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중국을 세운 한국인과 삼태극 사상 동북공정과 문화적 대응

댓글 0

고대사 연구

2018. 8. 6.

중국을 세운 한국인과 삼태극 사상

동북공정과 문화적 대응



http://cafe.daum.net/chunbusamtaeguk/dXHZ/6

 

 

 

중국의 산동성 문상현 남왕진(山東省 汶上縣 南旺鎭)에는 배달(倍達 ) 환국 환웅시대의 제14대 천왕이었던 치우(蚩尤) 천왕의 묘가 있다.

 

이곳에서는 2001년 5월에 수리공사(水利工事)를 진행하던 도중에 석회암으로 된 

길이 2.38m, 넓이 0.83m, 두께 0.31m의 '치우총(蚩尤塚)' 비석이 발견되었다.

 


 

치우천왕은 BC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치우천왕은 황하의 이북 땅에 할거하면서 안으로는 용맹스러운 병사를 양성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주시하다가 병사를 일으켜 출정을 하였는데,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 1년 만에 아홉 제후의 땅을 점경하는 등 거의 파죽지세의 세력으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 때 동이족(東夷族)의 제후국 소전(少典)의 아들로 태어난 헌원(軒轅)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임금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화산(華山)족과 화하(華夏)족을 선동하여 연합군을 형성한 후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치우천왕에게 대적하여 싸움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탁록(涿鹿)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겨우 목숨만을 건지게 달아나게 되었다고 1675년(숙종 2년)에 북애(北崖) 선생이 당시까지 전해내려오던 40여권의 사서를 참고하여 저술한 규원사화(揆園史話)의 태시기(太始紀)에 기록되어 있다.

 

 

 

 

헌원(軒轅)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수구(壽丘)에서 태어나 희수(姬水)에서 자랐으며, 헌원(軒轅)이라는 언덕에 살아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헌원은 치우천왕에게 패퇴하여 서쪽의 중토로 물러나 배달국의 치우천왕의 군대가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것을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제작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국가의 형태를 갖추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동쪽에서는 치우천왕의 배달국이 서쪽의 중원에서는 헌원이 신흥 국가세력이 대립하는 형국이 되게 되었다. 말하자면 동이인과 동이인이 대립하는 형세가 된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상대를 완전하게 제압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자, 전선이 고착화 되고 계속되는 분란으로 국력이 낭비되자, 치우천왕은 헌원을 회유하여 황제(黃帝)의 벼슬을 주어 화하족(華夏族)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당시 배달국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백제(白帝), 흑제(黑帝), 청제(靑帝), 현제(玄帝), 황제(黃帝) 등의 5제(五帝, 칸)라는 분권적인 통치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황제가 가장 수석 제후(諸侯)에 해당하는 벼슬이었다. 황제(黃帝)라는 이름은 항상 누런 흙탕물이 흐르는 황하(黃河)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라는 뜻도 있다. 배달국의 치우천왕으로부터 황제(黃帝)의 벼슬을 받은 헌원이 바로 중국의 시조가 된다. 그야말로, 우리 한국인의 선조인 동이족이 중국을 건국한 시조가 된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이 시조로 생각하고 있는 헌원은 실질적인 독립국가를 세웠다기보다는 배달국의 수석 제후국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배달국의 뒤를 이어 BC2333년에 개국한 고조선보다 130여년이 늦은 BC2205년에 하(夏) 국이 실질적인 독립국가로서 중국에서 최초로 개국되었으며, BC1122년에는 하(夏)의 뒤를 이어 주(周)가 개국되었으며, 이후 BC770년부터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그렇게 하여 BC249년에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개국하여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혼란이 지속되게 된다.

 

 

이처럼 초기에 중국의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넓은 지역을 동이인(東夷人)이 통치하다보니 알게 모르게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초기 중국의 사상에 천지인을 기반으로 하는 삼태극(三太極) 사상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증적은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 요녕대교수였던 우실하 교수가 이러한 증적을 세심하게 찾아 낸 인물 중의 한 사람인데, 그가 중국의 여러 역사적 문헌에서 동이인의 중심 사상인 삼태극(三太極) 문양을 발견한 증적을 제시한 것을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그림1) 상대 청동기에 보이는 삼태극

 

*자료: 謝海元⋅顧望, 1996: 619(1), 621(2).

 

 

 

(그림2) 동주東周 시대 비봉문飛鳳紋에 보이는 삼태극

 

*자료: 謝崇安, 1997: 책머리 도판.

 

 

 

 

(그림3) 주대周代 창인 과戈에 보이는 삼태극과 상세도

 

*자료:『金石索』, 上卷, 195.

 

 

 

 

 

 

 

(그림4) 주대周代 초楚나라의 생笙에 보이는 삼태극 변형문.

 

*자료: 三浦康平, 1999: 82.

 

 

 

 

 

 

 

(그림5) 춘추시대 큰 종인 박鎛에 보이는 삼태극

 

*자료: 謝海元⋅顧望, 1999: 620.

 

 

 

 

 

 

 

(그림6) 춘추시대 종(鐘)에 보이는 삼태극

 

* 자료: 謝海元⋅顧望, 1999: 108(1). 612(2).

 

 

 

 

 

 

 

(그림7) 전국시대 증후을묘의 종鐘에 보이는 삼태극

 

*자료:『曾侯乙墓文物藝術』, 1996: 24 도판 37

 

 

 

 

이러한 기조는 당(唐)나라 시대에까지 지속된다. 후한시대의 반고가 『한서(漢書)』를 처음 지은 이후 당나라 시대에 비서소감(秘書少監)이라는 관직에 있던 안사고가 한서를 새로 주석을 달아서 자신의 의견과 다른 내용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주석을 달아 개편하였는데, 한서(漢書)』 「율력(律曆志)지」의 본문에 삼국시대의 위나라의 학자였던 맹강(孟康)이 '태극원기 함삼위일(太極元氣 含三爲一: 태극의 원기는 셋을 함유하고 있으면서 하나가 된다)'라고 인용하여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을 비판하지 않은 것을 보면 당나라 때까지는 삼태극 사상이 중국에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 없다.

 

 

그러다가 송(宋)나라 시대에 성리학(性理學)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음양론에 오행론을 결합한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이 주자(朱子)에 의해 채택되면서 천지인 3제를 기반으로 하는 삼태극 사상은 음과 양의 2분법의 논리로 전개되면서 중국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처럼 중국은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고려를 거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사대주의가 만연하게 되어 음양을 기반으로 하는 유학(儒學)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중국의 음양오행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천지인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 민족의 뛰어난 고유사상인 삼태극 사상은 점차 빛을 잃어가게 된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의 뒤를 이은 대한민국의 태극기 조차 음양오행설을 기반으로 하는 국기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니, 중국 사상의 폐해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삼태극은 죽지 않았다. 천지인, 인내천을 기반으로 하는 삼태극 사상은 서민 대중 들 속에서 부채, 북, 노리개를 비롯한 가장 대중적인 소재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면서 우리 민족의 얼을 지켜준 것이다.

 

 

이제 우리 민족도 세계속에 웅비할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음양오행설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상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중국을 건설하고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인 들의 사상을 지배했던 천지인을 기반으로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삼태극 사상을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