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한국 기독교 전래사(傳來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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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 자료

2012. 4. 27.

 

▶속회참고자료/한국 기독교전래사 I (2012.4.25)

 

한국 기독교

 전래사(傳來史) I


오늘 속회 주제는「진정한 친구」이다. 우리를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그는 우리의 진정한 친구다. 이 친구의 유언을 따라 땅끝까지 흩어진 제자들을 통하여 친구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까지 왔다. 오늘 자료는 그리스도 우리 친구 예수님의 복음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왔는가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공동 집필 발행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전 3권)에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진정한 친구에 대해서 알리고자 이 자료를 만들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 한국인들은 ‘자진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진하여 전파하고, 자진하여 내 교회를 세운 세계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복 받은 민족이다. (오소운).

 

1. 기독교의 동양전래

가. 사도 도마의 동양 전도

기독교의 초기 동방 전도에 관한 전설이나 문헌은 모두 예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인 도마와, 그와 함께 갔다는 바돌로매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인도인들의 전설 중에는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전도할 때, 도마와 바돌로매는 동방으로 진출하여 도마는 인도에서, 바돌로매는 중국에까지 들어가 전도하였다고 한다.

 

이보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는 남인도 말라바르(Malabar) 교회가 갖고 있는 역사적 전통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말라바르 교회 전승에 따르면, 처음으로 사도 도마가 인도 동쪽 해안에 있는 마드라스에 도착하여 전도하다가 점차 서쪽으로 옮겨 말라바르에 정착하여 전도활동을 벌인 것이라고 한다. 그의 전도 활동은 중국에까지 확산되었다고 한다.

 

음각된 글자는 히브리어로 <도마> 라고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향토사학자들 중에는 도마가 가야시대에 우리나라에 와서 전도하였다며 <도마 바위의 암각화>를 증거로 제시하기도 하는데, 정통 사학자들은 이를 반신반의하고 있다.

 

나. 네스토리우스파의 동방 선교

네스토리우스는 주후431년 에베소 공의회의에서 어거스틴이 주동이 되어 성모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cos) 라는 주장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를 낳은 이”(Christocos)라고 하는 게 맞는다고 끝까지 주장하다가 주교직을 파면 당하고 추방당함으로 정치적 패배를 맛보았으며, 451년 칼케돈(Chakedon)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확정하면서 네스토리우스파와 서방교회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네스토리우스파는 자기네 교회를 ‘앗시리아교회’ 혹은 ‘갈대아교회’라 부르며 독자적인 교회 전통을 수립해 나갔다. 이들은 489년 천주교가 주권을 잡은 동로마 황제 제노(Zeno)에 의해 에뎃사에서 추방당하고 니시비스(Nisibis)로 옮겨 신학교를 재건했으며 서방교회와는 다른 전례와 신학 전통을 수립하여 나갔다.

 

674년 페르시아가 회교국인 아라비아에 의해 멸망된 후에도 칼리파(Khalifa)의 신임을 얻어 계속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고 762년에는 오히려 본거지를 바그다드로 옮겨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페르시아에 근거를 둔 네스토리우스파는 7세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인도와 아라비아에 선교사를 보냈는데 인도에서는 말라바르에서 중점적으로 활약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앙아시아를 통해 뚫린 비단길을 타고 중국에까지 선교단(宣敎團)을 파송하였고 중국에서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景敎)란 명칭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다. 중국의 경교 전래와 역사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중국에 도착한 것이 635년, 당(唐) 태종(太宗) 때였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내보내 이들을 환영하였고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머물게 하며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도록 배려하였다.

 

이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한자 명칭은 여러 가지였다. 그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 음역인 ‘파사’(波斯)를 붙여 <파사교(波斯敎)>라고도 하고 후에 그 교가 로마에서 전래되었음을 알고 로마를 의미하는 한자 ‘대진’(大奏)을 넣어 <대진교(大奏敎)>라 불렀다. [대진승(大奏僧)]은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를 의미하고 [대진사(大奏寺)]는 그 교회당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종교”라는 의미가 담긴 "경교"(景敎)란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대진경교(大奏景敎)]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알로펜이 이끄는 선교단을 환영하고 장안에 정착하도록 배려한 태종은 638년(신라 선덕여왕 7년)에 경교를 조정이 인정하는 종교의 하나로 선포하였고 장안 의령방에 사원을 건축하여 <대진사>라 칭하였으며 승려 21명을 두어 포교하도록 하였다. 태종에 이어 고종(高宗)대에 이르러서도 경교는 계속 보호를 받았다. 고종은 경교를 ‘참 종교의 뜻’인 <진종(眞宗)>이라 하였으며 전국에 경사(景寺)를 건립하였고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란 칭호를 붙여줄 정도로 후대하였다. 현종(玄宗) 숙종(蕭宗) 대종(代宗) 덕종(德宗)에 이르는 1백여 년 동안 경교는 삼이사(三荑寺=회교, 조로아스터교(祅敎), 경교)의 하나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인 고위관리들 가운데 경교를 숭배한 인물들도 여렷 나오게 되었는데 처음 알로펜을 영접했던 방현령을 비롯하여 현종 때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고력사(高力士), 숙종ㆍ대종ㆍ덕종 3대를 섬긴 명장 곽자의(郭子儀)와 그의 밑에 있던 이사(伊斯)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781년 덕종 건중(建中)2년에 유명한「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奏景敎流行中國碑)」를 장안에 있는 대진사 경내에 건립했다. 이경교비야말로 중국에서의 경교 역사와 실태를 증언하는 귀중한 사료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교는 845년 무종(武宗)의 모든 종교를 없애라는 회창멸법(會昌滅法)조치에 의하여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奏景敎流行中國碑)」

 

라. 원대(元代)의 ‘야리가온’

845년의 금교령 이후 경교는 약 4백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몽골족이 세운 원(元)대(1234~1367년)에 이르러 재흥하는 현상을 보였다. 원은 몽골족이 우랄 알타이산맥을 근거로 하여 형성되었고 그들의 세력은 동으로는 만주와 한반도, 북으로는 러시아 키에프, 서로는 페르시아와 폴란드에까지 확장되었다. 이들 몽골족이 변방을 점령한 후 중국 대륙의 송(宋) 왕조를 멸망시키고 원(元)이라는 왕조를 세워 중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당 말기에 박해를 피해 변방에 은둔해 있던 경교도들과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시리아문화를 흡수 해 살고 있던 돌궐 계통의 위구르ㆍ네이만ㆍ케락ㆍ온구이트 족들 가운데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이 몽골족을 따라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바로 이들을 통해 중국에서 경교가 재흥하게 된 것이다.

 

원대에 재흥한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란 명칭을 쓰지 않았다. 대신 [야리가온(也里可溫)] 혹은 [아이개온(阿爾開溫)]이란 칭호가 붙여졌는데 “복음을 섬기는 자” 또는 “복음을 받들어 섬기는 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몽골족은 변방 부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결혼정책을 사용했는데 칭기즈 칸이 아내로 맞이한 케라르트(Kerart)족 공주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칭기즈 칸 영내에 예배당을 지었으며 케라르트 출신의 야리가온들이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和林)에 진출하여 상당한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쿠빌라이도 자신은 불교도였으나 야리가온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1289년 숭복사(崇福寺)를 설립하여 야리가온에 대한 업무를 관장케 하였고 궁 안에 3만 경호대를 기독교도들인 알라인(Alains)들로 조직할 정도였다.

 

로마교황 사절이 되어 몽골을 1275년 방문한 아버지 니콜로(Nicolo)를 따라 몽골에 도착한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으며 17년간 원의 조정에서 봉사하였는데 그 동안 듣고 본 바를 나중에 본국에 돌아가서 쓴 책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은 진강에서의 십자사 건립뿐 아니라 중국의 서북지방, 내몽골지역, 화북과 화남은 물론 서남지역인 운남(雲南)에 산재한 야리가온들의 행적에 관해 상세한 언급을 하고 있어 원 초기의 기독교 이해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원대에 적어도 47개 지방에 야리가온 사원들이 건립된 것으로 정리된다. 즉 원대에 야리가온이 지역적으로 폭넓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대의 역사가 변방족인 몽골의 한족(중앙 민족) 지배의 역사였던 것과 같이 야리가온은 외래종교로 몽골족의 지원을 받으며 지배계층의 종교로 정착했다. 본토민인 한족에서 유래된 종교가 아니라 몽골족과 함께 지배자로 도래한 색목인들의 종교였기에 그만큼 중국에 토착되기도 어려웠고, 원대의 야리가온은 경전 번역에 소홀했을 뿐 아니라 예배 시에는 시리아 말을 사용하였고 시리아어로 된 기도서와 경전을 그대로 사용함으로 외래종교란 인식을 오히려 강하게 부각시켰다.

 

이처럼 야리가온이 지배계층의 외래종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1368년 한족이 다시 일어나 명(明)을 세우고 원을 멸망시켰을 때 야리가온도 함께 소멸되었다. 명에 들어오면서 만주족을 비롯한 외래민족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고 중국에 남아 있던 이방민족들도 한족화(漢族化)됨에 따라 외래종교로 인식되었던 야리가온이 자리할 위치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2. 경교의 한국 전래 주장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제일 먼저 언급한 학자는 영국인 여류 고고학자 고든(E.A. Gordon)이었다. 기독교의 동양전래 및 기독교․불교 교류에 대해 연구하였던 그는 한일합방 무렵에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불교 사찰을 살펴보고 한국 불교와 경교의 연결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특히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신장(神將), 관음상(觀音像), 나한상(羅漢像).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에서 페르시아의 경교적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능묘에 나타나는 십이지상(十二支像) 부조나 능 앞의 무인상(武人像)에도 경교적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 같은 연구를 기념하기 위해 중국 장안에 건립되었던 「대진경교유행중국비」모조비를,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경내에 세우기도 했다.

 

이 주장을 따르는 자들은 특히 1956년에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되었다는 십자가 형태의 석제물(石製物), 전남 해남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동제(銅製)십자가, 그리고 마리아 상과 유사하다는 관음상(觀音像)을 예로 들며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이후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은 여러 학자․연구가들에 의해 꾸준히 지적되고 있으나 아직은 가설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객관적인 입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국사에서 발견된 경교 돌십자가

 

 

 

 

3. 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가.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비록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 선교에 대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이었다. 윌리엄슨은 스코틀랜드태생인데 일찍이 런던선교회 소속선교사로서 1855년에 중국에 와서 그리피스 존(Griffis John) 등과 같이 상해에서 선교하던 중, 토마스 목사의 생사도 알아 볼 겸 한국 사정을 알려고 1867년 만주에 내왕하는 한인들과 두 차례 접촉하였다. 윌리엄슨은 한국인 상인들과 여행자들에게 진리의 말씀과 서적들을 주면서,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달 19일에는 천장대에서 귀국 도상의 한국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만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에 관한 지식에 놀랐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동지사는 북경에서 여러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런던선교회도 방문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이 사람이 로버트 토마스를 만났었다고 하는 사실을 1866년 4월 4일 날짜의 토마스의 서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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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평양에 세워진 <토마스 목사 기념년교회와 토마스 목사 사진>인데,

옛날 필자가 어렸을 적 우리 고향 아리실교회의 당회장으로 해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묵으신 노해리 선교사가 은퇴 후 영어로 쓴

<북장로교회 한국선교역사>에서 옮겨 실린 이다.

 

“동지사 일행이 방금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북경에서 다른 외국인들보다 훨씬 이들과 친숙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조선에 관한 지식 그리고 조선말을 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에 저들이 묵고 있는 공적인 숙소에 아주 쉽게, 환영을 받으면서 왕래할 수가 있었습니다.”

 

윌리엄슨은 상당한 정도의 한국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로버트 토마스를 통해서 얻은 지식과, 자신이 직접 만난 두 사람의 조선인 천주교인을 통해 얻은 지식, 그 외에도 고려문 전도시에 만났던 많은 조선인들을 통해 그는 “분명히 조선은 위대한 가능성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간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한국인의 지성과 성품과 윤리적 생활이 우수한 점, 그리고 명민한 판단과 담 큰 결단력을 지적하고는, 지력(地歷)과 지하자원에까지 언급하고 수운(水運)의 편리함도 서술한 후

 

“이 나라에 없는 것은 다만 서양의 종교와 그 문명의 박차(迫車)와 지도(指導)”라고 갈파하였다.

 

1866년 토마스가 순교하기 1년 전부터 고려문에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는 1867년에도 그곳의 한국상인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하며 한국선교를 준비했다. 토마스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년이 되는 1867년 9월 9일, 윌리엄슨은 고려문을 포함한 만주 전도여행을 떠났다. 고려문은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장이 섰는데, 이때는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중국인과 물건을 매매할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었다. 따라서 한국인들과 접촉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윌리엄슨은 한국인들에게 중국어 성경을 팔면서 복음을 전했다.

 

윌리엄슨은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이 뛰어났고 그 일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면서도, 선교의 방법에 있어서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 대국들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한국이 문호를 열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대영제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이 선도하여 한국같이 그 나라들에 반대하여 어리석고도 무식하게 폐쇄하는 나라들을 개방하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나는 믿는다.”

 

윌리엄슨은 누구 못지않은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있었지만, 선교방법론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비록 한국의 개방을 위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무력을 통해서라도 이 나라를 개방하도록 만드는 일이야말로 일종의 거룩한 소명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중국으로 박해를 피해갔던 리델 신부가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한국 선교의 문을 열려고 한 것이나, 토마스가 불란서 함대의 통역으로 국내에 입국하려고 한 이면에서 우리는 당시 영국과 불란서 등 유럽 강대국 출신 선교사들의 내면에 복음의 열정이 제국주의 패권의식으로 채색되어 복음의 순수성이 희석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4.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토마스나 윌리엄슨같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들 가운데는 일찍부터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한국 선교를 타진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존 로스(John Ross, 1841-1915)와 존 맥킨타이어(John McIntyre, 1837-1905) 선교사였다. 이들은 처남매부지간이었다. 일찍이 1892년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는 자신의 서울에서 본 한국(Korea From Its Capital)에서 “한국개신교 복음화의 시작은 중국 우장에서 활동하는 존 로스 목사의 노력에 기인한다”고 지적할 만큼 존 로스는 한국개신교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로스(羅約翰)는 제임스 그레이슨이 "한국의 첫 선교사”라고 부를 만큼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입국 이전에 한국 선교의 초석을 놓았던 개신교 선교사였다.

 

가. 존 로스의 한국 선교 준비

1872년 존 로스는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아내 스튜어트와 함께 그 해 8월 중국 지푸를 거쳐 그 다음 달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부가 있는 영구(營口)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만주어를 배우는 한편 만주 우장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873년 사랑하는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큰 위기를 만났지만, 로스는 결코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던 로스는 영국에 있는 누이동생 캐더린 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는 선뜻 오빠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같은 선교지에 와 사역하던 총각 선교사 존 맥킨타이어가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을 받고 청혼하여 둘이 결혼했다. 로스는 1881년 재혼할 때까지 7, 8년을 여동생 캐더린의 도움 속에 홀로 지내며 한국 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수 있었다.

 

존 로스 목사

 

로스는 아내와의 사별에도 불구하고 1873년 가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산동 지역 특히 서간 지역으로 1차 선교여행을 떠나며 한국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 만주 우장을 떠난 존 로스는 봉천 홍경을 거쳐서 압록강 상류 임강 부근까지 건너갔다 거기서 우연히 한 한인촌을 발견했다. 이미 윌리엄슨에게 토마스 선교사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조선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공을 찾았지만 나서는 뱃사공이 없어 배라도 빌려 비밀리에 도강하려고 했으나 배를 빌려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외국인과 접촉만 하면 처형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존 로스 선교사를 태워다 줄 사공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존 로스는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포기하고 ‘개국(開國)의 날’이 속히 이르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귀로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 사람의 한인과 친하게 되어 자기가 갖고 있었던 한문 성서 몇 권을 그에게 전하고 돌아왔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배포한 성경을 읽고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로스는 1873년 가을, 만주를 출발하여 고려문을 방문했다. 로스는 고려문에서 한국어 선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중국인 여사(旅舍)에 짐을 풀고 매일 시장에 나가 한국인을 만났으나 별 소득이 없이 영구로 돌아갔다.

 

1874년 4월 말에서 5월 초 로스는 자선 사업가 아딩톤(R. Arthington)의 재정 후원으로 서기를 동반하고 다시 고려문에 가서 자신의 어학 선생을 찾기 시작했다. 서기를 통해서 만난 사람이 바로 의주 출신 중인 이응찬(李應贊)이었다. 이응찬은 한약재를 잔뜩 싣고 고려문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 갑자기 남서풍을 만나 거센 파도가 이는 바람에 배가 전복되어 싣고 가던 모든 물건들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다행히 그는 물에서 나왔으나 물건은 찾을 길 없게 되었고, 갑자기 무일푼의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1890년 로스는 이응찬을 만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술회한다.

 

“일을 하자니 힘이 들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워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궁지에 빠졌다. 이러한 비참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에 그는 우연히 한국말 선생을 구하기 위하여 한국 사람들 사이에 파견된 나의 서기와 만나게 되었다. 하루 저녁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에게로 왔다. 나를 만나자 그의 친구들을 먼저 돌려보낸 다음에 곧 나의 선생이 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 앞에서나 모르는 척 해달라고 신신부탁한 다음에 뛰어나가서 친구들이 여관에 채 들어가기 전에 그들을 따라갔다.”

 

이응찬은 진퇴양난의 위기의 순간에 로스 일행을 만나 그의 어학 선생을 하면서 로스의 사역을 지원한 것이다. 로스는 이때가 1874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래 한학에 뛰어난 이응찬의 지도를 받으면서 로스의 어학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이응찬의 어학 지도로 로스는 1877년 한국어 교본『한영문전입문』(韓英文典入門, A Corean-English Primer)을 저술하였으며, 1879년에는『한국, 그 역사, 생활 습관』(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 1875년에는『예수셩교문답』과『예수셩교요령』도 출판하였다. 로스 목사는 한글에 대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글자는 표음문자인데다 매우 단순하고 아름다워서 누구나 쉽게 또 빨리 배울 수 있다.”고 칭찬하였다.

 

나. 로스와 맥킨타이어의 성경 번역

이응찬은 로스를 도우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이응찬은 1875년 고려문에 가서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로스는 말씀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전도의 중심이라 보았다. 해서 성경 번역, 한글성서 간행에 전력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복음주의자였다. 선교사로서는 가장 적절하고도 고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백홍준 장로

 

이들 네 명의 의주 청년들은 선교사, 세관관리, 병원장 등 그곳 외국인들의 어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이응찬과 함께 로스의 성경 번역 사업을 지원했다. 이들이 한 일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위해 한문 성경을 수차례 정독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수를 믿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4년 후 1879년에 네 사람 모두가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 사실에 대해 로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맥킨타이어는 네 명의 박식한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한국인들은 중국인들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로스역 성경

 

이 일이 있은 후, 같은 의주의 청년인 서상륜(徐相崙)이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홍삼 장사를 하기 위해서 영구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서상륜은 그곳에서 심한 열병에 걸려 생명을 잃을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로스가 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즉시 서상륜을 그곳 선교부가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성을 다해 간호해 주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서상륜은 퇴원을 한 후 같은 해인 1879년에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4년 후 1883년에는 김청송(金靑松)이 그 뒤를 이어 세례를 받아 이제 세례를 받은 젊은이는 모두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880년 존 로스의 동료 선교사 맥킨타이어는 한국인의 신앙공동체 형성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한국 최초의 장로 서상륜 선생

 

“최근에 한국인들을 위한 저녁 집회를 조직했다. 그 모임은 우리 번역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관하는데 자기네들 방에서 최소한 8명이 모이고 있다. 나도 늘 참석하지만 듣기만 한다. 나는 한국어를 단지 번역 수단으로만 이용해서 문자로만 알았지 번역인들과 대화할 땐 중국어를 썼다. 그러나 이처럼 소외되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 적어도 한국어로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결심이다. <지금은> 이 일에 제외되어 있지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이런 집회를 내 자신이 인도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10월까지 열두 달 동안 교육받은 한국인들은 30명이 넘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가 이미 복음 전래 초기부터 실행에 옮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은 역시 성경 번역에 있다 하겠다.

 

초창기의 성경 번역 과정은 한국인 번역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읽고 나서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선교사는 그것을 다시 헬라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이었다. 1879년 존 로스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머무는 동안 서방세계에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새로 번역될 한글 성경의 출판에 필요한 비용을 보조받을 약속을 받아내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로스는 1881년에 봉천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그해 10월에 인쇄했고, 이어 성경 인쇄에 들어가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을 처음 인쇄하고, 5월에는 요한복음을 발행했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중국인 식자공으로는 한글 성경전서를 완간할 수 없어 한국인 식자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서간도 한인촌 출신 김청송이었다. 비록 “그는 너무 둔하고 느려서 무슨 일이나 네 번 이상 가르쳐 주어야 비로소 깨달아 알았고 손이 너무 떠서 두 인쇄공이 3,000장을 인쇄하는 동안에 겨우 4페이지밖에 조판을 하지 못할” 만큼 천성적으로 느렸지만“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치밀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 치밀함 때문에 인쇄되어 나오는 복음서를 자세히 읽게 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씀으로 성경 번역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께서 다시 성경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말씀을 통해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최종 원고가 완성되어 인쇄에 들어가려고 할 즈음 동지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돌아가는 길에 봉천교회에 들렀다. 이때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그 원고의 교정을 부탁해 그가 원고를 서울로 가지고 가서 교정을 완료한 후에 다른 동지사 편에 그것을 돌려보냈다. 이 사실은 1890년 로스가 이때를 회고하면서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이미 동지사 일행에 의해

 

“번역원고가 한국의 수도에서 교정되었다.”고 밝히면서 알려졌다. “심지어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번역 원고가 코리아 서울의 수도에서 수정되었으며, 이는 너무 많은 흥미를 자아내 한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바칠 조공을 나르는 동지사에 딸려 이따금씩 중국에 오는 한 수행원이 이곳의 성경 번역 사업을 보기 위해 들렀다. 이들의 방문은 점차 더욱 잦아졌고, 그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느리기 한이 없었던 그 식자공(김청송)과는 정확히 정반대 모델이었다. 그는 손놀림이 민첩했고, 눈치가 빨랐으며, 말과 사고와 행동이 영특했다. 그는 식자공으로 종사했으며,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배운 지식을 가지고 더 잘 적응하리라고 여겨지는 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자유를 얻었다. 몇 백 권의 복음서와 훨씬 더 많은 전도지를 가지고 그는 봉천에서 정 동쪽으로 약 4백마일 떨어진 자신의 마을로 갔다. 그는 그 여행에 2주일이 걸렸고, 반년 만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책들을 팔았으며,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들을 읽었고, 그 중에 몇 사람은 내가(로스) 그들에게 세례를 주러 오기를 원했다고 했다.”

 

처음에 로스는 와서 세례를 달라는 말을 반신반의해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더 많은 책을 공급받고 다른 마을로 가 반년 후 돌아와서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처럼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 성경 번역 사업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출판 후에도 성경 보급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께서 한글 성경의 번역과 보급에도 개입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발견한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번역에 사용한 성경은 중국어 성경ㆍ헬라어 성경ㆍKJVㆍERV(English Revised Version) 등 네 종류의 성경이었다. 당시 번역이 진행된 곳이 만주 우장이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한문 성경이 출판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문 성경을 주된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국어 성경 외에 헬라어 성경과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영어 성경을 사용했다. 한국인 조력자들이 한문 성경을 가지고 한글로 번역하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 및 영어 성경과 대조하여 수정하고 헬라어 성경사전 및 주석을 참고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 후 수정된 원고를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여 읽어 가면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을 처음 인쇄하고, 5월에는 요한복음을 발행한 데 이어서

1883년에는 재 교정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합본이 3,000권, 재 교정된 요한복음이 5,000권 발행되었고,

1884년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1885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출판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 전권이 완간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을 위해서 공식적인 모임을 시작한 것이 1887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미 존 로스의 신약성경이 완간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앞선 일이었다.

로스와 맥킨타이어 역 한글 성경은 첫 작업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다. 비록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서울 지역에서 사용하는 데는 불편이 많았지만, 고유명사를 헬라어 원문대로 표기한 것이나 또한 당시 이응찬이나 백홍준이 모두 의주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몰락 양반 가문이어서 한학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한학이 훨씬 더 쉽고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성경번역을 하는 데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지도 않고 아예 순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 번역에 기여한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만든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는 정식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에 한글로 성경이 번역되어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가 놀랍게 진행되었다.

 

다. 권서인들의 활동

외국의 선교 과정을 보면 선교사가 피선교국에 들어가서 그 나라 글과 말을 배워가지고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선교 개시 이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 나라 성경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복음이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 청년들이 외국에 가서 복음을 받고 선교사와 합작하여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외국 선교사가 정식으로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한국에 반입되었으며, 선교 이전에 한국인에 의해 교회가 먼저 세워지는, 기독교 역사상에 보기 드문 선례를 갖고 있다.

귀하게 만들어진 우리말 성경은 권서사업을 통해 한국에 반입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일반적으로 성서공회의 권서사업(성경 반포)의 목적은 사람에게 단순히 성경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로 사용하여 성경의 지식을 얻도록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이용한 부속기관은 성경 보급소, 권서인, 성경 교사 등이었다. 성경 보급소는 성경의 보관 창고, 판매 서점 및 설치된 지방의 전도 중심지 역할을 했다. 권서인(매서인)은 성경 반포의 주역이자, 전도인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전도의 선구자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경 교사 제도는 채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라. 한문서적의 도입

1879년 말, 2명의 개종자와 십여 명의 구도자가 의주에 거하게 되자, 맥킨타이어는 기독교서적을 요구하는 그들의 굶주린 상태를 외면할 수 없어 서적 운반을 자청하는 한 한국상인을 통해 과학서적을 포함한 한문 성경과 전도책자 한 꾸러미를 보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짐은 국경에서 압수되었고, 편지가 개봉되어 의주의 백홍준은 3개월간 투옥되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거의 모든 재산을 잃은 백홍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를 위해서 핍박받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신앙고백을 맥킨타이어에게 하였다.

이 최초의 박해 사건으로 인해 그 후 2년간 수세 청원자가 없었지만,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초기 개종자들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 갔으며, 1880년에는 30여 명이, 이듬해에는 100여 명의 한국인들이 우장의 맥킨타이어를 찾아가서 성경공부반에 참석, 일주일까지 머물다가 돌아갔다.

 

마. 김청송의 서간도 한인촌 전도

1882년 3월, 로스는 일단 한글성경의 반포가 가능한 만주 한인촌을 대상으로 전도하기로 하고, 김청송을 ‘최초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겸 최초의 권서인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즙안현 이양자를 중심으로 수천 권의 복음서와 소책자를 팔았다. 그의 전도로 많은 세례 지원자가 한인 계곡에 생기게 되었다. 많은 결신자를 얻게 된 김청송은 심양(瀋陽: 봉천)으로 돌아와 로스 목사에게 즙안 전도 결과를 보고하고, 즙안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간청했다. 1884년 여름 어느 날, 김청송으로부터 성경을 받아 읽고 은혜를 받은 청년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더 잘 알기 위해 봉천까지 떼를 지어 왔다. 이들 중의 더러는 본국에서 임오군란 때 변경으로 좌천된 고급 군인들이 즙안현으로 망명해 온 이들이었다. 그해 가을에 로스 목사는 웹스터(Webster) 목사와 함께 즙안에 가서 75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다음해 다시 25인에게 세례를 주어 100여 명의 세례 교인이 생긴 큰 교회로 발전되었다.

 

바. 미제본(未製本) 복음서 밀반입

만주에서는 성경을 반포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나, 당시에 조선은 외국종교 서적의 유입을 엄금하는지라, 어떻게 이 신간된 복음을 조선에 수입할까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의주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경 번역이 진행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한글)성경에 대한 강렬한 요구가 있었고, 또한 백홍준 등의 전도 활동이 잘 수용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종자들과 그의 친구들이 무보수로 성경을 전달하는 일을 자청하였고, 별 사고 없이 수백 권의 복음서가 의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로스로부터 몇 십 권의 복음서와 기독교 서적을 가져가던 한 개종자가 사고를 당해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경 반입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 가지 묘안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미 제본 된 복음서 낱장을 밀반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 제본 된 복음서 낱장이 ‘편견과 두려움이 세워 놓은 장벽’을 넘어, 창문 창호지로 장식됨으로써 집을 드나드는 자들에게 읽히게 되었는데, 성경 종이가 한지였기에 구멍 난 곳의 문종이로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실 그 복음서 낱장은 공허한 조선인의 가슴에 풀칠되어 붙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 백홍준, 이성하의 의주 전도

백홍준은 1879년 수세 후 의주에 거주하면서 최초의 전도인으로서 복음을 은밀히 전파하였으며, 이듬해의 투옥사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켰다. 그는 자신과 친구들이 우장과 봉천에서 가져온 한문 및 한글 복음서, 소책자들을 의주는 물론 구성ㆍ삭주ㆍ강계 등지에 반포함으로써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곳곳에 생기게 하였다.

 

한편 이성하 역시 의주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서상륜ㆍ서경조의 글에 의하면 이성하는 초기 번역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는 번역보다는 전도인으로 활약했다. 그는 다량의 한글 복음서를 책문을 거쳐 압록강 연안의 구련성까지는 가져왔으나 삼엄한 국경 경비 때문에 그곳 중국인 여관에 쌓아두었다. 그가 외출을 한 후에 의심을 품은 여관집 주인이 그의 짐을 풀어보고는 금서인 것을 알고 이를 압록강에 던져 떠내려 보냈고, 일부는 소각해 버리고 만 사건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스는

 

“성경이 던져진 물은 한국인들에게 생명의 물이 될 것이고, (성경이 탄)재는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밑거름이 될 것이다.”

 

라고 술회한 바 있는데, 뒷날 그의 예언이 이루어져 압록강 일대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이성하가 성경반입에 실패한 후에 백홍준이 재차 시도하였다. 그는 변경에 도착하여 정세를 살펴보니, 성경을 반입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었다. 그는 곧 시장에 나가 별 것 아닌 책들을 여러 권 샀다. 그리고 성경을 한 장씩 뜯어내어 돌돌 말아 긴 끝을 만들어 시장에서 사온 책을 묶었다. 그리고는 이 책을 짊어지고 강을 건넜다. 관리는 책만 조사하고 별 것 아니므로 통과시켜 주었다. 집에 돌아온 백홍준은 책은 버리고, 책을 묶었던 끈을 풀어 다시 성경을 만들어 전도를 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의주 청년들이 이곳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백홍준이 요리문답반을 운영하면서 더욱 신자들이 증가하여, 1885년에는 약 18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예배처가 생겨났다.

 

백홍준은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로스 목사의 권서인으로 본국에 들어와 전도하다가 언더우드 목사에게 전도사로 임명을 받아 사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역을 하던 중 백홍준은 2년간 봉천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 이유는 만주에 있는 선교사와 내통한다는 죄명이었다. 백홍준이 내통했다는 선교사는 로스 목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1894년 봉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백홍준의 옥사를 두고 차재명은 그가 편찬한「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에서 자연사한 것이라 기술하고 있으며, 김해연은「한국기독교회사」에서 백홍준의 죽음을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아. 서상륜의 서울 권서 활동

서상륜은 1882년 4월에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6개월간 봉천에서 성경 사업을 돕다가 10월 6일 권서인으로 의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서상륜의 성경 밀반입 행로에 대해 여러 책은 그가 국경에서 검거 투옥되었다가 친척 관리의 도움으로 밤에 탈출하여 의주에 도착, 전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과 다른 듯하다. 서상륜은 국경 검문소에서 성경을 압수당했지만, 첫 밀반입이라 아무 일 없이 의주로 돌아왔는데, 며칠 후 검사관이 서상륜을 찾아와서 그 책들을 읽어본 결과 좋은 것들이므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옷속에서 꺼내놓았던 것이다. 서상륜은 이 우호적인 검사관으로부터 전해받은 성경과 소책자로 의주에서 전도하다가 경성(京城)에 잠도(潛到)하여 [복음전포(福音傳布)]란 책방을 경영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없어 곤란을 겪게 되었고, 이에 로스는 1883년 봄에 김청송을 통하여 수백 권의 성경을 전달했다.

 

서상륜이 백홍준과 함께 장로 안수 받은 새문안교회의 처음 모습

 

서상륜은 김청송으로부터 전해받은 복음서를 서울에서 장사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나눠주면서 은밀히 전도하였다. 그리고 김청송도 평양 권서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봉천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뒷날 평양교회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로스는 이보다 앞선 1883년 봄에 봉천을 지나가는 조선 북경 사절단에게 성경을 전달하려고 복음서 200권을 따로 준비해 두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883년 8월에는 6천 권의 복음서가 거의 배포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에 고무된 존 로스는 이듬해 1884년 봄 묄렌도르프 부인의 주선으로 인천 해관(海關)을 통해 6천여 권의 성경을 서상륜에게 전달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