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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일본땅’ 주장 일본 역사학자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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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 땅

2012. 11. 11.

 

독도는 일본땅’ 주장 일본 역사학자 ‘0명’
[한겨레가 만난 사람] 한일 근대사연구 50년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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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근대사 연구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일본 도쿄 미타토구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 입구에 선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 지난 5월 말 최 교수가 방문했을 때 외교사료관의 간부가 직접 나와 마중하기도 했다.
논문 한편도 없고, 오히려‘일본땅 아니다’ 4명
‘영유권 권위’ 에도시대 관찬지도에 독도 없어

 

 

“여든이 넘은 늙은이가 일본에 오면 꼭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 공문서관, 도립도서관, 동양문고에 들러 한-일 관계 역사자료를 뒤지고 있다는 사실이 후학들에게 자극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한-일 근대사 연구의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최서면(80·[사진]·한국연구원장) 명지대 석좌교수는 외출 때면 지팡이에 의존해야 하는 불편한 몸이지만 현장주의 정신은 오히려 왕성해지는 것 같다. 올해 들어서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일본에 들러 ‘한-일 근대사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일본 정부의 자료를 들추거나 한-일 관계 고문서를 찾아내고 있다. 일본 근대 외교 자료를 집대성한 외무성 외교사료관의 자료를 일본 사람보다 많이 읽은 한국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 최 교수는, 일본인 자신이 기록한 문서를 통해 감춰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한-일 관계사의 사실과 진실을 규명하는 데 50년이 넘는 세월을 바쳤다.

지난 5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한겨레>와 네 차례, 8시간에 걸쳐 장시간 마라톤 인터뷰를 한 최 교수는 자신이 평생의 화두로 삼고 있는 독도와 안중근 의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일본은 새삼 독도가 자신들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내가 독도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일본 쪽 자료를 보면 일본 것이라고 하기 힘든데 왜 자꾸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선 일본 국제법 학자들 10여명이 일본 외무성 자료를 가지고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역사학자 중에서는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반면, 독도가 일본 것이 아니라는 역사학자는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대 명예교수 등 3~4명이나 된다. 영유권 다툼에서 제일 권위가 있는 게 정부가 편찬한 관찬지도인데 도쿠가와 막부가 펴낸 관찬지도 네 종류에도 독도와 울릉도가 나오는 지도는 한 장도 없다.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시비를 가리자고 하는데 한국 정부가 결심만 하면 가기 전에 이길 것 같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원전주의로 판결하는데 일본이 가지고 있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될 것이다.”

 

일본 과거사 청산없어 잘못 되풀이
감정적 대응보다 연구로 승부를

 

-독도 문제는 활동가보다는 연구자가 더 많아야 한다는 게 지론인데?

“독도 문제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가진 자는 늠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못 가진 자는 늘 히스테리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선 명심해야 한다. 일본 사람들이 내놓는 얘기가 새로운 게 있으면 대응해야겠지만 구태의연한 것이라면 못 가진 자의 욕구가 그러려니 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독도 문제는 영토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 감정을 생각해서 자주 거론할 문제가 아니고 신중해야 한다. 따라서 정부 발표는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역사적 상호 토론을 통해 어느 것이 더 역사적 비중이 있는지 비교·연구하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독도 연구자들은 대개 일본의 연구를 까는 데서 시작해서 까는 데서 그치고 마는 경향이 있어 그들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본이 애초 독도보다는 울릉도를 집어먹기 위해 ‘다케시마 문제’라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잘 알고 울릉도와 독도를 함께 연구해야 한다.

한 지방대학에서 몇 해 전 독도연구소를 설립한다며 강연해 달라고 하기에 울릉도연구소면 몰라도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동해연구소로 바뀌었더라. 또한 영토 문제에 대응하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야 한다. 잡학을 해야 한다. 페니실린이 쓰레기통에서 나왔지 연구실에 나온 게 아니잖은가.”

 

-내년이 안중근 의거 100돌이고 내후년이 한-일 병합 100돌이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돌을 지금부터 준비하는 게 의인을 맞는 우리의 자세가 아니겠느냐.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일본에서 안중근 자료를 만나다 보면 더 훌륭한데 이것밖에 모르나 하는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역사적 의의를 생각할 때 그가 목숨을 걸고 내건 동양평화론이야말로 위대한 선견이라고 생각한다. 한-중-일이 서로 침략하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이 사상은 21세기 아시아공동체론으로 발전하고 있다. 얼마 전 중국 쓰촨성에서 큰 지진이 났을 때 한국과 일본이 조건 없이 지원하고 전염병에 공동대처하려는 움직임 등이 바로 동양 평화 사상이다. 최근 외교사료관에서 안중근 자료를 들춰보다 안 의사가 의거 뒤 1909년 10월26일 밤 11시 일본 총영사관에 넘겨지기 전 러시아의 조사를 받은 기록을 찾아냈다. 러시아의 기병대위가 “이토가 죽었다”고 하자 안 의사는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러시아정교 십자가를 향해 십자가를 그은 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줘서 이 대업을 이루게 됐습니다”라고 말한 부분이다. 또한 주권을 잃어버린 100돌을 2년 앞두고 우리가 이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을 해 봐야 한다. 70년대 운양(운요)호 사건 100돌 때 서울에 갔는데 앞다투어 극일한다고 난리치던 신문들이 정작 한 줄도 보도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라고 관심을 촉구한 일이 있다.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이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본은 우리나와 달리 정치가들의 과오를 스스로 청산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즉, 100년에 이르는 군벌의 잘못을 국민이 심판하지 못하고 외국인이 심판한 게 일본의 전후였다. 다만 그들은 공과 사를 가릴 줄 안다는 점은 우리도 배워야 한다. 토론을 할 때는 스승을 거침없이 공격하다가도 일단 결의하면 이의 없이 따르는 점은 무섭다.”

-그동안 일본에서 수많은 자료를 발굴했는데?

“발굴한 자료를 얘기하자면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 것 같다.(웃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기록이 담긴 북관대첩비 발굴은 “야스쿠니에 북관대첩비가 방치돼 있다”는 구한말 유학생의 비분강개하는 글이 계기가 됐다. 그래서 78년 일요일 비문을 찾으러 야스쿠니 신사에 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비둘기집 근처에서 초라한 비석이 하나 있어 비문을 읽어봤더니 그게 북관대첩비였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구한말 유학생은 임시정부 외교부장을 지낸 조소앙이었다. 74년 안 의사의 수기를 입수하게 된 것도 우연히 고서점에서 보낸 목록에서 ‘안응칠 역사’라는 목록을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서점에 연락했더니 <임나일본부설>을 쓴 유명한 식민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 교수가 이미 사 갔다고 하더라. 그에게 가서 “안중근은 일본에게는 지식으로 알 필요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민족교육의 교과서로 필요하다”며 양도할 것을 부탁하자 “네 박력에 졌다”며 넘겨주었다.

도쿄/글·사진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북관대첩비·안중근수기 발견, 최서면 교수는 누구

 

 

50년간 한-일 외교에 막대한 영향력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막후 ‘외교 조언’
장면 박사에 DJ소개 정계입문 열어줘

 

 

 

≫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의 80평생 살아온 길은 파란만장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해방공간에서 연희전문대 시절 김구 선생 밑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한민당의 외교·정치부장을 지낸 우익인사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돼 1948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은 그의 다채로운 삶의 서막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석방된 그는 남기남 주교와 장면 박사 등 천주교 인사의 보살핌 속에 천주교 조직 일을 하다 57년 이승만 정부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88년 귀국한 뒤에도 한-일 근대사 자료 발굴과 연구를 위해 자주 일본을 왕래하는 등 50년 넘게 현장을 누비고 있으며, 풍부한 인맥을 바탕으로 한-일 외교의 막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애초 이탈리아로 건너가 한국을 소개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 일본 국회도서관 아시아자료관에서 한국 자료를 섭렵하던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 부끄러움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그길로 5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국회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읽자 사서들이 “다른 손님이 이책을 찾는데 본 일이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90년대에는 외교사 사료관에 7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하며 자료 발굴에 매달렸다. 이 때 자료가 국사찬위원회를 통해 500장이 넘는 두툼한 <한일 관계 사료 목록>으로 편찬됐다. 그는“세상에서 나 혼자밖에 모르다는 흥분의 연속이었으며, 행복감이 7년간 이어졌다”고 말했다. 북관대첩비와 안중근 수기 발견뿐아니라 이준 열사 사망의 진실, 을사보호조약에 고종 황제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실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공개됐다.

이런 풍부한 한-일 근대사 자료 섭취는 한국과 한-일 근대사를 알고 싶어하는 일본인과 외국학자들을 위한 강연으로 이어졌고, 강연은 다시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총리 등 일본의 유력 정관계 인사와의 인맥쌓기를 낳았다. “강연하다보니 재일 한국인 논객 중 일본에 참고가 되는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일본의 정계인사들이 우리가 잘못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물으러 오기도 했다.”

그는 이런 인맥을 바탕으로 한-일 외교사의 이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여러 조언을 하는 등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50년대 후반 알고 지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장면 박사에게 소개해 정계입문의 길을 열어주고 70년대 일본 방문 때 후쿠다 다케오 당시 대장상을 소개해준 것도 최 교수였다. “ 정치동물인 최서면하고 학자 최서면을 따로 떼어내 둘로 나누면 최서면은 죽어버린다”

온종일 도서관에 파묻혀 살다가도 저녁 때면 후학들과 어울려 역사를 이야기하며 말술을 마다 않고 줄담배를 피우는 그를 보면 `괴물’이라는 그의 별명이 실감난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