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스크랩] 교당골(敎堂溝)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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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전래사

2012. 11. 13.

 

 

반복되는 대흉년, 역경에서 축복으로의 전환점

 

1869, 조선인들은 혹독한 대흉년을 경험했다. 기근은 무려 5년간이나 지속되었고 당장 먹고 살아야 할 생존에 목을 매던 양민들은 변방을 넘어 중국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1994년 이래 북에서 시작된 고난의 행군, 이미 125년 전의 조선인들이 겪었던 사건이었다.

1785, 정조는 압록강을 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교시를 내려 조선 백성의 만주 이주를 엄금했다. 서간도 지역에 대한 이민을 만주족에게 국한시킨 청나라에 대항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고종 6년부터 시작된 대흉년은 90년동안 지속된 조선의 이민 정책마저 무색하게 만든 대혼돈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던 단순 월경자나 탈북자를 조국을 배반한 역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1884, 심양 선교부에서 인쇄공으로 일했던 김청송의 간청에 따라 서간도를 방문했던 로스와 웹스터 선교사는 지안을 중심으로 3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서간도 전역에 퍼져 살았던 사실을 보고하였다. 참담한 갈증과 기근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과 황폐한 대지가 생계형 불법 이민자들을 양산해낸 결과다.

그러나 이는 영적인 면에서 보면 조선을 향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긍휼이었다. 이 땅을 향해 중보하던 스코틀랜드 사역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역사이기도 하였다. 관서 지역 양민들이 중국과의 밀무역을 통해 먹고 살 길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헤멜 때 서양 귀신이라 부르던 선교사들을 만난 것이다. 이는 지난 60년동안 공산 정권이 들어선 이래 북한에 대한 정보 부재와 전쟁에 대한 공포로 불안했던 남한이 북한에 들이닥친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북녘의 고통은 통일에 대한 가능성으로 다가서기 시작했고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에 그리스도의 계절풍이 다시 불어 올 새벽을 알리는 여명의 순간과도 같다.

 

산약꾼 김청송, 간도에 이양자(裡陽子) 교회를 세우다

 

1885,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조선에 찾아와 복음을 선포하기 전, 관서지역을 중심으로 이 땅에는 이미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믿음의 선각자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심양(당시 봉천)에 본거지를 두고 압록강변 고려문을 찾아 조선 선교를 가슴에 품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와 맥킨타이어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성하,이응찬,백홍준,김진기,서상륜과 김청송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 땅에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뫼시기 위해 중국까지 나선 조선의 동방박사들이요 조선 그리스도 교회의 영화로운 첫 열매들이었다. 그러기에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한국 교회의 이름으로 압록강변에 이들의 이름 석자를 새겨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름과 함께 기념해야 할 어른들이다. 백홍준과 서상륜의 자손들은 이런 저런 모습으로 선조들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형편이나 다른 분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는 형편이다. 저들이 의주와 소래에 양육한 가정 공동체나 교회당이 오늘날의 북한 땅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다만 저들이 일으켜 세운 하나님의 나라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름도 빛도 없이 고스란히 우리의 혈관에 흐르고 있지 않던가? 다만 산약꾼 김청송이 세웠던 이양자교회가 지금은 중국 땅에 귀속이 되어 있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기에 애써 위안을 삼을 뿐이다.

지난 세월, 110년이 넘도록 현지 중국인들이 교당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온 지린성 유림현 교당골(楡林縣 敎堂)에는 조선 교회의 흔적이 생생히 살아 있는  역사의 발상지이다. 조선인들이 세운 교회당이 있었던 탓이다.

단둥에서 지안(集安)으로 교당골을 찾아 나서던 날은 유난히 맑은 하늘에 마음마저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지안은 자강도 만포시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나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탓에 고구려와 관련된 역사적 유적이 유난히도 많은 곳이다. 랴오닝에서 지린성 경계로 들어서자 공안의 검문이 있었다. 탈북자들을 잡으려는 이유 외에 최근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 시도에 항의하는 한국 시민 사회 단체가 곳곳에 전단을 뿌리고 배너를 걸었던 탓에 공안 당국의 신경이 곤두섰던 탓이다.

교당골은 지안으로부터 랴오닝 방향으로 되돌아 60여킬로 떨어진 곳에 있다. 정확히 일러 유림현 교당골은 독립을 꿈꾸던 광복군, 산에 약초를 캐던 산약꾼들로 붐비던 산골 마을이다. 지안에서 150 여리 떨어진 이 첩첩 산중에 자그만치 3000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붐볐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교당골 초입에 차를 세우고 옛 교회당 터를 찾아 나서는 좁은 샛길이 자그만치 40여분이나 계속되었다. 이런 산 비탈에 경운기라도 있었다면 제격일텐데 육신의 다리를 절며 오르던 산 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화음이 귓가에 가득했다. 이 찬양은 산 골짜기마다 높고 낮은 음자리표로 들려왔다. 당시에는 곡조도 없는 노래로 찬송을 불렀을 텐데 내게는 왜 이리도 완벽한 화음으로 들려오는 것일까?

, 다름 아닌 천국의 향연으로 느껴지는 이유일 게다.

 

 

늦 여름 풍성한 수확으로 뭇 농부들 가슴 기쁘게 했을 오미자 말리던 향기 길가에 가득했던 것처럼 이곳 산중에 터를 잡았던 옛 조선인의 고향인양 아늑해 보인다. 교당골로 들어서는 산천 초목마저 왜 이리도 정다워 보였던가!

골짜기 안에는 인삼을 재배하는 삼 밭, 철마다 벌목하는 탓에 아직까지 교당 골짜기가 사람의 흔적을 유지한채 남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

좁은 협곡에 재잘 거리며 사이좋게 흐르는 개울 물.

들 풀처럼 자라난 가을 국화에서 단 맛을 뽑던 나비들

가파른 산세에 피곤한 몸을 기대어 하늘을 향해 축복하는 소나무는 이 땅에 첫 교회당을 지어 봉헌했던 김청송의 이름 석자처럼 높고 푸르른 소나무인 게다.

모두가 이 땅 믿음의 사람들의 찬양을 듣고 자란 하나님의 첫 열매들이다.

교당골로 올라가는 골짜기마다 장뇌삼 밭이 지천에 가득했다.

원래 장뇌삼은 북동쪽 음지에서 잘 자란다더니 교당골도 음지의 습성을 타고난 탓일까? 유난히도 개울 물마저 차가웁게 느껴졌다.

 

개울가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람들

 

 

 

 

출처 : 느티나무
글쓴이 : kuky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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