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선조와 정조의 특별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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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2015. 11. 13.

선조와 정조의 특별한 편지

선조, 민심의 회복을 꾀하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경복궁에 방화 사건이 일어난다. 왜군이 한양 성안 가까이 쳐들어오자 임금인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을 떠나려 했는데,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내탕고(內帑庫, 조선 시대 임금의 개인적인 재물을 넣어 두던 곳간)에 들어가 왕의 보물을 약탈하고, 노비 문서를 보관하는 장례원(掌隷院, 조선 시대 노비 문서와 노비와 관련된 소송을 맡아보던 관아)과 형조(刑曹, 조선 시대에 법률, 소송, 형옥, 노예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불태운 것이다. 그 후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에 연이어 불을 질러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기까지 했으니, 이는 백성을 버린 조정의 위엄도 함께 매몰되어 불태워진 참담한 사건이자 조정에 대한 백성의 믿음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방증하는 사건이었다.

 

명나라 원군이 왜군을 격퇴하고 이순신과 권율이 각지에서 활약하면서 어느 정도 왜란이 진압되는 듯 보이자, 1593년 9월, 선조는 한양으로 귀환을 준비하며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諭書)’를 내렸다. 유서(諭書)는 임금이 내리는 명령이다. 선조는 ‘선조국문유서’에서 왜군에게 투항하여 왜군을 돕기까지 했던 경상도 남부의 조선인 포로에게 그 죄를 묻지 않고 벼슬을 내리겠으니 포로가 된 사람을 많이 데리고 나오라고 회유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유서를 임금이 친히 ‘한글’로 썼다는 점이다.

 
 

 

 
 선조국문유서

선조국문유서

 
 

선조는 잃어버린 백성의 신뢰를 되찾아야 했다. 선조는 백성들이 왜적의 포로가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며 백성의 입장을 이해하는 말을 서두에 넣어 왜적에게 투항한 포로들에게 죄를 묻지도 않을 것이며 공을 세웠다면 벼슬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유서 말미에서는 전혀 의심하지 말라고 달래면서 지금 나오지 않으면 후에 왜적에게 죽을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곧 나라가 왜군을 소탕할 것이라고 희망을 심어 주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최대한 많은 백성에게 널리 전하기 위해 선조는 자신의 뜻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수단, 즉 한글을 사용했다.

 

장수 권탁(1544~1593)은 김해(金海) 성을 지키고 있던 중 선조의 유서를 접하고 적진에 숨어 들어가 수십 명의 왜적을 물리치고 조선인 포로 100여 명을 구해 나왔다. 이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권탁은 결국 목숨을 잃게 되는데, 그가 가슴에 품고 있었던 선조의 유서가 그의 가문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선조국문유서’가 현대에 이르러 보물 제951호로 지정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왕이 한글로 쓴 명령이라기보다는 조선의 조정이 백성과 소통하겠다는 선조의 의지를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 한자의 한계를 느끼다

 

지난 2009년,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들이 발견돼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이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읽은 뒤 폐기하라고 지시했으나, 심환지가 왕명을 어기고 보관함으로써 200여 년 만에 공개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로 정조에 맞선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조와의 비밀 편지가 공개되면서 두 사람이 매우 밀접한 관계였음을 짐작케 한다. 공개된 편지를 보면, 정조가 비밀 편지를 교환함으로써 ‘막후 정치’를 펼쳤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정보를 수집하고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신하들과 긴밀하게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특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심환지로 하여금 상주(上奏, 임금에게 고하는 일)하도록 해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정조는 심환지 외에도 남인계 거두 채제공(蔡濟恭) 등 다른 신하들에게도 비밀 편지를 많이 보냈는데, 특히 외사촌 홍취영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다량 발견되었다.

 

정조의 비밀 편지 중 눈길을 끄는 것은 1797년 4월 11일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 말미에 유일한 한글 ‘뒤죽박죽(뒤쥭박쥭)’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한자로 편지를 잘 써 내려가다가 ‘뒤죽박죽’이라는 표현만은 한글로 써 궁금증을 자아냈다.

 
 

선조국문유서

 
 

선조국문유서

 
 

정조는 왜 갑자기 ‘뒤죽박죽’을 한글로 썼을까? 먼저 정조가 다른 어찰에도 한글을 수시로 썼는지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의 다른 어찰에는 중간에 한글이 불쑥 튀어나오는 사례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한글이 특별한 암시를 준다거나 의도를 갖고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격앙되어 흥분하는 바람에 한글을 쓴 것일까?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다른 어찰을 살펴보면 1798년 8월 16일 자 편지에는 ‘호래자식[胡種子]’이라는 욕설이 등장하는 등 훨씬 강경한 어조와 자극적인 내용이 더러 있지만 그런 편지에도 한글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뒤죽박죽’이라는 한글이 갑자기 나온 것을 두고, 단순히 정조가 흥분했거나 급한 마음으로 썼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한쪽에서는 정조가 ‘뒤죽박죽’을 한글로 쓴 것이 ‘뒤죽박죽’이라는 우리말을 대신할 한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임금으로서 국사를 논하는 비밀 어찰에 공식 문자인 한자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한문 구조로 사고하며 글을 썼을 텐데도 정조가 ‘뒤죽박죽’만 한글로 쓴 것은 그 어감을 정확히 표현할 한자어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진실은 정조 외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빽빽한 한자 속에서 툭 튀어나온 한글은 현대인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짓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 참고 문헌
김흥식, ≪한글전쟁≫, 서해문집, 2014.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