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찬송과 동요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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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문학가협회

2017. 6. 5.



찬송과 동요의 전성기

글 : 오소운 목사


《아동 찬송가, 1936》가 출판되던 1930년대는 찬송가와 동요의 전성기라고 하겠다. 교단마다 찬송가를 출판하고, 아동문학가와 작곡가들은 새로운 동요를 작사 ․ 작곡하여 보급하고, 교회는 교회대로 주일학교가 부흥하여, 도시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찬양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역동적인 시기였다. 먼저 이 기간 동안에 출판된 찬송가를 살펴보자.


①1930년, 부흥성가(성결교, 242곡)

②1931년, 신정 찬송가(연합공의회, 314곡)

③1932년, 「찬숑가」에 「신정 찬송가」에서 31곡 발췌추가(총 317곡)

④1933년, 찬미가(안식교, 248곡)

⑤1934년, 방언찬송가(개인출판, 77곡)

⑥1935년, 신편 찬송가(장로교, 400곡)

⑦1936년, 아동 찬송가(장로교교육부, 101곡)

⑧1937년, 聖會頌歌(성공회, 150곡)

⑨1938년, 가톨릭 성가집(천주교, 213곡)

⑩1939년, 구세군가(구세군, 139곡)

⑪1939년, 복음찬미(동아기독대, 274곡).


이 10년 동안, 매해 각 교단에서 찬송가를 출판하였는데,《아동 찬송가, 1936》도 그 중에 들어 있다. 출판 연도는 알 수 없지만, 1942년에《아동 찬송가(무곡판, 30전)》을 나는 고향에서 가지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작곡가요, 1천 200 여 곡의 찬송가를 작곡하여 봉헌한 나운영 장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ㅡ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양악은 서양찬송가로 시작되어, 이상준 ․ 김인식 ․ 백우용 등이 작곡한 「창가」의 보급 ․ 애창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창가 중에는 서양 찬송가보다는 일본 창가의 영향이 더 두드러진 듯한 느낌이 많다.


이 「창가」1에 이어 등장한 것이 「동요」이다. 우리나라의 동요는 윤극영 동요 작곡집 제1집《반달》이 출판된 1926년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수정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박태준 작곡의 「기러기」 외 12곡이 모두 1920년에 작곡되었기 때문이다.《박태준 작곡집》 (1975년, 세광출판사 발행)의 차례를 보면 이 사실이 밝혀져 있다. 물론 박태준의 최초의 동요작곡집《중중 때때중》은 1929년에야 출판되었기 때문에 윤극영의 작곡집《반달》이 3년이나 앞선 것처럼 느껴지지만 윤극영의 최초의 동요인 「고드름」은 1924년 8월에 작곡되었으니 박태준의 동요가 이보다 4년 앞선 것임을 알 수 있다.



루터 메이슨


▶애국․독립운동의 일환이었던 동요창작 운동


박태준 윤극영, 홍난파, 정순철 , 이일래 , 박태현 등등의 동요운동은 우리나라의 정서가 담긴 최초의 창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래를 통한 구국 , 애국 , 독립운동이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동요작곡가들이 줄줄이 태어나 활동하던 이 시대에, 양악의 발상지가 새문안교회였음은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새문안교회 70년사》에 보면, 1917년 집사 명단 중에 우리나라 양악계의 거목 이름들이 보인다. 김인식 ․ 이상준 ․ 김형준 ․ 홍영후(난파)가 이들이다….

새문안교회 집사들로서 1930년대에 활동한 음악가에 대해 알아보자.


♬․김인식과 「예수 나를 위하여」


근대 서양음악의 개척자인 김인식(金仁湜, 1885~1962)은 평북 강서 태생이다. 그는 교회에서 풍금 치는 것과 노래하는 것을 몹시 흥미 깊게 보고 들었다고 했다. 이후 그는 16세 때 정의여학교 교장인 미스 벨마 스눅(Miss Velma L. Snook)과 한위렴(韓衛廉, William B. Hunt, 1869~1953) 선교사 부인인 버사 핀들리 헌트(Bertha Findley Hunt)에게서 성악을 배웠는데, 악보가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악보를 베껴서 배우다가 나중에는 다른 악보까지 빌려서 모조리 베꼈다.


그는 실력이 뛰어나, 3학년 때부터 저학년들의 음악 교사 노릇을 했다. 그 뒤 선교사 그람 리(Graham Lee)에게 코넷을 배우는 한편 독학으로 바이올린 연주법을 터득했다. 그가 한 일이 많지만 가장 큰 일은 찬송가 번역과 편집이라 하겠다. 이유선 교수에 의하면《찬숑가, 1908》중 100여 편이 그의 번역이라고 한다. 그리고《신정 찬송가, 1931》서문에 보면 「교열은 피득 목 부부와 김인식 씨가 하였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1904년 평양 서문 밖 소학교 운동회 때에 부를 「학도가」를 작사 ․ 작곡하였는데, 학도가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학도야 학도야 뎌기 청산 바라보게

고목은 썩어지고 영목은 소생하ㅏ

동방구 대-한의 우리 쳥년 학도들아

놀기를 됴화망고 학교로 나가보세


이것은 우리나라 창작 창가의 효시로서, 4/4박자, 16마디 단선율로 되어 있으며, 리듬은 서양음악적인데 반해, 한국 전통 운율인 34조에 5음 음계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특히 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이상준과《풍금독습 중등창가집》


이상준(李尙俊, 1884~1948)은 황해도 재령 태생이다. 피어선성경학교에서 선교사에게 아코디언을 배운 후 음악에 열중하여, 1899년 새문안교회 찬양대를 지휘,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찬양대 지휘자의 영예를 얻었고, 같은 해 평양 대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쳐 음악교사 제1호란 영예도 차지하였다.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서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졸업 후 서울의 여러 학교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중등창가집》․《풍금독습 중등창가집》․《악리부(樂理附) 중등창가집》․《보통악전개요(普通樂典槪要)》․《나팔곡집》등을 출판하였다.


♬․홍난파와《조선동요 100곡집》


홍난파(洪蘭波, 1898~1941)는 경기도 수원 태생이다. 본명은 영후(永厚). 1912년에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 졸업 후 다시 기악과에 입학하여 김인식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졸업 후 모교의 교사가 되었다. 1918년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 해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생명 같이 아끼는 바이올린을 저당잡혀 운동자금을 대고,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3․1운동 후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반일학생」이라며 받아주지 않자, 1926년 동경고등음악학원에 편입 1929년에 졸업하고 귀국하여《조선동요 100곡집》(상권)을 내었다. 1931년 9월 미국 시카고시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 연구과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마리누스 폴센(Marinus Paulsen) 박사에게 사사하였다. 1933년에 귀국, 이화여전 강사로 있으면서《조선동요 100곡집》(하권)을 냈다. 이 하권을 낼 때에는 가사가 없어서 곡조를 먼저 작곡하고, 거기다가 당시 23세의 윤석중(尹石重)에게 가사를 붙이게 했다는 것이다. 1954년 「홍난파 13주기 추도회」에서 윤석중은 이렇게 회고했다.


― 종로 2가 徳元빌딩 3층에 (난파선생의) 研楽会가 있었다. 필요성 때문에 동요 100곡을 짓기로 결심하셨는데, 하도 급해서 더러는 멜로디를 먼저 쓰시고, 나중에 나에게 가사를 부탁하셔서 맞춰 넣었다.


난파 선생은 「구니다찌(國立」에 다니면서 바이올린 연습시간 외에는 책을 들고 놓지 않았다. 돈만 생기면 책을 사는 게 일이어서 음악분야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대해서도 박식했다. 성격은 온순하고 생전 가야 남에게 성내고 다투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장난기가 좀 있어 나중에 그의 조카며느리가 된 김원복에게까지, 기숙사에서 복면을 하고 숨었다가 깜짝 놀라게 하는 등 짓궂은 장난을 좋아했다. 그는 애국자였다. 1919년 「2. 8 독립선언」때 일본 동경에서 바이올린을 저당 잡혀 독립운동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뿌렸고, 1941년 「홍사단사건」으로 72일간 종로경찰서에서 고생하다가 풀려난 뒤 경성요양원(현 위생병원)에 10일간 입원했다가 퇴원한지 5일 후에 별세하여, 새문안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드렸다.


♬․김형준과 김원복 그리고 「봉선화」


김형준(金亨俊, 1884~1950)은 황해도 신천(信川) 태생이다. 숭실중학교에서 선교사들에게서 음악을 배웠고 특히 트럼펫을 잘 불었다. 그는 한국 악단의 선구자로서 홍난파보다 먼저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원을 졸업했다. 그의 딸 원복(金元福, 1908~2002)은 한국 최초의 피아니스트인데 2002년에 94세로 별세했다. 


그의 생애를 신문에서 발췌해본다.

「한국 최초의 여류 피아니스트」 김원복 씨가 (02년 4월) 29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 가곡 「봉선화」의 작사자인 성악가 김형준의 딸로, 이화여고를 거쳐 동경 구니다찌(国立)음대 졸업 후 귀국, 피아니스트로 활동, 이화여대와 서울대 교수를 지냈다. 고인은 구니다찌음대 시절 작곡가 홍난파의 조카로 바이올리니스트인 홍성유(洪盛裕)를 만나 결혼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28년 동경 한국 YMCA 등에서 「부부 음악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하지만 결혼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오로지 연주에 여생을 바쳤다.


1920년 난파는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哀愁)」라는 곡조의 악보를 그의 단편 소설집《처녀혼》의 뒤에 실었는데, 25년 성악가인 김형준에게, 그 곡에다 가사를 붙여 달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봉선화」이다. 「봉선화」는 한국 최초의 44조 전통운율로 된 가곡이요 민족의 노래이다. 봉선화는 일제로부터 가창이 금지되기도 했다.


♬․윤극영과 동요곡집《반달》


윤극영(尹克榮, 1903~1988)은 서울 태생이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 동경음악학교 ․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였다. 1923년 「색동회」의 창립동인으로 활약하고, 이듬해 동요단체인 「다리아회」를 조직, 어린이 문화운동과 동요창작 ․ 작곡운동을 벌였다. 동요작곡의 선구자로서 망국의 한을 노래에 실어, 1924년 반달 ․ 설날 ․ 할미꽃 ․ 고기잡이 ․ 꾀꼬리 ․ 옥토끼 ․ 고드름 ․ 따오기 등 창작동요를 한데 묶어《반달》이란 제목으로 작곡집을 내어 어린이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다. 동요보급 운동도 함께 전개 「반달 할아버지」로 널리 알려졌다. 300여 곡의 동요 이외에 동요작곡집으로《반달》․《윤극영 111곡집》을 내놓았다.



윤극영의 반달


윤극영 작곡 동요 「반달」이 나온 1920년대는 3․1운동의 슬픔을 안고 많은 지사들이 각자가 나름대로 독립운동과 애국운동을 펼쳐나가던 시대였다. 이 시기는 근대 음악의 싹이 트는 시기로서 교회마다 찬송가 ․ 창가 ․ 애국가요 ․ 동요 등을 보급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동요 「반달」이 나오기까지 우리 어린이들은 동요다운 동요를 부르려야 부를 노래가 없었다. 있었다면 고작 방정환이 외국 곡조에 맞추어 지은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가 어린이들을 위한 유일한 노래였다. 「반달」은 작곡된 직후 나이의 구별 없이 온 겨레의 노래가 되었다.


「반달」을 작사 ․ 작곡한 윤극영 선생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전혀 뜻밖이었어요. 그렇듯 짧은 세월에 그렇게까지 널리 퍼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는 「반달」을 작곡한 날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23년 9월 9일, 21살의 청년이던 윤극영은 서울 삼청공원 근처인 소격동에 살고 있었다. 그에겐 누님 한 분이 계셨다. 그 누님은 그보다 10년이나 위인데 일찍 경기도 가평으로 출가하여 얼굴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누님의 시집은 가운이 기울어 가는 양반 집이었지요. 가난 속에서 무척 고생스런 시집살이를 하고 있어 평소 저의 양친께서도 가슴 아파하셨지요."


그 누님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밤을 지샌 그에게도 새벽이 왔다. 윤극영은 삼청공원으로 가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반달」의 악상이 떠오른 것은 바로 이 때였다 한다. 울음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은하수 같은 엷은 구름 너머로 반달이 걸려 있고, 저 멀리 샛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누님을 잃은 슬픔 속에서 태어난 「반달」은 나라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당시의 온 겨레의 마음 속에 파고 들었다. 돛대도 삿대도 없이 정처 없이 흘러가는 하얀 쪽배는 곧 조국의 슬픈 모습이요, 간도 ․ 중국으로 유랑하는 겨레의 외로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달」로써 빼앗긴 나라의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이 노래가 불길처럼 퍼지게 된 데에는 당시 윤 선생이 주재했던 소녀 합창단인 「다리아회」의 힘이 컸다.


이 노래엔 일화가 많다. 윤 선생이 만주에 있을 때 아시아 전역의 일본화를 지원키 위한 일본 연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한 일본인 가수가 「반달」을 부르고는 이런 말을 했다.

"이 곡은 조선인이 작곡했다고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일본인의 작곡이지요."

이 자리에 있던 윤극영 선생과 그의 친구들이 기가 막혀 항의를 했다. 그 일본인은 몰래 윤극영 선생의 집으로 찾아와 이렇게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작곡자가 이런데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윤극영은 「반달」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은행원이 담보를 요구하자 뱃장 좋게 이렇게 말했단다.

"담보물은 없소. 그러나 나는 「푸른 하늘 은하수」의 작곡가요."

그러자 ‘은행에서 돈을 빌려 주더라’며 껄껄 웃는 것이었다.


경찰지서(支署)에 끌려간 맹꽁이오소운 목사


1944년 여름방학이 되었습니다. 맹꽁이는 낮에는 학교에 가서 풍금을 치고, 밤에는 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함께 노래를 부르는 동안 아이들은 노래를 익히는 것입니다. 윤극영 선생이 작사․작곡한 「반달」도 부르고, 박태준 선생이 작곡한 「오빠 생각」이란 노래도 부릅니다. 맹꽁이는 많은 동요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소파(小波) 방정환 선생이 지은 「형제 별」을 특히 좋아하였습니다.


♬․형제 별


날 저물은 하늘에 별이 삼 형제

빤짝빤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웬 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리네


이 노래는 언뜻 보면 그냥 별을 노래한 것 같지만, 실은 이중가(二重歌)로서, 그 이면(裏面)의 뜻은 삼천만 민족 중 천 만 명 가까이가, 간악한 왜인들에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농토를 빼앗기도,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고향을 떠나 북간도로 이주해 간, 민족의 한을 담은 노래였습니다.


처음에 맹꽁이는 이 노래의 숨은 뜻을 모르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는 맹꽁이를 집안으로 불러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너 그 노래 뜻이 무언지 알고 부르는 거냐?”

“노래 뜻이요? 별 삼 형제가 있었는데, 별 하나가 구름에 가리자 다른 두 형제 별이 눈물을 흘린다, 이런 뜻 아니에요?”

“물론 겉으로 나타난 뜻은 그렇지. 그런데 그 별 삼 형제가 삼천만 조선 민족을 가리킨단다. 왜인 등쌀에 땅을 빼앗긴 수백만의 동포가 북간도(北間道)로 간 것을 슬퍼하는 우리 이천만 민족의 노래란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2절이 있어야 하겠군요.”

맹꽁이는 그러며 즉석에서 2절을 만들어 불렀습니다.


바람 불자 막내 별 다시 나타나

언니 별과 반갑게 다시 만났네.

삼 형제 별 ‘다시는 헤지지 말자!’

손가락을 걸고서 약속을 하네.


그러자 아버지는 맹꽁이의 입을 막으며 좌우를 둘러보았습니다.

“너 그러다 큰 일 내겠구나. 그런 노래 불렀다가는 당장 순사(巡査)에게 잡혀 가.”

그러나 맹꽁이는 태연했습니다.


“왜인들이 알긴 무얼 알아요? 일본 군가를 부르는 시간에 가사를 바꾼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뼈 이 피는 /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이라’ 하고 조용히 불러도, 지네 나라 군가 부르는 줄 알고 잘 부른다고 칭찬만 하는 걸요.”

“원 녀석도…. 그래도 조심하여라. 왜인들 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새 세상 되거든 맘껏 크게 불러라.”


하고 신신 당부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간 맹꽁이는 첫 시간에, 긴 칼을 찬 지서 순사가 자기 반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또요또미가 다레까? (とよとみが だれか? 도요또미가 누구냐?)

“하이, 와다시가 도요또미데스 (はい、わだしが とよとみです。예, 제가 도요또미입니다.)


담임 선생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순사는 “물어 볼게 있으니 잠깐 데리고 오라”는 지서장의 명령이라며, 지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지서장은 책상에 군화를 걸치고 비스듬히 앉아서 들어오는 맹꽁이를 날카롭게 쏘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너 밤마다 아이들 모아 놓고 조선 노래를 가르친다는데 사실이냐?”

지서장이 일본말로 물었습니다. 


맹꽁이는 큰 소리로

“가르쳤다기보다는 함께 불렀습니다.”

“그 노래들이 어떤 내용인지 말해 봐.”

“녜, 조선 동요들입니다. 「오빠 생각」이란 동요는 서울 간 오빠를 그리워하는 누이동생의 노래이고, 「반달」이란 노래는 밤하늘에 흘러가는 반달을 노래한 것이고….”

“왜 일본 노래는 안 부르고 그런 조선 노래만 불렀지?”


순사들이 모두 맹꽁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담대한 맹꽁이는 거침없이 그 이유를 대었습니다.


“그 애들은 아직 학교에 못 들어간 제 동생이나 조카들입니다. 일본말을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 왜 네가 그 애들에게 노래를 가르쳤지?”


“제가 주일학교 선생이거든요. 올해에는 남자 선생들은 모두 징병으로 전선에 나가고, 여자 선생들은 다 시집을 갔기 때문에 부족한 제가 선생으로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여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별을 보며 노래를 불렀어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아냐, 아냐! 노래 부른 게 무슨 잘못이 되겠니….”

그러는데 걱정이 된 담임 선생님이 따라 와 맹꽁이를 변명해 주었습니다.

맹꽁이는 전교에서 수석이고, 이찌가와(市川) 교장도 신임하는 모범생이다, 원래 노래를 좋아하니까 방학 동안 밤하늘을 보며 노래를 부른 것일 게라며 적극 변명해 주었습니다.

“이찌가와 대위(大尉)가 믿는 애란 말이지요?”


이찌가와 교장과 지서장은 제대 군인인데 같은 부대 출신이라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녜, 믿을 뿐만 아니라 끔찍이 사랑한답니다. 글쎄 얘에게는 오르간을 치도록 허락하고 지도해주고 있어요. 지난 봄 새 학기에는, 얘가 오르간을 잘 치고 노래를 잘 하니까, 1-2학년 음악 시간을 맡기려 하였는데, 본인이 부끄럽다고 사양하는 바람에 성사가 안 되었습니다.”


“아, 그 정도입니까?”

“녜, 이찌가와 교장이 아주 총애하는 학생입니다. 직접 통화를 하시겠습니까?”

담임선생님이 그러며 전화기를 집으려 하자 지서장은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아, 됐습니다.”


그리고는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에이, 바보 같은 자식! 갈아 치워야겠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담임선생님이 놀라 묻자 지서장은 당황해하며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고는 맹꽁이를 향해 말하였습니다.

“야, 너 노래를 잘 부르는가본데 여기서 노래 한 곡 불러 보아라. 그럼 용서해 주지.”


“무슨 노래를 부를까요?”

맹꽁이는 웃으며 물었습니다.

“너 일본의 세계적인 명곡 「고오죠노 쓰끼」 (荒城の月)를 아니?”

“녜, 4절까지 다 외웁니다.”

“호! 그래? 그러나 시간이 없으니까 1절만 불러봐라.”

맹꽁이는 목소리를 가다듬었습니다.

1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荒城の月황성의 달


春高楼の 花の宴         새봄 높은 성루(城楼)의 꽃 잔치 자리,

めぐる盃 影さしで       기울이는 술잔에 그림자 뜨네.

千代の松影 わけいでし  천년의 솔 그늘을 헤쳐 누비던,

昔の光 今いずこ。       그 옛날의 영광은 어드메이뇨.


맹꽁이는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왜인 지서장과 다른 순사들은 손바닥이 찢어져라 하고 박수를 하였습니다.

“우와! 너 이담에 성악가로 나가면 크게 되겠다. 2절도 불러봐라.”


맹꽁이는 웃으며 2절을 불렀습니다.


秋 陣営の 霜の色          가을 진영의 서리 빛깔에

泣き行く雁の かず見せて  울며 가는 기러기 숫자 보이네

植うる劍に 照りそいし    꽂아놓은 장검에 비취던 그 달

昔の光 今いずこ。         그 옛날의 영광은 어드메이뇨


지서장은 맹꽁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또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바가야로! 멀쩡한 아이를 가지고 뭐이 어쩌고 어째?”

“녜? 누구 말씀입니까?”


담임선생님이 또 깜짝 놀라 묻자, 지서장은 당황하며 얼버무렸습니다.

“아, 아닙니다. 나 혼자 해본 소립니다.”

담임선생님의 손을 잡고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너 겁도 안 났니? 순사들 앞에서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다니….”


“죄 지은 게 없는데 왜 겁이 나요?”

그러자 담임선생님은 맹꽁이의 귀 가까이 입을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엔 「죄 없는 죄인」도 많단다. 아무튼 한 시름 놨다. 너 앞으론 조심하여라. 특히 집에 돌아가서도….”


그런데 얼마 후 지서장이 담임선생님하고 맹꽁이네 집을 찾아 와 무턱대고 예배당으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맹꽁이가 영문도 모르고 예배당으로 안내하자, 지서장은 찬송가 괘도 있는 데로 가서 괘도를 넘기며 물었습니다.


“이거 뭐 하는데 쓰는 거냐?”

“예, 주일학교 아이들이 찬송 부를 때 쓰는 괘도입니다.”

“누가 쓴 거냐?”

“제가 쓴 건데 왜 그러세요?”


“호! 붓글씨가 제법이구나. 한번 일본말로 번역해 읽어보아라.”

맹꽁이는 시키는 대로 일본말로 설명하였습니다. 지서장은 이것저것 마구 넘기면서 「ソロモン(솔로몬)」이라는 말은 안 나오느냐고 물었습니다. 맹꽁이는 진땀이 났습니다. 「솔로몬의 입은 옷도 이 꽃만 못하였네」란 가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맹꽁이가 진땀을 흘리며 통역을 하자, 담임 선생님이 나섰습니다.


“이건 어린이 찬송가입니다. 제가 정확하게 번역해볼게요.”

그리고 맹꽁이 대신 하나하나 넘기며 번역을 하였습니다. 지서장은 이상하게도 「솔로몬」이라는 말에 집착하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이라는 말을 왜 그렇게 열심히 찾으려고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일본 천황은 살아있는 신(現人神 ․ あらひとがみ)이라서 하나님보다도 높고, 일본의 개국여신(開國女神) 「천조대신」(天照大神 ․ あまてらすおおみかみ)이야말로 모든 신중의 최고의 신이라고 발악을 하며, 찬송가를 뜯어고치다 못해, 먹칠을 하던 그 시절 이야기입니다. 정보원의 아버지를 불러 엉터리 정보제공의 실책을 따지니까, 그 친일파가 「찬송가 괘도를 조사해 보라」 해서 「솔로몬의 영광」이니, 그와 비슷한 「대일본제국」의 국체(國體)를 손상시키는 말을 찾아내면 교회를 폐쇄하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1945년 8월 초, 용인 경찰서에서 장로로서 교회를 담임하신 아버지(吳連泳 장로)를 호출하였습니다. 30리가 넘는 용인 경찰서까지 가려면 새벽에 떠나야 합니다. 아버지는 떠나시기 전에 가정예배를 드리며 제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왜인들이 나를 부른 것은 「천황폐하가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하는 질문을 하려는 것인데, 나는 끝까지 내 신앙을 지킬 것이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린 네게 어머니와 동생을 맡길 수밖에 없구나. 하나님이 인도해주실 것이다.”


하얀 명주 중이적삼에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아버지가 떠나신 다음, 어머니와 나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밤이 이슥하여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입니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또 겁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신앙을 변절하시지 않았다면 돌아오실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어떻게 돌아오셨어요? 덴노헤이까가 높다고 하셨어요?”

“네 이놈! 애비의 신앙을 모독하는 것이냐?”

“무어라 대답하셨는데요?”

“일본 천황은 물론 일본의 신이라는 천조대신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오셨어요?”

“그게 나도 이상하단다.”

한밤중, 조용히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가보니 아버지를 존경하는 일본인 형사가 쫓기듯이 빨려 들어왔습니다.


“아니 자네가 웬 일인가, 이 밤중에….”

“쉿! 언성을 낮추십시오. 남이 들으면 우리는 몰살당합니다.”

안방으로 들어가 앉자 형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장로님, 거기가 어떤 자리인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왜 다시 잡아 오라 하던가? 내 감세. 그러잖아도 이상하다 했었는데….”

“그게 아닙니다. 오늘 게가 통역을 거꾸로 했거든요.”


형사는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완전히 배교자로 만들었구먼. 썩 나가게. 꼴도 보기 싫으니.”

“장로님,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일본은 곧 패망합니다. 그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십시오. 저는 이제 갑니다. 하늘나라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박태준과 「양양 범버꿍」


박태준(朴泰俊, 1900~1986) 박사는 박순조 장로와 오환이 권사의 3남 1녀 중 2남으로, 1900년 11월 22일 대구 남선동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자라나, 미션스쿨인 계성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졸업 후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음악을 전공하고,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미풍(微風) ․ 님과 함께 ․ 동무생각 ․ 순례자 등을 작곡하였다. 같은 해에 계성중학교로 옮겨 1931년까지 재직했는데, 이때는 오빠생각 ․ 오뚜기 ․ 하얀 밤 ․ 고추 먹고 맴맴 등 동요를 작곡했다.


1932년 본격적인 교회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서 터스컬럼대학 ․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6년 귀국해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있었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쇄되자 교수직을 그만두고, 1941년 고향에 내려가 계성중학교에 부임했다.


8․15 해방을 맞이하여 한국 오라토리오 합창단을 창단하고 교회음악 활동을 하였다. 1948년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과를 창설하고 초대학장을 맡았으며, 1952년 미국 우스터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4~66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지내다가 정년퇴임하여 1973년까지 명예교수로 강의를 계속했다. 서울시문화훈장 ․ 문화훈장 대통령장 ․ 예술원상 ․ 국민훈장 무궁화상을 받았고,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그 밖의 작품으로 「물새 발자욱」 등이 있고 동요작품으로는 「햇볕은 쨍쨍」․ 「새나라의 어린이」 등이 있다. 그가 낸 첫 동요곡으로는 1920년에 작곡한 「기러기」가 유명하다.


♬․기러기

윤복진 요 ․ 박태준 곡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길을 잃은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로

엄마엄마 찾으며 흘러갑니다


오동잎이 우수수 지는 달밤에

아들 찾는 기러기 울고 갑니다

엄마엄마 울고간 잠든 하늘로

기럭기럭 부르며 찾아갑니다


집 떠난 엄마 찾아 울며 가는 아기와, 그 아기를 찾아 울며 따라가는 아빠…. 이것은 당시의 슬픈 사회상을 말해준다. 왜인의 수탈로 조상 때부터 전해온 전답을 다 빼앗기고 북쪽 만주 땅 북간도를 향해 떠난 수도 없는 난민의 아픔을 박태준은 우리 5음계로 슬프디 슬프게 작곡하였던 것이다.


그의 작곡집은 1929년《중중 때때중》․《양양 범버꿍》 등이 있다. 「양양 범버꿍」이란 노래는 내가 고향 아리실교회 주일학교에서 가르쳐주었는데 가장 인기 있는 노래였다. 그 가사를 보자. 한 편의 동화다. 지금도 가사를 다 외우고 있다.


양양 범버꿍


(6/8 박자, 보통으로)

마을가는 엄마가 집 잘 보라고

가마솥에 밀과 콩 달달 볶아서

오빠 한줌 나 한줌 나눠준 것을

한데 한데 먹자고 살살 달래지


(4/4박자, 빠르게)

양양 범버꿍 양양 범버꿍

너는너는 범버꿍 나는나는 양양

얼렁뚱땅 울 오빠 꿀~꿀 꿀돼지


이 노래를 오빠 편, 동생 편 남녀 두 편으로 갈라서 「양양」 ↔ 「범버꿍」 하고 메기고 받으며 노래할 때, 아이들의 즐거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박태준은 찬양곡과 찬송가는 물론 어린이 찬송도 많이 작곡하였으며 평생 남대문교회 찬양대 지휘를 했다.


♬․《강신명 동요99곡집》


강신명(姜信明, 1909~1985) 목사는 경북 영주 출신이다. 그가 동요곡집을 내었다면 놀라는 이가 많을 것이나 사실이다. 숭실전문학교 영문과 3학년 재학 중이던 1932년에 그는《강신명 동요99곡집》을 내었다. 그는 평양에서 교회 어린이 찬양대를 지휘하면서 4살 손아래인 김동진(金東振, 1913~ )과 함께 동요 연구에 몰두하였다. 화성학은 당시 숭실전문학교 음악교수인 말스베리(Dwight R. Malsbary, 1899-1977)에게 배웠다.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 중이던 1936년, 동요에 대한 애착을 못 버리고《아동가요곡선 300곡집》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강 목사님의 약력을 동아백과사전에서 인용한다.


ㅡ 목사․교육자. 경북 영주(栄州) 출생. 1934년 숭실전문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한 뒤 38년 평양신학을 졸업, 목사 안수를 받고, 49년 서울 중구 저동에 있는 영락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53년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을 수료하고, 55-79년 새문안교회 목사로 있었다. 그 사이 미국 스털링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고(1964), 연세대학 재단이사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삼애학원(三愛学院)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81~85년 숭전대학 재단이사장․총장직에 있으면서 한국기독교선교단체협의회 회장, 세계선교사 훈련원장 등을 역임하여 한국기독교의 원로로서 종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저서에 설교집《영혼의 닻》, 동요 작곡집《새서방 새색시》,《아동가요곡 300곡집》 등이 있다.


♬․이일래의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경남마산 출신인 이일래(李一來, 1903~1973)는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의 동갑내기 당질(堂姪)이다. 연희전문에서 수학을 전공한 그는 엉뚱하게도(?) 1938년 고향 마산에서《朝鮮童謠作曲集》을 출판했다. 여기에는 21편의 동요가 실려 있는데, 3장에 실려 있는 「산토끼」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 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노래다. 


그의 불후의 명작 어린이 찬송인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가 21장에, 구약 시편 첫 말씀 그대로 1절만 실려 있다. 작사자는 「PSALM 23」. 그런데 시중의 많은 책에는 석 아무개 작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어린이 찬송가, 1953》때 추가한 2-3절 때문이다. 이일래가 작사한 2-3절 가사는 한국찬송가위원회 편집, 대한기독교서회 발행《어린이 찬송가, 1979》179장부터 실려 오고 있다. 


또 하나의 그의 명작이 있다. 해방 전부터 입으로만 전해오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작곡자 미상의 노래가 있었다. 1973년 나는 이 노래를 채보(採譜)하여《찬송가(어린이용)》54장에 실었는데, 이일래 선생이 필자에게 전화를 하여 당신의 작곡이라 확인해주심으로써 다음 판부터는 이일래 작곡으로 표기하여 출판되고 있다.

각주 1

일본에 <창가>가 처음 탄생한 건 명치유신 때 미국의 음악가를 모셔다가 서양음악을 가르친 것이 그 시초다. 일본이 초청해 온 음악가는 "미국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숭앙받는 로웰 메이슨의 아들 루터 메이슨이다. 그는 일본에 와서 찬송가를 가르치면서 음악을 가르쳤다. 어느정도 배운 일본 놈들은 그가 안식년으로 돌아가자 비자를 안 내 주어 다시는 일본 땅을 못 ..

  1. 일본에 <창가>가 처음 탄생한 건 명치유신 때 미국의 음악가를 모셔다가 서양음악을 가르친 것이 그 시초다. 일본이 초청해 온 음악가는 "미국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숭앙받는 로웰 메이슨의 아들 루터 메이슨이다. 그는 일본에 와서 찬송가를 가르치면서 음악을 가르쳤다. 어느정도 배운 일본 놈들은 그가 안식년으로 돌아가자 비자를 안 내 주어 다시는 일본 땅을 못 밟게 하고 그에게서 배운 찬송가 곡조에 지네들이 가사를 붙여서 <창가>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래서 옛날 창가등은 거의가 찬송가 곡조로 되어 있어서 이를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창가 곡조를 찬송가에서 갖다 부른다고 망언을 하는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