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기도로 세운 우리 대한민국

댓글 4

속회 참고자료

2012. 6. 4.

 

▶속회참고자료/기도로 세운 우리 대한민국(2012.6.1)

 

기도로 세운

우리 대한민국

 

 

오늘 속회 주제는「기도로 세운 일꾼」이다. 주님의 사역을 돕고 이어나가기 위해 주님은 열 두 제자를 세우셨는데 기도로 세우셨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북한 김일성은 무신론 공산주의자가 되어 공산국가를 세우고, 우리나라는 배재학교 출신 감리교 장로인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면서 제헌국회 개원 때 감리교 목사의 기도로 이 나라를 세웠고, 감리교 장로 윤치호가 작사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가사가 있는 애국가를 국가 대용으로 삼았다. 이 때 된 일들을 여러 자료를 모아 「기도로 세운 대한민국」이란 제목으로 엮었다. (오소운).

 

1. 제헌국회 기도로 시작했다.

1948년 5월 31일 오후 2시 제헌국회 개원식장(옛 중앙청 회의실).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5·10 총선거를 통해 선출된 제헌국회 의원 198명(제주 2개 선거구는 4·3사건으로 선거 연기)은 결연한 모습으로 식의 거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가 단상에 올라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제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입니다. 먼저 이윤영씨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공식 회의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감리교 목사 출신 이 의원에게 부탁한 것이다. 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구보다 놀란 것은 이 의원이었다. 제헌국회 의원 중에는 이 의원을 비롯해 오택관ㆍ이남규ㆍ오석주 등 4명의 목사가 있었다. 평신도로서 이승만ㆍ김동원ㆍ김상돈ㆍ강영옥ㆍ 윤치영ㆍ황두연ㆍ서용길ㆍ윤재근ㆍ홍성하ㆍ정 준 등이 있었다.

 

기독교 사학자 김수진 목사는

“전체 의원 198명 중 크리스천 의원이 50여명에 달했다”며 “그중 30명은 신우회(信友會)까지 조직, 교섭단체를 구성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의원들이 모두 일어선 가운데 이 의원은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국회 속기록에 기도 전문이 실려 있다.

 

가. 이윤영 의원의 개원식 기도 전문

우리에게 독립을 주신 하나님!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攝理)하시는 하나님,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복을 내리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셨으며 세계인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써 역사적인 환희의 날이 우리에게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드러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직까지 남북이 둘로 갈린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씻어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민생의 도탄이 오래 갈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만 확대될 것이오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속히 이 땅에 임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독립을 주신 하나님, 이제는 남북의 통일을 주시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전 준비 없이 짧지만 정말 미리 준비한 것 같이 간결한 기도, 남북대치를 내다보고 사탄의 역사를 막아달라고까지 한 이 기도는 <예언적인 기도>라 할 수 있다.

 

나. 대한민국의 첫 헌법은 이 기도의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의원은 헌법기초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참여했으며 초대 내각 총리로 물망에도 올랐다. 수많은 기독교 인사들은 불안한 광복 정국을 봉합하는 촉매제가 됐다. 원래 주일(1948년 5월 9일)에 치러지기로 했던 총선일도 기독교계의 반대로 변경됐다. 비록 기독교 국가는 아니지만 현재 국회조찬기도회 (사)국가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기도하는 국회ㆍ국가라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주게 된 것도 제헌국회 첫날의 기도 정신이 계승됐기 때문이다.

 

2. 경찰서 백 개보다 교회 하나를

광복을 맞이하며 김구 선생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귀국을 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 사정은 너무나 좋지 않아, 산업시설이나 교육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있지 않았고 또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치안시설마저 부족하여 불안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의 협력자들은 먼저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경찰서를 추가로 건립해야 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김구 선생은 그러한 건의에 이렇게 대답했다.

"경찰서 백 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훨씬 낫네!"

 

김구 선생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누가 보지 않아도, 시키지 않아도 법을 지킬 것이며 이웃을 사랑할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점차 퍼져가 그 지역을 범죄 지역이 아닌 사랑이 풍성한 지역으로 변화 시킬 것을 믿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윤영 목사

 

 

1945년 망명지에서 귀국한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

 

 

오늘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는 건물 교회당이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봐야 할 때다. 교회는 세상을 염려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기에 우리가 진리의 영 가운데 성결하게 나아갈 때 우리 대한민국이 희망과 행복을 경험할 것이다. 국민일보에서

 

기독교 사학자 조병호 박사는

“국회의원은 공사 및 소유 관계가 분명하고 연고에 의존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며 시종일관하는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울 왕과의 대립 속에서 공의와 정의를 이루는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비전을 실천했던 다윗 왕과 같은 리더십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57년 전 이 의원의 기도가 제17대 국회의원들의 마음속에서 공명을 이루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이어지기를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바라고 있다.

 

가. 이윤영 의원은 누구인가?

이윤영(1880∼1975) 의원은 평양 숭실학교와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5년 평양지방 감리사직을 맡았던 그는 왜정 말기 한국과 일본기독교단의 기독교 통합을 반대했다. 광복 후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리교회를 재건, 서부연회를 조직했다. 특히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조직했으나 북한 정권의 탄압 때문에 월남했다. 1947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재건위원장을 맡은 그는 얼마 뒤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한민당의 반대로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지 못했지만 훗날 무임소장관과 사회부장관에 기용됐다. 1952년 제2대 정ㆍ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이후 신흥대학(현 경희대) 학장, 광성고등학교 평생이사 등을 역임했다. (2005. 5. 15. 국민일보 / 함태경 기자)

 

3. 제헌국회와 이승만 박사

허명섭 / 서울신학대학교 겸임교수 글:

 

올해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이 열렸다. 이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 라는 취임사를 낭독했다. 이에 앞서 5월 31일 열렸던 역사적인 제헌국회에서도 이승만은 강단에 등단한 후 공개적으로 “의회를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드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승만의 그런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어색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들 중의 하나는 당시 기독교의 영향력이 매우 지대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이는 국무총리를 제외한 초대 내각의 21개 부서장 가운데 개신교 신자가 9명이었고, 그 중의 2명은 목사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 개신교인이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5% 미만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놀라운 비율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 끼친 한국교회의 역할이 그만큼 지대했다는 것이다.

 

가. 해방 정국에서의 기독교

해방 후 한국사회의 급선무는 일제 잔재의 청산과 새로운 건국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미ㆍ소군정에 의한 분할점령, 그리고 이어지는 신탁통치논쟁 등을 거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국내외의 정세는 거센 급류 속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했고, 새로운 시대를 맞아 개인과 각종 단체들의 욕구는 거침없이 분출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통일된 조국 건설에 대한 기대와 염원을 강력하게 표출하였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생각이 자리하였다. 하나는 기독교가 이미 구미제국에서 오랜 역사에 걸쳐 실험 성공했다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건국은 도덕심의 함양 없이는 불가능한데, 그것을 가장 잘 감당할 수 있는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이다. 게다가 불교나 유교는 이미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실험되었는데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가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잘 대변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반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는 해방 후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를 견인했던 매우 중요한 배경의 하나였다.

 

이런 생각들은 한국교회의 직접적인 현실정치 참여로 구체화되었다. 더구나 해방 공간의 한반도는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에 더없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친 기독교적인 미군정의 수립, 한국교회의 축적된 인적자원, 해방 후 입국한 민족 지도자들의 기독교적 배경, 한층 높아진 기독교의 사회적 위상, 공산주의의 확장에 따른 위기의식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교회가 이때만큼 많은 관심을 갖고 현실 정치에 직접 뛰어들었던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우익의 3영수’로 불리던 이승만ㆍ김구ㆍ김규식의 기독교 이념을 토대로 한 건국사상의 표출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1945년 11월 28일 조선기독교남부대회의 주최로 정동예배당에서 열렸던 ‘임시정부요인 환영대회’는 그런 단적인 예에 속한다.

 

이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이제 우리는 신국가 건설을 할 터인데 기초 없는 집을 세우지 말자. 곧 만세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했다. 김구 또한 새 나라의 건설은 건국(建國)과 건교(建敎)의 2대 방책에 있다고 강조했다. 즉 건국의 기초는 기독교 신앙을 확립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김구의 이런 생각은 “경찰서 백을 세우지 말고 교회 하나를 세우라”는 말에도 잘 드러난다. 김규식 목사 또한 거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새 나라의 주역은 교회가 되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자신을 이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연설이 끝날 때마다 정동예배당의 안팎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 공간의 한반도에는 다수의 기독교 정당과 기독교 색채가 강한 정당들이 결성되었다. 이남지역의 조선민주당(정인과), 기독교동지회(양주삼), 사회민주당(박용희) 등과 이북지역의 기독교사회민주당(한경직), 기독교자유당(김화식) 등은 그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들 중 이남 지역의 기독교 정당들은 얼마 지나지 못하여 우파 정당들에 흡수되거나 통합 재편되었다. 그리고 이북지역의 기독교 정당들은 점차 가시화되고 있던 공산당 정권의 강압에 의해 해체되었고, 그 구성원들은 대다수가 월남의 길을 택하였다.

 

이들 정당 외에도 수많은 기독교 관련 단체들이 결성되었으며, 그들 또한 해방 공간의 새로운 건국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남지역의 조선기독교남부대회, 기독신민회,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 그리스도교도연맹, 기독교민주동맹, 기독교사회주의연맹 등과 이북지역의 이북5도연합노회, 북조선기독교연맹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극히 소수를 제외한 이들 기독교 단체들은 그 노선과 실천 방안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새로운 건국은 기독교 이념에 기초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을 함께 했다.

 

나. 공산당의 모진 역풍(逆風)

하지만 한국교회의 이런 건국 비전은 이북에 공산정권의 수립이 가시화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소련군의 주둔 초기에 이미 이북에는 분단 지향적이고 독자적인 통치기구가 구성되었으며, 그것은 우리민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분단의 길을 의미했다.

 

위에 잠시 언급했듯이 그로 인해 이북지역의 기독교 정당들과 단체들은 공산당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핍박 앞에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즉 해방의 감격ㆍ기쁨ㆍ희망도 잠시뿐, 이북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일제 치하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어둠과 굴욕을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이북지역 기독교인들의 월남사태는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들은 이후 한국교회의 강력한 보수 반공화로 이어졌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통일된 건국의 꿈은 백일몽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민족의 발전과 안녕보다도 철저하게 당의 노선을 앞세우는 공산당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동안 한국사회가 몸부림치며 쌓아올리던 꿈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게 된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통일우선주의의 외침과 그런 시도는 민족의 여러 지도자들에 의해 꾸준히 표출되었다.

 

이런 통일우선주의의 소망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남지역 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고, 민주국가를 표방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 미군정(美軍政)과의 연결 고리

한국교회의 건국 비전, 즉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통일 조국의 건설 또한 이제 물 건너가 버린 일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한국교회의 대다수가 남한 만의 단정(單政)수립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즉 한국교회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민족통일 그 자체보다 먼저 종교의 자유가 확보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건설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사실 반공주의는 한국교회와 미군정의 강력한 연결고리였다.

 

미군정은 초기부터 반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소(對蘇)봉쇄정책을 시행하며 공산주의 세력들을 척결하고자 했다. 공산주의의 팽창억제는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의 기본사명이자 기본전략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는 새로운 국가ㆍ새로운 사회ㆍ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좌파성향으로 경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이남에까지 그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 이남지역에 견고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이미 막대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던 좌파세력을 제거해야 하는 이중적 과제에 직면하게 됐다.

 

물론 미국 정부는 소련의 남하와 영향력 확대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군사 및 외교 전략으로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남에 둥지를 틀고 있던 공산세력은 직접 군사력을 사용해 제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공산세력과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육성이 절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한국의 보수 우파세력을 주목했다. 정치적으로는 한국민주당, 종교적으로는 기독교가 미군정의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물론 두 세력은 중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보수와 우익노선을 표방했을 뿐 아니라 상당수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미국유학 경험으로 서양문물에 익숙해 있었으며,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이남의 어떤 세력들보다도 반공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점들이 미군정과 두 세력을 밀착시키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즉 그들은 반공이라는 틀 속에서 서로가 연합할 수 있는 합일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라. 반공과 건국이념의 합일(合一)

이런 맥락에서 최근까지도 뜨거운 감자인 친일 및 부일 문제는 논의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친일 및 부일의 여부보다는 공산주의 및 좌익성향이 더욱 문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미군정에 참여하게 되는 우파 인사들의 친일 및 배일 여부는 간과되거나 묵과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미군정의 두 세력에 대한 지원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두 세력은 미군정의 대한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 따라서 두 세력은 이후 정치ㆍ경제ㆍ교육ㆍ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편, 한국교회와 이승만을 끈끈하게 결합시켜 준 것도 바로 반공이었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 귀국한 ‘우익의 3영수’에 대해 비교적 고른 관심과 기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점차 한국교회 다수가 이승만을 집중적으로 지지하는 국면이 되었다.

 

그것은 남북협상과 통일우선주의를 견지하던 김구와 김규식에 대한 이탈을 의미했다. 이북 공산당의 실체를 생생히 경험했던 월남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두 김씨의 그런 행동과 외침은 너무 낭만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런 반공주의 때문에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시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기독교의 존립 문제가 걸린,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반공주의가 이후 정권유지 차원에서 경도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출발하였다는 사실과 그 방편으로 채택 되었던 반공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쉽게 권위주의로 변질 타락하였다고 하더라도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후 한국의 정치와 종교 그리고 한국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즉 작금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착시키는 데에 그것들이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4. ‘예수사랑’ ‘나라사랑’(김진홍목사 설교)

7일(수) 오후 8시 30분 뉴욕효신장로교회(담임 방지각 목사)에서는 한국에서 뉴라이트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김진홍목사(뉴라이트 전국연합 상임의장, 두레교회 담임) 초청 수요예배가 있었다. 김진홍목사는 이 날 시편 33편 10-12절을 본문으로 “예수사랑, 나라사랑”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뉴라이트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했다.

 

김진홍 목사

 

 

김 목사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한국이 몇 년 사이 많이 좌경화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뉴라이트 운동이 시작되었다. 좌파들이 대학가를 석권해서 그 세력을 키웠다. 뉴라이트 운동을 대학가에서부터 확산시킬 것이다. 내년까지 100개의 대학이 목표다. 한국내 문제나 북한의 문제나 다 <영적인 문제>다. 그래서 먼저는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한국에서 제 2의 청교도 운동이 일어나길 바란다.

 

청교도운동에는 두 가지 핵심이 있다. 먼저는 개인의 경건이요 그 다음은 역사와 국가에 대한 책임이다. 그래서 예수사랑, 겨레 사랑은 항상 함께 나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전하면서 뉴라이트 운동에 많은 기도와 참여를 부탁했다.

 

“얼마 전 강연회를 마쳤는데 한 불교신도가 와서 자신은 불교를 믿는데 기독교인이 (나라사랑운동에) 앞장서 주기를 부탁하더라.

 

가. 좌파들과 맥아더 장군 동상

몇 년 사이 좌파가 한국사회에 뿌리를 많이 내렸다. 얼마 전 5천명이 모여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넘어뜨리려는 운동이 있었다. 인천 시민들이 세운 동상인데….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아더 장군이 개인으로 싸운 것도 아니고 지휘관으로 와서 남한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아주고 국가의 정체성을 지켜준 것인데 어떻게 그 동상을 무너뜨릴 생각을 했을까.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려는 종북 좌파들의 행패

 

이것은 정부를 부정하는 그릇된 생각이다. 그래서 교인중심으로 1만 5천명 정도 모아서 그 운동을 막았다. 그랬더니 좌파에서 동상위치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왜 옮기나? 그 자리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곳이라서 의미를 두고 세운 것인데….

 

 

 

그거 막느라 북새통을 이루었다. 좌파 중 한 청년은 죽창으로 경찰 눈을 실명케 하기도 했다. 그런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자 불교인이 기독교인인 나에게 앞장서달라고 하는 것 같다.

 

나. 전교조의 좌익화

초중교 교사가 48만 명인데 그 중 전교조가 9만 명이다. 그 분들이 20년 전부터 처음에는 바른 교육으로 시작했는데 거기에 좌파 운동가들이 들어가서 사범대생들을 학생시절부터 교육시켜서 전교조가 좌익단체가 돼버렸다.

 

금년 5월 서울의 모 중학교 1학년생을 좌파교사가 교육해서 작문을 썼는데 제목이 “폭탄을 들고 미군에게 돌진하리라”였다. 그것을 보고 잘 썼다고 박수를 치고….

 

다. 좌경화 막기 위한 뉴라이트 운동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사회가 너무 왼쪽으로 치우쳤다. 그래서 뉴라이트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시민운동으로 작년(2008년 필자 주) 11월 7일 시작했다.

 

성직자로서 가능한 한 이런 일에는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정치할 것도 아니고 국회의원 나갈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 하나.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백범 김구 선생을 생각하면 나라 사랑하는 일을 우리가 맡아야 한다. 그래서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해야 한다. 좌경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라. 북한 문제는 영적인 문제

내가 볼 때 북한 문제나 한국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다. 북한정부는 영적인 면이 있다. 영은 영인데 악한 영이다. 그래서 북한 문제나 한국 문제는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영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왜 영적이냐?

 

나는 북한을 여러 번 다녀왔다. 고아원도 하고 농장도 운영한다. 10년 전부터 열심히 북한 돕기 운동을 해왔다. 3번째 북한을 방문해서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7시쯤 TV를 봤다. 김정일 생일 사흘 후였는데 생일축하 잔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TV에서 북한을 대표하는 시인이 한 명 나왔다. 나는 그 시를 듣고 크게 충격 받았다.

 

“석가모니께서는 인류구원을 이루기 위해 히말라야 산맥에서 7년을 고행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예수도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인류구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성취하고 계십니다….”

 

북한은 TV채널이 고정되어 있어서 그 시간에 모든 국민이 다 그 방송을 봐야 한다.

 

마. 하나님 자리에 김일성, 김정일을

또한, 북한 호텔에는 선전용으로 꼭 서점이 있다. 나는 갈 때 마다 책을 한 보따리씩 사온다. 그들은 사도신경을 이렇게 고쳐서 사용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김일성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김정일 장군을 믿사오니 이는 태어날 때부터 공산당으로 태어나사…. 아멘.”

 

어떻게 한 나라가 이렇게 갈 수 있을까. 정말 영적인 문제다. 북한에서 가는 데마다 보는 구호가 있다. “김일성 어버이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 성경식으로 말하면 임마누엘이다. 그들에게는 <김마누엘>이다.

 

바. 북한에서 예수 믿으면 공개처형

2003년 1월 26일에 함경도에서 42살 먹은 여자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공개처형 당했다. 처형장에는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이게 했다. 그 여인은 “여러분 예수 믿으시라요. 우리 민족은 예수 믿어야 희망….” 소리치다 총살되었다.

 

그 때 누군가 동영상으로 그 장면을 잡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 세상천지 어디에 예수 믿는다고 그렇게 공개처형당해야 하는가.

 

사. “교육은 북한이 이상적”(?)

전교조 좌익단체에서 지난 해 200명이 단체로 북한을 방문했었다.

그들이 방문 후 공항에서 한다는 첫마디가

“교육은 북한이 이상적이다” 라고 했단다. 그래서 내가 나중에 만나서 그랬다. “그러면 당신은 북한에 가서 교사 하시오. 이사비가 모자라면 내가 보조해드리리다.”

 

아. 80년대 민주화 운동부터 반미, 친북 성향으로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빗나갔나? 나도 7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때 경험이 지금 뉴라이트 운동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 때 제일 중시한 것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본>이었다. 경제성장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운동했던 사람들이 참 순수하고 단순했다.

 

그러다 80년 5월 17, 18일에 <광주사태>가 일어났다. 우리나라 역사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다. 광주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버린 것이다. 이게 독이 되었다. 이 후 군부저항 청년운동이 반미 추세로 가게 되고 이게 갑자기 친북성향으로 비약 돼버렸다.

<주>: 탈북 동포들의 증언에 의하면 <광주사태>는 김정일이 보낸 특수부대에 의해 살인과 파괴가 자행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70년대 운동했던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찾아가서 이야기했다. 웬 친북이냐? 김일성 주체사상이 무슨 해답인 된단 말이냐? 그 때 후배들은 “선배님들은 선배님들도 모르는 사이 벌써 수구세력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라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자. 대학가를 석권한 주사파들

주사파에는 NL(Nation Liberation)과 PD(People Democracy)가 있다. 이들이 20년 간 대학가를 석권했다. 그냥 놔두고 방치한 사이에 그들은 20년간 대학가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 핵심인물들은 북한 노동당에 가입했다.

 

그들은 북한 인공기를 걸어놓고 사진도 찌고 자기들끼리 만나면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식으로 자기정체성을 확인했다. 이런 세력이 17대 국회 선거에서 17명이 국회의원으로 공천되었다. 그 중 12명이 당선되었다.

 

대학생 시절 <위수김동, 친지김동> 했던 이들이 그게 바뀌어져서 국회의원 하는 것인가? 그것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가 시비가 되었을 때 여당의 한 중진 좌파 국회의원은 그것을 애국운동이라고 공식석상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여당이 그렇게 말하면 우리의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 아닌가.

 

차. 역사적으로 본 우리 민족의 “하나님 나라 실현” 의지

제헌의회가 열렸을 때 첫 행사가 임시의장 뽑는 것이다. 그 때 이승만 박사가 임시의장이 되고 첫 마디가 ‘여러분 신생독립국가 대한민국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겠습니다. 이윤영 목사가 올라와서 감사기도 드리겠습니다.”였다. 그 때 불교무교 등 여러 가지 종교가 다양하게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종교에 상관없이 다 기도하자”고 했을 때 그들은 다 일어나 기도했다.

 

대한민국 첫 회의록이 기도문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참 의미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국회에 가서 그것을 카피해서 읽었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세워진 대한민국인데 주체사상으로 흔들리는 것은 볼 수 없다.

 

3.1만세운동 이후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가 세워지게 됐다. 김구선생의 임시정부 <선서문>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동포 국민이여 분기하라. 우리의 흘리는 일적(一滴)의 피가 자손 만대의 자유와 복락에 치(値)하고 신국(神國ㆍ하나님 나라) 건설의 기초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인도는 마침내 일본의 야만을 교화하고 우리의 정의는 마침내 일본의 폭력에 승리 할 것이다.

동포여! 최후의 1인까지 싸우라!

 

1945년 상해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귀국한 김구 선생이 연설문을 보면

‘이제 세워질 신생독립국가 대한민국은 기독교 진리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라는 부분이 있다. 정파에 상관없이 우리 선배들의 역사가 이렇다. 예수사랑ㆍ나라사랑ㆍ하나님사랑ㆍ동포사랑ㆍ이웃사랑은 이렇게 한 인격 속에 어우러져 있다.

 

그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한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그 당시 기독교 비율이 전 국민의 4%가 안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민족지도자들은 50%정도가 기독교였다. 그 때 선배들은 일제치하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한반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당시 민족 지도자들이 다 개신교도였다. 서재필ㆍ도산 안창호ㆍ이승만ㆍ김구ㆍ조만식ㆍ남강 이승훈ㆍ이상재ㆍ남궁억 등등.

 

카. 주체사상도 여호와가 말씀하시면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편 33: 10-12)

 

이 구절을 북한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북한에서 씨감자를 재배한다. 2월 달에 가서 심고 7월 말에 감자를 캔다. 감자 캐다 한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때 다행히도 감시하는 사람이 어디 갔었다.

 

“남조선엔 거지가 많디요?", “아니라요. 부자가 더 많디요.” “미제국주의가 다 가져간다고 하던디….” “자동차도 만들어 수출합니다.” “자동차도 만들어요? 내가 듣는 것하고 많이 다르네요.”…

 

북한에 처음 가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두번째 가면 눈짓으로 인사만 한다. 세번째 가면 남자는 형님, 여자는 오라버니라고 하면서 금세 친해진다. 몇 십년간의 주체사상이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여호화께서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이 말씀이 정말 실감난다.

 

문제는 남쪽에 살면서 북쪽 체제가 좋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뉴라이트 운동이 왜 필요하나? 1년 전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질문이 ‘북한이 적이냐 미국이 적이냐’였다. 미국이 적이라고 대답한 이가 58%, 북한이 적이라고 대답한 이가 33%였다. 전쟁 일어나면 북한 편들겠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버렸다. 그래서 시민운동으로 시작해서 바른 정신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터가 대학가이다. 지난 25년간 좌파ㆍ주체사상가들이 대학가를 잡았기 때문에 대학교에서부터 운동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5월에 ‘민족생존과 한미동맹’이란 주제로 대구경북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친미주의자다, 나가라.” 외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차근차근히 역사를 이야기 해주고 70분 동안 강의를 했더니 마지막에는 다 기립박수를 쳤다. 그들이 말하기를 유치원 때부터 대학교 다닐 때까지 이런 강의는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좌파정권 10년간 모두 빨갱이교육만 했다는 것이다. 가치관이 비틀어져 버린 것이다.

 

이제 대학을 공략해야겠다. 뉴라이트 동아리를 대학교마다 만들고 회장도 출마시키고. 현재 10개 대학을 탈환했다. 내년까지 100개 대학이 목표다. 얼마 전 경희대 회장 선거가 있었다. 가장 치열한 접전이 있었던 곳이다. 뉴라이트 크리스천 한 명을 훈련시켜서 ‘사명감을 가지고 출마해라’ 했다. 지난 3개월 동안 선거가 엄청 치열했다. 미국에 와 있는 동안 전화가 왔다.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감사기도를 드렸다. 확신을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나라 사랑하는 사람이 걱정만 하고 방치하는 것이 문제다.

 

교사 48만명 중 전교조가 9만명이다. 1년 예산이 200억이다. 그들이 교육을 망치고 있다. 뉴라이트 깃발 드니까 크리스천 5000명이 전교조를 탈퇴하고 뉴라이트 단체를 만들어달라고 왔다. 그래서 좌파를 학교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서겠다는 것이었다. 감사한 일이다.

 

타. 한국에서 제 2의 청교도 운동을

신앙이란 예배당 안에서 우리끼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우리 책임을 다해야 한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다. 제2의 청교도 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다. 청교도 운동의 두 기둥은 개인의 경건, 역사와 국가에 대한 책임이다. 예수사랑ㆍ겨레사랑ㆍ하나님 사랑ㆍ동포사랑, 이웃사랑은 항상 같이 나가야 한다.

 

파.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북한 동포들이 중국에 양식을 얻기 위해 많이 오는데 중국사람들이 탈북자 못 숨기게 현상금을 건다. 가슴 아픈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동족의 현실을 놓고 기도해야 한다. 백성들의 눈물을 풀어주시는 하나님께 북한 당국의 못된 독재정치가 해방의 역사를 맞도록 기도해야 한다.

 

[필자 부기] 머잖아 북한 정권은 망 하고 만다. 왜놈에게 시달리는 우리 민족을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셨듯이, 기도로 세운 우리 나라 머잖아 기도로 통일도 시켜주실 것이다. (오소운).

 

이승만 대통령 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