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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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 자료

2012. 3. 23.

▶속회자료 /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12.3.23)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

 

 

오늘 속회 주제는「하나님의 공의」다. 하박국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가를 배운다. 하박국서는 하박국의 날카로운 질문과 여호와의 답변으로 기록되어 있다.“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이 질문은 오늘 이 땅의 북쪽 김일성왕조 아래 핍박받는 성도들의 외침이다. 몇 주 전 정의선 담임 목사님이 책한 권을 주셨다.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金正日のかくされた戰爭)》, 저자는 하기와라 료(萩原遼)로서 일본 공산당 기관지‘아까하다(赤旗)’평양 특파원을 지낸 사람의 저서였다. 단숨에 읽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책이었다.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저자가 북한정권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친 얘기, 북한 주민 300만명은 양식이 없어서 굶어죽은 것이 아니라 김정일이가 반동분자를 굶겨 죽인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전율(戰慄)했다. 그래서 내가 그 책을 요약해 쓴다면 평정심을 잃을까보아 일본 인터넷에서 일본인들이 쓴 서평을 번역해서 싣고 마지막에 우리측 서평을 실었다. (오소운).

 

1.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

- 《金正日のかくされた戰爭》 / 萩原遼著 -

1990년대에 북조선은 3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아사자가 많은 해는 1997년과 1998년으로서 각각 100만명이 굶어 죽은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죽은 것은 [주체농법]이라는 엉터리 농법으로 농지가 피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천재(天災)까지 겹친 때문이라 생각된다. 비슷한 기상조건의 중국측 조선족자치구나 한국의 북부는 흉작정도의 피해였는데, 북조선반이 대량의 아사자가 나온 것은 인재(人災)의 요소가 많았다고 할 수가 있다.

 

현재로서는 김정일 정권은 아사자가 가장 많이 나온 시기에 핵개발에 거액을 투자한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핵무기나 미사일에 사용된 외화를 식료품 수입에 썼더라면 그렇게 많은 아사자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뜻으로 볼 때 인재라기보다는 미필고의(未畢故意)의 대량학살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북조선의 대량 아사는 적대 계층을 진멸하려고 김정일 정권이 꾸며낸 ‘제노사이드(genocide) 곧 집단학살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제출하고 있다. 표제의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이란 김정일이 벌인 국내의 적과의 전쟁이라는 뜻이다.

 

저자 자신이 인정하는 대로 지금으로서는 가설로서 정황증거일 뿐이다. 김정일 정권이 붕괴하고 평양의 비밀문서관의 문이 열리기까지는 정답을 낼 수가 없겠지만, 최종적인 가설 이외에 본서에는 그 동안 우리가 못 본 중요한 사실이 여러 가지 지적되어 있어, 금후의 북조선 정세를 생각할 때 중요하기 때문에 이 블로그에서 다루려 하는 것이다. 먼저, 김일성과 김정일 사이에는 1990년 이후 심각한 노선대립이 있었고 김일성이 죽기 직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는 북조선측 공문서까지 첨부되어 있다.  

 

김일성은 1973년에 김정일을 비밀리에 후계자로 지명해 놓고 서서히 권력 이양을 추진, 1980년대 후반에는 외교 이외는 모두 자식에게 맡겼었는데,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된 이후 원조가 격감되고 연간 수만 명의 아사자가 계속 생겨나기까지는 경제가 매우 어려웠다. 김정일은 경제의 참상을 부친에게 숨기고 있었다. 김일성이 농촌현지지도에 나갈 적이면 사전에 손을 써서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처럼 꾸며댔으나 숨기는 것에는 한도가 있었다. 마침내 굶어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 김일성은 아연실색하여 내정간섭에 들어갔다. 1993년의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는 이때까지의 중공업일변도에서 민생중시 정책으로 전환시키고 농업과 경공업을 앞세우는 새 방침을 세웠다. ([김일성저작전집]에서 연설문을 실렸다.)

 

더욱이 카터 전 대통령을 통한 한국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의 신청이 승낙되었다. 북조선은 상투적으로 시시콜콜 전제조건을 붙이는 게 관습인데 이때의 김일성은 전제조건이나 예비회담 따위는 필요 없고 언제든 만난다고 대답하였다. 얘기는 빨리 진전되어 1994년 7월 25일부터 3일간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되었다. 김일성은 7월7일에 죽었는데 만약 한 달만 더 살았더라면 남북정상회담은 6년 빨리 열렸으리라. 그리고 김영삼의 풍부한 원조에 의하여 김일성이 들고 나온 민생중시의 새 정책은 재정적인 뒷받침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남북 정상회담에 반대했다. 김일성 사망 3년 후에 북조선에서 발간된 【영생(永生)】이라는 사실상의 공식 김일성 전기소설에는 김정일이 회담을 중지하라고 탄원한 내용이 씌어 있다.

 

핵개발 포기의 반대급부로 미국에게 요구하는 발전소에 대해서도 김정일 부자의 대립이 있었다. 김정일은 원자력 발전소를 고집했는데 김일성은 원자력 발전소는 십년 걸린다며 난색을 표시하고 빨리 완성되는 화력발전소를 많이 만들라고 지시했다. 반대급부를 결정하는 제2회 미북고관협의는 7월 15일에 열렸으니까 만약 김일성이 1주일만 더 살았어도 북조선은 미완성으로 끝난 2기의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 대신에 4개의 화력발전소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7월 7일에 죽고 민생중시의 새 방침은 폐기되었다. 화력발전소 대신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김일성 죽음의 전후 정황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 모양인데 흥미 있는 분들은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김일성 사망 관련 원글 삽입ㆍ필자】

―1994년 7월 9일 평양의 TV에는 지긋한 나이의 상복 차림의 아나운서가 침통한 소리로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동지의 서거를 최대의 애도로써 전 인민 전 다원에게 고함” 이라 발표되었다. 뉴스는 순식간에 세계에 전파되었다.(중략)

사인을 전하는 [의학적 결론서]가 사망 뉴스 30분 후에 공표되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 왔었다. 거듭된 정신적인 과로로 19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하여 심장쇼크를 일으켰다. 즉시 모든 치료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쇼크가 악화하여 1994년 7월 8일 2시에 사망하셨다. 1994년 7월 9일에 실시된 병리해부 검사에서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정되었다. (1994년 7월 9일) ”

 

신처럼 받들던 김일성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태에 북한의 인민들은 망연자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수령님은 백세까지 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장수연구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어제까지 원기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왜 이처럼 갑자기 죽게 되었는가!”…이것은 김일성 사후에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 수 십 명으로부터 필자가 얻은 감상의 일단이다…. “김정일이 죽인 것이 아닌가?” “혹은 어떤 쇼크를 주어서 죽게 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도 소문으로 흘러 나왔다는 것이다.

 

“의학적 결론서”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먼저 의심스러운 것은 사망한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후에 미국의 언론인 오바도퍼가 김일성 장례식 때 북한의 고관과 재미 한국인 기자 문명자씨로부터 얻은 정보라며 묘향산 특각(별장)에서 사망한 것이 밝혀졌다…. 묘향산 별장은 평양에서 북으로 160Km. 산중에 있다. 풍광명미(風光明媚)하여 김일성 마음에 든 별장이다. 김영삼 대통령을 여기 모실 계획이었다고 한다.

 

해부는 7월9일에 실시되었다. 시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가장 빠른 시간인 0시에 해부를 했다면 죽은지 22시간 후가 된다. 사망시간 오전 2시애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한국의 언론인 우종창씨는 밤 9시부터 10시라고 한다. 조총련회장 한덕수는 7일 밤에 죽었다고 한다. 사망시간이라는 오전 2시는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대다. 측근도 의사도 자는 시간이다.

 

사망원인이 심근경생과 심장쇼크의 합병증이라면 추치의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김정일이 바라는 시간에 바라는 병으로 죽었다는 느낌이 들지만 일단 액면 그대로 긍정하기로 하자. 그런데 “의학적 결론서”를 부정한 내용의 기록이 나중에 김정일 공인 출판물에 나타나게 된다. 김일성 사망 3년 후인 1997년 6월 북한 문학예술출판사에서 출간된 장편소설 “영생(永生)”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북한에서는 당의 승인 없이 개인출판은 없다. “영생”은 김정일의 어용작가들이 쓴 김일성 전기다. 내용은 1993년 말에서 94년 7월 20일까지의 김일성 죽음을 애도하는 중앙추도대회까지의 7개월간을 묘사한 글이다.

 

여기 보면 앞에 소개한 “의학적 결론서”의 두 군데 내용이 삭제되었다. “즉시 모든 치료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쇼크가 악화되고…”중에서 “심장쇼크”가 지워졌다. 또 하나는 “1994년 7월 9일에 진행된 병리검사…”의 날짜가 삭제되고 “그 후에 진행된 병리검사…”로 바뀌었다…. 기묘한 일은…“의학적 결론서”에는 김일성의 심장발작 후 즉시 모든 치료를 했고 여러 명의 의사 진료를 받았다고 쓰고 이는데 “영생”에서는“심장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김일성은 오직 혼자여서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되어 있다.

 

“(심장의) 둔통(鈍痛)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수령님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더구나 내일 만나기로 약속한 김정일 동지와 못 만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 때 수령님은 그 생각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셨는지? 누군가가 곁에 있어서 이미 창백해진 수령님의 얼굴을 발견이라도 했더라면. 그러나 수령님은 혼자였던 것이다.(p.402)

 

(중략) “의학적 결론서”는 “즉시 모든 치료를 하였다” 하고“영생”은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죽었다”고 썼으니…. “영생”에 의하면 김일성의 의사진 3명은“의학적 결론서”원안을 가지고 7월 8일 밤 김정일을 방문하였다. 원안을 읽어본 김정일은 의사들을 째려보았다. 벌벌 떨고 있는 의사진에게 김정일은 원안에 가필을 하고 돌려주었다. 가필은 “거듭된 정신적 과로로 인한”란 몇 자였다. (pp.127-130에서 요약. 다시 ‘서평’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둘째 문제는, 아사자는 모든 지역ㆍ모든 계층에 골고루 발생한 것이 아니라 특정의 지역, 특정의 계층에 집중 발생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1995년부터 1996년에 걸쳐 북조선에 들어간 세계식량계획(WFP)의 모니터링 팀(Monitering team)의 보고서(원문)을 분석하여 각국에서 들어온 식량의 배급이 얼마나 불공평한가를 밝히고 있다.  

 

북조선에는「성분」이라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다. 인구의 20%는 혁명의 가계인 「핵심계층」으로 보아 우선적인 배급 등 수많은 특권을 주고 있지만, 다른 20%는 반혁명 가계의 「적대계층」이라 하여 아무리 우수하여도 진학을 못 하고 인민군 입대도 노동당 입당도 할 수가 없다. 나머지 60%는 중간적인 「동요계층」으로 구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핵심계층은 편리한 도시에 살고 적대계층은 산간이나 벽지에 추방되어 있다. 홍수의 피해가 컸던 곳은 적대계층이 사는 지역이었는데, 원조물자의 절반 이상이 피해가 비교적 적은 핵심계층에게 배급하고 가장 피해가 심한 적대계층에는 거의 배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 추가]

인터넷 위키백과사전에 보면;

출신성분(出身成分)은 현대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계층 제도 및 그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민성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의 북한은 버젓한 계급 차별 사회에 의해 구성되어 국민은 그 출신에 의해 「3대 계층 51개 분류」로 분류되고 있다. 3대 계층은 「핵심 계층」 「동요 계층」 「적대 계층」의 3개이며, 51개 분류란 각층내의 분류이다.

 

①핵심 계층 - 노동자ㆍ고농ㆍ빈농ㆍ사무원ㆍ노동당원ㆍ혁명 유족ㆍ애국 열사 유족ㆍ피살자 가족ㆍ전사자 가족ㆍ후방 가족 등 12개로 분류

 

②동요 계층 - 중소상인, 수공업자, 소공장주, 하층 접객업자, 중산층 접객업자, 무소속, 월남자 가족, 중농, 민족자본가, 중국 귀환민, 일본 귀환민, 안일·불화·방탕한 사람, 접대부 및 미신 숭배자, 유학자 및 지방 유아, 경제 사범 등 18개 분류

 

③적대 계층 - 8월 15일 이후의 노동자, 부농, 지주, 친일 친미 주의자, 반동 관료, 천도교파 당원, 입북자, 개신교ㆍ불교ㆍ천주교 신자, 탈당자, 철학자, 적(敵)기관 복무자, 체포자,투옥자 가족, 간첩 관계자, 반당·반혁명 종파 분자, 처단자 가족, 출옥자, 정치범, 민주당원, 자본가 등 21개 분류

 

「핵심 계층」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특권계급으로 수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한편 「적대 계층」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본인의 능력ㆍ소행과 관계없이 차별적 대우의 대상으로 여겨 진학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탄광 지구로 강제 이주된다. 「동요 계층」으로 분류된 사람이라도 직장에서의 승진에, 한계가 있다. 표면상으로는 직장에서 공적을 올리면 승진의 한계도 완화된다고 하고 있다. 김정일은 “핵심계층 20%만 살리고 적대계층을 말살해버리고, 동요계층은 죽든 말든 상관없다. 또 낳으면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WFP는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식량을 주려고 했지만 북조선 당국자들은 이러저런 이유로 방해를 하였고, 감시단 앞에서 나눠준 것은 도로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특히 천대를 받은 것은 적대계층이 집중하여 사는 함경남북도였다(귀국운동으로 북조선에서 들어갔던 재일(在日) 조선인의 대부분이 함경도로 보내졌다.) 함경도는 대홍수 전인 1994년부터 식량배급이 중지되어 있었음은 WFP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굶어 죽은 사람들의 삼분의 일이 이 지역에서 나왔다고 한다.

 

세번째 문제는, 북조선이 믿을 만한 수치를 내놓지 않기 때문에 추측밖에 할 수 없지만, 적어도 100만명 규모의 아사자가 나올 정도로 식량이 부족하였다는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북조선 국민이 1년간 필요한 식량은 최소한 380만 톤인데 한국 통일부의 자료를 보면 추곡 수확이 380만 톤을 밑돈 해는 1996년ㆍ1997년ㆍ1998년ㆍ2001년 4년뿐이다. 부족량은 11만 톤에서 35만 톤으로서 국제원조로 충분히 보충될 만한 양이었다. 1995년 이후 50만~154만 톤의 식량이 원조로 들어갔으니까 특정계층에 중점적으로 배급하는 일만 없었다면 아사자는 없었을 것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아주 소규모로 끝났을 것이라는 말이다.(도표 참조)

 

연도      수입량   억불    톤당달라

1990      121万t      1.9 15     6.45

1991      326万t      3.98      121.78

1992       259万t     4.91      189.22

1993       334万t     5.14       154.08

1994       119万t     1.58       132.73

1995       253万t     6.85       270.60

1996       252万t      5.94       235.76

1997       308万t      7.07       228.98

1998       342万t      6.92       201.95

1999        261万      5.25       201.05

2000        534万      6.06       123.65

 

 

네 번째 문제는 식량원조가 들어가기 시작한 처음부터 가격이 비싼 쌀을 대량으로 수입했다는 사실이다. 1990년부터 1994년까지는 톤당 150불 전후 가격의 쌀을 수입하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식량원조가 시작된 1995년 이후는 200불 이상의 비싼 쌀을 수입해간 것이다. 이것은 국제사회가 북조선을 압박하기 위하여 부당하게 비싸게 팔아서가 아니라, (김정일 정권은 자국민에게 그렇게 선전했지만 사실무근이다) 가격이 비싼 쌀이나 정미(精米)를 톤당 328불에 2억불어치나 수입한 것이다.

 

100만명 이상의 아사자를 내면서 핵심계층에게는 좋은 쌀밥을 먹인 것이다.

이 항목은 흥미롭다. 이 호사생활의 경향은 국제원조가 시작된 1995년부터 시작하였다. 일반미와 정미 수입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1993년에는 40만톤, 1994년에는 12만톤이던 것이 1995년에는 117만톤으로 뛰어 오른다. 1996년 68만톤, 97년 64만톤, 98년 120만톤, 2000년에는 160만톤으로 증가하고 있다. 국제원조로 특권계층만 고급 쌀밥으로 살찌운 결과가 된 것이다. 국제원조는 핵심계층 사치를 시키기 위해서 사용될 가능성은 이렇게 높다.

 

이상 네 가지 사실에는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김정일이 적대계급 잔멸을 위한 집단학살을 입안(立案)실행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김정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핵심계층의 우대는 필수불가결이다. 전국민을 골고루 배급한다면 ‘궁정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2.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

또 다른 서평을 보자.

저자는 본디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까하다(あかはたㆍ赤旗) 평양 특파원인데, 당시의 실지 체험을 중심으로 북조선 정부를 속속들이 고발하고 있다. 이것은 루마니아 특파원의 침묵과 대조적이라서 커다란 의의를 나타낸다고 볼 수가 있다. 하기와라는 지금도 보통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눈을 유지하여 미국의 눈치 안 보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세가 좋다 생각되어 계속하여 읽었다.

본서는 김정일의 3대전쟁을 애비와의 전쟁, 반동분자와의 전쟁, 미국과의 전쟁이라 한다. 이것이 숨겨진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가 이렇다.

 

①김일성은 김정일에게 모살(謀殺) 되었다.

②대량아사는 의도적인 살인이었다.

③핵위기는 불만을 반미로 몰기 위함이었다.

 

①은 미국에 식량지원을 요구하는 문제인데, 농업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김일성의 중유화력발전소 계획과 김정일의 핵개발 문제제기가 대립되어 격돌한다. 이 선택 결정일 직전에 이때까지 건강하던 김일성이 돌연 묘향산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언제나 붙어 다니던 순환기 전문 의사들이 이날따라 없었다. 급전을 받은 김정일이 파견한 의사의 헬리콥터는 험한 날씨로 인해 착륙하지를 못했고, 육로로 간 사람들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전원 사망했다는 등등의 이런 이상한 발표 때문에 모살(謀殺)일 수도 있다고 결론 내렸다. 분명히 산사태나 교통사고 등은 북의 사망 이유 중에 자주 나오는 소재다.

 

②의 문제에 대해서; 전 국민에게 줄만한 식량이 국제연합 식량기구의 원조와 북의 식량수입량을 합산하면 대량 아사자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요, 또 대량 아사자가 나온 지역은 북조선의 반동들을 모아놓은 지역 함경남북도라는 점이다. 대형 아사자의 연출은 반동세력으로 지목된 주민들을 말살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③의 핵은 1980년대 말기에 이미 한 개 있었는데 계속 개발을 서둘러 핵위기를 만들어냈고, 이를 미끼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전략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국가수반이나 당 지도시스템을 통한 국가운영으로 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가 필요하다. 김일성이 죽자 국가 지도체제의 변동이 있었는데, 세상에도 이상한 군부통치가 국가조직을 초월하여 성립된 것이다. 이리하여 북에는 국가주석이 없다. 이게 [선군정치(先軍政治)]라는 것이다.

 

한편 중국은 레어메탈(Rare Earth Metals, 稀土類元素ㆍ필자 주) 획득을 목적으로 북조선 깊숙히 먹어 들어가고 있다. 무산광산의 50년 채굴권을 획득하고 나진부두의 50년 독점사용권 등이 그 증거라고 제시하고 있다. 중국은 북을 놓아줄 리가 없다. 어찌 되었든, 이때까지의 북조선 정세분석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김정일에게 이러한 방침을 취하게 한 것은 군과 당에게 버림받은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부처의 비참한 말로를 보았기 때문이다. 루마니아가 자유화되자 김정일은 극도로 불안에 떨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다시 말하면 북조선 인민의 분노의 철퇴를 맞아 죽는 공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첫째로 군을 장악하여 그들을 충성분자로 만드는「선군정치」 밖에는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군인들을 틀별 대우하여 특권계급화 하여 그들이 자기에게 충성하는 한 안전하다고 김정일은 생각한 게 틀림없다, 김씨왕조의 존립은 선군정치에 있기 때문에 민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생각한 것이다.

 

가. <북조선 기아의 진실>  

북조선 기아의 진실(나치오스 지음, 후소샤 간행)

1990년대 후반의 북한의 기아를 다룬 지금까지의 유일한 연구서다. 하기와라 료씨의 책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에서 중요한 논거의 하나로서 언급되어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읽어보았는데, 마침내 기아의 실태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저자 앤드루 나치오스(Andrew S. Natsios)는 그리스계 미국사람인데 제2차대전 중 그리스에 남아 있던 백부가 독일군의 식량징발로 일어난 기아로 아사했기 때문에 인도적 원조의 세계로 진출했다고 한다. 세계선명회인 월드비전에서 NGO로 오랜 세월 활동하였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부시 정권의 국제개발청(USAID) 장관직에 있었다. 미국에서는 재야의 거물이 개발부의 고관에 임명되는 일이 자주 있다. 원저는 장관재임중인 2001년 12월에 출판되었다. 개인의 업적이지만 백악관의 양해 하에 출판된 것이라 해도 될 것이다.

 

나치오스는 1997년 6월에 북한을 방문하고 있다. 먼저 평양의 보육소로 안내되었는데 아프리카의 기아지대에도 절대로 없을 만치 말라빠진 아이들을 보고 출입금지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갔는데 영양상태가 좋고 깨끗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있었다. 예정에 없는 고등학교 시찰을 강경하게 원해 가 본 곳의 1천 수백 명의 학생들은 보통 아이처럼 잘 자라 있었고, 영양실조의 징후로 보이는 아이는 몇 명 안 되었다. 다음에는 홍수의 피해가 컸다는 희천이라는 공업도시로 안내되었는데, 길가의 수많은 여자들이 풀뿌리를 캐고 있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희천의 유치원과 중학교 아이들은 엄청난 기근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는데 교실의 창문에 몰려서 내다보고 있는 아이들의 영양 상태는 아주 좋아 보였다.

 

나치오스는 혼란 상태에 빠진다. 수많은 기아지대를 보아온 그의 눈으로 볼 때 북한은 기아와 부요가 함께 있는 부자연한 상태였다. 수단이나 소말리아보다 더 비참한 어린이들은 어디서 데려온 것일까? 거친 들에서 풀뿌리를 캐고 있는 여자들은 가아의 명백한 징후였다. 북한은 기아를 과장하고 있는 것일까? 감추고 있는 것일까? 나치오스에 의하면 북한에 들어간 외국의 NGO 관계자들은 모두 같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외국인의 눈에는 기아는 교묘히 감추어져 있고 북한에서 활동하는 원조관계자들에게는 기근이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평등주의적인 나라의 배급 제도를 숭상하며 높이 평가하는 자」역시 있다. 그들은 시민의 자유가 억압되고 있는 현실에 곤혹을 느끼면서도“그래도 아무도 굶어 죽지는 않고 있다”고 북조선을 변호한다.

 

나치오스는 다음 해 중국측 국경지대를 방문하여 많은 탈북자들에게서 실태를 청취한 결과,「두 개의 북조선」이 있음을 확신한다. 평양시민은 다른 도시보다 훨씬 많은 배급을 받고 있는데 여기 살기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태도와 충성심이 있어야 그 보상으로 입주허가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정세분석자 도널드 오버돌퍼는 평양의 인구정화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외국의 외교관의 말을 빌리면 북한 국민은 정기적으로 성분검사를 받는데, 병자나 고령자, 혹은 장애가 있는 자는, 정치적으로 믿을 수 없는 자라고 평가받은 자와 함께 평양에서 추방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오랜 동안 평양에서 살고 있는 러시아 외교관이 내게 들려준 말과 일치한다. 그는“중앙당에서는 매해 1만명 이상의 거추장스러운 자들을 평양에서 추방하고 꼭 같은 숫자를 체제에 대한 충성심의 보수로서 지방에서 평양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이 1998년 아시아 워치(Asia Watch) 인권 리포트는“아이들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모아서 북동부(함경도) 오지로 추방한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북동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NGO는“이상하리만치 높은 비율로 장애자나 어린이들이 모여 있는 도시를 실제로 보았다”고 이 보고서는 신빙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또 하나의 북한」이란 이렇게 추방당한 각계각층 사람들이 사는 곳, 곧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낙원인 평양의 화려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장소를 말한다. (중략).

비극적인 현실이지만 그것은 외부 인사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평양이 엘리트들만이 사는 전시용 도시라는 것은 일본인에게는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구미에서는 북한과 관계되어 있는 원조단체 관계자까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나치오스가 이 책을 쓴 것은, 북한에서는 분명히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그것도「잘라 내버린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는 가장 심각했던 1996년부터 97년 양년간 식량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졌다면 굶어죽은 사람이 없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사자가 생긴 것은 정치적인 학살이라는 주장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나. 북한정부의 식량배급 방식

김정일 정부는 식량배급에 있어서 1995년과 96년에 정치적인 이유로 몇 가지 무서운 결단을 내리고 있다. 동쪽 항구에는 모든 식량수송을 중지한 것이다. 둘째로는 정황증거 밖에는 없지만, 1996년의 비참한 추수기 직후에 동북부 이외의 지역에도 일시적으로 배급을 중지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평화연구소의 스캇 슈나이더는 1996년 6월에 중국측 국경지대를 방문하여

 

1996년의 추수기 직후의 3개월 동안 식량가격과 아사율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보고를 수집하고 있다. 보통 때라면 추수기 후에는 식량가격도 사망비율도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데 말이다.

 

동쪽 항구란 함경도의 나진ㆍ청진항을 말한다. 함경도에 배급을 중지한 기간 당연히 아사자가 집중 발생하였다. 이 일을 일본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나치오스는 배급량이 다음 7단계로 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①수용소의 죄수들은 하루 200g.

②취학 전 어린이 200~300g.

③고교생·신체장애자ㆍ고령자는 400g.

④대학생·군인·경공업 종사자·평양시민은 700g.

⑤고급장교ㆍ비무장지대 근무 군인 850g。

⑥광산노동자·국방산업 종사자는 900g.

⑦노동당 간부는 1,000g 이상.

 

그들이 말하는 배급의 평등성이란 말뿐이다. 다음의 글은 아주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 체제에서는 재산의 축적(蓄積)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종래의 농민시장경제와는 전혀 다른 원인으로 기근의 희생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재산이 축적되지 않는 대신에 정치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는 국가가 특별히 보호해준다.

 

 그래서 재산이 없이도 잘 살 수 있다. 조선 노동당의 엘리트와 그의 가족들은 어떠한 위기나 기근에서도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재산이 평등하다고는 하나 뒷구멍으로 받는 혜택 때문에 심한 격차가 생긴다. 북조선은 사회주의에서 일탈(逸脫)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저 체제야말로 어떤 면에서 사회주의의 전형(典型)이라 할 것이다. (하략)

 

3.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

- 양창식 역 / 하기와라 료 저 -

저자는 특파원으로 북한에 상주하면서 북의 기만을 발견했다. 이 나라의 분단 상황에서 제일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이 김일성 체제다. 말로는 남북통일을 일일여삼추의 심정으로 갈망하고 있다고 하면서 통일을 제일 싫어하고 있는 것이 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일이 되면 체제는 붕괴되고 일족은 루마니아의 차우세츠쿠처럼 다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사망전날 원자력에서 화력으로 전환을 주장하였다. 1994.7.6 김일성은 김정일의 국정운영으로 경제가 파탄되자

 

“나는 금후 어느 나라와도 우리나라와 경제 합작을 하자고 한다면 하고 싶다. 물론 우리들은 다른 나라들과 경제 합작을 하지 않아도 살 수가 있지만 경제 합작을 하여도 손해를 볼 일은 없다”고 하며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길은 농업의 근본적 재건을 통하여 인민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적인 남한의 대통령으로부터 원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표를 찌른 수법으로 나아갔다.

 

부자지간의 생각 차이는 생존을 건 노선투쟁,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발전하여갔다. 협의회가 끝난 다음날 1994년 7월 7일 저녁 김일성은 급사했다.

 

김일성은 김정일이 주장하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시간이 많이 걸려 경제건설에는 맞지 않다고 확실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화력발전소 건설로 농민경제를 복구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노선을 아들 김정일로서는 수용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1994년 7월 8일, 미북 제3라운드고급회의를 제네바에서 열기로 합의하고 강석주 제1외무차관은 7일 현지 도착하여 김일성의 훈령대로 경수로를 철회하고 화력발전소로 크게 변경할 계획이라 지금까지 비밀로 추진해 온 김정일의 계획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의 여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전날인 7월 7일에 김일성은 죽었다. 공산주의자 김일성이 교육시켰던「살부회(殺父會)」 방법을 김정일이 실천할 줄이야 천하에 누가 알았을까. 북의 평양왕조 정권의 운이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 어떤 나라 통치자에게 인민 350만 명을 아사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말인가.

 

<주> 살부회;

공산주의를 위해서는 자기 애비도 죽이라는 '살부회(殺父會)‘ 교육대로 김일성은 그의 애비인 김형직을 죽였다. 당시 김형직이 '정의부'의 일원으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아들에게 죽었으니 자업자득(自業自得) 아닌가!

 

“걸식을 한다니 말이나 되느냐. 구걸외교는 절대 안 된다” 김일성은 외국으로부터 식량 원조를 받아들이려는 김정일의 방침에 일보의 양보도 없었다. 그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에 의해 김정일은 어깨가 가벼워진 것처럼 자기의 생각대로 시책을 추진해 가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을 위해 성분을 확실히 분류해야 한다. 그래서 전 인민을 적대계층, 동요계층, 핵심계층의 3계층으로 대별하고 그것을 다시 7개로 세분화해서 식량배급의 양이나 그 질에서 차별하는 계층차별제도를 적용한 것이다. 식량은 쌀 몇 할 잡곡 몇 할 등으로 세분되고 거주지ㆍ취직ㆍ진학ㆍ결혼 등 전생활의 차별제도를 적용 받게 된다. 최하층의 적대계층으로 지명된 자는 평양은 물론 지방의 도시에도 살 수 없고 산간벽지에 추방되어 일생동안 거기서 살다가 세상을 마쳐야 한다.

 

함경남북도에는 이러한 차별화된 적대계층의 인민이 600만명이 살고 있다.

농경지가 부족한 고산지대에서 식량배급이 없으면 산나물과 초근목피로 연명하여야 한다. 수백만 명이 굶어 죽게 된 이 시기에 사람 고기까지 먹은 사실이 폭로되고 있다. 많은 수용소가 여기에 위치해 있고 탈북자들도 여기 사람들이 많다. 최근 공개총살 동영상도 이곳에서 입수된 것이다. 여기 사람들 300만 명이 아사했다고 본다면 “이 연약한 적대계층 지역에 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배급할 수 없는 제도에 대해서 우겨서 식량 원조를 한다는 것은 기껏 해봤다 효과도 없을뿐더러 나쁘게 말하면 도리어 해로운 일이다”(WFP 유엔세계식량계획의 로쓰에 씨의 말)

 

김정일의 적은 미국도 한국도 일본도 아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북한 내의 인민, 그 중에서도 주로 함경남북도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적대계층이었다. 그들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 아사로 위장한 살인인 것이다. 김정일에게는 계급 투쟁이었으며 전쟁이었다. 북한에 식량은 충분했다. 죽지 않아도 될 350 만명이란 사람을 감쪽같이 굶겨 죽인 건 김정일의 최고의사결정 소산이다.

 

【마치는 글】남북 통일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종북(從北)좌파들이 요소마다 들어가 날뛰는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큰 혼란 없이 남북 통일되기를 함께 기도하자.(오소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