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스크랩] ?`아웅산 테러 비화’ 밝힌 라종일 전 국정원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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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관계

2013. 5. 20.

“범인 강민철 송환, 햇볕정책 때문에 포기”

강민철 “조국이 날 죽이려했다” 분노, 북 소행 모두 자백

 

 

 

 

국가정보원(국정원)이 김대중 정부 당시인 1999년 미얀마 현지 교도소에서 장기 수감 중이던 북한 특수공작원 강민철의 한국 송환 방안을 검토했고 미얀마 정부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으나 남북 관계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포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국정원 1차장이던 라종일 전 주일대사는 “강민철은 테러를 지시한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았고 한국 정부도 대북 관계를 고려해 그를 외면했다”며 “북한 정권의 죄악상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한국 정부도 한편으론 인권을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론 분단의 피해자인 한 젊은이를 외면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라 전 대사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강민철을 한국에 데려오거나 제3국에서 살게 하지 못한 데 대해 공직을 그만둔 뒤에도 끊임없이 자책감을 가져왔고 이런 사실을 공개해 국가 권력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속죄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민철은 북한 지령에 따라 1983년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폭탄을 터뜨렸고 한국 고위관료 등 21명이 사망했다. 강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자신이 북한 공작원임을 자백한 점이 참작돼 사형집행이 보류됐었다. 그러나 석방이 좌절된 뒤 25년간 복역하다 2008년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중앙SUNDAY는 강민철과 아웅산 테러 비화에 대한 라 전 대사의 수기를 세 차례 연재한다. 라 전 대사는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 1차장과 주영대사를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선 청와대 안보보좌관(장관급)과 주일 대사를 역임했다.

라 전 대사는 수기를 책으로도 펴낼 생각이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테러범 강민철에 대해 왜 관심을 갖게 됐나.


“강민철은 흉악한 테러범이다. 큰 죄를 지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분단상황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남한도 간접 책임이 있다. 북한은 광주사태 이후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저항감이 팽배해 그를 제거하면 남한에서 혁명적 상황이 연출될 것으로 본 것 같다. 어떤 탈북자의 말처럼 북한에서 태어난 게 원죄인가. 구체적으로 강민철을 챙겨보기 시작한 건 1998년 국가안전기획부(이듬해부터 국정원으로 개편) 1차장이 되면서부터다. 정보교류차 미얀마를 방문하게 됐는데 미얀마 고관들 중 내가 영국 유학을 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한국에서 갈 때부터 어떻게든 강민철을 도와주겠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꺼내주고 싶었다. 미얀마 2인자이자 정보부장인 3성장군 킨 윤을 만난 자리에서 강민철의 면회 허용을 부탁했다. 그는 이전 15년 동안 일체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었다. 우리 대사관 직원이 처음으로 강을 만났고 라면과 김치 같은 위문품을 전달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강민철의 반응이 뭐였나.


“남과 북 모두에 대해 증오심에 차 있었다. 자기 일생이 망가졌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는 모국어를 15년 만에 해본 것이다. 대사관 직원에게도 순순히 마음을 열지 않았으나, 결국 하소연이든 욕이든 15년간 가슴속에 쌓아둔 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얘기를 실컷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 직원이 김치도 넣어주고 영치금도 넣어주면서 여러 번 면회를 하는 동안 강민철은 마음을 열고 나중에는 나이를 따져보더니 ‘형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진모 소좌란 사람이 3인조 공작팀의 리더였는데 강민철과는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아웅산 묘지 현장에 폭발물을 설치한 뒤 강민철은 쉐다곤타워(양곤 시내의 높은 불탑)에서 현장을 내려다보며 터뜨리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진 소좌가 쉐다곤타워는 관광객이 많아 들키기 쉬우니 주변 공장 앞에서 기다리다 터뜨리자고 했고, 거기에 갔다가 사람들이 의심하는 바람에 극장 앞으로 옮겨가 폭탄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현장이 잘 안 보이는 상황에서 나팔 소리만 듣고 전 대통령이 온 줄 알고 폭탄 버튼을 누른 것이다. 만일 진 소좌가 강민철의 의견을 따랐더라면 전 대통령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감옥생활을 했다고 하던가.


“늘 고향에 돌아가 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게 자기가 자백해 가족이 고통 받을 거란 걱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여자 손목 한 번 못 잡아본 숫총각이라고 고백하면서 누이동생을 미리 결혼시키지 못한 것, 장남으로서 부모한테 효도하지 못한 걸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특수부대는 출세코스다. 차관급과 맞먹는 월급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체포 과정에서 수류탄이 터져 하루아침에 불구가 됐고, 하루 두 끼 쌀밥과 카레 혹은 삶은 채소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그런 악조건에서 25년을 버틴 건 대단한 정신력일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버텨서 남이건 북이건 제3국이건 어디든 한국말을 쓰는 동포가 있는 곳에 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미워하면서도 동포를 그리워한 것이다.”

-강민철을 석방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수사에 협조해 집행이 유예된 상태였다. 미얀마 정부도 그를 풀어줄 의사가 있었다. 우리 정부도 그를 데려오는 문제를 검토했다. 두 가지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다. 첫째 우리가 데려오면 북한이 ‘아웅산 사건은 남한의 조작임이 드러났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이미 미얀마(사건 당시엔 버마) 정부의 수사로 진상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정당한 이유가 아니었다. 둘째는 남북 관계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던 햇볕정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정부가 안 움직이기에 평소 친분이 있는 극동방송 회장인 김장환 목사에게 교섭을 부탁했었다. 2000년대 초에 김 목사가 미얀마로 가 강민철의 석방을 교섭했다. 그쪽에선 정부 차원의 요청이라면 몰라도 민간인에겐 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꼭 한국으로 데려오자는 것도 아니었다. 제 3국에라도 가서 치료도 받으면서 단 하루라도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게 해 주고 싶었다. 한 번은 호주 정부 관리와 식사를 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얘기를 꺼낸 적이 있는데 부담스럽다고 하더라.”

-남북관계에 걸림돌이 된다는 게 사실상의 이유였던 건가.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강민철을 석방시켜도 남북관계나 햇볕정책에 대한 영향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게 있다. 북한이 햇볕정책에 응한 건 북한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지 우리의 진심을 보고 응한 게 아니다. 내가 접했던 정보를 공개할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에 자세히 밝히기 힘들다. 하지만 북한이 아무런 전략 없이 햇볕정책에 응한 건 아니었다. 북한은 햇볕정책 덕분에 대남정책에서도 상당히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6·15 선언이 여러 가지 긍정적인 면이 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순수한 마음에서 햇볕정책을 접근했을지 몰라도 북한이 같은 마음이라고 보긴 힘들다.”

-결국 남북한 정부 모두가 강민철을 버린 셈이다.


“자기들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는데 사람 하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건 뭐가 문제냐는 사고방식이 문제다. 미국은 북한에 억류된 자국민 한 명 때문에 전직 대통령이 체면을 구겨가면서 들어가서 결국 데려오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겐 사람의 문제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강민철의 얘기를 왜 이제 하는 것인가.


“2008년 그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장례도 없이 화장했다고 한다. 그로써 강민철은 남과 북에서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강민철이 살아있을 때 남북 정부는 수없이 접촉하고 만났는데 한번도 강민철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민족 화합을 얘기하던 햇볕정책 때도 마찬가지였다. 분단체제의 희생자인 그를 평생 이국의 감옥에서 살다 죽게 하면서 통일과 화합을 얘기하는 건 비극이다. 우리 민족의 엄청난 업보가 있다.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민족이 사람 하나의 목숨을 쉽게 안다는 걸 지적하고 싶었다. 현실에선 잊혀졌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라도 되살려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동기는 전혀 없다. 사람의 문제를 부각시키려는 것뿐이다.”

-북에서도 강민철은 잊혀진 존재인가.


“전해 들은 얘기지만 강민철의 상관들은 동정은커녕 ‘바보 같은 놈, 일 처리를 잘 못해 놓고 붙잡히기까지 했다’며 비난했다고 한다. 강민철은 마지막까지 탈출하려 했다. 특수훈련을 받은 그는 미얀마 군인의 추적 정도는 우스웠을 것이다. 약속한 곳으로 가면 보트가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을 조국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보트는 없었다. 강민철은 수류탄이 터져 한쪽 팔이 잘리고 온몸이 불구가 된 채 붙잡혔는데 자살하려던 게 아니다. 수류탄 핀을 뽑고 안전 버튼을 잡고 있으면 터지지 않는데 바로 터져버렸다는 것이다. 강민철은 그때 ‘아, 조국이 날 죽여버리려고 이런 수류탄을 지급한 거구나’하고 배신감을 느꼈고 그래서 자신이 북한 공작원임을 자백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요직에서 일했는데 스스로를 진보 학자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런 분류를 거부한다. 개인적으론 급진적이기도 하고, 보수적이기도 하고, 때론 리버럴하다. 권력의 논리를 알고 체득할수록 진보나 보수의 한쪽으로 가기 힘들다. 발자크는 큰 부(富)의 뒤엔 반드시 범죄가 있다고 했다. 큰 권력의 뒤는 더 심하다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도 말했듯 권력은 신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이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아마도 이명박 정부가 과거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180도 선회한 데 대한 경고이겠지만 더 큰 이유는 다음 정권에 대한 경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정권에 대해서 우리한테 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강민철 이야기를 증언하면서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가.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틀린 얘기다.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결국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 나온다. 햇볕정책도 단순히 정치적 어젠다로 접근하면 안 되고 휴먼 어젠다로 가야 한다.”

 

 

                                                                      <중앙SUNDAY(예영준기자)>

 

남북 사이에서 사라진 청춘 … 최인훈 ‘광장’속 명준 같은 삶

북한이 버린 테러리스트 강민철

2008년 5월 동포 한 사람이 머나먼 미얀마의 감옥에서 혼자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온몸에 부상을 입은 불구의 몸으로 투옥돼 하루 두 끼 식사로 연명하며 25년간이나 이어왔던 감옥 생활을 이로써 마감한 것이다. 남북한을 통틀어 7000만 명의 한민족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한 고통 속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의 곁에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모국의 언어로 마지막 말을 나눌 사람조차 없었다. 그의 몸은 화장돼 재는 이국의 대기 속으로 흩어졌고 그가 세상에 살았던 흔적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젊은이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 대해 부질없는 것이라고 외면하거나, 왜 상처를 다시 건드리냐고 화를 내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판단은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한가지 부탁은 우선 이 이야기를 차분히 읽어봐 달라는 것이다.

나는 이 젊은이를 이상화하거나 낭만적으로 묘사할 생각은 전혀 없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젊은이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28년 전 당시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폭탄을 터뜨려 수행 중이던 한국 정부 요인들을 무더기로 살상한 3인조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이다.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조금만 차분한 마음으로 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다면, 그가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살펴본다면, 그만을 쉽게 단죄하기 어렵다는 걸 이해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그를 그저 흉악한 죄인으로 단죄해 버리고, 모든 걸 그의 개인적인 책임으로 돌리고, 그가 겪은 일들, 그의 가슴에 맺힌 사연에 관해서는 귀를 막아버려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나는 이 젊은이의 비참한 운명에 관해 우리 모두가 책임의 일부를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통일을 바란다면, 그리고 통일이 그저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사람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한 일 혹은 하지 않은 일에 관해 심각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먼저 이 젊은이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테러를 자행했고,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북한은 거의 모든 정보가 차단된 곳이며, 일반 사람의 생각과 정서도 일정한 방향으로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외부의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스스로의 판단 능력이 있는 일반 테러범과는 다르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국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돼 있어 그는 자신의 행동에 관한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 어려운 처지였던 것이다.

듀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주인공은 자신을 비참한 처지에 빠뜨린 악인들에게 극적인 복수를 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라면 이런 일은 좀처럼 이뤄질 수 없다. 죄 없는 사람을 지하 감옥에 처넣은 자들은 현실의 세상에선 온갖 명예를 누리고 후세에 그럴 듯한 이름까지 남겼을 것이다. 반면 에드몬드 단테스는 지하의 감옥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 없어졌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훨씬 더 많은 에드몬드 단테스를 우리 주변에서 찾을 수 있 을 것이다.

세상에는 ‘지워진 사람들(the Erased)’이 있다. 1991년 동구권의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슬로베니아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비(非)슬로베니아 민족 가운데 영주권을 박탈당한 1만8000명에 이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워져’ 온 것일까. 그들의 이야기를 썼던 작가는 “이 세상에서 ‘지워진 사람들’이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생겨난다”고 말했다. 2008년 이국의 감옥에서 숨져간 북한의 한 특수부대원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지워졌다. 그러나 그가 겪은 고뇌와 외로움, 고통과 동경, 증오와 그리움은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가 한 인간을 얼마나 철저히 지워버릴 수 있는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주인공 ‘명준’은 결코 소설 속 인물이 아니고 수많은 ‘명준’이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돼야 한다. 그게 내가 이 증언을 하는 이유다.

강민철의 본명은 강영철이다. 강민철은 북한의 주요 인사가 흔히 쓰는 가명(nom de guerre)이었다. 미얀마인들은 그들이 부르기 쉬운 방식으로 그를 강민추라고 공식 기록에 표기했다. 공식 기록에는 1955년 4월 18일생으로 돼 있지만 그는 사실은 57년 7월 29일생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원도 북방의 통천 출신으로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통천은 바닷가여서 교통 요지이면서 경치가 아름답다. 정주영 현대 회장 같은 유명 인사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해산물이 풍부해 살기가 넉넉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강민철은 83년 10월 당시 버마라고 불리던 나라에서 군경과 교전 끝에 중상을 입고 체포됐다. 대부분의 죄수가 20년 안에 사망한다는 ‘인세인’ 감옥에서 25년간 복역하다 2008년 5월 암으로 사망했다. 체포 당시 그는 온몸에 부상을 입어 왼쪽 팔은 절단되었고 얼굴, 오른쪽 어깨, 복부, 음랑, 양쪽 넓적다리 등 몸의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었다.

강민철은 고향에 3인의 가족이 있었다. 부친 강석준, 모친 김옥선 그리고 시집가지 않은 누이동생이 하나.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가까웠던 여자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사이였고, 끝내 그는 숫총각으로 살고 죽은 셈이다. 북한의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초등학교 4년과 중등학교 6년의 10년 과정을 졸업하고 군에 소집돼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학과나 운동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고 군 훈련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려 장교로 충원됐다.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군사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 학교 훈련생들은 전국에서 출신 성분이나 능력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다. 전투나 무술·사격 등에서 뛰어난 능력의 소지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서로 실명을 알지 못하도록 돼 있었다. 교육 중에는 남한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교과 과정도 있고 남한의 영화나 TV를 볼 수 있는 특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살인적인 훈련이 있었다. 기초훈련은 야외에서 생존 기술, 장거리 강행군 훈련, 산악에서의 야간 활동 등이다. 처음에 35㎏의 모래를 담은 배낭을 지고 10㎞의 속보 강행군을 하는데 차츰 거리를 늘려 20㎞, 40㎞ 그리고 50㎞까지 강행군을 한다. 육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철인을 만든다. 남한에 침투한 요원 중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하거나 지휘관에 의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적지(한국)에서 수많은 군경으로 포위된 상황을 돌파하고 휴전선을 넘어 귀환하는 요원들도 있었다.

훈련병 중에는 한 달여에 걸친 기초 훈련 과정에서 탈락해 퇴교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고된 훈련을 끝내면 하늘·땅·바다를 가리지 않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거의 만능의 전사가 된다. 혼자서 100t급 배를 운항할 수 있고, 전술 행동을 하면서 12마일을 수영할 수 있으며, 육지건 강이건 바다건 간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강을 따라 수영을 하거나 특별히 설계된 잠수정에 타거나 혹은 매달려서 적지에 침투하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집처럼 특수임무를 수행할수있었다. 이들은 해외의 특수기관에관한 강의도 받았는데 이스라엘의 모사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강민철은 고된 훈련을 잘 이겨내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바로 대위계급장을 달았다. 군번은 9970이었다.

특수부대원으로 그는 많은 특권을 누렸다. 일반 군인이나 행정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수준의 보수 외에도 일반인이 구하기 어려운 물품들의 특별 공급도 있었다. 부대에는 매월 기차 한 차량분의 특별 보급품이 전달되었다. 외출 때에도 실제 계급보다 높은 위장 신분증을 갖고 나갔다. 엄격한 규율과 고된 훈련, 그리고 어려운 특수 임무는 20대의 젊은 청년에게 시련이라기보다 보람 있는 도전이었다. 20대 중반에 강은 이미 장래가 보장된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가족에게는 자랑과 희망, 그리고 동네의 친구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이 젊은이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길로 내몰았다. 83년 8월 그가 속한 ‘강창수 부대’의 지휘관인 강창수 중장은 3명의 장교를 불러들여 색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최고위층의 지시라고 했다. 선발된 그 3명의 장교 중 하나가 강민철 대위였다.

 

 

                                                                            <자료 : 중앙SUNDAY>

 

출처 : 두 리 번
글쓴이 : haj406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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