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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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찬송가 해설

2014. 5. 9.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사사오 데쓰사부로 작사 - 박재훈 작곡)

《통일 찬송가, 1983》 460장 

 

이 찬송은 일본 홀리네스교단 최초의 찬송가인「구원의 노래」(救いの歌, 1894)1 에서 이장하(李章夏, c.1886- ?) 목사가 번역하여, 1919년 성결교에서 발행한《신증 복음가, 1919》46장에 처음 번역 · 채택되어 별로 수정 없이 오늘까지 애창되는 찬송으로서, 일본 동양선교회(OMS) 초창기 지도자 사사오 데쓰사부로(笹尾鐵三郞, 1868-1914) 목사가 1897년에 작사한 찬송이다.

 

 

성결교에서 발행한《신증 복음가, 1919》46장

 

 

가사가 은혜스럽고 거기 사용된 곡조 'NETTLETON'(복의 근원 강림하사 곡조)도 우리가 좋아하는 5음계에 3박자라서 애창되었다.

 

같은 곡조로「복의 근원 강림하사」「눈을 들어 산을 보니」등도 불렀는데,《개편 찬송가, 1967》편찬 때「한 곡조에 한 가사만 인정한다」는 원칙 때문에,「눈을 들어 산을 보니」는 폐기하고, 이 찬송은 가사를 살려 채택하자 하고 작곡을 공모하였는데, 박재훈의 곡조가 채택되었던 것이다.

 

 

《개편 찬송가, 1967》464장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NETTLETON'(복의 근원 강림하사 곡조)으로 부르고 한국에서는 박자훈 곡으로 불러왔는데, 2001년 일본에서 《新聖歌, 2001》을 내면서 박재훈 곡을 채택하여 한-일 양국이 가사는 일본 것, 곡조는 한국 곡조로 부르게 되었다. (아래 악보 참조)

 

新聖歌, 2001》331장

 

《통일 찬송가, 1983》편집 때 보수교단 측에서 옛 곡조도 살리자, 하여 같은 가사에 456․457 두 장에 실렸었는데, 이번에 옛 곡은 빼어버렸다.

 

작사자 사사오 데쓰사부로 목사

 

작사자 사사오 데쓰사부로(笹尾鐵三郞, 1868-1914) 목사는 1869년에 일본 이세(伊勢)에서 태어난 홀리네스파 목사다. 무역업자로 성공해보려고 1888년에 미국으로 갔다가 어느 목사 부인을 만나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 후 샌프랜시스코에서 열린 전도집회를 구경 갔다가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감리교인 가와베 데이끼지(河辺貞吉, 1864-1953)와 함께 샌프랜시스코, 시애틀 등지에서 전도를 하였다.

 

1894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마쓰에(松江)에서 벅스턴(Buxton, Barclay Fowell, 1860-1946) 영국 성공회 선교협회 선교사의 지도를 받아, 후에 가와베 데이끼지가 시작한 일본메소디스트 교회에 출석하였다.

 

후에 벅스턴 선교사의 소개로 나까다 쥬지(中田重治, 1870-1939)를 만나 1901년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교수가 되었다. 그 동안에 벅스턴 선교사와 함께 영국과 미국을 돌며 순회전도를 하였다.

 

나까다 쥬지 목사

 

벅스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마쓰노 기꾸따로(松野菊太郞)와 함께 일본 홀리네스교단 최초의 찬송가인「구원의 노래」(救いの歌, 1894) 를 편집 발행할 때 많은 찬송을 번역 · 창작하였다. 1913년 성서학원을 사임하고 전적으로 전도사업에만 힘을 기울여 규슈(九州)에서 혹까이도(北海道)까지 전국 순회전도에 힘썼다.

 

「救いの歌, 1894」안표지

「福音唱歌, 1901」안 표지

 

이 찬송은「救いの歌, 1894」와「福音唱歌, 1901」에 실린 후, 일본 홀리네스교단 최초의 공식찬송가《리바이벌 성가》(リバイバル聖歌, 1923) 186장에 실렸고, 현행 찬송가인《聖歌, 1958》292장에 실려 있다.

 

작곡자 빅재훈 목사

 

작곡자 박재훈(朴在勳, 1922~ ) 목사는 1922년 강원도에서 박창숙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으로 가서 요한학교에 입학, 장수철, 윤춘병 등과 함께 1943년 3회로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곧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훈련소에서 도망쳐 귀국, 평남 강서군 문동국민학교의 교사로 교편을 잡은 그는 이유선(李宥善, 1911 ~ 2005) 교수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1946년 4월에 월남하여 서울 용산에 있는 금양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46년 그 동안 작곡한 동요들을 모아《일맥동요집》을 출판하였다. 일맥(一麥)이란「한 알의 밀알」을 뜻이다.

 

그는 대광고등학교의 음악교사로 자리를 옮긴 후, 야간으로 새로 설립된 중앙신학교에 입학 제1회로 졸업하였다. 6.25 사변 때에는 해군 정훈음악대에 복무하였다. 전쟁 후에는 기독교방송 음악과장, 영락교회 찬양대 지휘자로 일하였다.

 

1955년 그는「박재훈 동요작곡집」을 기독교아동문화사 (대표 안성진 목사) 에서 출판하였다. 국판 45쪽에 31곡이 수록되어 있다. 1959년 미국에 유학간 그는 웨스트민스터합창대학, 크리스천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귀국하여 한국찬송가위원회 간사로 있으며 음악전문위원으로서《개편 찬송가, 1967》 편집을 도왔다. 장수철이 세상을 뜬 후 그의 후임자가 되어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북미 지역을 순회 연주하기도 하였다. 1965년부터는 숭전대학, 장로회신학대학, 서울신학대학, 서라벌예술대학, 한양대학교음악대학, 서울대학교음악대학 등의 강사로 출강하였다. 1982년 회갑을 넘긴 그는 미주 한인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84년 토론토에 큰빛장로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다가 1990년 정년 은퇴하였다. 2013년 그의 전기 <작곡가 박재훈 목사 이야기>가 장신대 총장 문성모 목사 저술로 홍성사에서 출판되었다.

 

 

존 언더우드 목사의《통일 한영 찬송가, 1990》460장

 

해외 출장 갔을 때나. 외국 손님이 찾아 왔을 때 등에

부르면 좋겠다 싶어 스캔하여 올린다.

 

 

각주 1

「구원의 노래, 救いの歌」책은 없지만, 일본《福音讚美歌, 1941》판권승인(Acknowledgements) 난에 보면, 어느 책에서 채택하였는가를 자세히 알 수가 있다. 福音讚美歌 303장에 실려 있다.

  1. 「구원의 노래, 救いの歌」책은 없지만, 일본《福音讚美歌, 1941》판권승인(Acknowledgements) 난에 보면, 어느 책에서 채택하였는가를 자세히 알 수가 있다. 福音讚美歌 303장에 실려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