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살아있는 백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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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5.

          살아있는 백제사

 

지은이: 이 도학

출판사: 휴머니스트 

추천: *** 3 stars

 

저자 이도학


1957년 경북 문경 출생.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한양대학교에서 「백제집권국가형성과정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학교와 한양대학교 사학과 강사와 경기도 문화재감정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충남 부여에 소재한 국립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백제인들의 삶의 자취를 찾는 연구는 우리의 역사무대와 역사인식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는 문제의식으로 줄곧 백제사 연구에 매진해 왔다. 논문으로 「백제 칠지도 명문의 재해석」과 「4세기 정복국가론에 대한 검토」를 비롯하여 「한국사에서의 천하관과 황제체제」 등 80편, 저서로는 『백제고대국가연구』『고대문화산책』『한국 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 등 모두 9권에 이른다.

 

목차

본서의 서술 시각을 통해 본 백제사 연구의 전망

1. 백제는 어떠한 나라인가
국호의 기원과 왕성(王城) 이름
백제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왕실 교체 문제와 정복국가의 출현
자연 환경과 문화적 특성-백제와 바다

2. 백제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
백제의성장과 발전 단계, 읍락 단계와 국읍 단계
국읍연맹 단계
부체제 단계
집권국가 단계 1 - 한성 후기의 개막
집권국가 단계 2 - 웅진성 도읍기
집권국가 단계 3 - 사비성 도읍기
조국 회복전쟁기

3. 백제는 어떠한 위치에 있었나
칠지도가 말하는 백제의 천하관
백제와 고구려는 왜 싸웠는가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전쟁 기사 속의 '백제'
백제의 외교, 교역로의 추적

4. 백제의 세력권은 어떠하였나
백제의 영토는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백제의 교역망은 어디까지였는가
왕성의 조성 1 - 한성 도읍기
왕성의 조성 2 - 웅진성 도읍기
왕성의 조성 3 - 사비성 도읍기
관등 · 관직체계와 지방 통치체제의 변천

5. 기록과 백제인들
백제의 역사 편찬
《한산기》의 세계 - 허구를 통하여 되살아난 개로왕
백제 금석문의 세계
회상의 백제인들 - 백제 말기 세 명의 장군, 그 비장한 삶의 궤적을 찾아

6. 백제인들은 어떻게 생활했고, 어떠한 문화를 남겻나
백제인들의 정서를 찾아
백제 문화의 일본열도 전파

7. 백제사의 남겨진 의문들
알 수 없는 백제의 부활
무녕왕과 무녕왕릉의 수수께끼

백제사 연표
참고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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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운 국사 중에서 삼국시대의 역사는 거의 신라에 치중되어 있고 일부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대왕, 장수왕 정도만 소개되고 백제에 관해서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승자인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철저히 말살시켰기 때문에 사실 역사 교과서에 실을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국 시대에서 승자인 신라가 신라인의 관점에서 쓴 역사를 교육받았고 민족주의적 사학자들의 열정으로 만주 경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시기의 고구려 일부 역사를 배웠고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그저 삼천궁녀와 방탕에 빠진 의자왕으로 인해 망한 나라 정도로만 인식되도록 배웠다. 그동안 백제에 관한  역사서는 참 드물었다. 평생을 백제 연구에 바쳐온 이도학 교수의 (798쪽에 이르는 방대한) 백제사는 궁금했던 백제왕국의 실체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참으로 귀한 감로수 같은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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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글들>

 

백제라는 국가의 국호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첫째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만주에서 남하해온 온조와 비류형제가 나라의 터전을 잡는데 그 위치 선정에 의견이 엇갈렸다. 지금의 인천인 미추흘에 근거지를 형성한 비류와는 달리, 온조는 지금의 서울을 가리키는 위례성에서 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온조는 국가 경영에 있어 열 명의 신하(十臣)들의 보좌를 받았으므로 국호를 십제(十濟)로 정하였다고 한다. 그 후 국가 경영에 실패한 비류계의 미추흘 백성들이 온조계의 근거지인 위례성으로 합류하였다. 그때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고 하므로 국호를 '百濟'로 고쳤다고 한다.

둘째는 중국 수나라의 역사를 적은 <隋西>의 백제조 기록이다. 이 책에 의하면 국호의 유례를 百家나 되는 집단이 바다를 건너와서 국가를 세운 데서 찾고 있다. 즉, '百家濟海'라는 말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국호를 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백제를 건국한 세력의 규모와 건국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여 국호의 유래를 끌어낸 것이라고 하겠다. 이 기록을 중시하여 백제의 국가적 성격을 해양국가로 규정하기도 했다.


셋째는 시조 이름에서 국호가 기원했다는 견해이다. 우리말에서 '百'의 옛 새김은 '온'이므로 백제를 '온제'로 읽을 수 있다. 이는 백제 시조의 이름인 溫祚와 그 음이 연결된다. 이러한 경우는 적지않게 확인된다. 가령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카인은 제가 세운 고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로마(Rome)라는 도시와 국호의 유래도 시조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형제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만주를 비롯한 유목민지역에서도 部의 이름이나 국호가 시조 이름에서 기원하기도 한다.

넷째는 백제라는 국호를 우리말의 '밝잣' 곧 '光明한 城'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다.  즉, 백제의 '백'을 '밝', 다시 말해 '광명'과 연결짓고, '제'를 성을 가리키는 말로 풀이하였다. 고대인들의 태양숭배 신앙과 결부지어 나온 해석이라고 하겠다......


다섯째는 백제라는 국호는 '貊城'의 뜻을 지닌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貊族의 國城'이라는 뜻이다. 백제의 '백'은 다름 아닌 그 국가를 세운 종족 이름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예맥족(濊貊族)의 '맥'은 '박(박)'으로도 표기하고 있는데 본디 음은 모두 '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백제의 백은 종족 이름을 가리킬 수 있다......


위와 같은 백제 국호의 유래 가운데 <삼국사기>와 <수서>에 적혀 있는 기록은 '백제'라는 국호를 놓고서 탁상에서 고안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가령 '백가제해' 기원설의 경우는 고려(高麗)라는 국호가 '山高水麗'에서 취했다는 견강부회식 해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 견해들은 나름대로의 근거를 지니고 있는만큼 반감되지 않은 매력을 지닌다.

 

472년에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 의하면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여 왕실의 계통을 밝히고 있다. 그랬기에 백제는 538년에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국호를 南扶餘로 고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백제는 장구한 세월동안 국가의 법통을 부여에서 찾았다. 오늘날 백제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 이름을 '부여'로 일컫고 있다. 부여 왕국과 연관짓고자 햇던 백제인들의 집념에 찬 열망이 맺혀 있는 듯하다. 백제사의 출발은 이제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로 새롭게 인식되어야만 한다.

 

신라에서는 고유한 관직 이름과 복식 이름을 보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 백제는 좌평이니 달솔과 같은 관직의 명칭이 중국식으로 雅化되어 있고, 복식 이름도 중국화되어 있어 문화 전반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族制的인 요소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동시에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만주에 소재한 부여에서 기원하였던 만큼, 부여를 위시한 북방적인 요소도 강하게 남아 있다. 가령 5세기 중반 기록에 등장하는 좌현왕과 우현왕 제도는 흉노를 비롯한 유목 사회에 등장하는 직제이다. 


선우를 축으로 하여 왕위 계승권을 가진 근친 왕족들을 좌현왕과 우현왕에 임명하여 영토의 동방과 서방을 각각 통치하게 하였다. 백제 권력의 중추부에 좌, 우현왕 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여기에만 국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회 전반에 이와 연관된 유목적인 기풍이 녹록하지 않게 남아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4세기 후반 이후에 등장하는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적석총의 조영도 단연 북방적인 요소로 꼽을 수 있다. 요컨대 북방과 해양이라는 양대 문화 요소가 백제 문화의 큰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중 전자는 백제 기원과 관련하여 생성 된 것이요, 후자는 자연 환경이나 풍토 속에서 얻게 된 일종의 수확인 셈이다.

 

지금의 서울 지역에 정착한 온조 집단은 백제를 세워 마한연맹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어디까지나 마한의 맹주이자 적어도 대외관계에서는 삼한연맹 전체에 대한 영도권을 쥐고 있는 목지국에 예속된 상태였다. 그것은 몇가지 점에서 확인된다. 즉, 온조왕이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임진강인 칠중하에서 말갈 군대를 격파한 후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있다 (온조왕 18년). 그리고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온조왕 13년). 요컨대 백제는 마한으로 대표되는 목지국에 전쟁 포로를 바치거나 천도를 고하는 등 부용국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연맹 내에서 加로 일컬어지는 호족들이 독자적인 家臣과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명단을 중앙의 국왕에게 보고하는 양상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의 지형적 특질은 일찍부터 해상 교통을 가능하게 하였던 관계로 중국대륙과 일본열도를 잇는 해상 교통로가 개척되었고, 그에 수반하여 교역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색 속에서 한반도의 서남부지역을 무대로 성장한 백제는 4세기 중엽에 마한 전역에 대한 지배권 확립과 동시에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서남해안 지역, 그리고 일본 열도를 잇는 교역로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백제는 낙동강 유역에 진출하여 종래 구야한국(김해)이 장악하였던 교역 중개지로서의 위치를 독점함으로써, 중국, 백제, 가야, 왜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이후 백제는 동진과의 교섭을 통해 국왕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였거니와, 중국 군현이 소멸된 후 일시적으로 공백 상태에 빠진 중국대륙과의 교역도 활성화시켰다. 백제왕은 자국 영내와 그 영향권 내 세력들의 교역을 통제함으로써 그들을 지배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백제왕은 교역품의 분여를 통해 권력 범위를 확대하였을 뿐 아니라 강화시켜 나갔다.....또한 백제는 동일한 방법을 통하여 왜까지도 정치적으로 예속시킬 수 있었다. 백제 왕실은 국제적인 대규모 교역체계를 관리함으로써 얻어지는 경제적 역량을 토대로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다져 나갔다.

 

근초고왕이 몸소 한수 남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면서 모두 황색 기치를 사용하고 있다. 황색은 음양오행설과 관련지어 살펴볼 때 방위상 중앙을 뜻하거니와, 황색의 기치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황제뿐 아니라 국왕들이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경우도 5부 가운데 왕실이 속한 계루부를 內部 혹은 黃部라고 하였으므로 황색은 왕이나 왕자가 속한 中部(內部)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귀족- 大姓 8族: 백제의 귀족 가문으로는 먼저 건국 초부터 등장하는 성씨로서 解氏가 있다. 해씨는 부여씨 왕족들과 함께 부여에서 남하하여 백제 건국의 한 축을 형성한 가문이었기에 만만치 않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한성 도읍기 이래 해씨의 견제 세력이었던 眞氏가문이, 살해된 문주왕의 아들인 13세의 삼근왕을 옹립하면서 제동을 걸었다....그밖에 木려라는 복성의 木氏가 있었다.....목려만치는 권력 다툼에 패하여 왜로 건너가 소가 지역에 터를 잡았다. 그가 왜 조정을 휘어잡았던 소가씨(蘇我氏)의 실질적인 시조라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백제가 웅진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금강 유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다양한 씨성들이 등장한다. 砂氏, 백씨, 燕氏, 國氏 등이 대표적이다....이들 가문이 이른바 백제 8대성에 해당된다.

 

의지왕은 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각 식읍까지 내려 주었다. 6좌평제에서 무려 41명의 좌평이 추가되었다. 이는 명예적 성격이 다분하지만, 이 사실은 백제 중앙관직체계뿐 아니라 국가조직 전반에 걸친 모순의 야기와 동요를 점치게 하는 것이다. 참고로 의자왕 하면 흔히 대명사처럼 따라붙는 것이 '삼천궁녀' 이야기이지만 언급할 가치도 없다. '삼천궁녀'는 15세기대의 시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문학작품 속에서나 보이는 허구적인 이야기일뿐이다. 다만 의자왕의 서자 숫자만 41명이었던 점을 생각할 때, 그의 자녀 수는 족히 1백명은 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따라서 의자왕은 왕비외에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음은 분명하다. 


다만 그들 슬하의 아들들에게 공히 좌평을 제수하였음은, 여인들의 소속 가문을 종적으로 위계화시키지 못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는 의자왕이 그것을 시도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기보다는 여인을 매개로 한 權臣들의 정치 개입이 심화되었고, 권신들 간에는 일종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 귀족 세력의 권력 독주를 용인하지 않기 위한 의자왕의 견제 시책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七枝刀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칼몸에 여섯 개의 가지가 붙어 있는 칠지도의 특이한 형상에서 암시를 받을 수 있다. 우선 대부분의 명문철검은 칼등에 글자가 새겨져 있지만, 칠지도는 명문의 훼손이 쉬운 칼면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칠지도는 非實戰用 刀劍임을 짐작하게 하는데, 聖器 혹은 呪具의 기능을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형태가 靈力이 있다고 믿어진 사슴뿔이나 鈴鼓 등을 걸어 놓았던 蘇途의 神木가지를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칠지도는 여기서 착안하여 제작된 종교적 儀具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유사한 '出'자형 (녹각형) 금관을 착용한 신라왕은 사제적 성격이 농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신라 금관과 같은 수목형 관모양식의 계통을 시베리아 제민족의 생명의 나무인 世界樹에서 찾고 있는 바, 칠지도의 형상 또한 그것에서 구했으리라고 본다. 세계수는 나무 꼭대기에 한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인데, 칠지도는 새만 없을 뿐 그것과 동일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세계수를 挑都라는 신목으로 일컫고 있는데, 광명과 벽邪의 기능을 가진 신앙대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산꼭대기의 나무는 천상계와 지상계를 잇는 축이나 기둥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도도는 수목 숭배 신앙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과 형태가 연결되는 칠지도는 우뚝 솟은 신상에 있는 신목, 즉 단군신화의 神檀樹와 같은 애니미즘적 신앙의 대상을 도검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지상의 샤먼은 우주의 축을 이용하여 천상왕래를 한다고 믿어졌는데, 칠지도는 천손을 자처한 백제왕의 샤먼적 역할과 권위를 과시해주는 聖器가 될 수 있다.

 

경쟁관계에 있던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의 사당인 동명묘를 제각기 설치하였다. 이는 부여의 법통 게승을 선포하는 것인 동시에, 전체 예족사회에 대한 종주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광개토대왕) 능비문에서 신라나 임나는 그 국호를 당당히 표기하고 있으며, 또 후연은 누대에 걸친 앙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유독 百殘이라는 蔑稱과 그 임금을 殘主라고 폄하시키는 표현, 그리고 전쟁 사실이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구려가 백제를 최대의 경쟁자로 간주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자세히 기재할만큼 그 전승은 어느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역으로 말해 정치적 호칭인 백잔이라는 멸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능비문의 일방적인 압승 기록과는 달리 백제는 여전히 버거운 상대였음을 함축한다고 보겠다.....


요컨대 능비문의 핵심인 전쟁기사는 고구려 최대의 경쟁자인 백제를 염두에 둔 일종의 전승기념비요, 백제 군대에 피살된 광개토대왕의 조부 고국원왕의 宿憤을 말끔히 씻었음을 과시하는 정치선전문이었다. 광개토왕릉비임에도 불구하고 태왕릉 곧 고국원왕릉 앞에 굳이 그것이 세워진 이유는 이러한 배경에서 유래했던 것이다.

 

백제와 倭와의 교섭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부터 시작된다. 백제는 이때 倭 조정이 탐내던 철정이나 각궁전 같은 무기와 더불어 채견과 같은 비단 등을 선물하였다. 이후 백제와 왜의 관계는 조국 회복군이 패퇴하는 663년 9월뿐 아니라 웅진도독부가 소멸되는 672년까지 무려 300년간 우호적으로 진행된다......백제는 남조와의 활발한 교섭을 기반으로 오경박사, 의박사, 易박사, 歷박사, 採藥師 등을 왜로 파견하는 횟수를 증가시켰다.....


백제는 남조에서 수입한 물품을 왜에 재수출하는 형식을 통하여 그 예속을 강화하는 한편, 그 물품을 야마토 정권 내 호족에게 분여하여 그곳에서의 입지를 확대하려고 한 듯하다.....백제와 왜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특징이 발견된다. 백제와 왜가 수교한 이래 백제가 소멸되는 그 날까지 왜에게 엄청난 정신적, 물질적 선물을 안겨 주었다는 것이다. 유교, 불교를 비롯하여 낱낱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요, 질적으로도 단연 우수한 선진 문물이었다. 백제는 문화전수자의 역할을 단단히 하였던 것이다. 반면 왜는 군대를 출병시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역학관게에서 백제가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데 일조해 주었다.....


요컨대 백제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왜를 중시했다. 백제가 필요로 했던 군사력을 빌리는 데 가장 유효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대왜 교섭은 請兵 외교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백제는 효과적인 청병을 위해 태자와 같은 비중이 높은 왕족뿐 아니라 왕녀와 더불어 관인과 승려까지 앞세우는 입체적이고도 포괄적인 외교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만큼 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 동란의 시기에 있어서 군사적 지원은 절박한 문제였다.

 

백제 요서경략설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제기한 이래 많은 지지자들을 낳았지만, 현재 이 학설은 퇴조하고 있는 상황이다....백제의 남방경영은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 경영부터 시작된다. 백제는 남방항로의 기항지인 탐라를 점령하였다. 이곳은 섭라라고도 일컬었던 곳으로 백제 이전에는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고구려는 제주도를 백제에 빼앗겨 말 재갈 장식에 사용되는 珂라는 貝類를 더 이상 보낼 수 없다고 북위에 하소연하였다. 498년경의 일이었다. 백제는 제주도를 기항지로 하여 이전부터 진출해 있던 북규슈를 잇는 상설항로를 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백제는 유구국으로 불리었던 지금의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시켰다. 필리핀 군도는 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이다. 이곳이 백제와 연관있음은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백제장군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말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그 가문은 부여씨 왕족에서 나왔지만 흑치에 분봉된 관계로 그 지명을 따서 氏를 삼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왕족을 지방의 거점에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백제는 다시금 항로를 확장시켜 인도차이나 반도에까지 이르렀다. 즉, 지금의 캄보디아를 가리키는 부남국과 교역한 사실이 <일본서기>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백제는 북인도 지방에서 산출되는 페르시아 직물인 탑등을 수입하여 왜에 선물하기까지 했다.....


백제의 해외 경영은 다양한 인종의 거주와 물산의 집중을 가져왔다. <수서>에서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섞여 있으며, 중국인도 있다"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백제를 해상 교역 활동의 중심지로 보고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雜居하는 국제화가 이루어졌다고 보겠다.

 

오키나와는 1609년에 일본에 복속되기 전에는 '유구'라는 이름의 독립왕국이었다. 이곳은 한반도와는 1,000Km 이상의 먼 거리에 위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석기시대 이래의 문화 양상은 너무나 한국적이다. 가령 빗살무늬토기의 영향을 받은 소바다식 토기를 비롯하여 청동기 시대의 석관묘, 그리고 오키나와 각지에서 출토되는 상감청자와 고려 광종대에 제작된 銅鐘이라든지, 우라소에 성 터에서 출토된 "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명문기왓장이 잘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물증 뿐 아니라 줄다리기 같은 풍습까지도 오랜 시일에 걸쳐 간단없이 한국의 인적, 물적 영향을 받았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는 유구국의 왕성인 首里城의 正殿에 걸어놓은 동종의 명문에 "유구는....三韓의 빼어남을 모으고, 大明을 輔車로 삼고, 日城을 脣齒로 삼는다"라고 하면서, 삼한, 즉 한국을 제일 먼저 적으면서 그 문화의 수용을 함축하고 있는 데서도 뒷받침된다. 유구국 사신이 한반도에 내왕하였음은 허다하게 전하고 있다.

 

백제의 고이왕이 "왕이 釜山에서 전렵을 하다가 50일 만에야 돌아왔다"라고 한 부산은, "振威縣은 본래 고구려 釜山縣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 <삼국사기>지리 2"라고 하였듯이 지금의 경기도 송탄시를 가리키는 행정지명이다.

 

백제 왕성인 위레성의 어원을 다산 정약용은 '우리', 즉 울타리에서 기원했다고 하였는데, 몽촌토성에서는 최초의 성이라고 할 수 있는 목책이 보인다..........삼전도비에서 5분가량 큰 길을 따라 서쪽으로 걸은 후 좌측으로 꺽어지면 담으로 둘러싸인 부지안에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이 있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돌담으로 둘러싸인 한옥과 길가에 널려 있던 실로 많은 돌무더기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돌마을' 즉, 석촌이라는 동네 이름은 돌로 쌓은 피라미드 형태의 무덤인 적석총에서 연유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모두 89기의 고분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적석총 4기를 포함하여 구조를 달리하는 모두 8기의 고분만 보존되었다. 이 가운데 석촌동 3호분은 동서 약 50미터, 남북 약 49미터의 길이로 복원된 장대한 적석총이다. 석촌동 3호분의 둘레는 고구려 광개토왕릉인 장군총을 능가하고 있다. 이 고분을 통해서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고구려와 더불어 만주에 있다가 남하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고구려에 뒤지지 않는 국력을 생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