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승동교회, 백정 박성춘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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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유래

2013. 6. 11.

地域 敎會史 (2087)  

승동교회, 백정 박성춘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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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년 당시 인사동 승동교회

 

   승동교회는 1893년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가 세운 곤당골예배당(현 소공동 롯데호텔 뒷편)에서 시작된다. 무어 목사는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백정 등 천민들을 대상으로 전도했다. 이 때문에 승동교회는 ‘백정교회’로 불리기도 했다. 1895년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양반계층이 홍문섯골교회를 세워 나갔다가 1899년 가을 다시 합쳤고 1905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1939년 이곳에서 지금의 한신대학 전신인 조선신학교가 개교된다.


   한국초기교회에는 사회에서 천대를 받던 백정, 기생, 광대 등 소위 칠천역들이 많았는데 특히 승동교회는 백정 해방운동을 선도했다.

 


   교회 앞에 있는 3.1운동 기념비 표석

 

   백정 박성춘, 자신은 비록 천한 무식쟁이였지만 자식만은 공부를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아들을 곤당골 예수교학당에 입학시켜 결국 자기도 기독교인이 된 인물. 박성춘이 콜레라에 걸리자 아들은 무어 선교사의 친구 애비슨(고종의 어의)에게 치료를 부탁한다. 콜레라가 치료되자 박성춘은 회심하고 전도에 나서 서울 수원 등지에서 수백명의 백정에게 복음을 전하고 정부를 상대로 백정인권운동인 ‘형평운동’도 벌였다. 애비슨 선교사의 도움으로 백정의 지위가 공식적으로 회복되었다. 1911년 박성춘은 승동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된다. 아들 서양은 세브란스 의전을 1회로 졸업,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가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엔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주, 숭신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에 헌신했다. ‘예수 믿고 성춘이라는 이름도 얻은 백정 박가’의 집안에서는 많은 학자 의사 교육가 등이 배출되었다 한다.


   승동교회는 일제시대 때 민족운동의 큰 역할을 한다. 당시 이 교회에는 연희전문의 학생대표 김원벽이 다니고 있던 관계로 1919년 2월 20일 전국의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이 교회 지하에 모여 조국 독립을 위한 기도회를 한다. 거사 직전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 1500매가 학생대표들에게 배포되는 등, 독립 만세 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해냈다.


   1912년 준공하고 1958년 증축된 교회당은 2001년 3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130호로 지정됐다. (2004. 12. 25. 순복음가족신문 / 이소흔 기자)
 

 

 
            양반보다 먼저 장로가 된 백정 박성춘 
             “예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다”


   서울 승동교회는 1892년 모삼열(S. F. Moore, 이하 모삼열로 표기)에 의해 설립된 교회다. 무어 선교사는 1892년 1월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고 가족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앞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밀러 선교사의 안내를 받아 서울에 안착하였다.

 


    모삼열 선교사


   그는 선배 선교사들의 인도를 받고 조선말과 조선 문화 역사를 배운 후 백정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곤당골(현 을지로 입구)에서 서상륜 권서와 함께 선교활동을 벌였다. 1892년 6월, 16명을 모아 놓고 곤당골교회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백정들만 모여 예배를 드렸지만 양반과 중인들이 이들에 합세하면서 꽤 많은 교인들이 예배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양반들이 선교사에게 면회를 요청하였다.


   “선교사님, 우리 양반들에게 따로 앞자리를 마련해 주면 좋겠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습니다.”


   양반들은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곤당골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는 광교 다리 근방에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홍문삿골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삼열 선교사와 서상륜 권서는 바쁜 주일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 명례동(현 명동)에는 중인들이 많이 살아서 홍문삿골교회는 계속 예배 인원이 늘어갔으나 불행하게도 그만 화재가 나 전소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무렵 곤당골교회도 부흥 성장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하려던 참이어서 홍문삿골교회 교인도 함께 예배드리기로 하고 1904년에 절간이 많이 모여 있는 인사동(仁寺洞)으로 옮기게 되었다. 인사동은 불교의 본산지인 조계종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작고 큰 암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모삼열 선교사는 불교 마을에서 신앙생활에 승리할 수 있도록 이길 승(勝)과 마을 동(洞) 글자를 따 승동교회(勝洞敎會)라 이름지었다. 이 교회는 다행히 모삼열 선교사와 서상륜 권서의 협력으로 계속 부흥 성장했고 상회의 허락을 받고 장로 1인을 선출하게 되었다. 드디어 공동의회를 개최하였다. 


   “세례 받은 지 1년이 지나고 나이 만 30세 이상이면 누구나 장로 될 자격이 있습니다.”

  

  

박성춘 장로의 아들 외과의사 박서양


   승동교회에는 양반도 있고 천민도 있었지만 다들 모삼열 선교사의 말에 귀 기울이고 기도하며 투표했다. 그리고 박성춘 백정이 공동의회에서 회원의 2/3 이상 득표하였기에 승동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다. 양반은 장로 투표에서 낙선되고 말았으며, 천민인 박성춘이 장로로 선출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양반과 천민들의 차별이 시작되었을까? 양반과 천민의 출현은 삼국시대부터 부족사회 출현과 함께 생겨난 신분계급이 이씨 조선 시대부터 그 신분의 차별이 두드러지게 권력적 지배와 경제적 생산관계의 세습적 집단으로 상류(양반), 중류(상민), 하류(천민)의 계급이 형성되었다. 양반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관리, 귀족 등에 대한 칭호로서 국가의 특전을 받는 지배층이었다. 그러나 양반의 개념이 변해 조상의 혈통을 기준으로 소위 사대부(士大夫) 출신을 양반이라 칭하였다. 여기에 유학(儒學)으로 소위 유교(儒敎)를 신봉하므로 차츰 가계(家系)의 신분으로 정권에 참여했다.


   양반들은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과 함께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 병역을 비롯해서 세금, 부역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죄를 지어도 회초리로 정강이 밑을 형식적으로 때리는 척 흉내만 냈다. 머슴(家奴)이 대신 매를 맞아도 되었다. 혹시 양반이 지나가게 되면 그 앞에서 가던 걸음도 멈추고 서서 머리를 숙여야 했다. 더욱이 백정들은 아무리 돈이 있어도 집을 지을 때 기와를 얹지 못하였다. 자녀가 결혼을 해도 가마를 타고 갈 수가 없어 업고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디 이것 뿐이겠는가. 사람이 죽어 상여가 나가야 되는데 상여도 나가지 못하고 시신이 든 널을 지게에 지고 산에 묻어야 했다.


   이렇게 천대받던 백정이 장로로 선출 되자 양반들은 백정인 박성춘 장로 밑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며 양반 이여한, 황기연 등이 당시 승동교회 당회장 곽안련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1909년 승동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는 안국동에 한옥을 매입하고 안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초대 목사로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의 한 사람인 한석진 목사가 부임하였다. 한석진 목사는 일본 동경교회에서 교회 기틀을 마련하고 귀국하여 야소교 신문사가 출발하자 사장으로 취임했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종로5가에 자리 잡고 있는 연동교회 출신 유성준, 박승봉, 김창제 등 일부 교인들이 여기에 합세하였으며, 1910년 유성준과 박승봉이 장로로 장립을 받으면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이 일로 양반교회(兩班敎會)로 소문나면서 서울에 양반들이 여기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박성춘 장로의 진실한 활동으로 백정들이 모여 들면서 승동교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해 갔었다. 특별히 무어 선교사로부터 이미 신앙훈련을 잘 받았던 박성춘은 갑오개혁 시 계급타파에 앞장섰고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박성춘이 단상에 올라가서 “우리에게 서양문화를 뿌려 주었던 예수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외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 기독교적인 사상이 들어갔기에 이미 그의 아들 박양서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최초로 천민의 자녀가 의사가 되어 양반들이라고 큰 소리를 쳤던 그들이 병에 걸리자 천민의 자녀 앞에서 진찰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9. 5. 2. 한국장로신문 / 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