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한국인의 기원과 역사적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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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 참고자료

2011. 9. 10.

 

▶속회자료 한국인의 기원과 역사적 사명(2011.9.9)

 

한국인의 기원과

역사적 사명

 

내일 모레기 추석 곧 한가위다. 한가위는 고대 단군조선부터 오늘까지 우리 한민족의 추수감사 명절로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온 가족이 모여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기쁜 명절이다. 오늘 속회 자료는 그래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아보고 이 시대에 맡은 사명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방대한 자료를 모아서 잘라내고, 덧붙이고, 성경과 대조하는 작업은 힘든 작업이었지만, 독자들을 생각하며 만들었다(오소운).

 

1. 지능지수 높은 한국인

“미국에 사는 백인들의 평균 지능지수, 곧 IQ는 100이고, 동아시아인들의 평균치는 이보다 적게는 2∼3점, 많게는 10점이상이나 높다.”

 

이 말은 유명한 심리학자인 리처드 헤른슈타인((Richard Herrnstein) 하버드대 교수가 명저「종(鐘)모양의 곡선」(The Bell Curve)에서 밝힌 말이다. 세계 13세 어린이 수학 및 과학경시대회에서 한국 어린이들은 보통 5등 안에 든다. 미국의 50개 주는 매년 최우수 고교졸업생 2명씩을 뽑는데 거의 매년 한국 학생이 여러 명 포함된다. 미국에는 1만개가 넘는 고등학교가 있는데 한국학생들이 수없이 수석졸업을 한다. 하버드대가 이들을 다 뽑는다면 주요학과는 이들로 가득 찰 것이라고 한다. 인종쿼터제 같은 것이 있어서 입학생 수가 제한되긴 하지만, 문명의 충돌이라는 설(說)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는 근저「문화가 중요하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60년대 한국은 아프리카의 가나와 비슷했는데 지금은 1인당 소득 면에서 그 때보다 20배 이상 앞서게 된 것은, 교육열ㆍ근면성ㆍ기강 등에서 그만큼 다른 나라보다 앞선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총생산(GNP)은 60년대 불과 몇 조원에서 지난해에는 515조원으로 늘었다. 최근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이 방콕에서 공동 개최한「아시아경제의 장래」에 대한 회의에서 마이클 페어뱅크는 과거 30년간 한국인의 생산성 향상은 세계 제일이라고 했다. 한국의 제2차 5개년계획(1967∼1971)의 경제고문이었던 어마 아델만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은 보면 볼수록 유대인과 비슷하다.”

 

유대인인 그녀는 한국을 수없이 방문한 바 있다. 같이 유대인과한국인을비교하는 글을 써보자고도 했다. 헤른슈타인 교수에 따르면 유대인의 평균 지능지수도 백인보다 높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 한국ㆍ중국ㆍ일본ㆍ베트남 네 나라를「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며 이들 국가들이 역사 전통 문화에서 서양을 앞설 것이라고 예언했다. 서양이 현재 소득수준 기술면에서 다소 앞섰다고 하여 결코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까?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과 군사대국으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면서 세계 어느 나라와 언제든지 그리고 어떤 규모의 전쟁을 하더라도 이기게 돼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가히「캠핑」하는 기분으로 동아시아국가의 하나인 베트남에 전쟁을 걸었다. 결과적으로는 패배하고 물러났다. 일본은 유럽 선진국보다 산업화를 100여년 늦게 시작했지만 70년대 초에 이들을 모두 추월했다. 토인비는 이런 예가 동아시아국가들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세계 역사는 동서양간의 다툼의 역사이며 최근의 그 축소판이 미일간의 경제전쟁인데 이를 모르면 세계 경제나 역사의 흐름을 잘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2. 우린 모두 노아의 후손들

온 세상에 악이 가득 차자 하나님은 주전 2,458년에 물로 온 지구를 심판하셨고, 당시 의인이었던 노아네 여덟 식구만이 살아남았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아라랏산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노아 네 가족을 통하여 인류가 번성하도록 복을 주셨다. 노아의 아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함은 네 아들을 낳았으며, 야벳은 일곱 아들을 낳았다. 셈의 자손들은 산 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주로 아라랏 산 중턱에 살았다. 함의 자손은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에 정착했고, 야벳의 자손은 주로 섬과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

 

셈의 자손들 중 일부는 산에서 내려와 우르 지방으로 내려왔는데 인류 최초로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족이 그들이다. 우리말에서 남자를 뜻하는 '사내' 또는 '사나이'는 '산(아라랏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수메르 사람은 인류 최초로 기호글자로 발음과 뜻을 나타내는 '쐐기문자'를 만들었다. '수메르'라는 말이 '셈'에서 나온 것으로 학자들 사이에 인정되고 있고, 수메르어는 아담 때부터 있었던 언어로 추정된다.

 

수메르어와 우리나라 말 사이에는 유사점도 많다. 우리말의 '길'은 수메르어로 '길 gir'이고, 그들도 님(nim)이란 존칭을 붙이며, 하늘을 '아늘(an-ur)'이라, 아버지를 '아빠(abba)', 또는 '아비(abi)'라고 부른다. 한국어와 수메르어는 둘 다 교착어(膠着語)로서 주격ㆍ소유격ㆍ목적격을 나타내는 조사가 있고, 문장 구조도 한국어와 같은 주어-목적어-동사 순이다.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은 함의 장자인 '구스'의 가문에서 태어난 '니므롯'은 영웅적 사냥꾼으로 바벨탑 문명을 건설한 중심인물이다. 함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은 이집트 지역으로 가서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수많은 우상신을 섬기는 신비주의 종교를 만들었다.

 

함의 넷째 아들인 가나안은 장사꾼 기질이 있어서 그의 후손은 시돈과 두로 지역에 페니키아를 건설하고 무역을 번성시켰으며, 수많은 우상 신을 만들어내었다. 이로써 함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사탄의 삼위일체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론ㆍ이집트ㆍ페니키아 문명을 건설한다.

 

이 곳에서는 인본주의 문명ㆍ신비주의 종교ㆍ물질 만능주의가 태동되어 이스라엘과 인류를 타락시켰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장사에 도움이 되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보급하기 위해 아스다롯이란 여신을 만들어 내었다. 페니키아 신전에서는 여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사제들이 쾌락을 선사하기 위해 돈을 받고 매춘을 했다. 이 가나안의 여신이 수메르 지역에 있는 셈의 자손들에게도 스며들어 '이난나'(Inanna) 여신이 되어 이스라엘을 성적으로 타락시켰고, 섹스종교인 통일교는 이런 바알종교의 변형이다.

 

오늘날 로마가톨릭교에서 성모마리아를 섬기는 것도 수메르의 이난나 (Inanna-理煖娜) 여신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난나 여신의 성축절(聖祝節)은 12월 25일이다. 수메르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주변국의 영향을 받아 점차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타락하기 시작했다.

 

3. 한민족의 원래 종교

바벨탑 언어분리 때 우리 민족은 우상종교를 믿는 메소포타미야를 떠나 해뜨는 곳을 향하여 동진(東進)하여 중원(中原)에 자리 잡고 단군조선을 세웠다. 우리는 이때부터 유일신 하나님을 믿은 경건한 민족이다.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을 천군(天君)이라고 하는데 천군이 신격화되어 단군이 되었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고려 말에 일연이라는 불교 중 김견명이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시대의 장군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자료의 수집과 편찬 의도가 불교전파에 있었기 때문에 불교의 윤회설을 입증하기 위해 인간의 조상이 짐승(곰)이었다는 근거 없는 설화를 끼워 넣어 역사를 왜곡했다.

 

[삼국유사]의 고조선 편에서는 환웅(하나님의 아들)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면서 굴속에서 견디라고 했고, 곰이 21일 동안 견디어 여자가 되었으며, 여자는 사람으로 변한 환웅과 혼인해 단군 왕검이란 아들을 낳았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왕인 인종 때에 김부식이 삼국시대에 대해 저술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데, 김부식이 신라중심으로 중화(中華)사상에 젖어 쓴 역사서로 내용이 딱딱하고 중국과 신라의 역사적 사실이 과장된 부분이 많다.

 

[삼국사기]는 불교와 유교적 관점에서 저술해 고조선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단군에 대해 이야기는 전혀 없다. 그러나 김부식과 일연이 우리 민족의 참된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해도 중국에 남아 있는 우리민족에 관한 역사까지 변개시킬 수는 없었다. 중국의 고대사는 분명히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숭상한 경건한 민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 보면

 

"동이 사람들은 시월이 되면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말씀을 읽으며 밤에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시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성회가 있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 했다."

 

삼국지에서 진한은:

"성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天神)께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고 했고, 그 제단을 수도(穌塗)라고 한다."

 

중국의 고대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도 단군이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이자 임금임을 밝히고 있다.

 

1675년(숙종 2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한 [규원사화]는 일본의 우리 역사 말살 때에 많은 책이 몰수ㆍ폐기되는 와중에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선생이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남창(南倉) 손진태(孫晋泰) 선생이 극비리에 필사(筆寫)하여 빛을 본 책이다. 일제가 고조선의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했지만 [규원사화]를 비롯한 많은 고서와 중국의 역사책에서 밝혀진 바로는 엄연히 단군조선이 있었고,「단군(檀君)」이란 말은「박달(壇)나라의 임금(君)」이란 뜻이었던 것이다.

 

단군조선은 47대 1,195년간 존속했고, 공자를 비롯한 많은 중국의 성현들도 우리나라(東夷)를 흠모했다는 기록이 있고, 동방삭(한 무제 때의 사람)은 당시의 우리 민족을 가리켜

 

“태연하게 앉아 서로 범하지 않고, 헐뜯지 않고, 사람에게 근심이 있으면 서로 구해 주어 선인(善人)이라고 했다.”라고 기록한 바가 있다.

 

고조선 시대에는 한문이 없었는데 어떻게 단군이란 이름이 생겨났는지는 [규원사화]에 잘 나와 있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박달임검지역야(朴達壬儉之譯也)'라 해서, '단군이란 박달나라 임금을 번역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달이라는 말은 옛부터 백달이나 배달로도 불렀고, 나라의 우두머리는 임검이라 했다. [규원사화] 단군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신씨이강어단목지하 이환검신인

(神氏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

 

이 말의 뜻은「신씨천황께서 이미 박달나무 밑에 하강했고, 환검신인이 다시 단목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았다」때문에 단(檀)으로써 나라이름을 삼은 것이며,「단군이란 단국의 임검이다'라는 내용이다. 사가들이 역사를 한자(韓字)로 기록하다 보니까, '박달 임검'을 박달나무단(檀)자 임금군()자로 쓰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 때부터 단군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보면, 세칭 낙랑단궁(樂浪檀弓) 곧 낙랑나라의 단궁(檀弓)이라는 글자가 있다. 이것은 활이 생산되는 자료가 낙랑나라 박달나무이기 때문에 낙랑단궁(樂浪檀弓)이라 했던 것이다.

 

단군, 단군임검 또는 단군왕검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박달나라의 임금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다. 시조 단군 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단군은 한 사람일 수 없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임금들도 모두 '박달나라 임검'이라는 뜻으로 계속 단군이라고 불리어 왔다. [제왕연대력]이나 [조선사례]기 혹은 [해동춘추] 같은 책을 보면, 처음 국호가 [단]이라고 되어있다.

 

[규원사화]의 신뢰성을 입증하는 '중국 고대기본 사적'과 합치되는 부분이 열 군데 이상 된다. [규원사화]에 보면, 제3세 임검 가륵임검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때마침 하왕(夏王)이 덕을 잃어 신하들 중에서 몇몇이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 식달(息達)에게 남국과 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들을 치게 하니, 나라의 위엄은 크게 빛나게 되었다.

 

(時夏王失德 其臣有謀逆者 乃使息達 率藍眞蕃之民 以征之於是國威益彰).'

여기서 식달은 사람으로서 요즘 말하면 국무총리 벼슬에 있던 사람이다.

 

단군조선은 나라를 아홉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진번과 남국은 그 아홉나라 중 두 나라에 해당되는 나라다. 위 대목에 보면 그 당시 중국임금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위 내용과 부합되는 중국측 사서가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보면,

 

'하나라 임검 태강이 덕을 잃어 이인(夷人:동이인, 즉 조선사람)이 비로소 배반하기 시작했다. (夏后氏 太康失德夷人始畔)'라는 내용이 있고, 그 주()에 '태강 예에게 쫓겨 났다'고 되어있다.

하왕 태강이 그 신하 예에게 추방당한 연대가 표준세계년표에 의하면 '태강 19년 신해(辛亥, 주전 2170년)'이므로, 이 연대를 우리 가륵(嘉勒) 임검의 즉위년대수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측 기년(紀年)으로 환산하여 보면 가륵임검 37년 신해(단기 164년)에 해당하므로 위 사실은 대략 이 무렵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두 내용이 부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환단고기]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15세 벌음(伐音)단군 때의 기사를 보면, '때마침 하왕이 사신을 보내와 도와줄 것을 요청하여 말량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여 구해 주었다. 그 후 또다시 하왕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그 무도함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

 

(時夏王遣使請援 乃末良興兵進救 後夏王復請兵 儉以其無道却而不許)

 

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중국측 사서(史書) 여러 군데를 찾아본 즉, 주전 77년에서 주전 6년에 살았던 유향(劉向)이라는 분이 쓴 설원(說苑) 제13권 권모편(權謀篇)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위 벌음(伐音)과 같은 시기에 재위하였던 하왕 계() 52년 갑오(주전 1767년)에 '탕이 하왕 걸을 토벌하려고 하므로, 걸왕이 노하여 조선의 군사(九夷之師)를 일으켜서(조선 군사의 힘을 빌어서) 탕을 토벌하니, 탕이 이에 걸왕에게 사죄하였다.

 

(湯慾伐桀 桀怒起九夷之師 以伐之 湯乃謝罪)'라고 되어있고, 그 다음해인 53년 을미(乙未, 주전 1766년)에는 '탕이 걸왕에게 조공을 하지 아니하므로 걸이 다시 조선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구이(九夷)가 군사를 일으켜 주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탕이 군사를 일으켜서 걸왕을 토벌하여 남소(南巢)로 추방하였다(湯不貢 桀起九夷之師 九夷不起 湯乃興師伐之遷桀南巢)'라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바로 앞서 말한 [규원사화]의 벌음임검의 기사내용을 뒷바침해주는 것이다. 위 사실을 우리측 기년(紀年)으로 환산하여 보면, 벌음임검 5년 갑오(甲午, 단기 567년)와 6년 을미(乙未, 단기 568년)의 2년에 걸쳐서 일어난 사실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규원사화]의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단군이 이미 하늘에 제사 지내고, 교()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고, 도()를 이뤄 행하게 한지 몇해 동안의 백성들이 모두 감화되어 악은 없어지고 천하는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이는 창세기에서 노아가 홍수 심판 후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과 같다.

“노아가 주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가운데서 취하여 제단에 번제를 드리더라”(창 8:20).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교시하는 내용은 성경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계시도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시며, 한 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저도 새지 아니하도다.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네가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뜻을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 바탕이 통하여 맡은 일을 온전케 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삼국유사]ㆍ[삼국사기] 작가들과 침략자 왜놈들이 아무리 우리 역사를 왜곡하여 고대사를 없애려고 혈안이 되었지만, 이렇게 중국 고대사와 [규원사화]를 통해 우리 민족이 단군시절부터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민족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나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를 전통종교로 생각하고,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인식하는 오해를 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외래 종교인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귀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은 유일신을 믿는 민족이었다.

 

4. 공자에 대한 오해

사람들은 명절 때마다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그 원류(原流)가 공자의 유교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공자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는 했지만 죽은 부모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한 적은 없다.

 

마치 불교에서 석가가 누구든지 도를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은 뒤로 한 채, 불상을 만들어 절하고 석가를 신으로 모시고 허리가 부러지게 천배씩 절하듯, 유교의 많은 부분은 후대 사람들이 공자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만든 것이다. 그 범인은 진시황이다.

 

고대 중국인은 上帝를 믿었다

고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위인은 요와 순 임금이다.

공자(孔子)의 서경(書經)에 의하면 요ㆍ순 임금은 상제(上帝,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었다. 순임금 때부터 중국인들은 여름에는 북쪽국경에서,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 국경에서 국경제사(國境祭祀)를 상제(上帝)께 드렸다. 요ㆍ순 시대부터 상제에게 제사를 드렸던 제사문이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주> : 대명회전(大明會典) : 명회전(明會典)이라고도 한다. 모두 180권. 회전(會典)이라는 것은 중국의 명(明)·청(淸)나라 때의 종합행정법전을 말한다.

 

"지극히 오래 전 태초에 공허하고 흑암의 큰 혼돈이 있었느니라. 다섯 행성은 아직 운행되지 않았었고, 태양도 달도 빛을 발하지 않았었느니라. 거룩하신 신 상제(上帝)께서 이곳에 모든 만물을 지으셨느니라. 주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셨느니라. 그리고 사람을 지으셨느니라.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만물이 지음을 받았느니라."

 

이 내용을 창세기의 내용과 비교하면 매우 흡사함을 느낄 수 있다.

창세기 1:1~5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또 다른 국경제사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모든 생물들이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았나이다. 상제(上帝)시여, 인간도 만물도 모두가 당신의 사랑으로 이 낙원에 살게 되었나이다. 모든 생명체가 당신의 선하심으로 지음 받았사오니, 그 축복은 당신으로 말미암음이옵니다. 오 주시여, 당신만이 이 모든 만물의 참 어버이가 되시옵니다."

 

창세기 1:25~27 /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리스도교 이외에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위와 같은 기도문은 없다. 따라서 중국인이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진 노아의 후손인데, 얼굴은 동양인이지만 언어나 생활(입식), 식생활(고기ㆍ기름) 등에서 서양인과 가깝다. 옛 중국인들의 시신을 발굴해 보면 금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인은 노아의 셋째 아들인 아벳의 후손인것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셈족인 동이족과 피가 섞이면서 지금과 같은 동양인적 모습을 하게 되었다.

 

중국 사람들 역시 진시황이 진나라를 세웠던 B.C. 200년까지 무려 2000년 동안 유일신인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다. 상제(上帝)의 중국식 발음은 '샹따이'인데, 유대인의 하나님 칭호 중 하나인 '엘 샤따이'와 유사한다. 현재 중국어로 된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상제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인들이 쓰는 문자인 한자는 동이족 창힐 어른이 시작하여 후손들이 창세기를 모델로 만들어졌음은 아무도 부정 못한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그리스도교 이외에는 이런 기도문이 없다. 바벨탑 사건이후 하나님을 기억하던 백성들이 동방으로 이주해온 후 하나님을 기억하며 드렸던 기도문으로 생각된다. 진시황(秦始皇)이 진()나라를 세우던 주전 200년경까지 중국인은 2000여년 동안이나 유일신(唯一神)이요, 창조주이신 상제 하나님을 잘 믿어왔다. 그런데 바벨론과의 무역으로 막강한 부를 축적하고 사병을 길렀던 장사꾼으로 함의 후손인 '여불위'의 아들 '여정'이 진시황으로 즉위하면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그는 유일신, 즉 상제 하나님 신앙을 없애야 통치하기가 쉽다고 생각하고 종교혁명을 일으켰다. 공자의 제천(祭天)사상이 가득 담긴 시경ㆍ서경ㆍ사기ㆍ논어 등 모든 서적을 불태우는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 책들 중에는 상제 하나님에 관한 기록, 바벨탑의 기록, 창세기의 기록이 많이 있었을 터인데, 그 책들을 태워 버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공자의 제자들인 학자들이 계속 저항을 하자 생매장을 하여 죽여 버렸던 것이다. '분서갱유'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신앙적 차원으로 볼 때는 유일신을 잘 섬기던 야벳의 자손 중국인들이 함의 후손으로서 우상숭배에 열을 올리던 진시황제를 따라 바벨론적인 바알적인 신앙으로 완전히 떠나버린 사건이다.

 

진시황은 분서갱유로 모든 유일신 신앙이 담긴 종교서적을 다 불태운 줄 알았으나, 하나님은 그루터기를 남겨 두셨다. 오랜 세월이 흘러 공자(孔子)의 허물어진 옛집을 수리하다가 벽 속에 숨겨둔 공자의 서적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공자의 잃어버렸던 책들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완전치는 않으나 완성하였다.

 

공자는 산동성 곡부(曲埠)의 동이족 출신 학자인데, 그의 저서 '중용(中庸)'에서 "제사(祭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자기의 많은 학문을 토대로 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늘과 땅에 드리는 모든 제사의식들을 통해 사람이 상제(上帝)를 섬기느니라." 결국 제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샹따이'를 섬기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공자가 간절히 바라던 제사는, 조상(祖上)숭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이 되시는 창조의 주 상제(上帝)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말했던 것이다.

 

5. 고대중국의 하나님은 상제

샹다이(上帝)란 말은 공자가 편찬한《서경(書經)》에 32회,《시경(詩経)》에 32회,《사기(史記)》에 20회가 씌어 있고《중용(中庸)》에는 58회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진시황의 [분서갱유] 시건 이후 이 말은 사라졌다. 진시황은 상제 신앙을 말살하고, 조상신을 섬기게 한 장본인이다.

<주> : 이 수치는 필자가 직접 찾아 얻어낸 것이다.

 

공자는《중용》에서 말씀하기를 「교사(郊社)의 예식은 샹다이를 섬기기 위한 것이다」(郊社之禮,所以事上帝也)라고 하였다.《예기(禮記)》에는 제사 드리는 예법이 여러 군데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나라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교제(郊祭)」라 칭한다 하였다. 공자는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규칙을 내리셨는데 이것이 「교제(郊祭)」이니,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바른 길이니라」(天垂象, 聖人則之. 郊祭, 天之道也.」) 하였다. 중국 황제를 자칭 천자(天子)라고 하는데, 천자는 매해 첫날 반드시 먼저 교제를 하나님께 드리며 경배하였다.《春秋繁露郊祭第六十六

<주> : 교사(郊祀) : 천자(天子)가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교외에서 하늘에 지냈던 제사. 교사(郊社), 교제(郊祭)라고도 한다.

 

유교의 효사상을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책중에 명심보감(明心寶鑑)이 있는데 첫마디가 이렇게 나온다. “자왈 위선자는 천이보지 이복하고 위불선자는 천이보지 이화니라.” 子曰爲善者天而報之以福, 爲不善者天而報之以禍(공자가 가라사대 선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복으로써 갚아 주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화로써 갚아 준다).

 

삼국지의 유명한 제갈량((諸葛亮)도 크리스천이었던가? 이런 말을 했다.

“모사는 재인이나 성사는 재천이니라.”

謀事在人 成事在天:

 

이 말씀은 잠언어 있는 말씀이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잠언 16:1)

이 말씀을 중국어 성경으로 이렇게 번역하였다.

心中謀事在人允人祈求在主

심중모사는 재인이나 윤인기구는 재주니라.

 

(周)대의 우주론에서 독특한 개념이었던 '천'(天)은 은(殷)대의 '상제'(上帝)와 같은 개념이다. 은대의 왕들이 자신들을 상제의 후예라고 주장했던 것은 그들의 왕권이 상제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대의 왕들에게 있어서 '천(天)'은 훨씬 의인화된 신(神)을 의미했다. 주의 왕들은 '천명'(天命)은 늘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왕가의 후예들이 언제나 왕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믿었다.

 

6. 공자 이전의 시대정신

공자가 태어나기 전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중국 대륙의 역사는 우리 민족인 동이족(東夷族)과 지나(支那)족인 하화족의 경쟁과 협력 관계로 이루어졌다. 중화사상(中華思想)을 가지고 있는 하화족을 중국인들은 화하(華夏)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본래 황하상류 지역에 있는 임분(臨汾)에 주로 살았다. 동이족에 속하는 소호(少昊)족은 공자의 고향인 산동의 곡부를 중심으로 살았고, 그 수가 하화보다 훨씬 많았으나 하화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고 살았다. 동이족의 정신적 중심은 산동의 태산(泰山)이었고, 태산 정상에 있는 천제단(天祭壇)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았다.

 

하화의 첫 임금은 요()였는데, 그는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만한 인재를 찾지 못하고 동이족인 순(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순은 다시 하화에서 우(禹)라는 인물을 찾아 자리를 넘겨주었고, 우는 동방 장군들의 협력을 얻어 황하의 치수에 성공하였으며, 하화는 임분에서 화산(華山) 지역으로 진출했다. 우는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14대에 이르러 걸(桀)이라는 폭군이 나타나자, 동이족의 탕(湯)이 걸을 제거하고 은(殷) 나라를 세웠다. 은나라는 '정인(貞人)'이라는 기도집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국사를 결정하는 신정국가였다.

 

은나라의 30대 주(紂)왕은 우상을 섬기고 무도하므로, 하화의 발(發)이 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 나라를 세워 무왕이 되었다. 주의 무왕은 신정국가였던 은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명분을 찾기 위해 신앙의 자유를 선언하였다. 조상 귀신을 모시는 '종묘(宗廟)'와 농사의 신을 섬기는 '사직(社稷)'을 모든 지방 관청에 만들게 하고 왕궁에도 세웠다. 은이 멸망할 때 두 명의 위인이 있었는데, 한 명은 고조선으로 가서 요동 지역에 땅을 얻어 살았던 '기자'이고, 다른 하나는 무왕에게서 은나라 도읍 근처의 땅을 봉지로 받아 은의 유민과 함께 살았던 '미자'인데 그 땅을 송(宋)이라 했다. 공자의 증조부 공방숙은 바로 그 송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는 죽기 7일 전에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렇다면 공자와 그의 조상은 하나님을 섬기던 은나라 사람이었고, 공자는 우리와 같은 민족인 동이족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하나님을 버리고 귀신을 섬기던 주 나라가 멸망하고, 천하가 어지러울 때 공자가 태어났다. 공자 사상의 기본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자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었다. 공자는 요ㆍ순과 하ㆍ은ㆍ주에 이르는 역사인 《상서(尙書)》를 기록해 바른 역사를 확립하려 했다. 그러나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바빌론과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 진()의 시황제(始皇帝)였다. 그는 동이족의 신임을 얻기 위해 태산에 제사를 드리러 갔다가, 동이족 창해역사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시황제는 동이족의 포섭을 단념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3년 후인 주전 215년에 2700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는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동북지구의 요하(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조()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은 주된 이유는 동쪽의 고조선을 막아 놓고, 산동의 동이족을 박해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주전 212년부터 동이족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공자의 사상을 박해했는데, 공자의 책을 모두 수거해 불태웠고, 공자의 제자 460명을 땅에 묻어 죽였다.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책을 불태움, 坑儒:공자의 제자들을 땅 속에 묻음) 사건을 통해 공자의 원래 사상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공자의 옛집 벽속에서 공자의 책들이 발견됨으로 다시 그 책들이 복간되었지만, 그의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사상은 희미해지고, 조상귀신 섬기는 일이 유교의 정신인양 잘못 전해지게 된 것이다.

 

시황제의 아들 호해를 제거하고 진을 멸망시킨 사람은 하화족인 한(漢)의 유방(劉邦)이었다. 그는 동이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자의 학문을 복원하겠다고 선언하고, 공자의 책들을 기억나는 대로 복원하게 하였으나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주나라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삽입하였다. 그래서 상제를 공경했던 공자가 귀신을 섬기라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7. 한민족의 이동경로

진화론적 사학자들은 인류가 한 곳으로부터 전파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다는 병행(竝行)발생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러 고고학적 증거를 놓고 볼 때 인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흩어졌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라. 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 11:9)

 

성경은 주전 2357년 경에 노아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대적해 바벨탑을 쌓자 하나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서로 알아들을 수 없게 한 뒤 온 세상에 흩으셨다고 명시한다. 국내 사학자들이 터키 아라랏산 지역으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만주에 이르는 여정을 탐사한 결과 민족 이동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 지역에는 셈족의 특징인 광주리를 닮은 듯한 밑이 둥근 환저형(丸底形) 토기와 생활용기가 발견되었고, 우리말과 같은 SOV형 교착어를 사용하며, 아라랏산에만 있는 흑요석 공구를 사용하고, 대홍수와 까마귀에 대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중국의 이벤허(李賓漢)박사가 조사결과를 중국 북경대학에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므로 북경대학도 한 민족의 이런 민족이동설을 인정한 것이다.

 

 

아담의 탄생은 주전 4114년이고, 대홍수는 주전 2458년에 일어났으며, 바벨탑 사건은 주전 2357년에 일어났다. 고조선의 건국이 주전 2333년이므로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24년만에 만주에 도착한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셈족이 이동이 자유로운 유목민이었고, 조사단이 볼가강 하류의 아조프 박물관에서「바퀴달린 집」을 발견함으로써 이동속도가 빨랐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강화도 마리산에는 단군왕검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천제단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천제단의 방향이 서쪽으로 향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서쪽에서 섬겼던 하나님께 경배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경우, 3600개의 고대 암각화 중 70%가 수메르나 셈족의 것으로 추정되며, 가고시마현의 거석에 새겨진 수메르 양식의 고대선박도 이를 입증한다.

 

공자 시대에는 종이가 없어서 대나무를 깎아서 그 위에 올챙이 모양의 과두문자(蝌蚪文字)를 썼는데 이를 죽간(竹簡)이라 한다. 그러나 한나라가 만든 공자의 책은 종이에 예서로 쓴 것이므로 그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고 하고, 그것을 만든 학자를 어용(御用)학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용학자들 가운데 양심선언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논어의 술이(述而)편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말했다.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 怪力亂神): 공자는 괴이한 일과 난잡한 귀신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즉, 공자가 조상 귀신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공자 같이 수준 높은 사람이 가장 저급한 종교이며 무속적이고 샤머니즘적인 귀신숭배에 빠졌을 리가 없다.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제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하늘과 땅에 드리는 모든 제사 의식들을 통해 사람이 상제(上帝)를 섬기느니라."

 

결국 모든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공자는 말한 것이다. 이런데도 사람들은 명절 때마다 명백한 우상 숭배인 조상귀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것이 유교나 우리의 전통인 것처럼 확신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미 죽어 심판에 처한 영혼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며, 다른 잡다한 악령들만 불러들여 사탄만 즐겁게 할 뿐이다.

 

8. 맺는 말

이상으로 공자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부분에 대해 살펴 보았다. 공자는 죽음을 앞두고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의미인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는 유언을 남겼듯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사망에서 구원하는 진리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사오백년 전에 동양의 공자와 서양의 플라톤과 인도의 석가가 인생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고, 예수님은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이렇게 내리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 14:6)

 

우리 동이족은 무려 20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믿고 섬기던 민족이었는데, 진시황의 왜곡된 역사로 인해 우리는 진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불교나 유교가 전통종교인 줄 착각하고 살았다. 우리 민족이 원래 하나님을 믿던 민족이었고, 노아의 장자인 셈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구한말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급속도로 이 생명의 도가 퍼져 나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민족이 된 것이다.

 

주님이 재림이 가까운 이 때, 구원의 역사는 해 돋는 동방 한국 민족이 일으켜야 한다. 진리의 횃불을 들고 땅끝 예루살렘으로 큰 부흥의 역사를 밀고 나가야 할 때가 왔다. 일어나라!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사 24:15). Amen! Halleluja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