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내가 죽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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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문학가협회

2014.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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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는 나에게 <소운(小雲)>이란 아호를 지어주신

은사 고 김정준 목사님의 시다.

이 시는 나의 시이기도 하다. 

 

내가 죽는 날 

                             

 

 

1953년 은사 김정준 목사님과 함께


 

내가 죽는 날은 비가와도 좋다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은

 

감격의 눈물인 까닭이다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세상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나라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 그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추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품에 안긴

 

광채를 보여 줌이라


 

 

 

내가 죽는 그시간은 밤이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거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리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1. 성장과 투병생활

1914년 11월 6일 경남 동래군 구포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기독교가정에서 성장하여 1935년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때 성경교사 송창근박사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939년 연희전문학교를 2년 수료하고 도요쿄오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여 43년 졸업했다.

귀국하여 경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경주 불국사 역전의 구정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았고 45년 8월 송창근 박사의 후임으로 경북 김천의 황금정교회에 전임하여 목회에 열중하던 중 이듬해 결핵으로 마산국립요양원에 입학가료하게 되었으나 그의 신병이 그의 믿음과 경건과 또한 학문에 지장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유익을 주는 것이 되었다.

그는 살아날 희망이 없던 중병으로 의사의 최후언도를 받았으나 끝내 믿음으로 기적적인 회복을 보게 되었다.

2년반동안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구약 시편을 탐독하여 전부 암송하게 되었고 그 오묘한 의미를 터득하여 후일 그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시편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저서 [나의 투병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는 그곳 요양원에서 요양원교회를 창설하고 친히 강단을 맡았다.

 

2. 한국신학대학학장

1949년 3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여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성남교회 목사르 겸임했다. 그는 1953년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 임마누엘신과대학에서 2년동안 수학하고 구약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귀국하여 교편을 잡다가 다시 59년 5월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돌아와 6대 한국신학대학학장에 취임하였다.

그후 63년 4월 연세대학교 교목실장 겸 신학대학 구약학 교수로 부임 하였고, 64년 1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 원장에 임명되었다. 70년 5월에는 다시 제8대 한국신학대학학장으로 취임하염아다.

 

3. 신학교육과 구약학 발전에 공헌

 

그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남북 아시아지역의 신학교육과 구약학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한국의 구약학회장을 다년간 역임하면서 구약학개쳔에 전념하였고 65년 전국신학대학협의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으로서 국내 신학교육의 협력과 향상의 토대를 놓았으며, 동북아 신학대학협의회의 회장 및 실행위원으로 활약하였고, 67년 1월부터 3년동안 WCC의 신학기금위원회(TEF) 연구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63년 한국구약성서 번역위원으로 활약하였다.

 

68년 7월 제4차 WCC총회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으며, 그밖의 여러가지 국제회의의 강사로 임명되어 학술강연을 가졈아다.

69년부터 1년 동안은 독일 함부르크대학 초청교수로서 일하는 동안 그곳에서 한인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는 유능한 설교가로서 문학잡지들에 많은 수필을 기고하였다. 그는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학생들의 경건생활지도에 역점을 두고 신앙지도에 힘썼다.

 

4. 신학의 토착화에 노력

김정준 목사는 신학의 토착화를 강조하고 한국교회를 위한 한국신학의수립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그는 졸업생이 착용하던 서양식가운을 폐지하고 한국의 재래관복과 유사한 예복을 고안해서 착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70년대의 교회의 현실 참여운동에도 그는 적극성을 띠고 인권과, 사회정의 실현을 강조하였고, 정부의 탄압에 항거하는 표시로 73년 12월 한국신학대학교수 전원이 삭발을 단행했던 것이다.

신학생 데모 주동자를 제적시키려는 당국과 충돌하여 고초를 받던 중에 그의 건장은 극도로 악화되어 다시 한번 사경에 이르렀으므로 1976년 1월에 학장직을 사면하였고 건강이 회복되는 즉시 평교수로서 계속 강의하였다.

79년 11월 65세로 교직에서 은퇴하였다. 한국신학대학은 그의 은퇴기념학술강연회를 열었는데 강사는 그의 친구인 구약학자 크리스토프 바르트 박사였다. 3일간 바르트 박사는 십계명의 복음적 이해를 강연하였다. 한국신학대학이사회는 그를 명예교수로 추대하였다.

 

5. 그의 역서, 저술, 논문

그는 본래 중병을 앓았고 건강상태가 때때로 좋지 못했으나 건강한 사람 이상의 일을 해낸 열정가였다. 그의 역서와 저술과 논문은 광범위한 것이었다. 존 A 멕카이의 <기독교신학서설>, 어거스틴의 <참회록>,로데스의 <시편>,G.E.<이사야>등의 많은 역서를 펴냈다.

그의 저술로서는 <어거스틴><예수전>,<에큐메니칼운동 해설>,<함태영옹의 세계일주기>,<구약성서의 인간관>,<이스라엘의 신앙과 신학>,<폰라드의 신학> 그리고 그밖에도 몇가지 더 있다.

그의 설교집으로는 <땅에 묻힌 하늘>(마태복음 설교집)과 <침묵> (마가복음 설교집)등이 있다.

또 그는 실천신학 특히 설교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기독교사상>지에 설교학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목회자들의 설교준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구약학자로서 귀중한 많은 논문들을 잡지에 발표했는데 그것들을 일일이 소개할 수 없지만 구약학에 관한 신학적 문제들을 거의 망라하여 연구발표하였다.

또 신학교육가로서 국내학회와 도 동북 또는 동남 아시아신학대학협 의회들에서 발표한 신학교육관계의 논문도 수없이 많다. 실로 그는 학자로서,목회자 또는 설교자로서, 또 문필가로서 화려한 활동의 경력을 가졌으며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한국교계의 지도자로 그의 인간성은 천진하고 다정다감하며, 꾸밈이 없는 순박한 성경을 가졌다. 그의 전공이 구약학이지만 그의 학문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고 경건에 이르는 학문이었다.

그의 신앙의 정열이 그의 학문의 깊이가 그의 경건의 깊이였다. 또 그의 학문과 신앙은 그의 다양한 교계활동에서 표출되었다. 대한기독교서회 편집위원장으로, 또한 한국기독교연합회 신학위원장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방면으로 한국교계의 한 빛나는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1981년 2월 3일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