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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애국가 친필본 원본을 열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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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진실

2014. 8. 19.

윤치호 애국가 친필본 원본을 열람하다. 애국가 제자리찾기 / 문화재제자리찾기

2014/07/1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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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애국가 친필본 



원본을 열람하다.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조계종 승려)

*2014년1월 31일 에모리대학에 소장된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를 직접 열람하고 쓴 칼럼입니다.


에모리 대학에 소장된 윤치호 친필본 애국가.(복사본)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본인이 작사가임을 밝혀 놓았다. 친필본은 1945년 9월에 쓰여 졌다고 한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가 확정을 위한 심의를 진행했었다. 당시 국편의 심의 결과 윤치호 작사설은 112로 우세했으나, 만장일치가 아니란 이유로 부결, 현재까지 작사가 미상상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 당시 보고서를 살펴보니 “1907년 윤치호 작이 위조가 아니라면 윤치호 작이라해도 무방하다라는 최남선 위원장의 언급을 남긴 채 종결되고 있었다.

윤치호가 자신이 작가가라고 밝힌 친필본은 1990년대 유족들에 의해 에모리 대학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애국가 작가가의 규명을 위해서는 윤치호 친필본의 확인과 친필여부가 애국가 작사가의 규명을 위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과제가 되지않을까? 2014131일 오후 2시 에모리 대학의 애국가 열람은 그런 취지에서 추진되었다.

유족들의 동의하에 원본을 열람하면서 사실 좀 놀랐다. 윤치호 친필본에는 이른바 노익장이라고 할만큼 힘이 담긴 글씨가 기괴하고 원숙한 필체로 구불구불 숨고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진으로 보았을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마치 한편의 그림처럼 정성을 다해 써내려간 느낌이었다. 이렇게 개성이 묻어난 작품을 누군가가 대신 작성한 위조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 했다

친필본 뒷면에는 “19459월 아버지께서 친희(친히) 써주신 것이라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이것을 두고 1907년이 아니라 1945년 쓰여진 기록이므로 위작혹은 가치가 없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 문서가 갖는 사료가치는 작성 시점이 1907년이냐 1945년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애국가 작사가라고 밝혔다는 점에 있으므로 작성시기의 문제는 일단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윤치호 친필본의 위작 논란은 윤치호의 친필여부에 초점이 모아져야 다음단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서가 1907년이 아니라 1945년 쓰여졌으므로 가치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란 가정에서 본다면, 이 문서의 가치는 좀더 다른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안익태 친필 애국가 악보는 49년도에 작성되었지만 2011년 근대 문화재 476호로 등록되었다. 동일한 입장에서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가 맞다면, 1945년 쓰여진 애국가 친필본은 국가기록물로서 문화재적가치가 상당하다고 할 것이다.




​에모리 대학에 보관된 찬미가 재판본. 1908년 6월 25일 발행된 재판본이다. 역술자 윤치호 발행자 김상만으로 광학서포에서 발매되었다. 찬미가란 제목은 찬송가 모음집이란 의미이다. 찬미가 14장에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다.

에모리 대학에서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의 원본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윤치호는

1908찬미가라는 교회 찬송가집을 번역 출판했는데, 찬미가의 14장에 현행 애국가 가사와 후렴이 거의 그대로 수록되어 있었다. 찬미가에는 윤치호 작이 아니라 윤치호 역술(譯述 )이므로 작사가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았던 유길준이 서유견문록을 저술할 때, ‘집술이라고 기재한 것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개화기의 지식인들은 역술’ ‘집술과 같은 언어로 자신들의 저작물을 남기는 풍조가 있었던 듯 하다. 게다가 1908년 윤치호 역술이란 표기가 지닌 부족함은  1907년 윤치호 작이란 친필본의 존재로 다시 보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19010년 신한민보에 윤치호 작국민가란 제목으로 애국가 가사가 수록된 기사도 에모리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런 문헌기록을 토대로 볼 때, 애국가와 윤치호가 지닌 연관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할 것이다.

윤치호 친필본 열람을 놓고 일부 사람들은 윤치호 작사설을 주장하기 위한 행보가 아니냐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필본을 열람하는 것은 애국가 작사가 규명을 위한 증거들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일뿐, 윤치호를 옹호하거나, 안창호 작사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윤치호,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창작하고 보급했던 민족의 노래라고 생각한다. 주요 작가가가 친일파란 이유로 애국가 작사가란 사실이 부정되거나 작가미상상태로 남겨 두려고 해서도 안된다. 사실은 사실로써 충분히 규명되어야할 당위성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제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난지 70년이 가까운 세월이 다가온다. 민족의 노래가 된 애국가를 언제까지 작가미상의 상태로 방치할 것인가. 정부는 광복70주년을 맞는 2015815일까지 애국가 작사가를 규명하기 위해 즉각 심의기구를 설치하기를 다시 한번 촉구한다.



 

안민석의원과 윤치호 관련 자료를 확인하는 모습

 



 

애국가   친필본 열람을 앞두고 에모리 대학교 도서관측의 설명을 듣는 모습. 우측은 당시 에모리 도서관 소개와 통역을 담당한 분. 김대중 대통령의 손자라고 한다.

 


 

윤치호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감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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