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한국판 요셉 류태영 박사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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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2016. 5. 11.

한국판 요셉

 

류태영 박사 간증

 

 

 

다정다감 | 조회 59 |추천 0 | 2012.11.08. 17:51

 

 

 

출처/ http://www.fgtv.com

 

 

[기독북에서 서적 소개글 퍼옴]

 

류태영 박사 자전적 에세이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에서 유일하게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열 여덟 살에 비로소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무작정 상경,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스 케이크 행상 등을 하며 겨우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찌들어지게 가난했고 장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었지만, 그는 구두닦이를 하면서도 유학의 꿈을 꾸었고, 이틀을 굶고서도 비관은커녕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분께 감사했다. 꿈꾸는 청년 류태영에게 그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유학이라는 말을 처음 접한지 13년만에 구두닦이 소년 류태영은 덴마크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본문 190면 참조)당시 우리나라와 덴마크는 수교도 없던 터라 그의 유학,

그것도 편지 한 통 쓰고 그 나라의 초청을 받아 유학가는 경우는 거의 기적이었다.

 

덴마크 말이라고는 알파벳도 모르던 그가 까막눈으로 시작한 덴마크 유학생활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본문 205면 참조)

그는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그곳에서 또다시 꿈을 꾼다. 그 나라에서만이 아닌 전세계를

순회하며 농촌을 비교연구하겠다는 당찬 꿈을...

무일푼이었지만, 그는 덴마크 정부 특별 예산 약 3만 달러를 지원받아 유럽의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본문 235면 참조)

결국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해보기도 전에 안될 것이라고 포기하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화이다.

 

귀국후 그는 청와대의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는 핵심에서 일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 감동을 자아냈던 그의 강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본문 249페이지 참조)

모든 것이 안정되고 아무 걱정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다.

또 다시 이스라엘 유학의 꿈을 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만류가 있었지만

우리나라 농촌의 발전을 위해 공부를 더 하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것이 그와 육 여사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1973년 4월, 나이 37세에 류태영은 이스라엘 국비장학생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그는 최단시일(4년 반) 내에 이스라엘 최고 명문인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아 주위를 놀라게 했고,

동양인 최초로 이스라엘 국립대학인 벤구리온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류태영은 이스라엘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인물이 되었다.

7년간의 이스라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게 된 것도 그의 조국사랑에 기인한다.

그는 아무리 그곳에서의 생활이 안정되고 인정을 받아도 한시도 조국을 잊어본 적이 없었기에 결국 귀국, 모교인 건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내년이면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류 박사는 현재 건국대학교 농업교육과 교수, 도산아카데미연구원 원장,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 한국.이스라엘 친선협회 상임부회장 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며, 우리나라 및 전세계 각국에 다니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연을 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과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류태영 박사는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역경 속에서 갖은 시련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힘이 되어 주자는 뜻에서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극복해 낸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글을 쓰며 무엇보다도 진솔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려 부단히 노력하였고 진실한 이야기만을 쓰고자 노력했다.

 

그러기에 너무도 가난했던 집안 사정을 숨김없이 밝혔고, 천하게 살아온 청소년 시절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진실은 진실에게 통하며 진실이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고 믿으며...

 

어린시절

 

류태영 박사는 전북 임실에서 더 들어간 산골마을 청웅에서 태어났다.

재산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다가 형제는 모두 8남매나 되었다.

위의 형과 누나 넷은 국민학교에 발도 붙여보지 못한 채 열심히 일만 했다.

아버지는 머슴으로 일하셨고 남은 가족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품팔이를 해야할 정도로 가난한 살림이었다.

 

어느날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영이는 영리하니까 학교에 보내야 합니다. 집안에서 한 사람 정도는 까막눈을 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권고를 들은 부모님은 마치 해외유학이나 보내듯이 큰맘먹고 태영을 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어린 태영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외에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 해오는 일이 전부였다.

하루 세끼를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나마도 거의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다.

어린 태영이 국민학교 5학년 되던 해에 이 가난한 산골마을에 조그만 교회가 들어섰다. 초가집을 빌려서 시작한 교회, 그곳은 가난에 찌든 소년의 유일한 기쁨의 장소가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새벽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첩첩산중이라서 깜깜한 새벽이면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믿음으로 이겨냈다.

이때부터 새벽기도는 그의 삶에 있어서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졸업 후 그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풀을 베며 소를 먹이고 토끼를 키우는 일로 일과를 보냈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토끼 몇 마리를 장에 내다 팔아 '중학교 강해'라는 책을 샀다.

 

중학교 강해를 독학하며 실력을 쌓다 열여덟 살에 읍내에 나가 가정교사로 취직해 중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1954년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지긋지긋한 고생이 시작되었다.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더 많았고 그나마도 국화빵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미군부대 주변에서 구두를 닦으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쓰레기통에서 곰팡이 난 빵을 꺼내어 먹기가 일쑤였다.

엄동설한에도 내의 한번 입어보지 못했다. 냉방에서 담요 한 장에 의지한채 삶을 이어나갔다. 너무나 추워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에 일어나 방안을 빙빙 뛰기도 했다.

 

그러다가 통금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면 성경과 찬송가를 챙겨들고 교회로 달려갔다. 뜨겁게 기도하고 나면 온몸이 화끈거렸다. 새벽에 그가 드린 기도는 오로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 전부였다.

도무지 가능성이라곤 없는 삶이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덕분에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했던 것이다.

 

구두를 닦으면서 생활하던 중 그는 우연히 '유학'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유학\'이 뭐냐고 묻자 \"외국에 나가 훌륭한 선생들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유학의 꿈

 

그때부터 그는 유학의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은 너무도 허황된 꿈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삶을 지탱해준 좌우명이었던 성경말씀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말씀에 의지해 기도하며 꿈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어느 나라에 가서 공부할 것인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가난한 농촌을 잘살게 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선진 농업국가인 덴마크로 가자"라는 답을 얻었다.

이제 그 꿈을 현실로 실현시킬 일만 남은 것이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며 한국의 농촌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리고는 한국의 농촌현실과 함께 그의 사상을 피력한 다음 덴마크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영어로 완성시켰다.

 

이제 편지를 부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고민하던 중

'그 나라의 가장 높은 사람에게 보내라'는 마음의 확신이 들었다.

가장 높은 사람이 왕인지 대통령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도서관에 가서 확인한 다음 편지의 겉봉투에 이렇게 썼다.

'프레드릭 9세 국왕. 코펜하겐. 덴마크'

주소도 없이 그렇게만 쓴 편지를 부치고 난 후 약 40일쯤 지난 어느날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바로 덴마크의 국왕 보좌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며칠 후에는 덴마크의 외무성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왕복 비행기표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덴마크의 국왕이 무엇을 보고 구두닦이 청년을 초청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꿈이 변하여 현실로(덴마크 유학)

 

1968년, 꿈에도 그리던 덴마크 유학길에 올랐다. 국왕의 초청을 받은 구두닦이 청년은 코펜하겐 공항에서부터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덴마크의 신문들이 일제히 한국에서 온 류태영을 집중보도했다.

덴마크의 한 대학에서 농촌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덴마크의 농촌은 한국과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가 있어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외무성 국제협력국장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덴마크 한 곳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비교연구를 하고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그가 정한 나라는 이스라엘이었다. 한손에는 총, 한손에는 괭이를 들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분단된 한국의 실정과 가장 비슷한 나라. 그는 바로 이스라엘의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한국에서 덴마크에 유학온 학생이다. 이스라엘의 키부츠에 대해 배우고 싶다. 가능하다면 이스라엘의

협동농장과 농촌부흥 모습을 배울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

얼마후 이스라엘 대사관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이스라엘에 가고싶은 날짜가 언제인가?"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편지 한 장이 이스라엘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유학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학의 90% 이상은 모두 미국행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도 생각 못했던 덴마크와 이스라엘 유학을 실현시킨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

 

1971년 건국대학교 교수시절, 그의 농촌운동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면서 청와대 비서실 새마을담당으로 발탁되었다.

농민들이 잘살기 위한 운동이라면 적극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3년 동안 청와대 새마을 담당으로 일하면서 그는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다시 이스라엘로 들어가 이스라엘 당국과 접촉한 결과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의 길을 떠났다.

이스라엘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육영수 여사를 만났더니

"류 선생이 잘 도와주어서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가버리면 어떡하느냐"며 만류했다.

 

1973년 4월 이스라엘 유학길에 다시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공부를 결심하고 나니 언어의 장벽이 가장 큰 문제였다.

기도하면서 계획을 세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최소한의 문장은 5백개이다.

주일을 제외하고 하루에 열마디씩 외자. 결심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매일 열마디씩 외어 나갔다.

3개월만에 5백 마디의 문장을 모두 습득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유학온 지 8개월만에 히브리대학교 대학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곳에서 그는 4년 반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동양인 최초로 이스라엘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히브리어로 농촌사회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7년동안의 이스라엘 생활을 마치고 귀국, 모교인 건국대학교에 몸담게 되었다.

그리고 농어촌을 다니면서 강연을 했다.

환경, 그것은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두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맞서서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할 것인가.

 

 

[본문 125쪽-129쪽 '3. 사랑, 결혼 그리고 유학\'중에서...]

 

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들

 

하나님은 오늘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를 깨워 주셨다.

새벽 4시, 내가 암자에 들어온 지도 4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동안에도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주셨다. 그리고 새벽마다 때로는 그윽한 음성으로,

때로는 꿈속의 자명종 소리로 나를 깨워 주셨다.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성경을 읽었다.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찬송도 불렀다. 이것이 내 일과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처음의 굳은 결심만큼 혼자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방 하나 갖기를 그렇게도 소망했지만 막상 혼자라는 것은 극복하기 힘든 고독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모처럼 운동도 할 겸 책을 들고 방에서 나와 산으로 갔다.

 

초여름이었지만 오히려 선선한 기운이 산허리를 감돌고 있었다. 나는 초록색으로 짙게 물든 잔디에 누워 강한 아카시아 향에 취해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 지게를 지고 독학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감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때 어디서 날아왔는지 커다란 호랑나비 한 마리가 책 위에 사뿐히 날아 앉았다.

꽃도 많이 피어 있고, 앉을 곳도 많이 있음에도 내 책 위에 앉은 것은 나의 외로운 마음을 헤아렸음일까. 하지만 나의 마음은 호랑나비를 보자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언제든지 가고싶은 곳으로 꿈을 찾아 훨훨 날아갈 수 있는 호랑나비가 부럽기조차 했다.

 

나는 부질없이 다시 나비를 보고 감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단조로운 생활이 벌써부터 나를 괴롭혀 왔다. 쓸 데 없는 일인 것처럼 내 머릿속을 차지하곤 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독서에 집중하려 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다른 상념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비는 여전히 책 위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책을 거두고 들고 일어섰다.

나는 외로움에 지친 몸을 이끌고 앞마당으로 내려와 평화롭게만 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형, 형 엄마가 빨리 내려오래요. 너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일까. 사람이 올라오는 것도 못보고 그렇게 서성였던 것이다.

"형, 빨리요. 집에 무슨 일이 있대요. 여전히 멍한 채 대답을 하지 않자 아이가 내 팔을 끌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생각에서 깨어나 눈을 크게 뜨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한번 재촉하는 아이를 앞세우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급하게 산을 내려왔다.

싸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하지만 무슨 큰일이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큰일이라도 났니?"

어머니께서 웃으시며 농담을 건네셨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음을 알고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확인을 했다.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

"무슨 일이긴 무슨 일. 식전이지? 어서 들어와 밥부터 먹자."

이미 밥상은 차려져 있었다. 닭고깃국과 하얀 쌀밥이 가득 담긴 밥그릇이 상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벌써 식사하시고 일 나가셨다. 남의집살이가 어디 만만한 일이더냐.

어여, 국에 말아 푹푹 뜨거라. 식기 전에."

그러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어디에서 닭고기와 쌀을 구하셔서는 나를 불렀던 것이다.

그냥 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해서는 내려올 것 같지 않으니까. 거짓말을 하셨던 것이다.

"자, 이거 가지고 가서 식후에 하나씩 먹거라."

식사를 마치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께서 종이에 싼 물건을 하나 건네주셨다. 치즈였다.

 

암자라서 고기는 고사하고 생선도 먹지 못할 나를 생각하시고 어머니께서는

서울에서 어렵게 행상을 하시며 번 돈으로 치즈를 사오신 것이다.

그 날 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치즈를 꼭꼭 씹어 먹었다.

나는 나의 부모님을 자식들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하는 노예로 만든 것 같았다.

참혹한 현실이다. 어쩌면 우리 농민 모두가 이 노예의 소굴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들을 반드시 해방시켜야 한다.

 

정신을 집중하고 공부에 몰두했다.

하지만 눈만 글자를 따라 움직일 뿐 정신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후 거의 하숙비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형이 약속했던 거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행여나 하고 집에 내려가 보아도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와야 했다.

생각 끝에 나는 자형에게 장문의 편지까지 썼다.

 

"...지금 제가 대학교에 다시 복학을 하고,

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3년은 더 공부를 해야 졸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이전처럼 학비를 벌면서 다니자면 몇 번을 더 휴학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졸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취직을 해 제 몸 하나는 먹고 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제가 준비하고 있는 고등고시는 1년 아니면 2년 안에 결판이 날것입니다.

그 시간의 절약도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 한 몸의 영화를 위해 대학에 들어갔다는 생각은 결단코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나깨나 저는 우리 집안의 행복을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그 웃음 가득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저는 그 힘든 고학의 길을 견디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농촌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가족의 가난도 결국 우리 농촌의 몰락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뜻을 헤아려 주십시오. 저는 반드시 그 뜻을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그동안의 많은 도움,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 뼛속 기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저에게는 이 시기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끼니때가 되면 눈치를 보기에 급급해야 합니다. 저에게 한 번 기회를 더 주십시오."

 

 

머리말 / 진실은 마음 문을 열어

 

1. 어둠 속에 빛은 있었다

나의 나된 것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다

빛은 있었다

작은 행복이 가져다 준 큰 기쁨

정든 고향을 떠나며

 

2.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서울 생활

혹독했던 그 해 겨울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다

고난 중에 감사를

시련의 축복

심은 대로 거두리라

1일 1선

예수 사랑으로 도둑누명을 뒤집어쓰고

고등고시 공부를 위해 귀향하다

 

3. 사랑, 결혼 그리고 유학

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들

뜻을 품고 동지를 모으다

명신 고아원의 천사들

내 곁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와 사랑

내의를 입고 눈물을 흘리다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다

농촌부흥을 위한 작은 시작

쓰라린 농민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며

가난한 신랑 신부의 행복한 결혼식

13년 만에 이루어진 유학의 꿈

더 높은 꿈을 향하여

 

4. 꿈이 변하여 현실로

알파벳도 모르는 까막눈으로 시작한 덴마크 유학생활

그룬트비와 안창호

덴마크에서 스타가 되다

결혼 No, 동거 Yes, 덴마크인들의 결혼풍속도

유럽 일주 여행을 하다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조국의 하늘을

대통령의 감격

대통령의 암행 감사

또다시 이스라엘 유학 길에 오르다

이스라엘 유학 4년 반만에 동양인 최초 교수가 되다

최단시일 내 우수성적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조국을 위해 이 한몸 바치리라

 

5. 빛 가운데로 걸어가며

교수로서 보람을 느낄 때

이스라엘 총리와의 청와대 만찬

미국 LA에서의 연설

어머니께서 소천하시던 날

중국 지도자들을 감동시킨 강연

류태영 박사 열렬 환영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 길로

꿈과 믿음이 있는 한 좌절은 없다

 

저자약력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알려진 류태영 박사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정환경이나 배경 등에 도전하며 자신의 꿈을 이뤘다.‘

언제까지나…’는 류박사가 구두닦이,신문팔이,행상 등을 하면서 야간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고 세계적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아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가 되기까지의 삶을 집중 조명한 책.그는 박정희 전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 새마을 담당관으로 발탁,우리나라 농촌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다.

어려울 때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고 고백하며 적극적으로 삶에 임했다.

 

류박사는 “어려운 살림은 원망의 대상이 아닌 맞서 극복할 수 있는 역경”이라면서

“이 책을 통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도전하는 정신을 가르쳐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 국민일보 / 2000.12.11 / 노희경기자 hkroh@kmib.co.kr

 

 

류태영

[학력] 건국대학교 졸업 덴마크 외무부 초청으로 Nordic Agricultural College에서 연구(농촌사회개발 전공)

이스라엘 외무부 장학금으로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 및 사회학 박사학위 취득

[경력] 대통령 비서실 초대 새마을 담당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교 교수 역임 건국대학교 농과대 학장,

건국대 부총장 역임 한국농촌사회학회 회장, 아시아농촌사회학회 초대 회장 역임 현재 :

건국대학교 농업교육과 교수, 도산아카데미연구원 원장,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 한국,

이스라엘 친선협회 상임부회장

[저서] <잘사는 작은 나라> <이스라엘 국민정신과 교육> <이스라엘 그 시련과 도전> <천재는 없다>

<이스라엘 농촌사회 구조와 한국 농촌사회> <이스라엘 민족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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