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용인의 대표적 명문 해주오씨

댓글 0

고대사 연구

2018. 10. 4.


용인의 대표적 명문 해주오씨

기사승인 2013.05.06  18:07:29

맹꽁이 오소운 목사는 해주오씨 추탄공파 25세손이다.

공유

  
▲ 모현면 오산리 본동에 있는 해주오씨 시조단. 시조 오인유를 중심으로 집안을 빛낸 선조들의 비가 늘어서 있다. 매년 음력 3월 시조제를 지낸다.

해주오씨의 뿌리

해주오씨는 용인의 대성 가운데 하나이다. 주로 원삼면과 모현면을 중심으로 세거하였고 지금까지도 용인지역의 유력한 가문으로 남아 있다. 해주오씨는 황해도 해주를 본관으로 하는데 신라 때 오첨을 시조로 하는 해주오씨와 고려 때 귀화한 오인유를 시조로 하는 해주오씨가 있다. 해주오씨는 수양오씨라고도 불리어졌는데 수양은 해주의 옛 지명이다.


용인에 세거해 온 해주오씨는 대부분이 오인유를 시조로 하는 해주오씨로, 1세조인 오인유는 지절과 덕망, 학식을 고루 갖춘 송나라의 대학자이다. 984년(성종 3년) 고려에 귀화하여 검교군기감사를 역임하였고, 이윤관, 이총섬 등과 함께 사직, 국자감(국립교육기관), 오묘(五廟) 등의 창건을 주창하여 이를 설치케 했다. 해주에 근거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삼게 되었다.


용인의 해주오씨

해주오씨가 용인에 정착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약 600여년 전의 일로 보이는데, 용인에는 오인유의 8세손인 오현(1336~1398)과 그의 아들 축(1354~1424), 그리고 축의 조카로 선천군수를 역임한 순종의 묘가 기흥구 지곡동에 있고 오현의 둘째아들 윤(미상), 윤의 둘째아들 계종(?~1501)의 묘가 수지구 상현동에 있으며, 오현의 4촌인 오희보의 묘가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에 남아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해주오씨는 이미 고려 말부터 용인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해주오씨가 용인에 정착하게 된 것은 혼인관계로 인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당시 용인은 용인이씨 세거지로 오현의 조모가 용인이씨이다. 오현과 오축의 후손들은 후에 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 이거하여 안성의 대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용인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해주오씨는 오희보의 후손들로, 고려말 대호군을 지낸 오희보(1360~1426)가 말년에 용인(당시 죽산)에 낙향하여 살게 되면서 용인의 해주오씨 가문을 열게 되었다.
현재 오희보의 후손들은 처인구 원삼면의 학일리, 죽능리, 백암면 등지에 150여 호가 살고 있고,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20여 호가 살고 있으며 기흥구 서천동에 10여 호가 남아있다.


원삼의 해주오씨


원삼에 세거한 해주오씨는 조선조에 크게 현달한 인물은 별로 없지만 끊임없이 출사, 수많은 이들이 관직에 이름을 올렸고 용인의 유력한 가문의 위치를 잃지 않았다. 특히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3대에 걸쳐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의병장 오인수, 아들 독립군 오광선, 광선의 부인 정정산, 손녀 광복군 오희영·오희옥, 사위 신송식) 집안을 배출하였다.


오인수는 포수로서 화포계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계원 300여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용인, 안성 등지에서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수십 명을 사살한 의병장이다. 아들 오광선(본명 성묵 896~1967)은 아버지가 일경에 체포되어 끌려가는 것을 보고 언젠가는 내손으로 복수하겠다는 결심으로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한 후 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중국 낙양군관학교 교관으로 지내며 독립군 양성에 기여한 바 크다. 1937년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여 만주 대전자에서 일본군을 괴멸하는데 큰 공을 세운 독립군 장군이다. 광복 후 국군 창설 당시 육군 대령으로 입대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고 후에 준장에 추서되었다.



광선의 큰딸 오희영(1924~1969)과 사위 신송식, 둘째딸 희옥(1926~생존)까지 광복군에 투신 조국광복에 기여한 보기드문 3대 독립운동 집안이다. 또 상해 임시정부 예산결산위원장을 지낸 오의선(1889-1931)도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 원삼 일대에 한학자로 유명한 오만영 선생, 육군사관학교 8기로 한국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하여 여러 전투에 전공을 세운 한국전쟁의 영웅 오형근 대령,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특전사령관을 역임한 오남영 중장, 수지구청장을 지낸 오세동 등 여러 인물들이 있고, 서울시장을 지낸 오세훈 변호사도 후손의 한 사람이다.


  
▲ 원삼면 승죽 호군공 묘역

오산리의 해주오씨


처인구 모현면은 연일정씨, 연안이씨, 해주오씨 가문이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지금까지도 모현의 대성을 이루고 있다. 이중 해주오씨의 세거지는 모현면 오산리로, 오산리(吳山里)란 오씨문중의 산이라는 데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오산리 해주오씨의 입향조는 오희문이다. 오희문은 1세조 오인유의 8세손으로 원삼면 학일리에 묘소가 있는 오희보의 5세손으로 당시 모현면의 세거성씨인 연안이씨 이정수(문천군수 역임)의 딸과 혼인하면서 모현면 오산리에 이거하여 모현지역 해주오씨 가문을 열게 되었다.



후에 추탄공파의 파조가 된 오윤겸(1559~1636 추탄)은 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하였고 임종하면서 유언으로 “죽고 난 뒤에 비문을 세우지 말고, 시호를 청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 추탄의 부친 오희문이 영의정, 조부 경민은 좌찬성, 증조 옥정은 이조판서, 그리고 추탄의 아들 달천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손자 도종이 보사원종공신에 녹훈 되어 가문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밖에도 오도종, 오도일 등 현달한 인물들이 잇달아 가문을 빛냈는데, 가장 가문을 빛낸 이는 심양에서 순절한 3학사 중 한 사람인 오달제(1609~1637) 선생과 윤겸의 고손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고 우의정을 지낸 오명항(1673-1728)이 있다. 
특히 오달제 선생이 심양에서 순국할 때 선생이 공부하던 원삼면 학일리에 풀이 말라 죽었다고 하여 풀 초(草) 마를 고(枯)를 따 고초골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오산리에는 오희문, 오윤겸을 비롯하여 오도일, 오명항 등 조선 후기를 쟁쟁하게 수놓았던 가문의 묘역이 남아 있다. 또 관향인 해주가 북한지역에 있어 오산리에 시조단을 조성하여 매년 음력 3월 15일 전국의 후손 1000여명이 모여 향사를 지내고 있는데, 가히 오산리는 우리나라 해주오씨의 고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추탄의 후손들은 추탄공파를 형성하였고, 선영을 지키며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추탄회관을 마련하여 종중의 결속과 선조의 유덕을 선양하고 있다.


서천동의 해주오씨

기흥구 서천동에는 1980년대까지 약 30여 호의 해주오씨가 세거해 왔었으나 1980년대 경희대학교가 수원캠퍼스를 조성하고, 후에 수원시 영통지구가 개발되면서 대부분 외지로 나갔고 현재는 10여 호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서천동 해주오씨의 입향조는 추탄 오윤겸의 후손으로 이인좌의 난 때 자원 출정하여 안성에서 적을 격파한 공으로 분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된 오수국(1688~?)인데, 그의 묘를 서천동에 조성한 이후 본격적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서천동의 해주오씨 인물로는 참봉을 지낸 오혁선(1867~1935)이 있다. 서천리 출신으로 2000년 서천리에 사립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이 지역 초등교육에 기여하였고, 오민근은 현재 추탄공파 회장으로 해주오씨 선양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수국의 아들로 군기시 주부를 지낸 명삼 등 서천동의 해주오씨 묘역은 서천동이 개발되면서 2010년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주오씨 가문이 지켜온 문화재


해주오씨 가문이 고려 말, 조선 초부터 용인에 세거해오면서 출사해서는 국가경영에 공헌하였고 고향에서는 지역발전에 기여하며 용인역사의 일부를 이루었다. 특히 국가적으로 귀중한 많은 유산을 남겼는데, 이 가운데 지정문화재를 살펴보면 국가지정문화재로 임진왜란 때 오희문이 10년간 피난하면서 써놓은 일기 보물 제1096호 《쇄미록》이 있고, 오명항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뒤 공신에 올라 받은 오명항영정양무공신교서〉가 보물 제117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또 지방문화재로 오희문 선생 묘(향토유적 34호), 오윤겸선생 묘(도기념물 104호), 오달제선생 묘 및 대낭장비(향토유적 3호), 오명항 선생 묘(향토유적 12호)가 있는데 모두 모현면 오산리에 있다. 특히 오달제 선생의 묘는 선생의 시신이 없고 평소에 사용하던 주머니와 허리띠를 묻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또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추탄공파에서 소장한 고문서로 교지, 서간문, 시집, 통문, 호적, 초상화 등 다수의 문화재급 유물이 가문에 남아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2008년 명가고문서 8집으로 《수양세가》로 간행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짧지만 가문은 영원하다. 가문의 역사가 모이면 곧 지역의 역사가 된다. 해주오씨 가문은 용인지역의 유력한 집안으로 남긴 유산이 적지 않으며 지역에 공헌한 바가 매우 크다. 오랑캐 왕 앞에서 흔쾌히 죽음으로 절의를 지켰고, 3대가 비바람을 맞으며 독립에 헌신했다.  흔치 않은 바가 해주오씨 가문에 있으니 바로 해주오문의 정신이자 용인의 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구 시민기자 webmaster@yongin21.co.kr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