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내 외증조할아버지 최익현(崔益鉉)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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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2018. 12. 9.




내 외증조부 최익현(崔益鉉) 의사

양력 1834년 1월 14일 ~ 1907년 1월 1일
음력 1833년 12월 5일 ~ 1906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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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니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면암(勉庵)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

국가, 민본주의 등과 사대주의, 군주제, 서원, 신분제 등을 모두 지키고자 한, 완벽한 의미의 '수구(守舊)'. 시대가 당면한 개혁을 통한 근대화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가지 과제 가운데 후자만을 만족시킨 인물.[1] 명백한 한계가 있음에도 자신이 믿는 성리학의 선비로서의 신념에 오차 없는 삶을 살았다. 조선 전기 최만리와 함께 최씨 고집의 아이콘.

1905년 을사조약에 항거해 호남 지방에서 의병을 궐기, 일본군과 교전하였다가 대한 제국군을 만나자 교전할 수 없다고 판단[2]해 의병을 해산하고 투항했다. 결국 일제에 의해 쓰시마 섬에 유배돼서도 단식 운동을 하는 등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다가 1906년 병으로 사망했다.

현손자[3] 최창규는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 생애[편집]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초명(初名)은 '기남(奇男)' 이다. 4세 때 포천을 떠나 충청북도 단양으로 이주하였으며 14세 때 부친의 권유하에 문신 이항로의 문인으로 입문하였다.

23세 때인 1855년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을 거쳐 사간원, 이조 정랑 등의 관직을 임명받았다.

2.1. 흥선 대원군과의 갈등[편집]
그는 생전에 특히 흥선 대원군과 갈등이 깊었던 사이이기도 했는데 1868년 대원군이 고종의 대리 섭정이었던 시절,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경복궁 재건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지자 반기를 들며 민생을 파탄하고 국가 재정을 바닥나게 하는 과소 행위라며 상소를 보내 혹독하게 비판했고 이에 대원군의 사람들에게 역사에 이름 석 자 남겨보려는 구차한 행위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고종은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동령부 도정에 제수했다. 다음은 1868년에 올라온 최익현의 상소다. 이만손을 비롯한 영남 유생들의 만인소는 영남 만인소 항목 참조.

첫째는 토목 공사를 중지하는 일입니다. 나라 임금의 급선무는 덕업(德業)에 있고 공사를 일으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초가집과 흙 섬돌은 요임금이 위대하게 된 것이고, 낮은 궁실(宮室)에 변변치 못한 의복은 우임금이 흠잡을 수 없게 된 이유입니다. 이 때문에 이들의 빛나는 자취가 모두 책에 쓰여 있습니다. 만일 고금의 사변을 모두 믿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본받고자 한다면 그 까닭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말을 깊이 생각하시고 아직 시작하지 않은 공사를 한결같이 모두 정지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소서.

둘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정사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재물은 백성들이 하늘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대학(大學)》에, ‘재물을 모으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재물을 흩으면 백성들이 모여든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나라의 재용(財用)이 고갈된 때를 당하여 방대한 역사를 시작하였으므로 형편상 백성들에게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한때의 임시방편의 정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대내(大內)가 완공되어 이어(移御)하신 것이 얼마 전이었는데도 원납전(願納錢)의 징수를 정파(停罷)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느 때에 가서야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당백전(當百錢)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경비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시어 이렇게 의로운 발기를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조치입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 2년 동안에 사·농·공·상이 모두 그 해를 입었는데, 그 피해가 되풀이되어 온갖 물건이 축나고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이 전보다 줄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현 시기의 형편과 세상 인심이 절로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이제 옛날 돈이 통용되어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모두 말하기를, ‘이 돈은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는데, 단지 집집마다 바치라는 방(榜)만을 볼 수 있을 뿐 영구히 혁파한다는 밝은 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혹이 점점 짙어가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미혹되지 않도록 하소서.

넷째는 문세(門稅)를 받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당당한 천승(千乘)의 재부로써 이해를 타산하여 이미 백관(百官)과 각 군문에 지급하는 녹봉을 삭감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각 항목의 견감(蠲減)한 물건도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겨 섶을 팔고 쌀을 파는 사람들에게 한 푼 두 푼 구걸하면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으니, 이것은 참으로 이웃 나라에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즉시 금지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이 없게 한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또 여기에 그치지 않고 1873년에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군의 과소 행위와 무리한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였으며[4], 그걸 떠나 이륜두상(彝倫斁喪 : 떳떳한 의리와 윤리가 파괴되다)이니 올바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이니 하면서 대원군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이에 조정이 발칵 뒤집혀져 목숨이 위험할 뻔했지만 고종은 최익현을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보호해주었고 결국 올바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이 된 대원군이 은퇴를 결정하여 항의 시위를 했지만 그 은퇴 기간을 절묘히 이용한 고종이 대원군 하야를 확정지어버리면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다. 밑은 최익현이 1873년에 올린 상소다.

신은 몇 해 전에 부름을 받고 마지못해 벼슬의 반열에 나왔으나 며칠도 못 가서 까닭 없이 견파(譴罷)당하였으니, 신의 변변치 못하고 사람답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벌써 환히 알고 계신 바입니다. 그때부터 시골로 물러가서 고생을 달게 받으며 낮은 벼슬자리도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승지와 같은 훌륭한 벼슬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명을 듣고 나서 놀랍고 황송하여 더욱 죽을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일들을 보면 정사에서는 옛날 법을 변경하고 인재를 취하는 데에는 나약한 사람만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대신(大臣)과 육경(六卿)들은 아뢰는 의견이 없고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은 일을 벌이기 좋아한다는 비난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속된 논의가 마구 떠돌고 정당한 논의는 사라지고 있으며 아첨하는 사람들이 뜻을 펴고 정직한 선비들은 숨어버렸습니다.

그칠 새 없이 받아내는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있으며 떳떳한 의리와 윤리는 파괴되고 선비의 기풍은 없어지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벽스럽다고 하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은 처신을 잘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염치없는 사람은 버젓이 때를 얻고 지조 있는 사람은 맥없이 죽음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위에서는 천재(天災)가 나타나고 아래에서는 지변(地變)이 일어나며, 비가 오고 날이 개이고 춥고 덥고 하는 기후 현상에서는 모두 정상적인 상태를 잃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아무리 노련하고 높은 덕망으로 세상 사람들의 추대와 신망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담당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견제당하고 모순에 빠져 힘을 쓰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신과 같이 본바탕이 어리석고 학식도 전혀 없는 데다가 외롭고 약하여 어찌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전하의 총애만 믿고서 본분에 지나친 것을 삼가라는 경계와 복이 지나치면 재앙을 당한다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벼슬 반열에 끼어 따라다니고 길가에서 떠들어대며 의기양양하게 자족하면서 아무것도 꺼리는 바가 없이 처신한다면 또한 사람들의 드센 비방과 무엄하고 불경스럽다는 주벌이 잇따라 일어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달려 나가고 싶어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878년 10월 25일의 상소.

신은 일소(馹召)를 받았을 때 외람되이 개인의 사정을 진달하여 전하의 이해를 받으려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방의 공식 인편을 통하여 봉해 올린 글이 길에서 지체되어 제때에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상소문을 지을 적에는 신중히 잘하지 못하여 꺼리는 문제들을 건드림으로써 명령에 대해 태만한 죄가 드러났으며 가까이 있는 관리들과 높은 관리들의 비위를 거슬렀으므로 행장을 갖추고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하늘같이 큰 도량으로 포용하며 변변치 않은 말도 받아들이고 조그마한 질책도 없었을 뿐 아니라 관례를 뛰어넘는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신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고 구부려 남 보기 부끄럽습니다. 참으로 뜻밖에도 응당 받아야 할 벌을 요행 면하고 이렇듯 몹시 외람되고 분수에 넘치게 벼슬에 임명되었습니다.


대저 작록이란 나라의 명기(名器)입니다. 만일 적임자를 등용하지 못하면 위로는 임금의 정사에 오점을 가져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심정에 어긋나는 만큼 그로 인하여 미치는 폐해는 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하가 물러가고 나아가고 하는 것으로 말하면 풍속의 성쇠와 염치의 중대한 의리에 관계되는 바가 이보다 더한 문제가 있는 데야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이러므로 신은 임금의 명령에 따라 응당 벼슬에 나가야 할 것을 나가지 않아도 공손치 못한 것이 되고,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을 나가는 것도 역시 공손히 못한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오늘날 형편을 놓고 말하면 신은 사실 어리석고 무식한 시골 사람입니다. 설사 문을 지키고 야경을 서는 일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거늘 하물며 호조(戶曹)의 관리라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재정이 부족하고 백성들이 곤궁을 겪고 있는 이때에 신과 같은 사람은 결코 잠시라도 이 벼슬자리에 무턱대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낮은 벼슬에 처하며 부(富)를 사양하고 가난에 처하는 것은 사양하고 받고 하는 데서 지켜야 할 큰 지조입니다. 신이 전날에 승지의 벼슬을 사양하였고 오늘날 순차를 뛰어넘어서 발탁된 벼슬에 도리어 태연스럽게 나가 앉아 있다면 참으로 이른바 만 냥은 사양하고 10만 냥을 차지하는 격이니, 장차 맹자(孟子)의 죄인이 되는 데서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가지 못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신이 연전에 망령되게 시정에 대하여 논하였으니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간삭(刊削)된 지 얼마 안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갔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지만 권종록(權鍾祿)의 상소에 대해서도 좋게 비답을 내리셨으니, 신의 죄에는 공경스럽지 못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마땅히 해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형편없는 탓으로 하여 명예를 낚는다는 심한 무함이 신의 스승인 전 참판(參判) 이항로(李恒老)에게까지 미쳤으니, 이 어찌 몹시 억울한 노릇이 아닐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죄명도 씻지 못하고 스승이 당한 호된 무함도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한 몸만 단호하게 얼굴을 쳐들고 나갈 수 없는 셋째 이유입니다.

전날에 역말로 불렀을 때 은혜와 총애를 탐내어 경솔하게 행동한 결과 염방(廉防)이 어그러지고 관리들에게 수치를 끼쳤으므로 속으로 자신의 결함을 반성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갈 수 없는 넷째 이유입니다.

태평했던 조정에서는 신이 한 번 올린 상소로 시비가 터져 나와 대신들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고 삼사(三司)가 연합하여 상소를 올리게 되었으며 전직과 직무 없는 관리로 있던 신하들도 성토가 바야흐로 팽팽해져서 죄악이 더욱 밝아졌습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갈 수 없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이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신이 형편상 안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가엾게 여겨 이미 내린 명령을 속히 철회함으로서 공기(公器)를 중히 하시고 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도록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이미 나가지도 않으면서 의견도 아뢰지 않으면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역시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전하의 성덕을 받들어 빛내는 도리도 아니라고 봅니다.

지난번 상소 가운데 이미 문제를 끌어내고는 말을 자세하게 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늘의 의논을 보니, 정변구장 이륜두상(政變舊章彝倫斁喪) 여덟 글자를 가지고 신을 규탄하는 칼자루로 삼고 있으니, 신은 거듭 다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아! 우리 나라는 은사(殷師) 이래로 이미 오랑캐의 옛 풍속을 고쳤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 여러 열성(列聖)이 잇달아 나오고 뭇 어진 이들이 많이 나타나 일세를 한 범위에 넣어 후손에게 넉넉함을 물려주게 된 것은 모두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고 정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한 번 다스려지는 운수를 담당한 것이었으니, 세워도 어그러짐이 없고 후세에 가서도 의혹이 없으며 이 세상을 마치도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후세

의 임금이나 후세의 백성들이 혹 하나라도 이와 반대로 하면 문물제도는 오랑캐와 같은 형편에 빠지고 사람들은 짐승의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니 하루도 익히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나라의 일들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불순하여 고치지 않으면 끝이 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심한 것을 보면 황묘(皇廟)를 없애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서원(書院)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들 간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後嗣)로 나가니, 부자간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나라의 역적이 죄명을 벗으니 충신의 도리가 구분 없이 혼란되고, 호전(胡錢)을 사용하게 되자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별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이 몇 가지 조항들은 한 조각이 되어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윤리는 벌써 씻은 듯이 없어져 더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토목 공사의 원납전(願納錢) 같은 것이 서로 안팎이 되어 백성들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대 임금들의 전장을 변경하고 천하의 의리와 윤리가 썩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에 신이 생각건대,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에 대해 논한다면 만동묘(萬東廟)를 복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중앙과 지방의 서원을 짓지 않아서는 안 되며,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것을 막지 않을 수 없으며, 죄명을 벗겨준 나라의 역적에 대해 추후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호전을 사용하는 것도 혁파하지 않을 수 없고, 토목 공사의 원납전의 경우도 한 시각이나마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이른바 황묘를 복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 왕조는 명나라에 대하여 이미 300년 동안을 신하로서 섬겨왔고 임진년(1592년)에는 재조(再造)해 주었으니 만대를 두고 잊지 못할 은혜가 있으니, 만대를 두고 반드시 보답해야 할 의리가 있습니다. 옛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은 천지가 뒤바뀌고 상하가 도치된 것을 통탄스럽게 여기면서 무기를 갖추어놓고 밤낮으로 뛰어난 인재를 기다렸습니다. 이때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물고기와 물처럼 계합(契合)하여 빈틈없는 계책을 세워 물리칠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운수가 제한되어 효종이 승하하여 일은 성공을 보지 못하니, 온 나라의 신민이 원통한 마음을 드러내 보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 칸의 초가집을 지어놓고 제향을 올렸으니, 이것은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의리로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으며 먼 후세에 가서도 영원토록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 의식 절차를 위에서 충분히 갖추어 거행하게 되어서는 이 제단을 설치하는 것으로도 크게 보답하지 못할 듯이 해야 하는데도 번잡하고 중첩되는 혐의를 품는 일이 있습니다. 삼가 열성조의 분부를 상고하여 보면 번잡하고 중첩되게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관심을 기울여 중시하면서 관청 토지를 떼어주어 제물을 공급하게 하였고 친히 편액(扁額)을 써주어 드러내 빛내주는 뜻을 보였으며, 인정에 따라 원칙을 세움으로써 먼 후세에 가서도 의혹됨이 없게 하라는 명령까지 있었습니다.

또한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황은의 혜택이 깃들어 있으니 집집마다 시동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들 안 될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대 임금의 거룩한 뜻이 어찌 그저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기만 하고 그것을 폐지할 수는 없다는 의리에서만 나온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밝히기 어려운 것은 하늘의 이치이고 무너지기 쉬운 것은 인심입니다. 백성들의 위에 있는 사람들이 만일 지성으로 장려해서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떳떳한 의리를 배양할 수 없고 영원히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우(夏禹)의 사당(祠堂)이나 태백(泰伯)의 사당 같은 것을 놓고 미루어보아 백성들이 슬픔에 잠겨 그러면서 백대를 내려가도 변함없는 것인 경우에는 틀림없이 시골에서 사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은 여기에 더욱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훗날에 나온 성인들은 응당 그를 준수하며 고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 열성들이 의리를 바로잡아 전통을 드리운 것이 그와 같이 심원하였고 솔선 모범을 보이면서 조장 발전시켜준 수고가 그와 같이 빛나고 밝기 때문에 온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충성과 의리에 의한 교화에 감화되고 뼈 속에까지 깊이 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몇 해 전에 만동묘를 철폐할 때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은 전하의 뜻이 오로지 공경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서러워하며 슬피 울었던 것이며 온 나라 사람들의 심정은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유신(儒臣)은 상소를 올려 의리를 진달하였고 각 도의 유생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합문(閤門)에 나와 엎드려 상소하였습니다. 이로써 떳떳한 양심이 모두 같고 여러 열성(列聖)들이 배양하여 놓은 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천하의 일에는 어진 사람들이 의견을 내고 많은 선비들이 같은 계(啓)를 하며 온 나라 사람들의 의견이 한결같은 경우에 공론이 아닌 것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전하가 새롭게 정사를 총괄하면서 산만한 것을 정리하고 옳지 못한 것을 없애려고 한다면 공론에 대해서는 더구나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조용히 심사숙고하고 시원하게 생각을 바꾸어 빨리 제사를 회복하자는 요청을 허락함으로써 위로는 조종의 유지를 따라 준수하고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게 해 주소서.

만일 난처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서 혹 말하기를, 중대한 예를 그만두었다가 갑자기 다시 설행한다면 성심으로 공경하는 것에 결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주자는 태묘(太廟)의 예의 개정(改定)을 논하여 말하기를, ‘종묘의 예는 더없이 엄하고 중대한 일이니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놓고 보면, 오늘 황묘의 제사를 회복하는 것은 성덕에 더욱 빛을 드러낼 것이며 누(累)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비속한 말들이 어찌 전하의 용단을 동요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서원은 흥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옛날의 교육은 집에는 숙(塾)을 두고 마을에는 상(庠)을 두며 주(州)에는 서(序)를 두고 나라에는 학(學)을 두어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배움에 있어서는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위로는 윤리가 밝아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화목하게 지냈다고 봅니다. 지금 아조(我朝)의 성균관(成均館)이 옛날의 국학이며 향교(鄕校)도 옛날의 주서(州序)이고 서원은 옛날의 숙상(塾庠)입니다. 500가(家)에 한 개 ‘상’이 있은 뜻을 미루어 보면 만호나 되는 고을에 겨우 한두 개의 서원을 둔 것은 소략이 매우 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을 둔 기본 뜻은 학문을 강론하여 도를 밝히는 것이 사실 주된 것이며 시골의 향선생(鄕先生)의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려는 일은 그 나머지 일이었습니다.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널리 설치하게 되자 겹쳐서 제사지내는 것을 혐의쩍게 생각하여 이미 세운 것까지 함께 폐지하고 천이나 백에 열이나 하나만 남겨둔다면 학교에 관한 옛 제도와는 크게 어그러지며 창건한 본래의 뜻을 크게 잃게 될 것이니, 교육이 해이되고 풍속이 퇴폐해진 것을 이웃 나라에서 듣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명사(明史)》를 고찰하여 보면, 천하의 서원을 철폐한 것이 두 번 보이는데 그에 따라서 왕실이 뒤집혔으니, 이것이 또한 어찌 길상(吉祥)의 일로써 사람들이 원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삼가 바라건대, 속히 이미 내린 명을 환수하여 주소서. 다만 제사를 그만둔 서원에 대해서는 그 인물의 일생을 논하여 덕망도 공로도 없고 음사(淫祠)에 가까운 것은 모두 폐하되, 도덕이나 절의가 한 마을의 스승으로 될 만한 사람은 본향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며, 온 나라와 천하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은 주(州)마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곳곳에서 높여 보답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금대(金帶)가 많고 많으며 현송(絃誦)이 넘실거려서 옛날의 번성하던 시기에 못하지 않게 된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늘 오늘날의 서원은 실효는 없고 폐단만 있다고 하여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매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자공(子貢)이 희생으로 쓰는 양을 없애려고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너는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의를 아낀다.’ 하였습니다. 양이 남아 있으면 예도 회복될 가망이 있는 것이니, 서원을 철폐하면 어찌 학문이 영원히 폐지될 한탄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그 사람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정사도 거행되는 것이니 서원을 두면 실제 성과는 자연히 있게 될 것이고 폐단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밝게 살피소서.

이른바 귀신의 우사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천륜(天倫)입니다. 그 낳아준 바를 버리고 남에게 후사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일에서 변고입니다. 옛날에는 오직 종가(宗家)에 후사가 없어야 이렇게 남의 자식으로 대를 잇게 하였는데 후세에 와서는 종가(宗家)고 방계고 먼 친척이고를 따지지 않고 뒤를 잇게 함으로써 그 길이 매우 넓어졌으니 이미 주공(周公)의 뜻에 어긋납니다. 이렇게 널리 만연되다 보니 신주에 후사를 세워주는 풍속까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옛날의 예법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귀신의 도리로나 사람의 도리로 보아도 대단히 공손하지 못한 노릇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종친(宗親)들을 화목하게 대하고 어진 선비들을 내세워주며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것은 천지와 같이 사물을 살려 주시려는 심정에서 출발한 것이고 화육(化育)을 도우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도리에 맞게 처리하는 것이 마치 정조(正祖)가 고 판서(故判書) 유몽인(柳夢寅)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후손을 세워준 것처럼 한다면 의로운 발기가 만대를 내려갈 법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일을 맡은 신하가 물어 보지도 않고 자신이 사적으로 아는 것에 빙자하여 그릇된 규례를 답습하여 시행하였습니다.

이에 이익을 쫓아 어버이는 잊고 확상(矍相)의 활쏘기에서 쫓겨난 무리들이 때를 타서 부합하여 자기의 부(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고조부(高祖父)를 끌어대었으며 나아가서는 9대 조상이나 10대 조상들까지 끌어다가 기꺼이 대를 잇게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대수가 비게 되면 각 갈래의 귀신들을 억지로 끌어다 맞추어 그 대수를 채우고 자기의 조상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하늘의 이치에 가깝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정에 편안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끊어진 대를 이어주려는 전하의 본의는 그처럼 훌륭하였지만 봉행하는 신하가 잘 받들지 못하여 마침내 금지옥엽과 같은 후예로 하여금 이익을 보고 의리를 잊어서 못하는 짓이 없어 오랜 역사를 더럽히고 있으니,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나라의 역적에 대해서는 소급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윤리는 천하의 대륜(大倫)이며 이 천지 사이에서 도망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명하고 하늘이 토벌하는 것은 만대의 공의(公儀)이므로 한 번도 사람이 사사로운 뜻으로 옮겨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초기에 속된 무리들이 멋대로 하여 사설(邪說)이 횡행(橫行)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정(邪正)을 묻지 않고 충역(忠逆)도 살피지 않고는 그저 죄명에 걸려든 모든 사람들을 다같이 신설(伸雪)해 주고 화기를 인도하여 맞이하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대저 화(和)를 말한다면 공평(公平)한 것이며 바른 것입니다. 하늘을 놓고 말하면 비 오고 개고 춥고 더운 것이 각각 때에 알맞은 다음에야 화기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놓고 말하면 기뻐하고 성내어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모두 절도(節度)에 알맞은 연후에야 화기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비 오고 개고하는 것이 때를 어기거나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 마땅함을 잃어서 혹 항상 비가 오거나 기쁨에만 치우친다면 사리에 몹시 어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화평하고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설해 주어야 할 것을 신설해 주었다면 화기를 이끌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설해 주지 말아야 할 것을 신설해 주어도 화기를 이끌어올 수 있습니까? 응당 신설할 것을 신설해 주지 않으면 물론 화기를 손상시키게 되고 벗겨주지 말아야 할 것을 벗겨주어도 화기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신설해 준 사람들 중에서 신설해 주어서는 안 될 자들은 특히 나라의 역적들이며 이 나라의 역적들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는 혼조(昏朝)의 한효순(韓孝純)과 기사년(1569년)의 이현일(李玄逸)과 목내선(睦來善)입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륜(大倫)을 무너뜨리고 하늘의 의사에 따라 천벌을 주는 공정한 원칙을 어긴다면 떳떳한 윤리와 도리에 어그러지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터인데 어떻게 화기를 이끌어다가 성궁(聖躬)에 복을 돌릴 수 있습니까?

이것은 결코 성조(聖朝)의 독단이 아니라 속류들의 사설이 해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깊이 생각하고 변별하여 법과 의리로 재단하여 용서할 것은 용서하되 마치 화기로운 바람에 단비가 내리듯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응당 죄를 주어야 할 자들은 죄를 주기를 드센 우레가 울고 된서리가 내리듯이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인륜을 세워 화기를 가져올릴 것이며 만물의 운명을 바로잡아 많은 복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더없이 다행하게 되고 만대를 두고 더없이 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호전(胡錢)을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엄하게 구별하며 통분함을 참는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효종(孝宗)과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전해준 심법(心法)으로써 그 공로는 공자(孔子)나 주자(朱子)의 공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정(先正)이 오랑캐들의 물건 매매를 금지하였던 일로 보면 호전을 쓰는 것은 역시 옛적 회계에서 신하 노릇하고 첩 노릇한 수치를 잊거나, 음양의 향배(向背)에 관한 구분에 어두운 것이니, 정사에 펴서 일에 폐해를 끼친 것이 이미 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은 전날에 벌써 당백전(當百錢)을 폐지할 것을 청한 바 있는데 오랑캐 돈의 폐해는 당백전보다도 심합니다.

당백전의 폐해는 모든 물건들이 유통되지 못하게 하고 오랑캐 돈의 폐해는 모든 물건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당백전의 폐해는 마치 속이 결리고 아픈 증세와 같아서 배를 씻어 내리는 약을 써서 내려가게 하면 전과 다름없이 나아지지만 오랑캐 돈의 폐해는 설사증과 같아서 원기가 날로 빠지는데 그것이 다 빠지면 죽어버리게 되니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의도로 보아도 그렇고 이해 관계를 보아도 또한 이러하니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다시 쓰는 문제는 단 하루도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 성헌(成憲)을 변란 시키는 몇 가지 문제는 실로 전하께서 어려서 아직 정사를 도맡아보지 않고 계시던 시기에 생긴 일이니, 모두 전하 자신이 초래시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을 책임진 관리들이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린 결과 나라의 기강이 모두 해이되게 되었고 오늘날의 폐해를 초래케 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임금이 권한을 발휘하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깊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속론과 사설에 이끌리지 말고 가까이 돌거나 권세 있는 관리들에게 속지 말며 기를 부리는 현상이 없게 하고 본래의 마음을 깨끗이 가지며 욕심을 깨끗이 다하여 하늘의 이치가 유행되게 할 것입니다.


정령(政令)을 내려 조치함에 있어서 응당 집행해야 할 것은 사나운 우레나 바람과 같이 드세게 시행하며 응당 제거하여야 할 것은 제거하고 쇠를 끊듯이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주 명령을 내려 조신(朝臣)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의혹함이 없는 원칙을 세우고 덕을 수양하는 책임은 어진 스승에게 맡기고 관리들을 등용하고 물리치며 음양을 조화롭게 하는 책임은 정승들에게 맡기고 임금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책임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맡길 것입니다.


임금을 위하여 토론도 하고 사고도 하며 임금을 바른 말로 깨우쳐주는 책임은 유신들에게 맡기며, 군사를 훈련하고 선발하며 외적을 막는 일은 절도사(節度使)들에게 맡기고, 돈과 곡식의 출납과 군사비용에 대해서는 유사(有司)에게 맡기고, 효도가 있고 청렴한 사람을 뽑으며 선비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감사에게 맡길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지위에 있지 않고 다만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그 지위만 높여주고 후한 녹봉을 줄 것이며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면서 《중용(中庸)》에서 아홉 가지 의리에 대한 교훈과 직분에서 벗어나 정사를 논하는 데 대한 《논어(論語)》의 경계(警戒)를 어기지 말고 잊지 말아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도록 하소서. 이미 썩은 윤리를 다시 펴고 위태로운 나라의 형편을 안정시킨다면 백성들은 태평세월을 즐기게 되고 종묘와 사직은 만년의 향사(享祀)를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가 당요(唐堯)나 우순(虞舜)과 같은 임금이 되면 대소(大小)와 원근 할 것 없이 모두 다행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 미미한 신이 비록 시휘(時諱)에 저촉되고 뭇 사람들의 노여움을 범하였으니, 천만 번 죽더라도 구구한 광영이 가문에 흘러넘칠 것입니다. 신은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근심하는 지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1878년 11월 3일의 상소.

2.2. 문호 개방 반대 운동[편집]
최익현은 흥선대원군과도 그랬지만 이후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일본과 문호를 개방하는 협상이 진행되자 위정척사 운동의 선봉장으로 나서서 반(反) 개화와 외세 척결 등을 주장하였다. 아래는 그가 올린 상소다.

신은 적들의 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의정부(議政府)에서 응당 확정적인 의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으나 아직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그들의 속셈이 화친을 요구하는 데 있을 것이라고 소문이 떠돌아 입 가진 사람은 모두 분격하며 온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이 소문이 시행된다면 전하의 일은 잘못되고 말 것입니다.

화친이 상대편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그 화친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겁나서 화친을 요구한다면 지금 당장은 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그들의 물건은 모두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괴상한 노리갯감들이지만,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것들이므로 통상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나라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일단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이 전파되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뭍에 올라와 왕래하고 집을 짓고 살게 된다면 재물과 부녀들을 제 마음대로 취할 것이니,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이런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병자년(1636년)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병자년에 화친을 한 뒤로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내게 되어 오늘까지 관계가 반석 같은데, 지금은 왜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합니다. 저들은 재물과 여자만 알고 사람의 도리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그들과 화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뒷날에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크게 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서양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아무 곳에서 동맹을 맺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순조(純祖) 때에는 서양 사람이 몰래 들어왔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고, 우리 헌종(憲宗)도 들어와서 염탐하는 자들을 모두 주륙하였으니 이것이 전하의 가법(家法)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기어든 왜인들은 서양 옷을 입고 서양 포를 쏘며 서양 배를 타고 다니니, 이는 왜인이나 서양 사람이나 한 가지라는 것의 뚜렷한 증거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속겠습니까?

감히 고려 때의 우탁(禹倬)과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고사를 본받아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렸으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큰 계책을 세우고, 조정 관리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짐승을 끌어들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으로 처단하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도끼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조정의 큰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저들이 대포를 겨누며 화친을 하자고 하니 이건 믿을 수 없는 화친이다.
2.저들이 파는 건 사치품이지만 우리가 파는건 생필품이니 민생에 해를 끼칠 것이다.
3.저들은 말이 왜인이지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도적이다.
4.저들이 우리 나라에 올라오면 재물과 부녀자를 취할 것이다.

한창 문호 개방에 관심을 기울이던 고종은 "최익현은 지금 대계(臺啓)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중에 있으면서 나라와 관련되는 문제를 말한다고 하면서 어려움 없이 상소를 올렸으며, 도끼를 가지고 와서 임금이 행차하는 길 옆에 엎드렸으니 일이 참으로 놀랍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나수(拿囚)하라."란 명령을 내리며 최익현을 전라남도 신안 흑산도로 위리안치 시켰다. 다음은 최익현의 안치 이유다.

일본을 제어하는 일은 일본을 제어하는 일이고, 서양을 배척하는 일은 서양을 배척하는 일이다. 이번에 일본 사신이 온 것이 어떻게 서양과 합동한 것이라고 확실히 알겠는가? 가령 일본이 서양의 앞잡이라고 해도 또한 변란에 대처할 방도가 각기 있을 것이다.

최익현(崔益鉉)의 상소에서는 내가 사학(邪學)을 물리치는 일에 엄하지 않아 그렇다고 하면서, 한 세상을 현혹시킬 계책을 앞장서 만들고 이렇게 임금을 속이고 핍박하는 말을 만들어서 방자하게 지적하여 규탄하였다. 지적하여 규탄하는 것도 모자라서 공동(恐動)하기까지 하였고, 공동하는 것도 모자라서 헐뜯어 욕하였으니, 그 가운데서 두세 마디의 말은 어찌 신하로서 감히 할 말이며 차마 할 말이겠는가? 가늠할 수 없는 행동과 음흉하고 간사한 속셈에 대해서는 마땅히 전형(典刑)으로 단죄해야 하겠지만 참작해 볼 것이 있으니 최익현은 특별히 한 가닥 남은 목숨을 용서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삼배도(三倍道)로 당일에 압송하라.


귀양 이후에도 문호 개방이 확대되자 그는 개화에 반대하는 유생 및 백성들과 함께 위정 척사 운동을 전개하였고 개화파 역신 처단과 외세 철수 등을 주장하였다.

2.3. 위정 척사 운동의 전개, 보수적 성향[편집]
우선 위정척사란 성리학 외의 모든 사상과 종교, 학문을 배척하는 것이다. 즉, 과학 기술을 천시하는 사농공상의 철처한 신분제, 예를 중시하는 대의 명분과 신권 중심의 통치 철학 등 성리학를 지키고자 하였다.

수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사림 기득권의 핵심적 인물로 그가 지키고자한 것은 성리학을 통해 철저히 지켜온 기득권이다. 따라서 사림을 견제하는 흥선대원군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며 평등 사상을 주장하는 동학이나 천주교 역시 반드시 타파해야할 사상이다. 따라서 1894년 청일전쟁 및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때도 끝까지 반대를 고수했다. 또한 개화를 통해 성리학 질서를 무너뜨리려하는 대신들의 척결을 주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을미개혁이 있었을 때도 계속해서 반대를 고수하였으며, 1896년 단발령이 일어났을 때는 상투 자르는 것을 맹렬히 반대하며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 없다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바로 왕명(王命) 거역 및 반역 미수죄로 체포되었다.

그가 했던 이 한 마디는 유생들과 보수 성향의 인사들에게도 교훈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후에는 왜놈들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들이 들끓는 조정에 있어봤자 심신(心身)이 더러워지게 될 뿐이라며 관직을 내놓고 사퇴하였으며,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내려주었지만 모두 고사하고 향리에서 후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2.3.1. 독립협회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편집]
고종 35년 12월 10일, 최익현은 고종에게 나라를 위해 시행해야 할 열 가지를 적은 상소를 올렸는데, 그중 일곱 번째가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에 대한 다음의 매우 노골적인 배척이다.

일곱째, ‘민당’을 혁파하여 변란의 발판을 막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비방하는 것을 써놓는 나무와 진언(進言)할 때 치는 북이 있었으며,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도 또한 유생들이 대궐문에 엎드리고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시위(示威)의 표시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린 일이 있었으니, 진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계가 있고 절제가 있어서, 차라리 정사에 대해 비방은 할지언정 대신을 협박해서 내쫓는 일은 없었으며, 차라리 소장을 올려 호소는 했을지언정 임금을 위협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 이른바 ‘민당’이라는 것은 시정(市井)의 무식한 무리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서, 구차하게 패거리를 규합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분을 빌려서 대신(大臣)들을 멋대로 명하여 오라 가라 하고 임금을 지적하여 탓하며 나라의 정승을 능욕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저들끼리 결탁하여 고함을 지르며 위엄을 보이고 생색을 내는 것이 굉장하여 그 기세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아! 이로부터 정사에 관한 권한과 권세가 모두 백성들에게 옮겨가 앞으로 조정에서는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일도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가의(賈誼)가 말한바, "발이 도리어 위에 있고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다."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비슷합니다. 이와 같은데도 금지치 않는다면 나라에 어찌 법과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외국에는 이른바 자유 의원(自由議員)과 민권(民權)을 주장하는 당(黨)이 있고, 심지어는 직접 선거하는 민주(民主)의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이 무리들이 이미 대신을 협박해서 쫓아낸 것이 여러 번 되는 만큼, 비록 여기서 한층 더한 일인들 또한 무엇이 두려워서 못하겠습니까? 설령 이 무리들이 진심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도리를 놓고 생각해볼 때, 그런 징조를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듣건대, 성상께서 분발하시고 큰 결단을 내리시어 모두 제거하신다고 하니, 진실로 더할 나위 없는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잘 처리하지 못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허물을 자신에게서 찾고 지극한 정성과 측은한 마음으로 충분히 생각을 고칠 뜻을 보이시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사랑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친구 간에 신임하며 임금을 공경하고 윗사람을 친근하게 대하는 도리로써 깨우쳐 그들을 감복시키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더욱 심한 자 몇 사람을 다스리고 나머지는 법사(法司)로 하여금 해산시켜 보내도록 하며, 서둘러 정사와 형벌을 밝히고 교화를 힘껏 시행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이 과연 우리를 속이지 않고 진실한 마음과 실질적인 정사로 시종여일하는구나.’라고 분명히 알게 한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안정되지 않을까 근심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함께 불복하는 마음을 품고서 도리어 윗사람을 원망하는 뜻을 쌓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그들을 꺾자고 한다면 화(禍)의 기미를 촉발하게 되고 내버려둔 채 따지지 않고자 한다면 교만이 자라날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백성은 물과 같고 임금은 배와 같으니,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으며, 또한 배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매우 절절하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이것을 보고서 속히 도모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요약하면,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 등을 제거하겠다는 고종의 방침에 대해 원칙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고종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민당 혁파의 책임을 떠맡으매 정치적 부담을 안기보다는, 왕권 유지하에도 원론적으로 옳은 태도를 견지해 대중의 존경을 받으면서 관료들로 하여금 악역을 담당하게 하라는 요지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엔 또한 군주가 유학에 힘쓰면 나라가 절로 평안해진다는 사상을 그 배경 논리로서 하고 있음이 물론 드러나고 있다.

2.3.2. 을사 조약 관련 떡밥 : 고종에게 자살을 강요했다?[편집]
고종을 비판하는 주장의 근거로 종종 제기되는 것이 을사조약 직후 최익현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숭정제의 예를 들며 자결을 촉구했고 고종은 난 그딴 거 모른다고 무시했다는 것인데,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다. 우선 숭정제 이야기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폐하께서도 죽으십시오' 가 아니라 '숭정제는 자결까지 했는데 폐하께서는 조약 하나 무르지 못하시옵니까' 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그리고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를 칭찬했지 모르겠다며 잡아떼지 않았다. 또한 최익현은 대표적인 근왕파이자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유림인데 황제에게 자살을 강요했을 리가 없으며, 설령 했다고 치더라도 주변에서 살려둘 리가 없다. 보수 유림의 공격에 시달리던 이완용 일파가 가만히 있었을 리도 없고.

2.4. 을사조약 체결에 의한 의병 활동[편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진회 등 친일 집단이 세워져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한성으로 상경하여 고종의 자문에 응하여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만행을 규탄하고 외세의 철수, 그리고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 처단과 일진회 해산 등을 요구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향리에 압송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일본에 의해 조선이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비분함을 느끼며 을사 조약에 가담한 5적인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의 처단을 요구하고 아직 공관들이 떠난 것이 아니니 임금이 직접 조약이 무효라는 것을 선언하고 각 공관이 철수하기 전에 조약이 무효라는 성명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현실은 국제법이고 뭐고 힘이 없으면 무시당하는 시대였지만. 전국 각지에 의병 궐기 내용을 알리며 납세 거부, 기차 승차 및 철도 이용 거부, 일본 상품 불매, 을사 조약 가담자 5적 처단 운동과 의병 활동 및 항일 운동을 호소하며 74세의 노구를 이끌며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전라북도 순창에서 거병하고 정읍과 순창을 장악하는 등 한때 기세를 올리지만, 남원에서 교착 상태 와중 고종의 군대 해산 권고 칙지를 받고[5] 고심하던 도중 남원에서 맞서게 된 군대가 하필 대한제국군(진위대)이라서 동족과 싸울 수 없다고 하여 스스로 군대를 해산하고 투항했다. 결국 체포되어 제자인 임병찬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해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2.5. 단식 그리고 사망[편집]
쓰시마 섬에 유배를 왔던 그는 유배지에서 일본인이 밥을 주니 일본 식으로 머리를 깎으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왜놈이 주는 더러운 음식 따위에는 입에도 대지 않겠으며 차라리 깨끗이 굶어죽을 것을 선언하고 단식 운동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고종에게 단식에 관한 상소를 올렸는데, 이 때문에 최익현의 사망 원인이 최고령의 나이로 무리한 단식을 한 영향으로 인한 아사로 알려지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그의 죽음을 아사(餓死)로 처리했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돌고 있다.

이때 최익현과 함께 유배를 간 제자들도 모조리 단식하였으나 결국 일본 측에서 오해가 있었음을 알리고 머리를 안 깎아도 된다고 해서 죽을 먹기 시작했다. 단식한지 2일 만의 일이다. 이와 관련된 것은 이 시기 함께 유배갔으며 같이 단식하였던 임병찬의 대마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70노구에 가자마자 단식하면서 4개월을 버텼다는 이야기를 역사서를 쓴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때문에 4개월이 아니라 4일 ~ 7일만에 아사했다는 식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기록들마저 돌아다닌다.

그리고 3개월 후 풍토병에 걸려서 약 1개월간 투병하다가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쓰시마 섬을 떠나 부산으로 운구되어 충청남도 예산에 안장되었다. [6]

1914년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에 모덕사가 완공되었고, 영정은 여기에 마련되어있다. 사당 옆엔 그의 생가도 자리잡고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874년 제주도 유배 기간 중에 한라산에 오른 기행문 유한라산기가 1990년대 고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적이 있다. 그리고 1999학년도 대학 수학 능력 시험과 2009학년도 평가원 6월 모의 고사 언여 영역에서 수필 복합 문제로 출제되었고, 2015학년도 대학 수학 능력 시험 국어 B형에서도 정철의 관동별곡과 함께 수필 - 시가 복합 문제로 출제되었다.

3. 평가[편집]
3.1. 옹호[편집]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진정한 선비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천하의 대원군에 대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두 차례나 강하게 상소를 올려서 비판했으며 그중 두번째 상소는 고종을 고무시켜서 대원군의 실각을 유도했다. 최소한 부나 명예 따위를 위해 몸을 사리는 간신배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의병을 일으키는 등 행동력과 결단력을 갖췄으며 애국심이 투철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후에 독립 협회 비판만 해도 최익현이 유독 꼴통이었다기 보단 독립 협회가 너무 막나가서 처음엔 황국 협회를 습격하면서 독립 협회를 지켜주던 한양 백성들까지도 저것들 반역 도당 아니야?하고 당혹해할 정도로 거칠게 군 것이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일본이나 서양이나 조선의 재물을 노리는 도적일 뿐이라는 최익현 류의 위정 척사파들의 주장은 그들이 개혁에 전혀 반대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들어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김옥균 류의 개화파들은 일본을 뛰어난 스승 정도로만 보는 나이브함에 일본이 조선을 도적질하는 것을 본의아니게 돕기까지 했다.

3.2. 비판[편집]
강도 일본에게 국권이 피탈되던 시기에 의병으로서 우국충정을 다 한 열의는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최익현 그 자신이 틀 안에서 누리던 기득권을 위해 민생 정책과 근대화 정책에 사사건건 제동을 건 장본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상당수의 악질 유림들이 면세 특권을 악용해 사익을 축재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서원 철폐를 반대한 점은 그가 철저한 기득권의 옹호자였음을 보여주는 방증일 것이다.

선조 이후 수백년 간 이어져온 사림의 기득권을 타파하려는 흥선대원군에 제동을 건 것은 민생을 핑계삼아 지키려는 기득권일 뿐이다. 만약 그가 기득권의 핵심 인물인 사(士)가 아닌 신분제의 차별을 받던 중인이나 농공상에 속하는 가난한 농민 내지 천인이였다면 그의 행동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가 신분제를 폐지하는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을 극렬하게 반대하였던 것은 이미 최고의 위치에서 신분제의 모든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사림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저 의병 운동이라는 업적 하나로 무비판적으로 추앙받아야 할 대상은 아니다.

강직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가 역사에 순기능으로 남지 못했던 데에는 사상의 경직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종래에 국제법에 관심을 가졌던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이 또한 그가 개방적이었다고 변호하는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봉건적인 유림들의 사고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한 쪽에서는 백정 박성춘의 연설로 민권 신장의 센세이션이 열리고 있는데 여기다가 되려 상소를 올려 자유 민권 정신을 '패거리들의 작당' 정도로 폄하하는 등, 여러모로 격동하는 시대에 뒤쳐진 인물이었다.

단순히 개화파 반대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명분과 의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세력은 무조건 배척하고 반대했다. 고종(그리고 대원군) 때에 신원하려 했던 정도전, 윤휴 등의 복권을 목숨걸고 반대했던 이도 최익현이다. 이 역시 그의 사상적 경직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외세의 위험성을 일찍이 감지한 것도 폐쇄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부터 우러나온 막연한 거부감의 영향도 있는 초기 시절은 분명 높게 평가하기 어려우며[7] 최익현을 비롯한 위정 척사파의 주장처럼 그냥 문 닫고 있자는 거나 성리학이 융숭했던 조선 초기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사실 비현실적인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최익현을 격상시키고 카운터파트인 개화파를 막연히 '외세에 놀아난 위험한 모험주의자들'로 일반화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사실상 설득력이 없다고 봐야한다. 실제로 개화파의 흐름은 실로 다양했으며, 외세를 보는 관점 또한 그러했다. 파워 게임을 벌이는 열강들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자는 쪽의 온건한 입장도 분명 존재했으며, 외려 외세를 등에 업고 나라를 뒤엎으려는 김옥균류의 급진파들은 소수에 가까웠다. 애당초 개혁 세력의 생리적인 특성상 소수의 급진주의자들의 존재야 필연적인 것인데, 그 소수를 곧바로 개혁 세력의 정체성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비약 그 자체다.[8]

구한 말의 개화파들은 비록 그 시도들이 맥아리없이 좌절된 경우가 허다했다하더라도, 부국강병에 대한 비전과 세계사적 흐름에 부합하는 발전 방향을 제시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비록 구한 말의 병폐로 성리학이 과도한 비판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당시의 성리학은 시대적 흐름으로 볼 때 위기에 빠진 조선을 개혁하기에 적합한 사상은 아니었다. 후일 유교도 대한 제국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이때쯤 되면 유교는 주류 사상의 위치가 아니게 된다.[9]

3.3. 영향력[편집]

 

중, 고등학교 교과서만 펴놓고 보면 아무 권세가 없는 지방의 시끄러운 상소꾼 정도로 생각되겠지만, 그는 엄연히 위정척사파라는 한 정치 집단의 대표성을 띄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고향인 충청도는 물론이거니와 넓게는 기호 지방까지, 그가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수천 명의 유림들조차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한 상소조차 비단 최익현 개인이 아니라 당시 전통 질서와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던 보수적 선비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따라서 그 유명한 도끼 상소나 독립 협회에 대한 규탄이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실력 행사였던 셈.[10] 게다가 유림의 대표라는것 외에 실질적인 권세가 없는것도 아니었다. 최익현은 요직으로 들어가는 핵심 관문인 이조의 정랑을 역임했으며, 임금의 측근인 승지로 근무했던 엄연한 고위 관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