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대륙 백제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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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실

2018. 1. 29.

 

 

 

대륙 백제는 말한다

-임승국 교수의 역사입문 이야기

 

 

재야사학자 임승국(林承國)씨가 지난 28일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4세. 고인은 고려대 영문학과 출신으로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내다 백제사를 고리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나서 이른바 ‘강단사학계’와는 다른 길을 걸은 대표적인 ‘재야사학자’다. 고 안호상 박사, 박시인 전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설립, 기존 교과서가 단군 존재를 부정하고 한사군을 한반도에 설정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국회청원활동도 벌였다….

 

 

이승국 교수의 회고담

 

― 제가 경희대 영문학 교수시절 때 우연히 지나(支那)〈25사〉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25사〉가운데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다음으로 여섯번째 책이 〈송서〉(宋書)입니다.

 

 

하루는 윤영춘 박사댁에 놀러갔다가 그 분이 갖고 있는 장서 중에서 우연히 이 〈송서〉를 끄집어냈습니다. 윤 박사가 이걸 보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제가 펼친 곳이 〈송서〉 97권 '백제의 전' 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기록을 무심코 쭉 읽어 내려갔지요.

 

 

지나(支那)에서 태어나 중학교 4학년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으니 한문 실력은 그런대로 있어서 쭉 읽어보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송서〉에 기록되어있는 백제는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는 의례히 백제를 생각할 때면 연상되는 것이 의자왕이고,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 삼천 궁녀와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다이빙 앤드 풍덩 등입니다.

그런데 〈송서〉 97권을 보니까 아예 백제의 위치부터가 달랐습니다. 반도가 아니었습니다. 현 수도인 북경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산동반도를 지나 양자강 남북의 평야지대를 포함한 지나 동해안 일대를 백제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록을 보고서 그 때 하고 있던 영문학이라는 낡아빠진 학문을 집어 치우고 스승도 안내자도 없이 한국 상고사라는 난장판 학문에 뛰어 들었습니다. 만 5년 동안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직장도 없이 도서관에 파묻혀서 사서삼경과 <25史>와 씨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6년 만에 다행히 명지대학으로부터 다시 교수발령을 받은 후에, 영문학 교수가 아닌 한국고대사를 강의하는 사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학문의 안내자가 바로 ‘백제사’였으니, 오늘 강의하는 것도 백제사의 이해라고 하면 비로소 말문이 열립니다.

 

 

 

〈송서〉97권 백제전의 머리 부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려는 대략 요동에 있었으며, 백제는 대략 요서에 있었고,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불렀다. 요서는 북경을 포함한 하북·하남·산서 등을 포괄한다.

 

산서성의 옛이름이 晉이다.

 

 

 

〈송서〉에만 이런 기록이 있고 다른 기록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닙니다.〈25사〉중〈송서〉 다음이 양서(梁書)인데, 양서 54권 백제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양서 다음은 남제서(南濟書)입니다.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제(濟)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남제서에도 백제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더 엄청납니다. 당시의 백제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이었습니다. 동성왕의 무덤이 산동반도에 있다고〈25사〉에 기록되어있고요, 동성왕은 산동반도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직접 도읍하면서 대륙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군사·외교정책은 가까이에 있는 위나라와는 전쟁으로 상대하고, 양자강 남쪽의 남제와는 우호관계를 맺는 등의 정책을 폈습니다.

 

 

 

동성왕은 남제의 소도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실로 엄청납니다. 아마 간덩이가 작은 사람은 이 글만 보아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요서나 진평이라고 했던 백제의 세력이 놀랍게도 남쪽으로 확장되어 북위의 군대와 싸워 이겼고, 또 한 때는 양자강 남쪽까지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일곱 구역으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을 각각 파견하여 통치하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총독 일곱 명을 두고 지나 동해안을 깡그리 지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지나인들은 다 없애 버렸습니다. 남제서 백제전의 머리 부분을 다 뜯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으로 오는 〈25사〉 중 남제서를 보면, 백제전의 앞부분이 뜯겨나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글씨가 없는 공백이 하얗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게 '똥되는 놈'(지나인)의 심보입니다. 오죽하면 똥되는 놈이라고 하겠습니까? 백제전이라는 제목은 있는데 그 다음이 빈칸이란 말이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강시단야(降屍丹野: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인데, 똥되는 놈을 시체로 만든 자는 백제 군대이겠죠. 그리고 그 빈칸은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지나 본토에는 오리지널 〈25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대만에는 물론이고요. 지나 본토와 대만에 가공하지 아니한 원본 〈25사〉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흔하지 않지만. 지나(支那) 가는 사람들은 오리지널 〈25사〉를 구해서 남제서 백제전을 펼쳤을 때, 공백이 아니라 글씨가 꽉 차 있다고 한다면 무조건 갖고 와야 합니다. 요즘 지나에 많이 갔다왔다 하는 모양인데 다 소용없어요. 강아지 눈에 보이는 건 누런 똥 밖에 없습니다. 근래 지나갔다 온 사람들의 눈에는 누런 황금덩어리만 보일 뿐입니다.

 

 

 

백제가 이렇다는 것은 감히 생각을 못합니다. 그저 '낙화암 풍덩' 만을 연상할 뿐입니다. 지나지도에 있어 동해안 지역은 사실상 지나 땅의 전체나 다름없습니다. 깊은 오지에는 사람들이 살지를 못합니다. 지나사람들이 집결되어있고 지나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 지나 동해안 지역입니다.

 

 

 

모택동도 여기에 사는 지나인구의 수를 “십억에서 이억을 뺀 수억”이라고 했습니다. 전체 10억 중에서 8억의 인구가 이곳에 몰려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지역을 몽땅 백제가 지배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얼마 전에 KBS에서 사학 관계서류를 모아서 연변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몇 천권을 보낸 모양입니다. 연변대학 총장이 그걸 받아서 읽어 보니까 식민사관이 그대로 남아있길래, 예를 들어 김철준씨가 쓴 문화사관이나 이기백씨가 쓴 한국사의 무엇 등등이었는데, 무슨 이런 책을 보냈느냐 하면서 모조리 폐기처분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만큼 대한민국 망신시킨 적이 어디 있습니까?

 

 

 

해방 이후 식민사학시대

 

 

해방 이후 40-50년 동안 우리는 식민사학을 복창 복습했다는 것을 여기서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대방(帶方)이라고 하면 보통 황해도 사리원 일대로 알고들 있습니다.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쓴 김성호씨는 나름대로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 글을 썩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잘못한 것은 사리원이 대방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일본사람들이 한 얘기를 그대로 고스란히 믿고 베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백제시건국어대방고지(百濟始建國於帶方古地)'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백제가 처음 나라를 세운 땅이 대방이라는 뜻인데, 대방이 황해도 사리원이니까 사리원에서 백제가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흠이 있다고 해도 공격할만한 흠은 아니지만, 백제사 출발점은 대륙인데,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학계에서는 미추골(彌鄒忽)을 미추홀이라고 합니다. 홀(忽)자를 역사에서는 골이라고 읽습니다. 밤골이다 무슨 골이다 할 때처럼, 고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성호씨는 이 미추골을 인천이 아니라 아산면 인주면이라고 했습니다. 미추골이 인천이라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거기에서 더 내려가 아산면 인주면이라고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번역한 책 '한단고기'에도 미추골이 나오는데, 그 곳의 위치는 바로 하북성입니다. 하북성에 있는 미추골에서 비류수가 흐릅니다. 비류백제라고 할 때의 비류수가 바로 거기서 흐릅니다.

 

 

 

유신정권 때 행정소송을 내다

 

 

우리 사학계는 정말 답답합니다. 오죽 답답하면 제가 유신정권 때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벌였겠습니까? 국사를 바로 잡으라고 행정소송을 냈을 때, 원고는 명지대 교수 임승국이 되고 피고는 박정희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학계에서는 저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송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요? 결과는 '피고 패소, 원고 승소' 이렇게 났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 때 판결장을 들고 문교부장관을 찾아가 집행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피고가 억울하다고 대법원에 항고를 했습니다. 문교부에서는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집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판결 날짜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꼭 일주일 남겨두고 박대통령이 피살당해 버렸습니다. 조금 뒤 대법원에서, 그 재판은 피고의 유고로 인하여 무기한 연기한다는 통지가 왔습니다. 그 때의 무기연기가 지금까지도 무기연기 중입니다.

 

 

 

대법원장이 몇 번이나 바뀌고 정권이 몇 번 바뀌었는데도 지금까지 무기연기라니, 이거 법이론상 맞지 않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이번 국정감사 시, 모 국회의원에게 그것을 좀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그 국회의원이 하는 얘기인 즉, 그 재판은 판결하지 않은 채 폐기처분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폐기하려면 원고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하기야 뭐 5공화국시절이니까 법이 없었죠. 저는 억울한 나머지 국회에 청원서를 냈습니다. 그래서 청원서에 입각한 공청회가 열렸지요. 앞서 강연한 박시인 박사, 안호상 박사와 함께 셋이서 공청회에 나가 열변을 토했습니다.

 

 

 

박시인 박사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투쟁형이 못되어 제가 대표격으로 싸웠습니다. 제안설명을 하면서 "낙랑현도진번임둔의 증거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문교부 장관이 하는 말이, 자기는 역사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국무위원이 반드시 역사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 갔습니다. 그 다음 앉은 사람이 차관인데,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은 사학은 고사하고 인문사회과학계통이 아닌 자연과학계통을 공부한 사람이라 내가 차관에게 질문하면, 그 사람은 속으로 '저 양반이 나 망신줄려고 국회에 불러온 것 아니냐'할 것 같아서 그냥 뛰어 넘었습니다.

 

 

 

다음은 국사편찬위원장이 나왔습니다. 3년동안 행정소송을 할 때 대통령 대리인으로 피고석에 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도 장관과 똑같은 답변을 하길래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이라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 무책임한 발언을 하니 너무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 때 방청석에 있던 국회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국사편찬위원장 임명권자인 문교부장관은 사임하라고 외쳤습니다. 목표는 국사개정인데 인사문제로 번지니 다시 한 번 더 국사개정의 방향에서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 뒤, 장차관과 국사편찬위원장도 한사군 문제를 공부안했다고 발뺌하니 앞서 얘기한 대로 쭉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이리 해서 국사개정을 하기로 결정하고 공청회는 끝났습니다[끝].

 

 

 

 

일제의 만행과 친일사학계

아래 글은 다른 이가 쓴 글입니다.

 

 

일제시대의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 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아야 하며, 민족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잃지 않아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한 순간의 쉼도 없이 지금도 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한 부분을 채워 가고 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흘러간 것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우리의 현재를 존재하게 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느끼며 접하는 모든 것에 투영되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바로 민족의 역사에는 민족의 번영과 영광, 시련과 애환이 깃들여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역사 정신을 간직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민족의 장래와 존망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그것은 민족의 주체성, 즉 민족의 자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대주의와 외래사상은 일 만년 역사 속에 찬연했던 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왜곡하면서 그 모습을 달리하며 오늘에까지 이르러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 또한 이 땅을 강제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가 이 민족을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왜곡, 날조한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청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서구의 퇴폐적 물질문명과 외래 사상의 폐해는 민족 역사와 정신의 뿌리까지 흔들어 놓았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과 민족 역사의 왜곡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시책

 

 

 

①먼저 조선사람들의 자신의 일·역사ㆍ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②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무위 · 무능 · 악행을 들추어내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④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들을 경시하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⑤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⑥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을【절반의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건인 것이다.'

일제는 위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악랄한 정책을 이행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전통 문화와 역사의 말살을 꼽을 수 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민속(民俗) 조사를 실시하고 우리의 민속 신앙들을 미신(迷信)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동제(洞祭)를 중점적으로 탄압했는데 무라야마 지존(村山智順)의 연구에 의하면 동제는 일본의 신도(神道)와 공통성을 지니며, 여러 가지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현실적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민중 심성을 개발하는 가장 으뜸가는 향토 오락이며, 성씨별 분열을 막고 이를 통합하는 기능을 지니고, 마을 사람들의 심신을 정화시켜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들은 일제의 반(半)일본화 작업에 있어 방해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다각적인 탄압을 진행하였다. 경찰국에서는 중추원 시정 연구회의 연구를 자문 받아 무녀 취체 법규를 제정하고 무당들을 경신 단체에 가입시키는 한편, 강력한 취체 행정으로 이를 금압하고, 학무국에서는 신사(神社)·신도(神道) 정책을 펴 나가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했으며, 사회과에서는 우리의 민속 신앙을 미신(迷信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함)으로 간주하는 사회 교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날조편찬

 

 

일제의 사서(史書) 20 여만 권 소각과 더불어 시작된 조선사의 편찬은 당시의 조선인들로 하여금 소위 '공명·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혀 조선인에 대한 일본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루어졌다.

 

 

즉 '공명·정확한 사서의 편찬을 위해 사료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감행하였는데 1차로 1910년 11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37년까지 이루어 졌고 압수 대상 서적은 단군 관계 조선 고사서, 조선 지리, 애국 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열전류, 각 가정의 족보 특히 가야와 관계가 깊은 김해김씨, 김해허씨 족보 및 미국의 독립사까지 강제로 뺏어갔다. 조선 세종 때부터 단군관계 사서를 수집하여 장서각 및 규장각에 보관하였는데 이들 사서중 단군 관계 고사서를 다 일본으로 가져가버렸다.

 

 

 

조선사 편찬시 상당수의 조선인이 참가하였는데 여기에는 이병도 · 신석호 · 최남선 · 권중현 · 박용구 · 이완용 · 박영효 등이 있다. 다음에 다시 서술하겠으나 우리는 이병도 씨가 이 작업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조선사의 성격과 구성 내용 등을 살펴보자.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하는 데는 3대 요건이 필요하다.

 

 

 

그 첫째가 상고사와 국조(國祖)의 부정이고 둘째가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만 압축해 버리는 것 마지막 셋째가 한국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 적이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펴낸 이른바〈조선사〉는 위의 요건을 충실히 따랐다. 또 단군조선의 말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던 당시 일본의 가장 악질적인 어용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 같은 자를 중추인물로 세움으로써 그 의도가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시대 구분에서도 위와 같은 의도가 엿보이는데 1916년 1월의 회의 때 결의한 상고 삼한. 삼국. 통일신라 등이 1923년 1월 8일 제 1차 위원회 회의에서 삼국 이전. 삼국 시대. 신라 시대로, 1925년 10월 8일 제 1회 위원회 때는 신라 통일 이전. 신라 통일 시대로 압축되었다. 내용에 있어서 위와 같은 의도는 확연히 드러난다. 몇 가지 살펴보면 조선의 반도적 지리 요건으로 인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반도 북부-지나의 중국의 식민지, 반도 남부는 임나 일본부) 조선 역사는 위만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조선인은 자립, 자치 능력이 없다 (당쟁·반란의 의미 확대) 조선의 조정은 동학란 때문에 청나라를 불러 들여왔으나 일본이 처음 무찌르자 합방해 주기를 원하므로 합병하여 조선인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잘 살게 되었다라는 등이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사학계

 

 

위와 같이 일본의 의도가 너무도 뻔한 조선사의 편찬은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광복 후 출판된 권위 있는 역사 사전마저 '〈조선사〉가 비록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유화정책으로 된 것이기는 하나 색인이 없는 사료의 이용을 위해서는 많은 편리를 준다' 고 망발을 늘어놓고 있고 당시 조선사 편찬에 참가한 이병도 (어용 사학자 이마니시 류의 제자) 는 해방 후 사학계의 거두로 우뚝 서게 되어 수많은 제자 양성과 더불어 식민 사학의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완용의 손자(이장무)가 서울대 총장을 지냈고, 그의 동생(이건무)는 문화재청장를 지냈으며, 이완용의 손자인 이윤형은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재산 반환소송을 하여 승소한바 있다.

 

 

 

현 사학계의 주도권을 쥔 자들은 모두 식민사학 1세대인 이병도 씨의 제자들로서 (물론 고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신석호씨도 있지만 일찍 타계하였음) 제 2세대라고 꼽으면 서울대학교파로 고병익·천관우·이기백 (한림대 한국사 교수), 차하순·한우근·김철준· 원용씨 등이 있고 비서울대파로 김정배·유원동·변태섭씨 등이 있다.

제3세대로는 혜성같이 나타나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동국대학교 교수 이기동씨가 있다. 우선 이들이 저서나 강연회 등에서 한 발언들을 보면 민족사학에 조금이라도 눈이 뜬 사람이라면 분노가 먼저 치솟아 오를 것이다.

 

 

 

1976년 발표한 〈한국고대사 연구〉라는 책에서 만리장성이 우리나라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는 몇 해 전 타계하였는데(되놈들의 동북공정보다 한 수 더 뜬 매국노다) 죽기 전 친구 최태영의 설득으로 “단군은 신화가 아닌 우리 국조(國祖)·하는 참회의 글을 남겼는데, 그의 도당들은 죽기 전 망령이 나서 사리를 판단 못하고 쓴 글”이라고 폄하한다.

 

 

 

다음으로 유명한 자는 이기백 교수가 있다. 이기백 교수는 한국사 신론 서문을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 끝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 라고 시작하면서 그의 학문적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것은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 끌어다 서술한 〈한국사 신론〉 같은 이 자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인에게까지 한국사를 그릇 인식하게끔 만들고 있다. (필자 미상)

 

 

 

역사를 바로 세우자

 

 

썩어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것 중 최고를 꼽는다면 식민사관에 찌든 사학계의 원로대신들이 아닐까? 한국의 사학계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지 경향신문 `99년 2월 4일자 - 14면을 요약한다.

 

 

 

영어권 국가의 첫 일본미술사 박사이자 16권의 관련저술로 일본문화훈장을 받은 존 코벨(1910~96)여사의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일본문화의 뿌리는 한국이라는 것과 한국의 일부 고고· 미술사학계가 부패된 시신처럼 썩은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 일의 유물에 담긴 미적 성취와 연대기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한· 일문화의 영향관계를 증명한다. 역사책은 때때로 왜곡· 조작되지만 예술사는 인간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지녔는지를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야토기는 보잘것없는 일본 하지끼(土師器)토기를 밀어내고 그곳 궁중토기로 쓰였다.

 

 

 

가야 기마족이 369년 배를 타고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알리는 유물이 널려있는 것이다. 또 70년대에 발굴된 나라(奈良) 다카마쓰 고분(高松塚)은 8세기에 사망한 일본 제42대 문무(文武)왕의 비빈 또는 후궁의 묘이지만 현무· 청룡· 백호가 그려진 「100% 고구려식무덤」이다. 8세기 일본은 한국 세력을 흡수하고 당나라 영향권에 있었다』라고 주장한 일본의 견해를 뒤집은 셈이다.

 

 

 

시베리아 무속(巫俗)도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서 신도(神道)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고구려·신라 고분벽화에 나오는 신성한 백마 숭배사상이 대표적 사례다. 1945년 8월15일 일왕은 자신이 타고 다니던 백마를 맥아더에게 넘기는 것으로 항복을 표현했다. 저자는 그러나 한국 (식민주의)학자들이 스승(이마니시 류)의 이론을 뒤집는 유물이 나오면 발표를 하지 않거나 재매장시키는 경우가 있다고 비판한다.

 

 

 

78 ~ 86년 한국에 머물며 한국미술사를 연구한 그는 『경북대박물관에 소장된 한 미공개 금관은 가야가 신라보다 앞선 문화를 지닌 사실을 나타낸 유물』이라면서 『신라가 모든 면에서 가야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는 원로(元老)가 죽거나 은퇴해야 사실이 밝혀지리라』고 극언했다. 또 호암미술관 소장 가야금관(국보 제138호)은 방사성 탄소나 열형광에 의한 과학적 연대측정의 절차 없이 3 ~ 6세기 유물이라는 「안전한 꼬리표」를 단 채 전시된다. 가야금관이 신라금관보다 시대적으로 앞서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일부러 신라보다 뒤늦도록 연대매김을 한다는 설명이다. 역사는 진실을 전해서 후세에 교훈을 주어야 한다. [史5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자신들이 이뤄놓은 업적이 거짓으로 포장되었을지라도 그것을 비호하고 진실을 호도한다면 후손들에게 자신이 평가 받을 미래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독재자나 폭군과 다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수가 옳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진실은 아닌 것이다. 불행하게 현재의 역사는 강단사학자들에 의한 독단적이고 철의 장벽보다 더 두터운 폐쇄 성속에서 썩어가는 시체이다. 아래 글은 필자의 글이다.

 

 

 

이조(李朝), 사색당파(四色黨派), 민비(閔妃), 엽전(葉錢)

 

위 언어들은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략, 감점하고 조선 왕조를 이가(李哥)네 조선으로 격하시키고, 500년 동안 당쟁만 일삼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미개민족이라고 선전하기 위해 만든 소위 황국사관(皇國史觀)의 대표적인 표현 언어다.

 

 

 

그들은 야꾸자를 시켜 우리 국모(國母) 명성황후를 죽이고 그를 「민비(閔妃)」라 격하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고종황제까지 독살했다. 그리고 한국인을 ‘후데이센징’이니 「엽전」이라고 경멸했다.

 

 

그런데 오늘의 나라꼴을 보면서 어느 유명인사 개탄하기를

“이조 500년 동안 사색당파로 갈라져 싸움질만 하던 엽전들, 이제라구 별 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당쟁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왜놈들이 조선 왕조 실록에서 「당쟁사」만을 골라 역사책에 수록하여 열심히 가르쳤고, 애국지사(愛國志士)의 자제들은 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했는데, 친일파의 자식들은 일본 유학을 하고 총독부(總督府) 고관이 되고, 대학 교수가 되어 일본이 만든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지금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요즘에는 역사학자들 중에서 민족사관(民族史觀) 바로 세우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악랄하게도,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웠는가를 증명하는 증거가 서울 도처에 있다.

 

 

 

몇 해 해 철거된 총독부 건물은 일본 국회 의사당과 같은 모양이고, 날 일자(日) 모양이고, 시청 건물은 일본 동경(東京) 도청(都廳) 건물 모양인데 근본본(本)자 모양이다. 북악산의 모양이 큰대(大)자 형상이니,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大日本」 이란 글씨가 서울에 박혀 있는 것이다. 옛 서울대 문리대 건물은 동경대 건물과 같이 지었고, 문도 붉은 색 문 「아까몽」 (あかもん、赤門) 이었다. 서울 역 건물은 동경역 건물 같고, 한국은행 건물은, 일본은행 건물과 같다. 왜 이렇게 돈을 들여 같은 건물을 만든 것일까. 일본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이루어 중국까지 점령하면, 대일본 제국의 수도를 서울로 옮기고, 자기네가 지진이 없는 우리 땅에 와서 살고, 우리는 일본 섬나라로 이민시키려는 장기 계획이었던 것이다.

 

 

 

왜인들에게 잠언 16장 1절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 “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결정은 야훼께서 하신다.”

 

 

그런데도 아직도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용어를 멋도 모르고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하루 빨리 주체성을 회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