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쌍둥이 지구에는 제2의 '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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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2018. 12. 24.

- 오두의 역사산책 -

쌍둥이 지구에는 제2의 '나'가 있을까?

'나'가 2천2백만년 달려가면 '너'가 아닌 '나'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쌍둥이 지구(Earth's Twin)'를 발견했다는 뉴스가 화제다.

 

지구가 멸망하면 인류는 그곳으로 이주할 수 있을까?

지구의 물이 모두 마르면 그곳 쌍둥이 지구에서 물을 가져올 수 있을까?

쌍둥이 지구의 '인간'이 우리의 지구를 정복하는 일은 벌어질까?

 

이와같은 상상은 흔히 지금까지 공상과학에서 상상되어온 일이다.

좀더 새로운 상상을 해볼 수는 없을까?

 

혹여 그 머나먼 쌍둥이 지구는 또 다른 지구만이 아니라

그곳에는 또 다른 '나'가 존재하고 있다는 아바타 지구와 같은 '제2의 나'의

존재에 대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과학적 탐구의 우주는 무한한 신비의 베일을 벗어나가고 있다.

동시에 인간에게서 '나'에 대한 사유 또한 무한히 전개될 수 있다.

 

거시적 우주 과학만큼 '나'에 대한 마이크로 코스모스의 신비함도 

역사 철학적 사유적 새로운 담론을 제공한다. 

 

외계인은 물론 이제는 '외계의 지구' 존재 가능성이 더욱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슈퍼 지구'라는 이름까지 붙은 이번에 발견된 '쌍둥이 지구'는 지구에 사는 인류의 사유 체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우주 왕복선을 타고 2천2백만년을 가면 쌍둥이 지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제2의 나'를 만나는 길이 더 쉬울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빛으로도 6백광년 걸리는 곳이니 이번에 NASA가 발견했다는 '쌍둥이 지구'는 이미 6백광년 전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기에 지나가는 혜성에 부딪쳐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른다.

 

인류는 오랜 세월 지구 외에는 생명이 없다고 여겨왔다. 

특히 서구문명의 아담 이브의 지구 에덴동산의 창조주 개념은 지구 외에는 같은 고등 인간이 존재하지 않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점차 지구 외의 우주 어딘가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더 이상 낯선 주장이 아니게 되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의 케플러연구팀이 12월 5일 (2011년) 지구에서 약 6백광년 떨어진 곳에서 지구와 환경이 닮은 '쌍둥이 지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만큼 지구와 유사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이 별은 2009년부터 2년 동안 관찰한 끝에 ‘케플러-22b’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다만 캐플러-22b의 성분이 암석인지 가스인지 액체인지는 확인이 덜된 상태라는 것이다.

 

제프 마시 캘리포니아대 버클리분교(UC버클리) 교수는 이와같은 '쌍둥이 지구'의 발견에 대하여 “호모사피엔스가 집(지구)과 비슷한 별을 찾으러 우주로 나아가는 일"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더 명확한 확인이 필요하지만, 뜨겁지도 춥지도 않는 이른바 골디락 존(goldilocks zone)이 우주 저 멀리 존재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우주 저 멀리에 살만한 온기가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가 그곳 환경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생각을 가지게 한다.

 

'제2의 지구'에 더하여 '제2의 나'를 추적하는 사유체계에서 또 하나의 '나'가 존재하는 전혀 새로운 법칙과 그 실존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쌍둥이 지구는 '지구 2.0'이라는 별칭이 붙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에 있는 현생 인류가 직접 현장을 탐험하고 확인하기는 불가능한 곳이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걸리면 전혀 다른 '신기루'가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치고싶지는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머리털을 단 한번도 감지 않으면 머리카락에서 싹이나 어떤 신비한 열매를 맺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은 시간을 전제하는 상상이다. 

 

만일 사람이 2200만년 살 수 있다면 객관적인 자식이 아닌 자아로서의 '제2의 나'를 임신하여 출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바이블에서나 단군신화 동박삭 전설 등에서 인간은 수천 년 또는 수 만년을 산다고 믿어왔다. 그것은 신화적인 영생론의 희원일 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억겁이라는 것도 어쩌면 '쌍둥이 지구'와 같은 '광년'의 이야기와 같은 상상의 세상을 사유하는 철학적 의미의 하나였다.

 

쌍둥이 지구의 그 크기는 지구의 2.4배이며 평균 기온이 섭씨 22도라고 한다. 그곳 쌍둥이 지구의 태양은 우리의 태양보다 약간 작고 그 태양의 온도 또한 지구의 태양보다 낮다고 한다. 지구와 공전주기도 비슷한 290일인 쌍둥이 지구는 그 태양과의 거리가 우리의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보다 15% 짧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곳 태양의 온도가 약간 낮으면서도 빛의 양이 우리의 태양보다 25% 정도 적어 이곳 지구처럼 바다가 존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온도가 적절하다고 물이라는 성분이 별에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도 학설에 불과하다. 때로 지구의 물도 태양과의 거리로 생긴 것이 아니라 외계의 혜성이 싣고와 부딪쳐 남은 것이라는 학설도 있기 때문이다.  

 

 

 

Image

*참조: http://kepler.nasa.gov/Mission/discoveries/kepler22b/

 

*쌍둥이 지구(Earth's twin) 대조 그래픽.

 

 

말하자면 물이란 것은 우주의 다른 곳에서 옮겨올 수도 있고 여건이 같으면 거리가 다른 우주 공간 어디라도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문화기원론에도 등장하는 두 이론이기도 하다.

 

지구상의 종족들이 가지는 전통 문화는 유사한 것이 많다. 그 기원에서 같은 환경에서 동시발생적이라는 주장과 모든 문화는 전달된 문화라는 두 가지 이론이 존재한다. 물론 두 가지가 병존하기도 했다.

 

문화의 양태가 다른 지역과 전혀 연결석이 없더라도 유사한 또는 동일 문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을 산 속에 집어넣으면 거의 유사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분명한 것은 전달이 아니라도 같은 환경이라면 '물(바다)'이 생긴다고 이번에 발표했듯이 이러한 공식을 극한적으로 확대해보고싶은 생각이 든다.

 

즉, '나'가 태어나고 발생하게 된 지구의 환경 고향의 환경 부모의 환경과 유사한 환경이 있다면 그곳에서 '나'라는 존재가 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이 글의 주장의 핵심이다.

 

쌍둥이 지구에 또 다른 '나'가 그곳에 살고 있다면이라는 나의 가설은 그래서 '쌍둥이 나'라고 해두자. 쌍둥이 형제나 쌍둥이 자매가 아닌 '쌍둥이 나'라는 것에 전혀 새로운 철학적 접근이다.

 

이러한 나의 가설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보다 더욱 새로운 '또 다른 나 자신을 찾으라'는 것이 철학적인 주제에 더하여 과학적 탐험 담론이 되는 것이다.

 

쌍둥이 지구에 '쌍둥이 나'가 있다면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보통 말하는 쌍둥이는 그저 '나' 외의 함께 태어난 존재의 객관적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쌍둥이 나'라는 존재는 나의 의식과 나의 존재가 따로 그곳에서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실존적인 '병립되어 있는 나'를 상상하는 것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말하는 아바타는 일종의 몽유현상을 묘사한 것이다. 아바타가 활동하는 대신에 '나'는 잠들어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여 남가일몽과도 같은 꿈 이야기와 같은 것으로 쌍둥이가 아닌 나의 일부인 것이다.

 

꿈과 달리 몽유병과 같은 자신의 꿈이 현실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에서 몽유현상을 다루고 있는 것이 영화 아바타인 셈이다. 꿈과 아바타와의 관계에 대한 것은 필자의 <아바타>에 대한 영화비평으로 쓴 <신화이야기> 영화 '아바타(Avatar)', 느티나무와 우물의 신화학적 해석에서 볼 수 있다.

 

영화 속의 아바타가 아닌 '나' 자체가 이곳 지구에서도 심신을 움직이며 활동하고 사유하고 있는데도 동시에 그곳 멀리 쌍둥이 지구에도 '나'가 심신을 움직이며 동시에 활동하고 사유하는 그런 '차안피안(次岸彼岸) 쌍아병존(雙我竝存)' 말이다. 

 

몽유병이란 의식은 꿈을 꾸는데 몸은 꿈 따라 환경을 옮겨가며 움직이는 병적 증세를 말한다. 그것은 몸과 의식이 따로 노는 것으로 결코 심신 자체가 '쌍아병존'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곳 지구에 존재하는 '나'와 '쌍둥이 지구'에 존재하는 '나'가 서로 만날 때에 상대를 '너'로 느끼지 않고 각각 '나'로 인식하는 사유체계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론적인 것을 넘어 종교적 믿음은 가능하다. 

 

인류 문화에서 서로 만나지 않은 상태의 '두 나'에 대한 믿음이 존재해 왔다.

 

'두 나'는 서로 만날 수는 없고 서로 인식하지 못하는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은 현생의 '나'에 이어 사후의 세계에 '나'가 다시 존재한다고 믿는 종교적인 것은 결국 시차를 둔 '두 나'의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저 세상을 가보지 않았으면서도 저 세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어왔다. 저 세상(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에 '나'가 다시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죽으면 저 세상에서 다시 '제2의 나'의 생이 살아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나'의 직렬잇기 사유체계이다. 필자의 가설은 그것을 병렬잇기를 할 수 없는가 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쌍아병존'이라는 상상은 이 세상에 '나'가 살면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 같은 또 다른 이상향이 존재하고 그곳에서는 또 다른 '나'가 살고 있다는 상상이다. '쌍둥이 지구'에 대한 생각과 이승과 저승에 대한 사유체계를 '나'에 무시간적으로 적용시켜본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나와 너 또는 나와 그에 대하여서는 많은 상상을 해왔다. 그런데 나와 너에 대하여 '의견일치' 같은 것이 아닌 종교적인 나와 너의 일체에 대한 조금은 다른 개념을 바이블에서 볼 수 있다. 

 

흔히 내가 나와 너에 대한 개념에서 기독교 바이블에서는 "그날에는 내가 네 안에 있다"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엄격히 말하여 무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이 내 안에 강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뜻이었다. 그것은 '신과 너의 일체'이지 일반적인 나와 너의 일체 개념도 아니며 더구나 '나와 나의 병존'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우주에서 가장 신비한 것은 '나'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는 '나'를 탐구하기를 바라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의 출발과 그 종말 또는 부활 환생 영존 그 어떤 것이라도 객관적인 우주 시간과는 다른 주체적인 '나'에 대한 존재의 미스터리는 가장 어려운 과학이며 사유담론의 테제이다.

 

오랫동안 인류는 '지구는 영원한 곳'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은 오늘날 우주의 별똥별이나 혜성이 지구에 부딪쳐(deep impact) 지구가 깨져 사라질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도 멸망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은 모두 사라진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이 세상도 사라진다는 생각말이다. 그것은 나와 이 세상이 동시에 '신기루 현상'으로 여긴 상상이었다. 

 

내가 살아 있을 때만이 이 세상은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이긴 하지만, 그러한 상상을 반대하는 증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죽어서 내가 없는 이 세상은 그대로 계속 존재하는지 확인을 할 수 있는 과학적 증명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변하더라도 그것은 객관적 현상일 뿐이다. 주체적인 '나'의 현상은 나만이 해석이 가능한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남에게는 '나'는 그냥 객관적 존재인 '너'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나면서 '나'를 확인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나'가 죽으면 '나' 또한 이 세상의 객관적 세상과는 전혀 감지될 수 없는 존재의 '나'가 된다. 죽은 두의 나(그것이 영혼이든 영생의 실체이든)가 '나'가 죽어 없는 이 세상을 볼 수 있는지 그 확인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또 하나의 '나'는 저승에서 이승에 살아 있는 '나'를 지금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 나'의 이론으로 쌍둥이 지구에도 '제2의 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상상과 같은 이론이다. 저승은 이 세상과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환경일 수도 있다는 이론은 고대인류의 철학적 사유체계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승과 저승의 연결된 우주론이었다.

 

그것을 계승한 이론이 도가사상의 무릉도원 이상향이다. 이러한 이상향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저승 개념이다. 이러한 이승과 저승의 같은 우주환경으로 여기는 이와같은 전통 코스몰로지가 변한 것은 기독교와 불교의 '또 다른 우주(새하늘 새땅)' 개념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변이된 결과일 뿐이다.

 

옛사람들에게 저승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해 있었고 에덴동산 이야기나 손오공 이야기에서 보듯이 때로 그곳에서 이곳으로 쫓겨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다시 그곳 이상향-저승으로 찾아가는 것이 가나안이며 무릉도원이며 샹그릴라이며 엘도라도였다. 

 

그러다가 그러한 신천지 개념은 이 세상이 아닌 새로운 천지 특히 새로운 하늘을 강조하여 '하늘나라'라는 막연한 우주 밖의 초월적인 '저승론'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이 세상(땅)에 있는 것은 이상향이 아닌 땅 속의 감옥과도 같은 '지옥(地獄)'으로 표현된 것이다. 지옥개념은 이 세상에 대한 혐오와 실망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며 하늘나라-천국 개념은 애초의 지상에 있었던 이상향을 환상의 하늘 공간으로 이동시켜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산업혁명 이후 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연주의가 재등장하고 다시한번 자연애찬으로 인류는 눈을 돌리게 된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생명과 에코의 찬양이기도 했다. 그래서 죽어서 천당을 가고자 하는 것보다 이 세상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된 현상이 강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은 아직도 종교로 남아있기도 하지만, 인간이 죽으면 냉동시켜 차후 과학자들이 다시 살려낸다는 '믿음' 또한 다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들의 무덤쓰기에서도 나타나거니와 고대 이집트인들이나 아메리카 인디안들도 가졌던 미이라 처리로 장차 언젠가 환생한다고 믿은 것의 리바이벌이다.

 

이러한 논리를 지구에 대입하면 지구가 파멸되면 제2의 지구를 만들거나 제2의 지구에 가서 산다는 것이 된다.

 

내가 주장하는 제2의 나에 대한 가설은 '나의 환생' 또는 '나의 부활'이 하나의 '나'가 움직이는 변화현상이 아니라 이미 그림자처럼 또 하나의 '나'가 존재하여 그 '두 나'가 번갈아가며 옮겨가고 옮겨오는 환생 부활이라는 개념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것을 쌍아병존설이라고 해두겠다.  

 

쌍둥이 지구에 현생인류는 찾아갈 수 없는만큼 먼 거리에 우리가 사는 지구가 있다. 쌍둥이 지구의 발견이 발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천체망원경을 이용하여 발견한 것으로 과학적 '발견'이라 해도 상상에 가까운 발견일 수 밖에 없다. 특히 6백광년 전의 모습을 지금 보는 것이기 때문에 거의 신기루 현상을 본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 쌍둥이 지구는 존재했건 하건 실존적인 카테고리에서 파악을 했다는데서 지구 중심의 우주론 지구중심의 자아론은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6백광년 떨어져 있는 쌍둥이 지구는 현재의 우리의 지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지구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존재가 파악되기 때문이다. 다시 앞서 논한 '내가 없어지면 이 세상도 없어질 수 있다'는 명제에 대입해보면, 지구가 없어지면 쌍둥이 지구도 없어질지도 모른다.

 

'나'가 죽으면 '너'도 없어진다. '나'의 세계에서는 '너'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가 태어나기 전에는 역사와 우주가 존재했어도 그 우주는 '나' 없는 객관물일 뿐이다. 사실 그것이 있었는지에 진위 여부는 현재의 '나'가 존재하면서 논리적으로 추측하고 배우고 인식한 결과일 뿐이다.

 

'나'는 시한부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다른 영역에서 환생하거나 부활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영존하는 것일까?

 

이러한 '직렬잇기 나'에 대한 기대는 종교적 믿음 외에 아직 아무도 증명하지 못한 명제다. '천국' 또는 '저승'이라는 타계주의적인 종교적 관념은 '쌍둥이 지구'와 같은 또 다른 공간 우주개념의 '다음에 이어지는 기대'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시간적으로는 다른 공간적으로도 다른 곳으로서 '제2의 나'가 살 수 있다는 종교적 믿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죽으면 무(無)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제2의 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가 죽으면 '세상'은 그대로 존재해 남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가 죽은 뒤에 살아갈 미지의 저 세상에서 '제2의 나'가 살게 된다면 그 '제2의 나'는 그 전에 살던 이 '세상'에 대하여 '나 없는 공간과 시간'으로 바라보게 될까?

 

이러한 상상의 믿음은 사후의 세계라는 이름의 '제2의 지구'가 전제되는 면이 있다. 피안의 세계에서 영생불멸(immotality) 존재로 살아간다는 <도화원기(桃花源記)>의 무릉도원 개념은 이상향이 이곳이 아닌 그곳 즉 다른 곳에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제2의 지구'라는 인간의 장생불로 사상의 또 다른 연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같은 상상들은 이곳의 차안과 그곳의 피안이 서로 왕림 가능할 때만이 확인이 가능하다. 같은 논리로 '나'의 '백업(back-up)'은 살아있는 '제2의 나'가 병존하고 있어야만 확인이 가능하다.

 

이러한 상상적 사유에서 쌍둥이 지구 저편에는 '나의 백업(또는 왕래)을 위한 나'가 존재할 수 있지는 않을까? 아니 백업이 아니라 '쌍창(two windows)'으로 서로 각각 공존 병립하여 살아가는 것이 확인될 수는 없는 것일까?

 

'나'가 없는 이 세상을 저 세상에 있을 '나'가 확인하는 것은 왕래할 때만이 가능하다. 왕래한다는 것은 저 세상에 '나'가 이 세상의 '나'로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왕래한다면 '두 나'가 존재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논리는 가설상태이지만, 사유체계에서만은 새로운 가설을 던지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또 다른 우주의 크기를 재는 상상이 있었다. 

 

나는 '무한하다'라는 말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지구 밖의 밖을 또 나가면 또 밖이 존재한다는 그런 무한성은 어딘가 허술한 이론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 나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고체계가 가르쳐진 뒤에 그것은 결국 땅 위에 선을 그으면 또 그을 수 있고 또 그어 나가면 길고 길게 끝없이 그어나갈 수 있다는 허구가 우주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땅 위의 선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더라도 지구가 원형이라는 이론에서 이해가 되듯이 같은 방법으로 지구 밖으로 계속 직선을 그어 나가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또 다른 법칙으로 '직선의 구형 구조'에 대한 상상을 한 것이다. 

 

땅 위 지표에서 직선을 그으면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은 증명이 되어 있다. 그러나 입체적으로 정확히 직선을 긋는다해도 결국 이 우주는 '밖으로 나가는 직선'의 법칙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직선이라는 이론이 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상상을 했던 것이다.

 

결국 직선이 아닌 원형을 따라 돌아오는 선이 될 것이지만, 그 원형의 궤도를 벗어나는 진정한 직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그 진정한 직선은 오히려 '곡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나'와 '진정한 나'에 적용하면 그 '진정한 나'는 '나'가 아니고 '너'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와 '제2의 나'의 '쌍아병존'은 서로 교통할 수 없을 때는 종교적 상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로 교통될 수 있을 때는 얼마나 제한적일까?

 

<도화원기>에서 말하는 고향과 이상향의 왕복은 일회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상향에서 돌아왔다 다시 그곳을 마을 사람들과 찾아가보았으나 현장을 찾을 수 없었다" 또는 "돌아오니 본래의 고향은 오랜 세월로 변해서 폐허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직렬잇기에 초시간적인 적용에 공간적으로도 초월된 다른 환경체제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나'와 '제2의 나'의 교호가 단회적이라면 '남가일몽(南柯一夢)'과 같은 꿈의 한계에 머물 수 밖에 없다. 반면에 '나'와 '제2의 나'의 교호가 상시적이라면 그야말로 지구에서 '쌍둥이 지구'를 왕복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언제나 함께 다닐 수 있는 내 몸과 내 그림자의 관계만큼 가까울 수도 있다. 내가 다치면 항상 따라다니는 '내 그림자'가 나의 백업상태로 회복될 수 있는 때는 있을까? 이 세상은 빛의 세상이다. 동시에 그림자의 세상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학에서 창조는 빛으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림자도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은 '너'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이전에 먼저 '제2의 나'로 시작된 것이라는 많은 흔적이 있다. 

 

배꼽도 그 한 흔적이다.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것은 '어머니의 제2의 나'로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배꼽은 내 살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살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와 어머니는 서로 '나'가 있고 '너'로 보고 있다. '나' 대신에 '너'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너'란 분명히 '나'에서 분화된 것임이 분명하다.

 

쌍둥이 지구 발견으로 '쌍둥이 나'를 찾아 나서는 길은 어쩌면 머너먼 갤럭시 너머까지 갈 필요가 없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너' 각각이 사실은 '제2의 나'일 수 있다는 것에 더욱 깊이 천착해 들어가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뺀찌로 '너'자의 안으로 굽은 가지를 잡아 당겨 밖으로 당겨놓으면 '나'자가 되는 것만큼 어쩌면 우리는 '동시에 병존하는 나'를 찾아 서로 '너'에게 다가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날 '우리'를 발견하고 '나'가 아닌 '너와 나'의 '우리'가 가지는 '우리의 의식'이 더욱 분명한 제2의 자아로 보려는 것이 '범아일체'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일체우리'는 서로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제2의 나'가 우주 어딘가 또다른 '쌍둥이 지구'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상상은 오히려 '우리'가 아닌 '나'가 분화된 상태가 더 흥미롭고 이상적이게 느끼게 해준다. 

 

고향 마을을 키워 도시가 되는 것보다 고향과는 멀리 있는 무릉도원 이상향을 발견하고 그곳에서는 장생불노하는 '나'를 꿈꾸는 것은 그래서 현대 우주과학의 '쌍둥이 지구' 이상향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쌍둥이 지구를 찾아가면 이곳 지구는 사라진다. 실제로 사라지기보다는 돌아오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에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2의 나'를 찾아 아주 멀리 멀리 아니 깊이 깊이 사고해 들어가면 그것은 어쩌면 '너' 사라지고 '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원천적으로 확인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말은 그래서 '네 안에 내가 있다'는 바이블 귀절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즈음 드라마 속에 나오는 '내 안에 너 있다'는 것도 사실은 바이블을 흉내낸 것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제2의 나'라는 개념의 외연의 한 모습기도 하다.  

 

'나'를 찾아 억겁을 가면 그곳에 '너'가 있다면? 그것이 '나'임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릉도원에 사는 '불노장생하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고 그곳이 그들의 '고향'인줄 알고 사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제2의 나'를 찾고자 한 궁극에 도달한 것은 결국 '너'로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인 셈이다.

 

좀더 쉽고도 재미있게 대입한다면, 쌍둥이 지구에도 또 다른 한반도가 있다면? 그 쌍둥이 지구의 어느 깊이 숨어 있는 곳이 이 글을 읽는 귀하의 고향과 똑같이 생긴 곳이 있다면?

 

천국이나 저승 개념의 과학적 현실화가 옛사람들에게는 이상향으로 자주 고향과 함께 병존하고 있었다. 고향의 나르시수스라고 해도 될까.

 

그림자에는 빛이 직접 쪼이는 그늘의 단색 그림자가 있다. 또 다른, 그러면서 칼라 그림자가 숨어 있다는 것을 물 가에서 발견하는 것과 또 다른.. 제3의 그림자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제2의 나'일지도 모른다. 

 

 

'쌍둥이 지구'를 찾아 6백광년을 가면 오히려 다시 '지구'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너'를 찾아 억겁을 가면 '나'가 다시 깨어날지도 모른다.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면 마중 나오는 거울 속의 '나'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두 나'는 보기만 아니라 말까지 나눌 수 있는 그런 '쌍아병존' 말이다. 

 

로보트는 지금까지 '너'로 만들어 왔다. 대화하고 행동을 나누는 '너 로보트'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필자의 '쌍아병존론'은 로보트를 '나'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신비한 상상의 '나 로보트'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6백광년 뒤쯤..  

 

'나'와 '쌍둥이 나'는 지구와 멀리 '쌍둥이 지구'에서 서로 왕복하며 확인될 수 있는 날이 올까? 쌍둥이 지구 별은 천체 망원경 속에서만 볼 수 있다.

 

"저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이라는 노래말 가사는 아주 오랜 신화적인 시대의 '나'와 '내 별'이라는 쌍아병존의 의식을 전해주고 있다. (12/07/11 오두 김성규, 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odunamsan@hanmail.net)

 

 

  

 

 

 

출처 : 오두막 위에 서린 무지개  |  글쓴이 : 오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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