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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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나라

2012. 1. 22.

 

 


이어령

한국인 이야기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참으로 놀랍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는 제자들을 죽이면서까지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거꾸러져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듯이, ‘한국의 지성’으로 일컬어지던 ‘바리새인 사울’ 이어령도 하와이 작은 교회에서 주님께 돌아와 바울과 같이 열성적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오늘은 그가 중앙일보에 연재한 칼럼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중에서 우리 자신도 깨닫지 못한 한국인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두 가지 한국인


산불이 나면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깨진다. 큰 짐승이든 작은 짐승이든 평소에 쫓고 쫓기던 관계에서 벗어나 다 같은 방향으로 살길을 찾아 달려간다. 위기의 한순간이 정글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또 이런 말을 한다. 단세포 편모충(鞭毛蟲)인 클라미도모나스는 암수의 구별 없이 세포 분열로 번식을 한다. 하지만 환경이 변해 질소 같은 것이 부족해지면 둘로 갈라졌던 것이 다시 한 몸으로 합친다고 한다. 위기에 대처하는 이러한 능력 때문에 클라미도모나스는 발생생물학이나 유전학의 모델 생물로 많이 이용된다. 우리는 평균 3년 만에 한 번꼴로 난을 겪어온 민족이다. 국난의 산불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한 방향으로 뛰었고 환경이 어려워지면 클라미도모나스처럼 한 몸이 되었다. 하지만 관과 민이, 계층과 분파가 서로 증오하고 분열하고 얼굴을 할퀴다 나라를 잃는 실향민이 된 적도 있다.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여행작가로 구한말 세계 각처를 탐사한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은 한국을 이렇게 적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러시아의 자치구 프리모르스키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같은 한국인인데도 정부의 간섭을 떠나 자치적으로 마을을 운영해 가는 그곳 이주민들은 달랐다. 깨끗하고 활기차고 한결같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국의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심과 게으름과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은 어느새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바뀌어 있었고, 아주 당당하고 터프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평상시보다 위기에 강한 민족, 남이 멍석을 펴주는 것보다 제 스스로 일을 할 때 신명이 나는 한국인의 기질을 일찍이 그녀는 한국의 난민을 통해 간파한 것이다. 어느 민족보다도 부지런하고 우수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로 변해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비숍 여사는 이렇게 희망의 말로 결론을 맺는다.

 

“고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도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면 참된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은 어떤가. 지금 세계시장의 정글은 불타고 있다. 그 불길은 한국을 향해 번져 오고 북한은 로켓을 발사해 불난 데 부채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가. P리스트, J리스트, K리스트…. 끝없는 검은 리스트의 행렬 속에서 우리의 가슴은 더욱 암담하다. 백 년이 지났는데도 비숍 여사가 말한 ‘정직한 정부’, 그리고 ‘참된 시민의 발전’은 아직도 먼 곳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눈을 돌리면 세계의 무대에서 타오르는 또 다른 불꽃이 보인다. WBC의 다이아몬드에서 뛰는 한국의 야구선수들이, 세계피겨선수권의 아이스링크에서 나는 김연아가, 그리고 한마음으로 열광하는 모든 한국인의 얼굴이 보인다. 함께 외치고 함께 감동의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또 미사일이 아니라 축구공을 놓고 남북한 젊은이들이 대결하는 잔디밭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비숍을 놀라게 했던 프리모르스키 난민들의 유전자가 어디엔가 마르지 않고 우리 핏속을 흐르는 게 보인다. 그러나 미안하다. 겨우 백 년 전 이방의 한 여인의 시각으로 한국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2. ‘쑥쑥이’라는 태명(胎名)


『젊음의 탄생』 강연이 끝나자 책을 든 청중이 사인을 받으려고 몰려왔다. 거의 기계적으로 사인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쑥쑥이라고 써 주세요”라고 말하는 여성이 있었다. 놀란 표정을 짓자 “제 아이에게 주려고요”라고 말한다. 군이라고 써야 할지 양이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물었다. “여자애요, 남자애요.” 그러자 그 여성은 “아직 몰라요”라고 이상한 대답을 한다. 그제야 나는 그 여성의 배가 불러 있는 것을 봤고 그 옆에는 곧 애기 아빠가 될 젊은이가 참나무처럼 서 있는 것을 봤다. 쑥쑥이는 태명(胎名)이었던 것이다.

 

이름이 있으면 태아도 우리와 같이 존재한다. 칠십 평생 처음으로 글씨도 모르는 배 속 아이에게 책 서명을 해 준 것이다. 처음엔 미소를 지었지만 나중에는 눈이 축축해졌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로 안습(眼濕)이었다. 나와 동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기계총이 나고 부황 난 얼굴에는 으레 버짐이 번진 그 애들에겐 태명은 고사하고 본명조차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쇠똥이, 개똥이가 아니면 그 흔한 돌쇠였다. 그래도 남자아이는 천한 이름이라야 오래 산다는 속신 때문이라고 하자. 하지만 여자애들은 갓 났다고 ‘간난이’, 섭섭하다고 ‘섭섭이’다. 그 흔한 ‘언년이’란 이름도 아마 언짢은 년이라는 욕일 것이다. 남과 다른 특성을 나타낸 이름이라 해도 겨우 점이 있다고 해서 점박이고 점순이다.

 

검으면 검둥이, 희면 흰둥이 그리고 검고 희면 영락없이 바둑이가 되는, 거의 강아지 이름을 짓는 수준이다. 동네에다 대고 “바둑아!”라고 불러 봐라. 틀림없이 대여섯 마리의 개들이 떼를 지어 달려올 것이다. 동명이인의 여자애들이 강아지 이름처럼 그렇게도 흔했으니 이름이 없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요즘 젊은 부부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태명에는 남녀의 성별도, 누구 성을 따르느냐의 성씨(姓氏) 문제도 없다. 그저 쑥쑥 자라라고 쑥쑥이, 무럭무럭 성장하라고 무럭이다. 튼튼히 크라고 튼튼이, 기쁘다고 기쁨이 그리고 또 그런 행복과 축복을 받으라고 행복이요 축복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태 안에서 우리와 함께 당당한 쑥쑥이에게 사인을 해 준 덕분에 그동안 잊고 살던 나 자신의 태아기(胎兒期)에 대해서도 눈뜨게 됐고, 하마터면 빠뜨릴 뻔했던 한국인 이야기에 태아들이 생활하고 있는 신비롭고 놀라운 이야기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양철북』을 쓴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그 소설 첫머리에 자신의 탄생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양수의 어둠 속에서 철퍽거리고 놀다가 갑자기 환한 바깥세상으로 나오면서 처음 보는 불빛이 몇 촉짜리 전구였는지 그 상표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어제 일처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상상력으로 치면 그 못지않은 영화감독 스필버그는 외계인(ET)들을 태아의 모습처럼 보여 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가의 허풍이요 영화 속의 허상이다. 우리와는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쑥쑥이는 분명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내계인(內界人)이다.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탄생의 비밀을 풀어 가자면 소설가나 영화감독의 상상력에만 의존할 수 없다. 로물루스 형제를 젖 먹여 키운 수상한 늑대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와 좀 더 다른 이야기를 하려면 늑대를 곰으로 바꾸는 상상력만 가지고서는 안 될 것이다. 시인과 과학자가 손을 잡아야만 쑥쑥이가 살고 있는 저 어둡고 신비한 태내 공간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3. 양수(羊水)의 바다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들은 바다에서 어머니를 본다. 한자의 바다 해(海)자에는 어머니를 뜻하는 모(母)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말도 그렇다. e의 철자 하나만 다를 뿐 바다도 어머니도 다같이 ‘라 메르’라고 부른다. 거기에 인당수 바닷물에 빠져 거듭 태어나는 심청이 이야기, 실험관의 인조인간 호문클루스가 갈라리아의 바다에 떨어져 생명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괴테의 『파우스트』, 그리고 또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장 콕토의 시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서 “생명의 시원인 모태는 태초의 바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과학자들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바다가 아니라 20억 년 전 최초의 생명 세포를 태어나게 한 태고의 바다라고 한다. 이유는 그 바닷물과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의 성분이 비슷하고 거기에서 생명의 기적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海水)와 양수(羊水)의 미네랄 화학기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겨자씨만 한 태아(胎芽)가 되어 어머니의 자궁 속 바다를 떠다니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태고의 그 바다는 어둡지만 참으로 고요하고 아늑했을 것이다. 하루에 일 밀리미터씩 자란다는 수정란의 미생물에서 수아가미와 지느러미가 달린 물고기 모양으로 변해간다. 지구 생물의 진화과정으로 본다면 10억 년의 세월이 지나간 셈이다. 그 지느러미가 손과 발이 되고 폐가 생겨나면 물고기였던 나는 도롱뇽 같은 양서류로 변신한다. 정말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 같은 흔적도 남아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손톱ㆍ발톱이 생기기 시작하면 나는 어느새 쥐와 같은 포유류가 되고 그 몸에 뽀얀 잔털이 자라면 영장류의 원숭이 모습으로 진화한다. 

그래도 인간이 되려면 아직 수백만 년이 지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어떤 서사시도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놀라운 변신의 드라마를 보여준 적이 없다. 생물학자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머니의 바다(羊水) 속에서 20억 년, 더 올라가면 40억 년의 기나긴 생물의 계통 발생 과정을 단 10개월 만에 치렀던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빛의 속도로 질주해도 불가능한 그 길고 긴 생명의 여정을 거쳐서 우리는 이 한국 땅에 안착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태아들도 꿈을 꾼다는 데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때 무슨 꿈을 꾸었을까. 지상의 꿈과는 분명 다른 꿈이었을 거다. 프로이트 박사의 분석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순수한 꿈, 초록색 바다의 꿈이 아니면 그냥 하얀 꿈이었을지 모른다. 축제의 불꽃처럼 일시에 생물들이 터져나온 캄브리아기의 바다 꿈이었을까. 그보다도 먼 우주 대폭발의 하늘 꿈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과 그 태아들도 그 안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잘 기억해 주기 바란다. 한국인 이야기를 하는데 두고두고 되풀이될 중요한 화두이니까.

 

4. 왜 태어나자마자 울었을까?


태어나자마자 아이들은 왜 큰 소리로 우는가. 

“바보들만 사는 당그란 무대에 타의에 의해 끌려나온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그랬을 것”

이라고 셰익스피어는 풀이했다. 과연 대문호다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한 가지 씻을 수 없는 실수를 했다. 아이들이 타의에 의해 끌려 나왔다는 그 대목이다. 태아들은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호흡운동을 하고 걸음마의 다리운동까지 한다. 이렇게 충분한 준비를 다 마치고 나서야 여행을 떠날 마음을 갖는다. 그 깜깜한 암흑 속에서도 출구의 산도를 용케 알고 그 방향으로 머리를 돌린다. 달력도 시계도 출생을 가르쳐 줄 학원 선생도 없는 나 홀로 공간에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오히려 출산일을 모르는 것은 산모 쪽이다. 배 속에 든 아이가 사인을 보내 진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분만일이 온 것을 눈치채질 못한다. 초음파로 태내를 환히 훑어보는 산부인과 전문의도 아이가 언제 나올지 정확한 일시를 모른다.

 

그래서 이따금 구급차 안에서 몸을 푼 산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셰익스피어 같은 멍청한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사주팔자(四柱八字) 타고난다고 하지만 그 운명의 날을 선택한 것은 바로 배 안에 있는 ‘나’다. 오히려 진짜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것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아이들이 아니라 인공 분만에 의해 억지로 끌려 나온 요즘 아이들일 것이다. 제왕절개의 인공 출산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아이들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고고(呱呱)의 성(聲)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들이마시는 호흡작용으로 닫혀 있던 폐벽이 열리는 소리다. 그리고 그 최초로 들이마신 ‘들숨’이 생을 마칠 때 마지막 내쉬는 ‘날숨’으로 이어지는 한 호흡은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험난하고 허무한 세상으로 나가려고 목숨을 걸며 비좁은 산도를 빠져나오는 모험을 했다. 양수가 터지는 탄생의 순간 행복의 바다, 평화의 바다는 사라진다. 어머니의 심장 박동을 파도소리로 듣던 태아의 추억은 멈춘다. 아이의 출산이란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하는 것이다. 그때 터뜨리는 울음소리야말로 수억 년 전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상륙했던 생물들의 울부짖음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왜 편한 바다를 버리고 모래와 용암밖에 없는 불모의 육지로 올라왔는지. 포식동물들로부터 피난처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의 신비한 힘이 있었던 것 같다고 진화론자들은 말한다. 정든 곳을 버리고 미지의 공간으로 나가려는 생명의 의지, 논리만으로는 풀 수 없는 어떤 고통에 대한 모험과 도전, 그것이 탄생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게 진화론인지 킬리만자로의 산꼭대기에서 얼어 죽은 표범 이야기를 하는 헤밍웨이 소설인지 분간할 수 없다.

 

태아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싶은 날에 태어났다. 나의 생일날은 내가 선택한 가장 성스러운 날이며 어머니의 바다를 떠나 육지로 상륙한 고난의 기념일이다. 나는 그날 총탄이 날아오는 육지를 향해 단신 상륙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성공을 했을 때 내 아가미는 허파로 변해 있었고 그 허파는 풍금처럼 상실한 바다와 새로 만난 대륙을 향해 울리고 있었다. 진통이 끝난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고고의 성을 들었으며 다음에 태어날 아이들의 바다를 준비하기 위해서 가장 청정한 바다에서 딴 미역국을 부지런히 드시고 계셨다.” 

그러니까 바다에서 뭍으로 상륙한 우리 신생아들은 용감한 해병대요 영원한 해병대였던 것이다.

 

산모는 출산을 통해 자연의 큰 힘과 그 지혜를 배운다고 했다. 어찌 여성만의 일이겠는가. 탄생의 비밀을 통해 우리는 대륙으로 올라온 생명의 바다를, 생물학과 시학(詩學)이 하나로 합쳐진 지혜의 책을 읽는다.

 

5. 동서양의 나이 계산법


“나는 한 살 때 태어났습니다.”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 첫 줄에 나오는 대목이다. 당연한 소린데도 아주 참신한 충격을 준다. 그래, 정말 그래. 우리는 태어나면서 한 살을 먹었지. 나는 양력으로 12월 29일 태어나서 이틀 만에 두 살을 한꺼번에 먹은 사람이다. 하지만 비웃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태어난 아이를 0살부터 정확히 계산하는 서양 사람들이다. 그것은 일 년 가까이 어머니 배 안에서 열심히 살아온 태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과학이요 합리성이요 라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제 나이 헤아릴 줄도 모르는가. 공장에서 나온 물건이라면 출고 날짜부터 따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눈ㆍ코ㆍ입을 달고 나온 아이들은 부품들을 꿰맞춘 TV 상자가 아니다. 

19주째만 되어도 벌써 태아 손에는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지문이 생기고 손금이 잡힌다. 손금을 보는 사람은 태내 생활을 통해 앞날의 운명을 비춰보려는 것과 같다. 배 속에서부터 왼손가락을 빠는 아이들에게 왼손잡이가 많다는 것은 영국의 실험 결과에서도 드러나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태내 버릇 백 살까지 간다’는 새 속담이 생겨날 판이다.

 

“태내에서부터 성인병이 시작된다”는 데이비드 버커의 책을 읽고 감동한 사람이라면 “나는 한 살 때 태어났습니다”라고 한 한국 작가의 소설에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현대소설은 고사하고 판소리 ‘심청가’를 들어보면 왜 한국 사람들이 태아의 나이까지 계산했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앞 못 보는 심 봉사는 태어난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몰라서 손으로 더듬어봐야 했지만, 그 애가 열 달 동안 어떻게 어머니 배 속에서 자랐는지는 초음파 사진을 찍듯 훤히 들여다본다.

 

그것이 중중모리 신가락으로 읊어대는 “사십에 점지한 딸 한두 달에 이슬 맺고……”로 시작하는 심청이 출산 대목이다. 첫 대목부터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정자ㆍ난자가 결합하는 것을 “이슬을 맺는다”고 한 촉촉하고 정감 있는 표현이다. 석 달에는 그 이슬에 피가 어리고, 넉 달에는 인형(人形·사람 모양)이 생긴다. 다섯 달과 여섯 달에는 오포(五包:간장ㆍ심장ㆍ비장ㆍ폐장ㆍ신장)와 육점(六點:담ㆍ위ㆍ대장ㆍ소장ㆍ삼초ㆍ방광)이 생겨난다고 묘사한다.

 

재미난 것은 여섯 달까지는 맺고 어리고 생겨난다고 하다가 일곱 달부터는 그 달수의 운에 맞춰 모두 열리는 것으로 바뀐다. 칠 개월에는 칠규(七竅)가 열리고 구 개월이 되면 구규(九竅)가 열리고, 열 달째는 금강문ㆍ하달문ㆍ뼈문ㆍ살문의 모든 자궁문이 열리면서 아이가 태어난다. 일곱에서는 일곱 수의 얼굴 구멍이 아홉에서는 하체의 두 구멍을 합친 아홉 수의 구멍이 열린다는 것도 짝이 맞지만 열 달에는 자궁문이 모두 열린다는 것도 딱이다.

일곱 수부터 모두가 ‘ㅇ’의 열린 모음으로 시작하는 한국말도, 그리고 정말 ‘열’에서 ‘열리’는 자궁문도 절묘하다. 과학의 정밀성과는 또 다른 시(詩)의 정교함이다.

 

과학적 관점으로 봐도 태아들은 일곱 달부터 듣고 느끼고 기억하기 시작한다. 감각이 열리고 뇌가 발달한다. 이때 태명(胎名)을 계속 불러주거나 같은 음악을 되풀이해 들려주면 태어난 뒤에도 산아들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한 개의 수정란에서 42사이클의 세포분열을 되풀이하면서 자라던 태아가 이 세상 밖으로 나온 뒤에는 겨우 5사이클로 줄어들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탄생 전에 우리 몸은 거의 다 만들어진 것이나 진배없다.

 

태아 의학이나 주산기학(週産期學)의 발달로 태내의 많은 신비가 풀어지면서 나이는 태아 때부터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요 과학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작은 일 같지만 이것이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고 체계를 가르는 중요한 철학의 랜드마크다.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보는 차이가 바로 이 연령 계산법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최첨단 자기공명 기기라 할지라도 앞 못 보는 심 봉사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생명공간을 들여다 보는 것은 렌즈도 수정체도 아니요 ‘마음의 눈’이기 때문이다.

 

6. 기저귀와 훈도시(ふんどしㆍ褌)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갓난아이들은 용케 어머니의 젖꼭지를 찾아 빤다. 시각이 아니라 후각을 통해서다. 설마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이미 배 안에서부터 어머니 냄새를 맡아 왔다는 이야기다. 배 안에서도 어머니의 말을 익힌다는 말, 그리고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편안한 표정을 짓고 베토벤의 시끄러운 음악에는 얼굴을 찡그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냄새까지 맡는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신생아들에게 평소 사용하던 어머니의 브래지어와 그렇지 않은 것을 대주고 그 반응을 살펴본 실험결과라고 하니 승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탯줄을 끊자마자 양수를 빨고 배설물을 싸던 생물유전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배우고 익혀야 사는 사회로부터 오는 최초의 문화유전자가 기저귀를 타고 들어온다. 빠는 것과 싸는 것은 생물학적 유전자에 맡겨진 것이지만 먹는 것과 누는 것은 문화적 학습과 훈련에 의한 것이다. 한국 나이로 두세 살은 되어야 겨우 자기 의지로 배설을 가릴 수 있게 된다. 그동안에는 기저귀를 줄곧 차고 지낸다. 사람들의 일생을 기저귀(강보)로부터 시작하여 수의(壽衣)로 끝나는 한 폭의 천으로 파악한 것은 역시 대문호 셰익스피어다. 하지만 기저귀의 문화인류학적 의미는 그보다도 훨씬 복잡하다.

 

같은 기저귀라도 자연섬유로 된 옛날의 기저귀와 종이로 만든 요즈음의 일회용 기저귀는 소재부터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천 조각 자체보다도 문화에 따라 아이에게 기저귀를 채우는 방식이 나라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 우선 기저귀를 느슨하게 채우느냐 꽉 조이느냐의 문화적 풍습에서 민족성 형성에 차이가 생긴다는 이른바 ‘기저귀학(學)’이란 것도 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다니엘 벨 같은 사회학자는 실제로 기저귀를 지나치게 꼭 죄는 풍습으로 러시아인의 기질과 사회성을 분석했던 기저귀학파를 비웃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기저귀를 채우듯 일본 사람들은 아이들의 다리에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꼭 조여 맨다. 일본인 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다카바시 에쓰지로). 일본인들은 머리에는 하찌마끼(머리띠), 어깨에는 다즈끼(어깨띠), 양 가랑이 사이에는 훈도시(기저귀 모양의 천)를 조여야 힘이 나는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일제 강점 하의 영향으로 우리도 허리띠ㆍ어깨띠까지 두르고 데모를 하지만 일본의 훈도시만은 그들의 것이다. 힘자랑하는 일본의 역사(力士)들이 발가벗은 채 ‘기저귀’만 차고 씨름판에 오르는 그 기상을 보면 그래 정말 ‘기저귀의 문화유전자’라는 게 만만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아이들을 업고 다니는 시대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어머니들은 기저귀도 포대기 끈도 느슨하게 매는 편인 것 같다. 업힌 아이들이 어깨라고 하기보다 엉덩이에 박처럼 매달려 있는 옛날 그립고 귀여운 삽화를 보면 알 것이다. 기저귀를 꽉 졸라매는 것은 문(文)이요, 헐렁하게 매는 것은 질(質)이다. 조이는 것도 느슨한 것도 아닌 채운 듯 만 듯한 그 가운데 것이 바로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인 문질빈빈(文質彬彬)이다. 한국인이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문화다.

 

기저귀를 조여 매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 동남아의 경우다. 아예 기저귀란 것이 없단다. 인도네시아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배설할 기미가 보이면 전광석화와 같은 타이밍으로 받아 씻어낸다고 한다. 기저귀 없는 문화권의 ‘질’이 생겨나는 순간이다.

 

그렇다. 기저귀는 문화의 중요한 단서물이다. 젖을 ‘빠는 것’과 대소변을 ‘싸는 것’의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이 ‘먹는 것’과 ‘누는 것’의 의지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저귀의 의미다. 한국인의 최초의 학습은 이렇게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을 배우는 ‘맘마’와 ‘지지’이고 자기 의지로 배설하는 것을 배우는 ‘쉬이’와 ‘응가’의 유아 언어다. 빨고 싸던 생물학적 유전이 먹고 누는 문화유전자로 변하고 그것이 사회에 나가면 벌고 쓰는 관계로 진화한다. 그래서 버는 것만 알고 쓰는 것은 모르는 경제학ㆍ경영학은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도 꽉 조인 기저귀를 말이다.

 

7. ‘따로 따로…’와 보행기


콩나물 시루가 된 만원 엘리베이터 속에서 이따금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만약 인간이 다른 짐승들처럼 네 발로 돌아다닌다면 지금 이 엘리베이터는 어떻게 되었을까. 컨테이너처럼 길게 눕혀져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겠지. 사람들은 양 떼 모양처럼 아주 거북하고 민망한 자세로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웃음이 나오다가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인간의 직립 자세의 기원에 대한 프로이트 박사의 가설이 떠오른다. 그것은 항문과 생식기가 있는 엉덩이와 얼굴이 있는 머리 사이를 되도록 멀리 떨어뜨리기 위한 자세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이미 앞 글에서 기저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연 상태에서 인간적 문화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대소변 가리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결단코 프로이트 박사와 같은 산문적이고 건조한 상상력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내 기억을 비디오처럼 리와인딩하면 처음 일어서서 웃고 있는 한국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투부터가 다르다. 한국 사람들은 임신하는 것을 아이가 “선다”고 하지 않는가. 말의 이미지를 통해서 보면 한국의 아이들은 어머니 배 속으로 강아지처럼 기어 들어온 게 아니라 당당히 선 채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온 것이다.

 

실제로도 한국 애들은 엎어 재운 서양 아이들과는 다르다. (엎어 재운 아이들이 질식사로 죽는 사고가 잇따르자 요즘 서양에서도 한국식으로 눕혀 재운다). 한국 애들은 누워 지내던 태에서 엎어지는 운동을 하고 다음에는 고개를 들고 누에 벌레처럼 배로 기어가는 단계에 이른다. 일 년 가까이 그런 과정을 제 힘과 의지로 자연스럽게 통과해야만 두 발로 일어서는 마지막 봉우리에 오르게 된다.

 

중력의 법칙에 따르면 엎드려 기어 다니는 이상으로 편한 자세는 없다. 이 세상 어떤 의자나 책상도 두 다리로 서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모험을 자청하는가. 더구나 한국의 장판은 양탄자가 깔린 서양이나 일본의 다다미 방과는 다르다. 한번 넘어지면 콘크리트 바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무릎을 찧고 머리를 부딪쳐 울면서도 다시 일어선다.

 

유난히 정이 많은 한국의 어머니 아버지들인데도 애가 일어나 걸음마를 배우는 순간만은 옆에 떨어져서 추임새만을 한다. “따로~ 따로~! 따로~ ”라고 외치면서 손뼉을 친다. 아이는 다시 일어섰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선다. 그러다가 보라, 이윽고 어느 날 아이는 제 발로 일어선다. 아직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눈에, 볼 위에, 입술 위에 은은하게 어리는 미소를 보았는가.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 이 땅의 지평 위에 우뚝 선다. 한 일(一)자의 땅바닥 위에 사람 형상을 딴 큰 대(大)자를 세워 놓은 한자의 그 설 입(立)자처럼, 혹은 한 폭의 깃발처럼. 그런데 서양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최초로 일어선 순간의 감동을 잘 모른다. 라이스 유크리드라는 사람이 ‘베이비 점퍼’의 보행기를 만들어 특허(US 8478)를 낸건 1851년부터의 일이다.

 

2002년 아일랜드의 매터병원에서 가레트 박사 팀이 190명의 부모를 상대로 조사한 보고서를 보면 이들 가운데 102명(54%)이 보행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 사용 기간은 중간치로 계산해 생후 26주에서 54주까지 반년 이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에게 운동을 시키고 빨리 일어나 걷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인데 실제로는 보통 애들보다도 오히려 서너 달 더 늦어진다는 조사 결과다. 거기에 보행기가 굴러 떨어지는 사고도 많이 발생하여 캐나다에서는 이미 십여 년부터 법으로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 미국에서도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런 이유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제왕절개 수술로 탄생의 자유와 그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이번에도 일어서고자 하는 자율의 의지와 훈련이 보행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호사스러운 보행기 위에서 기기도 전에 먼저 걷는 우리 아이들도 이제는 서양 애들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언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는지 아이도 부모들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따로 따로 따로”라는 전통적인 추임새의 말조차 모른다. 그것은 곧 첫발을 떼놓고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에 은은히 미소 짓는 한국인의 모습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