의 가사에 조선식곡을 도입식힘이 조치 않는냐」는 주장으로 다양한 조선찬송가를 만들어 도입한 결과 일부 교역자 측에서는 맹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 일례로 필자가 시내 모 교회의 음악을 지휘할 시 김형준 씨의 이 운동에 공명하여 김씨를 초빙하여 예배순서에 조선곡 찬미가를 합창한 일이 있었다. 특히 젊은 학생들의 감격은 실로 장대하였건만 강단 위의 앉아 있던 목사가 돌연히 기립 대호(大呼)하여 가라사대 ‘오늘 합창을 한다기에 허락하였더니 이런 것인 줄은 몰랐소. 이런 소리는 요정이나 놀이터에서나 부를 것이지, 신성한 교회당에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업소’ 당시의 챙피는 말할 것도 업거니와 김씨는 ‘미상부(未嘗不) 그럴 것이다’는 듯이 미소를 챙기고 즉퇴(卽退)하시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서리는 것이다. 신성한 교회일수록 찬미의 (서양) 곡조는 부를 수 있으되 조선음악을 부를 수 없다는 부패한 정신의 소유자가 당시 교역자중의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박경호는 교회 안에서 조선식 교회음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교역자들을 「부패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매도한다. 그런데 조선식 교회음악을 반대했던 목사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음악이 「요정이나 놀이터에서나 부를 것이지 신성한 교회당에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어찌하랴. 이 논란은 100년이 지난 오늘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통탄할 일이다.

 

6) 사도신경․주기도문․십계명의 통일

초창기에는 교단마다 제각각이던 시도신경, 주기도문이 성경 번역이 완료되고, 양 교단의 연합노력의 결과로 통일이 되어 이 책에 실렸는데, 100년 가까운 오늘까지 수정 없이 사용되고 있다. 현대에 맞게 수정하자는 의견이 많이 나오고 있으나, 교파연합이 잘 안 되는 오늘 형편으로는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7) 전 국민 복음화운동 찬송

《찬숑가》266장에는 「금년에 만 명을 구원 줍쇼셔」란 찬송이 있는데, 이 찬송은 'A Million Souls for Jesus,' 「백만 명 구원하기를 간구함」이란 찬송이다. 장신대 조숙자 교수는 이 찬송을 한국인의 창작으로 보는데 비해, 연세대 민경배 교수는 호주계 미국인 작곡가인 로버트 하크니스(Robert Harkness, 1877-1961․사진)의 작곡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웹 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미국 장로교 부흥사 존 윌버 챔프만(John Wilbur Chapman 1859-1918)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고, 그가 하크네스와 함께 한국에 왔었다는 글이 보였다. 그리하여 상기의 노해리(魯解理) 선교사의 책을 찾아보았더니 있었다! 제목은 The Million Soul Movement.

 

이 책에서는 먼저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을 소개하고, 1907에 평양 길선주 목사네 (장대현) 교회의 새벽기도 운동을 소개한 다음 이렇게 적고 있다.

… 매일 아침 4시 30분에 교회 종을 쳐서 (새벽 기도회를) 알렸다. 첫날 새벽 2시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종이 울리자 500 여명이 모여왔다.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께” 란 표어는, 윌버 쳄프만 목사, 찰스 알렉산더 부부, 로버트 하크네스, 데이비스와 그의 어머니 등의 부흥사들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부흥 노래 특별 소책자가 발간되었는데, 거기에는 로버트 하크네스가 작곡한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께”(A Million Soul for Christ)란 곡도 들어 있다.

이 찬송은 요즘 말로 하면 「전국 복음화운동 찬송」이라 할 것이다. 그 찬송을 소개한다. (악보 참조).

 

최초의 적국복음화운동 주제가

 

 

이 찬송을 부르며 선교의 열을 올린 한국 교회는 세계 역사상 찬란한 「선교의 기적」을 이룩하였다. 1909년부터 1932년까지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을 통계로 알아본다.

 

【에피소드】노해리(魯解理) 선교사의 일화

 

1908년에 한국으로 온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노해리(魯解理, Harry A. Rhodes) 선교사는 1934년부터 1939년까지 필자의 고향 용인군 남사면 아리실교회 당회장을 지내었고, 1934년에 장로가 된 선친(吳連泳, 1889~1951)은 그가 안수하여 장로가 되었다. 봄․가을 두 차례 순회방문 때에는 우리 집에 묵었는데, 유기 그릇을 반짝반짝 닦아 거기다 하얀 쌀밥을 담고, 최선을 다한 반찬을 드리면, 다른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날 달걀을 달라 하여 밥 한가운데를 푹 파내고 거기다가 날달걀을 깨 넣은 후 소금을 뿌려 드시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신기해서 왜 그렇게 드시느냐고 어머니께 여쭤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유기 그릇 냄새를 싫어한단다’. 그 후로는 노해리 목사는 출장 중에도 양식을 먹기 위해 전속 요리사를 데리고 다녔다. 언더우드 목사는 소탈하여 먹기 어려운 한국 음식도, 변소에 가서 토하는 한이 있어도, 잘 들었는데, 입이 까다로운 노해리 목사는 한국 교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상관없이 요리사를 데리고 다녔다. 「고꾸상」(コク樣, cook을 일본어로 [고꾸]라 하고 거기다 경칭인 [-상]을 붙인 말.)이라 불리는 요리사는, 요즘 말로 인스턴트 식품이 들어 있는 각종 캔을 따서 음식을 만들었다. 어린 나는 「고꾸상」이 깡통을 버리면, 그 빈 깡통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특권을 누렸다. 얼마 후 노해리 목사는 순방목사를 그만두고 연희전문 전임교수로 갔다.

 

노해리 목사가 좋아하는 찬송가는 219장 「주 음성 외에는」이었다. 1937년 가을이라 기억된다. 이 날 따라 노해리 목사님은 이상하게도(?), 모두가 그가 좋아하는 찬송을 미리 찾아 놓고 기다리는데, 「내 주의 보혈은」을 부르자고 하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하고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가사는 「내 주의 보혈」인데 곡조는 「주 음성 외에는」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곡조가 안 맞으니까 교인들은 안 따라 부르는데, 그는 1절을 끝까지 부르더니, 후렴에 가서 운이 안 맞으니까 원곡 대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하고 우렁차게 부르는 것이었다. 어린 우리는 깔깔거리고 웃다가 아버지의 엄한 얼굴에 웃음을 멈춘 기억이 어제인양 새롭기만 한데 70여년 전 얘기다.

 

노해리 목사가 쓴《미국장로회의 한국선교역사》(전2권)이 있다. 이 책은 한국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낸 월례보고나 연례보고를 중심으로 쓴 한국선교 역사의 귀중한 자료이다. 그 책 제1권 546쪽 이하에 보면,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연도별 조직교회(組織敎會) 수와 미조직(未組職) 교회 수, 그리고 세례교인 수와 평균 출석 인원 수, 그리고 주일학생 수 등의 통계가 나와 있다.

 

 

 

세례교인 수에 원입인(願入人)․주일학교 학생 인원을 더하면 약 3배는 될 것이다. 평균 출석 인원을 보아도 2배가 넘는데, 주일학생 수는 성인 출석인 수의 약 1.5 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세례를 주기 전에 원입과정․학습과정을 엄격히 하였기 때문에 몇 해를 다녀도 세례 못 받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이 숫자는 북장로회만의 숫자이니까 남장로회․감리회․카나다 장로회․호주 장로회․성결교․침례교․구세군 등 여러 교단의 숫자를 합치면 이보다 더 많지 않았을까 추측할 때, 백만 명 구원 찬송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1925년 수정(4)판《찬숑가》에는 이 찬송이 빠져 있다.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곡조가 너무 서양식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나라 곡조에는 약 박자로 시작되는 게 없는데, 이 곡조는 우리나라 운율을 무시한 작곡이다. 소절을 따라서 가사를 적어 놓으면 왜 안 불렸는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금|년에백만|명을구|원해줍쇼셔|

금|년에백만|명은과|하지안으며|

능|하신도죡|하야야죄|인을구하니|

그|도를셩신|께셔께|닷게하쇼셔|

금|년에백만|명을구|원해줍쇼셔|

참|도를온대|한에퍼|지게합쇼셔∥

 

운율이 이지경이니 누가 부르겠는가. 또 가락의 진행도 완전히, 아니 지나치게 서양식이다. 특히 2단이 그렇다. 만약 이 찬송 곡을 「올드랭사인」이나, 「나의 죄를 씻기는」 같이 5음계로 작곡했더라면 오늘도 애창될 것인데 아쉽다. 작곡자 하크네스가 현재 우리 찬송가에 들어 있는 그의 찬송, 「나의 믿음 식을 때에」(423장) 정도로만 작곡했더라도, 이 찬송은 살아남았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여행지에서 갑자기 작곡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아무리 가사가 좋아도 그 가사에게 입힌 옷이 시원찮으면 불리지를 않는다. 이는 마치 아이자크 와츠의 인격에 끌려 데이트를 하던 엘리자베스 싱어(Elizabeth Singer)가, 아이자크 와츠의 결혼을 거절하며 “와츠 씨, 저는 보석보다는 보석 상자를 더 좋아하거든요.”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좋은 가사라도 곡이 나쁘면 안 불린다.

 

8)《찬송가, 1908》의 영향

《찬숑가》의 좋은 번역 찬송들은, 1908년부터《신편 찬송가》가 출판된 1935년까지 장장 27년 동안 한국 교회의 기본 찬송으로 명성을 떨쳤다. 해방 후 장․감․성 세 교단이《합동 찬송가》를 내었을 때,《찬숑가》의 것이 228편이나 채택되었고, 현재 우리가 부르는 속칭《통일 찬송가》에도 178편이 채택되는 등,《찬숑가》는 한국 찬송가의 원 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당시 번역 가운데 사투리라든지, 신학적 혹은 문학적으로 부적절한 표현들이 발견되었는데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은 재고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