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우리 역사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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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대한민국

2017. 4. 27.



우리 역사 다시 보기


글: 허성도 박사


 아래 글은 200자 원고지로 200매 가까운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에서 간추린 것이다.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에서 한 강연이다. 정말 가슴 뭉클한 글로서 이 책의 서두를 장식하려고 맨 앞에 올렸다. 소제목과 각주(脚註)는 필자가 단 것이다. (오소운) 



1) 나로호 실패 당연하다



나는 2010년 6월 10일 오후 5시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얼마 전에 이런 글을 봤다.


1600년대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

나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우주개발역사를 보면 이 실패는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가 우주 개발에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다.


1957년,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미국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다. 실패한 미국은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다.


‘우리 미국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제 힘으로 한 게 아니었다.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ㆍ재미니 다 실패하고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 사업이 성공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


지나는 어떻게 개발했는가? 여러분은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아실 것이다.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가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 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 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지나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그러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 라고 했는데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지나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다. 당시 지나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는데, 이를 1대 1로 교환하자고 했다. 그런데 미국은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다. 미국은 전학삼에게 ‘너는 지나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했지만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다.


그는 나이 마흔 여섯에 지나에 돌아와 모택동을 만났다. 여기서부터는 일화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하자 전학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해낼 수 있다. 그런데 첫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치고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 성과가 어떠냐 따위의 말을 절대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모택동은 그것을 다 들어 주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그는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고 정부는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다.


오늘날 지나의 우주과학이라는 것은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이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2) 신기한 한민족의 나라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이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다. 기억나십니까?


❶사색당쟁,

❷대원군

❸쇄국정책,

❹성리학의 공리공론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친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1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미국ㆍ소련ㆍ지나 등 다른 나라에서 배운 사실을 비추어 보듯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된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이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ㆍ700년ㆍ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 동안을 살아남은 왕조가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이다.


1300년대의 역사 지도를 놓고 보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다. 당시 서구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 계속 되고 있었는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다. 에스파냐 왕국이다. 그 나라가 500년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 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노릇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 노릇을 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지 단일 집권체가 500년 가지는 못했다. 전 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이나 유지되어 온 것은 조선왕조 딱 한 나라 이외에는 없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다. 고구려가 700년 갔다. 백제가 700년 갔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다. 러시아에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아시아에 하나가 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이다.


그러면 한민족이 세운 이 나라들은 신기한 나라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다. 왜 그럴까? 그러려면 국민이 다 바보거나 다 똑똑하거나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한다.


첫째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라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었고,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었고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었다.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없었다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를 알아보자.


3) 기록문화의 정신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난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한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깨나 써야만 되는가. ‘그럼 한문 쓰는 사람만 다냐? 한문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 글줄 깨나 써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다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거다. 그래서「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격은 칠 격(擊)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24년 동안 상소ㆍ신문고ㆍ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천 건이다. 이것을 재위 연수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해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이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는가요?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 아주 똑똑하고 또 야무진 백성에 해당한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제 말씀 드리고자 한다.


―첫째는 조금 김이 새겠지만 ‘기록의 문화’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나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다. 그걸 딱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지나 땅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이집트 사람, 지나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였겠지요? 저도 그랬다.


헌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 왕이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은가? ‘마마, 마마가 물러나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 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있겠는가?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지요.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는가. ‘당신이 물어나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 기록을 남겨주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하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할 때면, 웬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어 여러분이 하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화장실 가면 언제 몇 시에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죽는 날까지 적는다면, 기분이 어떠실 것 같아요?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적혀 있다.


경국대전


우리 사극에서 간신배가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도 적었다. 인조는 그 사관이 괘씸해서 엉뚱한 죄목을 걸어 귀향을 보냈다. 그러자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그 사실을 적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는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닌가? 그래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다. 이걸 사초(史草)라고 한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한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으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하고 청문회 하듯 확인한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한다. 4부를 출판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고,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6,400만자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가.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이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나이다.’ 세종이 참았다. 몇 년이 지났다. 또 보고싶어서 환장을 하겠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나이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 왕들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는가, 안 들었겠는가? 들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 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문제는 여기 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다. 누구 보라고 썼겠는가?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다.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올렸다.


(2)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승정원 일기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 비서실이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다. 이 최고 권력기구는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다. 이 일기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다.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다. 이 ‘승정원일기’는 1910년까지 썼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는가? 우리,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이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늦으면 80년 후에 끝난단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긴 것이 우리 선조다.


(3) 일성록(日省錄)

일성록


왕들의 일기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왕이 되고 나서도 썼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손자 왕도 1910년까지 썼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했는데 선대왕들이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후대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하다가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다. 국방ㆍ경제ㆍ과거(科擧)ㆍ교육에 관한 모든 사항을 조목조목 다 썼다.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가 세계 어디 있는가.


나는 언젠가는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하여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내고 싶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다. 500년간의 [실록]이 있다. 혹시 보시고 싶으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네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가.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 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는가. 그게 뭐냐면 국격(國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모두 한자로 씌어 있어서) 우리가 지금 못 보고 있을 뿐이다.


(4) 고대의 기록들


지진에 대해 집중 조사를 해 보았더니 '삼국사기'에 지진이 87회, ‘삼국유사’에 3회,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다. 우리 방폐장ㆍ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천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ㆍ핵발전소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놓으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이다. 그리고 정문에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다.


‘우리 민족이 가진 2천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천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 물어볼 것이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이다.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이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5) 정치ㆍ경제ㆍ과학 문제


(1) 조세의 문제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자.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세종,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사옵니다.’ 세종은 언제나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부결되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르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다.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데 5개월이 걸렸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왔다. 찬성이 훨씬 많아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찬성이 물론 많으나 반대도 많사옵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올리기 시작하면 도루아미타불이옵니다.’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다시 만들어라’ 해서 안이 완성되었는데 또 부결이 됐다.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되어 시범실시를 3년 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다.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된다 사료되옵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다. 다시 시범실시를 했다. 성공적이라고 올라왔다.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다. 또 부결이 됐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사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된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 만에 공포·시행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한 일이 있는가. 나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2) 법률문제


오늘날 3심제를 하지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시골 감영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관찰사가 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다.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이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면 이 책이 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다 나와 있다. 이게 조선의 법이다. 이래서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6) 첨단과학이 발달한 조선시대


과학에 대해 알아보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은 1543년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출판금지를 시켰다. 그 책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인 1767년에 나왔다.


동양에서는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네모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리학자 주자(朱子)다. 그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다.


그런데 이것을 증명해낸 것이 서구보다 2백년 앞선 1400년대에 이순지(李純之, 1406―1468)라고 하는 세종 때의 학자다.

이순지 약력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1400년대이다. 그러자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다. 일식ㆍ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이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이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였다. 여러분, [동지사(冬至使)]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기껏 다음 해의 달력을 얻어 오는데,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달라 사리ㆍ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집결을 했다. 이순지가 책임을 맡게 되자 세종한테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진급이 느립니다.’ 그러자 세종이 즉시 명령한다. ‘서운관의 진급 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다.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높은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전하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한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다.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 영의정 아닙니까. 세종은 즉시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발령을 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다. 이 책은 일본 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란 책에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쓴 책이 조선의 이순지가 저술한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다.” 라고 나와 있다.

칠정산 내외편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공개를 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세종이 너무나 기뻐서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七政曆)’이라고 붙여줬다. 이것이 그 후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다.


1,400년대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한다. 아라비아ㆍ지나 그리고 조선뿐이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이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다.


7) 담헌서(湛軒書)와 기리고거(記里鼓車)


기리고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이다. 여기에는 sinA를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등이 나와 있다.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하는데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다.


기리고거(記里鼓車)라는 게 있다.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유사하다.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이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기리고거란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이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매달아 놓은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다.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매달아 놓은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다. 여기 고뢰(鼓擂), 종료(鍾鬧)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친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니며 지도를 그렸다.


세종은 대단한 왕이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는데 그냥 가지 않았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가서 한양과 온양 간 거리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했다.


8) 신라의 국학대학(國學大學)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대학을 세웠다. 철학과(哲學科)와 명산과(明算科) 두 과가 있다. 명산과는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다.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졸업하면 산관(算官)이 된다. 수학을 잘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다.


전 세계에 수학만 잘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 제도는 계속 되었다. 이 산관이 수학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된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하면,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이다. 석굴암ㆍ불국사를 짓는 정밀한 설계도 산관이 해낸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 김부식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왔다. 삼개(三開)ㆍ철경(綴經)ㆍ구장산술(九章算術)ㆍ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한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方程)이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풀었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 가장 궁금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나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이다.


9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다. 갈고리 구(勾)자, 허벅다리 고(股)자다. 여기 2차 방정식이 나온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온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다.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오는데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신라시대 교과서에 나온다. 우리는 삼국시대에 이미 이런 교육을 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온다. 비밀할 때 , 비율 할 때.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이런 것을 삼국시대에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ㆍ마이너스ㆍ정사각형 넓이ㆍ원의 넓이ㆍ방정식ㆍ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이라 가르치고 있으니 한심하다.


우리는 파이(π)를 밀률(密律)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로 파이(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이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나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 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문건으로 남겨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국격(國格)이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잘 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이다.


9) 맺는 말, 한문을 가르치자


제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있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하지만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하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새로 쓸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새로 쓸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새로 쓸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새로 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전공하지 않는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느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온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된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가서 떠들어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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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도 박사



교육

1968. 3. ~ 1972. 2.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1972. 3. ~ 1974. 2.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석사1978. 3. ~ 1986. 2.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경력

1980. 9. 1985. 2.충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전임강사․조교수1985. 3.~ 현재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전임강사 ․ 조교수 ․ 부교수 ․ 교수


공적내용

허성도 교수의 강의는 철저한 준비와 충실한 수업으로 정평이 나있고 강의 준비와 수업에 대한 열의는 교육방식의 개선을 위한 노력에서 특히 두드러진 평가를 받았다. 교수법 개선을 위한 강사 워크숍 역시 새로운 교수방식을 통해 수업의 질과 효율성을 추구하고자 “중국어입문”을 담당하는 강사들을 대상으로 매년 한차례씩 워크숍을 개최하여 중국어 교수법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왔다. 또한 중국어학습 특별프로그램 운영하여 실용중국어 수강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왔다.

각주 1

이 분은 우리 외할머니의 외삼촌이시다. 즉 외할머니의 친정 어머니가 대원군의 누이란 말이다. 따라서 고종황제는 우리 외갈머니의 고종4촌 오빠다.

  1. 이 분은 우리 외할머니의 외삼촌이시다. 즉 외할머니의 친정 어머니가 대원군의 누이란 말이다. 따라서 고종황제는 우리 외갈머니의 고종4촌 오빠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