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인류의 기원은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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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 참고자료

2013. 4. 30.

▶2013. 5 3.노아속회 참고자료◀

 

의 起

 

 

오늘 속회 주제는「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길잡이로 온 세례요한의 사명의식과 겸손을 배우고 그와 같이 우리도 이 땅에서 이웃에게 영향력을 끼치자는 과목이다. 영향력은 개인의 영향력도 있지만 국가와 민족의 영향력도 무시 못 한다. 가까운 일본을 보면 우리에게 그 많은 문화유산과 과학 문명을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되레 자기네가 영향을 끼쳤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며, 서쪽의 지나(支那)인들도 동이족인 우리 조상의 영향을 받아 미개에서 개화로 갔건만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 고구려가 지네 변방국가였다고 우기고 있다. 이런 못된 것들이 아무리 역사를 뒤집으려 해도 발굴문화재와 전통 문화재는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이번 자료는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존 카터 코벨의 “일본에게 영향력을 준 한국인”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오소운)

 

 

1. 유네스코 인류의 기원은 한국인이다

세계최초로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기원이 이집트인이 아니고 한국인 이라고 발표했다. 이 사실은 2008년 10월 15일 〈명상신문〉의 역사란에 기고한 황문권님에 의해서 밝혀졌다. 제목은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기원은 한국인이다 라고 발표”이다.

 

이 기사에서 “인류의 기원이 한국인인 증거로 요동성 근방 만주 지역에서 대량의 탄미(炭米=불에 탄 쌀)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탄미의 DNA 검사결과 자연산이 아니고 교배종이란 것이 판명됨으로써 농사기술이 상당한 수준을 이룩했던 것으로 판명되었고, 대량으로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그 탄미는 군량미로 생각되며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큰 전쟁이 있었던 듯 하다는 의견이다. 또한 이 쌀은 1만7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당시 사람의 DNA를 검사한 결과 평균수명이 1,000년 정도로 판명되어 고조선(古朝鮮) 이전의 왕국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다고 한다. 노예 제도가 없었던 유일한 나라 한국(桓國)의 역사를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것은 우리나라가 세계의 종주국(宗主國)이라는 사실과 《한단고기(桓檀古記)》의 역사가 진실이라는 것이 확인 된 것이다.

 

주) [桓]자는 〈설문해자〉에 보면 〈한〉이라 읽는다고 나와 있다. 그림에 보시는 대로 桓자는 호단절(胡端切) 곧 호의 〈ㅎ〉+단의 〈안〉= [한]이라 읽는다고 설명하였는데 모두들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인류의 기원의 한국인설은 당연하다.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는 일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연히 환국은 인류 최초의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일만7천 년 전의 쌀이 동아시아에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인류 최초의 것이 된다. 한국(桓國) 이전이라 함은 〈마고성(麻姑城)시대〉라고도 추정할 수 있는데, 이 역사는 오직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고대역사인 것이다. 마고성 시대란 주전70379년~7197년경으로서 마고가 임금으로 있던 시대를 말한다. 이를 전한국(前桓國)시대라 한다. 파미르 고원의 중앙에 마고를 모시는 천부단이 있고, 동서남북 사방에 보단을 두었으며, 보와 보 사이에는 3개씩 도랑이 있어 12개의 성문을 두었다. 2궁 2소(二穹二巢) 사방에 2궁과 2소를 두어 오음(五音) 칠조(七調)의 율려(律呂)를 맡게 하였다.

 

 

 

 

2. “한국인은 일본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 모자 지음: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출판사: Hollyn International Corp. (아래 그림은 책 표지)

 

 

일본은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유산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Dr. Jon Carter Covell 1912~96) 박사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지은이 존 카터 코벨 모자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들은 미국인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이하 본문 요지

일본천황 혈통의 기원은 한국이며 일본의 시조는 통설대로 주전 660년이 아니라 주후 369년임을 밝히고 있다.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이었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그런데 “원숭이 나라” 일본의 역사왜곡이 문제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왜구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일본은 ‘난쟁이’ ‘왜구’ 같은 단어를 아주 싫어해 7세기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왜인들은 오직 백제 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주) 일본인의 교활함을 말할 때 〈여우보다 간교한 원숭이 나라〉라고 각국이서 말한다. 남의 것 흉내 내 만들고는 그게 본디 제것인데 남이 베껴갔다는 식이다. 심지어 한글도 지들이 만들었는데 세종대왕이 베껴갔다고 주장한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의 일기―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이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한국 식민지 신라방(新羅坊)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기(須惠器)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주) 스에기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친 시기로 보고 있다. 스에기(須惠器)토기는 '질 좋은 토기'라는 뜻이라고 하며,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이 토기에 '스에(すえ)'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스에'는 우리말의 '쇠'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쇠처럼 단단한 토기'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들어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넘은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3. 한국 점령이 자랑거리?

1923년 도꾜와 요꼬하마를 덮친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은 인명과 재산피해로 광포해진 일본인들의 희생양이 되어 타격을 받았다. 교과서가 씌어진 1930년대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빈곤지역을 ‘마늘 냄새나는 조선인(にんにくくさい朝鮮人)’들이 사는 곳이라 부르며 기피하는 지역으로 몰아갔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광분한 미국인으로부터 재미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피난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를 교과서에 수록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1982년)에 와서 일본 자본가들은 그때 잃은 땅과 사업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배상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일본은 이 같은 조치를 한국인들에게 취했는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한국에 해악을 끼친 사실에 대해 치욕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시건방진 자랑거리로 여기며 수십년 전과 달라진 바 없는 차별과 왜곡을 일삼고 있다. 일본 군부는 2차대전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었단 말인가. 겉보기에 그들은 분명히 반성의 기색이 없다.

 

그런데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적어도 주전 3세기부터 주후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 순수한 일본 고유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 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水墨畵)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노동력이 일본의 예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일본은 한국을 강제합방해 한국인을 노예로 부려먹었다. 또 있다.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고려시대에는 특히 심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역사왜곡까지 새롭게 시도해서 한국을 뒤흔들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이런 압력에 굴복하거나 모욕을 한 귀로 흘려 넘기는 한, 일본은 소리 없이 등 뒤로 다가와 한국을 밟고 일어설 것이다.

 

4.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져

일본인이 쓴 역사책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태반인데, 식민사관이 판을 치는 현재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史書)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가야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이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선전하는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가야 왕녀였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따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神武)는 4세기 가야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女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꼬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 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고려장》이라 해서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도 왜인들의 날조다. 왜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제했다. 한국의 20여만 권의 역사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 왜땅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까지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미술품에 남아 있는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자들이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일본이 일으킨 지금의(1982년) 교과서 파동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는 일본 헌법의 전쟁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셋째 단계에 가서는 천황가를 ‘성스러운 권력체’로 되살린다는 게 일본의 속셈이다. 이것이 실현 가능할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은 그 이름과는 동떨어지게 보수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군림했다. 이제 자민당은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키우고 싶어 한다.

 

주) 저자 카터 여사의 예언은 적중했다. 지금 일본 수상이란 자는 침략전쟁 자체를 “보는 입장에 따  라 다르다. 당한 자에게는 침략이지만 한 자에게는 정당하다” 라고 말해 세계의 지탄을 받고 있다.

 

5. 일본인은 솔직해질 수 없다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統制, Control),

   한국은 무심(無心, Casual),

   일본은 작의적(作意的, Contrived)

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無心)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井戶茶碗)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無心)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

 

주) 이도다완(井戶茶碗) :조선시대 막사발로서 풍신수길이는 이에 반해 임진왜란을 일으켜

수많은 도공들을 납치해갔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또(京都)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또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매년 여름과 겨울을 교또 대덕사(大德寺)의 유명한 선사찰 진주암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나는 주지스님과 삶에 있어 ‘솔직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다. 면전(面前)에서 하는 말과 등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지적하면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그것이 바로 ‘호벤(方便)’, 즉 편의라는 것이었다.

 

주) 일본인은 이중인격을 다 갖고 있다. 그들의 말에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 라는 게 있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혼네는 속마음이고 다테마에는 겉치레 말이다. 한국인이 알본서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친한 친구에게도 <혼네>를 말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부간에도 그렇게 산다.

 

일본에서는 솔직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자기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일본인들은 어떤 상황이라도 거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그들이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속에서 억제되고 대신 ‘작의적(作意的) 얼굴’ 곧 일부러 꾸며낸 얼굴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의도된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 누구든 자신을 거기 맞춰 살아야지 예상에 없는 짓으로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진주암은 일본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100% 솔직했던 인물을 받드는 절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개념을 특별히 더 기만적이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독신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온갖 난잡한 일을 다 저지를 대신(大臣) 승려 잇뀨(一休)는 거리낌 없이 여자들과 즐겼다. 이 때문에 잇뀨는 호벤, 혹은 ‘편의상의 거짓말’을 생의 방편으로 정당시하는 사찰에서 받드는 대표적 인물이 됐다. 진주암에서 이런 문제로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스님이 으레 하는 말이 “그래, 당신이 옳소. 잇뀨는 솔직한 사람이고 우리도 그래야겠지만 여기는 일본이요. 잇뀨처럼 정직한 건 미국에선 괜찮겠지만 일본에선 맞지 않아요.”

 

나는 일본에 있는 절이 모두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살아 있는’ 진주암에서 지냈다. 적어도 잇뀨를 추모하는 사찰인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벽에는 섬세한 수묵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여기서의 표준개념인 ‘살아 있는 거짓말’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위에서 히틀러의 말을 인용했지만,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들이 살아온 지난 세상들은 그렇게 자연스레 하얀 옷감에 구시대의 절대강자들의 원하는 사상과 대중의식의 체계들로 명확히 채색이 되어 원래의 주인인 흰색이 변형되고 왜곡되어진 빨강색으로 알고 왔던 것처럼…. 그러한 삶들이 현재까지 진행이 되어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항목 끝)

 

6. 세계 최초의 것은 거의 한국에 있다

1) 우리나라 〈소로리 볍씨〉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볍씨로 국제공인

출처:대한매일 2001. 1. 18. 1면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출토된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국제학술회의에서 인정받았다. 농촌진흥청은 17일 필리핀 국제미작(米作)연구소가 지난 해 말 세계 28개국 500여명의 학자들을 초청해 개최한 ‘제4회 국제벼유전학술회의’에서 이같이 공인됐다고 밝혔다.

 

학술회의에서 〈소로리 볍씨〉는 DNA 분석결과 1만5,000년 전 것으로 확인돼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보다 3천년이나 앞선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kdaily.com

 

문화일보 [2003-10-22] 기사를 보자.

충북 청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재배 볍씨(약 1만 5천년전것)로서 이때까지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보다도 약 3천년이나 더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됐다고 영국 BBC 인터넷판이 22일 보도했다. BBC 인터넷판은 기사에서 충북대 이융조(선사고고학) 교수 연구팀이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고대 탄화(炭化) 볍씨를 발굴했으며 59개의 볍씨를 대상으로 탄소연대측정법을 실시,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이 교수는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6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에서 발표한 ‘세계최고의 〈소로리볍씨〉의 발굴과 의미’라는 논문을 통해 1만5000년 된 것 등 4개종의 볍씨 59톨을 발견했으며, 이는 지난 97년 중국 황허(黃河)강변 장시(江西)성에서 발견된 선인동 볍씨(1만500년)보다 약 4500년 정도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 결과는 미국의 권위 있는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기관인 지오크론(Geochron)과 서울대의 AMS연구팀으로부터 동일하게 얻은 것이어서 국제적으로 공인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교수는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의 박태식 박사가 이 볍씨에 대해 야생벼가 아니라 재배벼라고 밝혀 1만5000년전에 한반도 중부에서 농사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주) 이 발표는 20,000~15,000년으로 나온 시험결과에서 낮은 연대를 발표한 것이라 한다.

기사원문: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id=etc&sid1=102&mode=LPOD&oid=021&aid=0000048289

 

 

 

2) 배 만들기도 한국이 세계 최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 발견 - 8천년 전 배YTN 뉴스 동영상 보기 (8천년 전 배)

-http://news.naver.com/tv/read.php?mode=LSD&office_id=052&article_id=0000090729

창녕 신석기 유적서 8,000년前제작 추정. [한국일보 2005-09-05] 8,000년 목선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아래 그림 참조)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선(木船)이 발견됐다. 국립김해박물관은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신석기 유적에서 통나무를 이용해 만든 소형 선박을 발견했다고 5일 밝혔다. 김해박물관은 목선 발견 지점이 비봉리 유적 아래 신석기 초창기 층위인 점을 감안할 때 이 선박이 8,000년 전에 제작,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과학적 연대 측정 등을 통해 이 같은 추정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국내 발굴 선박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경주 안압지 배(8세기)보다. 6,800년 앞서게 된다. 또 이집트 쿠푸왕 피라미드 고선박보다 3,400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선박으로 알려진 도리하마(鳥浜) 1호나 이끼리끼(伊木力) 유적 출토품보다 2,000년 이상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된다. 실물 기준으로 볼 때 〈비봉리 목선〉은 최대 길이 310㎝, 최대 폭 60㎝, 깊이 약 20㎝ 정도의 규모이며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원래는 길이 4미터 이상 추정)

 

배는 불로 나무를 그슬린 뒤 날카로운 석기로 제작했으며 어로용, 이동용 등 다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박물관측은 “어로 활동 등 신석기인들의 생활상과, 목선을 만들 정도로 뛰어났던 당시 사람들의 기술력 등을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기사출처::

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509/h2005090518362923280.htm

 

고대의 산해경(山海經)도 한반도 남부지방의 특성으로 [배(선박)]를 거론하고 있다. 기록과 유물이 일치한다 하겠다. 21세기. 현대의 한국은 세계제1의 조선국. 역시 원조(오리지널)의 힘은 강력하다 하겠다.

 

3) <한국이 고래잡이> 세계 최초

                - 영국 BBC 방송

 

한국에서는 8천년전에 이미 목축과 고래잡이가 성행했었다. 영국 BBC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사냥 기원” [경향신문 2004-04-21 ]

경상남도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벌써 기원전 6,000년부터 고래 사냥을 시작 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BBC 인터넷판이 21일 보도했다. BBC는 반구대의 암각화엔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큰 고래 46마리 이상이 그려져 있으며 선사 인류가 고래를 잡기 위해 작살과 부구(浮具), 낚싯줄을 사용한 증거 를 제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림 참조).

 

 

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래 그림들. 각종 고래 그림이 그려 있다. (UNESCO 문화재 등록)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이상목씨와 공동으로 연구에 참여한 대니얼 로비노 박사는 “암각화에는 돌고래 및 고래의 그림과 함께 배위에서 작살과 낚싯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면서 “이것은 고래잡이 광경”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인류학 잡지인 랑트로폴로지(L‘Anthropologie)에 실릴 예정이다.

〈이상연기자〉 기사 출처: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32&article_id=0000062823§ion_id=103&menu_id=103

 

4) 세계최초의 마제석기((磨製石器, 갈아 만든 돌 그릇)도 한반도에서

백과사전에 보면 세계최초의 마제석기(갈아 만든 석기)가 주전 9000년경 즉 약 1만 1천년전에 중동(아랍)에서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약 2만년전의 마제석기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구석기 유적인 경남 진주 장흥리 집현과 대전 용호동에서 각각 1기씩 마제석기가 출토되었었는데 그래도 긴가민가 설마설마 하다가 이번엔 아예 숫돌까지 발견된 것.

 

 

 

1만 수천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만 해도 중동(아랍) 신석기보다 빠르다. [동아일보 2004-5-13]

5) 전남 장흥군에서 약 2만 년 전 신석기 유물 출토

후기구석기 유적서 간돌 첫 출토.

 

우리나라의 전형적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인 간돌(磨製石器)이 여러 점 출토돼 마제석기(신석기)의 최초 사용 시기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 조선대 박물관(관장 이기길·李起吉)은 13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1만8500년 전∼2만55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 장흥군 신북마을의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간돌 7점과 이를 만든 숫돌 2개 등 신석기 유물이 출토 됐다고 발표했다.

 

발굴된 마제석기는 도토리 등을 갈 때 쓰는 갈돌 1점, 큰 동물을 자르거나 나무를 다듬을 때 쓴 간돌자귀 2점, 그리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홈석기 5점 등이다. 홈석기는 돌의 위나 아랫부분 또는 테두리 부분이 홈처럼 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뭔가를 빻고 곱게 가는 데 쓰인 도구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간돌 유물이 나온 가장 오래된 유적은 1만 2천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이다. 따라서 이보다 최대 1만년 앞선 신북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이 출토된 것은 이례적이다. 국내에선 구석기 유적인 경남 진주 장흥리 집현과 대전 용호동에서 각각 1기씩 마제석기가 출토 됐지만 마제석기의 제작 도구까지 함께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대 박물관 이기길 관장은 “이번 발굴로 신석기시대 이전에도 마제석기가 사용됐음이 확실해졌다”고 밝혔다.

 

(펀주: 한국 신석기 시대가 지금까지의 예상보다 사실은 훨씬 더 일찍 시작했다는 말.)

출처: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200405130294

 

【마치면서】 유네스코에서는 1889년부터 유네스코에서는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퇴치(文盲退治)에 공이 큰 이들에게 ‘세종대왕 문맹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주고 있다. UNESCO는 인류의 시작이 한국이며 한국어를 세계 공용어로 하고 쓰기 편한 과학적인 글 한글을 영어대신 쓰자고까지 주장했는데 이제 그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끝】

 

 

[붙임] 존 카터 고벨 박사가 지은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우선 표지 그림을 먼저 올린다.

 

 

                                                                                                                                                        

                                                                                                                                                     

 

 

[신간안내]

부여기마족과 왜(倭) 外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옮김

 

‘4세기 때 부여족이 멸망한 후 그 일부가 한반도로 남하해 가야에 영향을 주고 배에 말과 무기를 싣고 왜로 진출한다. 이후 부여기마족은 369년 왜의 야마토를 정벌하고 6세기 초까지 왕권을 장악하며 일본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일본의 역사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려있는 사실(史實)이며 이는 양국에서 출토된 유물이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천황릉의 발굴을 금지하는 등 1300여 년간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미술사를 전공한 미국인 저자가 부여족, 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 일본의 고질적 역사왜곡의 근원 등을 학문적으로 파헤친 62편의 글을 모아 펴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일본과 중국의 막후 갈라먹기 타협으로 한반도가 분단될 뻔한 위기일발이 있었다고 주장하여 눈길을 끈다. 저자는 “한국 학자를 비롯해 일반인들이 일본식 교육의 주입으로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일본이 역사왜곡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군국주의의 부활”이라고 경고했다. 글을읽다 발행. 2만원.

 

▲ 논어 테마 에세이 / 김종호 지음

 

‘君君 臣臣 父父 子子 (왕은 왕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2,500여 년 전에 쓰여진 논어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말의 창고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지녀야 할 덕목을 가르친 지혜의 보고(寶庫)이다.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못하고, 여당이 여당답지 못하고, 야당이 야당답지 못하고, 언론이 언론답지 못한 작금의 우리 현실에서 논어의 온고지신(溫故之新)은 다시 한번 중요하게 다가온다. 중국 공산당이 요즘 공자를 재평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은 논어를 7개의 테마로 재구성하여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 한문을 잘 모르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그저 수필집을 읽듯 명구(名句)를 되새기면 된다.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의롭게 얻은 부와 자리가 아니면 내게 뜬구름과 같다’. 양극화와 비리로 혼탁한 시대에 써먹을 말이다. 한티미디어 발행. 1만3,000원.

 

▲ 현장 혁신의 리더 CEO 윤종용 / 홍하상 지음

 

직장인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전문경영인 1위는 누구일까. 바로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이다.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초우량 기업으로 키운 CEO인 그의 이름은 이미 웬만한 재벌 총수보다도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평범한 엔지니어 출신인 윤 부회장은 전문 기술과 시대의 변화를 읽는 지식을 바탕으로 이건희 회장과 함께 한국 디지털 시대의 서막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컨버전스로 미래의 유비쿼터스를 주도하고 있다.

 

또한 ‘경영혁신의 전도사’라는 별칭에 걸맞게 끊임없이 조직을 혁신하고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같은 그의 경영능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포춘>지는 ‘영향력이 큰 아시아 기업인 1위’에 선정하기도 했다. 윤 부회장의 경영철학과 비전을 조명한 이 책은 혁신과 글로벌 리더십, 디지털혁명관, 인재관 등을 상세하게 소개해 삼성전자가 어떻게 해서 잘 나가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위즈덤하우스 발행. 1만1,000원.

입력시간 : 2007/01/09 13:10

수정시간 : 2013/12/13 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