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한국 기독교 전래사(傳來史)(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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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 자료

2012. 5. 6.

 

▶ 속회참고자료/한국기독교전래사(2012.5.4)

한국 기독교

전래사(傳來史)()

 

 

오늘 속회 주제는「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온 여인의 신분의 한계와 수치심의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을 본받자는 과목이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역사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은 각나라의 믿음의 선각자에 의해서이다. 지난 번 속회 자료는 서쪽 곧 중국을 통해 전래된 과정을 다뤘는데 이번에는 동쪽 곧 일본을 통해 전래된 과정을 다루었다. 역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발행한《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전재(轉載)한다.

 

다만 지면 관계상 일부 줄인 것도 있음을 양해하시기 바란다. 일본인 이름표기는 문화관광부의 「전자법(転字法)」을 따르지 않고 발음 중심으로 표기하는 「전사법(転写法)」을 썼다. 영문 이름은 지면 관계상 다 빼었다. 전 3권으로 된 이 책은 쟁쟁한 교회사가들이 공동집필한 한국교회 최초의 한국기독교 역사서다. 값도 비싸지 않으니 관심 있는 성도들은 서점에서 구입해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아울러 인터넷을 하는 성도는 웹사이트에 들어가 ‘오소운 목사’라고 치고 저의 찬송가 블로그 (http://blog.daum.net osowny/)에 들어가 보시면 더 자세히 볼 수가 있다. (오소운).

 

 

1. 일본에서의 성경 출판과 선교

가. 이수정의 개종과 신앙 활동

 

이수정은 온건 개화파 양반학자다. 임오군란때 민비를 구출한 공으로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의 도일 목적은 개화된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연구하는 것이었다. "소년들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야망(野望)을 품어라”(Boys be Ambitious for Christ)로 유명한 클라크 박사의 제자로서 기독교인 농학자 쓰다센(津田仙)을 만나려고 하는 또 하나의 열망도 있었다. 이수정은 동경에 도착한 후 곧 쓰다센을 방문하였다. 산상수훈에서 시작하여 기독교에 관한 대화가 오고 갔고, 쓰다센은 성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문 신약성경 한 권을 주었다. 이수정은 숙소로 돌아온 후 매일 그것을 읽으며 기독교에 접근해 갔다.

 

 

쓰다 센 목사

 

그리고 1882년 12월 25일 그는 도꾜 쓰꾸지교회(의 성탄 축하예배에 참석하여 이 첫 예배에서 그는 큰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쓰다센 목사에게서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하였다. 몇 개월간의 이 성경공부에서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야스가와(安川亨) 목사로부터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대한 의문을 해결한 후 세례받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미국선교사 녹스 목사에게 1883년 4월 29일 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이수정은 도일 7개월 만에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세례 받은 첫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은 그 해, 크게 부흥하기 시작한 일본교회는 5월 8일부터 5일간 제 3회 전국기독교도 대 친목회를 동경에서 열었다. 이수정은 이 대회에서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하였으며, 이튿날에는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 요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유교의 감응의 논리를 빌어 설명하였고, ‘신인상감’의 원리를 '등잔의 심지가 타는 것'과 '종이 울리는 것'과 같은 한국적인 비유로 표현하였으며, 예수교의 은혜와 믿음에 의한 속죄와 구원의 도리를 허망한 불교의 자력구원관과 비교하는 것 등이었다. 그의 이 신앙고백은 문서로 남아 있는 한국개신교 최초의 신앙고백서로서, 한국인의 마음밭에 복음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귀중한 사례라고 하겠다.

 

 

간증 집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

 

이수정의 개종과 공개적인 신앙고백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재일(在日) 미국 선교사들과 일본 교회에 큰 자극을 주었다. 재일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제안을 받아 이수정은 곧바로 성경번역에 착수하는 한편 그는 당시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가 있던 30여명의 유학생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열렬한 신앙과 전도의 첫 열매는 당시 동경외국어학교 한국어 교사로 있던 손붕구로서 이수정으로부터 성경과 교리를 배우고

 

"이수정이 그의 신앙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면 나도 또한 죽을 각오이다"라고 하면서 6월 9일에는 세례문답을 받았다. 손붕구에 이어 여러 명의 유학생들이 계속해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이수정은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손붕구의 도움을 받아 6월 24일 한문요리문답서를 교재로 하는 주일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7월 1일 주일에는 이경필을 비롯한 세 명의 청년이 세례를 받았다. 1883년 12월 16일에는 한성순보 발행을 위해 유학하고 있던 청년 박영선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전의 이경필ㆍ이계필ㆍ이주필 형제와 김익승ㆍ박명화 등 5명의 수세자를 합하여, 1883년 말에 벌써 7,8명의 한국인 수세자가 동경에 있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학생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1883년 6월에 개설된 요리문답반 주일학교 모임은 점차 발전하여 미국 선교사들이 와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종의 성경연구회로 확대되었고, 더 나아가 주일마다 설교자를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인 1883년 말 도꾜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동경교회였다.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보고자 고심하던 재일 선교사들에게 이수정의 개종은 "근대선교사상 가장 괄목할 만한 사건으로, 너무 좋아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가 미국인과 미국 선교사를 좋아하고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자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장로교의 녹스 목사는 이수정에게 세례를 준 후 즉시 본국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신사는 한국에 선교회가 개설되어야 한다고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는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모든 수단을 다하여 선교회를 보호하고 지원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녹스의 이 글은 곧 미국 교회에 이수정의 요청을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으로 불리게 하였고, 이제 막 시작된 한국선교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또한 이수정에게 성경 번역일을 제안하고 지원하였던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역할이 컸다. 그는 계속해서 이수정과 한국인 개종자들, 그리고 한글 성경번역 관계 기사들을 선교잡지에 기고함으로써,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당시 일본 교회에서는 한국선교론이 대두되어 한국 선교사를 지원하는 자까지 나오는 분위기였는데, 이수정은 여기에 강력히 반대하고 미국 선교사를 요청하였다. 이는 한일간의 오랜 역사적, 민족적 감정과 정치적 문제 못지않게, 서구문명을 일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미국으로부터 수용해야 한다는 문화적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수정의 문화적ㆍ종교적 욕구가 재일선교사들의 한국선교 열의와 만났고, 그것은 선교사 초치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수정은 또한 1883년 12월 13일에 미국 교회 앞으로 보낸 진정서에서, 지난 7, 80년간 위험을 무릅쓰고 행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비밀전도와 순교를 불사한 신도들의 신앙을 지적하면서, 한국인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정부도 대외 통상정책을 펴고 있으므로,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허용치는 않을지라도 기독교인을 찾아내어 박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 뒤,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수정의 호소는 매클레이의 내한에 이어 선교사들의 한국파송을 이루게 하였다.

 

나. 이수정의 성경 번역ㆍ출판ㆍ반포

 

수신사 박영효의 기이한 모습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미국성서공회 루미스 총무는 이제 이수정의 개종에서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루미스가 이수정을 찾아가서 한국선교의 지름길인 성경번역을 제안하자 이수정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수정은 성경이 한국민족에게 철도나 전신, 기선보다 더 필요한 것임을 확신하였고, 성서를 한국인에게 빨리 보급해야 하겠다는 소망이 강렬하였기에 열심을 내어 성경번역을 시작하였다.

 

이수정의 마가전 내표지

 

이수정의 번역은 1883년 5월 중순에 시작되었다. 번역저본은 브릿지맨과 쿨버트슨이 공역하고 1864년 상해에서 발행된 <신약전서 문리>였다. 출판은 11월에 시작되었다. 즉 <신약성서마태전>을 필두로 1883년 11월에 인쇄에 들어가 1884년 8월까지 <신약성서마가전>, <신약성서로가전>, <신약성서약한전>, 그리고 <신약성서사도행전> 등 5권의 단편 한한성서가 각 1천부씩 출간되어 나왔다. 신약전서가 현토(懸吐)되었고, 로마서까지 조판이 완성되었으나 사도행전까지만 간행한 것은 한한성서보다는 한글성서의 필요가 더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만주에서는 사도행전까지 '예수셩교본'이 출간되었고 계속해서 신약의 나머지 부분도 나을 예정이었으므로, 한한성서간행 의의가 그만큼 감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토 달린 한문성경들은 이후 번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당시 동경의 유학생에게는 물론 국내에 반포되어 지식층의 환영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한한성서의 번역이 끝난 6월말부터 이수정은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여 한글성경 번역에 들어갔는데, 그 첫 작업으로 마가복음이 선택되었다. 번역은 7월 11일에는 4장까지 속도감 있게 진행되었으나, 이후 여름 동안 이수정이 동경외국어학교 한국어 교사직을 맡게 되고, 선교사들도 다른 업무로 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잠시 중단되게 되었다. 번역은 10월초에 재개되었고, 이듬해 1884년 2월에는 초역이, 그리고 4월 10일경에 완역이 되었다. 마가복음의 출판은 미국성서공회에 의해 1885년 2월 요꼬하마에서 6천부가 간행되었다. 그것은 한국선교사로 임명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초에 일본에 도착하게 된 것과 때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바로 이 마가복음을 들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마가복음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해 온 김옥균에 의해 약간의 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1887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송덕조 등의 공역주로 개정되어 <마가의젼복음셔언힉>로 다시 요꼬하마에서 출간되었다.

 

이수정은 마가복음에 이어 신약 전체의 한글번역 계획을 세우고 루미스와 의논한 뒤, 1884년 말부터 누가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했으나 출판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 원고는 뒷날 루미스에 의해 언더우드에게 전달되어 개정을 보게 된다.

 

한편 이수정은 소책자도 번억하였다. 매클레이의 요청으로 번역한 감리교 요리문답서는, 1천부가 인쇄되어 곧 국내로 유입, 반포되었으며, 당시 널리 읽히던 <천도소원>과 <랑자회기>는 번역되었으나 원고 형태로만 아펜젤러 등에게 전달되었다. 루미스는 이수정의 시간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자 모든 관심을 성서번역에 쏟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고용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갑신정변으로 정부의 학자금 지급이 끊긴 유학생 가운데 박명화를 채용하여, 그에게 요한복음을 번역하게 하였다. 이수정은 김옥균 망명 개화파들과 관계를 멀리하여 결국 그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상처까지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약전서의 한글번역 계획은 취소되고, 이수정도 1886년 5월 12일 귀국길에 올라, 국내에서 은거하다가 병사하고 만다. 그러나 이미 한국에는 선교의 문이 열려져 있었다.

 

다. 재일(在日) 선교사들의 역할

 

이수정이 도일한 그 이듬해인 1883년은 일본교회가 급격한 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된 해로서 향후 3년 내에 교회 수는 2배로, 교인 수는 3배로 증가하였고, 1890년에 이르러 300교회에 약 42,000명의 개신교 신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의 열기 속에 한국인 유학생들의 개종이 이루어졌고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갔다.

 

일본에서의 한국선교사업에 대한 괄목할 만한 진전은 먼저 문서사업 쪽에서 진행되었다. 미국성서공회에서는 1875년 굴릭을 일본에 파견한 데 이어서 1882년에는 루미스를 파견했는데 루미스는 이수정 등을 통해 성서를 번역하여 1884년에는 한한성서 5종류 각 1천 권을, 1885년에는 한글 마가복음 6천권을 출간하였으며 그. 후 미국전도문서회의 지원을 받아 한국 선교사들을 통해 이들을 모두 한국에 반포하였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이보다 앞서 만주의 '예수셩교본'을 일본인 권서들을 통해 한국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반포하였다. 톰슨 총무는 1882년 로스로부터 2천 권의 복음서와 많은 소책자를 받게 되자 부산에 성서보급소를 세웠다. 부산의 이 성서보급소는 장날의 경우 "출입구에 놓인 신발 닦개가 닳아버렸을" 정도로 붐비게 되었다. 이어서 대구에도 복음서를 반포하고 제물포에도 성서보급소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일본에 온 미국선교사들 중 한국선교의 선구자는 장로교의 녹스와 감리교의 매클레이였다. 녹스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의 신앙성장과 성경 이해를 도와 성경번역에 큰 힘이 되었고, 미국 선교본부에 이수정의 선교사 요청을 전달하면서 한국에서의 교육사업과 의료선교의 절대적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한국선교의 문을 열었다. 매클레이는 미감리회의 첫 중국선교사로 1848년 임명되어 1872년까지 봉사하던 중, 해안에 조난되어 온 한국선원들을 본 뒤 한국선교의 꿈을 가지기 시작했고, 1872년 본국 총회에서 일본과 한국선교를 강조한 뒤1873년 일본 초대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개척자적 정신과 한국선교에의 열망이 김옥균과 이수정을 만나게 하였고,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1884년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편, 재일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 노력은 개화파들의 서구문명 수용 열의와 만나게 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과 재일 선교사들 간의 접촉은 1882년 9월 두번째로 일본에 온 김옥균이 유학생 4명의 영어교수를 맡아주기로 한 매클레이 부인을 찾아가 감사 인사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매클레이 부처는 그와 매우 가까운 친분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이것이 매클레이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옥균의 중개로 고종의 선교사업 윤허를 가능케 하는 밑바탕이 된다.

 

김옥균은 1883년 7월 제3차 도일시 자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몇몇 유학생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었으나, 3백만 엔의 차관도입이 민영익과 묄렌도르프 등의 보수파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하게 되면서 자신의 세력 강화를 목적으로 종래의 태도를 바꿔 친기독교적으로 되었다. 먼저 그는 야스가와 목사와 친한 사이가 되어 기독교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옥균은 결코 신자가 되지 않았으며, 선교사들의 기대를 박차버렸다. 그는 다만 일본의 개화를 가능케 하고 있는 기독교를 자신의 정치적 세력 확장과 교화의 수단, 개화의 방편으로만 이용하려고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 문화적 동기와 행동의 결과 매클레이의 방한과, 알렌과 민영익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한국에서 장로교, 감리교의 두 선교회가 선교사업을 개시할 수 있었다. 한편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와 서재필 등은 스크랜턴과 언더우드 등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고, 뒷날 한국기독교를 위해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 되었다.

 

2. 미국 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

가. 한미조약과 견미사절단

 

구미 여러 나라 중에서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여 가장 먼저 국교를 맺은 나라는 미국이다. 제너럴 셔어먼호 사건을 탐색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조치는1867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해 1월 21일 전함 와추세트호의 함장 슈펠이 제너럴 셔어먼호와 선원들에 대한 탐문을 위해 지푸를 출발하여 한국 해안지방에 이르러 한국인으로부터 제너럴 셔어먼호의 소각과 선원의 몰살소식을 갖고 돌아왔다. 미국측은 제너럴 셔어먼호 사건을 통하여 한국을 문책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수교와 통상을 체결하기 위한 기회를 잡고자 하였다.

 

 청나라 주재공사 로우와 미국동양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본국정부의 훈령에 따라 1871년 5월 5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나 일대 격전을 벌였다. 이것이 [신미양요]다. 미국은 이 침략전쟁에서 그들이 뜻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청의 알선과 권유를 받아 한국은 미국에 수교통상의 문호를 열게 되었다. 이것은 청나라가 1876년 이래 한국에 진출한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 해안에 설치한 장막에서 조선측 대관 신헌(申櫶), 부관(副官) 김홍집 미국측 전권 슈펠트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한미수호통상조약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조문이 없고 다만 '학자'를 이 나라에 파송하여 "언어와 문학과 예술을 연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미국은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을 역임한 푸트를 전권공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5월 13일 한국에 부임하여 5월 19일 비준서를 교환하고 초대 주한 미국공사로서 외교업무를 개시하게 되었다. 푸트 공사는 부임 한 후 국왕을 배알하면서 한국의 친선사절을 미국에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에 따라 한국에서는 특명전권공사에 민영익, 대리공사에 홍영식을 임명되고 이들을 보좌하는 수행원으로서 서광범, 유길준, 변 수, 고영철, 현광택, 최도민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의 평균연령은 25세를 넘지 않았으며, 뒷날 민영익을 제외한 이들의 대부분은 한국의 개화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견미사절단 일행은 1883년 7월 16일 제물포를 출발.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에 이르는 여정에서 사절단 일행은, 그 후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가우처 박사다. 그는 뒷날 볼티모어 여자대학을 창설한 사람으로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 미감리회의 목사였다. 사절단 일행을 만나자 그는 한국을 위해 기도하면서 깊은 흥미를 느꼈다. 그의 기도와 한국 탐문이 선교본부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을 일으키도록 이끌게 되었다. 한국의 사정을 알게 된 가우처는 한국선교의 염원으로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그는 1883년 11월 6일자로 와일리 감독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그 선교비의 일부로 2천불을 보냈다. 그 이듬해 1월 31일자로 그는 다시 일본선교사로 활약하고 있는 미감리회의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썼다. 내용은 매클레이가 직접 한국에 가서 선교사업 개시의 타당성 여부를 탐사해 보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국제간의 수교 통상의 방법을 통해 한국에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개신교 선교가 비교적 순조로이 진행된 데에는 이러한 상황의 전개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은 여러 나라의 복음기관들에서 시도하였지만, 선교사를 직접 한국에 파견한 최초의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등의 교파들이 한국에 선교사를 가장 먼저 상륙시켰던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그들의 해외선교열의 결과라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미국에서는 18세기 말에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고 거기에 따라 일련의 종교적 열정으로서 해외선교열이 고조되었다. 제2차 대각성운동은 여러 교단에서 선교회를 창립케 했고 기독교대학과 신학교를 설립하는 데에 큰 자극을 주었다. 1882년 5월 한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졌지만 미국 각 교단에서는 아직 한국에 대하여 선교적 관심을 깊이 가지지 않았다.

 

 그 이듬해 한국의 사절단이 미국에 파견되어 감리교 가우처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 무렵 한국선교를 위한 노력은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고 있었다. 한국에 가까운 중국과 일본에 파견된 미국계 선교사들이 본국 선교본부에 한국선교의 필요성과 방법을 강조하고 있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수정과 한국 청년들이 일본에서 복음에 접하여 이미 세례를 받았던 만큼,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통한 한국 개척선교가 전망이 밝다고 강조하였다. 교사와 의사를 통해 선교사업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은 중국의 지푸에서 선교하고 있던 리이드에 의해서도 긴급히 요청되고 있었다.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선교본부는 민첩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선교본부를 움직인 것은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한 교계언론이었다. 감리교회에서는 기관지인 [기독교 변증자](The Christian Advocate)와 해외선교부의 기관지인 [모든 나라를 위한 복음](The Gospel in All Lands)의 공헌이 컸다.

 

가우처 목사

 

이들은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선교사들의 호소문도 게재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선교를 위한 헌금이 답지하였다. 이럴 무렵 가우처의 요청에 의해 일본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목사는 1884년 6월 말부터 2주일」선교의 가능성 여부를 탐문하고자 한국을 다녀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1884년 말 감리교회 소속의 스크랜턴 박사와 아펜젤러 목사 및 메리 스크랜턴 부인이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일본 고베 외국인묘지에 있는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묘지에서 필자(왼편)

 

한편 미국의 장로교회에서는 이수정의 호소가 발표된 뒤에 한국선교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기상조를 강조하는 의견이 있었는가 하면, 당시 북장로교 선교부 임원의 한 사람이었던 엘린우드 같이 당장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엘린우드는 브룩클린 교회의 평신도로서 장로교선교본부의 위원으로 있던 맥월리엄즈를 움직여 1884년 2월 한국선교를 위하여 5천 달러를 기금으로 헌납토록 하였다. 이를 계기로 다른 사람들도 호응, 기부금이 증가하였다. 선교본부에서는 1884년 봄 의술이 뛰어난 젊은 헌신자 헤론을 한국최초의 선교사고 임명하였다. 뒤이어, 인도 선교를 목표로 신학을 마친 후 1년간 의학공부까지 한 언더우드는 1884년 7월 28일 엘린우드의 도움으로 한국최초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3. 매클레이와 알렌의 입국

 

그러나 한국 땅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중국선교를 목표로 1883년 선교지를 향해 떠났던 의사 알렌이었다. 그 역시 엘린우드의 결단에 의해 선교임지를 바꾸어 한국 땅에 오른 최초의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한국 사절단을 만난 가우처와 미감리회의 요청으로 매클레이는 당시 주일미국공사 빙햄과 주한미국공사 푸트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84년 6월 24일에서 7월 8일까지 2주일간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일본에서 이미 몇 차례 접촉한 바 있는 김옥균을 만나 한국 국왕으로부터 교육과 의료를 통한 선교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이를 통해 그 이듬해 아펜젤러가 교육사업을 통한 선교활동을 위하여, 스크랜턴이 의료 선교사업을 목표로 각각 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에 선교사를 가장 먼저 상륙시켜 터전을 마련한 것은 미국 북장로교였다. 그들은 이미 헤론과 언더우드를 선교사로 파견할 것을 결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첫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한 사람은 알렌이었다. 그는 의학공부를 마친 후 의료선교사를 지망하여 1883년에 미북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먼저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상해와 남경 등지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거의 1년간을 의미없이 보냈다.

 

상해의 유력한 인사들과 동료의사들은 그가 한국에 가서 활동하도록 권하였다. 그는 먼저 당시 한국세관에 근무하고 있는 하스에게 편지를 띄워 외국거류민들을 위한 서양의사의 필요성을 탐문하였다. 이와 함께 1884년 6월에는 본국 선교부에 편지를 써서 자신의 한국행 계획에 대한 승인여부를 전보로 회답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를 통해 알렌은 9월 14일에 상해에서 행선하여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22일에 서울에 들어와 한국에 상주하는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미국 공사 푸트는 선교사의 신분이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고 판단하여 알렌을 공사관의 공의(公醫)로 임명하고 그를 도와주었다. 알렌은 그 해 10월 중국에 두고 온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가정이 안정되자 그는 외국거류민을 위한 공의로서 바쁘게 봉사하는 한편 한국어의 학습에 노력하였다. 알렌의 가정은 날마다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일을 계속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상황에서 개척선교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종교적 삶이었을 것이다. 이 삶은 그의 어학선생의 한 사람이었던 노도사에게 영향을 주어 훗날 서울에서 가장 먼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알렌 선교사

 

 

그 후 그는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에서 민영익을 치료하게 되는 것을 계기로 왕실과 지배층 관료와 깊은 신뢰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건의로 서양식 병윈인 제중원(濟衆院)이 개설될 즈음에는 감리교, 장로교의 의료선교사는 물론 복음선교사도 입국하게 되었다.

 

4.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 정착

 

앞에서 살펴본 대로 매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허락받은 선교사업은 ‘학교와 병원’ 사업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선교부도 선교사를 선발함에 있어 두 가지 사업을 염두에 두고 선발했다. 그 결과 1884년 말에 이르러 미국 북장로회에서는 이미 의료선교사로 선발된 알렌과 교육선교사로 언더우드를, 미감리회에서는 의료선교사로 스크랜턴을, 교육선교사로 아펜젤러와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을 각각 선발하였다.

 

이들의 신분은 의사 혹은 교사지만 언더우드ㆍ스크랜턴ㆍ아펜젤러 모두가 안수 받은 목사들이어서 복음전도라는 본래의 사명도 수행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태평양을 건너 1885년 2월경에는 모두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4월 5일 오후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아펜젤러는 제물포에 도착 즉시 도착 상황을 본국에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소감을 피력했다. 그 날은 마침 부활주일이었다.

 

유관순 열사를 길러낸 메리 스크랜턴(뒷줄 중앙)의 기념 사진. 메리 여사는 우리 할아버지(오인선)에게 전도하여

1895년 아리실감리교회를 세울 때 아들 스크랜턴 선교사와 함께 참예하신 우리 가문의 <신앙의 은인>이시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鐵杖)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펜젤러 선교사

 

아직 갑신정변의 여파로 서울 분위기가 외국인에게 호의적이지 못하다며 입경을 만류하는 미국 대리공사 폴크의 말을 듣고 아펜젤러는 그 곳에 머물다가 일본에 돌아갔지만 언더우드는 입경을 감행하여 서울에 있던 알렌의 제중원 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885년 5월 1일에 스크랜턴이 혼자 입국하였고 6월에 스크랜턴 대부인과 아펜젤러 부부가 합류했으며 같은 때 북장로회의 새로운 의료선교사 헤론 부부가 도착했다. 이로써 미감리회와 북장로회는 미국 공사관 근처의 정동에 기지를 마련하고 선교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한편 영국성서공회도 비교적 일찍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1884년 중국에 있던 세 명의 주교들이 영국성공회 본부에 한국선교부 개설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1885년 말에는 중국 남부 복주에서 활약하던 영국성공회 선교회에서 중국인 두 명을 부산에 파송하였다. 1887년 한국 선교를 지원하려는 울프의 서한은 같은 영연방국가였던 호주에도 전해졌다. 그는 “한국에서의 ‘선교’의 필요성과 기회를 절감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호주에 영적으로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한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일할 사람을 보내달라”는 내용으로 절실한 서한을 냈다.

 

이 서한은 매카트니 목사가 발행하던 선교지에 실렸고 이 같은 울프의 요청에 응한 데이비스목사와 그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가 1889년 10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들은 호주의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신도협회에서 재정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서울을 출발했으나 오랫동안의 여행 등으로 병을 얻어 1890년 4월 데이비스 목사가 병사하는 바람에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동생도 그해 8월에 호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희생이 오히려 호주장로교회 전체에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1891년 10월 매케이ㆍ멘지스ㆍ포오셋ㆍ페리 등을 파송함으로 본격적인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1892년에 미국 남장로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1891년 10월 북장로회의 언더우드가 휴가차 미국에 돌아갔을 때 내슈빌에서 열렸던 미국 신학생 해외선교연맹집회에 참석해 강연한 적이 있었다. 그 강연회에는 당시 밴더빌트대학에 재학중이던 윤치호(尹致昊)도 강사로 참여하였다. 언더우드나 윤치호의 강연내용은 한국 선교에 관한 것이었고 이 강연을 들은 신학생들은 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갈 것을 자원했다. 여기에 레이놀즈의 친구였던 전킨이 합류하여 함께 모여 기도하며 준비하였다.

 

남장로회 본부에서는 처음에 재정문제로 난색을 표명하다가 언더우드와 그의 친구들이 3천 달러, 언더우드의 형이 2천 달러를 선교기금으로 내놓자 마침내 1892년 초에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원한 신학생 중에 테이트ㆍ레이놀즈ㆍ전킨ㆍ그리고 테이트의 여동생메리 테이트ㆍ데이비스ㆍ레이번ㆍ볼링 등이 첫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했다. 이로써 남장로회의 한국 선교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이미 선교에 착수한 북장로회 언더우드의 호소와 지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밴더빌트 대학생으로 한국 선교를 호소했던 윤치호에 의해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도 이루어졌다. 개화사상가였던 윤치호는 188 4년 7월 고종의 선교윤허가 내려질 때 통역으로 참석한 바 있었으면 그 해 말에 있었던 갑신정변 후에 중국 상해에 유학하였다가 그곳 남감리회 선교부가 운영하던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재학 중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장로

 

그는 1888년 미국에 유학,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수학하였는데 이 무렵 한국 선교를 요청하는 강연을 여러 곳에서 하였고 에모리대학 캔들러 총장에게 선교기금으로 2백 달러를 기탁하며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를 요청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갑오개혁으로 개화 정부가 들어선 1895년 2월에 귀국하였으며 그 후로도 계속 남감리회 관계자들에게 한국 선교를 요청하였다. 이에 1895년 10월 18일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 감독과 리드가 내한하여 선교 상황을 점검하고 돌아갔으며 이듬해 5월에 리드가 선교사로 다시 내한함으로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는 시작되었다.

 

캐나다장로회의 한국 선교는 1898년 시작되었다. 그러나 캐나다인이 개인자격으로 한국에 와서 선교한 것은 1888년부터였다. 즉 게일이 토론토 대학의 YMCA 후원으로 1888년 12월 16일에 내한하여 활동을 개시하였고 펜윅이 토론토의 몇몇 실업인들의 지원을 받아 1889년 말에 내한하였다. 또한 1890년 9월에는 토론토 의과대학YMCA의 후원을 받은 하디가 내한했고 1893년 7월, 역시 같은 단체의 지원을 받아 에비슨이 내한했다. 특히 에비슨이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언더우드의 요청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상 네 명은 토론토에 근거를 둔 선교사들이었다.

 

 

연동교회를 세운 게일 선교사

 

1893년 12월 18일에 매켄지가 내한했는데 그는 메리타임즈지역 장로교학교 선교협회의 파송을 받아 온 것이다. 매켄지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인 황해도 소래에 머물면서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을 겪었고 헌신적으로 교인을 돌보며 교회 건축에 매진하다가 1895년 6월 24일에 순교하였다. 그러나 매켄지의 죽음은 캐나다에 있는 교인들의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거기에 소래교회의 교인들로부터 매켄지의 후임으로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서한이 캐나다에 답지하여 특히 노바 스코시아지역 교회들이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캐나다장로회의 메리타임대회가 1897년 10월 7일 한국선교를 정식으로 결정하게 되었고 이러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도 메리타임대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서둘러 한국선교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그리어슨ㆍ맥레ㆍ푸트등 3인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9월 7일에 내한함으로 캐나다장로회의 한국선교가 본격화 된 것이다.

이로써 한국 개신교회의 큰 두 줄기, 장로교와 감리교의 한국선교가 이루어진 셈이다.

 

5. 여러 교파 교회의 정착

영국성공회도 일찍이 한국 선교에 착수했다. 또 다른 영국 계통의 교회로 구세군이 1908년부터 한국 선교에 착수하게 된다. 1907년, 오늘의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동방교회의 전통인 러시아정교회의 한국 진출은 1898년 시작되었다 1897년 6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한국 선교를 명령하였고 이에 암브로시우스 구드코 대신부, 니콜라이 알렉세예프 보제, 크라신 등으로 조직된 선교단이 1898년 러시아를 출발하였다.

 

영국에서 시작된 플리머스 형제단의 한국 선교는 1896년에 시작되었다. 일본인 전도자 노리마쓰가 개인자격으로 내한하여 조덕성ㆍ신태일 등 한국인들의 협력을 얻어 서울ㆍ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폈으며 1898년 일본에서 활약하던 브랜드가 내한해 서울 서소문에 선교부를 개설하고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했다. 이 플리머스 형제단은 ‘성서성당’ ‘기독신우회’ ‘그리스도인의 집회소’ 등의 명칭으로 불리며 교회조직을 부인하는 독특한 신앙공동체로 존속하였다.

 

이상에서 1910년 이전에 한국에 진출한 교회들의 선교 개척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다양한 교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각기 다른 문화적, 역사적 생성배경을 지닌 교회들이 그대로 한반도에 이식되는 형태로 개신교 선교가 추진되었다. 교리적인 배경의 차이로 인한 교파 교회의 도입은 불가피했다 할지라도 같은 교파 안에서도 본국에서의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분열되었던 교회가 분열된 실체 그대로 한국에 유입되기도 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장로교와 감리교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그러한 상태로 한국에 유입되어 각기 다른 선교부를 배경으로 하여 한국 선교를 추진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이처럼 초기부터 강력한 교파적 교회로 정착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한국에 나온 선교사들이 본국의 모교회를 변질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고 선교지에 이식시키려는 강한 의욕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교파들이 분열이 강했던 미국에서 유입된 것이기에 그만큼 교파적 특징이 강해진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교파적 특색을 지닌채 정착됨으로 상호 경쟁심을 유발시켜 교회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교회들 간의 불필요한 마찰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부정적인 효과를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둘째, 초기 기독교 선교의 전개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도입과 수용의 자세를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가장 큰 교파인 장로교와 감리교는 물론, 성결교ㆍ구세군ㆍ안식교 등도 한국인의 구도행위와 선교사 파송 요청에 의해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의 주체적인 복음 수용의 자세를 다시 확인시켜 주는 예가 된다. 외국 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도 거의가 한국인의 요청에 의한 것들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흔히 제3세계국가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경제ㆍ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 침략적 세력 확장의 선봉대로 선교사를 먼저 파송한 것과는 다른 형태로 한국 선교가 추진되었다는 점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 특히 개신교의 선교는 서구 제국주의 기독교 국가들의 세력 확장책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욕구를 지닌 한국인 구도자들의 적극적인 기독교 수용 행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후에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자국의 경제적ㆍ정치적 이익을 위해 활약한 몇 가지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나 이 문제는 전반적인 기독교 선교 개척의 동기 및 선교실태와 결부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6. 초기의 선교활동(1)

가. 의료(醫療)와 교육(敎育)선교

 

1884년 7월에 매클레이에게 허락한 고종의 선교 윤허는 ‘학교와 병원’사업에 국한된 것이었음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복음 전도와 교회 설립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선교 활동은 조선 정부의 태도와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적 분위기 때문에 아직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개신교 초기선교는 직접적인 복음 전도보다는 학교와 병원 사업을 통한 간접선교 방식을 취해야 했다. 그리고 이 같은 간접 선교방식은 척사위정자들이 기독교를 두고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 ‘외세 대변자’라고 비난하는 일종의 편견을 불식시키는 데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의료선교였다. 1884년 10월에 미국 공사관 소속의사 자격으로 들어온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함으로 고종과 민비 및 정부측 인사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다가 처형당한 홍영식의 집(재동에 소재)을 하사받아 1885년 4월에 광혜원(廣惠院-후에 제중원)이란 병원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서양의 근대식 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의료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사업을 위해서도 훌륭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국왕에 의해 인정받은 이 병원을 통해 다른 선교사들도 훨씬 쉽게 선교 활동에 착수할 수 있었다. 1885년 4월에 들어온 언더우드가 교사 자격으로 이곳에 머물면서 우리말을 익히기 시작했고 감리교의 스크랜턴도 1885년 6월까지는 이곳에서 의사로 활약하였다.

 

 

 

1885년 여름에 들어온 헤론이나 1886년 여자 의사로는 처음으로 들어온 엘러즈도 이곳에서 활동의 근거를 얻었다. 제중원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장로교 선교부는 1887년에 이 병원을 남대문 구리개로 옮겼고 알렌은 선교사직을 사임, 주미 한국공사관 직원이 되었고 대신 헤론이 맡아 보았다. 처음에 조선정부의 왕립병원으로 출발한 이 병원은 1894년 에비슨에 의해 운영되다가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의 건축 기금으로 남대문 밖에 새 건물을 마련하게 되어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885년 9월 10일에 정동에서 감리교의 스크랜턴이 민간 의료기관으로 진료소를 시작하였다. 스크랜턴은 새 건물을 마련하고 1886년 6월 15일에 정식 병원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시병원(施病院)이다. 스크랜턴은 정부가 운영하던 제중원과는 달리 민간 병원으로 육성하려고 처음부터 노력하였다. 시병원의 환자 중에는 풍토 열병에 걸려 서대문 성벽에 버려진 여인과 그의 네 살배기 딸도 있었다. 스크랜턴은 이 같은 버림받은 환자들을 진료하는 데 정성을 다했다.

 

스크랜턴은 보다 적극적으로 민중 계층과 접촉하기 위해 궁궐과 외국 공사관이 즐비한 정동을 떠나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의 표현대로 상동은 ‘민중이 있는 곳’이었다. 병원은 선교사들이 민중은 만날 수 있는 좋은 중개소였다.

1887년 10월에 내한한 하워드에 의해 여성 전용병원도 시작되었다.

 

처음엔 시병원 안에서 시작했다가 1888년 4월부터 정동에 따로 건물을 마련하고 병원을 시작했는데 보구녀관(保救女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의 봉건주의 사회체제 안에서 소외당했던 또 다른 민중 계층이었던 여성들이 의료의 혜택을 받게 되었고 나아가 간호. 의료교육까지 실시되어 박에스더(혹은 김에스더)가 미국 유학까지 하고 1900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의학박사가 되어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 외에도 서울에 동대문ㆍ애오개ㆍ모화관 등지에 진료소가 개설되었고 성공회에서 운영하던 낙동병원도 있었으며 지방에도 선교사들에 의해 병원과 진료소들이 개설되어 복음 전파의 유용한 도구 역할을 하였다. 병원마다 한국인 전도인들이 배속되어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특히 지방의 병원이나 진료소를 찾는 한국인들은 거의가 돈 없고 소외당한 민중 계층이었다. 이들에게 거의 무료로 진료해 줌으로 민중 계층이 기독교를 접하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초기 의료선교는 종래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정부와 민중의 편견에 가까운 인식을 교정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의료선교가 복음 전도에 대한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전개되었기에 더욱 그 의미는 크다 하겠다. 목사와 의사였던 언더우드 부부의 1890년 활동보고가 그 점을 분명히 밝혀준다.

 

“언더우드 부부가 올해 초 한국 내륙지방을 여행하였다. (언더우드 부인의 수기를 보면 이것은 신혼여행을 빙자한 <선교여행>이었다.)  그것을 통해 민중들 편에서는 선교사 활동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개방적인 조짐들이 발견되었으나 반면에 정부 관리들로부터는 아직은 복음 전도를 허용치 않겠노라는 입장을 수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 있어 언더우드 목사는 직접적이고 개방적 선교사업을 전개함에 아직은 자유롭지 못함을 느끼고 있으나 언더우드 부인만큼은 숙련된 의사로 환자들을 치료할 기회를 수없이 가졌고 그것을 통해 의혹을 씻어 내고 민중의 신뢰를 획득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 부인과 언더우드 선교사

 

 

나. 교육선교 활동

 

학교를 통한 교육선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85년 4월에 내한한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는 목사였지만 한국 정부에 대한 공식입장은 교사였다. 둘은 제중원과 정동 진료소 교사로 있으면서 이미 1885년 말에 2,3명씩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모두가 영어를 배우러 찾아 온 사람들이었다. 본격적인 학교 설립은 아펜젤러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아펜젤러는 이미 18 85년 11월에 미국 공사 폴크를 통해 고종으로부터 학교 설립 허가와 교명을 얻어 놓았다. 그리고 1886년 6월 8일 2명의 학생으로 정식 학교를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근대교육의 효시인 배재(培材=인재를 키운다는 뜻)학당의 시작이다. 이 학교는 문을 열자마다 학생들이 몰려들어 불과 5개월 만에 학생 수가 32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학생들이 늘어난 것은 종교적 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는 현실적 목적이었다. (이승만 박사도 배재출신이다.)

 

“한국인들 사이에 영어를 배우려는 열정이 강합니다. 새로운 언어에 대한 부족한 지식이 출세의 걸림돌이 되어 왔으며 지금도 그런 형편입니다. 한국인에게 ‘왜 영어를 배우려 하시오?’ 하고 물으면 거의 공통된 대답이 ‘벼슬을 얻기 위해서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욕구를 갖고 학교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성경을 읽거나 선교사들의 예배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1887년 7월 24일에 세례 받은 박중상과 같은 해 10월 2일에 세례 받은 한용경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고아원 형태로 교육을 시작한 게 경신학교다.

 

제중원에서 역시 영어를 배우러 찾아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던 언더우드는 1886년 1월부터 고아원 설립에 대한 구상을 가졌는데 고아나 극빈자 아동들을 수용해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술학교 형태를 구상했다. 정동에 한옥을 구입해 수리하고 학생 1명으로 정식 문을 연 것이 1886년 5월 11일이었다. 이것이 소위 ‘언더우드학당’ 이라고도 불리는 고아원 학교였다. 이 학교는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에 경신학당으로 정착하여 오늘의 경신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이 사진은 노해리 선교사가 쓴 <북장로교선교역사>에서 옮겨 실린 것이다.

 

거의 같은 무렵에 여자 학교도 시작되었다. 즉 1886년 5월 31일에 스크랜턴 대부인에 의해 시작된 미감리회의 이화여학당과 1887년 6월 엘러즈에 의해 시작된 북장로회의 정동여학당이 그것이다. 배재학당처럼 출세지향적인 남성들에 의해 초창기부터 활기차게 시작했던 남자 학교와는 달리 여자 학교는 남존여비 사상 때문에 초창기에는 학생들은 고아이거나 과부, 첩과 같은 소외계층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박에스더를 비롯하여 하란사, 이경숙, 여메례 등 초기 한국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은 모두 이 같은 소외계층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전통 봉건주의 사회체제에서는 무시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기독교 학교를 통해 자기 개발의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도 선교부가, 혹은 지역 교인들과 합동으로 설립한 기독교 학교들이 계속 늘어났다.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는 초기 교과목에서 한문 ∙ 역사ㆍ지리 수학 과학 등 일반 과목에 많은 비중을 두었고 예외 없이 성경과목을 포함시켜 기독교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복음 전도의 도구로서는 의료선교보다 교육선교가 보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가르쳤던 샤록스가 1901년에 보고한 내용이다.

 

“학교 사업이라든가 학생들의 자질이나 성실성을 종합해 볼 때 확신하게 되는 바는 점증하는 학교의 효율성과 가치성이 교회나 선교회에만 보람을 줄 뿐 아니라 한국을 복음 화시키는 데에 생생하고도 가능성 있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학교는 “한국을 복음 화시키는” 도구였다. 이 점에서 선교사들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러나 학교를 찾는 학생들은 이 점이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갈등은 기독교가 민족의 종교가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마지막 관문이기도 했다. 식자층의 독교관은 아직도 부정적이었다. 민중계층이야 병원이나 학교를 통한 선교 활동을 은혜의 행위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그만큼 기독교에 대해 개방적인 분위기였으나 식자계층과 지배계층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