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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공작원 김용규씨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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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실

2015. 11. 21.

귀순 공작원 김용규씨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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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래된 글인데 소름끼치게 현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글입니다.

귀순 공작원 김용규씨의 증언

■「햇볕정책」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 소설

 


 유명인물의 자서전과 회고록을 전문에 출판하는 「원민(元珉)출판사(대표:박영훈)」는 1999년 11월에 「소리없는 전쟁」이라는 소설을 출판했다. 이 소설은 「김씨조선」의 「대남 침투 공작」의 핵심에 있다가 귀순한 공작원 「김용규」씨가 「김씨조선」에서 보고들은 또한 직접 참여한 「대남 공작 사례」를 소설 형식으로 공개한 실화 소설이다. 
초판 5,000부를 찍은 이 실화 소설은 출판 1년 6개월 남짓이 지난 지금까지 재판(再版)되지 않을 정도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출판사의 관계자는 「원래 이 소설은 정부 모기관에서 출판하려고 한 소설」이라며, 「현 정부(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햇볕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출판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용규」씨에게 원고를 받아 내용을 검토한 출판사 측은 상업성보다는 「이러한 책은 널리 읽혀져야만 한다」라는 인식에서 출판을 결심하고, 1999년 11월에 초판을 발행했다. 그러나 「널리 읽히도록 하겠다」는 하는 차원에서 출판한 이 책에 대해 출판사 측은 특별한 광고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출판사 관계자는 『외부로부터 「소리없는 전쟁」을 광고하지 말아라, 라고 하는 간섭이나 압력은 없었다』라고 하면서, 「다만 소설 출판 당시 본격화한 햇볕정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는 이 소설이「군인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군에서 운용하는 진중 문고에 납품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라며, 「과거에는, 군에서 일부나마 이러한 책들을 구입해 장병들이 읽도록 하였는데 왜 납품 요청이 거부되었는지 이해 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도대체 「소리없는 전쟁」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정부의 「모 기관」이 「햇볕정책」을 의식해 출판을 취소하고 책을 출판한 출판사도 정부의 「햇볕정책」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햇볕정책」 에 반하는 내용 「김씨조선」의 「적화통일」을 위한 「대남 공작」이 어느 정도 집요하고 철저하게 실시되고 있는가를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들어내기 때문이 아닌가. 이 소설은 또한 「김씨조선」이 1960∼70년대의 대남 공작을 통해 정관계(政官界)를 위시하여 종교계, 언론계등, 「대한민국」사회의 요직 내부 깊숙이 「친북인사」를 침투 시켰다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 소설의 부제는 「대남 공작 비화 소설」이다. 저자「김용규」는 이 소설에서 「통혁당공작」 「박정희」대통령을 위시한 우리 정부 요인의 살해를 목적으로 한 「경희궁폭파 기도사건」 전「중앙 정보부」부장「이후락」의 납치 기도 사건등 「김씨조선」의 「대남 공작」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이후락 부장 납치 기도사건」은 자신이 담당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소설 안에 등장하는 인물의 실존 여부 및 대남 공작 사례가 사실인가를 묻기 위해서 기자는 「김용규」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김씨는「현재는 인터뷰를 할 수가 없다」라고 하며 사실의 진위여부 묻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거짓말을 말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간단한 말로 소설에서 기술된 사례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란 것을 인정했다. 김씨는 더 이상의 전화 통화를 사양하였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측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이후락」 부장의 주변인물은 「그 분은 지금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고 최근 눈 수술을 받았지만 항간에 알려져 있듯이 건강이 그리 나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과 바둑을 두며 담소하는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근황만을 전했다. 「김씨조선」의 납치 기도 사건에 대해서는 「현재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라고 하는 입장이었다. 기자는 1978년에 「이후락」 부장이 무소속 후보로서 국회 의원에게 출마했을 무렵 「김용규」씨와 그의 지역구인 「울산」에서 만나 자신에 대한 북한의 납치 기도 사건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했다고 하는 것을 주변 취재를 통해 확인할 수가 있었다.


 ■동료 공작원 2명을 사살하고, 귀순한 남자

 


 「김용규」가 귀순 직후에 출판한 수기 「시효인간(時效人間)」과 대남 공작 비화 소설 「소리없는 전쟁」에서 「김용규」씨가 증언하고 있는 「통혁당사건」 「경희궁폭파기도사건」 「이후락 납치 기도 사건」등을 소개한다. 

「시효 인간」에서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L씨로 칭하고 있다. 「김용규」씨는 1936년에 서울에서 태어나,「서울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1951년 3월 패주중인 「김씨조선」인민군에 납치되었다. 불과 15세에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다.

 납치 후, 「김용규」는 「526군부대」의 침투공작원이 되었다. 「시효 인간」에서 「김용규」는 납치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들의 선전에 혹하여, 그들의 주장이 올바른 것으로 알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맹종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지는 것을 못 참는 천성의 기질로 칭찬을 받은 후는 더욱 더 의기양양하게 죽을 정도로 열심히 하였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죽을 정도로 열심히 한」결과 「김용규」는 「금강정치학원」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김일성 대학」「철학과」에 입학하는 등 순조로운 출세의 길을 걸었다. 순조롭던 「김용규」는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상태로 1957년 「남노당 2차 숙청」시기에 「문천 기계공장」의 노동자로 좌천되었다. 「남조선」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건 충성의 대가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김일성 독재 체제」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러나, 살아야 하기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는 열심히 일하였고 결과 「문평공대 기계제작과」를 졸업했다. 당에 대한 충성심을 다시 인정받은 그는 「노동당 연락부」소속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김일성 군사 정치 대학」에 들어갔다. 「평양시 용성구역」 북부 외곽 지대의 면적 300만평을 차지하는 이 대학은 대남 공작원 양성 기지였다. 김씨가 다시 대남 공작원에게 선발된 것은 1967년 6월이었다.

 


이후 「김일성 군사 정치 대학」 1년을 수료하는 등 「대한민국」에 귀순한 1976년 9월까지의 10여 년간, 대남 공작 활동을 하였다. 「김용규」는 귀순할 때까지의 10여 년간, 고정 간첩을 동반하여 월북하는 임무를 띠고 일곱 번이나 남파되었다. 남파 공작의 성공에 따라 소위「공화국 영웅」칭호를 받고 핵심계층만이 될 수 있는 「공작조」의 조장이 되었다. 「대한민국」으로 말하면 「차관급」 대우를 받는 핵심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노동당 연락부」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오른 탓에, 그는 각종 비밀 자료에 접할 수가 있었다. 「김일성 군사 정치 대학」「지도 핵심반」에는 과거 대남 공작으로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를 수록한 「공작 경험집」이 극비 문서로 비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김용규」는 이 「공작 경험집」읽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소리없는 전쟁」에 나오는 각종 공작 사례도 그 「공작 경험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차관급」 대우를 받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한번 좌천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김용규」는 항상 불안했다.

 

 
주변에서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그대로 버려진다」는 남한 출신자의 말로를 수도 없이 목격하고 아무래도 자신의 출신 성분도 「남한 출신」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회를 엿보았다. 일곱 번째의 남파 공작 목표는 「거문도」에 있는 고정 간첩인 여성을 대동 월북하는 것이었다. 「김용규」는 이 기회를 활용하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1976년 9월 19일 21시30분 「김용규」는 다른 공작원 2명과 함께 「거문도」에 상륙했다. 대동 월북할 고정 간첩인 여성의 집으로 향했다. 「김용규」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남파를 위해 남포항을 출발할 때부터 이미 귀순을 결심한 「김용규」로서는 다른 2명의 공작원도 설득해 함께 귀순하기를 원했다.

 


 그 여성의 집에는 손님이 와 있었다. 귀순을 결심한 「김용규」로서는 아예 그런 생각도 없었지만 대동월북은 불가능했다. 안내원과 접선하기로 한 장소로 움직였다. 길을 걸으면서 2명의 공작원을 설득하기로 했다. 만일에 대비해 권총의 안전 장치를 풀었다. 걸음을 멈추며 2명의 공작원 쪽으로 향했다.

 


 「여기에 함께 남기로 하자」라고 말했다. 어두운 곳에서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검은 그림자는 바로 그를 습격했다. 거부의 몸짓이었다. 반사적으로 바로 검은 그림자를 차면서 동시에 방아쇠가 당겼다.

 



 갑작스런 총성이 「거문도」의 밤하늘을 갈랐다. 짧은 연발 사격으로 2명은 동시에 넘어졌다.

 가방으로부터 모든 문서를 꺼냈다.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2명의 공작원은 차거운 시체가 되었고 김씨는 자유를 향해 첫 걸음을 하였다. 이 날 귀순한 「김용규」는 모친등 한국에 살고 있는 가족과 재회하여 「김씨조선」의 대남 공작을 연구하는 전문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통혁당(통일혁명당)사건

 


 「통혁당사건」은 남파 간첩에 포섭된 「김종태」가 네차례 「김씨조선」을 왕래한 후, 국내에 잠입 「통혁당」을 만들어 학원, 노동, 종교등에 동아리 형태의 소조직과 서울시내에서 여러 곳의 「학사주점」을 운영하면서 선전·선동 활동을 하다가 「중앙정보부」에 적발된 사건이다. 1968년 8월에 적발된 이 사건에 의해 「서울시당 책임자」「김종태」, 「민족 해방 전선」 책임 비서 「김지락」 「전남도당」창당준비위원장 「최영도」 「전맥」지 편집장 「이문규」등 합계 158명이 검거되어 73명이 송치되고 50명이 구속되었다. 「김종태」가 이 사건으로 사형을 받고 난 후 「김씨조선」은 군중 대회를 열어 대대적인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김씨조선」은 1994년에도 간첩을 보내 「김종태」의 아내등 유족의 소재를 확인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와는 달리 이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한 후 출소한 인물 중에는 「통혁당」이 「김씨조선」「노동당」과는 무관한 조직이라며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용규」는 「소리없는 전쟁」과「시효 인간」을 통해 「통혁당」조직이 「김씨조선」「노동당」의 주도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김용규」는 2권의 책에서, 『「통일 혁명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군 임자도」에서 면장을 하고 있던 지방유지「최영도」가 조카인 남파 공작원「김수용」에 포섭되면서 비롯되었다』고 되어 있다. 「최영도」는 3회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고 「노동당」에도 입당하였다. 「전남도당」책임자가 된 「최영도」는 지하당조직을 확산하는 한편 과거 「노동당」으로부터 「전남도당」조직을 맡겼지만 조사기관에 체포되어 10년의 형을 받은 「전태묵」을 다시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김씨조선」은 「최영도」의 조직을 「전라남도당 지도부」의 정 조직으로, 「전태묵」의 조직은 후보 조직으로 2원화 하여 관리하며 조직을 확산 시켰다.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 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조카인 「김수산」을 앞세워 「김종태」를 포섭하기도 했다. 

 

반정부 감정을 가지고 있던 「김종태」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김씨조선」과 접선을 요청해 왔으므로 포섭은 용이하게 행해졌다. 「평양」에 밀입북한 「김종태」는 밀봉 교육을 받는 한편 「김일성」과 만나기도 했다. 간첩 교육을 받은 후 다시 「대한민국」에 돌아온 「김종태」는 「김지락」 「이문규」 「이치년」 「임지영」등 친척, 친구등 측근을 규합해 「통혁당 서울시지도부」를 구성했다. 한편 「학사주점」 「신문화연구회」 「전맥회」등의 동아리를 조직 운영하면서 반정부 감정을 선동하는 선전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68년 8월 「중앙 정보부」에 의해 조직이 적발되었으므로 「통혁당」을 적화 통일의 전진기지에 생각하고 있던 「김씨조선」의 계획은 일단 좌절되었다.

 


 「김용규」는 자신의 책에서 「김씨조선」이 「통혁당」재건을 위해 계속 공작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73년 7월에는 자신이 직접 「통혁당」재건 공작 계획에 참여 한 사실도 함께 적고 있다. 포섭 대상은 과거 「김종태」와 제휴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통혁당」재건 계획과 관련해 「김용규」는 「소리없는 전쟁」에서 흥미 깊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김씨조선」의 공작망이 우리사회의 어떠한 장소에서도 암약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대목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2명이 밤낮 계속해서 지시하는 문장을 모두 해독하여 하달하지만 그것은 그간 「평양」의 공작 팀이 각각 관리하고 있던 일부 현지조직과의 접선암호와 특정 조직원의 기록 대상이었다. 기록 대상에는 「발전소」 「전신 전화국」등 중요 부문 외 점 조직 형태로 특별 관리되는 개별적 대상도 있고, 2∼3명 또는 4∼5명으로 구성된 조직도 있었다. 그 중에는 최근 구성된 조직도 있었고 1960년대 처음·중반에 포섭된 교수와 박사로 구성된 조직, 언론계·종교계·공공 기관, 그리고 각 단체에 침투한 조직도 있었다. 기록 대상에 여러 명의 알 만한 인물의 이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수동무! 왜 그렇게 놀라나?』

 


 『이런 사람들도 이미 북쪽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정말로 나는 이러한 저명 인물들이 이러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수동무! 지금 우리가 해독한 이 기록 대상은 아주 일부분에 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천수동무는 이것만을 보고 놀라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권력 핵심부에도 많이 포진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쾅하고 넘어지겠구나!』

 



■「이후락」을 납치하라/「국회에 교회에 침투하라」

 


 「박정희」대통령등 정부 요인 살해 공작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납치 기도 공작에 대해서도 「김용규」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974년 8월 13일밤 12시, 서울에 남파되어 있던 「김씨조선」공작원은 『8·15 광복절 행사」와 관련해서 「중앙청」주변에 접근하지 말고 48시간 비상 대기 상태로 다음의 지시를 기다릴 것. 건투를 빈다』라는 비상 전문을 받았다. 그 때부터 48시간 지난 8월 15일 밤 12시까지를 계획으로 「광복절」행사를 노린 중대한 사건일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중앙청」부근에 접근하지 말라는 것은 그 주변의 어디선가 위험한 일이 일어나므로 그 위험으로부터 「지하당」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파 공작원이 비상 대기하고 있던 8월 15일 10시30분. 소식은 평양에서가 아니고, KBS 라디오에서 터져 나왔다. 「문세광」이 박대통령을 저격하였지만 실패하고 영부인인 「육영수」여사와 여고생 1명이 사망했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사건 현장도 「중앙청」이 아니고 장충동「국립극장」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 날 저녁에 예정되어 있던 「경희궁리셉션」등의 「8·15 경축 행사」는 모두 취소되었다. 「경희궁리셉션」의 취소는 불행중의 다행이었다. 「김용규」의 주장에 따르면 매년 8월 15 일 저녁이 되면 대통령이 참가하는 경희궁리셉션이 있는 것을 알고 있던 「김씨조선」공작 지도부가 그 날 「경희궁」 폭파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대통령과 정부 요인을 한 순간 날려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김용규」는 책에서 「문세광」은 다른 루트인 「조총련」계통을 통해 투입된 것이고 이로 인해, 「경희궁」폭파 계획은 무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효 인간」에서 그는 1974년 2월 처음부터 요인 암살과 주요 시설 폭파 임무 수행을 위한 「라디오 폭파 훈련」을 받고 있던 중 「김씨조선」공작 지도부가 「서울」출신인 자신에게 「경희궁」에 있는 각종 시설의 위치 등을 파악한 사실이 있고 자신도 「경희궁」폭파 훈련을 받은 사실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훈련 중 그는 다른 특수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후락」전 중앙정보부장을 납치해 오는 임무이다.

 



 「노동당」「연락부」「중화 1 지구」 5호 초대소에서 「라디오 폭파 훈련」을 받고 있던 1974년 4월 3일 「김용규」는 연락부의 A급 공작원 2명과 함께 2호 초대소로 불려 갔다. 「연락부」 제 1 부부장은 「당중앙」의 지시에 의해 「이후락」전 부장을 납치할 것을 지시했다. 「김대중」납치사건으로 공직을 떠난 후 해외에 나갔다가 귀국한 「이후락」전 부장이 「충무호텔」 2층 특실에 묶고 있다 라는 정보가 들어 왔고 이 정보를 보고 받은 「 당중앙」으로부터 납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하였다.

 


「남포연락소」전투원 27명을 포함한 30명으로 구성된 「특수공작조」의 조장에는 「김용규」가 임명되었다. 「김용규」는 입수한 정보가 믿을 수 있는 정보인가를 확인하고 작전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특공대의 임무는 대상 인물을 납치하는 것과 동시에 가능한 범위의 그의 경호원 주치의까지도 납치 월북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김씨는 입수한 정보와 수집한 모든 자료에 근거해 작전 수행에 납치 대상으로는 2∼3명의 경호원 주치의 운전수 2명등 6∼8명의 인원으로 예상했다.

 


 또 이들 경호원 전원이 태권도유단자인 것과 동시에 호신용의 무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상 신호 장치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상 호실은 호텔 2층에 있는 2개의 특실의 해안쪽의 특실이고 그 인접 호실은 경호원과 주치의 운전수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김용규」는 이러한 패턴으로 작전을 수립했다. 마취 실습등 모의 훈련에 들어갔다. 「남포시」 「와우도 휴양소」를 「충무호텔」로 가상해 실전 훈련을 했다. 유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사회 안전부」「이명순(중장)」을 실험 대상으로 하여 그 옆방에 7명의 경호원을 배치했다. 최고의 「암호조」와 「행동조」로 구성된 「특수공작조」는 시도할 때마다 성공했다. 10일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소 잘 훈련된 공작원이었기 때문에 침투동작이 매우 민첩하였다고 한다. 이제 결행시기만이 남았다. 마침내 공작선 2척에 분승한 공작원은 「이후락」 전 부장 납치를 위해 「충무」로 향했다. 공작원이 「지나」양자강 하구의 중간 지점에 도착했을 때 「평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납치 대상이 휴양을 끝내고 「충무호텔」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허무하게 상황이 종료되었다.

 



 상황은 간단하게 끝났지만, 이 사건 「김씨조선」의 지하 조직이 어느 정도 우리사회에 깊은 곳까지 침투하고 있나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소리없는 전쟁」에서 2명의 공작원은 이러한 대화를 하고 있다.
 김:『「이후락」이 비록 공직으로부터 떠났다고 해도 신분을 그대로 노출 시켜며 다니지 않을 것인데 보통 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그러한 정보가 곧 바로 「평양」에 들어가는 사실은 우리말고도 또 다른 현지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정:『각급 「지하당」조직을 복선(複線)으로 배치하는 것은, 「지하당」 조직 원칙에서도 특별히 강조되는 내용인데 그걸 말이라고 하냐? 우리 아닌 다른 지도부가 2개나 3개정도도 있을 수 있다』

 



■「국회에, 교회에 침투하라」

 



 「김용규」는 「소리없는 전쟁」의 결론에서, 「김일성(본명:김성주)」이 대남 공작 요원과 담화하는 석상에서 역설한 말을 소개하고 있다. 그대로 소개한다.

 



 『「칠레」에서의 「아엔데」의 경험은 선거를 통해도 정권을 탈취 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아엔데」가 실패한 원인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너무 급진적으로 개혁을 서둘러, 「역쿠데타」를 초래한 것이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김대중」납치사건으로 인해 민심이 기울고 있다. 이러한 민심을 교묘하게 유도하여 신망이 높은 핵심인물을 입후보시키면, 국회에도 얼마든지 비집고 들어갈 수가 있다. 지금부터, 대 국회 공작은 프락치 공작에 머물지 말고, 의석을 확보하는 공작으로 전환해야 한다』

 



 『「유생군」(전 서독 주재 한국 대사관 노무관, 1971년 입북)의 경우를 보면 현재 「남조선」에서는 고등 고시에 합격만 하면 행정부 사법부에도 얼마든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지금부터 검열된 학생 중에서 머리가 좋고 영악한 아이는 데모에 내 보내지 말고 고시 준비만을 시켜라. 10명을 준비시켜 1명만을 합격해도 초기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므로 고시 공부를 하는 학생에게는 그들이 걱정없이 고시 공부에만 전념 할 수 있도록 물심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 해 주어야 한다』

 



 『최근 「남조선」에서 가장 비집고 들어가기 좋은 장소는 「교회」이다. 「교회」에는 이력서나 보증서없이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가 있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헌금만 꾸준히 내면 누구라도 신임을 받을 수가 있다』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정권을 계승한 「김정일」이 「유훈」통치를 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