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보르항'과 '식그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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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문학가협회

2017. 5. 10.


'보르항'과 '식그무니'

 

[유라시아 신화기행]

유목민들의 聖山 몽골 보르항

하느님․버드나무 뜻해…붕우리․초원의 강 어디서 본듯

석가․미륵불 등장하는 신화도 닮은꼴

 

▲ 〈보르항〉은 우리 말로 버드나무를 뜻한다. 성산 보르항에도 어김 없이 우리의 서낭당과 비슷한 〈어워〉가 있다. 그리고 그 어워는 버드나무로 꾸며졌다. 어워 뒤편으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보르항 산은 다른 몽골의 초원과는 달리 우리의 산 지형을 닮아 있었다. 그 기시감(旣視感)은 놀라울 지경이었다./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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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기의 유라시아 신화기행

 

보르항 산은 칭기스칸이 묻혀 있다는 산, 몽골인이라면 누구나 묻히고 싶어하는 성산이다. 우리가 부모 함자 입에 올리기를 꺼리(忌諱)듯이, 몽골 인들은 이 산에서는 절대로 <보르항>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보르항 산 가는 길은 실로 멀고 험했다. 꼬박 하루 반 우리를 태우고 동 몽골 평원을 달린 러시아 지프는 주행기능만 겨우 갖춘 쇳덩어리였다. 전후 진퇴와 상하 도약에 두루 능해서 며칠 타고 다녔더니 엉덩이와 정수리가 평균적으로 얼얼했다. 유럽 전문가들이 이 차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내렸다는 평가는 잔혹하다.

 

「썩 잘 만든 자동차다. 사람 태운다는 걸 까먹고 만든 것만 눈감아준다면.」

 

보르항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오르는 순간, 나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우리 경험에는 편입되기 어려울 듯한 막막한 초원과 험악한 바위산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있던 나는 눈을 의심했다. 보르항 연봉, 그 연봉 바라다 보이는 구릉 위의, 서낭당과 너무나 흡사한 어워, 초원을 흐르는 강이 그렇게 낯익어 보일 수가 없었다.

 

이 성산 이름이 유럽인들 지도에는 <부르칸>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몽골 인들에는 <보르항>이다. 보르항은 <하느님>, 혹은 혹은 <버드나무>를 뜻한단다.

 

<밝은 산>으로 푸는 학자도 있다. 최남선이 백두산 옛이름으로 본 <불함산(不咸山)>과 같은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보르항 박시>는 몽골의 창조신 이름이다. 알타이 문화권에서 널리 쓰이는 <박시>는 <샤만(巫覡)>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규경의『오주 연문 장전 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남무(男巫)라는 의미로 <박사(博士)>라는 말을 쓴다.

 

<조선>이 <아침>이라는 문헌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은 우리의 뿌리인 원시 북방 몽골 인의 유목 생활을 상징하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르항>이라는 말이 내 안에 지어낸 울림은 깊고 그윽했다. 신화 읽은 보람인가.『몽골 민간 신화』(체렌 소드놈 지음, 이평래 역, 대원사) 한 대목을 읽어 본다.

 

「… 식그무니 보르항(석가모니불), 마이다르 보르항(미륵불), 에첵 보르항(아버지 신불)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누가 이들을 보살필 것인지를 두고 의논했다…

 

세 보르항은 각각 자기 그릇을 놓아 두고, 누구의 그릇에 빛이 발하는가를 보고, 그 보르항이 사람을 보살피기로 결정하고 잠이 들었다(이하 <보르항> 생략).

 

다음날 식그무니가 일어나 살펴보니, 마이다르 앞에 놓인 그릇에서 빛이 발하고 꽃이 피어나 있었다. 식그무니는 마이다르 앞의 그릇을 자기 그릇과 바꿔놓고 다시 잠을 잤다…

 

모두 잠에서 깨어나 그릇을 살펴 보니, 식그무니 앞에 놓인 그릇에서 꽃이 피어나고 빛이 났다. 그리하여 식그무니가 사람들을 보살피게 되었다…

마이다르가 말했다.

 

『네가 나를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네가 보살필 사람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도둑질하며 살게 될 것이다.』

 

마이다르와 에첵은 하늘로 가고,

식그무니는…지상에 남게 되었다.

 

 

『한국의 창세 신화』(김헌선 지음, 길벗)는 손진태가 1930년대에 함경도 무녀로부터 채록한 <창세가>를 싣고 있다.

요즘 말로 옮겨 일부를 소개한다.

 

「…미륵님 세월에는… 태평했는데 석가님 내려와서 미륵님 세상을 빼앗고자 하니 미륵님 말씀이, 아직은 내 세월이지 네 세월은 못 된다… 내 세월 빼앗고 싶거든 내기 시행하자… 너와 나와 한 방에 누워서 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 내 무릎에 올라오면 내 세월, 네 무릎에 올라오면 네 세월이라.

 

석가는 도적심사를 먹고 반잠 자고 미륵님은 온잠을 잤다.

미륵님 무릎 위로 모란꽃이 피어올랐는데, 석가가 중둥이를 꺾어다가 제 무릎에 꽂았다.

 

(미륵님) 일어나서,

"축축하고 더러운 석가야,

내 무릎에 꽃이 피었는데 네 무릎에 꺾어 꽂았으니

꽃 피어 열흘 못 가고 심어 10년을 못 가리라.

 

미륵님은 석가 성화가 받기 싫어…

세월을 주기로 마련하고…

네 세월이 될라치면 문짝마다 솟대 서고,

가문마다 기생 나고,

가문 마다 과부 나고,

가문마다 무당 나고,

가문마다 역적 나고……」

 

몽골 신화가 내려온 것인가, 우리 신화가 올라간 것인가?

쉿. 흥을 오래오래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넓고 넓은 옛 이야기의 초원에서, 아득했다.

 

(이윤기/ 소설가)

 

 

◆신화도 길처럼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방식 비슷해

 

몽골 초원에는 길이 없다. 거꾸로 말하면, 초원이 모두 길이다.

길이란 무엇인가? 한 지점과 다른 지점을 잇는 가장 가깝고 편안한 이동로다.

초원에 길이 한 줄 생겨나면 유목민들은 한동안 그 길을 간다.

하지만 옆으로 더 나은 길이 나면 모두 새 길로 들어선다.

 

사람들이 가장 가깝고 편안한 길로 승인하고

이름을 붙이기까지 모든 길은 잠정적인 길에 지나지 않는다.

 

옛이야기(신화)가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방식은

길이 만들어지고 길로 확정되는 방식과 많이 닮은 것 같다.

옛이야기에는 주인이 없다. 모두가 옛이야기의 주인이다.

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모두 그 이야기를 향유한다.

 

하지만 바로 이본(異本)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수많은 이본 중에서 사람들 마음 바닥을 가장 절실하게 울린 이본이

우리가 읽는 옛이야기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1948년, 컬럼비아 대학 총장에 취임한 아이젠하우어는,

새 건물을 여러 채 짓고도, 땅에 잔디를 깔았을 뿐 길은 내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잔디에,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통하는 길이 여러 갈래 났다.

그제서야 그는 그 길을 <길>로 확정하고 비로소 포장하게 했다.

그는 길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신화와 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말타고 초원길 달려오는 몽골 인이 보였다.

동행한 기자에게는 견강부회로 들렸던 모양인가?

이렇게 반응한 걸 보면.

저기, 말 탄 몽골 인이

<신화> 위를 달려오고 있군요.

 

 

입력 : 2002.09.15 19:07 17' / 수정 : 2002.09.15 21:11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