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임진왜란 그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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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 참고자료

2012. 4. 19.

 

▶속회참고자료/복음의 향기(2012.4.20)

 

임진왜란

그 뒷이야기

오늘 속회 주제는「복음의 향기」다. 자그마치 300 데나리온이나 하는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씻긴 베다니의 마리아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을 향한 한 여인의 사랑을 조명한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현대 노동자 품값을 10만원이라 치면 3천만 원이나 되는 거금이다. 오늘 자료는 임진왜란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와 관련해 죽음을 각오하고 왜국의 도요또미 히데요시(이후 풍신수길)을 죽여 조국의 원수를 갚고 포로를 데리고 온 양부하 의 이야기와, 왜국에 끌려간 포로 석방을 위해 노력한 사명대사 이야기, 그리고 왜국에 끌려가 천주교도가 되어 순교한 오다 줄리아 등의 자료를 모아 만들었다. (오소운)

 

1. 세계 최고의 해군명장 이순신

 

일본인이 군신(軍神)으로 추켜세우고 일본 7대 영웅 중의 한 사람인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 일본 해군제독은 이순신을 자신의 스승이라 불렀다. 뿐만 아니라 도고는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이란 말도 했다.

충무공에 대해 높이 평가한 외국인으로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들 수 있다. 진린은 처음에는 충무공을 작은 나라의 장수라며 얕보고 함부로 대했으나 충무공으로부터 목숨을 구원 받은 이후로는 태도가 180도 바뀌어 충무공을 존경하며 따랐다. 진린은 사람들에게 “이야(李爺)는 하늘이 내린 장군”이라고 말했다. ‘야(爺)’는 윗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으로 우리말로는 ‘어르신’ 정도의 어감이다. 진린은 명나라에 낸 보고서에서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이 있다”고 극찬했다. 경천위지는 ‘천하를 잘 다스린다’는 뜻이요, 보천욕일은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 는 뜻이다.(출전: 회남자)

 

보천욕일은 ‘어마어마한 공적’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중국 신화에서 비롯됐다.

근세 이래 우리를 가장 괴롭힌 숙적(宿敵)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이순신을 잊지 않고 존경했다. 일본에서 ‘군신(軍神)’으로 존경받는 러일전쟁 때 일본 해군제독 도고는 러일전쟁 전승축하 잔치에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 좌중을 경악케 했다. 문답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국의 넬슨제독과 당신을 비교하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넬슨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함대로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나는 러시아 발틱함대의 3분의 1 규모로 싸워 이겼다.”(도고 자신이 더 낫다는 뜻)

 

“조선의 이순신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나는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내 함대를 갖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5년이면 일본이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로 다스리던 시절이다. 식민지의 장수를 세계적인 위인보다 더 위 반열에 올려놓은 도고의 발언은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세계적인 위인인지 짐작케 하고, 이런 훌륭한 조상을 비방하고 잊어버렸던 한국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2. 이순신(1545-1598) 약전

조선 시대의 명장. 본관 덕수. 자 여해. 시호 충무. 서울 출생.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 이듬해 발포 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내고 15 86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 때는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죄(定罪)하려 하자 그 원인이 첨병(添兵)을 거절한 데 있다 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끝내 주장하다 중형은 면했으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길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고, 89년(선조 22) 선전관·정읍 현감(井邑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만을 지내다가 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玉浦)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唐浦)에서 20척, 당항포(唐項浦)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陞品)되고 7월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다시 가토 요시아끼[加嘉明]의 수군을 안골포(安骨浦:창원군 웅천면)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었다. 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의 적 수군을 격파,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일소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本營)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난민구제·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97년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이에 앞서 명·일 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鳴梁)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다. 다음해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露梁)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混戰)중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또한 격퇴함으로써 한국 민족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시조(時調)·한시(漢詩) 등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 추봉되었으며, 좌의정(左議政)이 추증, 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장지(葬地)는 아산(牙山)의 어라산(於羅山)이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시의 충무충렬사(忠武忠烈祠), 여수(麗水)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이 중 현충사는 성역화되어 전시관 등을 건립,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저서에 《이충무공전서》가 있다. <동아백과>에서.

 

 

3. 풍신수길을 암살한 양부하(梁敷河)

 

풍신수길의 사망원인이 독살인데 독살을 주도한 사람들이 명나라 사신 심유경과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청년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이 한ㆍ일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에 삼절사(三節祠)가 있다. 삼절사가 있는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은 남원양씨(南原梁氏)집성촌인데 조선시대 동래향임과 좌수들 중에 남원양씨가 많았으니, 옛날 남원양씨는 부산의 대표적 양반 씨족이었다. 부산의 남원양씨가 배출한 대표적 인물이 이 삼절사에 모셔져 있으니 양지(梁誌)ㆍ양조한(梁朝漢)ㆍ양통한(梁通漢) 세 분이다. 그런데, 이 부산의 남원양씨중 숨은 큰 인물이 있으니 양부하(1580~1675)다. 양부하는 삼절사에 모셔진 양조한의 손자다.

 

그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동래성에서 순절한 양조한(梁朝漢, 1530∼1592)의 손자다.

 

양부하는 당시 12살이었는데, 숨진 할아버지의 도포 속에 숨어 있다가 왜병에게 발각되어 포로가 되었다. 당시 양부하의 집은 가마실(지금의 釜谷동)에 있었는데 양조한의 처는 부자가 숨지자 손자 양태수(양부하의 동생)만을 데리고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의 고향인 밀양 무안면으로 피난을 갔다. 난리 중에 양부하의 어머니는 실종되었는데 그 행방이나 성씨까지 실전된 상태다(증언자 양갑석=양부하의 11대손)

 

양부하는 일본에 끌려갔다가 27년만인 1619년(기미년 )에 39세의 장년으로 돌아온다. 그가 돌아왔을 때 양조한의 부인이자 양부하의 조모는 그의 손자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조모는 처음에 "내 손자가 아니다" 라며 부인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증언한 분은 양구석 전 남원양씨 부산종친회장.) 그는 이후 96세에 이르도록 장수하는데, 그는 평생 비밀을 지키다가 죽기 직전인 95세에 이를 밝혔는데, 풍신수길의 독살에 관계한 것이었다.

 

그의 증언은 조선중기의 학자 임상원(任相元, 1638~1697 형조판서 역임)의 문집 [염헌집(恬軒集)]에 전해온다. 이후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과 성호사설, 그리고 일본인 아오나기(靑柳綱太郞)가 쓴 [豊太閤朝鮮役]에도 기록되어 있다. 양부하는 일본에 강화사신으로 온 명나라 사람 심유경과 모의해 왜적의 수괴 풍신수길을 독살하는데 그 내용은 이하와 같다.

 

일찍이 동래 사람 양조한(梁朝漢)과 통한(通漢)이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싸우다가 죽었는데 양조한의 손자 부하(敷河)는 그때 나이 12세였다. 12살의 양부하는 사로잡혀 대마도로 실려 가자 배에 목창(木槍)을 세우고 그 끝에 쓰기를, “나는 조선 양반의 자제지만 관백에게 헌신하겠다” 하였다. 비록 어렸지만 그는 이미 조부 양조한과 아버지 양홍, 동래부민의 전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는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여러 섬을 거쳐 풍신수길이 있는 교또 후시미성(伏見城)에 양부하를 보냈다. 풍신수길이 양부하를 보고는, “조선 아이도 일본 아이와 같구나.” 하니 양부하는 눈물을 비 오듯 흘리었다.(원문;鮮兒與日本兒同也 敷河垂頭流涕)

 

수길은 통역하는 왜인에게 명령하기를 “네가 이 아이의 스승이 되어 일본 말을 가르쳐라. 통달하지 못하면 너를 목 벨 것이다” 하니 통역관이 두려워하여 촛불을 밝히고 밤 새워 양부하를 가르치면서, “네가 만약 힘쓰지 않으면 나와 네가 함께 죽는다” 하였다. 이튿날 수길이 양부하를 불렀더니 양부하가 잘 대답하므로 수길은 크게 기뻐하였다. 석 달 동안 배워서 일본 말을 다 알자, 수길은 그를 사랑하여 항상 좌우에 가까이 있게 하였다.(원문; 秀吉知敷河非賤人。而容貌鮮令。狎而愛之。常置左右。恩意甚厚)

 

수길은 3층 병풍을 뒤에 치고 높이가 한 자를 넘는 방석에 머리를 틀어 뭉치고, 다리도 뻗고 앉았는데, 왼편에는 포(砲)와 검(劍)을 두고 오른편에는 활과 화살을 두었으며, 머리 위에 창(槍) 따위를 걸어 두었다. 그때 임진왜란이 한창인데도 수길은 할 일이 없었다. 곁에 근신(近臣) 다섯이 있어서 한가할 때면 옛 일을 이야기하고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수길에게 다섯 명의 계집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다가 군사를 일으키던 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이 수뢰(秀賴ㆍ히데요리)였다.

 

강항이 지은 간양록(看羊錄)에는 “수길의 근신(近臣)이 수길의 계집과 간통하여 낳았다”고 하였다. 병신년(1596년) 가을에 양부하는 조선 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수길에게 청하여 만나 보았는데, 중국 사신이 심유경(沈維敬)이었다. 양부하는 이후 심유경과 친해져서 내왕하면서 수길을 죽이는 모의에 가담하였다.

 

당시 왜인들이 심유경을 객관에 가두고 군사를 시켜 매우 엄중히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심유경이 크게 곡을 했다. 이는 양부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양부하가 풍신수길에게 가서 '나으리. 중국 사람이 곡을 합니다.' 하고 알렸다. 의아히 여긴 수길이 심유경을 만나보기를 원하니 양부하가 음실(蔭室=비밀통로)을 만들어 객관에서 궁궐로 몰래 오게 하여, 유경과 수길을 만나게 했다. 유경은 좌석에 앉자마자 환약(丸藥) 한 개를 먹었다.

 

수길과 두 번째 만났을 때에도 역시 약을 먹으므로 수길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심유경은 “만리 바다를 건너오느라고 습기에 상해서 병이 났으므로 항상 이 약을 먹으니 기운이 넘치고 몸이 가쁜합니다" 하였다. 수길이 “거짓이 아니오?” 물으니 심유경이 “감히 거짓말을 어찌 하겠소?” 하였다. 수길이 “나도 섬에서 돌아와 기운이 줄어든 듯 하니 하나 주시오”하자, 유경이 “좋지요” 하고 곧 주머니 속에서 찾아 주었다. 수길이 양부하를 시켜 가져다가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보니 환약에 서(署)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원문;秀吉令敷河取來。置諸掌中。熟玩之。丸有署字)

 

수길은 “글자가 어찌 이렇게 작은가. 일본에서 큰 글자를 잘 쓰는데 그 만도 못하다” 했다. 의심이 많은 풍신수길은 품속에서 이쑤시개(楊子, ようじ)를 꺼내어 그 약을 반으로 갈라 유경에게 주면서, “함께 맛보고 싶소” 하였다. 유경이 받아서 꿀꺽 삼키고, 한참 뒤에 목을 움츠리고 팔을 펴서 몸이 편안해지는 듯한 형상을 보이니 수길이 그제서야 입에 넣고 물을 찾아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도 심유경을 만나서 환약 한 개를 얻어 처음처럼 나누어 먹었는데, 그 약은 매우 독해 사람의 몸을 몰래 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유경은 객관에 돌아가서 다른 해독약을 먹어서 그 독기를 아래로 내리게 하였다.(원문;華使歸館。必飮他藥下之。再服又下之.)

 

당시 양부하는 수길의 독살에 깊이 가담해 있었고, 이 독살 과정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은 곧 조선으로 돌아갔고 풍신수길이 죽는 과정을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목격한 인물은 양부하 뿐이었다. 풍신수길은 이로부터 사지에 윤기가 없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몸이 말라서 의원에게 보였으나 효험이 없고, 침을 놓아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수길이 괴이하게 여기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진액이 없을 수 있는가. 내 뜸을 뜨리라.” 하고 내실에 들어가서 첩들에게 쑥을 붙이게 하였다. 어느 날 수길은 갑자기 모로 누워 웃으면서, “내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말하였다. 얼마 뒤 풍신수길은 죽었다.

 

그가 명나라 사신 심유경을 만나 독약을 먹은 것이 1598년 5월이었고, 죽은 것이 7월이다. 두 달 만에 급사한 것이니 이는 독살된 것임이 명약관화하다. 비상 같은 비소 종류를 독으로 썼던 것이다. 수길이 내실에서 거처하게 된 뒤부터 양부하가 직접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수길의 내실 체재 이후 과정은 양부하가 문지기에서 듣고 기록하였다. (원문;自秀吉處內。敷河不得侍。此則聞諸其人者也.)

 

수길이 죽은 뒤에 양부하는 일본 서부의 다이묘 모리(毛利輝元)의 사람이 된다. 1600년의 유명한 세끼가하라(關ヶ原) 전투에 서 모리씨가 도꾸가와에게 패한 뒤 그 관할지가 축소되면서 번세(蕃勢)가 어려워졌다. 마침내 양부하는 모리씨에게 귀국을 간청하고 모리휘원은 거느리던 조선인들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허락했다. (원문;敷河間說輝元。請得西歸。輝元曰。吾壤削食少。不得以多養士也。許之。)

 

\모리씨의 귀국 문서 노첩(路帖)을 받은 양부하는 주변의 귀국하려 하는 조선인 82명을 모아 대마도를 거쳐 부산 감만포로 돌아왔다. (이 귀국에 대해 노포동 묘비는 100명이라고 했는데 숫자가 틀리고, 귀국 포구가 감만포로 기록한 것은 일치한다)《염헌집(恬軒集)》의 <양부하전>에는 “양부하의 나이 39세 되던 기미년에 돌아왔고, 신사년에는 이미 돌아온 지 57년이 흘러 96세이다"라 했다.(원문;時敷河三十九歲。萬曆己未也。食吾粟者 五十有七年.) 또 "그의 말 중 지명은 왜어로 구술해, 해독할 수 없어 강항의 간양록을 참조했다"고 했다. (원문;名地名人。竝用倭語。不得譯而文。以看羊錄)

 

부산 동래출신의 소년 양부하는 명나라인 심유경과 함께 풍신수길을 암살함으로 조부 양조한과 아비 양홍의 전몰, 실종된 모친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다. 수길의 죽음으로 임진왜란도 끝난 것이다. 이런 쾌거가 당시에 밝혀지지 못한 것은 심유경이 풍신수길보다 먼저 죽은 때문이다. 그는 강화 실패와 독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귀국 즉시 처형됐다. 그가 죽을 때 독살공작에 대해 진술했지만 그 땐 풍신수길이 아직 죽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후 수길이 죽자 그는 명사(明史)에 간신이 아닌 충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온 양부하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다시 열린 평화의 시대에 왜인들이 천하남아로 모시는 풍신수길의 암살을 밝히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57년이 흐른 뒤에 죽을 즈음에 밝힌 것이다. 지금도 많은 한국관광객들이 일본 오사까성(풍신수길의 업적 전시)을 찾아 관광하는데, 전시장 끝 부분에 꼭 있어야 할, 풍신수길이 조선청년 양부하와 명사 심유경에 의해 암살된 사실이 누락되어 있다. 과거 일본사학자들은 풍신수길의 암살부분을 필사적으로 숨겼는데, 이제는 밝혀야 한다. 부산시는 이 위대한 조선 청년 양부하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그의 묘가 있는 부산시 금정구 노포동 도로변에 동상이라도 세웠으면 한다. 사실 남원양씨 문중도 양부하의 일본내에서의 행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음이 안타깝다. 양부하…! 그는 조국 병탐의 원흉 이등박문을 암살한 쾌거를 이룬 안중근열사와 다를 바 무엇인가?

 

이 풍신수길의 암살관련 전말은 일본 교또의 명가 아도가(阿刀家)에 비전(秘傳)하는 문서 <비장인(非藏人)>에도 일부 기록되어 있다.

 

4. 왜인들이 무서워 한 사명대사

사명대사(1544~1610년)의 본관은 풍천, 속명은 임응규(任應圭)다. 호가 사명당(四溟堂)이다. 명종 13년(1558년),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죽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였다. 3년 뒤 승과에 합격하였고 선조 8년(1575년) 선종의 본거지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의 휴정(休靜)을 찾아가 수행에 정진하였다.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스승인 휴정과 함께 투옥 당했으나 강릉 지방 유생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1592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3월에는 서울 부근 삼각산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 받았다.

 

1594년 4월부터 1597년 3월 사이에 적장 가도 기요마사(加藤淸正)의 4차례의 협상에 참석하였다. 1605년 4월에는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500명을 데리고 일본에서 귀국하였는데 이때 왜군에 강탈당했던 통도사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도 되찾아서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했다. 1610년 8월에 해인사의 홍제암에서 66세의 나이로 입적했으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명대사에 대한 전설은 끊임이 없다. 표충비에서 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영취산 대법사(밀양시 중산리)에는 사명대사가 50살 때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나 잎을 피웠다는 아름드리 모과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높이가 2.2미터, 굵기는 3.2미터로 나무 밑동은 어른 두 사람이 양팔을 벌려야 마주 잡을 정도로 우람하다.

 

5. 사명대사와 도꾸가와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4년에 전후 처리문제로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풍신수길 세력을 정벌하고 일본 통일을 성취한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를 처음 만났을 때 주고받은 문답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에서는 죽은 히데요시 추종 세력인 서군(西軍)과 이에야스 세력인 동군(東軍)이 격돌하여 큰 전쟁을 치렀다. 1600년 9월 15일에 천하 패권을 놓고 맞붙은 [세키가하라 전투]가 이것이다. 여기에서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면서 일본 열도는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졌고, 그 여세를 몰아 이에야스의 기세가 최고조로 달해 있던 시기에 사명이 방문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은 사용하는 언어는 달랐지만 한문을 같이 썼기 때문에 붓으로 쓰는 필담은 가능한 상황이었다. 먼저 이에야스가 사명대사에게 선제공격을 날렸다.

 

石上難生草(석상난생초 요)

돌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房中難起雲(방중난기운 이거늘)

방안에는 구름이 일기 어렵거늘

汝爾何山鳥(여니하산조 이기에)

넌 도대체 어느 산에 사는 새이기에

來參鳳凰群(내참봉황군 인고?)

봉황의 무리 속에 와서 끼어드는가?

 

곧바로 사명이 맞받아쳤다.

我本靑山鶴(아본청산학 으로서)

나는 본래 청산에 노니는 학으로서

常遊五色雲(상유오색운 하다가)

항상 오색구름을 타고 놀다가

一朝雲霧盡(일조운무진 하여)

하루아침에 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

誤落野鷄群(오락야계군 하였노라)

들 닭 무리 속에 잘못 떨어졌노라

 

사명은 과연 고승이다. 그 담대한 배짱과 칼날 같은 재기가 이 시 한 수에 담겨 있다. 도꾸가와가 또 물었다.

 

도꾸가와 :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

사명대사 : 일본에 있다.

도꾸가와 : 무슨 뜻인가?

사명대사 :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막론하고 당신의 머리를 베고 싶어 하니 당신의 머리가 바로 보배요.

 

일본에 와서 태연스럽게 자신의 목이 보배라는 말을 하는 사명대사를 보고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그 대담함에 놀라 협상이 순조로워졌고 급기야는 조선인 포로 3,500명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허균의 석장비문과 표충사의 영당비문에 적혀 있다.

 

6. 임난 때 왜로 잡혀간 포로들

왜놈들은 5만 명 기상의 조선 포로를 잡아다가 동남아디역과 유럽인들에게까지 팔고, 도공이라든지 각종 기술자들은 살려서 미개한 문화수준을 많이 올렸다. 그중에는 천주교인이 되어 순교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원화대순교>(元和大殉敎, 일본어:元和の大殉教 겐나노 다이쥰꾜>는 일본의 에도막부(江戶幕府) 시대 초기인 1622년 나가사키(長崎)시의 니시사까(西坂)언덕에서 기리시단(キリシタン, 일본의 천주교신자를 일컫는 말) 55명이 화형 및 참형을 당한 종교탄압 사건이다. 일본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신도가 동시 처형된 사건으로 이후에도 막부에 의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드나들었던 네덜란드 선원들과 예수회(Jesuit) 선교사들에 의해 해외에 전해지면서, 순교한 26인의 성인과 함께 대표적인 순교사건으로 기록된다. 또한 이 사건에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와 천주교에 입교한 조선인 신도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금지령을 풀어 주었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이를 뒤집어 천주교 사제 및 수도사, 전도사 등을 체포하여 하옥시키고 있었다. 사망자 중 33명은 오오무라(현 나가사끼 시에 속한 옛 지역)에서, 다른 사람들은 나가사끼의 감옥에 수년간 갇혀 있다가, 1622년 9월에 전원 처형 명령과 함께 우라까미를 경유하여 니시사끼로 호송되어 그곳에서 일괄 처형되었다.

 

순교자들은 선교사 및 수도사와 남녀노소의 신도들이었다. 여성과 어린이가 많이 포함된 것은 선교사들을 숨겨주었던 일가를 전원 처형하라는 명령 때문이다. 예수회ㆍ도미니코 수도회ㆍ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사제 아홉 명과 수도사 몇 명은 화형, 나머지 평신도들은 참형을 당했다. 화형당한 사람 중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일식관측을 통해 위도(緯度)를 측정한 것으로 알려진 카를로 스피노라 신부가 포함되었다.

 

그를 숨겨준 포르투갈인 도밍고스 조르지와 그의 부인 및 어린아이도 희생자에 포함되었다. 또한 외국인 중에는 조선인 안토니오(화형)와 그의 부인 및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발발 2년 후인 1594년의 시점에서 규슈 지역에는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중 약 2천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위키백과>에서).

 

처형광경을 지켜보던 서양화를 배운 수도사 한 명이 처형광경을 스케치한 그림이〈원화대순교도〉는 예수회 본부가 있던 로마의 예수회(Jesuit) 교회까지 전달되어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후에도 기리시단 박해는 점점 철저화 되어 개항에 의한 서양세력의 압력과 메이지 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금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순교자들은 1868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전원이 시복(諡福)되었다.

 

7. 일본에서 순교한 오다 줄리아

왜군 장수 가운데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평양에서 부모를 잃은 세 살배기 여아를 하나 얻었는데 하도 예뻐서 부인에게 보내 이 아이를 양녀로 삼는다. 이 아이가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잘 자랐는데 불행하게도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난 다음에 귀국한 고니시 유끼나가가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반대편에서 싸우다 그만 죽는다. 고니시가 죽었으니 이 양녀는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몸종이 된다. 비록 종이 됐지만 아름답고 교양도 높고 또 지식이 뛰어나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는다. 줄리아는 하루 일을 마치고는 밤에는 기도를 하고 성경일 읽고 다른 시녀나 가신들에게 전도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처음에는 천주교에게 호감을 보냈던 이에야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금교령을 내린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을 불어 대교하라 하여 듣는 자는 용서하고 안 하는 자는 죽였는데 사랑하는 줄리아는 차마 죽일 수가 없어서 "너도 천주교를 버려라." 한다. 그러나 줄리아는 아름답고 고운 목소리로 "나는 신앙을 버리지 못합니다." 대답한다. 신분이 딸에서 종으로 바뀌고 이에야스는 이 여인을 도꾜에서 떨어진 이즈(伊豆大島)섬으로 보내고 배반하고 돌아오라 했지만 듣지 않자, 더 먼 아라지마(新島)로 보낸 후 설득했는데도 막무가내, 마침내 동경에서 174킬로나 떨어진 고즈섬(神津島)으로 유배시켰다.

 

줄리아는 어느 섬에 가든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버림받은 자, 병든 자들을 구해주고, 유배 와 자포자기 된 자들을 위로하여 희망과 신앙을 심어주고, 섬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했다고 전해진다. 아라지마 시절에는 도꾸가와 저택에 있던 같은 신자 루치아와 클라라를 만나 그들과 함께 일생을 수도생활에 전념했다고도 한다. 이에야스는 이즈섬으로 1년 동안 유배를 보내면서 “언제든지 천주교를 버리면 나한테 연락해라. 다시 부르겠다.”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하니까 이에야스는 죽이지는 않고 도꾜에서 서남쪽으로 174Km 떨어진 천애의 고도 고즈시마(神津島)로 유배 보냈다.

 

줄리아는 그곳에서 라틴어로 된 성경을 보며 기도와 찬미로 일생을 보냈다는데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50년대에 고즈섬의 향토사학자 야마모도(山下彦一郎)가 섬에 있는 유래를 알 수 없는 공양탑(供養塔)이 있는 무덤이 줄리아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 그가 이 섬에서 삶을 마쳤음이 분명하다 함으로써 이후 동 섬에서는 매해 5월에 한일 크리스천을 중심으로 위령제를 지내게 되어 관광지가 되었다. 이 사실은 일본에 온 '마치우스'라고 하는 선교사가 예수회 앞으로 보낸 보고서(1613년 2월 12일자)가 발표됨으로써 확실해졌다.

 

가. 절두산에도 줄리아의 석비 세워

1972년, 한국 가톨릭순교지 절두산(切頭山)에 오즈섬의 촌장(村長)과 의회 의원들이 줄리아의 무덤의 흙을 갖다가 땅에 묻고 돌비를 세웠다. 그러나 앞서 말한 교황청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석비는 철거되어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보관하게 되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번역 전재.)

 

나. 오다 줄리아 39제(祭)미사

오다 <줄리아 39제(祭) 미사>(2008년 5월 17일)가 오다 줄리아 현창비(顯彰碑: 숨어 있는 선행을 밝히어 세상에 널리 알리는 비석) 앞 작은 광장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도꾜에서 온 80여 명의 신도들이었다. 미사를 주재한 도꾜교구(東京敎區)의 우라노 유우지(浦野 雄二) 신부는

 

"오늘 우리가 오다 줄리아님의 '겐쇼우비(顯彰碑)' 앞에 모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400여 년 전 조선에서 태어나 도요또미히데요시의 조선정벌에 따른 피해자로서, 이 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생을 마감한 ‘오다 줄리아’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그녀를 위해 다 같이 기도합시다."

 

신도들은 땡볕아래서도 흐트러짐 없이 머리 숙여 기도했다. 미사는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도미자와 히데꼬(富澤日出子)라는 67세의 할머니는

"얼마 전 성당의 잡지에 난 글을 읽고 스스로 감동하여 처음으로 이 축제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동안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라고 했다.

도꾜의 하찌오지(八王子) 성당에서 단체로 온 쓰까모도 세치코(塚本世智子, 54세)씨도

"최근에 이러한 사실을 접하고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무리해서 참석했다" 면서 참석하기를 너무나 잘했다고 만족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