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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김연갑 애국가]안창호가 지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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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유래

2013. 2. 26.

[김연갑 애국가]

 

안창호가 지었다고?

 

기사입력 2012-08-15 07:51 | 최종수정 2012-08-15 11:20



【서울=뉴시스】김연갑의 '애국가' <3>

국가 작사자로 거명된 인물은 윤치호를 비롯한 4명이다. 그렇다면 윤치호를 제외한 민영환·최병헌·김인식·안창호는 어떤 근거로 애국가의 작사자로 호명되었는가? 이들에게 주어진 오해와 그 진실을 정리하기로 한다.

◇민영환과 <대한제국 애국가>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약관 18세에 문과에 급제, 홍문관 관직에 올랐다. 이후 동부승지·성균관대사정에 발탁되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임오군란의 발발로 부친이 살해되자 관직에서 사직했다.

다시 관직에 오른 것은 1884년 이조 참의직이다. 이어 도승지·전환국총판·친군연해방어사·한성부윤·기기국총판을 역임했다. 1893년 형조판서와 한성부윤, 1894년 형조판서를 거쳐 1895년에는 주미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조정 운영 전반에 대한 간언을 하였다.

1896년 4월에는 다시 고종의 명을 받아 러시아황제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 등을 대동하고 인천을 출발, 상해와 폴란드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러시아 왕실 군악대의 위용을 체험하게 되었다. 대관식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황실 군악대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 이 결과로 1900년 12월 군악대 설치령이 공포되게 했다. 이후 민영환은 의정부 찬정을 역임하고, 오스트리아 등 6개국의 특명 전권공사가 되어 해외여행을 했고, 영국 여왕 즉위 60주년 행사에도 참석하였다.

위와 같은 두 번의 세계여행은 민영환으로서는 구미제국의 선진문화를 누구보다도 일찍 체험하는 계기였다. 이 때문에 당시 발족한 <독립협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그러다 시국의 변화로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의 공격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다 자신의 건의에 의해 설치케 된 원사부의 회계국 총장직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생활을 했다. 이어 표훈원 총재 등을 맡아 왕실 군악대를 신설하고 국가(國歌) 제정 등을 맡아 실현시키기도 했다. 바로 이때에 윤용선과 함께 <대한제국애국가> 제정에 앞장서 후에 악보가 완성되었을 때 서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면서 외무대신에서 한직인 시종 무관직으로 밀려나고 1905년 11월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조약체결 자체를 무효화 하기 위해 여러 집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일제는 민영환을 왕명 거역죄로 구속하였고, 이에 민영환은 국운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상의 생애에서 알 수 있듯이 민영환은 고종시대의 대표적인 관료요, 지사이다. 우리가 역사 인물을 평가할 때 그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가에 의미를 둔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특히 1896년 윤치호 등과 함께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는 등 외국의 견문이 넓은 인물로 국가상징의 하나인 국가(애국가)의 필요성과 의미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이런 결과로 조정에서는 기장조성소(旗章造成所)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1902년 국가·군기·국장(李花紋章) 등을 관장하는 기장조정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이에 대해 황성신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장-영기성유 재작일(製章-領旗聖諭 再昨日) “황상폐하께옵서 조칙(詔勅)을 하(下)하셨는데 음악을 문신 중으로 선정하라 하셨고….”

이와 같이 조정에서는 구체적으로 관장 기구와 담당자를 선정하라고 지시를 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서는 서양식 악대 지휘는 물론 작곡을 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외국에서 담당자를 고빙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주한 독일 공사관 와이파트(Weipatt)의 추천으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 Eckert)를 초빙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과정에서 <구한국관보> 1901년 1월27일자에 의하면 고종은 의정대신 윤용선에게 국가를 제정하라고 명하였다. 조칙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인심을 감발(感發)케 하고 사기를 쉬려함으로써 충성심을 돋우고 애국심을 진작함에 있어 성악(聲樂)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마땅히 국가의 절주(節奏)를 제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임(文任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으로 하여금 찬진케 하노라.”

이상의 제정 명령이 있은 지 1년여 후인 1902년 7월1일 작곡을 완료, 악보를 발간하여 세계 조약국에 배포하였다. 이 악보의 서문을 민영환의 명의로 하게 되었다. 악보에 표기된 ‘원수부 회계국총장 육군부장 정일품 훈일등 민영환(元帥府 會計局總長 陸軍副將 正一品 勳一等 閔泳煥)’에서 확인이 된다.

민영환은 이 <대한제국애국가>의 제정과 배포의 총책임자였을 뿐이다. 자결 이후인 1907년 존재하게 된 현 애국가의 작사와는 무관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민영환을 작사자로 거명한 것은 <대한제국애국가>의 악보 서문을 쓴 사실에서 비롯된 와전인 것이다.

◇최병헌과 또 하나의 애국가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은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20세까지 한학을 공부했다. 성장하여 과거제도와 사회제도상의 부패상을 체험하면서 사회개혁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8년 30세,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자연스럽게 선교사들과 교유하였고, 특히 존스(G H Jones)목사와 교분을 갖게 되어 그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1895년에는 정부의 농상공부(農商工部)에 근무하고, 1889년에는 <배재학당>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이어 <관립어학교>에서 한문교관으로도 근무했다. 그리고 1893년 세례를 받아 정동교회 전도사로도 활동하며 기독교에 입신케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902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는 교회 담임과 등단설교를 할 수 있는 최초의 목사가 된 것으로서 바로 이때 아펜젤러(Appenzeller) 목사가 해난사고로 사망하자 정동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맡아 1914년까지 목회활동을 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성산명경」은 이 기간에 집필되었다.

이 시기는 저술 외에도「신학월보」등 기관지에 많은 글을 발표하며 YMCA운동에도 참여, 부위원장과 전국 삼년대회의 대회장으로 활약하며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인천과 서울의 감리사로서 행정 능력도 발휘하였다. 특히「만종일련」이란 저서를 출판하였는데, 이 저서는 앞의 책과 함께 최병헌의 대표적인 저술로서 초기 신학연구에 크게 기여한 기념비적인 책이다.

1922년에는 <조선예수회> 목회직에서 은퇴하고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추대되어 동양사상과 비교종교론을 강의하였다. 특히 해박한 한학 지식으로 동양의 많은 종교원리를 이해하여 한국적인 기독교 논리 개발에 노력하였다. 특히 한국 재래종교와 기독교사상의 접합점을 모색하는데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1927년 5월 별세했다. 그의 문집인 탁사집(濯斯集)이 남아있어 활동상을 담고 있다.

1908년도「감리교선교부보고서」는 이 시기 최병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최병헌 목사의 유능한 목회하의 정동제일교회는 서울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위한 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정동교회는 주로 관리급이 출석하고, 그 교회 회원들은 서울과 지방의 책임 있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역시 기독교 지도자인 윤치호와도 교류를 맺어 의형제로 지낼만큼 친교가 깊었다. 둘 사이가 친밀했던 이유는 감리교 교인이란 관계도 관계지만 동시대를 살면서 한학자와 서양 신학문의 소유자라는 정반대의 성향이 의외로 긴밀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긴밀함에서 ‘애국가 합작설’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최병헌의 관련설은 가족 측에서 제시하는 자료가 있지만 객관적으로는 1994년 박용란이 지은「새로 쓴 교회음악사」가 있다. 주장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우리 애국가는 오랜 동안 가사를 지은 분이 윤치호라고 알려졌으며 1904년 외무대신 서리로 있을 때 고종의 명을 받아썼다는 주장이 파다하게 전해져 왔다. 그러나 근자에 와서는 애국가는 정동교회의 한인 최초의 목사인 최병헌과 윤치호의 합작이라는 결론이다.”

그런데 이상의 주장에는 단적으로 그가 지었다는 가사와 출전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크게 논의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그 부당성이 제기된다. 우선 “최병헌과 윤치호의 합작이라는 결론이다”라는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조사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특정 사실만을 표집한 결과로 인한 것이다. 또한 이 역시도 당시 가족들의 주장을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받아 정리해 놓은 것일 뿐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둘째는 가족들이 제시한 <불변가>의 존재를 들어 이 노랫말이「찬미가」14장의 노랫말이며 현 ‘애국가’라고 하면서도 정작 구체적인 기록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최병헌 작사설은 윤치호와의 긴밀한 관계에서 비롯된 오해이며, 그 진실은 최병헌은 작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안창호와 애국가 사랑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1895년 17세 때 상경하여 당시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경영하는 <구세학당>에 입학, 3년간 수학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구문물과 기독교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관서지부를 조직하면서 구국운동에 전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안창호의 명성이 관서지방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897년 20세가 되던 때에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1898년 평양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강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22세 때인 1899년에는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당시로서는 흔히 않은 남녀공학 이었다. 이 때 교가인 <점진가>를 지었다.

1900년에는 미국 센프란시스코로 건너가 한인 친목단체 <대한인공립협회>를 결성하고 야학을 운영했다. 그리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행하여 교포사회 발전을 꾀하던 중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귀국 후 2년 뒤인 1907년에는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평양에 윤치호와 함께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출판문화를 진작시키기 위해 평양과 대구에 태극회관이란 출판사를 건립하고, 민족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평양에 도자기 회사를 건립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등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3개월 만에 석방되나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어 중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이때에 그 유명한 <거국가>를 지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자금 관계와 지도자 간의 파벌싸움으로 곤란을 겪게 되어 다시 미국으로 망명, 교민사회를 통합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1911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기관지로 <신한민보>를 창간했다. 이 신문에 <국민가>라는 곡명으로 애국가 가사를 수록하고 작사자를 윤치호로 표기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다시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고 임시정부의 내각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의정원 회의 때마다 애국가를 손을 휘저으며 불렀고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다가도 애국가를 잘 부르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후 1926년 북중국 만주지방의 상황을 살피다가 길림 지역 <대독립당> 결성을 논의하던 중 중국 경찰에 체포되는 수난을 겪었다. 1928년에는 다시 상해로 건너가 이동령·이시영·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 대동주의를 제창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이상촌 건설이 만주사변의 발발로 실현될 수 없게 됨에 따라 남경에 토지를 매입하고 일본군에 대항하는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폭파사건으로 일경의 단속에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4년의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2년6개월만인 1935년 10월에야 가출옥하였으나 1937년 6월에 있었던 ‘동우회사건’에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또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12월 보석으로 경성대 부속병원에 입원하나 결국 이 병원에서 퇴원하지 못한 채 61세인 1938년 3월10일 순국하였다.

신나라레코드 김기순 회장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성실한 자세와 정직한 마음씨를 지녔던, 그래서 가장 인격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평가 때문인지 애국가 작사자로 윤치호와 함께 유력하게 제기되는 인물”이라고 짚는다.

「도산안창호」(1947)와 자료집인「도산안창호웅변집」(1950) 그리고 가장 방대한 전기물인「안도산전서」(1971)에 작사자라는 주장이 있다. 출판 당시에도 그렇지만 안창호에 대해서는 지금도 가장 널리 인용되고 있는 전기류이다. 이들 중에서 논점이 되는 사항들을 정리하였다.

① “도산이 상해 임정시대에 현행 애국가 가사 중 ‘임금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하였다.”

② “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작사이어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됨에,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사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③ “임시정부 시절 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하지 않았다.”

④ “도산이 지은 노래는 십여 편이 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가장 잘된 작품이다.”

“대성학교 대리 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 이 가사가 적당치 않다 함으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편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였다.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라는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매우 잘 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 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비교적 구체적인 상황 제시다. 마치 직접 보고 들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인지 이 내용은 작사자 문제를 언급할 때 가장 널리 인용되는 문헌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광수가 지적했듯이 주요한은 1900년생이므로 대성학교와 한영서원 시절에는 10세 미만의 소년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자신이 밝힌 바대로 본 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이 장인(안창호)에게서 전해들은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하여”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주요한이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글은 신뢰할 수가 없다.

이 글의 문제점과 더불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증언과 기록의 중심인물인 주요한의 태도이다.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그의 증언이 비중 있게 인용되고 있는데도 그의 견해가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그 예의 하나가 이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던 시기에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 중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설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라고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라고도 했다. 이는 자신이 쓴「안도산전서」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주장일 뿐만 아니라 윤치호 작사설을 부정하는 종래의 태도와도 대립되는 것이다.

결국 안창호 작사설은 증언이 임시정부와 관련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임시정부 시절 애국가를 가장 열렬하게 불렀고, 지극히 사랑한 사실이 증폭된 결과이다.

◇김인식 작사 애국가

김인식(金仁湜 1885~1963)은 평양에서 태어나 1896년 감리교계에서 운영하는 평양 판교소학교(후에 숭덕학교로 개명)에 입학했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 문화에서 성장하였고, 16세 때에 숭실전문학교로 진학하여 당시로서는 드물게 선교사로부터 서양음악을 배울 수 있었다. 중학 2학년 때 선교사 부인 헌트(Hunt)와 당시 정의여학교 교장이던 스눅(Snook)으로부터 성악과 오르간 그리고 음악이론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 역시 선교사들로부터 코넷도 배웠고, 독학으로 바이올린 연주까지 익혔다. 이때부터 김인식은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오르간을 잘 다뤘다. 이 때문에 중학 3학년 때는 1학년 음악 수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평양 서문 밖에서 소학교연합 운동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때 <학도가>를 작사·작곡하여 부르게 하였다. 이처럼 작곡에도 소질을 발휘하여 우리나라 창가의 효시로 기록되게 했다. 이때가 1905년이다.

김인식은 학교를 마치고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모색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여의치 못함을 알았다. 그러자 1907년 22세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상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에서는 음악교사를 필요로 했다. 이런 때에 김인식의 출현은 여러 학교의 관심을 끌었다. 제일 먼저 요청한 학교가 진명여학교다. 음악 교사직으로 올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김인식은 유학을 포기하고 이 학교에 적을 두며 경신학교와 배재학교 등에서 음악 지도를 맡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김인식은 서양음악 지도자로서 이름을 얻게 되고, 윤치호와 같은 관료급 인사들도 알게 되었다.

1910년에는 현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서도 음악을 담당했다. 이때 설립한 단체로 보중친목회가 결성되고 여기서 기관지 <보중친목회보>를 발행하였다. 바로 이 기관지에 김인식 작사의 애국가가 수록되었다. 이 애국가가 주목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당시 다른 학교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을 한 것과 그 파급 효과가 매우 컸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제1회 졸업생 70명 중 26명이 전국의 사립학교 교사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둘은 이 애국가의 작사자가 김인식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작사자가 전문 음악인이었다는 점과 현 애국가의 작사자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기관지는 김인식 작사의 <애국가>(KOREA)를 악보와 함께 싣고 있는데, 8·6조의 시형에 곡조는 올드랭사인이다. 이는 현 애국가와 형식이 같은 것인데, 노랫말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一 華麗江山東半島는 우리本國이오/ 稟質됴흔檀君子孫 우리國民일셰/ (후렴)/ 無窮花三千里 華麗江

大韓사람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셰

二 愛國하는 義氣熱誠 白頭山과 갓고/ 忠君하는 一片丹心 東海갓치깁다

三 二千萬人오직한마암 나라사랑하야/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을다하셰

四 우리나라우리皇上 皇天이도으샤/ 萬民同樂萬萬歲에 泰平獨立하셰

이 애국가에서 논점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애국가를 영문으로 ‘KOREA’라 병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윤치호의 찬미가에서도 ‘KOREA’라는 곡명으로 썼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주목되는 자료이다. 곧 ‘KOREA’는 애국가 또는 국가라는 의미로 쓰였음을 알게 한다.

②곡조가 올드랭사인이란 점이다. 이는 당시 많은 활동을 한 음악인 김인식이 왜 굳이 직접 작곡을 하지 않고 당시 널리 쓰이던 곡을 쓴 것인지 문제가 될 수 있다.

③후렴은 같으나 노랫말은 현 애국가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인식이 윤치호의 무궁화가와 애국가에서 후렴과 곡조를 그대로 원용하여 노랫말을 지은 것임을 알게 한다. 그 이유는 이 시기 올드랭사인 곡에 동일 후렴의 노래가 거의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 작곡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기는 이미 윤치호가 1907년에 작사하여 애국가를 보급시킨 2년 후가 되는 시점이어서 그렇게 본다.

이렇게 볼 때 김인식 작사의 애국가(KOREA)도 윤치호가 작사한 애국가의 또 하나의 버전일 뿐이다. 김인식의 실제 애국가가 있음은 사실이나 현 애국가는 아니다. 오해이며 진실은 또 다른 애국가의 작사자일 뿐인 것이다.

4명이 자사자로 호명된 것은 각각 오해의 여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즉, 민영환은 에케르트 작곡의 <대한제국애국가> 악보 서문을 쓴 사실에서, 최병헌은 윤치호와의 사적 긴밀 관계에서, 안창호는 임시정부 시절 애국가 사연에서, 김인식은 자신이 작사한 또 다른 애국가의 존재에서 비롯된 오해인 것이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art-arira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