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古文書集成 36-龍仁 海州吳氏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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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2016. 8. 10.

文叔子(韓國學大學院 博士課程 修了)



本書의 주인공인 海州吳氏는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海州吳氏 楸灘公派로서 楸灘 吳允謙(1559-1636)을 派祖로 하는 계열을 가리킨다. 해주오씨 추탄공파는 吳允謙, 吳達濟(1609-1637),吳道一(1645-1703), 吳命恒(1673-1728) 등 朝鮮中期 이래 많은 문인과 관료를 배출하였다. 이 가문이 배출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근기지방의 여타 가문과 더불어 사족 세력의 동향을 중심으로 최근까지도 연구되어 오고 있다. 1) 한편 이 가문은 族圖記, 𤨏尾錄 등 조선전기의 자료를 소장한 가문으로도 꽤 알려져 있다. 15세기초에 족보의 초기형태라 할 수 있는 족도기를 작성했고, 이를 필사하여 전해왔다는 사실은 이 가문의 가계계승 의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또 쇄미록은 현재 해주오씨 추탄공파의 종손인 吳文煥氏로부터 13代祖가 되는 吳希文이 壬亂 중에 쓴 피난일기로서 임진왜란기 士族의 생활상과 노비 및 토지재산의 경영양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이 가문에는 이미 알려진 이런 자료들과 비교하여 그 가치가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많은 古文書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古文書類는 그동안 龍仁郡 慕賢面 吳山里 海州吳氏 楸灘公派 宗家에 소장돼 오던 것을 1987년에 韓國精神文化硏究院에서 이를 대여하여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하였다. 이들 자료들이 그동안 학계에 알려지지 못하다가 지금에야 이렇게 公刊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번 古文書集成 간행을 위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1997년말에 본 가문에 대한 추가조사를 실시하여 簡札類을 비롯한 고문서류를 재차 수집, 촬영하였다.
이렇게 수집, 촬영한 고문서는 양이 방대할 뿐 아니라 종류도 비교적 다양한 편이다. 특히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가의 문서 뿐 아니라 吳道一, 吳命峻(1662-1727) 등 支派의 문서도 종손이 보관하고 있어 이를 함께 수록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본서에 상당부분 수록되지 못한 簡札, 詩文類, 置簿記錄類 등의 여타 문서들도 언제든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열람이 가능함을 밝혀둔다. 그리고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故 吳鼎根 선생님과 故 吳福根 전 종친회 회장님, 현 종손인 吳文煥 선생님 등 많은 海州吳氏 楸灘公派 諸賢께 이 기회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이 가문은 18세기 중엽까지 ‘海州吳氏’ 혹은 해주의 古名을 딴 ‘首陽吳氏’로 칭해졌다.2) 1771年(英祖 47) 辛卯譜 간행시에 ‘甲戌譜 및 公私書籍에 海州로 쓰고 있으므로 海州吳氏로 지칭하겠다’는 취지를 밝힌 후부터는 ‘해주오씨’로 그 명칭이 정착된 것 같다.
해주오씨 가문의 가계기록의 역사는 전술한 족도기의 작성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종의 가계도라 할 수 있는 족도기는 1401年(太宗 1) 吳先敬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가 撰한 족도기 跋文에 족도기 작성의 취지가 잘 나타나 있다. 즉 祖上의 유래와 子孫들의 계통을 밝히고 이를 자손만세에 보존키 위함이었다. 오선경은 자신의 先親이 譜事를 시작하였으나 이를 마치지 못하고 卒하자 古文獻 등 여러 가지를 참작하여 家系의 계통을 圖本으로 남긴 것이다. 이는 오희문(1539-1613)대에 와서 증보 및 필사의 과정을 거쳐 전래되었다. 즉 오희문은 圖本을 구해 이를 증보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둘째 아들인 允諧로 하여금 復本을 만들도록 하였다. 또한 자신이 남긴 피난일기인 「𤨏尾錄」 끝에 이를 附錄함으로써 이 두 자료가 훗날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3) 그리하여 조선중기 이후 이 가문에는 꾸준히 족보가 간행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4)
한편 현전하는 이 가문의 가계기록으로는 1829年(純祖 29)에 간행된 󰡔海州吳氏世譜󰡕와 󰡔楸灘先生遺集󰡕(吳允謙), 󰡔西坡集󰡕(吳道一) 5)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해주오씨세보󰡕는 19世紀 족보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전기형 舊譜가 갖는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어서 풍부한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녀를 기재할 때 先男後女式으로 기재하지만, 一女·二男 등으로 태어난 次序를 명기해 주고 있다. 6) 또한 庶子女를 모두 기재하였고 이 때 嫡庶與否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딸의 경우 사위의 이름을 적고 이 딸이 사위에게 있어서 前室인지 後室인지까지를 기록하여 당시 가족제 연구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7)
다음 〈圖 1〉은 󰡔海州吳氏世譜󰡕(1829)와 󰡔海州吳氏大同譜󰡕(1991)를 중심으로 󰡔楸灘先生遺集󰡕(吳允謙), 󰡔西坡集󰡕(吳道一) 등에 수록된 墓碣, 行狀 등을 참조하여 해주오씨 추탄공파의 家系를 재구성한 것이다.
〈圖 1〉海州吳氏 楸灘公派의 家系

海州吳氏는 高麗朝에 軍器監 벼슬을 지낸 吳仁裕를 始祖로 하는 가문으로, 고려조에는 가문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사환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고려조 인물들의 경우 이들의 官職만이 족보상에 기재되어 있을 뿐 生卒年 및 자세한 행적 등은 추적하기 어렵다.
朝鮮朝에 들어와 15세기 중반 이후 이 가문은 점차 族勢를 다져나가는데 始祖로부터 11世인 玉貞--景閔--希文에 이르는 시기이다. 11世인 玉貞은 사섬시주부로서 贈吏曹判書이며, 그 아들 景閔(1515-1565)은 司憲府監察로서 贈左贊成에 올랐다. 希文 역시 관직이 繕工監監役에 그쳤으나 아들 允謙의 명성에 힘입어 후에 領議政까지 贈職되고 있다. 한편 조선전기까지의 婚俗은 妻鄕 혹은 外鄕으로의 이동이 많아 조선후기에 비하여 한 지역에 世居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해주오씨 가문의 경우 16世紀 초반까지 廣州 土塘, 죽산, 양성 등지에서 세거하여 近畿地方을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가문이 근기지역 뿐 아니라 중앙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질 정도로 현달하게 된 것은 시조로부터 14世가 되는 楸灘 吳允謙代이다. 오윤겸은 추탄공파의 派祖가 되며, 그 형제들 즉 允謙, 允諴, 允誠을 派祖로 하여 楸灘公派, 月谷公派, 西河公派 등으로 分派되고 있다.
해주오씨 추탄공파가 龍仁 지역에 세거하게 된 것은 윤겸의 父인 오희문이 용인의 世居士族인 延安李氏와 혼인하면서 부터이다. 오희문은 연안이씨 李石亨의 후손인 郡守 廷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처가가 있는 용인 지역으로 이거했으며, 처가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이 가문이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 오희문은 과거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이 가문으로서는 중요한 기록류들을 남기고 있으며 가계 운영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族圖記를 증보하여 이를 아들 允諧로 하여금 筆寫하게 하여 보존한 것이라든지, 임란 중에 쇄미록이라는 방대한 양의 일기를 남기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8)
특히 쇄미록에는 임란 중에도 노비 등 가문소유 재산의 관리, 운영과 奉祭祀에 철저했던 일면을 많이 접할 수 있다. 9) 이러한 가문운영에 대한 노력이 바탕이 되어 아들 윤겸이 현달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많은 관료와 문인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윤겸은 牛溪 成渾(一五三五~一五九八)의 문인으로 그가 우계 문하에서 수학하게 된 것은 우계 성혼과 父인 오희문의 親交 때문인 것 같다. 즉 父의 영향으로 오윤겸, 윤해, 윤함 三형제가 모두 성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0) 그 후 오윤겸은 司馬試 文科 別試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고, 壬亂이 일어나자 兩湖體察使 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스승인 成渾이 奸黨의 무함을 받자 이를 변호하다가 時論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1617年(光海君 9)에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국교재개의 계기가 되었던 回答使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1618年(光海君 10)에 廢母論이 제기되었을 때 庭廳에 불참한 후 廣州牧使를 자원하여 토당에 은거하였다. 11) 이후 인조반정으로 西人 정권이 들어서면서 大司憲을 시작으로 吏曹判書와 左議政, 領議政 등 중앙의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하는 등 정치적 비중이 높았다. 그는 成渾 門下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며, 李貴·鄭經世·李峻·金瑬등과 교유하였다.
오윤겸 후손이 중심이 된 해주오씨 집안의 정치적 성향은 초기에는 서인이었으며, 이후 노소론 分黨 후에는 소론으로 활동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道一, 命恒이었다. 그러나 소론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던 해주오씨 추탄공파의 후손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노론주도의 정국이 되는 것에 반비례하여 활동이 위축되어 갔다. 이후 그 일문은 慕賢面 吳山里 일대의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世居하였다. 12) 오윤겸 이후 이 가문에는 많은 문과 합격자와 당상관 이상의 관직 역임자를 배출하였다. 그 중 오윤겸의 아들인 達天(1598-1648)은 吏曹判書를, 손자인 道一은 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丙子胡亂시 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吳達濟 또한 이 집안 인물로서 오달천의 從弟가 된다. 그는 典籍, 兵曹佐郞, 侍講院司書, 正言, 持平, 修撰을 거쳐 1636年(仁祖 14)에 副校理가 되었다.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후 윤집, 홍익한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청나라로 끌려가 처형당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3)
西坡 吳道一은 吳達天의 아들로서, 문과급제자인 그는 1694年(肅宗 20)에 개성부유수를 거쳐 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大司諫, 副提學, 大司憲, 吏曹叅判, 工曹叅判, 兵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4년간 울진현감으로 있다가 1686年(肅宗 12)에 조정으로 돌아갔는데, 고을 정사를 맑게 하고 敎化가 행해졌다 하여 울진 民人들이 生祠堂을 건립하고 眞影을 그려 떠나간 공을 추모했다고 한다. 14) 또 문장에 뛰어나 시문 1300여수가 전한다고 하며 세칭 東人三學士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특히 그와 관련된 자료로서 이 가문에 家傳되어온 ‘詠畵’라는 簡札帖이 있다. 이것은 道一이 燕京에 奏請副使로 가게 된 것을 기념하여 당시 그와 교유하던 많은 인사들이 보낸 간찰을 帖으로 만들어 보존해온 귀중한 자료이다. 15)
해주오씨 추탄공파의 黨色이 소론으로 정착되는 시기는 吳命峻, 吳命恒 등으로 대표되는 17세기말-18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이다. 오명준은 1715年(肅宗 41) 「家禮源流」의 시비가 발생하여 노론, 소론의 대립이 첨예화했을 때, 책의 발문에 尹拯의 행동을 비난하였고, 이를 계기로 부제학 鄭澔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한편 吳命恒은 이인좌난에 판의금부사로 사도도순무사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여 奮武功臣 1등이 되고 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었으나,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이라는 것을 자책하고 상소하여 사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조선조 정계가 노론 일색으로 재편되면서 해주오씨 추탄공파는 용인군 모현면 일대에 在地士族으로서 완전히 정착하여 중앙정계와는 다소 거리를 갖게 되었다.
본서에 수록하는 해주오씨 가문의 고문서는 조선전기의 고문서가 좀처럼 찾아지지 않으며 派祖인 吳允謙代 이후의 문서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오윤겸 이전에 현달한 인물이 별로 없고, 楸灘公派를 비롯해 여러 갈래로 分派된 시기가 타 가문에 비해 비교적 늦은 17세기 초반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 고문서는 추탄공파 大宗孫家의 협조로 촬영한 것이지만, 종손 계열이 아닌 支派의 인물, 예를들면 吳道一, 吳命峻 등과 관련된 고문서도 함께 들어있다. 앞의 〈圖 1: 海州吳氏 楸灘公派의 家系〉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가문은 여타 양반가문과 마찬가지로 無後로 인해 조카 항렬에서 繼後하여 家系를 계승한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 16) 이런 과정에서 生父와 養父의 문서를 함께 보관하기도 하고, 시기별로 各家 소장의 문서를 종손에게 모아주기도 하면서 支派의 문서까지 함께 수집된 것으로 보인다. 17) 그러나 해은부원군 오명항 관련 고문서 등 아직도 많은 고문서류가 지파가문에 개별적으로 소장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추후에 학계에 공개되기를 기대한다. 18)
특징적인 문서들을 중심으로 본서에 수록하는 고문서의 내용과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가문의 宗稧의 존재를 보여주는 자료로 「首陽宗帖」을 수록하였다. 19) ‘首陽’이 海州의 古名이며, 따라서 이 가문도 해주오씨 대신 ‘首陽吳氏’로 지칭한 때가 있었음은 전술한 바 있다. 이 수양종첩은 贈領議政監役府君 吳希文의 자손들을 중심으로한 종계자료이다. 이 안에는 宗稧座目이 수록되어 있는데 오희문의 玄孫에서부터 9代孫까지 기재되어 있다. 20) 특이한 것은 이 가문의 族譜가 그랬던 것처럼 종계좌목에도 庶子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21) 이는 庶子도 종계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거주지별로도 京居者, 龍仁, 定山, 結城, 公州 거주자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거주지와 적서의 구별 없이 凡家門的으로 시행된 종계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서에는 191건의 告身敎旨를 수록하였다. 이 중 오윤겸에게 발급한 告身은 1595年(宣祖 28)부터 1633年(仁祖 11)까지 약 38년에 걸쳐 64건, 오달천 및 그 妻의 고신이 13건, 吳道宗(1618-1648)의 고신이 14건, 오도일의 고신이 81건이며, 吳遂顯(1659-1733)이 16건 등이다. 특히 오윤겸과 오도일의 경우 고신교지의 양만 보아도 이들의 화려한 관직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18세기 이후의 고신교지가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또한 18세기 이후 이 가문이 중앙 정계에서 멀어지고 재지사족에 머물렀음을 보여주는 요소가 될 것이다.
가장 많은 고신교지의 주인공인 西坡 吳道一의 경우, 그 외에도 특징적인 자료가 많이 수록되었다. 그 예로 첫째, 肅宗御製를 들 수 있다. 22) 이는 오도일이 강원감사로 떠날 때에 숙종이 餞別의 뜻을 표하고자 序와 詩를 직접 써서 보낸 것이다. 둘째는, ‘詠畵’라는 題名으로 帖冊된 간찰을 들 수 있다. 23) 오도일은 1686年(숙종 12) 6월부터 11월에 걸쳐 연경에 주청부사로 다녀왔다. 24) 이들 간찰은 모두 이를 기념하여 그와 교유하던 이들이 보낸 것이다. 영화 3帖이 모두 250여 건에 달하는 간찰을 수록하고 있으니 당시 오도일의 명성과 교유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吳命峻의 경우도 그와 관련해서 간찰첩이 전하고 있다. 이는 ‘別章帖’이라는 題名으로 上, 下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별장첩은 모두 1698年(肅宗 24)에 그가 永柔縣監으로 떠날 때에 받은 것이다. 문과급제자인 그는 영유, 강릉 등의 牧民官 시절에 善政을 베풀어 한때 生祠가 건립되었다가 철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5)
한편 이 가문도 다른 양반가문과 마찬가지로 계후자로써 가계를 계승한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시조로부터 17世, 18世 양대에 걸쳐 계후를 통해 宗家를 이어오고 있음은 앞의 〈圖 1〉의 가계도에서 확인되고 있다. 당시의 出·繼後 관계를 자세히 나타내면 다음 〈圖 2〉와 같다.
〈圖 2〉

〈圖 2〉에서 보면 吳遂顯은 伯父인 道宗의 계후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아들이 없어 조카인 命久(1718-1797)를 계후자로 맞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 수록한 上言26) 을 보면 처음에 입후하려던 대상은 命久가 아니라 遂良의 第三子인 命新이었다. 이는 양측의 父인 遂顯과 遂良이 생시에 이미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당시 命新의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즉시 立案을 받아놓지 않은 상태에서 生父인 遂良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生母 呂氏 또한 私情 때문에 여러 가지 핑계로 입안을 미루어오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이 上言은 생부모가 俱沒한 상태이지만 前例에 따라 立後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상언은 草文記이므로 실제 이런 내용의 상언이 올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命新의 立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圖 2〉에서 보듯이 수현의 계후자는 명신이 아닌 命久로서 그가 종가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呂氏 부인이 자식의 出後를 쉽게 허용할 수 없었던 私情이란 이미 막내아들인 命集이 出後한 상태이므로 두 아들을 출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조선후기 宗法的 사유가 보편화된 양반가문에서 가계계승이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실제 혈연적 연결고리보다 우선되지 못한 사례를 보여주는 특이한 자료라 하겠다.
19세기 이후 이 가문은 치열한 산송에 휘말리고 있다. 이 집안이 연루된 산송으로는 吳貞秀(1804-1874)代에 있었던 鄭氏와의 분쟁이 있다. 분쟁의 시작은 먼저 정씨가 縣에 單子를 올려 추탄 오윤겸을 비롯한 해주오씨 가문의 先代墓所가 자신이 守護禁養해오던 곳임을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落科하자 정씨는 營門에 議送을 올렸고, 이 때는 吳氏의 先山이 鄭氏의 當禁之中에 들어간 것으로 판결이 뒤집혀졌다. 이에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오정수 측과 용인에 거주하고 있던 정씨들은 묘지의 경계를 놓고 수차례 소송을 전개하였고, 결국은 官에 의해 묘소의 경계를 확인받기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과천현 霜草里에 있는 분묘의 경우 송추작벌문제를 놓고 몇차례 논란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에서 20세기초까지는 같은 가문내에서의 분묘다툼도 있었다. 즉 추탄공(오윤겸)의 후손인 吳和泳(1877-1956)과 해은공(오명항)의 후손인 吳憲泳간의 분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같은 가문인만큼 和解를 종용하고 그 곳에서 나는 수확물은 一石一斗라도 半分토록 판결이 남으로써 일단락되고 있다. 27)
그 외에 특기할 자료로는 分財記 1건과 土地明文 1건을 들 수 있다. 28) 乙亥年에 작성한 조모박씨의 분재기는 한글로 기록되어 있다. 여성이 財主로서 분재할 때에도 이렇게 한글로 분재기를 작성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특이한 자료라 하겠다. 토지명문 20번 文記는 토지를 매매하면서 작성한 문서가 아니라 3남매가 모여 제사의 윤회를 다짐하고 일정 토지를 지정하여 이를 제사윤회를 위한 財産으로 지정하고 있는 문서이다. 통상 分財記上에 奉祀條를 따로 지정하는 경우는 많지만 봉사조를 위해 이렇게 독립된 문서를 작성하여 보관한 경우는 특이한 사례이다. 이는 당시의 諸子女間 輪廻奉祀와 이를 위한 봉사조 재산의 지정 및 관리관행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판단된다.
해주오씨 추탄공파는 16세기 중반 吳希文이 妻家를 따라 용인 지역에 들어와 정착한 이후 관직 때문에 한양에 거주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용인일대를 벗어나지 않은 전형적인 경기지방의 사족가문이다. 따라서 이번 󰡔古文書集成󰡕 35-龍仁 海州吳氏篇-은 고문서를 통한 기호지방 양반가문 연구에 많은 기초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고문서를 이용한 嶺南 및 湖南 지방의 양반가문 연구가 매우 활발한 것에 비해 경기도 양반가문의 연구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며, 경기 지역의 고문서가 이렇게 고문서집성으로 간행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이번 작업은 매우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이 가문에 소장된 고문서류는 주로 교지류, 간찰, 시문류, 치부기록류 등이 대부분이다. 이 중 秋收記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을 중심으로 발췌수록하였으며, 擇日記, 初終記, 和劑 등은 지면 한계상 수록하지 못하였다. 또 簡札과 詩文類는 극소수의 문서만을 발췌수록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吳道一의 경우 1300여수의 시문을 지었다고 전해지듯이 이 가문은 문장에 능한 인물이 많고 학문적 교유범위가 넓었으므로 많은 양의 시문과 간찰이 소장되어 있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들 문서는 본서에 다 수록하지는 못하지만 韓國精神文化硏究院에서 언제든지 마이크로필름으로 열람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밝혀 둔다.
본서에 수록한 고문서의 자세한 목록은 뒤에 첨부하는 〈附錄〉에서 그 作成年代와, 發·受給·撰者, 문서의 規格과 特記事項을 밝혔으니 이를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