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알고 쓰자

맹꽁이 2019. 3. 13. 09:12

 

 한글 ― 한국어「세계5대언어」된다

[출처] : 파리 한인신문 [한위클리]에서

 

현재 지구상 언어는 6,912 종류가 있지만, 언어학자 데이비드 해리슨(David Harrison)에 따르면 기존 언어 중 90%가 2050년까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살아남을 언어와 어떤 언어가 새로 주도적 언어가 될지 궁금해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100년 후 살아남을 10대 주요 언어로는 6개 UN공용어(영어 ․ 아랍어 ․ 스페인어 ․ 러시아어 ․ 프랑스어) 외에 독일어 ․ 일본어 ․ 히브리어 ․ 그리고 한국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게다가 사용 인구 면에서 한국어는 2050년까지 5대 언어에 속할 전망이다.

 

한국어의 부상을 네 가지 측면에서 예측해 본다. 우선, 언어의 힘은 해당 국민의 생존력이 중요한 요소다. 한국 · 독일 · 일본 ·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통점 중 하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혹독한 전쟁과 같은 시련에서 살아남은 국가들이다. 독일과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패했음에도 여타 승전국들보다도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스라엘은 4차에 걸친 중동전과 수많은 국지전에서 아랍세계와 대결을 벌여 버텨온 국가다. 한국은 20세기에 일제 식민통치를 겪었고, 치열한 한국전쟁에서 패망하지 않고 살아남아 냉전의 최전방이라는 일촉즉발의 안보 상황에서도 민주화와 경제 성장의 두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기적의 나라로 불린다. 이런 생존력은 근면한 국민성을 갖게 만들었고, 근면정신은 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

 

언어의 힘은 해당 국민의 창의성에 바탕을 둔다. 국민이 창의적이어야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경제력에서 앞서가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의성이 바탕이 되어야 국제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을 지속할 수 있다. 독일 자동차산업, 일본의 소재산업, 이스라엘 정밀산업 그리고 한국 전자산업은 모두 세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들 국가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다.

 

또 언어는 문화적으로 친근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 즉 외국어로서 주도적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가 매력적이어야 한다.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 팝음악 인기가 영어를 친근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듯이 한류(韓流)라 칭하는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인기도를 보면 이 말이 증명된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아시아와 중동을 넘어 유럽과 북미에까지 수출되고 있고, K―POP이라 불리는 국제화한 대중가요는 유럽에서도 붐을 일으키고 있다. 골프 · 야구 · 피아노 · 바이올린 · 첼로 · 성악 등 음악계에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한글의 최대 강점은 최첨단 단순성(cutting―edge simplicity)에 있다. 한글은 글자 자체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어서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쉬운 글자로서 컴퓨터와 핸드폰 입력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글자다.

미국 언어학자 로버트 램지지(Robert Ramsey, 1942~ )는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세계에 없다. 세계의 알파벳이다"

라고 했고, 미국 여류작가 펄 벅(Pearl S. Buck, 1892∼1973)은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격찬했다.

 

이런 강점 덕분에 문자를 갖고 있지 않은 민족들의 언어를 표기하는 수단으로 한글이 쓰이고 있다. 그 예로 네팔 소수민족인 체팡족과 태국 라후족이 그들 고유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 된다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용 인구에 있어서 한국어는 2050년 안에 지나어 ․ 스페인어 ․ 영어, 그리고 아랍어에 이어 5위에 속하는 언어가 될 것이다. 즉 한국어는 향후 40년 내에 사용자 수에 있어서 독일어와 일본어는 물론 유엔 공용어인 프랑스어와 러시아어까지 추월할 것이라는 뜻이다.

 

최첨단 단순성을 강점으로 한 한국어는 세계인들로 하여금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호감을 이끌어 냄으로써 매력적인 외국어로 떠오르고 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으로서 한글은 반포된 지 600년 만에 세계 5대 언어로 자리매김할 날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1) 한글, 세계 문자올림픽에서 금메달

KBS 2012―10―10 보도

 

“역대 최고 문자를 뽑는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금메달을 받았다. 9일 세계문자학회 등에 따르면 지난 2012년 10월 1~4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2차 세계문자올림픽에서 한글이 1위에 올랐으며, 2위는 인도의 텔루구 문자, 3위는 영어 알파벳이 차지했다.”

 

(1) 세계문자올림픽

 

세계문자올림픽이란 세계의 창조 또는 개조 문자를 대상으로 가장 우수한 문자를 뽑는 행사다. 지난 2009년 10월 자국에서 창조한 문자를 가진 나라 16개국이 모여 문자의 우수성을 겨룬 데서 비롯됐다. 글자로도 ‘올림픽이 가능할까’ 라는 발상에서 시작된 문자의 우열을 가리는 세계 첫 공식대회였다. 국가가 개입하면 공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학자를 중심으로 민간 차원에서 대회가 열린다.

 

이번 대회에는 독일 · 스페인 · 포르투갈 · 그리스 · 인도 등 자국에서 창조한 문자를 쓰거나 타국 문자를 차용 · 개조해 쓰는 나라 27개국이 참가했다. 참가한 각국 학자들은 30여분씩 자국 고유문자의 우수성을 발표했으며, 심사는 미국 · 인도 · 수단 · 스리랑카 · 태국 · 포르투갈 등 6개국 심사위원이 맡았다. 평가 항목은 문자의 기원과 구조, 유형, 글자 수, 글자의 결합능력, 독립성 등이었으며 응용 및 개발 여지가 얼마나 있는지도 중요한 요소였다.

 

(2) 한글 최상위 입상

 

한글은 2009년 첫 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고, 이번 대회에서도 1위 금메달이었다. 1회 대회에서는 2위는 그리스, 3위는 이탈리아 문자 순이었다. 이번 대회 2위는 인도의 텔루구 문자, 3위는 영어 알파벳이 뽑혔다. 이번 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은 이양하 전 주 레바논 대사는

 

“문자는 언어와 달리 쉽게 변하지 않는 데다 이번 대회에 창조, 개조 문자까지 참가한 만큼 사실상 문자올림픽은 이번이 마지막”

 

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한글이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자라는 사실이 세계적으로 공인됐으며, 이는 더 나은 새로운 문자가 출현하지 않는 한 변함없는 사실로 남을 것이란 뜻이 되는 셈이다.

 

(3) 한글의 우수성 인정

 

한글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독창적인 문자다. 그러나 그 우수성은 단지 독창적이라는 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음성학적인 고찰을 바탕으로 발음에 따라 변하는 구강구조를 형상화한 문자로 매우 과학적이기 때문이다. 초성 중성 종성의 구조로 돼 있으므로, 문자가 24개에 불과하지만, 이론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소리가 거의 없다.

 

실제로 영어 알파벳 26자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는 300여개에 불과하지만 한글 24자로는 이론상 11,000 여개, 실제로 8,700 여개의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정보전달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 한글 발표자로 나섰던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는

"각국의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 발표자와 심사위원으로 나섰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 결과 한글이 최고라는 게 검증됐고,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보면 된다."

고 말했다.

 

이양하 집행위원장은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한 아프리카의 몇몇 국립대 교수가 문자가 없는 자국의 현실을 소개하며 한글을 보급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고 전했다.

 

대회에 참가한 각국의 학자들은 대회 마지막 날 〈방콕 선언문〉을 발표, 자국 대학에 한국어 전문학과와 한국어 단기반 등을 설치하는 등 한글 보급에 노력하겠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또한 이날 채택된 이 방콕 선언문은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나라들과 유네스코에 전달될 계획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한글의 우수성과 창의성에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낸다.

 

제2부 / 은혜를 원수로 갚는 왜족(矮族)

 

1) 어원(語源)으로 밝히는 우리 상고사(上古史)

―― 글 : 박병희 박사 ――

 

(1) 머리말

 

“허 이거 참 야단났군!”

“그러게 말이야. 이놈의 세상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건지, 한심스럽기만 하이…!”

우리 주변에서 이런 한탄의 소리가 예사롭게 들리게 된지 오래다.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오늘날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국사(韓國史)는 우리 민족의 장래를 짊어지고 갈 청소년들에게 이렇다 할만한 자랑거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마디 물어 보자.

 

“지금의 역사책은 과연 우리의 참 모습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일까?”

 

우리 역사책들이 사실을 누락시키고 있는 것이라면 잘못은 하루 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일제의 압정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넘어 갔건만 우리가 시급히 하여야 할 일은 아직도 많고 많다. 그런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우리 민족의 그릇된 상고사를 바로잡아 청소년들에게 민족의 긍지와 기개를 되 안겨 주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글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는 조상님들의 행적을 밝혀서 남겨두려는 지침을 정성으로 적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비춰주는 작은 등불이 된다면 그 보다 더한 보람은 없으리라. 여기서 한마디 덧붙여 둬야 하겠다.

 

내가 이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79년 가을이었다. 그러나 자그마치 5000년에 걸친 기나긴 우리 역사가 아니던가!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친 우리 조상의 발자취에 관한 이야기를 누가 보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고증을 일일이 보충하고 또 하다 보니 어느덧 18여년이란 시간이 흘러 1997년 겨울이 돼서야 겨우 탈고하게 됐다. 더구나 그렇게 힘들여 원고는 완성됐지만 나는 그때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처지여서 2000년 조국에 돌아올 때까지 출판을 의뢰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내가 작고하신 최봉열 선생님 소개로 한민족문화연구원 강동민 이사장을 만나게 됐다. 고 최봉열 선생님은 내가 일본어로 펴낸 〈박병식 일본고대사를 함()하다〉를 읽고, 일본 시마네현 마쓰에시(松江市)에 살던 나의 집을 몸소 찾아오실 정도로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에 몸과 마음을 불태우며 일생을 바치신 분이다.

 

강동민 이사장과의 만남은 문자 뜻 그대로 천행(天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강동민 이사장은 마침 그때,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가르치는 학교 당국자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쓴 〈어원으로 밝히는 우리 상고사〉에 “한사군은 대륙에 있었으며, 낙랑군은 현재 지나(支那)의 수도로 되어있는 북경 지역이었다”라고 기재돼 있는 것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한 강 이사장은 “두 말 할 것 없이, 이것을 출판합시다”라고 말해 줬다.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말해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본 론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민족의 상고사는, 오늘까지도, 검은 안개에 가려진 채, 오리무중(五里霧中) 속에 버려져 있는 딱한 형편에 놓여 있다. 바로 그러한 우리의 등한함이 원인이 되어, 일본은 오래 전부터 역사를 제 멋대로 왜곡해 왔으며, 최근에는 지나 사람들조차 그들 정부가 앞장서서「고구려는 지나 민족이 세운 나라였다」는 기막힌 망언을 서슴없이 하기 시작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저들의 국사교과서 내용마저 그렇게 고쳐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일본과 문헌에 남아 있는 우리 낱말 몇몇을 예시하여, 그 어원을 밝힘으로써 저들의 그러한 왜곡행위를 근원적으로 봉쇄하여, 다시는 그러한 망발을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데 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사학자들 사이에 오랜 고질이 되어온 중대한 오류도 차제에 시정하고자 한다.

가라(명사. 나라 이름). 〈가라〉는 문헌에 남아있는 우리민족 최초의 국호다. 이렇게 말하면 “그게 무슨 소리냐? 『삼국사기』에는, 우리나라를 처음 세운 분은 단군이며, 최초의 국호는 조선이라고 명기돼 있지 않은가!” 라고 항변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게다.

 

"해가 아름답게 비치는 나라(=朝鮮)."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깨달아야 할 점은, 『삼국사기』의 그러한 기록은, 지나(支那)의 사서(史書)에서 전재(轉載)된 것이며, 따라서, 조선이라는 국호는 수도의 이름 〈아사달〉을 한자(韓字)로 의역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순수한 우리말인 〈아사달〉은, “아작 달=아침 달”의 옛 형태로서, 〈아사〉는 “밝음 · 해가 비침”을 뜻하는 고어(古語)이며, 〈달〉은, “양달=햇빛이 비치는 밝은 땅”, “음달=그늘진 땅”등에 씌어진 〈달〉과 같이, “땅ㆍ곳ㆍ나라”를 뜻한다. 따라서 〈朝鮮〉은 「해가 아름답게 비치는 나라」라는 뜻으로, 〈아사달〉에서 유래되는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음달>이란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놓자. 우리말 사전에는, “음달은 원래 응달이라고 적는 게 옳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국어학자들이, 음()의 <ㅁ>소리는 <ㅇ>으로 바뀌기 쉬운 소리라는 소리바뀜 법칙(예: 골마지→골아지. 林檎=림금→능금. 매→왜)를 깨닫지 못한 탓에 저지른 잘못이다. 따라서, <응달>이 옳은 게 아니라, <음달(陰地)>이 옳은 표기다. 우리가 쓰고 있는 <양달(陽地)·<음달(陰地)>이란 낱말은, 한자와 우리말이 결합된 합성어다.

그건 그렇고, 〈아사달〉을 건국한 임금의 이름도 역시, 한자로 단군(檀君)이라고 표기하지만, 그것도 우리말 “밝은 달=밝은 땅=해 비치는 나라”의 변형인 <밝은 달→밝달→박달()>과, [임금(君)]을 의역하여 합성한 것으로서, <단군>은「해가 비치는 땅의 임금ㆍ해의 나라의 임금」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① "아사달=해가 비치는 나라"

 

이렇게 해서, 〈아사달〉=해가 비치는 나라ㆍ해의 나라, 즉 <밝달>이 우리민족 최초의 국호임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가라>가 처음 국호라는 것은 웬 소리냐?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은, 가라도 〈아사달〉과 마찬가지로, “해가 비치는 나라ㆍ해의 나라를 뜻하는 말이다” 하여야 할 텐데, 과연 가라가 그런 뜻을 지닌 말일까? 그것을 풀자면, 두어 가지 기초적인 소리바뀜 법칙을 알아야 한다. 우선 그 첫째는, 해(日·太陽)의 원형이 <하>라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은, 출가(出家)해서 중이 된 이후, 나이, 즉 연세(年歲)를 셀 때 <하>라고 하는데, 그때 쓰는 말인 <하>가 <해=>의 원형임을 확인함으로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 것=나의 물건」을 <내 해>라 하는데, 그 말에 쓰이는 <해=것>의 원형 역시 <하>임은 우리 말 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째로 밝혀야 할 소리바뀜 법칙은, <ㅎ>소리는 <ㄱ>소리로 바뀌기 쉽다는 법칙이다. 그와 같은 소리바뀜의 예로는, <왕()>을 뜻하는 우리 옛말은 원래 <가시하나>이지만, <가시가나>라고도 했으며, <지나게=지나도록>이라고 하는 말의 고어(古語)도 원래는 <지나히>라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가라=해가 비치는 나라 · 해의 나라>의 옛 꼴도, 원래는 <하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推定)하게 한다.

그리고 <하라>의 <라>는 <땅ㆍ나라>를 뜻하는 옛말이며, 고어(古語) <다라=높은 곳> <다라=들ㆍ들판> 따위에 쓰인 <라>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고증으로, 우리 민족의 첫 국호인 <가라>의 옛 꼴은 <하라>이며, 그 원래 뜻이 <해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① "아사달=해가 비치는 나라"

 

이렇게 되면, 당연히,「왜 우리 조상은, 나라 이름을 <하라=해의 나라>라고 했을까?」하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 물음에 대한 정답은,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스스로를 <태양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독특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집사람()을 <아내>, 자식을 <아이>라고 부르는 데, 그것들의 원형은 각각 <안해=집 안에 있는 해> · <아해=어린 해 · 아기 해>이다.

어디 그뿐인가? 현대 말로, 우리 스스로를 나타내는 칭호, 즉 일인칭은 <나>인데, 그 원형은 <라>다. 모든 사람이 다 알다시피, <라>는 이집트에서 태양신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즉, 우리는, 태양신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까닭에, 스스로를 <라(太陽神)>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연대가 내려옴에 따라서, <ㄹ> 소리를 <ㄴ> 소리로 바꿔 발음하는 <우랄―알타이>어족의 특성 때문에, 원래는 <라>이던 일인칭이, 지금은 <나>로 바뀌었다. 그러나 원형인 <라>는, 일본 쪽에 가까운 동해에 있는 오끼섬(隱岐島)의 사투리가 되어, 현재도 쓰이고 있어서, <라>→<나> 소리바뀜이 있었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일본어 사전을 뒤져보면, 일본 사람들도, 망요슈(萬葉集)가 편찬된 8세기까지는 일인칭으로 <나>를 쓰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② "해들이 사는 땅" = 일본

 

이러한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 조상님은, 「태양의 자손인 해들이 사는 땅」이란 뜻으로, 최초의 국호를 <하라→가라>라고 했던 게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라>를 한자로 <加羅>·<伽羅>·<迦羅>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8세기 초에 편찬 된 일본『古事記』와『日本書紀』에는 <가라>가, <加羅> 및 <>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봐서, 적어도 8세기까지는, <가라>라는 우리 국호가 일본열도에서도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우가야(上伽倻)가 신라에게 멸망당했던 주후 562년 이후까지도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을 통 털어서, 우리나라를 <가라=태양족이 사는 나라>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고대사연구]의 저자 이병도(李丙燾)는, 「가라는 변진(弁辰) 제국(諸國)이 낙동강 유역에 세운 부족국가다」라고 했는데, 일본의古事記)』와『日本書紀의 기록 하나만 봐도, 그것이, 상고사를 무시한 맹랑한 잘못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뿐인가! 이병도는 한 술 더 떠서 말하기를,「우리의 국호 <가라=태양족이 사는 나라>의 <가>는, 변두리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며,「<가라>는 강이나 해변에 자리한 나라를 뜻한다」는 망발을 해 놨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③ 조상을 더럽히는 일본(日本)

 

일본 사람들은, <가라>가 「태양족이 사는 나라」라는 사실을 모르면서도, 가라가미(韓神)를 황실의 시조라고 하며, 천황의 거처인 궁성 안에 모시고 있다. 일본 정부의 손으로 주후 927년에 편찬된 『연기식(延喜式)』이라는 문헌이 있다. 거기에는 그 책이 편찬될 당시, 일본 전국의 신사(神社)에 모셔진 신들을, 신격(神格)의 고하(高下)에 따라, 제사를 모셔야할 사람의 신분과 제사의 격식을 자세히 규정해 놓았다. 거기에 따르면, 가라가미(韓神)는 천황이 몸소 제주(祭主)가 되어,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제사를 받들어 모시도록 돼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근년에 이르러서는, 봄에 가라가미 제사를 지내는 날인 2월 11일을, 우리나라 개천절에 해당하는 건국기념일로 정하고, 국경일로 삼고 있다. 평소엔 우리민족을 말끝마다 서슴없이 경멸하는 저들인데,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들이 우리 가라가미(韓神, 한국의 신)를 그토록 떠받들지 않을 수 없을까? 그런 의혹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기사가, 2003년 6월23일자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의 보도에 나타났다. 전문을 인용한다.

 

"동경대학의학부 인류유전학교실 도꾸나가(德永勝士) 교수는 인간의 6번 염색체 내에 존재하는 'HLA 유전자군'을 이용한 인간유전자(게놈)를 비교 연구한 결과, 일본 본토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 한국인과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도꾸나가 교수는 일본인, 한국인, 중국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12개 민족(집단)을 비교> 결과, 일본 본토인은 오끼나와인이나 혹까이도(北海道)의 '아이누'족보다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가장 가까웠다고 밝혔다.

 

일본 본토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HLA 유전자 형태는 HLA―B52― HLA―DR2로, 북규슈지방에서 야마가다현(山形縣)에 이르기까지 12% 이상 존재했고, 몽골인에게서는 5∼8% 나타났다. 반면 HLA 유전자는 오끼나와인에게서는 2%, '아이누'족에게서는 1%에 그쳤다. 이런 연구결과는 그해 7월 동경대학출판부가 출간한 '공개강좌' 총서에 수록됐다.

 

한편 돗도리대학(鳥取大學) 의학부 이노우에다까오(井上貴央) 교수팀은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DNA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돗도리대 연구팀은 야요이시대 유적인 돗도리현 아오야가미(靑谷上) 절터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배열을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

연구팀은 야요이인 유골 29점 가운데 7점에서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한 뒤, 그 중 4점에서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배열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이들이 한국의 현대인 및 혼슈(本州)의 일본인과 동일한 그룹에 속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일본 사람들은 기원 770년 무렵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세월에 걸쳐 "일본열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열도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열도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아무 혈통관계가 없는 천손(天孫)이다"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유전학적 증거의 부상으로 그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은 더 이상 뻗칠 자리를 잃고 말았다. 때늦은 감은 있으나, 그네들은 좋건 싫건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한민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 따지고 보면 이런 사실은 저들이 늘 들먹이는 [古事記][日本書紀]를 비롯한 그들의 고문서들을 선입견 없는 눈으로 읽어왔던들, 진작부터 알 수 있었던 뻔한 일이었다.

 

 

④ 건국신화 들여다보기

 

우선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건국신화부터 들여다보자.

"하늘나라로부터 내려온 천손 '니니기노미꼬도' 일행은 가고시마현(鹿兒島縣) 노마반도(野間半島) 끝에 이르러 가사사노 미사끼(笠狹崎) 앞을 바로 지난 데에 있는 이곳은, 가라국(加羅國/伽倻國)를 향해 있을 뿐 아니라 아침 해가 찬란히 쬐고 석양빛도 아름답게 비쳐주는 곳이니 매우 좋다고 하며 그곳에 대궐을 지어 정착했다."

 

이 기록은 천손 '니니기노미꼬도'와 그 일행이 부모형제를 남기고 온 고향 가라(加羅/伽倻)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잘 표현한 대목이다. 더구나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을 가라구니다께(韓國岳)라고 이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황실은 고대로부터 궁중에 가라가미(韓神)를 받들어 모시고,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가라가미마쓰리(韓神祭)를 지내 오고 있다. 기원 927년에 당시 국무총리 격이었던 후지와라 다다히라(藤原忠平)가 편찬한 연희식(延喜式)에는 가라가미마쓰리(韓神祭)를 지낼 때 제상(祭床)에 올리는 제물의 종류와 제사의 절차가 자세히 기술돼 있으며, 근년에 와서는 가라가미마쓰리를 봄에 지내는 2월21일을 건국기념일로 제정해 놓고 황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축제를 지내고 있다.

 

천손이라고 하는 황실이 가라(加羅/伽倻)에서 온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라족]이 개척한 일본열도가 독립하여 자치령이 되어 스스로 '야마터(日本)'라고 일컫기 시작한 것은 기원 663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부터다.

 

'야마터(日本)'는 원래 위지(魏志)에 기록돼 있는 야마국(邪馬國)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경북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번영한 가라(加羅/伽倻)의 종주국 '우가야=上伽倻'를 지칭한다. 즉 자치령이 된 일본열도에 살게 된 그들은 저들이야말로 종주국 '우가야'를 계승하는 나라임을 내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요시다도고(吉田東伍)가 펴낸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의 국호론(國號論)과 명치 33년 정월에 발간된 '역사잡지' 제101편 1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❶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원래 한국인들이 일찍부터 써 온 것인데, 우리나라가 그 이름이 아름답기 때문에 국호로 정했다. (伴信友)

❷'일본'이라는 문자는 상고로부터 씌어 온 '히노모도'라는 말에 한자를 충당해서 쓴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름 그 자체는 삼한(三韓)사람들이 시작한 것이다. (星野恒)

❸'일본'이라는 국호는 원래 한국인들이 쓰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 국호 로 더욱 적당하기 때문에 만세불변의 호칭이 됐다. (木村正辭)

 

⑤ 독립 후부터 일본 국호

 

명치시대의 뛰어난 석학들이 입을 모아 증언하고 있듯이 '일본'이라는 이름은 한민족이 오래 전부터 써 왔는데, 백제의 속령(屬領)이었던 열도 사람들이 독립한 후부터 그것으로 국호를 삼았음을 알 수 있다.

'日本'이라고 한자로 쓴 이름은 열도 사람들이 독립한 때에는 '야마터'라고 읽었었는데 근세에 한자음으로 읽게 되면서부터 우리말로 '일본'이라고 읽게 됐으므로, 그것을 소리바꿈한 '닙뽕'이라 혹은 '니홍'이라고 발음하는데, 기가 죽었던 패전 후에는 ‘니홍’이라 하더니 기가 세진 지금은 ‘님뽕’이라고 부른다.

 

 

2) 오나라(吳國)를 세운 '연오랑(延烏郞)'

―― 글 : 박병식 박사 ――

 

일본 천황가의 비사(秘史)를 이야기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날 일본민족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인이 우리와 같은 피를 지니는 한겨레라는 사실부터 밝혀둘 필요가 있다.

태고시기의 우리민족은 "태양을 조상이라고 우러러 모시는 태양신앙족"이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스스로 가라(伽羅)=가야(伽倻)족이라고 자부했었다. ‘가라’란 우리의 고어로 '태양'이란 뜻인데, 그 어원은 '하라=태양족'이고,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ㅎ→ㄱ 자음변화를 일으킨 탓으로 '하라→가라'로 소리바꿈 됐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천황이 스스로 제주(祭主)가 되어, '가라가미(韓神)'를 일 년에 봄가을 두 번 봉사(奉祀)하고 있는 사실로 입증되며, 춘계 제삿날인 2월 11일은 건국기념일(우리나라 개천절)로 제정되어있다.

 

(1) 초대 천황이 된 수로왕(首露王)의 후손

 

황국주의사상에 흠뻑 빠져 있는 일본학자의 대부분은, 지금도 "일본 황실은 초대 진무천황(神武天皇)으로부터 현재 재위중인 제125대 헤이세이천황(平成天皇)에 이르기까지 같은 혈통으로 이어왔다."고 거짓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허언(虛言)에 불과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초대천황이 된 사람은, 말기(末期) 아라가야(下伽倻) 수로왕의 칠대 후손이다. 김해 김씨의 족보에 의하면, 시조 수로왕에게는 본디 아들 열이 있었다. 그의 왕후는, 태국 중부에서 번영했던 태양왕조국 '아유타야(ayuttaya)에서 시집 온 허씨였다. 그녀가 낳은 열 아들 가운데서 집권한 아들들은 태양숭배를 국시(國是)로 삼았다. 그러나 일곱 동생들은, 백제로부터 파급되어 온 곰 신앙사상에 물들어 태양숭배사상을 고집하는 형들을 뒤에 남기고 일본 규슈의 남부지방으로 이주하여 일곱 곰의 마을(七熊里)을 만들어 그곳에 정착했다. 나중에 초대천황으로 즉위한 것은, 그들 일곱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일본역사 학자들은 그를 '오진덴노(應神天皇)라고 기록해 뒀는데, 제15대 '오진덴노의 즉위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주후 420년경인 것으로 짐작된다. 실존하지 않는 인물을 진무덴노라는 이름으로 등장시킨 일본학자들은, 제15대 '오진덴노에 이르기까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진무덴노로부터 제14대까지의 유령천황을 채워 놓지 않을 수 없었다.

 

(2) '오오꾸니누시노미꼬도(大國主命)는 연오랑

 

고려시대 중 일연(一然)이 편찬해 놓은 《삼국유사》에, 대략 다음과 같은 글이 남겨져 있다.

 

"제팔대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에 동해변에 살던 연오랑(延烏郞)이라는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 지역 임금이 됐다."

 

아달라왕 4년은 주후157년에 해당된다. 그리고 '연오랑'의 '연'은 포항 근처에 있는 '연일(延日)'이라는 고을 이름을 줄여서 표시한 것이며, 그곳은 바로 오()씨의 본관이 있는 곳이며, '연오랑'의 '랑'은 젊은 남자를 일컫는 말임이 분명하다. 연오랑이 세웠다는 오나라(吳國)은, 일본역사에 오꾸니(大國)라고 적혀있으며, 왕이 됐다는 '연오랑'은, '오꾸니누시노미꼬도(大國主命)라고 기록돼 있는데 그들이 지배하고 있던 지방은 지금의 시마네현(島根縣)지역이다. '연오랑'이 동해를 건너갔을 당시의 일본열도는, 가라족(태양숭배족)과 고구려의 전신(前身)인 '오로족'이 살고 있었으나, 곰신앙족으로 전향한 수로왕의 후손에게 정복당하고 있었다.

'오오꾸니누시노미꼬도(大國主命)라고 불렸던 '연오랑'의 후손도, 해군을 이끌고 시마네 현의 이즈모시의 이나사노하마(稻佐の浜)에 기습 상륙한 김수로왕의 후손에게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덧붙인다.

 

 

3) 일본어 뿌리는 한국어

―― 양심 있는 일본학자 모두 인정 ――

 

일본말의 뿌리가 한국말에 있다는 사실을 어원분석으로 규명한 책이 나왔다. 한국의 천재 언어학자 박병식(朴炳植, 1928~2009) 박사가 일본어로 출판한 [야마도말 어원사전(ヤマト言葉語原辭典, Banary 出版, 신국판 952면, 2001. 3. 13.)]이 양심 있는 일본 학자들의 양심을 두드리고 있다. 일본인들은 그 동안 드러내 놓고 말하진 않지만 고분 발굴 등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천황을 비롯한 자신들의 조상과 한반도의 관련성을 '몹쓸 비밀'처럼 애써 감춰왔다. [야마도말 어원사전]은 이런 풍토에 일침을 가한 셈이다.

 

(1) 《야마도말 어원사전》

 

일본은 주후 670년부터 '일본(日本)'이라는 한자를 국호로 삼았는데 그 당시는 이를 '닙뽕'으로 읽지 않고 '야마터'라 발음했다. 그런데 이 ‘야마터’는 바로 경북 고령지방의 '위지'에 적혀 있는 야마국(邪馬), 즉 가야의 이름이라는 것이 박 씨의 주장(의 당시 발음은 '야')이다. 이는 고대 일본열도를 개척해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가야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얘기다.

박씨는 "일본말이 '마' 소리를 즐겨 쓰는 것처럼 경상도 사투리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를 경상도에서는 '그래도 마', '게도', '게도마' 따위로 쓰는 것을 일본에서는 '게레도모' '게도(けど)' '게도모(けども)'라 하는 것도 전형적인 예라는 것이다.

 

의성어와 의태어에서는 이것이 더욱 명확해진다.

 

슬슬‗스루스루‗するする)

졸졸‗조로조로‗ぞろぞろ),

무서움에 떠는 벌벌‗부루부루‗ぶるぶる)

키가 크는 모습인 쑥쑥‗스쿠스쿠‗すくすく)

등 셀 수 없이 많다.

 

일본어로 출간된 '야마도말 어원사전'을 읽은 일본 동경대학 은퇴교수 가도 에이찌(加藤榮一, 1932―)는 최근 일본 세계일보에 박 박사의 주장이 옳다는, 일본인으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현대 일본어는 많은 한자어와 영어 등 외래어가 포함돼 있지만 그 근본은 〈야마도 말〉이라며 '야마도 말이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물음은 곧 '일본사람이 어디서 왔는가' 라는 질문이라고 못박았다…. "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내놓은 어원에 대한 학설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며

"어떤 이는 히말라야 지방에서 쓰는 레프챠어()가 일본어의 어원이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는 인도에서 쓰이는 타밀어에서 어원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문외한들의 짓이다." 라고 힐난했다.

 

그 이유로 그는 피차 왕래도 없던 멀리 떨어진 곳의 언어일 뿐 아니라 학자들이 예로 든 일본어와의 대응관계도 전혀 규칙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양식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위험하니 어원과 여성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라' 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가도 씨는 특히 비교적 과학적 접근을 했다는 무라야마 시찌로(村山七郞) 마저도 한국어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큰 집〉이고 일본은 〈작은 집〉이라는 시각에서 한ㆍ일간의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배워야 한다."

 

이렇게 일본 국민에게 주문했다. 미국 사람들이 영국의 〈작은 집〉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일본 사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까이(東海)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하야시 다께히꼬(林建彦)도

 

"한ㆍ일 두 민족이 형제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며 "일본 학계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모자를 벗고 완전히 항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박병식 씨는 일본 도까이대학 일본문학부 연구원과 시네마대학에서 한일 고대사와 국제문화론을 강의했다. 일어 저서로서 〈지금 가야족은 슬프다〉, 〈일본어의 비극〉 등 27권이 있다.


(2) 일본말 바탕은 경상도 사투리

 

한국인과 일본인은 둘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生死不二)라고 하는 불교적 불이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요, 또 사해동포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대체로 핏줄이 같다는 뜻이다. 지금도 동해안 어디쯤에서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해류와 바람이 저절로 일본 중서부 어디쯤에 가 닿게 해준다. 동해의 해류는 북쪽 오호츠크로부터 남하해 동해안 쪽으로 서진하다 대한해협 부근에서 일본 중서부로 둥글게 돌아가는 타원형을 그리기 때문이다. 남해안에서 일본에 가는 것은 폭풍우만 치지 않는다면 식은 죽 먹기다.

 

아득한 그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남방에서 일본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항해술이 많은 사람을 실어 날랐으리라고 보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박병식 씨는 일제 강점기에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일본인보다 일본말을 더 잘했고 해방 후 월남 직전 성진의전(醫專)재학시절에는 독일어나 라틴어ㆍ지나(支那)어ㆍ프랑스어도 익힐 만큼 어학을 좋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늘 의식 속에는 “일본말과 한국말은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잠재해 있었다고 한다.

 

“그래, 과거는 훌훌 털고 젊을 때부터 좋아하던 어학 그 중에서도 일본어 연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자.”

 

이것이 당시 그의 심경이었다는 것이다.

뉴욕의 후미진 동네에서 세운 그의 뜻과 하루 17시간씩 공부에 매달린 실천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1984년 첫 번째 일어로 저술한 “지금 가야족은 슬프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그는 26권의 책을 일어로 냈다. 특히 86년 낸 두 번째 책 “야마도말의 기원과 고대 조선어”는 한일 두 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말을 비교하여 두 나라의 말소리에는 일정한 소리변화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해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5만자의 한자음을 일일이 추적 비교한 이 연구는 학계에서도 상상 못한 독창적 성과였다.

 

예컨대 우리는 한자 한(韓ㆍ寒ㆍ汗)을 ‘한’으로 읽는 데 비해 일본에서는 이를 다 ‘간’으로 읽는다. 그런 식으로 일본의 모든 말에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언어가 건너가면서 변화되는 법칙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또 전기(前記)한 야마도 건국 사실 등에 주목해 일본의 [古事記]ㆍ[日本書紀]를 중심으로 일본 고대사 연구도 병행해 [萬葉集]등 그들의 책에 들어있는 암호와 다름없는 글귀들을 풀어냈다. 예를 들어 [日本書紀]에 있는

 

摩比羅矩都能 (마비라구도능)

俱例豆例 (구례두례)

於能弊陀 (어능폐타)…

 

라는 구절은 일본학자는 아무도 무슨 뜻인 줄 몰랐는데 그가 해독했다. 위의 글은 일본인이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말하자면 일본식 이두로, 그 뜻은

 

(백제가 망하니까) ‘마(이제) 비락 뜨는(비렁뱅이를 하러 떠나는) 구례(지금의 구례로 섬진강을 통로로 일본과 백제가 교류했기 때문에 백제 사람을 지칭한 말)들이 오는 해(年)다.

 

라는 것을 밝히니까 일본학자들이 입만 벌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로 박 씨는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는 우리말과 일본말이 같았다고 확신한다. 현재의 일본말은 그 후 교류의 단절로 인해 나름대로의 변화가 가속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야마도말의 기원과 고대조선어〉가 발간되자 일본인들로부터

‘그러다 칼침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협박도 받았다고 한다. 또 밤 12시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려 받으면 아무 말도 없이 끊어지곤 하는 위협이 3년이나 계속됐다는 것이다. 그러다 그의 책이 계속 나오면서 과학적으로 일본인들을 설득하니까 위협은 없어지고 지금은 오히려 고정 독자가 많이 생겨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런 팬들 중에는 그에게 연구비를 많으면 1백만 엔(1,500만 원 이상)이나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고, 가난한 이는 농산물 따위를 부쳐주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어느 해엔가는 계속되는 일본 내에서의 강연 때문에 목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찾았더니 그를 알아본 의사가 수술, 입원비와 약값 일체를 무료로 해주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 치료비가 부담돼 한국에 와서 수술을 받을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우리(日本) 학자들도 캐내지 못한 우리말의 뿌리를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게 그 의사의 말이었다. 또 일본 사회당의 어느 국회의원은 그의 글에 매료돼 그가 월남할 때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43년 만에 평양에서 만날 수 있게 주선하기도 했다.

 

그의 소망은 한국말과 일본말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일본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모두 그의 연구를 긍정하면서도 공적 장소에서는 입을 다무는 것은 학자적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과 성과를 인정해야 그 다음 단계의 양국 간 연구로 발전이 될 텐데 왜 그렇게 ‘속 좁은 태도’를 보이는지 안타깝다 했다.

 

그의 책을 읽은 이름 모를 많은 일본인들 중에는

“제가 전에는 반한파(反韓派)였는데 이제 친한파(親韓派)가 됐습니다.”

라는 대범함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는 것에 비춰보면 더욱 일본학계가 섭섭하다고 했다.

 

그러나 히로시마대가 그에게 자극받아 ‘한국어’를 정규과목으로 채택한데 대해서는 고마움을 표했다. 우리말이 건너가 일본말이 됐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문화적 우위를 나타내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한일 친선은 결국 문화적 교류에 바탕을 둔 상호 이해일 수밖에 없다.

박 씨는 최근 22년간의 연구를 집약한 《야마도말 어원사전》이라는 책은 그의 다른 모든 책처럼 일본어로 펴냈다. 일본 출판사가 ‘왜 일본말의 뿌리를 한국사람에게 배워야 하느냐”는 속내를 비추며 출판을 거절해 한국의 출판사에서 발간했다. 이 사전이 일본학계에서 검토되면 현재 일본어사전에 실린 어원 설명은 99%를 고쳐야 할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앞서도 예를 들었지만, 일본사전에 쓸데없는 짓이라는 뜻의 ‘겐모 호로로(けんもほろろ)’가 있는데 그 어원을 ‘꿩의 울음소리를 의성한 것으로 꿩 울음처럼 쓸데없는 짓을 말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식으로 설명했지만 이것도 경상도 말 ‘건 머 하러러(건 머하러―그건 뭐하러 하나)’에서 왔다는 것이다.

 

박씨는 79년 뉴욕에 건너가 일본에서 체류한 5년을 빼고는 쭉 거기서 살다 최근 영구 귀국했다. 그의 일본어 어원 연구는 그 자체 학문적으로 평가받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그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은 인간의 패기와 집념이다. 그는 ‘중학시절 60세가 넘은 분이 입학해 그 후 대학까지 마치는 것을 봤다’고 했다. 뜻을 세우는 건 정말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중앙일보] 2001년 5월 7일 字, [월요기획], ‘이헌익의 人物 오디세이’에서 수정.

 

(3) "일본인의 피 속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 유전학적으로 일본 본토인이 한국인과 가장 가깝다. (박병식) ―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은 천황을 둘러싸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인과 고급관료들이 창작한 황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네들은 거의 무력화한 황실을 등에 업고, 황실의 충실한 보호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이어 오는 천황가(天皇家)를 지키기 위해선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국민들을 교육시켰고, 그런 미명 아래 막강한 군부독재 정권을 수립 한국을 병탐,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해 왔다.

(4) 아직도 일본은 황국사관(皇國史觀)

 

다행히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민주주의 사상이 일본에 상륙해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자 양심적인 일본학자들로부터 황국사관에 물든 교육이 결코 옳지 않다는 소리가 나오게 되면서, 많은 일본 사람들이 일본민족의 참다운 뿌리를 찾는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 결과 요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한민족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게끔 되었으나, 아직도 황국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이 실정이다.

(5) 일본열도의 원주민들

 

 

 오늘날 '일본열도'라고 부르고 있는 섬들은 지금으로부터 1만년∼1만2천 년 전 [순다랜드(subdaland)] 시절까지만 해도, 북으로는 사할린의 북단인 옛 '소비에트연방의 아무르강' 하구

순다랜드(sundaland)시절의 아시아 지도. 붉은 색은 당시 육지

 

부근에서 대륙과 붙어 있었고, 남쪽은 북규슈와 한반도 남단이 연결된 '대륙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지질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진 지 오래다. (그림 참조).

 

인류의 발상지가 어디였는지 아직 확실한 정설은 없으나, 서양인들은 인류 최고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방, 즉 '이라크'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유역에서 시작됐으리란 것이 정설처럼 여긴다. 그 지역에서 원시 문명생활을 하던 고대인들은 바벨탑 언어혼란으로 더 이상 한 곳에 머물 수 없게 되자 동서로 대이동을 시작,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서양인의 조상이 됐고, 동쪽으로 온 무리는 동양인의 선조가 됐다는 것이 인류학자들의 지금까지의 견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여러 가지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이 학설은 수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하시로 한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본다. 벼농사는 세계 처음으로 우리 민족이 시작했다.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59톨의 볍씨가 출토 되었는데,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결과 1만5000년 전후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까지 지나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1만 2000년)보다 약 3000년이나 앞선 볍씨다. 지나의 쌀농사보다 더 앞선 것이다. 쌀 농사는 한국에서 시작 지나, 세계 각 곳으로 전파된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온 무리 가운데에는 '바이칼호' 부근에서 오래 살다가 '시베리아'를 거쳐 일본열도의 5배만큼이나 넓은 분지였던 '베링해'를 지나 '알래스카'로 넘어가서 계속 남하, 남미대륙까지 도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무식한 콜럼버스가 명명한 '아메리칸 원주민'의 선조요 우리의 피붙이다. 한편 어떤 무리는 그곳까지 가지 않고 도중에서 '사할린'을 거쳐 지금의 일본열도에 이르러 거기에 정착했다. 이들이야말로 일본열도의 주인의 일부가 된 북방계 원주민이다.

 

몽골지방을 거쳐 지나대륙의 동북지역에 정착한 무리들과 지나 서부의 삼위지역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이동해 온 무리들 가운데 한반도를 따라 남하, 북규슈를 거쳐 일본열도의 중앙부로 동북진한 부족들도 있었으니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남방계 원주민이라고 부른다.

남미의 멕시코에서 '마야문명'을 꽃피우고, 페루에서, 신비스러운 '잉카문명'을 남긴 민족들 모두 다가 그랬듯이 일본열도에 정착한 이들 원주민들도 태양을 숭배하는 우리 민족들이었다.

 

(6) 일본 고대 '죠몽토기' 한국의 '빗살무늬토기'와 비슷

 

'죠몽토기(縄文土器)'란 토기에 새끼줄로 무늬를 만든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일본학자들이 일컫는 말인데, 그런 토기와 거의 비슷한 무늬의 토기를 우리 고고학자들은 '빗살무늬토기' 라고 부르고 있다. 이름이야 뭐라 하던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발해연안을 비롯한 지나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 토기의 무늬와 일본열도에서 발굴된 토기의 무늬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은 그것을 제작한 사람들이 같은 문화를 지녔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열도에서 이와 같은 초기토기를 만든 사람들은 오늘날 '아이누'라고 불리는 북방계 원주민과 키가 아주 작아 왜인(矮人)이라고 부르는 남방계 원주민이 있다. 훗날 일본열도의 주인공이 된 왜인들은 '승문토기'를 일찍이 '아이누식 토기'라고 불렀다. 오늘날 일본인 스스로 '아이누'라고 부르는 이 부족은 극히 적은 수의 후손들이 사할린과 북해도 지방에서 오랜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는데 그들이 처음부터 북해도 이북지방에서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근세에 와서 왜인들에게 쫓겨서 그곳으로 몰려간 것이다. 지금도 그들 '아이누족' 사이에는 왜인에게 빼앗긴 일본열도의 동북지방 땅을 되찾아 '아이누 독립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격렬파가 있다고 전한다.

 

(7) 아이누 말과 한국말의 연관성

그런데 이 '아이누'라고 하는 말의 원형은 '태양의 자손'인데, 소리바꿈을 거쳐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다. 즉 그들 역시 태양숭배족이며 '아리안' 민족의 일파인 것을 알 수 있다. 사할린이 아무르강/흑룡강 하구지역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기, '아무르강/흑룡강' 유역에서 살고 있던 우리 조상들이 '사할린'으로 이동해 왔으리라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논리다. 아니 무엇보다도 '사할린'이란 지명은 '사하라→사벌=사벌'과 똑같은 발상에서 만들어진 이름 아닌가.

 

더구나 지금도 연해주의 '아무르강=흑룡강' 하구지역에는 '계림(鷄林)'이란 조선족 마을이 있다 하고 러시아 혁명 초기에 이곳에서 조직된 조선족의 유격대 이름이 '사할린대대'였다고 한다. '계림'이란 것은 '신라=사벌(沙伐)'의 별명이다. 먼 훗날, 왜인들이 섬이 되어 버린 사할린에 온 우리 선조는 이곳 이름을 '가라하터'라고 지었다. 가라 하터란 것은 '가라=가야'의 '하터=가장자리=끝나는 터'라는 뜻인데, 후대 일본사람들은 이것을 '가라후도'라고 표기하게 됐다. 어원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 현대 일본학자 중에는 '이 섬에 당()나라 사람이 건너와서 장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가라(唐) 히도()라고 하였던 것이 변해 가라후도라고 하게 된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된다.

 

'가라히도=당인(唐人)'가 가라후도로 둔갑했다는 설명은 웃음거리는 될망정 옳은 말일 수는 없다. 더구나 당나라를 '가라'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사람들뿐이지, 지나사람들 자신이 '가라'라고 한 일은 한 번도 없으니 '가라'는 '가라=가야'일 수밖에 없다. 일본 역사에서 '가라'는 '가야'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남방계 원주민인 왜인과 '아이누'는 먼 조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인데 '아이누'는 일본열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서양화한 무리들과 같은 신체적 변화를 거치면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남방계 원주민의 그것과 많은 차이를 가지게 되어 서로가 같은 종족이란 의식은 전혀 느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본열도 안의 우리 민족은 이들 '아이누족'을 포함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민족과 같은 시기에 같은 무늬의 토기를 생산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그토록 변화해 버린 '아이누' 언어 속에서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어휘가 우리말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원주민이 일본열도에 넘어온 것은 이곳이 아직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던 때이며, 그것은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2만∼3만 년 전이었으리라고 일본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전제할 때, 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고 나서 약 만년이 지난 즈음부터 지구의 온난화가 시작, 그때까지 육지였던 곳이 바다로 변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지구해빙기의 침수현상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고, 일본학자들은 이 시기를 '승문해진기(縄文海進期)' 라고 부른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일본열도가 지금 같은 섬이 된 것은 약 1만 2천 년 전이라지만 바닷물이 하루아침에 불어나서 육지를 물로 덮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니, 세월이 지날수록 조금씩 물속으로 가라앉아 가는 땅을 보며 사람들은 중대한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리라.



(8) 왜인(矮人)의 작은 키는 식량부족 때문

 

빙산들이 녹아 '땅이 자꾸만 물에 잠겨 가는데, 앞으로 물줄기의 저편에서 살아야 좋을까. 아니면 이쪽에서 사는 것이 나을까.' 일가친척이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질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그들은 어느 쪽에 살기로 결정한다 해도,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보고 있는 물줄기가 지금처럼 큰 해협이 되어 서로의 왕래를 불가능하게 만들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렸으므로 저들이 이렇게 될 줄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처음에는 징검다리를 놓고 넘나들 수 있었겠지만 어느새 물은 깊어지고, 수폭이 넓어지더니 건너편 집들이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하여 헤어지게 된 친척이나 친구의 소식이 끊어지고, 세월 따라 망각의 언덕을 넘은 지도 몇 천 년이 지났다.

 

'승문해진기'라고 불리는 때, 지금으로부터 6천5백∼5천5백 년 전의 관동평야와 5천∼4천 년 전의 '오사까' 평야의 해면 꼭대기 고도는 현재의 해면보다 5m 가량 더 높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면적이 지금보다 훨씬 좁았던 일본열도에 살게 되었던 원주민은 말할 것도 없고, 쌀을 외국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식량 확보가 어려웠던 시기의 일본사람의 키는 한반도의 우리보다 약 10cm 이상 작았다. 그것은 섬사람이 되어 버린 이들은 아직도 수렵으로 생활하는 불안정한 시기에 있었고, 식량공급이 불안한 상태의 좁은 지역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되면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신장이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나는 자연의 섭리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4) 일본어와 한국어

 

(1) [日本語와 朝鮮語의 比較硏究]

 

일찍이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외교관 윌리엄 G. 아스톤(William G. Aston, 1841―1911)은 일본 외교관 생활 25년 중, 한때 조선영사를 지내며 양국어를 비교 연구하였는데, 1869년에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日本語文法]을 저술하였고, 1879년에는 [日本語와 朝鮮語의 比較硏究] 란 책을 저술하여 일본인들을 놀라게 한바 있다. 이에 놀라고 자극을 받은 일본인 학자들은 앞을 다투어 양국어 비교연구에 열을 올렸고,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 언어학자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 1872―1967)는 1910년 [日韓兩國語同系論]을 저술하였고, 이어서 [日鮮同祖論]까지 낸바 있다.

 

여기서는 한국의 천재 언어학자 박병식(朴炳植) 박사의 명저[야마도 말 어원사전(ヤマト言葉語原辭典)]에서, 의성어(擬聲語)와 의태어(擬態語)를 중심으로 소개하려 한다. ‘야마도’란 일본의 고대국가로서 한자로는 ‘大和’, 또는 ‘’라고 쓰며, 5―7세기의 일본을 일컫는다. 당시 지배자들은 가야 ․ 백제 ․ 신라 ․ 고구려에서 건너간 ‘渡來人’들이었고, 당시 조정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였기 때문에, 일본이 자랑하는 고대 시가집 [망요슈, 萬葉集]는 경상도 ․ 전라도 ․ 함경도 ․ 평안도 사투리가 섞인 한국어 이두(吏讀) 시집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 절반도 해독 못했던 것이다.

 

야마도 조정은 한국어가 공식용어였기 때문에 2․3세대 관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신라에서 세 사람의 교사를 모셔왔음이 [日本書紀](天武 9년 11월 조)에 적혀 있다. 주후 538년, 백제의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 <千字文>과 <論語>를 가지고 가기까지 일본에는 문자가 없었으나, 한자를 배운 일본인들은 띄어쓰기가 안 된 한자 문서를 읽기 위해서 그 문서에 토를 달아야 했는데, 한자의 조각()으로 토를 단 것이 ‘가다까나(片カナ)’의 시초이다. 가다까나는 이렇게 한자의 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이를 [망요가나(萬葉カナ)]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 모음 외에 ‘애 ․ 어․ 으 의’ 등의 모음도 있어서 총 9개의 모음을 사용하였으므로 당시는 일인들도 한국말을 그대로 발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가다까나가 50음으로 확정되고 학교에서 교육을 하였기 때문에, 모음은 ‘아이우에오’의 다섯 모음으로 고착되었고, [애 ․ 어․ 으 ․ 의] 의 4 모음은 물론 받침까지 사라져버려 오늘에 이른 것이다.

 

(2) 의성어, 의태어 모두 우리 말

 

다음에 예시하는 말들은, [애 ․ 어․ 으 ․ 의]의 4 모음이 사라진 이후 받침마저 없어져 변해버린, 한국어에 뿌리를 둔 일본어들이다.

 

❶술술=するする(수루수루)

사물이 아무 저항 없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을 우리말로 ‘술술’ 풀린다라고 하는데, 받침이 사라진 일본어로는 ‘수루수루(するする)’ 풀린다라고 한다.

❷졸졸=ぞろぞろ(조로조로)

여러 사람이 뒤를 따르는 모습을 우리말로 ‘졸졸’ 따라간다고 하는데, 받침이 없는 일본어로는 ‘조로조로(ぞろぞろ)’ 따라간다라고 한다.

❸쫄쫄=ちょろちょろ(쪼로쪼로)

적은 분량의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우리말로 ‘쫄쫄’ 흐른다고 하는데, 일본어로는 ‘쬬로쬬로(ちょろちょろ)’ 흐른다고 한다.

❹자아자아=ざあざあ, さあさあ(자아자아)

사람을 강권하여 불러들일 때 우리말은 ‘자아자아’ 어서 오세요라고 하는데, 일본어는 ‘자아자아(ざあざあ)’, 혹은 ‘사아사아(さあさあ)’ 어서 오세요라고 한다.

❺깔깔=からから(깔깔)

우리말은 사람의 웃는 소리를 ‘깔깔’ 웃는다고 하는데, 일본어는 ‘가라가라(からから)’ 웃는다고 한다.

❻똑똑=とくとく(똑똑)

액체 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일본어로는 ‘도꾸또꾸(とくとく) 떨어진다고 한다.

❼불불=ぶるぶる(불불)

몸을 불불 떤다, 혹은 벌벌 떤다는 말을 일본어로는 ‘부루부루(ぶるぶる)’ 떤다고 한다.

❽쑥쑥=すくすく(스꾸스꾸)

곧장 힘차게 잘 자라는 모습을 우리말로는 ‘쑥쑥’ 자란다고 하는데, 일본어로는 ‘수꾸수꾸(すくすく) 자란다고 한다.

❾터벅터벅=とぼとぼ(토보토보)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는 모습을 우리는 ‘터벅터벅’ 걷는다고 하는데, 일본어로는 ‘토보토보(とぼとぼ) 걷는다고 한다. (이하 생략).

 

 

5) 고대 일본은 한국의 속국(屬國)

 

주후 173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239년에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국제외교 무대에서 이름을 남긴 왜의 여왕 히미꼬(ひみこ、卑彌呼, ? ~ 247)는 이상하게도 일본 황실의 명령으로 편찬된 [古事記, 712년 완성]와 [日本書紀, 712년 완성]에는 그 이름조차 보이지 않는다. [위지(魏志, 倭人傳)]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실재 인물인 여왕 히미꼬가 일본 국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왕 히미꼬 뿐 아니라, 그가 다스리던 나라 자체가 일본 국사에서 말살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일본 황실이 [古事記][日本書紀]를 편찬할 때 여러 호족 가문에 전해 오는 문서를 제출하도록 엄명해 그것들을 말살시켜 버린 사실이다. 일본 황실이 그때에 없애버린 옛 문서에 어떠한 역사가 적혀 있었는지 확실한 것을 알아내기는 일본 황실의 자발적인 협조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근년에 이르러 일본의 여러 곳에서 신비스러운 내용이 담긴 괴문서가 속속 발견돼 그 진상의 일부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들을 일본 학자들은 '수수께끼의 고문서(謎の古文書)' 라고 부르면서 위서(僞書)라고 무시해 버리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 문서들이 결코 위서가 아니라는 이유가 있다.

 

①그것들을 비밀리에 보관해 온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황족이거나 옛날부터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유서 깊은 가문이라는 사실.

②그러한 문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눈치 챈 황실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온갖 협박과 학대를 해서 대대로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③이들 문서를 세상에 공개하려고 하자 일본 정부는 경찰과 헌병을 동원하면서까지 저지해 큰 소동이 벌어지고, 관계된 사람들은 투옥과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 등이 증언되고 있다.

 

그러한 문서가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기까지에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숨은 곡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 문서에는 어김없이 ‘부처님이 일본에서 태어났다’ 라든가, ‘예수가 일본에서 죽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허무맹랑한 말이 첨부되어 있어서 그 문서의 신빙성을 손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보이는 제1대 神武天皇 이전에 약 73대에 걸친 ‘우가야왕조’(ウガヤ王朝)가 존재했음을 증언하고 있는 이들 문서의 일치된 기록이다. 다음은 그러한 기록을 보이는 고문서들이다.

 

(1) 우에쓰후미(うえつふみ, 上記)

 

이 책은 13세기에 가마꾸라 바꾸후의 창시자인 미나모도노 요리도모(源頼朝, 1147―1199)의 서자이며, 분고국의 태수를 지낸 오오도모 다까나오가 만든 것이라 한다. 이 고문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명치유신이 일어나기 전인 1838년에, 지금의 오―이다겐 오―이다시에 살고 있었던 일본 국학자인 사찌마쓰 하에사가까다.

 

이 책의 특징은 현재 일본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본 글씨와는 다른 모양의 글씨체로 쓰여 있는 점인데, 지금도 이 글씨가 어디서 전해온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이것은 주후 1223년에 오오도모 다까나오에 의하여 편찬되었다고 하며 일본열도의 창세기에 '니니기 왕조'가 있었고, 그 다음에 '야마사찌히꼬 왕조'가 있었으며, 그 뒤에 '우가야후기아에즈 왕조'가 73대 계속되었다는 역사가 담겨 있다.

 

또 일본의 초대 천황으로 국사에서 가르치고 있는 신무천황은 제73대 우가야 왕이라고 적혀 있는데, 주목을 끄는 것은 '니니기 왕조'가 성립되기 전에 스사노오노미꼬도가 건국한 이즈모국이 7대 계속되었다고 적혀 있는 점이다.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모로꼬'라는 표현이 씌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우리말로 '…모양으로/…하는 것과 같이'와 같은 뜻인데, 요새 경상도 사투리에 '…매로=…하는 모양으로'라고 쓰이고 있는 말의 옛 형태가 '모로'이다. 거기에 덧붙여진 '고'는 '…모로로=…모양으로'의 '로'인데, ㄹ→ㄱ 변화법칙에 따라 '고'로 소리바꿈 된 것이다.

그와 같은 변화는 '구더기'를 '구더리'라고 하는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 그리고 요새는 '따오기'라고 부르고 있는 새를 지방에 따라서는 '따오리'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로 뒷받침된다. 즉 이 문헌을 만든 사람은 경상도 사투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2) 후지미야시다 문서(富士宮下 文書, 神皇紀)

 

이 책은 현재 야마나시현 요시다시에 살고 있는 미야시다 요시다까가 보존하고 있다. 이 문서의 특징은 후지산 기슭을 근거지로 삼은 '우가야왕조'가 있었으며, 그 가운데 51대가 남자 왕이고, 24대는 왕비에 의한 섭정이 행해서 결국 합계 75대에 걸친 '우가야왕조'가 존재했다고 하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서 이 문서는 앞에서 말한 우에쓰후미(上記)보다 2대 더 많은 '우가야왕조'의 존재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에쓰후미에는 16명의 여왕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는 것을 볼 때 왕비에 의한 섭정이 아니고 당당한 여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3) 다께우찌 문서(竹內文書)

 

이 고문서는 이바라끼현 이소하라에 있는 황조황태신궁의 아마쓰 교관장인 다께우찌가()에 대대로 전해져 오는 신대사(神代史) 관계 자료다. 이 문서에도 우가야왕조(ウガヤ王朝)가 73대 계속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주목할 점은 신무천황이 72대 우가야 왕에게 양위를 받아, 마치 평화적인 왕조교체가 있은 것처럼 꾸며 놓은 것이 특징이다.

 

다른 고문서들은 '우가야왕조'가 신무천황에게 멸망당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 문서에서만 유독 평화적인 왕조교체가 있은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은 원래 신대문자로 씌어 있었던 이 문서를 5세기 후반에 제25대 부레쓰 천황의 명령으로 다께우찌스꾸네의 손자뻘 되는 사람이 이두문자로 바꿔 썼다는 사연이 있은 것으로 미루어, 그때에 평화적인 왕조교체가 있은 것처럼 조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가 해방 후 공개되자 그 내용 가운데 일본정부가 극비에 부치고 있는 천황가의 뿌리에 대한 것이 나타나 있었던 탓에 공개자인 다께우찌 교마로(竹内巨麿, 1875?―1965)는 1937년에 불경죄로 기소되고 아마쓰교(天津敎)는 해산당하고 말았다.

 

(4) 일본 건국신화 들여다보기

 

우선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건국신화부터 들여다보자.

 

"하늘나라로부터 내려온 천손 ‘니니기노미꼬도’ 일행은 가고시마현 노마반도(野間半島) 끝에 이르러, ‘가사사(笠狹埼) 지나리’ 앞을 바로 지난 데에 있는 이곳은 가라국(加羅國=伽倻國)를 향해 있을 뿐 아니라 아침 해가 찬란히 쪼이고 석양빛도 아름답게 비쳐주는 곳이니 매우 좋다고 하며 그곳에 대궐을 지어 정착했다.”

 

이 기록은 천손 '니니기노미꼬도'와 그 일행이 부모형제를 남기고 온 고향 가라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잘 표현한 대목이다. 더구나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을 가라구니다께(韓國岳)라고 이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황실은 고대로부터 궁중에 가라가미(韓神)를 받들어 모시고,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가라가미마쓰리(韓神祭)를 지켜오고 있다. 주후 927년에 당시 국무총리 격이었던 후지와라 다다히라(藤原忠平)가 편찬한 연희식(延喜式)에는 [가라가미마쓰리]를 지낼 때 제사상에 올리는 제물의 종류와 제사의 절차가 자세히 기술돼 있으며, 근년에 와서는 [가라가미마쓰리]를 봄에 지내는 2월 21일을 건국기념일로 제정해 놓고 황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축제를 지내고 있다. 천손이라고 하는 황실이 가라에서 온 가라족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개척한 일본열도가 독립하여 자치령이 되어 스스로 '야마터(日本)'라고 일컫기 시작한 것은 주후 663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부터다. 그 때 고국 백제 땅에 있는 조상의 무덤은 누가 돌보나, 하는 가슴 아픈 노래가 일본 고대 시가집 망요슈(萬葉集)에 우리말로 읽도록 이두로 기록되어 있다.

 

'야마터(日本)'는 원래 위지(魏志)에 기록돼 있는 야마국(邪馬國)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경북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번영한 가라의 종주국 '우가야'를 지칭한다. 즉 자치령이 된 일본열도에 살게 된 그들은 저들이야말로 종주국 '우가야'를 계승하는 나라임을 내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요시다도고(吉田東伍)가 펴낸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의 국호론과 명치 33년 정월에 발간된 '역사잡지' 제101편 1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日本’이라는 국호는 원래 한국인들이 일찍부터 써 온 것인데, 우리나라가 그 이름이 아름답기 때문에 국호로 정했다. (伴信友).”

'日本'이라는 문자는 상고로부터 씌어 온 '히노모도' 라는 말에 한자를 충당해서 쓴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름 그 자체는 삼한(三韓) 사람들이 시작한 것이다. (星野恒)

'日本'이라는 국호는 원래 한국인들이 쓰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 국호로 더욱 적당하기 때문에 만세불변의 호칭이 됐다. (木村正辭). * [출처] 고 박병식 박사의 글에서 발췌ㆍ주해하고 추가하였음.

 

 

4. 일제의 만행과 친일 사학계

[출처] http://blog.daum.net/Adalija/84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 사학자인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 1859―1925) 선생은 말했다.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아야 하며, 민족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잃지 않아야 한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한 순간의 쉼도 없이 지금도 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한 부분을 채워 가고 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흘러간 시간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우리의 현재를 존재하게 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느끼며 접하는 모든 것에 투영되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바로 민족의 역사에는 민족의 번영과 영광, 시련과 애환이 깃들어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역사 정신을 간직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민족의 장래와 존망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그것은 민족의 주체성, 즉 민족의 자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대주의와 외래사상은 일 만년 역사 속에 찬연했던 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왜곡하면서 그 모습을 달리하며 오늘에까지 이르러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 또한 이 땅을 강제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가 이 민족을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왜곡, 날조한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청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서구의 퇴폐적 물질문명과 외래 사상의 폐해는 민족 역사와 정신의 뿌리까지 흔들어 놓았다.

 

1)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과 역사왜곡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시책

 

①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ㆍ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②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무위 · 무능 · 악행을 들추어내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④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⑤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⑥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同化)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절반의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건인 것이다.'

 

일제는 위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악랄한 정책을 이행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전통 문화와 역사의 말살을 꼽을 수 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민속(民俗) 조사를 실시하고 우리의 민속 신앙들을 미신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동제(洞祭)를 중점적으로 탄압했는데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의 연구에 의하면 동제는 일본의 신도(神道)와 공통성을 지니며, 여러 가지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현실적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민중 심성을 개발하는 가장 으뜸가는 향토 오락이며, 성씨별 분열을 막고 이를 통합하는 기능을 지니고, 마을 사람들의 심신을 정화시켜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들은 일제의 반()일본화 작업에 있어 방해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다각적인 탄압을 진행하였다. 경찰국에서는 중추원 시정 연구회의 연구를 자문 받아 무녀 취체 법규를 제정하고 무당들을 경신 단체에 가입시키는 한편, 강력한 취체 행정으로 이를 금압하고, 학무국에서는 신사·신도 정책을 펴 나가 각급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했으며, 사회과에서는 우리의 민속 신앙을 미신이라는 말로 간주하는 사회 교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2)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날조 편찬

 

일제의 사서(史書) 20여만 권 소각과 더불어 시작된 조선사의 편찬은 당시의 조선인들로 하여금 소위 '공명 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혀 조선인에 대한 일본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루어졌다.

즉 '공명 정확한 사서의 편찬을 위해 사료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감행하였는데 1차로 1910년 11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1937년까지 이루어 졌고 압수 대상 서적은 단군 관계 조선 고사서, 조선 지리, 애국 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 열전(列傳)류, 각 가정의 족보 특히 가야와 관계가 깊은 김해김씨, 김해 허씨 족보 및 미국의 독립사까지 강제로 뺏어갔다. 조선 세종 때부터 단군 관계 사서를 수집하여 장서각 및 규장각에 보관하였는데 이들 사서 중 단군 관계 고사서를 다 일본으로 가져가버렸다.

 

조선사 편찬시 상당수의 조선인이 참가하였는데 여기에는 이병도 · 신석호 · 최남선 · 권중현 · 박용구 · 이완용 · 박영효 등이 있다. 다음에 다시 서술하겠으나 우리는 이병도 씨가 이 작업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조선사의 성격과 구성 내용 등을 살펴보자.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하는 데는 3대 요건이 필요하다.

그 첫째가 상고사와 국조(國祖)의 부정이고 둘째가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만 압축해 버리는 것 마지막 셋째가 한국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 적이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펴낸 이른바〈朝鮮史〉는 위의 요건을 충실히 따랐다. 또 단군조선의 말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던 당시 일본의 가장 악질적인 어용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 같은 자를 중추인물로 세움으로써 그 의도가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시대 구분에서도 위와 같은 의도가 엿보이는데 1916년 1월의 회의 때 결의한 상고 삼한, 삼국, 통일신라 등이 1923년 1월 8일 제 1차 위원회 회의에서 삼국이전. 삼국시대. 신라시대로, 1925년 10월 8일 제 1회 위원회 때는 신라통일 이전. 신라통일 시대로 압축되었다. 내용에 있어서 위와 같은 의도는 확연히 드러난다. 몇 가지 살펴보면 조선의 반도적 지리 요건으로 인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반도 북부는 지나의 식민지, 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 조선 역사는 위만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조선인은 자립, 자치 능력이 없다 (당쟁· 반란의 의미 확대) 조선의 조정은 동학란 때문에 청나라를 불러 들여왔으나 일본이 처음 무찌르자 합방해 주기를 원하므로 합병하여 조선인들이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잘 살게 되었다는 점 등이 있다.

 

5. 고려장(高麗葬) 이야기

1) 한국민족설화의 연구, 1948

한국역사민속학자 손진태(孫晉泰, 1900~납북)의《한국민족설화의 연구, 1948》는 고려장에 대해서 최초의 연구서로 알려졌다. 이 책에 고려장 전설로 알려진「기로전설(棄老傳說)」이 있다. 기로는 버릴 기()자와 늙을 로()자로 이루어져있다. 즉, ‘늙은이를 내다버린다’는 뜻이다. 고대의 각 나라 민속 중에는 사람이 늙어 70세가 되면 산속 깊은 곳에다 버리는 풍속이 있었다. 일본에는 아직도 늙은 부부가 자식 신세지기 싫다고 벤또 몇 개 싸가지고 자진해서 후지산(富士山)으로 들어가 굶어 죽는 풍습이 남아 있다. 20세기 말까지 일본 신문에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효도를 강조한「효자들의 나라」다. 이런 우리 선조들이 고려장제도를 만들었을까? 우리민족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민족이었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 옛날 자료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다. 굳이 고려장과 비슷한 풍속을 찾아보자면, 고대국가인 부여와 고구려인들의 후장(厚葬)을 들 수 있다. 임금이나 귀족의 장사를 지낼 때 금은이나 구슬로 만든 장식물과 살림살이, 심지어는 노비를 비롯해 소와 말들도 함께 무덤 속에 묻었다는 순장(殉葬)풍습이다. 저승에서도 이승에서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은 우리와 지리적 ․ 인종적으로 가까운 퉁구스족 ․ 몽골족 ․ 시베리아 여러 종족들 사이에도 행해졌다.

 

진시황의 무덤이 그 증거다.「고려장」이라는 용어는 이병도의《국사대관, 1939》「삼국의 사회생활」조에 최초로 나온다.

“이때 우리 조상들의 厚葬의 風은 실로 후인의 눈을 놀랠 만치 호화스러워 지금도 에 이러한 고분을『고려(고구려)장』이라 일컫거니와, 당시 지나인의 기록인 魏志高句麗傳에도『厚葬, 金銀財幣盡於送死라고 하였다.

 

다만 고려시대에 전염병 환자를 깊은 산속에 내다버렸다는 기록이 전해 오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한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못하게 하려는 어쩔 수 없는 격리조치였다. 하지만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그것도 친부모를 내다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려 시대에 불효죄는 반역죄와 마찬가지로 매우 엄한 처벌을 받았었다.

 

2) ‘고려장’이라는 말

 

그럼 늙은 부모를 생매장하는 것이 ‘고려장’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이 말은 왜정 때 일본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임이 밝혀졌다. 20세기 초 우리나라를 강제로 차지한 왜놈들은 우리의 문화재를 헐값에 사들여 자기네 나라로 마구 실어 보냈는데, 마침내는 우리 조상의 무덤에까지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부호들의 무덤에는 은금보화 부장품이 있다는 역사서의 기록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인 인부들은 천금을 주어도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은 안 하겠다고 한다. 이는 한민족의 정서상 당연한 것이다. 어찌 남의 신성한 무덤을 파헤친단 말인가? 예전부터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오페르트 도굴 사건」 이후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것은 가장 죄질이 좋지 않은 것으로 중벌을 받았기 때문에 인부를 살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간교한 왜놈들은 조선인의 경로효친(敬老孝親) 정신을 이용해 고려장이란 말을 만들어 냈는데 "조선에는 고려시대부터 고려장이란 게 있었다. 부모를 산 채로 내다 버리는 못된 풍습이다. 여기 묻힌 사람은 자기 부모를 생으로 고려장시킨 자들이므로 이 무덤은 파헤쳐도 괜찮다" 라는 논거로 조선인 인부를 회유하여 무덤을 파헤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덕일·김병기 공저《우리 역사의 수수께끼③》(김영사, 2007) 139쪽 이하에 “고려장은 있었는가?”라는 항목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3세기 때의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는 고구려의 장례 풍속에 대해 ‘장례는 후하게 하는데 금은과 재화를 모두 사자(死者)를 보내는데 쓴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무덤 둘레에는 송백(松柏)을 심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환도성(만주 통구)에 있던 시절의 기록인데, 장례에 재산을 모두 다 쓸 정도였으며,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둘레에 송백까지 심어 장엄하게 꾸몄던 나라에서 나이 든 부모를 산에다 갖다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고려에선 어떻게 장례를 치렀을까? 불교국가인 고려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을 주로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절에서 화장한 후 유골을 절에 모셔 두고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다가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뒤 유골을 항아리나 돌로 만든 작은 관에 담아 땅에 묻었다. 유골을 묻지 않고 산이나 강물에 뿌리기도 했다. 장례부터 제사까지 들어가는 비용은 자식들이 아들딸 구분 없이 똑같이 나누어 부담했다. 효를 으뜸으로 여기는 우리 조상의 무덤을 일본인이 파헤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간악한 왜놈들이 엉뚱한 말을 지어 내게 된 것이다. 그것이 [고려장]이이라는 말이다. 왜놈들은 속아 넘어간 조선인 일꾼을 앞세워 온 나라를 휩쓸며 도굴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일꾼들의 입을 타고 [고려장]이라는 말이 퍼졌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11일자에는 '고려장 굴총'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 하나가 들어 있다.

 

"西道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은즉 近日日人들이 高麗葬을 파고 砂器를 내어가는 고로 온전한 고총이 없다더라."

출처 : '고려장' 개념, 일제가 처음 퍼뜨렸다? ― 오마이뉴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인이「고려장」이란 말을 지어냈다는 증거를 아무도 대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증은 분명한데 확증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 확증을 잡으려고 며칠을 인터넷 정보바다를 뒤졌다. 그러다 마침내 여러 자료들을 찾았다. 우선 그 증거로 옛날 「朝鮮語讀本」에 실려 있던「떡보 이야기」를 소개한다. 네 살에 한글을 다 뗀 나는 1939년에 남사심상소학교(南四尋常小學校)에 입학하자마자 상급반의 조선어독본을 다 빌려서 읽었는데, 3학년 교본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3) 떡보 이야기

 

어느 마을에 떡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평생소원은 떡을 실컷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하는 말이, 명나라에서 고려에는 부모가 늙으면 산속에 갖다 버리기 때문에 늙은이들이 없음을 알고 지혜 겨루기 사신을 보낸다는데, 아무도 겨루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해서 자원하여 이를 해내는 자에게는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방이 붙었단다. 그러자 사람들이 떡보더러 한 번 나가 보라는 것이었다. 떡보가 자원했다. 나가던 날 팔뚝만한 썰지 않은 인절미를 다섯 개나 먹고 길을 떠났다. 압록강 나루에서 배를 저어 사신을 건네주러 저어갔다.

 

배를 탄 사신이 떡보를 보니 애꾸눈이었다. 그래 놀리려고「조탁정장목(鳥啄亭長目)」이로다. 하였다. 역관이 “새가 사공의 눈을 쪼았구나” 라고 번역을 했다. 떡보는 화가 나서 사신을 보니 입이 약간 삐뚤어져 있었다. 그래서 “바람이 사신의 입을 스치고 갔구먼유.” 하고 대꾸했다. 통역이 풍취사신구(風吹使臣口)라 합니다 하고 통역을 했다.

 

사신이 어럽쇼! 하는 표정이 되더니 손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니 저 자가 내가 떡 먹은 것을 어찌 알고서 빈대떡을 먹었냐고 묻지? 아냐, 인절미야” 생각하고 손으로 네모를 그렸다. 그러자 사신이 손가락 셋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세 개 먹었느냐고? 아냐! 다섯 개야!” 떡보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흘리며 손가락 다섯 개를 꼽아보였다. 사신이 깜짝 놀라더니 수염을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아하, 맛있었느냐고? 암, 배가 터지게 먹었소!” 떡보는 그러며 배를 내밀고 두들겼다.

 

그 순간 사신이 갑자기 배를 돌리라 하고는 급히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고국으로 돌아간 사신은 왕 앞에서 이렇게 아뢰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은 지혜가 모자라 고려국에 가서 지혜 겨루기를 할 자격이 안 되옵기에 가다가 되돌아왔나이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왕이 연고를 물으니 대답 왈:

“제가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그 애꾸눈 뱃사공의 지헤를 시험해보기 위해 「天은 圓也」라 하는 뜻으로 두 팔로 동그라미를 그렸더니 그 사공은「地는 方也」라고 네모를 만들어 보이더이다. 신이 손가락 셋을 보이며「삼강(三綱)」을 아느냐 하니까 오륜(五倫)까지 안다고 손가락 다섯 개를 보이며 미소하더이다. 그래서「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를 아느냐며 수염을 쓰다듬으니까 「태호복희씨(太昊 伏羲氏)」까지 안다고 배를 두들기더이다. 일개 무식한 사공이 삼강오륜을 알고, 삼황오제를 논할진대 나라 안의 박사들이야 말해 무엇하리까. 통촉하소서.”

 

이리하여 명나라는 다시는 지혜 겨루기를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분명 왜놈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아동문학가로서 우리나라 전설이나 민담(民譚)을 거의 다 읽은 나는 이 떡보 이야기를 어디서도 찾아 읽은 적이 없다. 이 이야기의 속뜻은 고려와 명나라를 비웃으며, 고려의 고려장 제도 때문에 지혜 있는 늙은이가 없음을 은연중 강조한 이야기다.

아래 글은 신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4) 우리 역사에 ‘고려장’은 있었는가?

(서울경제 1999.8.19.)

 

"고려장이 실제로 우리 역사 속에 장례풍속으로 존재했을까. 그러나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우리 역사에서 그런 풍속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삼국지」․「위서」․「고려도경」․「계림유사」․「세종실록」등 몇몇 기록들이 간혹 고려장의 실례로 인용되지만, 그것은 고려장과는 엄연히 다른 풍속이고 객관적인 자료로 볼 수 없다는데 전문가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근거도 없는 고려장이 어떻게 해서 현실 속에 남아 있을까. MBC는 1999년 특선 다큐멘터리「고려장은 있었는가」(충주 MBC제작)를 통해 고려장에 대한 이야기가 일제(日帝)시대에 일본인들이 우리네 무덤을 도굴하기 위해 날조해 퍼뜨린 유언비어라고 밝히고 있다.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기로설화」가 처음으로 우리 문헌에 등장한 것은 1926년의 일이다. 교사였던 심의련 씨는 그의 저서「조선동화대집」에서「老父를내다버린 」라는 제목으로 지게에 지고 노부를 내다버린 불효자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 이야기를 기록한 최초의 자료다.

 

그런데 이 전설은 미와 다마끼(三輪環)라는 당시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敎諭)인 일본인이 낸「傳說の 朝鮮」(東京博文館, 1919)이란 책의 내용과 일치한다. 제목은 일본식으로 ‘不孝息子’라는 글이 있다. 이것을 번역한 것이「老父를 내다버린 者」란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퍼뜨린 것이 왜놈들임을 증명된 것이다. 이 얘기는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조선동화집」에도 '부모를 버린 사내' 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며, 곧이어 1926년에는 나까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정리한「朝鮮童話集, 1926. 1. 1.」에도 약간 내용을 달리하여 '부모를 버린 사내' 라는 제목으로 거듭 수록되어 있다. 결국 오랜 세월 이 땅에 존재했던 것으로 믿어온 고려장은 일본문헌에 처음 등장했고, 이를 번역하여 조선 글로까지 내게 한 것이다. 이 시기는 일제의 극심했던 도굴시점과 일치한다. 게다가「고려장」이라는 용어 자체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4년으로 고려시대의 돌무덤이고 그것이 말 그대로 고려(고구려) 시대의 무덤을 뜻하는 고려장과 결합해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 이야기로 변한 셈이다.

 

다음은 한겨레신문: “「고려장은 없었다에 대한 약간 다른 생각」을 읽고”란 글을 요약한 것이다.

 

… 지난 13일치 <왜냐면>에서 ‘고려장’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퍼뜨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순우 씨가 제시한 근거의 하나인 그리피스(Griffis, William Elliot, 1843―1928)의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1894)은 이렇게 적고 있다.

 

5) [은자의 나라 한국]의 날조 기사

그리피스(Griffis, William Elliot, 1843―1928)

 

“조선왕조는 한국인의 미신 속에 뿌리박고 있는 적어도 두 가지의 잔인한 악습을 철폐했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중략) 고리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세한 내용은 충분히 알려지지는 않고 있지만, 노인을 산 채로 묻어 버리는 풍습이었다.”(은자의 나라 한국; 집문당, 130쪽)

 

그런데 1875년에 일제가 조선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운양호 사건(雲揚號事件)이 터진 이후 일본 군함의 무력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1888년에 일본통 미국인 그리피스가 쓴 이 책 초판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기 이전에 고려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는 이 씨의 주장이 오류라는 것이 확인된다. 충주MBC가 1999년에 현지답사와 전문가의 인터뷰 형식으로 제작한 ‘고려장은 있었는가’ 라는 비디오테이프에는 관련 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나온다.

 

심의린의 [조선동화대집]에 거두절미된 생매장 고려장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밝힌 분은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최인학 교수다. 우리의 고문헌들을 두루 살펴도 고려장은 없었다는 것을 밝힌 분은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다. 개성에서 후손들이 보는 앞에서 일경이 총칼을 들이대고 조상의 묘를 파헤쳤다는 것을 밝힌 분은 한국교원대 정영호 교수다. 무덤 속에서 귀한 문화재가 발굴되자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일제로서 이들의 ‘만행이 지하 백골에까지 미쳤다’고 통탄하던 안중근 의사의 말을 전한 분은 충청대 장준식 교수다.

 

이순우 씨는 ‘일제 때 도굴이 자행되었다’고 지적한 내용을 검증도 확인도 않고 부정하고 있다. 그리피스는, 자세한 내용은 충분히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나라에 패륜의 잔인한 악습이 있었다고 적어놓았다. 하멜은 [하멜표류기]에 악어를 우리나라 강에서 보았다고 썼고,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 416쪽에서 치핑구(일본)를 진주와 황금의 나라로 적어 놓았지만, 그리피스는 이들과는 다른 의도에서 엉터리 고려장을 기록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든다. 특히 ‘숱한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그 책을 썼다’고 하며, 한국의 우상숭배에 기독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제대로 된 본래의 고려장은 ‘후하게 장례를 치른다. 사람이 죽으면 금은보화를 넣은 다음 돌로 쌓아 봉토하고 묘지 주변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한국문화사〉고대편 404쪽)

 

6) 「고려장」은 고려식 장례법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1학기〈읽기〉교과서에는 고려장이 역사적 사실처럼 기술되어 있다. 대부분의 시판 동화책, 국어사전, 중앙 일간지와 방송사도 의심하지 않고 사실처럼 보도를 해 왔다. 이른바 고려장 터라고 알려진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 수저와 식기류는 저 세상에 가서도 사용하기를 바라는 계생사상(繼生思想)에서 온 것인데도 노부모에게 음식을 넣어주던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까지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손목(孫穆)이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 “고려에는 노부모를 방에 가두고 음식을 넣어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산 부모를 산에다 버리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치매노인이나 역병에 걸린 사람을 집안에서 격리한 모습을 적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송나라의 문신 서긍(徐兢)이 지은〈고려도경(高麗道經)〉에는 집안이 극빈한 자식이 부모의 장례를 지내지 못하고 주검이 까마귀밥이 되게 하는 풍장(風葬)을 소개하였는데, 살아 있는 노부모를 죽도록 내다버렸다는 내용과는 분명히 다르다. 마치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는 오늘의 언론 기사가 수백 년 뒤에 ‘21세기 한국에는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악습이 유행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지게에 져다 노모를 버린 아비의 아들이 다시 아비가 늙으면 져다 버린다 해서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이것은 지나(支那)의『효자전(孝子傳)』에 나오는「원곡(原穀)이야기」다. 사신이 문제를 내고 숨어 있던 노모가 풀었다는「어머니의 지혜」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인도의〈잡보장경(雜寶藏經)〉(기로국연(棄老國緣)이 원전이다. 원곡 이야기를 보자.

 

7) 원곡 이야기

- 인도의〈잡보장경〉‘기로국연’에서-

원곡이란 아이에게는 늙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싫어하여 갖다 버리려고 생각하였다. 15살 된 원곡은 울면서 말렸으나 아버지는 듣지 않았다. 드디어 수레를 만들어 깊은 사속에 갖다 버렸다. 원곡이 따라 갔다가 수레를 도로 가져오니, 아버지가

"이처럼 흉한 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하였다. 원곡이 대답했다.

"이 다음에 아버지가 늙어 내가 아버지를 산속에 내다 버리게 될 때, 다시 만들지 않고 이것을 쓰려고요."

이에 아버지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깨달아,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모시고 왔다. 이후 잘 봉양하여 마침내 효자가 되었다.

앞의 동화는 이 이야기를 번안하여 쓴 것으로서 고려장과는 무관하다.

 

불교의 [잡보경제일(雜寶經第一]의 '기로국 이야기'를 보자.《우리 역사의 수수께끼③》147쪽 이하에서 인용한다.

 

8) 기로국(棄老國) 이야기

 

기로국의 한 대신이 참아 아버지를 버릴 수가 없어서 밀실을 만들어 아버지를 감추고 모셨다. 이 무렵 천신(天神)이 와서 7일의 기간 내에 국가의 존망을 조건으로 어려운 문제를 풀라고 요구했다.

 

첫째, 두 마리 뱀의 암수를 구별할 수 있는가.

둘째, 큰 코끼리의 무게를 잴 수 있는가.

셋째, 향나무의 상하를 구별할 수 있는가.

넷째, 모양이 비슷한 말의 어미와 새끼를 구별할 수 있는가.

 

(….) 국왕과 대신들은 모두 답을 알지 못해 당황하다가 후한 벼슬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방을 걸었다. 대신이 밀실에 숨겨놓은 부친에게 묻자 부친이 답을 알려주었다.

첫째 : 부드러운 삼베 위에다 뱀을 놓아 두어라. 그때 이리저리 움직이는 놈이 수놈이고, 움직이지 않는 놈은 암놈이다.

둘째 : 코끼리를 배에 태워 배가 물속으로 얼마나 들어갔는가를 표시해 둔 다음에 코끼리를 내려놓고 그 표시까지 내려가도록 돌을 싣는다. 그리고 그 돌의 무게를 하나하나 달아보면 그것이 코끼리의 무게다.

셋째 : 나무는 물속에 띄워보면 뿌리 쪽이 조금이라도 더 가라앉게 된다.

넷째 : 꼴을 주어 보라. 어미 말은 반드시 새끼 말에게 꼴을 밀어준다.

 

대신은 아버지의 말대로 답을 올렸다. 큰 상을 내려준다는 왕에게 대신은 아비를 숨겨 국법을 어긴 죄를 용서해 달라 하였고, 국왕은 크게 깨닫고 기로풍속(棄老風俗)을 폐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로국 이야기는 몽골의 민담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방 곳곳에 고려장터로 알려진 무덤들은 무엇일까? 고고학계의 발굴결과로는 고려장과는 무관한 석관묘(石棺墓)나 석실분(石室墳)으로 판명됐다. 이와 같이 고려장은 고려의 장례풍속이 아니었다. 고려에서는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고려사』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 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호적과 재산을 달리하고, 공양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징역 2년에 처한다."고 하였다. 또한 국왕이 효행이 있는 사람과 80살 이상 된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선물을 주었다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이렇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반대로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기 위해 효자전의 원곡이야기와 기로국 이야기를 마치 우리나라, 특히 고려의 실제 풍습인 양 바꾸어 퍼뜨린 것이다.

 

 

6. 일본인도 모르는‘진짜’일본 고대사

[출처] : 존 카터 코벨 책 / 김유경 편역에서 간추림.

 

1) 존 카터 코벨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2―1996) 박사는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다. 미국 오벌린대학을 나와 서구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15세기 일본의 선화가 셋슈(雪舟)의 낙관이 있는 수묵화 연구』로 일본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교또 다이도꾸지(大德寺)에서 오랜 동안 불교 선(禪) 미술을 연구했으며, 1959년부터 1978년까지 리버사이드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하와이 주립대학에서 한국미술사를 포함한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했다. 일본문화의 근원으로서 한국의 존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위해 1978∼1986년 한국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 한국 미술, 한국불교, 한일고대사, 도자기 등에 대한 1천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 일본의 숨겨진 역사」「조선호텔 70년사」「뿌리」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영문저작을 냈다. 일본문화와 미술에 관한 16권의 저작이 있으며, 「다이도꾸지의 선(禪)」「일본 선정원 연구」등이 꼽힌다.

 

영어권 국가의 첫 일본미술사 박사이자 16권의 관련저술로 일본문화훈장을 받은 존 코벨 여사의 명저 [일본문화에 끼친 한국인의 영향(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은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일본문화의 뿌리는 한국이라는 것과, 한국의 일부 고고미술사학계가 부패된 시신처럼 썩은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일의 유물에 담긴 미적 성취와 연대기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한일문화의 영향관계를 증명한다. 역사책은 때때로 왜곡 조작되지만 예술사는 인간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지녔는지를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야토기는 보잘것없는 일본 하지끼(はじき, 土師器) 토기를 밀어내고 일본 궁중 토기로 쓰였다. 가야 기마족이 369년 배를 타고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알리는 유물이 널려있는 것이다. 또 70년대에 발굴된 나라(奈良) 다카마쓰고분(高松塚)은 8세기에 사망한 일본 제42대 문무(文武)왕의 비빈 또는 후궁의 묘지만 현무(玄武)·청룡()·백호(白虎)가 그려진「100% 고구려식 무덤」이다.

“8세기 일본은 한국 세력을 흡수하고 당나라 영향권에 있었다.”라고 주장한 일본의 견해를 뒤집은 셈이다. 그의 책 중에서 일부 요약한 글을 퍼다 실린다.

2) 날조(捏造)된 일본 고대사

 

“왜가 4세기 가야를 정벌했다. 일본의 지배자 혈통은 ‘BC 660년부터 한 번도 단절된 적 없이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다.”

현재 일본 젊은이들이 배우는, 어이없을 정도로 왜곡된 고대사다. 4~7세기 고대 일본을 장악한 것이 한국계 혈통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얼마나 실망할까. 1982년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 직후, 존 카터 코벨이 한·중·일 고대 역사서 연구를 통해 일본의 역사왜곡을 낱낱이 파헤친 미공개 논문을 최초로 소개한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갑옷으로 무장한 고구려 무사. 말에도 갑옷을 입혔다. 일본인들의 9할은 제 나라의 진짜 역사를 모른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일본 문부성은 국가적 자신감을 얻기 위해 고대 이래 현대까지 역사적 사실을 위조하고, 가미까제(神風)식의 맹목적 충성을 요구했다. 이는 역사를 들춰보면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외국 역사가들에겐 잘 알려진 반면 일본인에게는 대부분 은폐되어 왔다. 이 글은 왜곡된 일본역사 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고 어이없기까지 한 고대사에 관한 것으로 그간 연구해온 것이 바탕이 되었다.

 

근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황실 혈통이 “BC 660년부터 한 번도 단절된 일 없이 백수십대를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라고 배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교사는 한국 학생들에게도 이런 내용을 주입했다. “진무왕은 BC 660년 신의 계보에서 나온 1대조이고 일본 열도 전체를 통일한 개국자”라고 이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신화는 보편적인 것이 되고, 1930년대 군부는 이를 더욱 강조하면서 이를 믿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다른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전 세계 37개국에서 일본문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 공모가 있었다. 필자도 젊은 시절 이에 응모해 ‘일본의 미(), 시부미’라는 글로 상을 받았다. 이후 내가 일본의 미학이 사실은 한국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아는 데 40년이 걸렸다.

 

일본이 BC 660년에 나라를 세우고 천황혈통이 한 줄로 이어져 왔다는 기록이 712년과 720년에 각각 편찬된 [古事記]와 [日本書紀] 두 역사서에 나와 있다. 두 책에는 ‘천황 가문은 BC 660년 건국한 1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혈통’이라고 씌어 있다. 이는 8세기 당대의 일왕을 합법화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역사 편찬 당시의 일본 왕가는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00년 정도 된 집안이었을 뿐이고, 그때도 일본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자로 기록된 역사서가 없었다. 앞서 7세기에 역사서가 편찬됐으나 왕권 다툼의 전란 속에 불타버렸다.

 

3) 사관들이 날조한 [日本書紀]

 

일본 역사서는 엄청난 모순과 날조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실제 역사는 오직 300년 전부터였지만, 1000여 년이나 길게 역사를 늘이기 위해 어떤 일왕은 100년도 넘게 통치했다고 썼다.

그 전에는 오랜 가계를 노래처럼 외우던 가다리베(語部)들이 역사서 구실을 했다. 가다리베는 일본말로 가계를 외워 불렀다. 그에 비해 [古事記]와 [日本書紀] 는 한문으로 씌어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음을 따서 쓰고 어떤 것은 뜻을 차용해 썼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신생 왕가의 역사를 오래된 것으로 탈바꿈시켜야 했고, 신라에 대한 증오에 불타면서 일본어로 들은 것을 한자로 옮겨야 했던 역사학자들의 어려움을 헤아린다면, [日本書紀]에 수 없이 나타나는 모순이나 오류는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그중 대표적인 실수는 없애야 할 사실 하나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그대로 뒀다는 것이다. 즉 일본 최초의 왕조는 4세기경 일본에 온, 일부 학자들이 <기마족>이라고 일컫는 부족으로, 바다 건너 북쪽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시해버려도 좋을 일개 유목민집단이 아니라 한 세기에 걸쳐 한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까지 휩쓴 부여족으로 3세기에 북쪽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선진기술을 지닌 부여족이 가야와 백제에 둘러막힌 지역을 버리고 부산에서 바다 건너 새로운 땅 왜()를 점령하러 온 것이 369년 무렵. 이들은 가야와 백제에 많은 ‘사촌’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바다 건너 일본 땅 남서부에 많은 한국인이 수백 년 동안 정착해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부여족은 야심만만한 부족이었다. 그들은 일본에 최초의 실제 왕조를 건국하고 척박한 그곳에 중앙집권화 된 정부체제와 기마병술을 전수했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임무는 이런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천황의 조상들이 만든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였으므로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BC 660년의 일본은 구석기 혹은 신석기시대였으며 금속문명은 그때까지 도래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최초의 거주민은 아니다. 10만 년 전 일본 땅에도 인간이 거주해 돌도끼, 돌칼 같은 물건을 남겼다고 한다.

 

4) 조몽인(繩文人)과 야요이인(彌生人) 유적

그들이 누구인지, 원시도구를 만들어 쓴 ‘호모 사피엔스’가 그대로 멸족했는지, 아니면 그 다음 신석기시대 조몽(繩文)인과 연결됐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구석기시대 인류와 일본의 신석기 조몬시대 인류는 모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시작해 한반도와 알래스카까지 뻗어나간 북방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조몬 토기는 BC 1만년에서 BC 3000년대와 그보다 조금 늦게까지 분포한다.

 

일본 혹까이도 섬 최북단에 일부 남아 있는 아이누족은 오랫동안 조몬인의 후손으로 여겨졌다. 일본 정부가 종족외혼을 장려한 결과 순수 아이누는 지금 100여 명밖에 없지만 이들은 현재 일본인들보다 몸에 털이 많고 얇은 입술과 잘 발달된 턱을 지녔으며 몽골형 눈꺼풀이 없다. 백인인 코카서스 인종이 분명한 이들의 먼 조상은 아시아 북서부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조몬인은 수천 년 동안 사냥으로 먹고 산 종족으로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BC 3세기경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으로 오가는 관문인 규슈 북부에서부터 나타났다. 논농사법과 금속지식을 지닌 완전히 다른 혈통의 야요이(彌生) 종족이 나타나 조몬인을 밀어내고 규슈에 정착했다. 이들의 신기술은 일본 땅 절반을 넘어 동부까지 퍼져갔다. 규슈에서 발굴된 야요이인의 두개골은 한반도 남부 사람의 것과 유사하다.

 

야요이인은 조몬인과도 결혼해 논농사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농토를 빼앗기 위해 원주민을 토벌하기도 했다. 몇몇 고분에서는 조몬과 야요이 유물이 섞여 나오기도 하는데, 이때 토기의 생산이라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A.D. 57년 쓰여진 역사서는 이 당시 왜에 100여 개가 넘는 부족집단이 청동기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본 역사가들이 말하는, “이보다 700년 전 신인(神人) 진무천황이 나타나 통일국가를 건국했다”는 주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온 야요이인은 대부분 농부였다. 한국인들이 엄청난 학식과 신기술을 가지고 이주해 온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고분시대 이후의 일이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집단 정착지를 이루고 군림했으며 조몬인은 피지배계층이 됐다.

 

위의 상황으로 미뤄보건대, 일본 외무성이 내놓은 ‘일본약사(日本略史)’에서

“일본에 논농사와 금속문화가 들어온 것이 B.C. 9세기”라고 한 것은 실제보다 500여 년이나 앞당겨 쓴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또 “야마도 정부는 B.C. 5세기경 일어났다.”

라고 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여전히 구석기 조몬시대라 철로 된 창칼도 없었고 논농사도 짓지 않았고 대단위 정부조직도 없었다. 고고학은 일본 외무성의 이런 역사기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고고학은 구석기 인간인 조몬과 아이누족이 정벌 당했거나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집단과 섞여버렸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에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집단은 일본 열도 여러 군데에서 한국문화를 발달시켰는데 그중 세 군데가 발달의 본산이 됐다. 규슈지방, 북쪽 해안의 이즈모 지방, 그리고 야마도로 알려진 오사까 나라평원이 그곳이다.

3세기에 한나라가 망하자 난징과 산둥 부근에서 ‘진인(秦人)’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을 거쳐야만 일본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그중 일부는 한국 땅에서 몇 대를 살다가 한국인이 됐다.

 

[日本書紀] 이전 후한의 공식 사서인 [한서(漢書)]나 [위지(魏志)] 등 3세기의 책에 따르면 왜에서 부족 간의 권력투쟁에 의한 내전이 있었다. 지나(支那)에서는 이들을 ‘왜구(矮寇=난쟁이 도적)’ ‘왜족(矮族=난쟁이 족속)’이라 일컫고 있었다. 몇 구절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왜인(矮人)들은 새해도 모르고 사계절도 모른다. 그저 봄에 밭을 갈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으로 한 해를 가늠한다. 한 족장이 다른 부족장들보다 강력해 보인다. 규슈에 그 족장의 부() 족장이 있다. 여자들은 몸에 분홍과 붉은 물감을 칠하고 맨발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길은 날짐승의 통로나 다름없고 좋은 논이 없다. 주민들은 물고기를 잡아 나무그릇에 담아서 맨손으로 집어 먹는다. 독한 술을 많이 마신다.”

 

적어도 지나인 기록자의 판단에 따르면 3세기 후반 일본 문명은 거의 원시시대나 다름없었다. 당시의 상류층은 조그만 봉분형 무덤을 만들고 청동거울이나 동검, 동탁을 부장했다. 청동방울을 쓰는 한국인의 도래로 청동과 더불어 철기를 사용하며 지석(支石)을 세우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처럼 연달아 일본 땅에 들어온 이주자는 뒤떨어진 왜국에 와서 쉽사리 지배층이 되어 더 낳은 삶을 구가하려는 한국인들이었다. 이 시대에는 민족주의란 개념도 없고 한국과 왜국에 대한 충성심이 대립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다는 주요 수송통로이고 소통할 수 있는 길이었다. 한반도의 같은 지역에서 떠나온 한국인들은 왜국에 와서도 같은 지역에 모여 살았다.

 

5) 첫 번째 신라인 개척자, 스사노오노

 

신라인은 그중에서도 활동적인 이주 집단이었다. 북쪽 해안의 이즈모(현재 시마네현 마쓰에)가 그들의 주된 거주지였다. 오늘날에도 이즈모에는 신도(神道)에 나오는 天照大神(아마데라스 오오미까미의) 오빠로 알려진 맹렬한 남성 스사노오노 미꼬도(素盞鳴尊 또는 須佐之男)를 받드는 신사가 있다. 스사노오노는 실존인물로 신라에서 온 첫 번째 개척자인 듯하다. 그의 아들은 신라에서 옷감을 취급하는 상인이라는 암시가 [日本書紀]에 나와 있다. 이즈모신사는 천조대신을 받드는 [이세신궁]보다 오래된 곳이며 한 때는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었다. 지금도 ‘이즈모신사에서 결혼하면 복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성스러운 백마 모형을 안치한 마구간 건물도 있다.

 

이로 미루어 초기에 신라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을 이끈 스사노오노 같은 무속적인 지도자는, 그보다 늦은 시기 경주 천마총을 만든 사람들과 같은 일파임을 알 수 있다. 스사노오노를 상징하는 신칼은 그가 머리를 베어 죽였다는 용의 꼬리에서 뽑아낸 것이라 한다. 이 칼은 ‘오로시노 가라스끼’, 다시 말해 ‘한국의 용검()’이라고 불린다. 이 칼은 일본 왕권을 상징하는 [삼종신기(三種神器)]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한반도에 삼국이 있던 것처럼 일본에도 세 곳의 새로운 한인 정착지가 있었다. 신라인들은 이즈모에, 고구려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은 규슈 북쪽에 자리 잡았다. 부산―가야―백제 지역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동쪽 깊숙이 야마도 또는 나라(奈良)라고 불리는 땅으로 모였다.

기운 찬 한국인들이 일본 땅으로 건너가면서 시베리아 지방에 성행한 것과 비슷하게 그들의 무속신앙도 옮겨갔다. 따라서 이들은 신의 경지에 들어가 영혼 세계와 소통하면서 무리를 재난에서 막아줄 사람을 지도자로 받들었다.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이 당시 모든 한국인은 무속신앙을 갖고 있었고, 일본의 무속은 한국에서 유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세계 여러 나라가 샤머니즘 형태의 신앙을 받들었다.

 

6) 이즈모 · 규슈 · 야마도가 한인 정착지

 

북방 전역에서 태양은 소중한 존재였다. 곡식을 여물게 하는 태양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었다. 뱃사람의 삶에 중요한 바람도 숭상되긴 마찬가지였다. 또한 지방마다 특수한 신을 모셨다.

논농사에는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대가족이 필요하다. 풍년을 기원하는 온갖 행사가 치러졌다. 다산과 풍년은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어 오늘날에도 신도(神道) 신앙에는 풍년과 다산의 성적(性的) 상징이 가득하다.

애초에 존재하던 수천 개의 조그만 마을은 야요이시대에 와서 점차 통합되고, 가미()도 넓은 지역을 부여받으면서 줄어들었다. 지도자가 나타나 지배영역을 확보하면서 조상신이 더욱 숭상됐다. 이에 따라 지도자인 왕의 조상신은 훨씬 우월한 것이 됐다.

 

일찍이 신라에서 건너와 이즈모에 모여 사는 집단과 그보다 늦게 건너와 천조대신을 수호신으로 받드는 집단 사이에는 모호하게나마 권력분배가 이뤄진 듯하다. 당시의 기록에는 여왕 히미꼬(卑彌呼)가 3세기 말 실제로 일본의 일부 지방을 다스린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고대 일본사에는 이런 여걸이 많이 등장한다.

 

일본 천황 혈통이 천조대신과 태풍의 남신(男神) 스사노오노미꼬도의 결합으로 비롯됐다는 설정은 그때 일종의 타협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신이 아마데라스 여신의 목걸이인 곡옥 500개를 씹어 먹은 후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즈모의 신라인 집단은 시간적으로 먼저 일본에 건너왔다. 그런데 뒤늦게 김해에서 떠나온 부여 기마족 또는 가야 백제인 집단은 성능이 뛰어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규슈에서 오사까, 나라지역으로 이동했는데, 본질적으로 같은 한국인인 두 집단은 평화협정을 맺어 이즈모 그룹이 해의 여신에게 첫째 자리를 내주며 항복했다. 이것이 일본역사에서 말하는 ‘국양(國讓, くにゆずり)’이다. 이리하여 天照大神은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나와 있는 대로 초대 일왕의 거룩한 조상이 됐다.

 

이즈모에 모인 집단은 아마도 뱃사람과 어부들이었기에 바람신을 숭상하다가 논밭을 지닌 아마데라스 여신 그룹에게 제압당했을 것이다. 이즈모 주변 땅은 벼농사에 적당하지 않았다.

같은 한국인인 두 개척자 집단은 결국 경쟁보다는 타협 쪽으로 뜻을 모았는데, 그 방법은 혼인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아마데라스의 자손인 1~3대 천황은 모두 스사노오노 쪽의 여자들과 결혼한 것이다. 스사노오노, 즉 이즈모 바람신의 후손인 이 여자들은 조상으로부터 신통력과 점성술을 이어받은 무당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초기 천황들의 이름과 가계를 살펴보면 이즈모에 정착한 신라인의 자취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역사를 암기하던 7~8세기 직업 사관들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7) 일본이 가야를 정복했다고?

 

4세기 후반 왜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변화는 아주 급격한 것이었다. 3세기의 사서에는 ‘일본에 말()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말의 존재가 입증된 것이다. 이 말들은 배에 실려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고구려 이웃 북방지역의 부여족이 길들여 사용하던 작달막한 몽고말인데, 부여족이 한반도 서부지역(백제로 알려진 곳)을 점령하고 부산 근처 가야지역으로 퍼지던 때에도 부여족이 대동하고 다녔다. 한국 고대사에 ‘동부여가 바다로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본사는 이를 회피한다.

 

백제지역을 정복한 부여족은 그대로 남아 살기도 하고 일부는 나아가 가야족을 정벌, 그곳에서 입지를 굳건히 다진 뒤 더 용감한 일부는 369년 바다 건너 일본 땅으로 갔다. 대담하게도 말이 동승할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간 이들은 4세기의 가장 큰 선단부대였으며 작전은 성공했다.

 

일본의 어용 사학자들은 물론 이를 ‘부여족의 일본 정벌’로 기록하지 않는다. 하지만 [古事記] [日本書紀]의 신공왕후, 진무 및 여러 왕대의 기록에는 이 사실이 수없이 반영돼 있다. 8세기 당대 지배자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역사 쓰기에서 사실은 왜곡되고 180도 뒤집어져 ‘일본이 가야(미마나, 任那)를 정벌했다’고 기록됐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로 가야가 일본을 정벌한 것인데 말이다!

 

B.C. 18년 백제 건국에서 6갑자, 즉 360년 이후를 보면 당시 부여 기마족의 이런 움직임과 대략 부합한다. 한(漢) 나라 멸망 이후 동아시아 전역에서 역사 개편의 소요가 지속되던 때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진나라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부여족은 남하하면서 멸망한 낙랑족과 합류하며 세를 불렸을지 모른다.

 

일본에서 말하는 이른바 ‘역사’에 따를 것 같으면 중애천황(仲哀天皇)은 362년 죽고 그의 처 신공왕후(神功王后, おきながたらしひめのみこと)의 섭정이 이어졌다. 신공은 한국에서 출생한 왕녀다. 신공과 그녀의 아들 오진왕(應神天皇)의 출현은 일본의 역사서에서 그 연대가 정확히 두 갑자인 120년 전으로 앞당겨졌다.

그러나 전체적인 왜곡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다. 그들에 따르면 신공이 가야(미마나)를 정복하고 이곳을 ‘일본(일본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에)’이 지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369년에 가야에 기반을 둔 부여족이 바다 건너 규슈로 건너가 왜()를 정벌했다.

 

부여족 선단의 항해 방향을 거꾸로 돌려놓은 사실을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 일본역사서는 ‘신공왕후가 대구까지 올라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했으며 신라왕은 자발적으로 항복했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는 모두 날조다. 왜는 한반도에 침입해 대구까지 올라갔다가 방향을 틀어 다시 남하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정복한 일이 없다.

 

8) 진무천황 = 이와레 왕자 = 오진천황

 

8세기 일본 사가들은 ‘구다라기(百濟記)’를 참고했을 것이다. 부여족은 대구를 정복하고 계속 남하했다. 그들은 만주의 본거지를 떠난 이래 계속 몽고말을 타고 이동했다. 부여는 남쪽에 퍼져 있던 마한 원주민을 제압하고 백제 지역에서 전리품을 얻어낸 뒤 낙동강 유역의 근거지나 부산으로 떠났다.

 

이러한 부여족의 정복활동 전체가 일본 사서에는 ‘이와레 왕자의 야마도 동정(東征)’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레 왕자는 후일 진무(神武)천황이란 이름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이와레의 ‘이와’는 지금도 바위()를 뜻하며 ‘레()’는 부여(扶餘)족속이란 의미의 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무천황이란 이름은 [古事記]와 [日本書紀]가 편찬된 이후인 800년경에 와서야 처음 등장한다. 이와레, 즉 부여 바위왕자가 지나간 길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는 규슈에서 출발해 일본 내해를 따라 동쪽으로 400km 넘게 떨어진 나라(奈良)의 야마도 평원으로 항해한 것다. 지름길인 시고꾸 섬의 남쪽 태평양 바다로 들어올 수 있지만 당시 배의 성능상 내해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이와레 왕자의 동정 속도는 느렸다. 곳곳에서 원주민의 저항에 부딪혔던 것으로 보인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이와레 왕자의 동정은 4년, [古事記] 따르면 16년이 걸렸다. 마침내 그의 부대는 오사까와 요도강에 상륙했지만 여기서 오랜 원주민(아마 야요이족일 것이다)의 저항을 받아 패했다.

 

이에 그들이 받드는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가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진군해온 것을 노여워해 패했다고 생각하고 이즈(紀伊)반도로 배를 돌려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부터 상륙했다. 후꾸오까현 동굴 고분벽화에 아마도 진무와 야다노가라스(八咫烏)의 전설을 묘사한,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진무의 배를 인도하는 그림이 있다. 이때 이와레 왕자의 두 형제가 폭풍에 휘말려 죽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용왕의 딸이었다고 한다.

 

시련이 많았지만 마침내 그릇에 제물을 담아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와레 왕자도 토기를 직접 빚었다. 또 다시 치른 전투가 패색이 짙어졌을 때 금빛 깃털이 달린 연(매를 말한다)이 이와레 왕자의 활에 내려앉아 적들을 눈부시게 만든 덕분에 이겼다. 오늘날 일본군부의 최고 휘장은 금빛 연 훈장이다. 이와레 히꼬노스메라미꼬도(磐餘余彦) 왕자, 즉 진무천황은 오진천황을 말한다. 일본사를 늘리기 위해 오진천황의 활동을 진무라는 가상 인물에 갖다 붙여 기록한 것이다.

 

이와레 왕자(오진천황)은 우네비산(畝傍山)에 안장됐다. 지금도 매년 4월 초사흗날 왕실의 제관이 나와 산과 강, 바다에서 나는 제물로 제사를 지낸다. 제관들은 그 제사가 현재의 일본 천황가문이 큰 덕을 입은 외국인 정복자에게 올리는 것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첫 역사책에 그의 동정(東征)에 관한 기록은 대단히 세밀하게 기록된 반면,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아들 닌또꾸(仁德)왕의 통치에 대해서는 많이 기록돼 있다. 닌또꾸는 가장 큰 능묘를 축조했다. 이 능묘는 경주고분의 것보다 더 크다. 일본에는 규모가 다른 2000여 기의 고분이 있는데 한반도에 가까운 규슈 북부의 후기 야요이시대 무덤은 자그마하다. 그러나 5세기가 되면서 고분은 갑자기 엄청난 규모로 커진다. 이 대형 고분들이 모두 오사까―나라 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9) 닌또꾸 왕릉 발굴이 금지된 이유

 

또한 이들 고분에는 수많은 부장품이 매장돼 있다. 3세기 의 책 <위지>는 “왜에는 말이 없다”고 했으나 대형 고분에는 한국식 마구와 무기류가 부장돼 있었다. 부여족이 전투에 쓰던 말과 마구, 당시의 최신무기인 철제무기들로 보인다.

 

옛 천황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군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발굴이 금지된 상태다. 그런데 1872년 폭풍으로 닌또꾸 왕릉이 무너져 이를 복원할 때 내부를 본 컬럼비아대학의 쓰노다 류사꾸(須田作) 일본사 교수는 부장된 유물이 “더할 나위 없이 한국적이었다”고 했다. 일본 당국이 부여 기마족의 야마도 정벌을 논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닌또꾸 왕릉을 발굴해야 한다.

 

부여족 혈통의 두 번째 왕이 되는 닌또꾸 천황([日本書紀]에는 16대 왕으로 기재되어 있다)은 능의 규모로 보아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듯하다. 그의 통치형식은 봉건제이지만 장관이나 봉건영주와 같은 4개의 우지()가 있어 왕명은 모두 그들을 통해 전달됐다. 4명의 우지 중 3인은 부여 기마족 건국자 오진왕을 보좌하는 무장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옛 야요이족 출신으로 무속의례를 주관하는 모노노베(物部) 가문이었다.

후일 모노노베 가문은 임금이 되는 근거가 무속신앙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무속과 대치될 불교가 왜에 유입되는 것을 반대했다. 나까도미 가문도 오래 전 왜에 자리 잡은 집안으로 여러 신에게 종교의례를 집전하며 사슴뿔을 갖고 점술을 행하였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일본 전역에서는 무속을 믿었지만 군사 권력이나 종교권력은 모두 세습되고 있어서 혈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일본 역사가들이 당대 주요 가문의 역사를 모두 신의 시대라는 고대와 연관시키고 조상을 모두 신으로 설정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10) [삼종신기]가 가리키는 것은 한국

 

일본 왕권의 상징으로, 이를 소유한 사람이 왕이 된다는 삼종신기(三種神器)는 4세기부터 전해 내려왔다. 그러한 전통은 전적으로 무속신앙에 따른 것이다.

그중 하나인 동경(銅鏡)은 처음엔 지나에서 제작됐는데 이것은 신통력을 지닌 것이라 하여 죽은 자의 가슴에 놓인 채 사후세계를 위해 부장되었다. 동경의 번쩍이는 기능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일반화한 태양숭배와 통했다. 6세기 초 신라 금관에 달려 있는 조그맣고 둥근 금판도 태양을 뜻한다.

[삼종신기]의 둘째 물건인 칼은 왕권의 상징으로 일찍이 신라에서 이즈모로 이주한 한국인의 권세를 말해준다. 이 특별한 칼은 맹렬남 바람신 스사노오노가 머리 여덟 개 달린 용을 쳐부수고 얻어냈다.

 

삼종신기(일본어: 三種の神器 산슈노 진기/미꾸사노 가무다까라는 아마테라스로부터 하사받아 현재까지 일본 천황에 의해 계승된다는 세 가지의 물건으로,

❶구사나기의 칼(草薙劍),

❷야다의 거울(八咫鏡, やたのかがみ,

❸야사까니노 마가디마(八尺瓊曲玉)를 말한다.


일본의 국보 <3종 신기>

 

삼종신기는 천황조차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만큼 귀중한 물건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셋째 신기는 곡옥 또는 곡옥목걸이다. 곡옥은 일본에서 나지 않고 한반도 북부에서 나는 연옥이나 경옥을 깎아 만들었다. 고대에는 다른 신기보다 이 곡옥(일본에서 [마가다마]라고 부른다)이 진정한 왕권의 상징이었다. 경주 고분에는 이런 곡옥이 수십 개씩 장식된 금관이 많이 부장됐다.

곡옥은 태아나 올챙이와 비슷한 모습이다. 물고기는 아시아 전체에서 부의 상징이다. 그 위에 한국 무속에서 호랑이는 산신의 전령으로 중요한 존재이며 벽사(辟邪, 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침), 용으로 지니는 호랑이 발톱은 곡옥과 생김새가 같다. 그러나 곡옥이라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며 그중에는 곰의 발톱도 있다. 단군은 웅녀(곰 토템 부족의 여인)의 아들이며 아이누족은 곰을 신으로 받든다. 혹까이도의 아이누족은 지금도 곰 축제를 연다. 곡옥은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발굴된다. 이 물건의 이동경로는 북에서 남으로 향한 것이지 절대 그 반대방향으로 역류해온 것이 아니다.

 

[古事記], 특히 [日本書紀]에선 왕가의 분열상을 감추려는 끊임없는 조작이 행해졌지만, 14대 중애대()에 결정적인 단절이 있었다. 중애 이전 13명의 왕들은 모두 야마도에 거주했다는데, 중애왕만은 규슈에서 살았던 것이다. 중애왕은 10척 장신이라는 식의 특징적인 묘사가 많다. 그는 마지막 야요이 종족인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중애왕비 신공왕후에 대한 기록이다.

 

11) 한국의 왕녀 신공왕후(神功王后)

 

[日本書紀]에 따르면 신공은 신라에서 온 것이 분명한 한국 왕자 아마노 히꼬꼬의 딸이지만 가야에서 왔을 확률이 더 높다. 중애왕은 신공과 결혼했다. 그는 이미 두 왕비에게서 얻은 아들 둘을 두고 있었다. 새롭게 왕비가 된 신공은 매우 명석하고 영리했으며 얼굴은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워 아버지가 그를 매우 특별히 여겼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신공은 야심이 대단하고 수완도 비범한 한국 왕녀였던 듯하다. 그녀가 한국을 원정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정반대의 것일 수 있다. 그녀의 전설적인 행적은 A.D. 369년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와 일본을 정벌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외국인 왕족 신공의 개인적 거사(擧事)인 이 원정이 일본사에는 이와레 왕자의 무공에 가려 기록되지 않았다. 일본 사가들은 부여족의 일본 원정 중 일부를 따서 이 두 인물의 전설적인 무공으로 돌려놓은 듯하다.

 

한반도가 이들에게 점령당해 왜 땅으로 편입되고 신라왕이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남녀가 신무기를 들고 바다를 건너와 왜를 정복한 것이다. 또 다시 ‘바위’가 저변에 드러난다. 신공은 중애왕의 아이인 태아(이와레 왕자, 즉 오진왕을 말한다)를 한국이 아닌 왜 땅에서 낳으려고 자궁에 돌을 끼워 막아 출산을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부여족의 일본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왜 땅에서 태어난 자주적 왕가라는 해석이 가능하게끔 한바탕 작전이 연출된 것이다. 이로부터 350년 뒤 일본사를 처음 편찬할 때 한국과의 혈연관계를 덮어버리기 위해 역사기록의 전후좌우를 뒤바꾼 것이다.

 

12) 신성시 되나 실권 없는 日王

 

5세기는 신라와 야마도 두 나라 모두 무당이자 제관인 지배자의 힘이 정점에 달했다. 527년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무속의 색채는 많이 사라졌지만 일본에서는 계속 무속이 힘을 발휘했다. 이 원시 민중종교 신도(神道)는 9세기에 불교와 대치되는 종교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신도는 점차 일왕 숭배를 위한 도구로 변질된 반면, 한국 무속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왕권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처음에는 불교가, 나중에는 유교가 작용했지만 그것은 신비한 주술적 힘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군사권이 무속과 결부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또는 ‘신성한 천황’을 위해 싸우는 일이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고 정책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친 고다이고(後醍歸) 천황조와 메이지 유신 이후 19세기에 이러한 풍조는 극에 달했다.

 

일본 역사 초기의 무속신앙은 한국에서와 비슷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인 산신(山神)은 일본 무속신앙에 전적으로 흡수됐다. 즉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손자 니니기는 규슈에 하강하여 산신의 딸을 만나 사랑하면서 그녀가 그날 밤 잉태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단군설화와도 비슷하다.

 

성군이 나오면 받들지만 패륜 군주가 나오면 제거한다는 것이 지나의 천명(天命) 개념이다. 지나에서는 천명을 내세워 왕조를 바꾸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결코 일본에는 도입되지 않았다. 그 대신 권력 가문이 내세운 총리나 장군이 권력을 행사했으며 천황은 신성시되긴 했지만 실권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편찬자들은 한적(漢籍)을 옆에 두고 이를 표절한 것이 분명하다. 한 예가 닌또꾸 천황은 거대한 묘 규모로 보아 일단의 강제노역을 동원한 왕이었으나, [日本書紀]는 그를 민가에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다 하여 3년간 세금을 면제해준 매우 인자한 군주로 기술했다. 사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닌또꾸왕대()에 부여 기마족이 들여온 오락거리로 매사냥이 유행했다.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쓰기도 했다. 경주 석빙고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를 통해 비단과 무명을 비롯해 금 ․ 은 ․ 철 ․ 한문책 등이 들어오고 교역량이 늘었다. 이때도 불교는 유입되지 않았다.

 

13) 흔들리는 부여 왕통

 

8세기 역사기술의 방편 중 하나는 유명 가문 우지()의 조상을 일본 건국자 이와레 왕자의 원정에 동참한 신()들과 연결하는 것이다. 대표 우지는 가문 전체에 군림했다. 왕의 명령은 대표 우지나 장관을 통해 하부로 전달되고 농민과 장인이 여러 우지에 종속되어 노역을 하면서 살았다.

우지는 외국, 특히 한국이나 진나라에서 비단옷 재봉, 직조 같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온 장인들이 형성한 것으로, 외래 예술과 기술을 망라한 이런 전문 우지가 700여 개나 됐다. 노예도 있었다. 남부 규슈가 전쟁에 패하며 생겨난 구마소족 같은 전쟁포로나 동부 혼슈에 굴종한 에미시족이 그러했다.

 

우지들의 존재로 왕권은 일정 부분 제한됐지만 천황이 군부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면서 누가 천황이 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황은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시나 짓고 꽃밭이나 산책하고 제사나 지내고 빈둥거리면 그만이었다. 대신 국가의 정무는 민간 출신의 권력자가 집행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거나 천황가와 혼사를 맺는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한국 출신 가문이 번성하여 부여 지배계급과 혼사를 맺었다. 이 가문에서는 몇 대에 걸쳐 딸을 왕위 상속할 만한 자들에게 비로 들여보내고는 뒤에서 조종 하여 사위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후일 후지와라(藤原) 가문 같은 총리대신급 집안에서도 딸과 손녀를 줄줄이 왕비로 들여보냄으로써 일본의 왕권을 자기 뜻대로 조종했다.

 

5세기를 통틀어 왜국의 왕위는 부여 기마족의 후손이 차지했다. 닌또꾸왕의 비 바위 공주, 즉 이와노히메(磐之媛)는 가야 출신 가쓰라기 우지의 선조인 가쓰라기노 소쓰(葛城襲津)의 딸이었고 그의 손녀딸 하에는 부여왕족 혈통의 두 임금 겐조(顯宗)와 닌껜(仁賢)의 어머니다. 겐조 왕대에는 경주 포석정에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잔치를 벌인 것처럼 그도 닷새씩이나 연회를 계속하며 곡수연(曲水宴)을 즐겼다.

 

그러는 동안 부여왕통은 차츰 유약해지고 혈통과 파벌 간에 왕권 다툼이 생겼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26대 왕인 게이타이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변방 지역에서는 이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527년 북규슈에서 일어난 [이와이(岩井)의 난]은 왕권교체에 반발하는 부여 기마족 후손들의 저항으로 보인다. 이즈음에 백제가 가야 땅을 조금씩 먹어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부여 기마족의 한반도 내 지지기반도 전과 같지 않았다. 얼마 뒤 532년에는 신라가 가야의 북부를, 이어서 562년 남부 가야를 정복함으로써 가야는 끝났다.

 

6세기 말에는 불교 도입을 놓고 가야 출신 신진세력과 화족 사이에 큰 대립이 생겼다.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에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소가(蘇我)와 오래된 무속을 그대로 받들자는 모노노베(物部) 두 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여기에선 친불교파가 승리했다. 이후 50여 년간 한국인 후손 소가 가문이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어 딸들을 계속 왕비로 만들었던 만큼 일본 왕의 혈통에는 한국인 소가파의 피가 많이 스며들어 있다.

 

14) 비단 직조술 전파한 하다 가문

 

점차 한국의 상류층이 전문기술을 가지고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한 예로 300년경 백제에서는 가께쯔(眞毛津)라는 이름의 옷 만드는 여성을 보냈다. 그 후손들은 기누누이(衣縫· 비단 직조 공인)로 자리 잡았다.

덧붙여 기록에는 265년 진시황(또는 사마염)의 방계손 하나가 일본에 왔다고 한다. 그 궁월군(弓月君)이 처음에는 한국에 정착하여 120 가구를 거느리고 살았다. 시국이 복잡해지자 그는 후손을 모두 거느리고 왜로 이주했다. [日本書紀]에는 처음 백제인 궁월군으로 기록됐다가 9세기에 나온 책 [신찬성씨록]에는 ‘진시황제 3세손 효무왕’으로 그 표현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뛰어난 비단 직조기술을 가지고 온 하다우지(秦氏)는 부여 기마족의 통치 아래 번성했다. 이들은 광대한 토지를 하사받았다. 175년이 지난 후 하다 가문은 1만 8670명으로 불어났다. 한국말을 하면서 살던 하다 사람들은 별도의 지역에 모여 살았으며 불교가 들어왔을 때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600년경 이 집안의 우두머리는 하다 가와가쓰(秦河勝)라는 사람이었다. 왜국과 한국의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던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죽었을 때 하다 가와가쓰는 이를 진정으로 슬퍼한 주요 인물이다. 그리고 100년쯤 지나 하다의 후손은 이번에는 간무(桓武) 천황의 통치를 도왔다. 그는 하다 집안 소유의 땅 중에서 지금 교또시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대지를 간무 천황에게 내주어 795년, 여기에 새 수도 교도를 건설하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교또는 비단 직조로 유명하다. 하다 우지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일에 종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히데요시는 직조인들을 교또의 서북쪽 니시진(西陣)으로 이주시켰다. 그들의 혈통은 근본적으로 일본계가 아니지만 지금 그 일을 들춰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여 기마족 시절 일본과 사이의 광활한 바다를 건너는 직항로를 개척하기는 불가능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지나와 일본 간의 소통은 한정적이었고 그나마 한국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부여 기마족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해상수송업도 성장했다. 이를 입증하는 사실 하나는 가라노(枯野)라는 배가 26년이 되어 더 쓸 수 없게 되자 태워버리면서 소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배에 불이 났을 때 신라 사신들이 신라에서 배 만드는 장인을 불러다 수리해주었다. 이것이 저명부(猪名部)의 시초다.

 

15) 가야금을 본 떠 만든 고도(こと, )

 

또한 가라노(枯野) 배에서 나온 나뭇조각으로 고도(こと, )라는 악기를 만들었다. 고도의 원조 격인 가야금은 1세기에 가야에서 처음 만들어 썼으며 신공왕후가 일본에 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들 오진왕이 가라노 배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기마족이 온 뒤로 일본은 큰 변화를 겪었다. 일본의 관념론자들은 부여족의 원정에서 힌트를 얻어 이를 진무천황의 동정(東征)으로, 신공왕후 이야기로 꾸미고 이즈모 사람들이 진무에게 항복했다는 기이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8세기의 일본 사관들은 부여족의 정복을 은폐하고 만세일계의 일왕가를 만들어 정복 사실을 반대로 뒤집고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잠자던 씨가 후일 ‘현인신(現人神) 천황’을 핵심으로 한 군국주의로 발아되었다. 이등박문과 그 일파가 일본을 세계강국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그들은 불교나 기독교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종교임을 알았다. 고대 신도(神道) 신앙은 초군국적, 초애국적 이념을 고취하는 데 이용하기 꼭 좋은 비조직적 신앙이었다.

 

16) 한국인의 도움으로 탄생한 불상(佛像)

 

한국에서는 불교 유입 이후, 왕이 신과 소통하는 제관을 겸하던 무속적 개념이 좀 더 현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불교로 완전한 몰입이 이루어졌다. 맹렬한 불심을 가진 쇼무(聖務)왕은 딸(효겸천황)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출가해 중이 되었다. 일본 불교는 도경(道鏡) 선사(효겸의 사랑을 받아 권력을 전횡한 승려)처럼 파행적인 경우도 있지만 기적과 천황 숭배를 중심으로 하여 국가 안보를 주도한 무속 가문 나까도미(中臣)와 모노노베 우지에 의해 보존돼 왔다.

한국에서 불교가 들어오고 200년이 채 안 되어 불교는 이 섬나라를 완전 점령했다. 불심이 깊은 쇼무는 지방마다 절을 짓고 7층탑을 세웠다. 더 나아가 온 나라의 자원을 긁어모아 구리 100만근을 녹여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불상 제조가 여섯 번이나 실패로 돌아가자, 나중에는 그 일을 한국인 후손인 불교예술가에게 일임했다. 마침내 한국인의 손에 의해 불상이 만들어졌고, 그는 궁중의 4급관인 벼슬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일본은 한국인의 도움 없이는 잘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17) [필자의 결론] 역사 바로 가르치자

 

왜놈들은 정말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쓰레기들인가! 지진 많고 태풍의 길목인 섬나라를 떠나 우리 땅에 와서 살려고 가진 악선전에 모략중상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죽을 죄를 짓고도 얼굴에 철판을 깐다. 그들은 우리 민족을 깎아내려, 이조(李朝), 사색당파(四色黨派), 민비(閔妃), 엽전(葉錢), 이런 언어들은 만들어 퍼뜨렸다. 우리나라를 침략, 감점하고 조선 왕조를 이가(李哥)네 조선으로 격하시키고, 500년 동안 당쟁만 일삼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미개민족이라고 선전하기 위해 만든 소위 황국사관(皇國史觀)의 대표적인 표현 언어들이다. 놈들은 야꾸자를 시켜 우리 국모(國母) 명성황후를 죽이고 시간(屍姦)까지 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를 「민비」라 격하시켰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고종황제까지 독살했다.

 

그리고 한국인을 ‘후데이센징’이니 「엽전」이니 하며 경멸했다. 그런데 오늘의 나라꼴을 보면서 어느 유명인사 개탄하기를 “이조 500년 동안 사색당파로 갈라져 싸움질만 하던 엽전들, 이제라고 별 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당쟁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왜놈들이 조선 왕조 실록에서 「당쟁사」만을 골라 역사책에 수록하여 열심히 가르쳤고, 애국지사의 자제들은 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했는데, 친일파의 자식들은 일본 유학을 하고 총독부(總督府) 고관이 되고, 대학 교수가 되어 일본이 만든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이완용의 후손들이 지금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요즘에는 역사학자들 중에서 민족사관(民族史觀) 바로 세우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악랄하게도,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웠는가를 증명하는 증거가 서울 도처에 있다.

몇 해 전 철거된 총독부 건물은 일본 국회 의사당과 같은 모양인데 날 일()자 모양으로 지었고, 서울시청 건물은 일본 동경(東京) 도청(都廳) 건물 모양인데 근본 본()자 모양이다. 북악산의 모양이 큰대 자 형상이니,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大日本」 이란 글씨가 서울에 박혀 있는 형상이다. 옛 서울대 문리대 건물은 동경대 건물과 같이 지었고, 문도 붉은 색 문 「아까몽」 (あかもん、赤門) 이었다. 서울 역 건물은 동경역 건물 같고, 한국은행 건물은, 일본은행 건물과 같다. 왜 이렇게 돈을 들여 같은 건물을 만든 것일까. 일본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이루어, 지나 땅까지 점령하면, 대일본 제국의 수도를 서울로 옮기고, 지네들이 지진과 태풍이 없는 우리 땅에 와서 살고, 우리는 일본 섬나라로 이민시키려는 장기 계획이었던 것이다.

 

왜인들에게 잠언 16장 1절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

18) “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결정은 야훼께서 하신다.”

 

그런데도 아직도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용어를 멋도 모르고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하루 빨리 주체성을 회복해야겠다.

 

옛날 왜놈들이 경복궁 궁궐을 헐고 총독부를 짓고, 창경궁과 종묘를 뚝 잘라 길을 내고, 왕의 거처인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 때, 우리 선조들이 다윗의 시편 중 “저주의 시”[주 : 아래 구절]를 괄호 안의 말로 읽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 6 내가 예루살렘(조선)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조선)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조선)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왜놈) 자손을 치소서. 저희(왜놈)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8 여자(창녀) 같은 멸망할 바벨론(왜놈들)아 네가 우리(조선)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9 네(왜놈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시 137:6―9).

 

 

7. 제암리교회 학살방화사건

1) 치가 떨리는 왜놈들의 만행

 

1919년 4월 15일에 일어난 제암리교회 학살ㆍ방화사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3ㆍ1운동 기간 중에 왜놈들이 저지른 여러 만행 사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특별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재조선 서구인들이 일제 만행의 소문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이 사건의 현장을 발견하고 조사하여 총독부에 항의하고, 불타 폐허가 된 현장 사진과 함께 이를 국제 여론에까지 알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서구인들의 반응과 역할을 규명하는 것은 이 사건의 의의와 영향을 밝히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이 사건을 조사하고 알린 서구인들은 주로 서울에 있던 영ㆍ미ㆍ프 영사관 직원들과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이 글에서는 이들의 반응과 역할을 자료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이에 대한 서구 민간 여론과 해외에서의 반응도 살펴보고자 한다.

 

2) 미―영―불 영사관의 반응과 역할

 

미국ㆍ영국ㆍ프랑스는 조선시대 말기인 1880년대에 차례로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고 대사관을 설치하여 대사급 외교관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된 을사 늑약(乙巳勒約)으로 대사관을 철수하고 영사관만을 남겨, 선교사들을 비롯한 우리나라에 남아 활동하던 자국 국민들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통감부 시기 이래 이들 영사관은 일제의 회유와 배려로 일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민들이 반일적인 언동을 삼가도록 주의하고 있었다. 3ㆍ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9년 1월에도 주한 미국 총영사 버그홀쯔(L. A. Bergholz)는 선교사들을 포함한 주한 미국인들에게 정치문제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1897년 5월 11일자의 회람을 다시 반포하였다.

그러나 3ㆍ1운동이 일어나 일제 군경이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군중에게 비인도적인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잇따르고 목격자들의 보고와 이에 대해서 적절한 항의를 할 것을 요구하는 선교사를 포함한 자국 국민들의 요청이 있자, 서울 주재 미국영사관에서도 이에 대한 실상 파악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이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사건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인 1919년 4월 16일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자동차로 사건 현장을 돌아보고 돌아온 레이먼드 S. 커티스(Raymond S. Curtice) 영사는 4월 21일자 총영사에게 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국총영사 앨런 버그홀쯔 각하 :

 

일본 경찰 헌병 및 군인이 여러 촌락을 송두리째 파괴하여 버렸다는 여러 정보원으로부터의 보고를 입수하신 귀관의 명에 따라 본인은 이러한 보고의 진위를 가리기 위하여 1919년 4월 16일 수원 지방으로 출장하였던 바, 이에 출장 보고서를 제출한다. 저희 일행은 AP통신의 서울 특파원 태일러(A. W. Taylor), 서울의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및 태일러 특파원의 운전수 임(Yim; 인)으로 구성되었다. 저희 일행은 언더우드 씨의 자동차로 갔으며 언더우드 씨가 직접 운전하였고 한국어 통역 역할도 하였다.

 

저희 일행의 목적지는 수일 전에 전 부락이 완전히 소실되고 전주민이 학살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던 한국 이름 수촌, 일본 이름 스이손이라는 곳이었다. 이 마을에 가기 위하여 철도를 따라 남으로 나 있는 큰길로 오산까지 갔다. 이곳에서부터 우리는 정서(正西)쪽으로 길을 잡았다. 수촌에서 가장 가까운 장이 서는 고장인 발안장(發安場)에서(일본식 발음 하쓰안쪼) 3―4마일 못 미쳐서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계곡 너머로 발안장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발안장에서 1마일 못 미치는 지점의 낮은 구릉 뒤에서 꽤 많은 연기가 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언더우드 선교사는 언덕 밑의 몇 채의 민가로 다가가 그 지방에서 있었던 일에 관하여 주민들에게 물어보고 특히 그 연기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질문을 받은 주민은 각하에게 보고된 바와 같은 사건들이 몇 건 발생하였다고 말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감히 읍에 나가지 않으며 또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밭에도 안 나갔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는 못했다. 그 주민의 말에 따르면 우리 일행이 보고 있는 연기는 전날 즉 4월 15일 오후부터 불타기 시작한 발안장에서 1마일 떨어진 제암리에서 나는 연기라고 알려 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 보고서에서 커티스 영사는 사건 현장의 참상을 6쪽에 걸쳐서 생생하게 보고하고, 같이 동행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보고서도 첨부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미국 총영사는 4월 23일 “일본군이 교회 안에서 한국인 37명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국무장관에게 커티스 영사의 보고서를 첨부하여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 후 사태의 진전을 5월 12일 “제암리에서의 일본군에 의한 한국인 37명 학살과 촌락 파괴”라는 제목으로 국무 장관에게 다시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국무부는 이러한 공식 보고를 통해서 일제의 만행을 일찍부터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공식적인 외교적 조치는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 주재 영국 영사관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로이즈(Royds) 영국 영사가 4월 19일 선교사들과 함께 직접 현장을 확인 방문하였다. 이 일행과 함께 두 번째 그 현장을 방문한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ger)의 특파원은 4월 24일자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로이즈 영국 영사는 우리가 제암리를 처음으로 다녀온 후, 정부 당국자와 회담한 자리에서, 우리의 조사 결과에 언급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선교사업에 관심을 가진 영국인 몇 명과 함께, 제암리로 내려가 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자동차에 탄 일행은 로이즈 영사, 캐나다 선교부의 하디(Hardy) 박사, 게일(Gale) 박사, 나, 예비 운전수 등이었다. 이 승용차 이외에 2대의 오토바이가 동행했는데, 거기에는 그 지역 담당 감독인 노블(Noble) 박사, 케이블(Cable) 목사, 빌링즈(Billings) 목사, 베크(Beck) 목사, 헤론 스미스 (Herron Smith) 목사 등이 동승했다. 스미스 목사는 한국 내 감리교회 일본인 선교 담당이다. (중략)

 

마을에 당도해 보니, 많은 인부들이 폐허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집들을 다시 지으려는 준비 같았다. 불탄 시체들은 모두 옮겨지고, 매우 서둘러 현장을 청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후에 찾아간 다른 마을과는 현저히 대조적이었다. 그 마을들이란 이 달 초에 파괴된 곳들이었다. 우리는 제지받는 일없이 마음대로 사진을 찍었으나,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시작하려 하면, 경찰관이 주위를 배회하여 한국인은 얼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확인 조사를 바탕으로 주한 영국 대리 총영사 로이즈(W. M. Royds)는 주일 영국대사관에 보고하고 대사 그린 경(Sir C. Greene)도 5월 5일자로 미국 영사와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첨부하여 본국 외무부에 보고했다. 한편, 주일 영국 대리 공사 얼스턴(B. Alston)은 일본 외무차관 시데하라(幣原喜重郞)를 찾아가 일본 군경에 의한 잔학행위를 중지시킬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일본군의 잔학성은 과장된 것이라고 부인하고 상황을 개선시킬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본국 외무부가 런던 주재 일본대사관에 대해 ‘문명 세계가 일본의 야만성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강렬한 공포감’을 알릴 수 있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일본군의 잔학성에 대한 보도가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 파리 평화회담의 일본 대표들에게도 주의를 환기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보고를 받은 영국 정부도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일본과의 외교적인 배려에서 이러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를 꺼렸다.

 

프랑스 영사관에서도 주한 프랑스 부영사 갈루아(M. E. Gallois)가 1919년 5월 20일자로 주일 프랑스 대사 바스트(Bapst)와 본국 외무성 외무장관 삐숑(Pichon)에게 위와 같은 영미 영사관의 보고서들과 영자지 보도를 토대로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사건에 대한 보고를 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주한 서구인들이 모금하여 이 사건 피해자들을 돕기로 했다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이 만행을 믿으려 들지 않았지만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비통해 하던 외국인들은 집을 잃고 의지할 곳 없는 희생자들의 가족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미국 총영사관에서 수차례 모임을 가진 끝에 영ㆍ미ㆍ프랑스 등 주요 외국인들의 대표 3명이 선출되고, 이들은 경기도 지사를 찾아가 방화사건의 희생자들을 돕겠다고 제안키로 했다.

마쓰나가(松永武吉) 지사는 이미 총독부가 ‘이재민’들에게 가옥 복구에 필요한 목재를 무료로 공급하고, 부상자들에게는 물자를 지원하고,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들에게는 50엔의 급여금을 지급할 예정이라 말하면서, 외국인들은 그 이상 더 잘 해 줄 일이 없으므로 도울 수 있는 것은 의류와 식기류를 배급하는 일 정도일 것이라고 했다. 삽시간에 수천 엔이 모금되어 의류와 식기류 구입에 보탰으며, 몇몇 유럽인들은 자발적으로 피해당한 주민들을 위해 텐트를 쳐주고 배급하러 떠나기로 했다.”

 

결국 이들 서구의 영사관들은 이 사건을 상세히 자국 정부에 보고하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총독부에 항의하였으며 민간 차원의 모금을 통하여 피해자를 돕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보고를 받은 본국 정부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3) 재조선 선교사들의 반응과 역할

 

3ㆍ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1919년 4월 초 장로교 선교사 어드만(W. C. Erdman), 홀드크로프트(J. G. Holdcroft), 감리교 감독 웰취(H. Welch) 등 재조선 선교사 대표들이 일본 도꾜에 있는 미국 대사 모리스(R. S. Morris)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보고하고 상의하였다. 이 때 미국 대사는 오히려 그들에게 “엄정중립을 지키도록” 충고하였고 이 문제로 그들이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는 것조차도 반대하였다. 이에 선교사들은 정치적으로 간여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무장도 반항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제가 잔인한 폭력으로 다루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미국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도 그 같이 보고하였다. 그런데 그 얼마 후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미국영사관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된 것은 감리교 선교사 노블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항의와 요청 때문이었다. 노블은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4월 10일 미국 영사관을 방문하여 선교사가 붙들려 가고 교회당이 소각되는 것에 대한 영사관의 방침을 제시하라고 문책하였다. 그 이튿날인 4월 11일에도 서울 연지동 쿤스 선교사 집에 서울지역 북장로교 선교사 토마스, 빌링스, 클라크, 루이스 등 남녀 선교사 23명이 월례 선교사회로 모여;

 

“이번 사건에 대한 관헌의 단속을 비방하고 또 이번에 전도(全道)에 산재한 약 400명의 미국인 선교사를 규합하여 대대적으로 대항책을 강구할 것이라고 하고, 또 전임 미국총영사 밀러는 우리 선교사들을 우대하여 지대한 편의를 제공하였으나 현재 총영사 버그홀쯔는 이에 반하여 항상 우리를 냉대하여 한 점의 성의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평안도 지방에서는 일본 관헌이 교회를 폐쇄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지난 유럽대전 중에도 보지 못했던 바이다. 그런데 어제 노블 선교사 등이 총영사를 방문하였을 때와 같이 총영사는 선교사의 구금, 가택 수색, 기타에 관하여 현재 고구(考究) 중이라고 하나 아직 일본 정부에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음은 타당치 못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무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총영사의 이러한 태도는 장래의 교회의 소장(消長)에 영향이 미치는 바가 심대하므로 이번에 우리는 본국 정부에 진정하여 총영사를 경질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영사관은 진상 조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커티스 영사를 출장을 보내 우선 수촌리 사건을 조사하게 하고 통역으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를 참여시켰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에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사건의 현장을 발견하여 그가 그곳을 가장 먼저 찾아간 선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이 때 주민들과 면담하여 면담 내용을 축자적으로 기록한 타이프지 7쪽에 이르는 상세한 보고서를 남겼는데,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이 보고서는 커티스 영사의 보고서와 버그홀쯔의 보고서에 첨부되어 미국무부에까지 보고되었으며, 별도로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도 보고하여 <한국의 상황>에도 전문이 실렸다. 뿐만 아니라 이 보고서는 일본 영자신문 <재팬 크로니클>지 5월 3일자에도 “팔탄(발안; 제암리)의 학살에 대한 보고서 : 충격적인 상보(詳報)”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어 이 기사를 읽은 서구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앞에서 인용한 일본측 정보 자료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지역의 일제 만행 사건을 조사하도록 미국영사관에 압력을 가한 주동자는 감리교 선교사 노블이었다. 이 사건의 현장인 제암리교회는 그가 감리사로 있던 지역의 감리교회였기 때문에 노블은 곧이어 이 사건의 현장을 둘러보고 대책을 세웠다. 노블 부인은 그의 일기에 남편이 그 지역 구제에도 참여하고 하세가와 총독을 찾아가 면담하여 배상을 약속받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 노블 선교사는 그해 10월에 열린 미감리회조선연회에서도 “수원지방 감리사 보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이 사건과 그 영향을 보고하고 있다.

 

“(전략)…남양과 제암(提岩)과 오산 구역에 7개 교회당이 일병(日兵)에게 파괴를 당하였고 기() 근방에 319가옥이 불탔고 1600인이 거처할 곳이 없이 되었고 그 지경에 참사자의 수를 분명히 지()키 난()하나 신용할만한 통지를 의한즉 신자와 불신자를 합하여 82인이라 한다. 피소(被燒)된 교회당 3처는 경축(更築)하였고 기타 3처 회당은 건축 중이다. 5월에 총독이 해() 지경을 시찰하고 1500원을 보조하였으며 선교회에서 2000원을 연조(捐助)하였나이다. 제암교회당에서 일병에게 피살된 자가 23인이나 되는 고로 금일까지 참배자는 여차(如此)한 불측지변(不測之變)을 또 당할가 무서워하는 중에 있으며 이 지경 신자 334인 중에 173인은 혹 피살 혹 피수(被囚) 혹 도타(逃他)하였나이다. 제암 지경에 있는 교인들은 여차한 불측지사를 당하며 악형과 총검에 위험을 보았으되 신심이 더욱 독실하여 가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말하기를 죽음은 하시(何時)든지 올 터인즉 위아대사(爲我代死)하신 주 예수께 진충(盡忠)하겠다 하는데, 불신자들은 항상 권하기를 예배당에 가지 말라 일병이 또 올까 두렵다 하므로 이것이 어렵다.”

 

제암리교회 사건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박사다. 그는 1916년 그의 스승이었던 에비슨 박사의 권유로 한국에 건너와 세브란스에 근무하면서 이듬해 캐나다장로교의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한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언론에 투고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그는 그해 8월 조선선교사 대표로 일본에 건너가 극동의 선교사 8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고 일본의 요인들을 면담하여 일제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4월 17일 제암리교회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바로 다음 날인 18일 자신의 자전거를 가지고 9시 열차편으로 수원까지 가서 다시 자전거로 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고 조사하였으며, 같은 날 오후 수촌리도 방문하여 부상자들을 도와주고 “수촌리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남겼다. 그는 그 후에도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들을 조사하여 영국의 성서공회 총무 릿슨(Ritson)을 거쳐 토론토의 캐나다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 목사에게 보냈으며 이것은 다시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에 보내져 거기서 1919년 7월에 발행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증거자료로 실리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일로 일제의 미움을 사 항상 감시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이듬해 3월에 세브란스 근무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귀국하였다.

그의 영향이었는지는 모르지만 1919년 7월 10일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하세가와 총독에게 3ㆍ1운동 가담자들에 대한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항의서를 채택하여 보냈다.

4) “조선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 각하께

 

캐나다 장로교 한국선교단원인 저희들은, 1919년 7월 10일 원산에서 연례집회를 갖고, 인간성이 한결같이 지시하는 대로 조선에서의 현 정치적 소요를 진압하면서 일본정부가 취한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에 당신에게도 이 같은 항의서를 제출한다.

 

‘다음과 같은 잔인한 행위―

무방비한 남녀, 어린이에게 사격과 총검질을 함.

일본민간인이 한국인을 곤봉으로 때림.

총 갈고리로 무장한 소방수가 평화적 시위자들에게 가한 야만적인 공격.

부상당하거나 죽어가는 시위자를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함.

혐의자를 재판 전에 매우 비위생적 상태 속에 무한정으로 구류시킴.

경찰 심문 중에 사용한 고문.

범죄자를 경찰이 야만스런 구타(태형)로 처벌함.

마을을 불태우고 멋대로 재산을 파괴함.

제암리 학살.

전 사회를 공포에 떨게 한 잔인한 방법들.

기독교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

모든 관대한 인간감정을 분노시켰으며, 문명국가의 기본법이나 행동과는 정반대였던 아무리 비난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불법행위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캐나다의 장로교 선교위원단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부당한 행동들이 일본인뿐만 아니라 일본과 특별조약을 맺고 있는 영국신민인 우리의 명예와도 관련된 것이므로 주저하지 않고 각하에게 항의하는 바이다.”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1919년도 말까지의 상황을 보고하는 보고서에서도 스코필드의 활동을 상당히 비중 있게 보고하고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다른 어떤 선교사보다도 한국인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세브란스 병원의 보고서에서 독립선언에 의해서 일어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름 동안에 그는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의 실상을 관리들에게 직접 설명하기 위하여 도꾜를 여행했다. 수상을 인터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지도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그 상황을 충분히 토론했다. 그는 가루이자와와 고뎀바(軽井沢子天馬, 필자 주)에서 열린 선교사 회합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일본에 있는 동안 그는 일본에서가 아니면 미국에서라도 곧 출판되기를 바라면서 한국 소요에 관한 책을 한 권 저술하기도 하였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러한 것들이 공개됨으로써 중단되기를 희망하면서’ 현재 행정당국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악행에 관한 일련의 신문 기사들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것들은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박사는 고문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주기 위하여 총독에게 불려갔다. 당연히 고문과 구타와 악행 등을 다루는 기사들을 경찰들이 매우 싫어하였고, 이것은 일본 경찰이 그 필자(스코필드)를 심하게 공격한 것을 설명해 준다. 어떤 사람은 총독이 스코필드 박사를 ‘교활한 음모자요 굉장히 위험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캐나다 선교부나 스코필드의 태도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 나와 있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선교하기는 하였지만 같은 선교사로서 초기에 제암리 사건 현장을 방문하였던 스미스(F. H. Smith)는 스코필드나 브라운(A. J. Brown) 등 다른 선교사들이 도꾜의 <재팬 애드버타이저>지를 통하여 일제를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반론을 제기하고 적극적으로 일본 찬미론을 펴 일제에 이용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문으로 발간하던 한국 선교연합 잡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에도 제암리사건에 대한 기사는 없으며 3ㆍ1운동에 대해서 1919년 4월호에 “동료들은 한국에서 일어난 현재의 정치적 소요에 대해서 왜 우리 지면에 언급이 없느냐고 묻고 있을 것이다. 이 잡지는 경찰 당국에 의해서 종교 전파에 관한 사항만 취급하도록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독자들에게 반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봉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세속신문을 참조하게 하고 있다.”는 짤막한 변명 기사만을 내보내고 있다. 여기서 세속신문이라는 것은 일제의 영문 기관지인 ‘Seoul Press’ 를 말한다.

 

5) 서구의 여론과 해외 각국의 반응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사건이 민간 언론을 통하여 서구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The New York Times' 1919년 4월 24일자 다음과 같은 기사에 의해서였다.

 

“일본군 한국인 학살 ― 일본 총독부 기독교인 살해 및 교회 방화 보도 진상 조사 중.

서울. 4월 23일(AP); 조선총독은 일본군이 서울 동남방 45마일의 촌락에서 남자 기독교인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총살하고 대검으로 찔러 무참히 죽였다는 비난을 받고 진상을 조사 중이다. 또한 일본군은 만행 후 그 마을의 교회와 그 밖의 건물들을 불태워 없앴다고도 한다.”

 

그러자 일본 도꾜에서 발행되던 영자지 'The Japan Advertiser'지 4월 27일자와 4월 29일자에도 제암리사건이 상세히 보도되었으며, 일본 고베에서 발행되던 영자지 'Japan Chronicle'지 같은 날자들에도 한국 특파원으로부터 보내온 이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신문 5월 3일자에 실린 언더우드의 현장 보고서도 비록 익명으로 실리기는 하였지만 큰 충격을 주어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리고 이를 비판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을 포함한 일제의 만행을 종합적으로 폭로하여 일제에 대한 비판 여론 조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무래도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가 1919년 7월에 발간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이라는 보고 책자라 해야 할 것이다. 이 보고 책자가 발행된 경위와 목적은 이 책의 본문 부분에 대략 기록되어 있다. 즉 1919년 3월 초부터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잔인한 억압에 대한 전보들이 미국 선교본부에 답지하기 시작했으며, 4월 초부터는 이를 입증하는 편지들이 선교본부에 쌓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에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이 뉴욕에 도착하여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 북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 노스(F. M. North), 미성서공회 총무 해븐(W. I. Haven) 등과 만나 상황을 전하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는 해외선교부에서 다루기보다는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짓고 4월 16일 이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이 위원회는 12번이나 모여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는데, “한국에서 들어와 급속히 쌓이는 자료들을 일간 신문에 넘겨주기 전에 일본인들과 우선 이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고 옳다(only fair and just).”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였으나 일본 정부의 만족할 만한 답변을 얻지 못하자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그해 7월에야 1천 쪽이 넘는 자료 중에서 34개 증거자료만을 골라 125쪽의 보고 책자를 만들어 보급하였던 것이다.

 

이 보고 책자의 공간 목적은 첫째 비인도적인 처우와 불법으로부터 한국인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모든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것과, 둘째 미국에서 건전한 여론이 조성되어 일본에 영향을 주어 한국에서 정의와 공정한 처우를 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보고 책자는 일제의 공작으로 발간 시기가 지연되고 내용이 축소되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정치문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비정치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이 보고를 마련한 사람들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일제의 잔인성, 고문 사례, 비인도적인 처우, 종교 박해 및 학살 등 만행을 종교적 공신력이 있는 기관에서 폭로함으로써 미국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여론의 조성은 물론 일제의 식민지 정책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자료 책자의 서문에 일본 하라(原敬, 1856―1921) 수상의 7월 10일자 전보문을 게재하고 “일본 정부에 대한 아첨”을 하면서 “하라 수상과 그 동료들이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 충분한 권력을 행사할 것이며 한국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하여 그 뒤에 나오는 일제 만행 증거의 파급 효과를 감소시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자 코네티컷주 밀포드에 사는 뉴월 마틴(Newell Martin)은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1919년 9월 <일본의 한국 기독교인 박멸 시도(Japan's Attempt to Exterminate Korean Christians)>라는 편지형식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이 책자에서도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대표적인 예로 “제암리 학살”이라 하여 제암리교회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소책자들은 미국에서 일제를 비판하고 한국을 동정하는 여론을 일으켜 미국 의회에서까지 한국 문제를 취급하고, 그해 10월 상원의원에서는 “미합중국 상원의원은 한국 국민들이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는 정부를 위한 열망에 상원의 동정을 표하는 바이다.”라는 결의안까지 상정하게 하였다.

 

6) 무단통치(武斷統治) 포기하게 된 계기

 

지금까지 제암리교회 학살ㆍ방화 사건에 대한 서구인들의 반응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서구인들이 이 사건을 알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한국에 있던 개신교 선교사들의 조사 요구와 조사ㆍ폭로 때문이었다.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들에게 선교적 관심을 가지고 동정적이었던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을 일제가 폭력으로 탄압하고 비인도적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서울 주재 자국 영사관에 압력을 넣어 이에 대한 조사에 나서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암리사건과 같은 구체적인 일제의 만행 실상이 드러나자, 이들 서구 영사관에서도 자국에 실상을 보고하는 한편, 총독부에 압력을 넣어 이러한 탄압을 중단하고 만행사건의 책임자를 처벌하며 이러한 만행사건의 재발을 방지하도록 요구하였다.

 

서울에 있던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의 생각은 자국 정부가 공식적인 외교 통로를 통하여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해 일제의 한국인 탄압과 만행을 중단하고, 일제가 한국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와 자치권을 부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같이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던 영ㆍ미ㆍ프, 등 서구의 제국들은 이러한 보고를 받고도 이를 공식적인 외교문제나 국제회의에서 인도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 알려 소극적으로 한국 상황의 개선을 요구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러한 서구 제국의 태도는 당시 이승만과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서구 제국 정부에 대한 외교노선이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있는 것이었는가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영ㆍ미ㆍ프 등 서구의 제국 정부들은 현지 주재 외교관들의 보고를 통하여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만행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고 재한 선교사들을 포함한 서구인들도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직접 지원하거나 동조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처해있던 상황의 구조적인 한계에서 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에서 서구인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3ㆍ1운동의 전 과정에서 재한 서구인들 특히 선교사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일제에 대해서는 감시자의 역할을 하였고, 다른 서구인들에 대해서는 이 사건들에 대한 증언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충분하지는 않지만 현지 한국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구호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일제 총독부에는 물론 자국 정부와 해외선교본부에 보고서와 편지로 압력을 가하여 일제의 비인도적 탄압을 중단하고 한국의 시정을 개선하도록 요구하였다.

 

새로 부임한 사이또(齋藤實) 총독이 선교사회유를 최우선 정책으로 세우고 ‘선교사 담당’이라는 별명을 들으면서까지 선교사들을 회유하려 하였다는 사실은, 역으로 해석하면 이들 선교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선교사들이나 재한 서구인들로부터 일제의 만행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인도적 차원에서 한국에 동정적이었던 서구의 언론과 민간 여론의 동향도 일제가 한국에 대한 ‘무단통치’를 포기하고 시정(施政)을 겉으로라도 개선하여 이른바 ‘문화정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8. 일본은 '닙뽕'인가 '니홍'인가

 

1) 제 나라 국호도 모르는 일본인들

 

어느 날 절친한 친구 김성호 목사가 이런 질문을 했다.


“일본 나라 국호(國號)는 ‘닙뽕(にっぽん)’ 인가 ‘니홍(にほん)’ 인가?”

“정말 어려운 걸 묻네.”

“자네 같은 일본 유학파(遊學派)는 잘 알 것 아닌가.”


 “일본인 자신이 모르는 걸, 나 같은 외국인이 아무리 일본 유학을 갔다 왔다 한들 알 수 있겠나? 일본인들은 이 말을 둘 다 쓰고 있다네. 그래서 1934년에 일본 문부성에서 이를 ‘닙뽕’으로 통일하려는 안을 냈었으나, 부결되고 말았다네.”

 

“제 나라 이름 발음을 일본인 자신들도 모르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일본 유학 시절(1968―69)에 일본의 어느 통계를 보니까 자기 나라는 [닙뽕]이라 부른다는 사람이 31%, [니홍]이라는 사람이 35%, [둘 다]라는 사람이 34%라는 통계를 보았는데, 굳이 날더러 말하라고 한다면, 일본이 기가 죽어 겸손하게 나갈 때는 부드러운 발음을 써서 [니홍]이라 하고(위 그림), 자신이 생겨 강하게 나갈 때는 억센 발음을 써서 [닙뽕]이라고 한다네.(아래 그림). 패전 후 한 동안, 일본은 국제무대에 나가는 선수들 등에 영어로 NIHON 이라고 썼는데, 요새는 NIPPON 이라고 쓰고 있네. 지난 Asian Game에서도 NIPPON 으로 나갔지. 자신이 생겼다는 거겠지. 자네 이런 노래 아나? 이 노래는 1939년 국민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노랜데 여기서는 <니홍>이라고 하였으나 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닙뽕이라고 하였지.”

 

2) 왜놈 형사와 월남 이상재 선생 일화

 

이왕 일본이 ‘니홍’이냐 ‘닙뽕’이냐는 말이 나왔으니 왜정 시절에 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소개한다. 확인은 안 된 일화다.

월남 선생이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맞은 편 자리에 앉아 감시하던 왜놈 형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죠센시끼데 하나오 간데야로오!”

“朝鮮式ではなをかんでやろう!”

(조선식으로 코를 풀어 보자!)

하더니 손가락 하나로 콧구멍 하나를 막고 이쪽저쪽으로 팽팽 하고 코를 푸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듣고 화가 나신 월남선생이 역시 한 손가락으로 콧구멍 하나를 막고

“나는 일본식으로 코를 풀어주겠다.”

하시고는 팽 하고 코를 풀었단다.

그러자 그 왜놈이 화가 나서 ‘그게 어째서 일본식이냐’ 고 따지더래. 그러자 월남 선생 가라사대

“야, 무식한 왜놈아, 손가락 한 개면 일본(一本) 아니냐. 그러니까 손가락 한 개로 코를 푸는 건 [죠센시끼]가 아니라 [일본식(一本式)]이다.”

하시니까 많은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였다는 것이다.

 

3) “곤도와 니혼시끼데….”

 

그런데 월남 선생은 아직도 화가 덜 풀리셨는지 제2탄을 날리신다.

“곤도와 니혼시끼데 하나오 간데야루조.

(今度は日本式ではなをかんでやるぞ.

이번에는 일본식으로 코를 풀겠다.)”

라고 하시더니, 두 손가락으로 코를 쥐고는 팽팽 하고 시원하게 코를 푸셨다는 것이야.

그러자 그 왜놈은 이번에도 ‘그게 어째서 니혼시끼냐고 따지고 대들었다는 거야.”

월남 선생은 손가락 두 개를 보이며

“고레 니혼쟈 나이까, これ、二本じゃないか? (이거 두 가락 아냐?)”

그러자 장내는 웃음의 도가니가 되고, 여기저기서

‘나는 일본식으로...’, 혹은 ‘와시와 니혼시끼데….’

하면서 코를 푸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는 것이야.

 

 

제3부 / 욕심 덩어리 한족(漢族)

 

1. 〈뙤놈〉의 어원

 

중국인에 대한 멸칭(蔑稱)은 〈되놈〉이다. 발음을 세게 하여 〈뙤놈〉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지나인을 깎아내리는 용어로 쓰이는데;

 

❶때가 많아서 더럽다고 하여 때 놈,

❷큰 나라 놈이라 하여 대(大)놈,

❸떼로 몰려다닌다고 떼 놈

❹변소 갈 때의 뒤와 어원이 같아서 〈똥 뙤 놈〉

 

원래 되놈이란 말은 중국 한족(漢族)에 대한 욕은 아니었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만주족)에 대한 멸칭이다. 한자 가차(假借)로 [刀夷, 刀伊] 라고 쓰기도 하며, 말갈―여진족 시절부터 사용했던 말이란다.

 

이 족속들은 삼국시대부터 살을 맞대고 지낼 수밖에 없는 터라 비교적 미개한 그들을 이렇게 일컬었다.

고려시대에 일본 규슈(九州)에 여진족 해적이 쳐들어온 일이 있는데 이 사건을 일본에서는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라고 부르는데, 포로로 잡혔다 구출된 고려 사람이 되놈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알려진 것이다. 이후 조선 전기 북방 여진족의 약탈 등으로 계속 악감정이 있어 이 표현은 된 발음이 되어 〈뙤놈〉으로 계속 살아남았다. 그리고 후금(청)이 일어나고 두 차례에 걸친 병자호란(胡亂)에서 패배하여 인조가 삼전도에서 말 그대로 [데꿀멍] 한 후에도 청나라에 대해 호박씨를 까면서 되놈이라는 말을 써왔다.

 

❺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의 ‘도이노옴’

이 말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나온다. 박지원이 술 먹고 숙소에 돌아와 혼자 있는데 발자국 소리가 나서 "게 누구냐?" 라고 묻자 그 쪽에서 “소인 도이노음이오(島夷老音伊吾)” 라고 대답해서 박지원이 웃으며 놀랐다 한다. 이 '도이노음'의 정체는 외교 사신인 박지원 일행을 호위하던 청나라 갑군 병사였던 것이다. 박지원은 이 일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갑군이 자기를 ‘도이노음’이라 하다니 정말 배꼽 잡을 일이다. 갑군은 여러 해 동안 사신 일행을 모시는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 말을 배웠던 모양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로 오랑캐를 ‘되놈’이라 한다. 그들 앞에서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겠거니 하고 ‘되놈’이란 말을 종종 쓴다. 심지어는 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되놈’이란 말을 쓰기도 하니, 영판 자기들 호칭이 조선말로 ‘되놈’인 줄 알았던 모양인데, 자기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밝히려고 ‘도이노음이요’ 했던 모양이다. 따져보면 ‘도이’는 ‘도이(島夷)’가 와전된 말이요, ‘노음(老音)’은 낮고 천한 이를 가리키는 말, 즉 조선말 ‘놈’의 와전이다. 또한 ‘이요(伊吾’)란 웃어른에게 여쭙는 말이다.

 

2) 대륙백제설(大陸百濟說)

어느 인물이 직장이나 그 사회에서 인정받듯이 역사학설도 학계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왜놈들은 우리나라를 침략해 강제 합방하고는 지네들의 짧은 2천년 미만의 역사에 비해 조선은 1만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까 대대적인 역사왜곡을 시작하여, 고조선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돌리고, 중원을 제패한 삼한이 조선반도에서 서로 싸운 것으로 날조하기 위해 한국의 역사서 2만 여권을 강제 수거하여 가져가거나 불태우고 총독부 산하에 조선사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어 지네들 입맛에 맞게 완전히 뜯어 고쳐 책을 냈는데 그 중심인물이 이완용의 종손자 벌 되는 이병도(李丙燾, 1896―1989)다.

 

이 자의 문하생들과 후손들이 오늘까지 이 나라 강단사학계를 주관하고 있고, 진정한 역사학자들은 재야사학자가 되어 고생하고 있다. 이 자료는 재야 사학자로서 활약하던 고 임승국 교수의 ‘대륙 백제는 말한다’를 중심으로 만들었다. 강연체 문장을 필자가 고치고 중복된 부분은 잘라냈다.

 

3) 대륙 백제는 말한다

―― 임승국 교수의 역사입문 이야기 ――

 

재야사학자 임승국(林承國, 1928―2002) 교수가 지난 28일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4세. 고인은 고려대 영문학과 출신으로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내다 백제사를 고리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나서 이른바 ‘강단사학계’와는 다른 길을 걸은 대표적인 ‘재야사학자’다. 고 안호상 박사, 박시인 전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설립, 기존 교과서가 단군 존재를 부정하고 한사군을 한반도에 설정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국회청원활동도 벌였다…. 임승국 교수의 회고담을 보자.

 

“경희대 영문학 교수시절 우연히 [25사]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25사] 가운데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다음으로 여섯번째 책이〈송서(宋書)〉다.

하루는 윤영춘 박사 댁에 놀러갔다가 그 분이 갖고 있는 장서 중에서 우연히 이 [宋書]를 끄집어냈다. 윤 박사가 이걸 보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제가 펼친 곳이 [宋書] 97권 '백제의 전' 이라는 대목이었다. 그 기록을 무심코 쭉 읽어 내려갔지요.

 

지나(支那) 땅에서 태어나 중학교 4학년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으니 한문 실력은 그런대로 있어서 쭉 읽어보니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宋書]에 기록되어있는 백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는 의례히 백제를 생각할 때면 연상되는 것이 의자왕이고,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 삼천 궁녀와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다이빙 앤드 풍덩 등이다.

그런데 [宋書] 97권을 보니까 아예 백제의 위치부터가 달랐다. 한반도가 아니었다. 지나(支那) 의 현 수도인 북경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산동반도를 지나 양자강 남북의 평야지대를 포함한 지나 동해안 일대를 백제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 기록을 보고서 그 때 하고 있던 영문학이라는 낡아빠진 학문을 집어 치우고 스승도 안내자도 없이 한국 상고사라는 난장판 학문에 뛰어 들었다. 만 5년 동안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직장도 없이 도서관에 파묻혀서 [四書三經]과 [25史]와 씨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6년 만에 다행히 명지대학으로부터 다시 교수발령을 받은 후에, 영문학 교수가 아닌 한국고대사를 강의하는 사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니까 제 학문의 안내자가 바로 『백제사』였으니, 오늘 강의하는 것도『백제사』의 이해라고 하면 비로소 말문이 열린다.

 


 

[宋書] 97권 백제전의 머리 부분을 한번 읽어보겠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려는 대략 요동에 있었으며, 백제는 대략 요서에 있었고,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불렀다. 요서는 북경을 포함한 하북·하남·산서 등을 포괄한다. 산서성의 옛이름이 진이다.

 

[송서]에만 이런 기록이 있고 다른 기록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닙니다.〈25사〉중 [宋書] 다음이 [양서(梁書)]인데, 양서 54권 [백제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양서 다음은 [남제서(南濟書)]다.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제()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다.

 

[남제서]에도 백제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더 엄청나다. 당시의 백제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이었다. 동성왕의 무덤이 산동반도에 있다고〈25사〉에 기록되어 있고, 동성왕은 산동반도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직접 도읍하면서 대륙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군사―외교정책은 가까이에 있는 위나라와는 전쟁으로 상대하고, 양자강 남쪽의 남제와는 우호관계를 맺는 등의 정책을 폈다.

 

동성왕은 남제의 소도 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실로 엄청나다. 아마 간덩이가 작은 사람은 이 글만 보아도 깜짝 놀랄 것이다. 요서나 진평이라고 했던 백제의 세력이 놀랍게도 남쪽으로 확장되어 북위의 군대와 싸워 이겼고, 또 한 때는 양자강 남쪽까지 점령해 버린다. 그리고 그 땅을 일곱 구역으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을 각각 파견하여 통치하게 한다. 쉽게 말하면 총독 일곱 명을 두고 지나(支那) 동해안을 깡그리 지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지나인들은 다 없애 버렸다. 남제서 백제전의 머리 부분을 다 뜯어 버렸다는 말이다. 현재 한국으로 오는〈25사〉중 남제서를 보면, 백제전의 앞부분이 뜯겨 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글씨가 없는 공백이 하얗게 남아있는 것이다. 이게 '똥 되는 놈'(지나인)의 심보다. 오죽하면 똥 되놈이라고 하겠는가? 백제전이라는 제목은 있는데 그 다음이 빈칸이란 말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강시단야(降屍丹野: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인데, 똥 되는 놈을 시체로 만든 자는 백제 군대들이다. 그리고 그 빈칸은 그냥 남겨두었다. 지나 본토에는 오리지널〈25사〉가 남아 있다고 한다. 대만에는 물론이고. 혹시 지나에 가는 사람들은 오리지널〈25사〉를 구해서 남제서 백제전을 펼쳤을 때, 공백이 아니라 글씨가 꽉 차 있으면 무조건 사갖고 와야 한다.

 

이 책을 읽지 않고는 백제의 참 모습은 상상도 못한다. 그저 '낙화암 풍덩' 만을 연상할 뿐이다. 지나 지도에 있어 동해안 지역은 사실상 지나 땅의 전체나 다름없다. 깊은 오지에는 사람들이 살지를 못한다. 지나 사람들이 집결되어 있고 지나 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 지나 동해안 지역이다. 모택동도 여기 사는 지나 인구의 수를 “십억에서 이억을 뺀 수억”이라고 했다. 전체 10억 중에서 8억의 인구가 이곳에 몰려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지역을 몽땅 백제가 지배했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KBS에서 사학 관계 서류를 모아서 연변대학에 기증을 했다. 몇 천 권을 보낸 모양이다. 연변대학 총장이 그걸 받아서 읽어 보니까 식민사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김철준 씨가 쓴 문화사관이나 이기백씨가 쓴 한국사의 무엇 등등이었는데, 무슨 이런 책을 보냈느냐 하면서 모조리 폐기처분해 버렸다고 한다. 이것만큼 대한민국 망신시킨 적이 어디 있는가?

 

4) 해방 이후 식민사학 시대

 

해방 이후 40―50년 동안 우리는 식민사학을 복창 복습했다는 것을 여기서 또한 알 수가 있다. 대방(帶方)이라고 하면 보통 황해도 사리원 일대로 알고들 있다.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쓴 김성호 씨는 나름대로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 글을 썩 잘 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잘못한 것은 사리원이 대방이라고 한 것이다. 즉 일본사람들이 한 얘기를 그대로 고스란히 믿고 베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백제시건국어대방고지(百濟始建國於帶方古地)'라는 부분이 있다. 백제가 처음 나라를 세운 땅이 대방이라는 뜻인데, 대방이 황해도 사리원이니까 사리원에서 백제가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흠이 있다고 해도 공격할 만한 흠은 아니지만, 백제사 출발점은 대륙인데,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학계에서는 미추골(彌鄒忽)을 미추홀이라고 한다. 홀()자를 역사에서는 골이라고 읽는다. 밤골이다 무슨 골이다 할 때처럼, 고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성호씨는 이 미추골을 인천이 아니라 아산면 인주면이라고 했다. 미추골이 인천이라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거기에서 더 내려가 아산면 인주면이라고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제가 번역한 책 '한단고기'에도 미추골이 나오는데, 그 곳의 위치는 바로 지나 땅 하북성이다. 하북성에 있는 미추골에서 비류수가 흐른다. 비류백제라고 할 때의 비류수가 바로 거기서 흐른다.

 

5) 유신정권 때 행정소송을 내다

 

우리 사학계는 정말 답답하다. 오죽 답답하면 내가 유신정권 때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벌였겠는가? 국사를 바로 잡으라고 행정소송을 냈을 때, 원고는 명지대 교수 임승국이 되고 피고는 박정희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자 학계에서는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 소송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결과는 '피고 패소, 원고 승소' 이렇게 났다. 내가 이겼다. 그래서 그 때 판결장을 들고 문교부장관을 찾아가 집행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피고가 억울하다고 대법원에 항고를 했다. 문교부에서는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집행할 수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판결 날짜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꼭 일주일 남겨두고 박대통령이 피살당해 버렸다. 조금 뒤 대법원에서, 그 재판은 피고의 유고로 인하여 무기한 연기한다는 통지가 왔다. 그 때의 무기연기가 지금까지도 무기연기 중이다.

 

대법원장이 몇 번이나 바뀌고 정권이 몇 번 바뀌었는데도 지금까지 무기연기라니, 이거 법이론상 맞지 않는 얘기가 아닌가? 그래서 이번 국정감사 시, 모 국회의원에게 그것을 좀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그 국회의원이 하는 얘기인 즉, 그 재판은 판결하지 않은 채 폐기처분했다고 말해 주었다. 폐기하려면 원고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하기야 뭐 5공화국시절이니까 법이 없었겠지.

 

나는 억울한 나머지 국회에 청원서를 냈다. 그래서 청원서에 입각한 공청회가 열렸다. 앞서 강연한 박시인 박사, 안호상 박사와 함께 셋이서 공청회에 나가 열변을 토했다. 박시인 박사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투쟁형이 못되어 내가 대표 격으로 싸웠다. 제안 설명을 하면서 "낙랑현도 진번임둔의 증거는 무엇인가?" 라고 물었더니 문교부 장관이 하는 말이, 자기는 역사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변할 수 없다고 했다. 국무위원이 반드시 역사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 갔다. 그 다음 앉은 사람이 차관인데,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사학은 고사하고 인문사회과학계통이 아닌 자연과학계통을 공부한 사람이라 내가 차관에게 질문하면, 그 사람은 속으로 '저 양반이 나 망신 줄려고 국회에 불러온 것 아니냐' 할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갔다.

 

다음은 국사편찬위원장이 나왔다. 3년 동안 행정소송을 할 때 대통령 대리인으로 피고석에 있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 사람도 장관과 똑같은 답변을 하길래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국사편찬위원장이라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 무책임한 발언을 하니 너무 화가 치밀었다. 그 때 방청석에 있던 국회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국사편찬위원장 임명권자인 문교부장관은 사임하라고 외쳤다. 목표는 국사개정인데 인사문제로 번지니 다시 한 번 더 국사개정의 방향에서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 뒤, 장차관과 국사편찬위원장도 한사군 문제를 공부 안 했다고 발뺌 하니 앞서 얘기한 대로 쭉 설명을 해 주었다. 이리 해서 국사개정을 하기로 결정하고 공청회는 끝났다. *.

 

6) 천문학으로 풀어 나간 [대륙 삼국설]

 

(1) NASA도 인증한 [三國史記] 기록에 따른 3국 위치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桓檀古記]에 기록된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었던 사실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기록된 천문기록을 살펴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는데 미국 NASA가 공개한 천문현상 프로그램도 거의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김부식의《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천문대 위치를 살펴본 결과 고구려, 백제는 멸망직전까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했었다는 것이다. 신라도 대륙에 존재했었으나 통일신라 후반기에는 한반도에 존재한 것으로 나온다.

 

다음은 [서울신문] 이용원 논설위원의 글이다.

[서울신문] 2005―01―27 20판 31면

 

― 1990년대 초 한국 고대사 체계를 뿌리부터 흔들 만한 논문이 한 학자에게서 잇따라 나왔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중심지는 지나(支那) 대륙이다.” “고조선을 기록한 [단기고사], 《단군세기》의 내용은 정확하다.” 라는 주장이었다.

 

발표한 이는 역사학자가 아닌 서울대 천문학과의 박창범 교수(현 고등과학원 교수).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우주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딴 그는 역사서에 등장하는 천문현상을 첨단기법으로 시뮬레이션 해 이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박 교수는 《삼국사기》의 천문 기록이 지나, 일본 사서보다 정확하다는 사실을 밝혀낸 뒤, 이를 토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식 기록을 분석해 천문 관측처(수도)가 지나 대륙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2) ‘오성취루(五星聚婁)’

 

또 고조선 역대 단군(임금)의 행적을 기록한 [단기고사], 《단군세기》에 등장하는 ‘오성취루’가 B.C. 1734년 실제 있었던 천문현상이며, 그 발생과 사서의 기록에는 1년의 오차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오성취루’는 수성 ․ 금성 ․ 화성 ․ 목성 ․ 토성의 다섯 행성이 한 별자리 부근에 모이는 현상이다.

 

박 교수의 연구방법이 전문적인 데다 내용이 갖는 폭발성이 워낙 크기 때문인지, 아직은 이를 비판하거나 뒷받침하는 후속 연구 성과는 나오지 않은 듯하다. 다만 이를 계기로 ‘고천문학(古天文學)’ 이 별도의 학문 분야로 인정받았고 연구자가 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천문 현상을 ‘하늘의 뜻’으로 여겨 세밀하게 관찰했으며 일일이 기록했다. 따라서 멀리는 고조선, 가깝게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에 이르는 수천 년의 천문 기록을 가진 우리 문화는 고천문학의 보고(寶庫)이다. 그뿐이 아니다. 세계에서 고인돌을 가장 많이 보유한 우리 땅에서 고인돌에 새긴 별자리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관련 연구가 진행되면 별자리 기록의 역사는 몇 천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현대 천문학으로도 풀지 못한 ‘물병자리’ 변광성(變光星)의 비밀을 ‘고려사’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기록을 분석해 밝혀냈다는 보도가 어제(2006. 10. 7) 있었다. 고천문학이 올린 또 하나의 개가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고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성, 높은 과학 수준은 계속 입증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3)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창범 교수(사진)는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비록 후대에 쓰인 것이지만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나온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가 어디인가를 비정할 수 있는, 즉 관측자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조사했다.


 

박참법 교수


[三國史記], [三國遺事]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일어난 일식이 67회, 혜성 출현이 65회, 유성과 운석의 낙하가 42회, 행성의 이상 현상이 40회, 오로라 출현 12회로 총 226회의 천체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연구에 사용된 일식 기록은 기원전 54년에서 주후 201년까지의 초기 신라 일식 16회, 787년 이후의 후기 신라 일식 9회, 백제 전 기간의 일식 20회와 고구려의 일식 8회였다.

 

결론은 삼국이 주후 200년 이후에 수준 높은 천체 관측을 했으며 기원전부터 천체 관측은 삼국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고대 천문 현상의 관측은 그 국가의 수도 근방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므로「관측자의 위치」는 그 국가의 수도가 어디 있었는지는 물론 그 당시의 강역(疆域)이 어디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의 일식을 관측한 위치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백제에서 기록된 20개의 일식 관측지는 요서 지역(발해만)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기원전 201년 이전 신라의 일식 16개에 의한 관측자의 위치는 양자강 유역이었고 787년 이후 신라에서 기록된 일식 9개의 관측자 위치는 한반도 남쪽이라는 점이다.

 

신라의 일식기록이 201년을 마지막으로 787년에 다시 등장할 때까지 무려 580여 년의 공백 기간이 있는데 이 기록이 엄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즉 일식 기록만으로 따진다면 신라는 지나 본토 지역에서 한반도로 일정 시기에 넘어왔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박 교수의 논문에서 다룬 천문현상 연구에 의한 삼국의 관측자 위치는 우리의 고대사에서 규명할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7) ‘한자(韓字)’는 또 하나의 '한글'이다

 

오늘 조선 닷컴 1면 '오늘의 블로그' 에는 실로 역사적인 글이 하나 떴습니다. 고 임승국 교수의 “〈한자〉는 또 하나의 〈한글〉이다.” 라는 글입니다. 바로 '한문과 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글입니다. 아래의 글은 이에 화답하는 의미에서 띄우는 것으로, 영문학을 전공했음에도 백제사 등 고대사 연구에 일생을 바친 선비이신 임승국 교수의 육성입니다(중략).

 

(1) 고쳐야 할 사대주의

 

한글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글만 우리 글자입니까? 아니 우리 역사가 몇 년인데 한글만 우리 글자입니까? 우리 문화사가 500년 밖에 안 됩니까? 서양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 한자를 중국 글자(Chinese character)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서양 중심의 가치관에서 하는 말이고, 이제부터의 세계는 우리 중심의 문화세계, 우리 중심의 가치관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저는 과거에 알파벳을 가르칠 때 영문학 교수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백인종이 모여 세운 나라가 USA인데, 앵글로 색슨족이 주류족입니다. USC라고 하면 차이나를 말합니다. 똥 되는 놈들 민족 가운데 주류족은 USA의 앵글로 색슨족에 해당되는 한족(漢族)입니다. 이 한()은 민족의 이름도 나라의 이름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한테서 표절을 해 갔습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할 때의 '한'()에서 한이라는 발음을 따 갔던 것입니다. 이 한()은 동이족입니다. 흔히들 ‘환’으로 읽지만, 앞의 <설문해자>에 보면 한()은 “호단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ㅎ]+[안]=한. 이게 바른 발음입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 동이족, 곧 한()족입니다.

 

고쳐야 할 사대주의 사상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중국이라는 용어도 문제지만, 이()자를 오랑캐라고 훈을 붙인 옥편의 저자는 더 문제가 많습니다. 한문옥편의 원조가 되는 것은 허신(許愼)이 쓴 《설문해자》인데, 이 옥편의 역사가 약 200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자를 찾아보면, 첫째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둘째 '고문인동(古文仁同)'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랑캐란 말은 후대 똥 뙤놈이 악의적으로 고친 것입니다. 혹시 누가 이()를 오랑캐로 말하면,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古文仁同', 곧 “예부터 어질 자와 같이 쓰였다” 라는 한 마디로써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동이의 오행(五行) 철학에 의하면 木은 東, 火는 南, 金은 西, 水는 北, 土는 中央에 해당됩니다. 오행을 색깔로 말하면 동은 청, 서는 백, 남은 적, 북은 현(玄)이고 중앙은 황입니다.

오상(五象)을 방위에 배치하면 仁은 東, 義는 西 ,는 南, 智는 北, 信은 中央입니다.

동양철학 속에서 그 근본을 차지하고 있는 글자인 을 오랑캐라고 하는 것은 망발입니다.

 

동이족이야말로 중원 대륙 가운데 가장 비옥한 땅에서 사는 민족이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지역을 백제가 경영했습니다. 따라서 중원대륙에 사는 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민족이 동이족이고, 동이족은 즉 우리 선조들이 중원 땅에서 연합민족국가를 형성한 원류(原流)입니다(…).

우리의 5000년 역사는 동양의 역사문화 속에서 질풍노도와 같이 군림한 역사문화민족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알맹이요, 핵심입니다. 이제부터는 반대로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2) 한자(韓字)는 우리 글자

 

한자는 지나의 글자가 아니라 우리 한민족의 글자입니다. 약 4만 3천여 자가 옥편 속에 있는데, 글자 하나하나 마다 대개 발음기호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轄覺切' 이렇게 표시되어있습니다. 읽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첫 글자에서는 자음(하)만 취하고 두 번째 글자에서는 모음()을 취해 읽으라는 뜻입니다.

[轄ha+覺ak=學hak]

 

이렇게 '轄覺切'로 지나 옥편에는 2000년 동안 적혀 내려오고 있는데, 지나인(북경 사투리)은 '學'발음을 못하고 '쉬에'(xue)라고 합니다. ㄱ. ㄹ. ㅂ. 등으로 끝나는 글자를 사성 중 입성이라고 하는데, 지나인은 입성을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문자는 지나인들이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 민족의 발음으로서만이 완벽히 소리 낼 수 있는 것입니다. 100% 우리말로 적혀있는 것이 지나인의 옥편이고, 따라서 우리가 표준어를 쓰고 있는 한자의 주인공입니다. 한글만이 우리문자가 아니라 그 동안 지나 글자로 알았던 한자도 우리글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자야말로 우리 문화전통을 지금까지 전해준 고마운 글자입니다.

 

(3) 민족사의 르네상스를 위하여

 

정말 우리 문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안다면 이제부터 한자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합니다. 마치 신약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마냥 말이죠. 백만장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돈을 객지에서 다 써 버려서, 남의 돼지우리에 버린 밥 껍질로 주린 배를 채우다가 하루는 탄식합니다.

“나의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많이 있었건만, 나는 객지에서 헐벗고 굶어 죽게 되었구나!”

 

이런 탄식 끝에 이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향해 다시 힘차게 뛰어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맞으며, '내 아들이 다시 돌아왔도다' 하며 양 잡고 소 잡아 축제를 엽니다. 그래서 탕자는 또다시 백만장자가 됩니다. 이제 우리도 돌아온 탕자와 같이 상고사를 재확인하고 민족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르네상스입니다. 옛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옛집으로 돌아가려면 우선 한문을 알아서 민족의 전통을 확인하는 것이 첫 작업이 될 것입니다. 한국사에는 목표가 뚜렷한 근원을 향해서 돌아가는 '민족사의 르네상스'가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없었고 이를 기술한 고전(古典)이 없었더라면, 인류역사상 저 'Renaissance'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르네상스, 본래 이 말의 어원은 '옛 정통(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그리스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되돌아갈 고향의 영광과 위대한 추억이 없는 민족, 향수가 없는 민족에겐 르네상스란 말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

 

(4) 동이족의 대 이동

우리 동이족은 단군 때부터 평화를 사랑하며 전쟁을 하지 않아 중원에서 전쟁이 잦아지자 예맥(濊貊)족은 베링해를 건너 미대륙으로 가서 더운 지방을 찾아 남하하여 맥시코 나라를 세웠고, 낙랑(樂浪)족 역시 미주로 건너가 체로키족의 나라를 세웠다. 잉카 문명을 세운 족속도 우리 족속임을 영국 대영백과사전은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다 떠났으나 우리 선조들만은 이 땅을 떠나지 않으려고 싸우고 또 싸우다가 호전적인 오랑캐요 자칭「중국」뙤놈들에게 밀려 이 한반도 구석까지 왔다.

 

그 시대에 우리가 만든 한자(韓字)도 뙤놈들은 자기네가 만들었다 하고, 고대사 유적이 발굴됨에 따라 동이의 역사를 부인할 수가 없는 지경에 다다르자 [동북공정]이란 것으로 고구려 역사도 지네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변방에 밀려 왔지만, 고조선 그 옛날부터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다. 하나님이 말세에 쓰시려고 감추어두신 고통 중에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동방의 선민》이 우리 민족이다. 이 자료는 한자가 우리글임을 입증하는 자료다. 이 자료는 여러 웹사이트에서 퍼다가 첨삭(添削)하고 주를 달았다.

 

(5) 정확하게 발음하는 민족이 주인

 

누가 한자의 주인이냐 하는 것은;

첫째, 원래 발음하도록 정의된 것을 누가 정확하게 발음하는 지를 보면 안다. 즉 정확하게 발음할 줄 아는 민족이 한자를 만든 주인이다.

둘째, 원래의 한자를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민족이 주인이다.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3국 한국, 일본, 지나 중 한국만이 본디 글자를 쓰고, 일본은 약자, 지나는 전혀 딴 글자를 만들어 쓴다. 자기네가 만들었다면 말과 글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해 원 한자를 버린 것이다, 누가 주인인가?

한자는 글자 자체에 철학이 농축되어 담겨있는 상형문자다. 따라서 원래의 한자를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민족이 주인이고 이를 변형시켜 사용하는 민족은 상대적으로 주인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한 ․ 중 ․ 일 동양 3국 중 우리 민족만이 한자를 한 획의 가감 없이 원래 정자체(正字体)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인은 오래 전부터 약자를 쓰고 있고, 지나인도 정체를 버리고 완전히 간체(簡体)를 만들어 쓰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보라. 상형문자는 글자에 철학이 담겨있어 원래 만든 그대로 불편함 없이 쓰는 민족이 한자를 만든 주인이다.

셋째 한자는 단모음으로 발음하는 민족이 주인이다. 단모음의 역사는 복모음의 역사보다 우선한다. 이 문제는 음성학에 있어 가장 중요하므로 좀 상세히 설명하려 한다. aㆍeㆍiㆍoㆍu(아ㆍ에ㆍ이ㆍ오ㆍ우)의 단모음 체계에서 분화 발전한 것이 ia(이아)ㆍie(이에)ㆍii(이이)ㆍio(이오)ㆍiu(이우) 등 복모음이다. 그럼 지나 지나족과 한민족의 발음을 보자.

 

(6) 동양 3국 중 정자(正子)는 우리만 쓰고 있다

 

1.하늘 천(天);

지나인은 티엔(Tien)으로 발음하여 복모음 ie를 사용하여 [ie]로 발음하지만 한국인은 [천]으로 발음하여 [어] 단모음을 쓴다.

2.집 가(家);

지나인은 지아(Jia)로 발음하여 복모음 ia를 사용 이아로 발음하지만, 한국인은 [아]라 단모음을 쓴다.

3.나 아(我);

지나인은 워(wo)로 발음하여 복모음 [우어]로 발음하지만 한국인은 [아]로 발음 단모음을 쓴다.

4.이른 아침 조(早);

지나인은 자오(zao)로 발음하여 복모음 ao를 사용, [아오]로 발음하지만 우리는 [조]로 발음 단모음을 쓴다.

5.배울 학(學);

지나인은 슈에(Xue)로 발음하여 복모음 ue를 사용, [슈에]로 발음하지만 한국인은 [아] 단모음을 쓴다.

6.돈 전(錢); 지나인은 치앤(qian)으로 발음. 복모음 ia를 사용, 이애로 발음하지만 한국인은 [전]으로 발음 어 단모음을 쓴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데 몇 가지만 든다.

 

애(愛)=아이(ai), 호(好)=하오, 점(店)=디엔, 노(老)=라오, 소(少)=샤오, 포(包)=바오, 수(水)=슈에이, 외(外)=와이, 내(內)=내이, 좌(左)=쮸어, 우(右)=요우, 저(姐)=지에, 매(妹)=메이, 세(歲)=쉐이, 신(身)=시은, 상(箱)=시앙, 다(多)=뚜어, 위(位)=웨이 태(太)=타이, 수(手)=쇼우, 뇌(腦)=나오. 이 외에도 같은 게 거의 없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지나인은 단모음이 상당히 적고 한국인은 단모음을 사용해 정자체의 발음을 일자일음(一字一音) 원칙으로 정확히 사용한다.

 

(7) 《강희자전(康熙字典)》의 반절음(半切音)

 

중요한 것은 지나인의 표준사전인 [강희자전, 康熙字典]에서도 이들 정자체의 단모음 발음체계인 반절음(半切音) 사용법이 제시되고 있지만 지나인은 이 발음체계가 어렵기 때문에 간자체와 함께 반절음 체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은 한자의 완벽한 일자일음(一字一音)의 발음부호 체계다.

 

한자는 일자일음체계가 있어 한 글자마다 그 글자의 딱 떨어지는 발음이 있다. 이를 반절음 발음체계라 한다. 어찌 보면 상형문자인 한자의 일자일음체계를 표기하기 위해 3세 단군 가륵(嘉勒)께서 삼랑(三郞)인 을보륵(乙普勒)을 시켜 성음문자 《가림토문자》 38자를 창제케 했는지도 모른다. 즉, 가림토문자는 우리의 한자 전신인 고전(古篆)의 발음 방법을 일자일음 체계로 정확하게 표준적으로 표기하기 위해 만든 가장 과학적인 성음문자다.

 

엘리트층에만 보급되었던 가림토문자의 발성방법이 무슨 이유에선지 잊혀진 것 같고 조선시대 세종대왕 때에 이의 발음방법을 복구해 반포해 일반화할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다. 반절음법은 한문 글자 한자의 초성법과 중ㆍ종성음법을 표준적인 글자를 통해 제시해주는 발음법으로서 [康熙字典]을 통하여 반절음법을 익히게 되어 있다.

 

한자의 <일자일음체계>는 한국인에게 당연한 것이지만 지나인은 복모음으로 되어있어 거의 <일자이음체계>로 되어있다. 자기들 표준자전에 발음하라고 제시된 일자일음체계의 반절음 사용을 그들 스스로 못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한글은 우리의 고유 뜻글자인 한자를 발음할 수 있는 전용 소리문자인 고로 알고 보면 한자의 가장 정확한 발음부호다. 지금의 한글체계로 복모음 표현에 한계가 있는 것은 고대에 쓰인 반치음, ‘여린히읏’, ‘순경음 비읍’ 등을 다시 사용하면 모든 외래어표기가 가능하고 그래도 커버링이 안 되는 글자가 있다면 학자들로 하여금 고대 가림토문자의 발성법을 다시 연구해 보완하면 되리라 본다.

한자발음을 정의한 지나인의 표준 자전 [강희자전]에서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꺼릴 휘()=許貴切

족보에 자 나오는 이 글자의 초성음은 허(許)의 [ㅎ]이고 중종성음은 귀()의 [위]에서 찾는다. 따라서 합하면 [휘]라는 발음이다. 지나인은 후에이(huei)로 발음한다.

우(右)=于救切

초성음 우()의 [ㅇ]에서 중종성음은 구(救)의 [우]에서 찾는다. 합하면 우. 지나인은 ‘요우’로 발음한다.

산(山)=師閒切

(師)의 초성 [ㅅ]과 한(閒)의 중종성 [안]이 합한 산. 지나인은 ‘시안’.

삭(索)=蘇各切

(蘇)의 초성 [ㅅ]과 각(各)의 중종성이 합한 삭. 지나인은 ‘수오’, '사이', '수' 등 용도별로 발음을 달리한다. 삭과 같은 발음 전무.

소(素)=桑故切

상()의 초성 [ㅅ]과 고의 중종성인 [오]가 합한 소. 지나음은 ‘수’.

철(鐵): 天結切

동이족이 처음 발명했다는 철(鐵)자는 천(天)의 초성 [ㅊ]과 결(結)의 중종성 [열]이 합한 쳘. 지나 발음 ‘티에’.

두(豆)=徒候切;

(徒)의 초성 [ㄷ]과 후의 중종성 [우]가 합한 두. 지나음은 ‘토우’.

❽수(首)=書久切

서(書)의 초성 [ㅅ]과 구의 중종성 [우]가 합한 수. 지나음은 ‘쇼우’.

봉(鳳)=馮貢切音

빙(馮:탈 빙)의 초성 [ㅂ]과 공의 중종성 [옹]이 합한 봉. 지나발음 ‘훵’.

전(田)=條煙切

조(條)의 초성 [ㅈ[과 연(煙)의 중종성 [연]이 합한 젼. 지나음은 ‘티엔’.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康熙字典]이 규정하고 있는 발음방법에 제일 가까이 하고 있는 민족은 지나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다. 세계에서 한국인만이 가장 정확하게 [康熙字典]의 발음방법을 지키고 있다. 알고 보면 놀랄 것도 없지만 또 다시 생각해 보면 실로 놀랍지 아니한가?

 

상고 고고학으로 들어가면 논농사 밭농사를 처음 시작한 게 동이족이다. 그리하여 논 답()자가 지나에서는 쓰이지 않고 ‘쑤에이티엔(水田)’이라 한다. 일상 속에서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동양의 인문학이 꽃피우고 어휘가 풍부해지고 표현력이 다양해지려면 영어 속에 라틴어가 혼용되어 쓰이고 있듯이 한자와 한글이 병용되어야 한다. 한글은 대부분 한자어가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글만을 쓰면 못 알아들을 때가 아주 많다. 한자를 안 쓰면 법률용어는 거의 못 알아듣고 경제생활의 계약도 거의 못할 뿐 아니라 학문세계 뿐 아니라 사실상 사회생활이 불편해진다. 글자의 원리와 문화적 바탕을 보면 한국이 한자의 주인 다섯째; 글자의 발음 원리와 문화적 바탕을 보면 누가 한자의 주인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지나족은 돼지를 돈()이라 안하고 쮸()라 한다. 또한 원래 지나족은 돼지를 식용으로 사용한 민족이 아니다. 반면 동이족의 고고학 유적지를 가면 돼지를 기르고 이용하고 식용하여 돼지를 순장했고 돼지를 뱀을 막기 위해 습지대에서 〈깐란(干欄)〉이란 동이족 특유의 주거형태까지 만들었다.(그림 참조).

 

또한 동이족이 이러한 돼지를 물물교환의 형태로 발전한 화폐구실을 한 것이 우리말 돈의 어원이다. 돼지가 돈이다. 지나인은 돈(豚)을 툰(tun)이라 발음하고 화폐의 의미로 안 쓰고 치엔(錢)을 화폐의 의미로 쓴다. 이는 돼지를 사용한 민족이 동이족이지 지나 화하(華夏)족이 아니란 말이 된다. (안원전 담론 참조). 또 집 가()라는 한 글자만 보아도 한자를 만든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집 가(家) 자를 보면 집 밑(宀)에 돼지 시(豕)가 있는 글자다. 집에서 돼지를 기른 민족은 동이족 밖에 없다.

 

(8) 봉황과 용의 싸움

 

동이족의 신수(神獸)는 봉황(鳳凰)이요 지나족의 신수는 용(龍)이다. 봉황은 불과 대륙 문화를 상징하고, 용은 물과 농경 문화를 상징한다. 지나 족은 황하강 유역에서 물을 중심으로 출발하였고, 동이족인 배달민족은 북만주와 요동에서 시작하여 대륙에서 말 타고 활을 쏘는 문화에서 출발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언어가 ‘빨리 빨리’인데, 이는 곧 말을 타고 다니는 대륙기질에서 나온 것이다. 지나의 대표적인 언어가 우리와는 정반대로 ‘만만디'(慢慢地, 천천히)인데, 이는 물을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지나의 역사학자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中國史前史話》에서 봉황숭배는 동이족만의 전형적인 특색이라 말한다.

지나족은 본래 뱀을 신성시하였다. 뱀토템 사상은 고대 지나에서 가장 일찍 광범위하게 퍼졌던 사상이다. 뱀토템 사상이 황제 헌원(軒轅)의 시대에 이르러 청구(靑邱) 배달국의 용 문화를 수입하여 업그레이드 일반화 되었고, 그로부터 지나족은 용을 신성시 하였던 것이다.

 

용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부르는 신물(神物)이요, 황하(黃河) 속에서 꿈틀대던 수신(水神)으로 지나인들에게 인식되었다. 황하강(黃河江)의 사진을 보면, 구불구불 굽이치는 황룡 한 마리를 보는 듯하다. 황하는 지나족에게는 어머니의 강이요 민족의 젖줄이었으며, 그런 영향으로 지나인들은 더욱 용을 신성시하였다.

 

지나의 신화나 설화 속의 신과 영웅은 대개 이처럼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우주가 혼돈 덩어리였을 때 자신의 몸을 바쳐 하늘과 땅을 분리시키고 천지를 창조했던 반고(盤古)가 그렇고, 수신(水神)으로서 신들의 전쟁에 참여했던 공공(共工)과 그의 신하들이 그렇다.

 

지나 신화의 보물창고인 [산해경]에는 사람과 동물을 합성한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특히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한 신들이다.

성경에 용은 악마의 상징으로 나오는데, 말세에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無底坑, 지옥)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Eden의 뱀)이요, 마귀(魔鬼)요, 사탄(Satan)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 (계 20:1~3).

 

[설문해자(說文解字)] 에 보면 “동이족은 동방의 큰 활을 잘 쏘는 어진 민족이다” 라고 적혀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제경기에서 양궁(洋弓)을 석권하는 이유가 그래서인지 모른다. 동이족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활을 잘 다루어야 했다.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과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기마술과 궁술의 달인이었다.

 

무릇 동이족은 지나 문화의 뿌리요, 문명을 전해준 스승이었다. 인류문명의 뿌리와 지나족 문화의 뿌리가 모두 동방 배달국과 고조선에서 전해진 고대 일신교(一神敎)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지나의 건국 시조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동이족이었다. 삼황은 태호복희염제신농황제헌원을 말하고, 오제는 소호금천ㆍ전욱고양ㆍ제곡고신ㆍ요임금ㆍ순임금을 말한다. 지나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지나의 삼황오제 시대와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때까지는 지나족의 존재가 지나에서는 없었음으로 지나의 상고사는 동이족의 역사였고, 남쪽 변방의 남만(南蠻)족이 북상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지나의 역사서인《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황제 헌원 이전의 유명한 인물이 모두 동이족인 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책에서는 황제 헌원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회피하였다.

 

한편, 동이족인 강태공(姜太公)은 나중에 제()나라의 왕이 된 후에도 배달국의 하나님을 섬기는 신교(神敎)의 문화를 지나족에게 전수해 주었고, 배달국의 신교와 삼신관(三神觀)을 뿌리내리게 했다. 제나라에서는 팔신제 풍습이 있었는데, 팔신제는 팔신에게 제사지내는 제천의식이다. 여기서 팔신은 삼신 하나님과 치우천황 그리고 천지 일월을 말한다. 치우천황은 배달국의 도읍지를 청구(靑丘)로 옮기고, 동방 최초로 청동기 국가 문명을 이룩한 분으로서 주전 2,707년 즉위 통치하였다.

 

(9) 최초로 문자를 만든 치우천황의 신하 창힐(倉頡).

 

최근에 지나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ㆍ주전 221~206)나라 시대 전후의 죽간(竹簡ㆍ竹書)이 무더기로 발견돼 지나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베이징대는 2016년 초 해외에서 돌려받은 서한시대의 죽간을 분석한 결과 선진(先秦)과 진한(秦漢)역사와 고대 사상사, 자연과학사 등 여러 가지 분야의 연구서들이 담겨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발견된 죽간은 모두 3,300여 매로 현재까지 발견된 춘추전국시대와 진ㆍ한시대의 고서류 죽간 가운데 수량이 가장 많은데다 훼손된 흔적이 전혀 없이 먹의 색이 검고 빛이 날만큼 글씨가 또렷이 확인되는 등 보존 상태도 최고로 뛰어나 선진시대의 역사ㆍ문화ㆍ사회를 밝히는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중략.)

 

또 죽간 중에는 진나라 승상(재상) 이사(李斯)가 나라가 통일된 뒤 진시황에게 “진나라와 일치하지 않는 문자를 폐기해야 한다”고 청하면서 이사가 지은《창힐편(蒼詰篇)》이 고스란히 발견돼 중문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이사는《창힐편》에서 “창힐은 글자를 만들어 후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창힐편》은 송대 이후 유실, 왕국유(王國維) 등의 저작 등을 통해 일부 내용이 전해지고 있을 뿐 완전한 내용이 전해지지 않고 있었으나 이번에 발견된 죽간 속의《창힐편》은 1200여개의 완전한 문자가 보존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대부분이 처음 발견된 내용으로 한자 발전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012. 10. 3. 문화일보)

 

'맹자주소(孟子注疏)'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에는 이런 라는 구절이 있다.

"맹자가 말하기를 은(殷)나라 순(舜)임금은 제풍(諸馮)에서 태어나서 부하(負夏)로 이주해 명조(鳴條)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동이사람(東夷之人)이다."

 

지나인들이 성인으로 떠받들고 있던 순임금이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것이다. 고대 국가 은나라가 동이족 국가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지나인들은 의도적으로 이를 의식 속에서 지워버렸고, 사서(史書)에 무수히 등장하는 은허(殷墟)는 20세기 초까지 베일에 싸여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은나라의 건국 시조는 물론 나라 자체도 동이족의 국가인데 그들이 만든 문자만 동이족이 아닌 지나족의 문자라는 것은 “가랑닢으로 눈 가리기”의 어리석은 짓이다.

 

(10) 한자와 한글은 우리 민족의 완벽한 문자 시스템

 

한자의 근원인 녹도문자 또는 갑골문자도 우리 조상이 만들었고 거기서 나온 한자 또한 동이족의 문자였다. 후대에 한자를 집대성하여 정리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지나 인인들이 [문자의 시조]라 여기는 창힐 역시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동이족이었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자부선인(紫府仙人)은 배달국 치우환웅 시대의 대학자다. 태호복희씨와 함께 공부한 발귀리선인(發貴理仙人)의 후손이다. 후대의 유위자(有爲子)의 학문도 자부선인에게서 나왔다.

 

만물을 형상화한 한자는 신시배달시대의 녹도문자가 뿌리가 되어 탄생한 음()의 문자이며 뜻글자이고, 후대인 단군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가림토문자에서 만들어진 한글은 양()의 문자이며 소리글자이다. 즉, 뜻글자이자 음문자인 한자와 소리글자이면서 양문자인 한글을 함께 써야 완벽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진다. 이 두 문자를 함께 써야만 모든 소리를 완벽하게 말할 수 있고, 그 뜻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문자를 최초로 발명한 우리의 선조들은 그렇게 완벽한 문자를 만드셨다. 다시 말해 한자는 지나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배달국시대의 녹도문자 이래 동이족들이 세운 은나라에서 쓰던 글자들이 계속 발전해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는 한문을 언제 수입했다는 기록이 없다. 단군시대 이후 싸우기를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동이족이 영토욕에 사로잡힌 지나족의 진나라ㆍ한나라 등 의 세력이 밀리면서 한자(桓字)는 한자(漢字)로 바뀌어졌고, 동이의 이()자는 '어질 이'에서 '오랑캐 이'로 폄하된 것이다.

 

《說文解字》에서 이(夷) 자의 해석을 보면 <夷=人人大人人弓> 으로 나온다. 즉 이(夷) 사람들은 대의()를 따르고 궁도(弓道 활쏘기)를 따른다는 뜻이다. 고대 갑골문의 '夷' 자의 초기 모습은 '사람 '人' 자이다. 즉 '人'자가 변화되어 '夷' 자가 된 것이다. 고대 갑골문의 '人'자는 “하늘님 앞에 겸허히 예를 갖추는 사람의 모습” 이다. 즉 원래 '人' 자는 말하자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뜻하는 글자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뜻하는 '人' 이 '夷' 자로 변화한 것이다. [출처]'한자는 우리글이다'(2001년 7월 2일자 경향신문 기사)

(11) 동이족(東夷族)의 콩과 한자(韓字)

 

재야 사학자 박문기씨는 음성학적ㆍ문화학적 근거를 들어 한자가 지나인의 글이 아니라 우리글이라고 주장한 《한자는 우리글이다》(양문)를 펴냈다. 박문기씨는 콩과 관련된 글자로 콩의 원산지인 백두산의 동이족이 한자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이런 예를 들었다.

"지나인들은 태(太)자를 '클태'로 풀이하지만, 우리 조상은 '클태ㆍ콩태' 등으로 풀이하여 모든 콩 이름에 자를 붙였다. 조선조 숙종 때 홍만선이 찬술한《산림경제》에는 콩 농사법을 자세히 서술하였는데 콩의 종류를 많이 기록하였다. 그런데 모두가 태()자 돌림이다.

잘외콩(者之外太)ㆍ온퇴콩(百升太)ㆍ흑태(黑太)ㆍ청태(靑太)ㆍ백태(白太)ㆍ황태(黃太)ㆍ유월태(六月太)ㆍ불콩(火太)…….

 

이 밖에도 많이 있다. 한반도가 콩의 원산지인 만큼 우리의 콩 종류는 무궁무진할 정도였다.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수집한 종만 해도 무려 5,496종이나 되었다고 하며, 그렇게 해서 미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만 3,200종에 이른다고 한다.

 

또 옛날 단군이 도읍을 한 백두산 인근은 콩의 원산지로서 각종 콩이 많아 모두들 공을 먹으며 건강하게 살았고, 콩을 수출하는 배가 강에 가득하다 하여 강 이름까지 두만강(豆滿江) 곧 콩이 가득한 강으로 불렸다. 콩에는 우리 문화가 있다. 부엌을 뜻하는 두(痘)자는 주방 안에 콩이 있음을 말하고 주방의 주(廚)자에도 콩두(豆)자가 들어 있다. 콩을 먹어야 머리가 좋아진다 하여 머리 두(頭)자는 콩두(豆)옆에 머리 혈(頁)자를 썼다.

 

콩은 전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식물로서, ‘밭에서 난 고기’ 라는 별명으로 수백 만 사람들에게 식물성 단백질을 제공하며, 수백 가지 화학제품의 원료로 쓰인다. 1804년에 와서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남부와 중서부 지방에서 특히 중요한 작물이 되었다. 콩은 가장 영양분이 많고 소화하기 쉬운 식량으로서 단백질이 가장 풍부하고 또 가장 값싸게 얻을 수 있는 단백질 공급원 중의 하나다. 씨는 기름 17%, 분말 63%로 이루어져 있는데 분말 중 50%는 단백질이다. 콩은 녹말이 없기 때문에 당뇨병 환자들에게는 아주 좋은 단백질원이다.

 

동아시아에서는 흰색의 현탁액(懸濁液)인 두유(豆乳)와 두부형태로 널리 소비되고 있다. 또한 싹을 틔워 콩나물로 길러 샐러드 재료나 채소로 쓰고, 불에 볶아 스낵으로 먹기도 한다. 콩과 밀을 발효시켜 만든 갈색의 짠 액체인 간장은 최고의 자연산 조미료다.

 

(12) 고조선과 아침

 

주역(周易)과 태극(太極)을 만든 우리 선조 태호(太昊) 복희씨의 이름에는 콩 태(太)자와 하늘 호(昊)자가 들어 있다. 단군께서 태백산(太白山) 곧 백두산에 신시(神市)를 건설하시고 하나님께 제사하심으로써 조선(朝鮮) 나라를 개국하신 것이다. 공자가 편찬한 [예기(記)]에 공자는 복희씨를 가리켜 말하기를;

 

“천제(天帝)는 동방 해 뜨는 곳에서 나셨는데 그가 복희씨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한민족은 천손민족(天孫民族)임을 자랑하고 나라 이름을 아침 조() 맑을 선()자를 써서 朝鮮으로 정하여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을 조정(朝廷)ㆍ궁중에서 관리들이 입는 옷을 조복(朝服)ㆍ조정에서 내린 명령ㆍ조명(朝命)ㆍ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조공(朝貢)이라 하였고 왕의 사당을 종묘(宗廟)라고 하였다. 자는 집엄(广) 안에 아침 조()자를 넣어 朝鮮 왕의 사당임을 밝혀 놓았다. 이래도 한자가 우리글임을 못 믿는다면 그는 우리 국민이 아니다.

 

8) 지나, 인류사 첫 ‘한민족 피라미드’ 400여개 은닉 [출처] : 전 숭실대 법대 이을형 교수의 [한국의 상고사 찾기]에서

들어가며

지나(支那) 역사의 약점은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역사의 빈약함이다. 지나는 상고사가 없는 나라다. 그들은 한국(桓國)과 배달국시대 우리와 같은 역사가 없다. 이는 지금 대국이 된 지나가 역사에 대한 열등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의 상고사를 자기들 역사에 제멋대로 맞추고 조작해서 억지로 만들어 가는 이유다.

 

배달국시대까지도 한인(漢人)의 나라는 중원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삼황오제설(三皇五帝說)을 조작해 마치 상고시대 역사가 있었던 것 같이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헌원 이전의 역사는 기록도 없다. 그들이 말하는 삼황오제도 우리의 역사다. 지나의 삼황이라는 수인씨(燧人氏), 복희(伏羲氏), 신농씨(神農氏―소전·少典의 아들)과 오제(五帝)라는 천황씨(天皇氏), 유소씨(有巢氏), 고시씨(高矢氏), 치우씨(蚩尤氏), 신지씨(神誌氏) 등이 바로 한민족의 역사적 인물들이다. 이외에 역사적 인물로 여왜(女媧)), 소전(少典), 유망(楡罔), 소호(小昊) 반고(盤固), 헌원(軒轅), 전욱(顓頊), 제곡(帝嚳) 등도 마찬가지다.

 

요 · 순은 우리 한민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들은 우리 배달국 사람이기에 우리 선조들이다. 당시 또 나라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지배하거나 우리의 제후국이었다. 단군조선에 와서 우리는 고도의 문명국으로 부상했다. 이는 당시 법률이며 화폐가 발견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단군시대 우리 선조들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조선에는 도둑이 없어 문을 열어놓고 잔다.’는 기록이 있다.

 

죄에 대한 형벌제도도 명문화 했을 만큼 고도의 문명국이었다. 이 당시부터 가림토의 문자가 있었기에 기록이 가능했다. ‘한국은 성인(聖人)이 세운나라’라고 할 만큼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정신으로 그 축이 됐다. 지금도 홍익인간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류의 정신이다. 우리는 천민(天民)의 자손으로 천손(天孫)을 자처하며 태고시대의 옛날부터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민족이었다.

 

그 제천의식은 높은 산 정상에서 행해졌고, 산이 없는 평야지대에서는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 평야지대에 쌓은 제단이 바로 피라미드의 시작이다. 이 피리미드가 후에는 통치자 무덤으로 변화한 것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문명은 4대문명으로 알려져 왔지만 요하에서 인류의 최초 · 최고 문명이 일어난 것으로 밝혀지면서 세계 고고학계는 문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게 됐다. 요하문명(홍산문명)은 4대 문명보다 1000~2000년 앞선다. 따라서 홍산문명은 우리 선조들이 최고 · 최초로 일으켜 세계사를 주도했음을 상징하는 문명이다. 지금까지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던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우리 민족이 BC 3100년경 이곳으로 이동해 일으킨 것으로 이는 이제 상식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논문들이 그 연구결과를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피리미드도 요하문명을 일으킨 인종에 의해 나왔다는 사실이 학계에서 발표되고 있다. 예컨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요시무라(吉村) 교수는 다음 요지의 연구결과를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홍산문명을 일으킨 검은머리의 인종이 BC 31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키고 수메르에서 귀화한 ‘임호테프(Imhotep’에 의해 BC 2700년 전 이집트 최의 피라미드가 탄생됐다.”

 

요시무라(吉村) 교수의 이 같은 고증은 지금까지 인류 최고의 문명이라고 알려졌던 수메르문명이 사실은 우리 한국의 배달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만든 문명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집트문명 역시 배달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에 의해 처음 이뤄졌다는 것이다.


(1) 5대 문명이 나온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


5대 문명이 우리 한민족 주도로 된 것을 식민사관의 사람들은 믿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 한민족인 기마민족이 문명의 발상지를 오고 가며 침입 내지 정복해서 이룬 것이 5대문명의 실체다. 역사의 기술은 대개 문명이 나온 배경을 농경이 대하유역(大河流域)에서 발달한데서 출발하고 있다. 이 일대에서 생산이 증대되고 인구가 증가해 통치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실제로 문명이 일어났다. 그 당시 부족의 지배자도 출현해 부족국가가 왕조국가로 발전하며 5대 인류문명이 대하(大河)를 중심으로 발원했다. 그 중심에는 우리 한민족이 있었다. 우리가 5대문명에 관여했다.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 문명도 우리가 주도했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그대로다. 선조들은 BC 6000년대부터 콩 보리 등 농경민, 초원의 유목민, 산림의 수렵민 등이 공존하며 상호 필요한 물품을 교류하며 살았다.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두 강의 유역은 토지가 비옥했으나 강우량이 적어 건조했기 때문에 지하수도 ․ 제방 ․ 저수지 ․ 운하 등의 문명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필요한 물을 끌어 사용하는 관개기술이 나오게 됐다.

 

이집트 나일강은 여름마다 홍수로 물이 넘쳐 상류로부터 비옥한 흙이 운반됐기 때문에 보리농사가 발달하면서 많은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인류는 샘족 ․ 야벳족 ․ 함족으로도 구분하는데 이집트에서는 함족에 의해 BC 3500년경부터 도시국가 형성돼 BC 3000경 통일왕조가 수립됐다. 이후 왕조는 몇 번이고 교체됐는데, 기마민족이 이곳까지 와서 농경지대에 침입하고 정복하는 일이 많았다. 나일계곡에 연한 농경지역에서 봉쇄적인 지형 때문에 특색 있는 문명을 낳았고 BC 525년 페르시아에게 통일 될 때까지 약 30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 때문에 교통로, 교역로인 산림지대의 길, 초원의 길, 오아시스의 길 등이 넓혀졌다.

 

문화적으로는 태양력 측지술(測地術), 문자의 발명, 피라미드, [사자(死者)의 서()] 등이 있다. 나일강의 범람을 통제 · 관리해 홍수의 피해를 막고 경작지를 확대했다. 이것이 이집트의 정치통일과 강대한 왕권의 출현에 중요한 바탕이 됐다.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에 비해 개방적인 지형이다. 따라서 주위의 산악부에 상당히 유력한 유목민인 기마민족이 침입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국가성립은 비교적 늦게 성립되고 국가의 흥망도 빈번했다. 반면 문화교류가 빈번해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과 같이 오리엔트의 통일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메소포타미아는 왕권이 강대해 계약의 관념이 발달했다. ‘함무라비법전’은 그것을 상징한다. 이 지역에서는 페르시아에 의한 통일과 전제국가 체제가 완성됐다.

 

문화적으로는 태음력, 육십진법을 비롯해 설형문자(楔形文字), 페니키아의 표음문자, 히브리족의 일신교 등을 낳았다. 인더스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농경을 넓혀 BC 2500년경부터 각지에 훌륭한 도시를 건설한다. 이곳에서는 청동기(靑銅器)가 사용돼 인더스 문자도 만들어진다. 그리고 앞서 문명을 일으킨 메소포타미아와도 교류가 있었다. 우리 한민족은 이곳까지 영향을 미치며 인더스문명을 일으켰다. 기마민족의 기동력은 놀라워 이곳 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황하문명 또한 우리 한민족이 일으킨 문명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중원이라는 곳이 바로 황하지역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 민족이 이곳에 먼저 살았다. 그 당시 황하유역의 사바나 지대에서는 사람들이 수렵, 목축과 함께 보리, 조, 등의 농경을 발달시켰다. BC 1500~1200년경에는 우리 한민족이 주축이 된 여러 도시국가가 이곳에서 탄생된다. 그 중 은(殷)나라가 가장 대표적이다. 은나라는 우리 한민족이 세운 나라다. 서아시아 북방 유라시아의 우리 민족이 청동의 칼 등을 갖고 왔기 때문에 어느 민족국가보다 강력한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다. 황하문명에서는 뛰어난 청동기와 한자의 시조가 되는 갑골문자도 나왔다. 갑골문자는 주자(呪者)가 귀갑(龜甲), 우골(牛骨) 등을 불에 태워 그 위에 정치적 결정이나 곡물의 풍작, 흉작을 점치는 행위 등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당시의 은 왕의 묘나 궁전도 발굴되고 있다. 은허(殷墟)가 바로 그것이다.

(2) 피라미드의 최고(最古)도 조선의 피라미드

2000년 7월 3일 지나의 천진일보(天津日報)는 티베트 서쪽 끝에 돌로 쌓은 1백 개가 넘는 피리미드가 러시아 고고학 발굴단에 의해 발굴된 사실을 보도한다. 이집트에서 제일 큰 기제피라미드(Gizeh Pyramid BC 2613~2494, 146.5m)보다 2배 이상 큰(300m, BC,4000) 피라미드도 있었다. 이 피라미드들은 발굴에 참여한 지나인 학자도 언급했듯이 한국(桓國), 배달국시대의 지도자와 한웅(桓雄)의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그 증거로 5000년 전 지나 북부와 만주에 있었던 강력한 문명국가는 오로지 한국(桓國)과 배달국밖에 없었다. 당시 몽골이나 흉노, 거란과 여진은 문명을 만들 능력이 없는 단순한 유목민들이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그 주인인 우리는 역사에 대한 무지로 침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말문이 막힌다.

 

1945년 우연한 계기로 지나 북쪽을 비행하던 미군수송기 조종사에 의해 촬영된 사진의 보고서에 의해 이 피라미드들은 최초로 세상에 알려졌다. 400여개의 거대한 하얀 피라미드가 지나 북쪽에 널려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독일의 고고학자 하우스도르프(Hartwig Hausdorf)는 비밀리에 이들 피라미드를 촬영해 ‘White Pyramid’(하얀 피라미드)라는 책을 출판해 서방세계에 북 지나의 피라미드의 실체를 알렸다. 지나 정부는 이곳이 옛 지나의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이 피라미드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이라고 이조차 거짓말을 했으나 서구사회의 계속되는 압력과 방송 등으로 그 실체를 결국에는 인정한다.

 

1963년 발굴당시 지나의 고고학자들은 이 피라미드가 진시황(BC, 259~210)의 무덤으로 예상하며 희망을 갖고 조심스럽게 발굴에 임했으나 고고학계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 BC 약 4000년 전에 돌로 축조된 한국(桓國)과 고구려의 건축공법인 ‘들여쌓기 공법’인 것으로 드러났다. 피라미드들이 황하문명보다 2천년이 앞서고 진시황의 연대보다 수천 년 앞서 만들어진 한민족 고유의 공법으로 축조된 것이 밝혀짐에 따라 지나는 크게 당황했다. 돌로 쌓으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계단식 모양의 전통적 축조공법으로 쌓은 하얀색 돌의 피라미드였기 때문이다. 지나의 무덤은 돌이 아닌 흙으로 무덤을 만드는 종족이었기에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 피라미드에서 쏟아져 나오는 유물은 우리 한민족의 것이었기에 지나는 이를 숨기기 위해 발굴을 중단했다. 나아가 지나는 지금까지도 한민족 관련의 유물들을 절대 비밀로 하기 위해 발굴에 참여한 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는 야만성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 유물을 지나 것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꼼수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이곳의 발견으로 고고학계는 피라미드의 인류역사를 다시 써야 했다.

 

이를 증명하는 실화가 있다. 지나의 서안의 피라미드 발굴과학자인 장문구(張汶邱)의 발굴 실화가 그것이다. 그는 임종 전 ‘조선의 피라미드 중 최고(最古)는 티베트 피라미드다’라는 글에 이 같은 사실을 적시해 소개하고 있다. 장문구의 발굴참여 비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 피라미드의 발굴 상황에서 보인 지나의 옹졸함


1963년 4월 고적 발굴 팀 36명은 당국(지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았다.

“진시황의 다른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 하니 대기하라.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니 조사 발굴내용을 외부에 일절 누설하면 안 되니 이 점을 각별히 유의하라,”

장문구 일행은 지나에도 이런 피라미드가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에 탄성을 올렸다. 발굴팀은 3일 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발굴하기 시작했다. 3곳 모두 같은 형태였는데, 이중 가운데 피라미드가 대단한 규모였다.

 

거대한 벽돌 피라미드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 갈수록 말과 마차의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가림토 등)들이 나왔다. 또한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 · 절구 · 솥 ·그릇 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백김치) · 동물의 뼈 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 활 · 금관(신라형) · 칼 · 창과 장신구류 등 부장품 800여점, 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음), 14구와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 발견됐다. 장문구 발굴팀은 이렇게 말했다.

“난생 처음 보는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 듯 했다. 마치 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발굴팀은 이어서 말한다.

“작업 3일째 되던 날은 약 70% 정도가 파악 · 작성됐다. 이날 오후쯤에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보고를 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옛 지나족) 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의 문명이야!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의 발굴을 모두 그 자리에 두고 일단 오늘은 그만 나가자.”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장문구 발굴팀들은 숙소에서 현지 공안에게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 제출했다. 그렇게 발굴팀이 철수한 후 그 피라미드에 관해 더 이상 알려진 내용이 없다. 장문구는 “이것이 지나의 피라미드에 대한 마지막이었고 내가 아는 전부다”고 임종 전 말했다. 지나는 이처럼 우리의 피라미드는 물론 역사 유적과 유물들까지도 숨기고 외부와 차단시키며 공표조차 제대로 않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나는 인류의 문명 역사 마저 숨기며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조작하려는 속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인류의 유산까지 도둑질 하겠다는 의도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지나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동정이 앞선다. 만주 집안(集安)의 피라미드나 지나 북부 함양의 피라미드군(群)과 티베트의 피라미드 모두는 제아무리 지나 것이라 말해도 그것을 그대로 믿을 학자는 없다. 이 피라미드는 엄연히 우리 한국의 피라미드로 당시 우리 한민족의 세운 국가영역에 세워진 피라미드가 아니던가. 우리는 고대문명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고대 피라미드 건조의 효시(嚆矢)가 되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4) 한민족의 바른 역사 제대로 찾아야


상고사를 연구할수록 인류문명과 문화발전에 거대한 업적을 남긴 민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라는 것을 결코 피해갈 수 없게 된다. 외침에 의해 수많은 역사자료가 말살되면서 우리의 상고시대와 고대역사가 신화로 전락돼 만신창이 역사가 되기는 했다. 우리 민족은 천손민족(天孫民族)으로 하늘에 제사하고 선조를 숭앙하며 거대한 제국의 상고시대를 거친 민족임이 드러나고 있다. 그 고유의 전통이 여기저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을 우리는 볼 수 있고 느낀다. 이 전통들은 민족과 함께 살아 민족을 가호하며 단결시켜 주는 구심점이 됐다. 다만 각 사서의 저자에 따라 그 표현방식이 불교적 혹은 선교(仙敎)적 색채를 띠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단군의 사적을 신화로 채색하고 수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 속에 단군이 꾸며져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단군의 사적을 신화로써 채색하고 수식했다. 그렇다면 신화 때문에 사적을 말살할 것이 아니라 꾸며 놓은 신화적 요소를 조심스럽게 추려내고 본래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 상징적으로 표현된 설화 속에서 바른 사실을 찾아내야 한다. 종교적 색채를 제하면 우리 역사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고려조에서는 몽골의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 강회 금지정책 아래서도 호국불교 신앙과 함께 단군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조선조에서는 유학을 숭상하는 정책 때문에 불교는 억압했지만 단군숭상 사상만은 유지해 단군과 고조선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일제강점 후 상고시대와 고대시대의 역사가 잘려지면서 식민사관의 교육으로 전락했다. 식민교육에서는 한국(桓國) · 배달국 · 단군조선의 고대 3조선은 물론 예맥(濊貊) · 부여 · 숙신(肅愼) · 삼한 · 가야(伽倻) 등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사정없이 말살 왜곡 또한 상상을 초월하게 이뤄졌다. 우리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강성해 요동과 산동 반도는 물론 지나 중원을 장악했다. 요동, 산동 반도, 한반도를 본거로 거대한 왕조를 이룬 사실은 오늘날에는 모두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유라시아는 물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수도 또한 여러 곳에 두고 엄청난 국력을 과시했다. 이미 백두산과 평양이란 지명이 지나에도 많았던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렇게 강성한 우리 한민족의 나라가 진시황 때 통일을 이룬 지나가 강자가 되면서 이들에게 밀리기도 하고 살기 좋은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수도를 여러 번 옮겼다. 이 과정에서 산하와 도시의 명칭을 요동, 산둥 반도, 중원 지역에 동일하게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옛 활동지역의 것은 잊어버리고 반도의 역사만을 알면서 지명의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우리 한민족이 문화적 선도자였다는 것과 그 활동지역이 넓은 지역이었다는 것은 대만 학자 서량지(徐亮之) 교수 외에 현대 지나 학자들이 고대 한민족의 옛 지명을 찾아내면서 드러나고 있다.


(5)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 증명되는 고대 유적들


우리 민족이 얼마나 우수한가는 세계 최초로 공인된 것들을 살펴보면 안다. 우선:


①신구석기 유물: 2만 년 전의 것으로 알려진 전남 장흥군 출토의 신석기 유물이다. 신석기보다 더 오래 전인 구석기 유물도 경기도 연천에서 발굴되고 있다. 구석기 유물의 대표는 돌도끼, 신석기 유물의 대표는 마제(磨製)석기인데 지나의 황하문명은 신석기시대 후반에 일어난 문명이다.


②쌀농사 : 역시 세계 처음으로 우리 민족이 시작했다. 1만5000년 전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59톨의 볍씨가 출토 되었는데,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결과 1만5000년 전후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까지 지나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1만 2000년)보다 약 3000년이나 앞선 볍씨다. 지나의 쌀농사보다 더 앞선 것이다. 한국에서 지나, 세계 각 곳으로 전파된 것이다.


③토기 : 역시 세계 최초다. 제주도 고산리(高山里)에서 출토된 토기는 1만 수천 년 전 것으로 기존에 세계 최초라던 수메르 토기보다 수천 년이 빠른 것이다. 동이족의 문명이 황하문명보다 2000년 앞섰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것도 만주지방에서 출토됐다면 지나는 자기네 것이라 우길 것이다.


④배만들기(造船) : 역시 세계 최고(最古) 최초다. 8000 년 전 경남창녕군 부곡면 출토는 이집트 쿠푸왕 시대의 배보다 3400년 앞서고 일본의 이끼리끼(伊木力) 출토품보다 2000년 이상 앞선다. 세계전문가들이 와서 보고 이를 인정하고 있다.


⑤고래잡이 : 또한 세계 최초로 우리 한민족이 시작했다. 8000년 전 경남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는 영국 BBC 방송도 ‘한국이 고래잡이 최초’란 제목으로 방영하고 있는 것이다.


⑥고인돌 및 천문세계도 : 이것도 최초다. 8000년 전 전남 화순군에 있는 고인돌을 비롯해 강화도 등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한반도에 몰려있다. 상·고대부터 배달문명이 존재했다는 요지부동의 증거다.


⑦빗살무늬토기: 세계 최초다. 8000년 전 강원도 양양군 출토의 빗살무늬토기는 한국에서 시작해서 시베리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지나의 빗살무늬토기는 탄소측정결과 이후에 만들어 진 것으로 밝혀졌다.


⑧화포 : 세계 최초 자연화약 및 화포도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개발했다. 1376년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은 지나가 먼저 발명했지만 최무선이 독자적으로 연구 끝에 자연화약을 자체개발하고 함선에 실어 발사하는 화포와 화통은 우리가 세계최초로 개발했다. 이 무기는 1380년 두 번에 걸쳐 침입한 왜구 620척의 선단(船團)을 진포·관음포 싸움에서 격파해 대승케 하는데 기여했다.


⑨금속활자: 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1377년 직지심경(直旨心經)이다. 이 직지심경의 인쇄는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무려 70년 앞선 것이다. 이는 우리 금속인쇄문화가 얼마나 앞선 것인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이를 본 세계인들은 크게 놀라워했다.


⑩로켓 : 세계최초 로켓과 신기전(神機箭)도 개발했다. 신기전은 1448년 당시 한 번에 일백 발씩 발사되는 최첨단 비밀병기였다. 당시 두만강, 압록강 국경을 침입한 여진족들을 물리치는데 사용된 다연장로켓(9MRL)의 원조다.


⑪철갑선 : 세계최초의 철갑선 개발이다. 이순신 장군은 7년간의 임진왜란 당시 철갑선인 거북선으로 일본군과 싸워 23전 23승이라는 해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 거북선은 태종실록(1413년)에 최초로 나타난다.


⑫피라미드 : 앞서 칼럼에서 자세하기 기술한 피라미드의 건조 또한 세계 최고(最古)의 것이다.

 

이 외에도 현대에 와서는 삼성의 최초 발명품 1위는 갤럭시 스마트폰이 차지했다. 모바일 시대 도래와 더불어 급성장하고 있는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 갤럭시는 애플 아이폰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한국 기술력을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줄기세포와 체세포 개발도 세계최초로 했다. 황우석 연구팀이 2004년 세계최초로 시도해 외국에서도 이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고 있는 중이다. 줄기세포 기술이 질병치료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 및 창의력과 무관치 않다.

 

(8) 진(秦)나라의 등장 이전까지 중원은 우리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라시아 중원은 우리 한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명과 문화를 주도한 민족이 한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하족(華夏族) 등이 선진 한민족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들 화하족의 인구증가는 큰 변화를 가져온다. 물론 화하족들의 농경은 한민족에 의해 시작됐다. 농경과 함께 야생동물을 가축화 · 목축화 하는 일도 시작했는데, 바로 우리가 화하족에게 이를 전수시켰다. 이러한 생업이 일어나면서 농경민, 유목민, 수렵민이 공존하고 서로 교류하게 되면서 이들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문명이 일어나고 지배자가 출현해서 국가가 서게 된 것이었다.

 

기원전 8세기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주왕(周王)의 힘이 쇠해지고 제후(諸侯)들은 각지에서 나라를 세워 우리의 기마전술과 철제무기를 적극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철제농구가 보급되면서 농업이 발달하고 상업이 번성하게 됐다. 그 결과 지나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이후 진시황(秦始皇)이 BC 221년 중원의 여러 나라를 통일한다. 진시황의 통일 이전까지 지나는 한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우리는 지나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강 및 황하유역 등에 왕조를 세워 대륙을 호령했다. 농경과 함께 일어난 목축을 토대로 한 우리의 문명과 문화는 국가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이미 밝혀진 대로 1만5000년 전 재배볍씨의 발견(충북 소로리)으로 우리의 농업이 동북아시아에서 세계로 전파된 것이 입증됐다.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유라시아와 세계로 문명의 기틀을 전파할 수 있었을까.

 

대빙하시대(BC 50,000~25,000년 전)에는 지구의 28%가 빙하에 뒤덮여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가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남부의 쇼베(Chauvet) 동굴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동굴벽화(3만5000년 전)를 남겼던 인류와, 다른 지역의 인류들은 혹독한 기후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땅은 비교적 따뜻하고 다습한 기후가 유지된 천혜의 복된 땅이었다. 그 증거의 하나로 충북 단양 금굴 유적지 한 곳에서는 20만 년 전 인류보다 훨씬 앞선 70만 년 전부터 후대까지 전시대에 걸친 유적들이 고루 발굴되고 있다. 공룡의 화석과 더불어 많은 발자국마저 발견되고 있는 것은 우리 땅이 빙하기를 이길 수 있었던 환경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2005년 제주도 서귀포시 상모리 ․ 사계리(沙溪里)에서 2만여년 전의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ce) 화석이 발견된 사실이다. 즉, 옷을 지어 입고 언어를 구사하는 고도의 지능을 갖춘 인류가 지금의 우리 조상이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사실은 KBS 〈역사스페셜―제주도 사람발자국 화석의 비밀〉에서도 방영했다.




이렇게 이 땅에 우리 조상이 정착해 산 것은 일반적인 인류사의 시작(20만 년 전)을 넘어서는 훨씬 앞서고 빠른 것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해수면이 낮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오가며 살 수 있었고, 서해도 지금보다 해수면이 1백m 낮은 땅이었기 때문에(지상 60m) 당시 우리 조상들은 지금의 지나 땅을 걸어서 오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지리적 혜택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과학 동아―2004년 4월호]. 이것은 유럽과 시베리아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전 세계 해수면이 100m 상승하기 전의 일이다. 인류의 조상은 과연 누구이며 그 인류는 어떻게 이동했는지 역사는 말한다.


(9) 인류의 조상과 인류의 이동 역사 중심에 ‘동북아’


우리의 땅은 빙하기에 제주도와 육지가 거의 붙어 있었고 서해의 대륙붕(평균40m)이 전부 육지였다. 다시 말해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현재의 지나가 같은 하나의 대륙이었다.

 

그 당시 이곳에 지나인은 없었고 우리 한민족만이 물가를 에워싸고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 이런 넓은 대륙은 1만5000년 전부터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변했다. 우리 조상의 삶의 터전이었던 서해지역의 땅은 서서히 40m 수심의 대륙붕의 바다로 변했다. 전설의 섬으로 불리는 이어도 또한 1만1000년 전인 빙하기까지도 제주도와 연결돼 있었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민요로 불리는 이어도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지금의 대륙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세계학자들에 의해서도 밝혀지고 있다. 호주 시드니 대학의 지질학자들도 ‘1만년 이전의 한반도 서남해지역이 빙하가 녹기 전에는 육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빙하가 녹아내려 우리의 땅이 좁아지자 한국문명을 갖고 세계로 확대해 나간 것이다.

 

즉, 요하에서 시작한

❶요하문명(홍산문명, BC4500년~BC 3000년)은

❷메소포타미아문명(BC 3500년)을 거쳐

❸이집트문명(BC 3200~BC 343년),

❹인더스문명(BC 2600년~BC 1900년),

❺황하문명 BC 2000년),

❻그리스문명(BC 1100~BC,14년),

❼로마문명(BC 27~AD476년)으로

 

확산돼 나갔다. 이는 인류의 문명루트다. 세계문명의 시원지(始原地)가 자랑스럽게도 우리 땅이요, 우리나라 배달국시대였다. 또한 놀라운 것은 2003년 3월과 4월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는 인류사에 놀라운 논문이 게재된다. 그것은 “헬리코 파이로린 박테리아의 유전자로 추적한 인류이동”(3월7일자)과 “농업언어의 전파”(4월25일자)라는 논문이다.


(10) 1만 년 전 첫 인류이동·농업언어(문명) 한민족 입증


이 두 논문은 모두 약 1만 년 전(1만2000년~8000년 전)에 동북아시아로부터 어떤 집단이 세계로 확장됐음을 가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동북아시아에는 우리 한민족이 있었다. 쌀의 볍씨가 1만5000년 전에 발견됨으로 인해 우리의 농업과 언어가 동북아시아에서 세계로 전파된 것이 놀랍다.

 

아울러 헬리코 파일로리 박테리아(Helicobacter pylori)의 동아시아형(EA형) 원시유형자의 원형이 오로지 한국인에게서만 100% 독립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수메르지역의 이라크인들(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한 아메리카 인디언(멕시코, 마야, 잉카문명)에게서 변형된 동아시아(EA형) 원시유전자가 분포돼 있음을 밝힌 놀라운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두 연구는 모두 ‘한국인이 동아시아의 조상’으로서 전 세계로 확산됐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전 세계에 한국의 문명과 문화의 흔적이 수 없이 많이 있었던 것이고, 가축의 조상 또한 우리 것이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 개의 조상도 한국 개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생물교과서는 개의 조상은 한국 개였음을 DNA를 통해 추정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의 문명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주역으로 그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며, 우리보다 선진민족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1926~36년에 걸쳐서 북경 서남 약 50Km 교외의 주구점동굴(周口店洞窟)에서 수만 년 전의 북경인 유골이 40체 이상 발견됐다. 이중 1933~34년에 발견된 인골은 고생인류(古生人類)의 원생인류(原生人類)로서 홍적세기 후기 5만 년 전에 활동하고 불을 사용해서 식물의 조리를 알고 수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북경인이 지나 한족(漢族)의 조선(祖先)이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지나인(華夏族)=동남아시아인)이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인류문명의 시작과 이동이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시작되고 주도됐다는 사실이다.


(11) 한민족, 서양보다 3700년 앞서 ‘지동설’ 입증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나라 역사를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 역사를 통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나와 일본의 잘못 조작된 날조의 역사는 말하면서 진작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선조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지나와 일본에 의해 철저히 파괴 된 정체성(停滯性)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모른다. 나아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민족인 것을 모르고 사는 국민이 너무 많다. 이러한 한민족의 역사 무지에 대해서 이를 보는 외국학자들이 한국 역사의 진수를 알려주는 역사의 진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10,000년의 찬란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면서도 아직도 우리 지도자라는 인사도 기껏 5,000년의 역사라며,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안타깝다. 얼마 전 북한의 공격으로 침몰한 천안함 장병의 장렬한 순국 4주기를 맞았다. 그날 정부 대표의 추도사에서도 5천년 역사라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피가 거꾸로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일제가 조작 위조한 왜곡한 역사를 바른 역사인양 금과옥조로 알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우리는 1만년이 넘는 위대한 역사를 가진 세계 으뜸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지도급 인사까지 창피한 역사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최초 · 최고의 인류문명을 일으킨 민족 아닌가. 고대 요하문명, 피라미드, 신석기 유물, 쌀농사, 토기, 배만들기, 고래잡이, 고인돌, 천문세계도, 빗살무늬토기, 자연화약과 화포, 금속활자, 신기전(神機箭, 로켓), 철갑선, 책력,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등에서 보듯 우리는 5천년역사가 아니라 1만년이 넘는 역사란 것을 왜 모르는가.

 

필자의 일본 명치대(明治大) 선배이신 한갑수(韓甲洙, 1913― 2004) 선생은 군복무로 미국 공군 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었다. 그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의 학자 서량지(徐亮之) 교수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귀국 한민족은 지나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지나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지나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지나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는 이 말을 하고 한갑수 선생에게 넙죽 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1943년10월 초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4천 년 전 한족(漢族)이 중원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이 점령해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원에 들어 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했다. 동이는 은(殷), 주(周) 이전은 물론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활동무대가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 등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했다. 그 중에서도 ‘산둥 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가 바로 중원 땅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5천년 역사 운운하고 있으니 그 역사무지가 하늘에 닿아있다. 이로 인해 우리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인사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지난 100여년 일본의 침략역사에 의한 괴기(怪奇)한 일들로 정신이 마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너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역사를 모른 채 잊고 사는 자가 많음에 놀란다.

 

한갑수 선생 얘기가 나온 김에 필자가 한갑수 선생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 한글은 세계 어떤 말도 다 표기할 수 있는 우수한 글자다. 오래 전 한글 학자 한갑수(韓甲洙, 1913―2004) 씨의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내가 월간 [基督敎思想]지 초대 편집장으로 일을 시작할 때였으니까 1955년경으로 기억된다. 기독교서회 총무 김춘배 목사님이 한갑수 선생을 초청하여 서회 회의실에서 편집부와 월간 잡지부(새벗―새가정―基督敎思想) 집필자들과 직원들을 위하여 문화와 언어에 관한 강연을 한 일이 있다. 그 때만 해도 해방 된지 겨우 10년 미만이었으므로 외래어 표기법은 일본 발음을 따라 하는 게 많았다. 그 때 들은 이야기다.

 

*194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언어학회 회의에서, 가장 좋은 글자가 무엇이냐는 문제를 두고 토의한 일이 있다. 영국인은 영어 문자가 첫째요 한글이 둘째라 하고, 독일인은 독일 문자가 첫째요 한글이 둘째라 하고, 프랑스인은 프랑스인 대로 가장 우수한 문자는 프랑스 문자이고 둘째가 한글이라고 하고, 러시아인은 러시아 문자가 첫째요 한글이 둘째라고 하고, 헬라인은 헬라 문자가 첫째요 한글이 둘째라고 했다는 것이다. 수학을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이 결론은 한글이 세계 최고의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좋은 글을 두고 일본식 발음으로 된 외래어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12) 천문학의 시조도 우리 한민족이다


우리는 고대부터 하늘의 자손인 천민(天民=천손)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천체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그것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마련한 고인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고인돌에 북두칠성과 많은 별을 새겨 놓은 것은 태고 때 한인(桓因)시대부터 천문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천문학도 우리 민족에 의해서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전 서울 대 박창범교수는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서구의 천문관측 역사가 기껏해야 300년인데 비해 우리 동이족 배달민족은 BC 5000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밝히고, 북두칠성을 비롯해 카시오페이아 자리 등을 새긴 고인돌이 북한 지역에만도 약 200여개가 남아 있다.” (1997.9.29 한국일보) 고 했다. 그는 계속해 말했다.

 

“우리 천문학의 연구가 가장 오래 됐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대동강유역의 고인돌에서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가 발견되고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 10호 고인돌 덮개돌 겉면에는 11개 별자리 80여개의 별을 나타내고 있다. 별의 밝기에 따라 구멍의 크기도 각각 달리했고 중심부에는 북극성이 그려져 있다. 이 고인돌의 연대를 측정해보니 무려 BC 2800~220년으로 지금부터 약 5000년 가까이에 이른다. 지금까지 세계천문학계에서 고대천문학의 원형(별자리의 원형)이라고 한 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 지역 토지경계비의 천문기록 1200보다 1800년이나 앞선다. 천문학의 시작도 우리 한민족에 의한 것임이 입증된다”고 하겠다.


(13)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세계 첫 천문도


지나와 일본은 이를 숨겼다. 지나의 경우는 한무제(漢武帝)시대 지나인이 서방의 세계와 접촉한 것이 태초원년(太初元年)에 행해진 역법개정(曆法改正) 운운하며, 이 무제의 역법이 지나역법의 기본이 됐다고 변조했다. 일본도 명치유신 이전의 역(歷) 즉, 구태음력(舊太陰曆)의 기본이 됐다고 요시가와(吉川幸次郞경도대교수)는 이와나미신서(岩波新書 P.214~5)에 버젓이 쓰고 있다. 참으로 못 말리는 행태다.

 

대만의 양심적 역사학자인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책력을 만든 이는 희화자(羲和子)이다. 지나의 책력 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됐다. 그는 은나라 출신으로 동이의 조상이다. 동이가 책력을 만든 사실은 진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中國史前史話에서).

 

따라서 세계천문학계에서도 가장 오래 된 별자리 지도로 인정하고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우리가 천문학의 선구자임을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고구려의 석각천문도(石刻天文圖) 12개의 분야로 하늘을 나누고 그 안에 크기와 밝기에 따라 1460여개의 별을 새겨놓고 293개의 별자리를 그린 웅장한 천문도는 단지 하늘의 별자리를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황도(黃道=해가 1년 동안 지나가는 길)의 경사가 24°(도)라는 사실과 춘분점과 추분점의 위치, 계절의 변화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 고구려인의 천문학 수준이 최고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화폐 1만원권 지폐 뒷면에 있는 별자리 그림 일부가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다. 지나의 1247년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보다 900년이 앞서고 서양 천문학사보다 10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다.

조선조에 와서 태조4년(1395)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중앙부와 달리 고구려 시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바깥에 새겨진 별들을 보면 고구려 초기 하늘의 별들로 작성됐고, 이 같은 고구려 천문도를 기본으로 태조 때의 천문도는 수정된 하늘의 별자리였음이 고등과학원(KIAS) 박창범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14) BC 2099년 고조선 5대 단군, 인류 최초 지동설 이론


고조선 5대 단군인 구을(丘乙) 황제(BC 2099) 때 황보덕이란 재상이 50여 년간 천체를 관측하고 구을 단군에게 보고한 기록이 《한단고기》에 나온다. 북극성과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으로 수성 ․ 금성 ․ 지구 ․ 화성 등 10개의 행성 이름은 물론 인류최초의 ‘지동설’을 밝히고 있다. 이는 서양보다 37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서양은 16세기에 와서야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지구는 태양주위를 도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발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지동설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은 잘못된 우주관이기 때문이다.

 

서양은 조선 선조(1552) 이전까지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중심에서 군림하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과 해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는 잘못된 우주관을 갖고 있었다. 사물의 원리를 발견하는데 귀납법으로 도출시키는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4대 성인의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BC, 469~399)도 해와 달은 행성이 아닌 그들의 신으로 절대 숭배대상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서양의 천문지식은 이처럼 우리에 미치지 못했다.


《단군세기》에는 10대 단군인 노을(魯乙)황제 35년(을축년, BC 1916)에 지금의 천문대인 감성대(監星臺)를 두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첨성대(瞻星臺)도 이 감성대에 근원을 두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지금 첨성대 별 관측소는 남아 있어 이것이 세계 최초라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다.


(15) 조선시대 일식 정확히 예측, 1년도 현재와 1초 오차


《단군세기》에는 고조선 제13세 흘달(屹達) 단군(BC 1782~ 1720) 때 수성 ․ 금성 ․화성 ․ 목성 ․ 토성의 집결을 말하는 〈오성취루(五星聚婁)〉현상(무진 50년) 기록이 정확히 나와 있다. BC 1733년 7월 13일 그것이 사실이었음이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에 의해서 밝혀졌다.

 

또한 박석재 천문위원, 이종호 과학저술가 등 많은 학자들의 연구로 고대부터 우리 조상의 천문학 발달이 어느 정도였나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삼국시대에 와서 극히 한정된 장소에서만 관측할 수 있다던 백제의 기록도 있다. 세계천문학계를 선도하는 박창범 교수는 잃어버린 우리 고대사를 되살리고 있는 《한단고기(桓檀古記)》의 일식기록을 현대 천문과학으로도 틀림이 없는 옳은 기록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에서 백제의 일식 관측기록이 당시 백제 영역인 현재 지나 땅 발해만 유역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곳은 그 옛날 우리 백제의 중심지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돼 6시55분 53초에 끝났다고 정확히 예측한 것이 맞았다. 1년을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음으로서 지금의 48분 46초에 비해 1초의 오차밖에 없다. 이를 오영수 선생은 이순지(李純之, 1406~1465)가 밝혔다고 전했다. 반면 우리보다 천문지식이 뒤진 지나의 [현현기경(玄玄棋經), 1349] 같은 지나의 고전에는 1년이 360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일본 [世界天文學史]에는 당시 인류 역사상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한 책력으로서 세종 때 이순지의 《칠정력(七政曆)》을 꼽고 책력서로는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들고 있다.

 

제4부 /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1. 자랑스런 한민족(韓民族)

 

1)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재앙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지방에서 발생한 진도 9.0의 지진과 해일은, 일본 역사상 가장 처참한 재난이었다. TV 뉴스로 이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에스겔 선지의 예언의 말씀이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를 주민이 없는 성읍과 같이 황폐한 성읍이 되게 하고, 깊은 바다가 네 위에 오르게 하며, 큰물이 너를 덮게 할 때에,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겔 26:19―20)

 

그런데 며칠 후 미얀마에도 지진이 일어나고, 리비아와 시리아에 내전이 일어나고, 예멘과 여타 중동국가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예언 말씀이 또 떠올랐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 24:7―8).

 

분명히 말세에 다다랐구나! 일본 원전은 체르노빌 사태보다 더 심각하여 아시아 전체가 위협을 당한다는데…. 그러자 일본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쇼리끼 마쓰다로(正力松太郎, 1885–1969)란 자의 얘기가 떠올랐다. 쇼리끼 마쓰다로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원흉이다.

 

“후데이센진(不逞鮮人)들이 우물물에 독을 타고 돌아다니며 방화를 하고 있다.”

 

이런 거짓말을 유포하여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무참하게 죽창에 찔려 죽고, 식칼로 난자질되어 시궁창에 버려졌다. 쇼리끼는 1944년 경시청 강연에서 그 말이 거짓이었음을 아래와 같이 자백했다.

 

“대진재 때「조선인 폭동」이란 뜬소문을 퍼뜨린 거짓정보는 실패였다.’ (石井光次郎著 [回想八十八年] )

 

내 뇌리에는 88년 전 관동대진재와 2011년 동북대지진 사건이 겹쳐져 오늘 일본에서 고생하는 일본인 이재민들이 88년 전 관동대진재 때 죽어가던 동포들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유명 소설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동경도(東京都) 지사를 세 차례 연임하고 있는 이시하라 신따로(石原慎太郎, 1932― )는 14일 이번 동일본 대지진은 하늘이 내린 「천벌」이라고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

 

"일본인의 아이덴티티(Identity)는 아욕(我欲)이다. 이번 쓰나미를 잘 이용해 아욕을 단번에 씻어 낼 필요가 있다. 역시 (이번 지진과 쓰나미는) 천벌(天罰)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아이덴티티는 자유, 프랑스는 자유와 박애와 평등, 일본에는 그런 게 없다. 사욕뿐이다. 물욕(物慾), 금전욕…. 이런 것을 이번 쓰나미로 다 날려버리자. 덕지덕지한 일보인의 심성(心性)의 때를 다 씻어버리자." 한편 “피해자들은 불쌍하다”고 말했다.

 

그렇다! 대지진과 쓰나미라는 천벌은 일본의 죄악을 씻어 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씻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은 일본인들의 개인적 아욕(我欲)만이 아니다. 일본의 국가적인 야욕(野欲)을 씻는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현 아베 총리는 한술 더 뜨고 있으니, 더 큰 재앙을 불러 올까 두렵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을 향해 지속적으로 자행한 일본의 국가적 죄악은 엄청나다. 징병과 징용과 보국단으로 남자를 끌어내 총알받이와 군수공장 노예로 부려먹고, 꽃 같은 조선의 딸들을 정신대란 노리개로 끌어다 짓밟았고, 부상자들은 치료하지 않고 생체실험(生體實驗)용으로 썼으니, 일본인의 손에는 조선인의 피가 잔뜩 묻어 있고, 그들의 손에 학살당한 무수한 조선인들의 핏소리가 우리나라와 일본 열도에서 하늘을 향해 호소하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이 '천벌'이라는 이시하라 동경지사의 발언은 결코 망언이 아니다. 일본인들 중에도 그 말에 자중(自重)하자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세계가 경악한 이번 동일본 대지진을 일본인들은 천벌로 생각하고 회개의 기회로 삼아 그들의 국가적 죄악을 씻어 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에스겔서의 저주가 이어질 것이다.

 

“네 재물은 털리고, 상품들은 빼앗기겠고, 성벽은 헐리고 호화로운 저택들은 허물어져, 돌과 재목, 흙부스러기까지도 바다에 쓸려들어 갈 것이다.” (에스겔 26:12)

 

2)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의 진상

 

1909년 고종의 옥새를 위조하여 국권을 찬탈(簒奪)한 왜놈들은 1919년 3 ․ 1운동 이후 내선일체(內鮮一體)란 미명하에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며, 말도 일본어만 쓰게 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하여 완전히 우리민족을 말살하여 없애려 하였다. 역사도 변조하여 고조선 역사는 신화로 돌리고, 미개한 종족이라 지네들이 보호․개조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그들에게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분경 일본 관동지방에 일어난 대지진은 역시 <천벌>이었다. 순식간에 시즈오까, 야마나시로 파급되어 도시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고 해안에는 해일이 몰아쳐 수많은 건물이 쓰러지고, 터진 가스탱크는 하늘에서 불타고, 거리에서는 주유소가 터져 바다로 기름이 흘러가 바다에서 타는 바람에 하늘 땅 바다가 온통 불길에 휩싸였다. 땅이 갈라지고 철도가 끊겨 수십만의 사람이 부상당했고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내가 마포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던 1967년, 담임 목사님이신 최석주(崔錫柱, 1900―1989)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목사님은 가우처 목사가 설립한 아오야마가꾸잉(靑山學院) 신학부에서 공부하실 때인 1923년, 대지진 때 동경에서 겪으신 지진의 참상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경 전체가 불 도가니였어. 사방 땅이 갈라지고 철로가 끊어지고 비틀리고, 가스가 터져 집집마다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주유소 기름 탱크가 터져 기름이 타면서 바다로 흘러가 바다 위에서도 계속 활활 타고…. 하늘 ․ 땅 ․ 바다가 온통 불바다였지. 지옥이 따로 없었지. 동경 전체가 지옥이었어.”

 

일본 정부는 민심이 흉흉해지자, 옛날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 씌웠 듯이 ‘후데이센징’(不逞鮮人)이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우물에다 독을 타고 있으니 조선인들을 잡아 죽이라고 하였다.

 

일본인 작가 쓰보이 한지(壺井繁次)의 단편소설 중에 [十五円五十銭]이라는 글이 있는데, 거기 보면 조선인을 가려내기 위해 [十五円五十銭]이라고 적은 종이를 보이며 읽어보라고 하였단다. 바른 발음은 “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 쥬우고엥 고짓셍”이 맞다. 그러나 일본어 응(ん) 자를 ‘니은’ 만으로 배운 조선인들은 ‘주코엔 코짓센’이라고 발음하고 찔려 죽거나 맞아 죽었단다. 일본인 중에도 발음이 어눌한 자는 희생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쓰보이는 공산주의자로서 북한과 친하여 “조선 동무들에게 호감을 줄 목적으로” 이 때 일을「十五円五十銭」이라는 제목의 서사시를 써서 북한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그 얘기는 Yahoo Taiwan에도 실려 있는데 우리말에 없는 탁음(濁音) '고짓셍(ごじっせん)'에서 GO를 KO로 발음한 조선인들이 불쌍하게도 많이 죽어 갔다고 아래 주와 같이 쓰고 있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주전 1150년,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발음 테스트로 죽고 사는 참사가 일어났다. 사사 입다가 이끄는 길르앗 사람과 에브라임 사람이 싸울 때 얘기다.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쉽볼렛(시냇물)」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씹볼렛(무거운 짐)」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4만 2천 명이었더라.”(삿 12:5―6)

 

동경 일대는 전신 ․ 전화 ․ 철도를 비롯하여 전기 ․ 가스 ․ 수도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문화시설이 파괴되었으며, 학교나 병원도 대부분 쓰러져 가히 생지옥이었다. 당시 동양 제일이라는 일본 수도 도꾜는 화재로 가옥의 3분의 2가 무너지고 불에 타 18시간 만에 초토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의 군부와 경찰은 쇼리끼 마쓰다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각처에서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고 부녀자를 겁탈하였으며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치안이 무너진 상태에서 폭동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돌리게 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일본 경시청은 정부에 지진 현장에 출병을 요청하고 계엄령을 준비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내무대신 미즈노 젠따로와 아끼이께 경시총감은 늦은 밤 도꾜 시내를 돌아보고 다음날 도꾜와 가나가와현 경찰서 및 경비대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이 헛소문은 고또 내무성 정보국장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장관에게 타전했다.

 

"대진재를 이용하여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날뛰고 있다. 도꾜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린 자가 있어 이미 일부 계엄령을 실시하고 있으니 각지에서도 충분히 시찰을 하고, 조선인들의 행동을 엄밀히 단속하기를 바란다."

 

'조선인들의 폭동'이라는 유언비어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2일 오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5일에는 계엄군사령부에서 '조선 문제에 관한 협정'이 극비리에 결정되어

 

"조선인의 폭행 혐의를 적극 수사하여 이를 사실화하는데 노력할 것."

 

이렇게 지시하여 '조선인들의 폭동'을 사실로 날조하는데 광분하였다. 일본 경찰, 군부, 우익세력이 총동원되고 이른바 자경단을 조직하고 "조선인은 모조리 죽여라!" 외치며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일본의 신문들은 유언비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여 학살을 부채질하였다.

 

3) “죠센징, 보이는 대로 죽여라!”

 

가족과 집을 잃고 눈이 뒤집힌 왜놈들은 조선인을 사냥하는 미친개로 돌변하여 무려 7,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도꾜와 가나가와에서는 주로 군대와 경찰이, 지바와 사이다마에서는 자경단이 학살을 자행했다. 군경은 총검을 사용하였지만 자경단은 죽창과 곤봉, 식칼, ‘사시미 칼’을 들고 나와 경찰서나 관공서로 피신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까지 관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군마현의 후지오까 경찰서는 9월 3일 자갈회사 사장 주선으로 조선인 노동자 14명을 유치장에 수감하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경단 대표 13명과 군중 2백여 명이 경찰서로 몰려와 유치장을 부수고 죽창과 식칼로 14명 전원을 살해하였다. 지붕으로 도망가는 사람은 엽총으로 쏘아 사살하였다. 사이다마현 구마가야 경찰서에서는 9월 4일 소방대원 재향군인의 호위로 조선인들을 후까야 방면으로 보내려고 하였다. 후송 도중 후까야쬬 대학 부근에서 갑자기 자경단원들의 습격을 받고 현장에서 10여명이 살해되었다. 이들은 소방용 갈고리와 죽창, 곤봉 등의 흉기로 닥치는 대로 찍고 찌르며 잔인하게 조선인들을 죽였다. 이 일대에선 모두 43명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다. 9월 4일 아침, 자경단에 붙잡힌 조선인 노동자 2백여 명 중 절반 정도는 자동차로 안전지대로 호송되고 남은 노동자들은 이송 도중 흉기를 든 일본인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가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한 사람이 간신히 도망치고 86명은 모두 살해되었다.

 

9월 4일 혼죠경찰서에서 21명의 조선인을 경관 7명이 화물자동차에 태워 호송하고 있었는데, 촌민들이 흉기를 들고 쫓아오므로 다시 파출소 앞까지 되돌아왔다. 이때 경찰서장은 후지오까서에 전화를 걸어 조선인 인계교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촌민들이 알아듣도록 큰소리로 말했다. 이때 혼죠마찌 자경단 3백여 명이 촌민들과 합세하여 35명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9월 5일 새벽 오사도군 요리이미찌 경찰서에 유치 중이던 울산 출신 엿장수 김창(金艙) 등 14명은 이웃 마을 용사촌 자경단 30여명에게 죽창과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이들은 함께 유치중인 인들에게도 상처를 입혔지만 유독 조선인들만 현관으로 끌어내어 찔러 죽였다.

 

호꾸소 철도회사는 조선 노동자 5백여 명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57명은 역전 구일시에 합숙시키고 있었다. 4일 아침 이들 57명을 경찰서에서 보호하기로 하고 소방대 인솔 아래 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군중들이 나타나 여러 명을 죽였다. 홍전촌의 자등원에 사는 조선 노동자 13명이 나라시노에 수용되기 위하여 자경단을 따라 이찌가와 분서를 지나 중산재 북쪽에 이르렀을 때 부근의 경계를 맡고 있던 촌민들에게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뒤에 온 3명은 신원보증서도 갖고 있었는데 이들까지도 무차별 살해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5일 저녁부터 6일 오전까지 불태워져 매장되었다.

다음은 구정호에서 일하던 나환산이란 사람의 목격담이다.

 

"나는 86명의 조선 사람을 총과 칼로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9월 2일 밤부터 3일 오전까지 구정호 경찰서 연무장에 수용된 조선인은 3백여 명이었는데, 그날 오후 1시경 기병 1개 중대가 도착, 경찰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다무라란 자가 조선인 3명을 불러내 총살하기 시작했다. 다무라는 총성을 듣고 일본인들이 놀랄지 모르니 칼로 죽이라고 명령,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이때 임산부도 한 명이 있었는데, 그 부인의 배를 가를 때 뱃속에서 아기가 나왔는데, 군인들은 우는 아기까지 칼로 찔러 죽였다. 시체들은 다음날 새벽 화물자동차에 싣고 어디론가 운반해 갔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도꾜에서 752명, 가나가와현에서 1052명, 사이다마현에서 239명, 지바현에서 293명 등 일본 각지에서 6,661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피살자의 대부분은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다.

 

일본 정부는 군대와 경찰 등 관헌의 학살은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에 돌리면서 일부 자경단원을 재판에 회부하였지만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하고 말았다. 일본 정부에서는 당시 외국인이 한국인 학살 장면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외국인을 경찰서에 집합시켜 감시하고 외출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 총을 쏘고 싸움을 하면서

"이 총성은 조선인들의 총성이며 이 싸움은 조선인들이 습격하는 소리다."

 

이렇게 기만하는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조선인이 폭행하거나 습격하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조선총독은 동 6일 각 신문에

"조사해본 결과 관동지방 조선인은 노동자 3천명, 학생 3천명, 합계 6천 명 중 살해당한 자는 2명뿐이다."

라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 중 5분의 1이 관동지방에 있었으니 그 수가 3만 이상에 달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었다. 다수의 인명을 살육하면서 2명뿐이라고 발표한 것은 실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궤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일본인의 만행과 죄악을 지금도 잊지 않고 계시다!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었듯(창 4:10), 억울하게 살육을 당한 조선인들의 핏소리가 일본 열도에서 하늘에 오늘도 호소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국가적 죄악을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 재일조선인들의 핏소리가 일본 땅에서 그치고 "일본열도침몰"이라는 천벌을 면할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쌓아 올린 죄악이 부족해서 독도를 강탈하려고 하는가. 대체 이 악독한 나라는 어찌 해야 침략근성이 뿌리가 뽑힐 것인가. 답은 천벌(天罰)에 있다! 반성과 회개를 모르는 일본은 천벌만이 답이 될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보다 더 강한 후지산 폭발이나 강한 지진과 높은 해일이 열도를 뒤흔들어 국력이 쇠퇴 일로로 들어가야만 이웃 나라를 침탈하려는 그들의 야욕이 제어될 것인가!

 

4) 이어령 교수의 자랑스런 대한민국

 

(1) 이어령 교수와 나

 

벌써 반백년이 지난 옛날이야기다. 나는 이어령 교수에게 큰 빚을 진 일이 있다. 저녁을 대접하려고 찾아간 곳이 고급 요정인 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당황했던지…. 부끄러운 과거지만 여기서 털어 놓는다.

대한기독교계명협회 작가 겸 편집인(Writer& Editor) 시절, 집필자 훈련을 하기 위해 기독교서회와 기독교교육협회 그리고 우리 계명협회 공동주최로 1964년 10월 22일부터 온양에서 2박3일간 집필자강습회를 열었다. 강사는 이어령과 박창해, 그리고 조병화 시인이었다.

강습회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어느 날, 나는 이어령에게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불러내었다. 이어령의 본적은 충남 아산이지만 용인군 이동면 사람이고 나는 바로 옆 남사면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촌형 모리야마 돈네이(森山敦寧) 선생은 내 국민학교 때 담임선생이었기 때문에, 둘은 할 얘기가 많았고, 또 같은 문단에서 글을 쓰고 편집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금세 친근해졌다.

 

마침 온양 강습회에 같이 갔던 모 신학대학 교수도 날 찾아 왔다. 나는 어디로 가서 대접을 할까 하다가 얼마 전에 받아 둔 명함을 꺼내 보았다. 그 명함의 주인은 내가 자주 나가던 다방의 아가씨였다. 나는 매일 아침 그 다방에 나갈 적마다 전도를 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만난 그 아가씨가 다방을 그만두고 대형 음식점에서 일을 한다며, 점심때 들러 달라며 명함을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른 저녁에 그리로 갔다.

 

그런데 그 집은 일반 식당이 아니라 고급 요정으로서 점심때만 한정식을 파는 집이었다. 내가 다른 데로 가자, 했지만 이어령은 싸나이가 이왕 왔으니 들어가자 하여 들어갔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가씨들이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린 음식을 들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런 데가 생전 처음은 나는 완전히 얼어 버렸다. 그러나 호남아로 재치꾼인 이어령은 자기가 식대를 낼 테니 걱정 말라며 즐겁게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계산서가 나왔는데 세 사람 돈 다 털어도 모자랐다.

지금 같으면 카드로 긁을 수도 있지만 50여 년 전 일이다. 하는 수 없이 전화로 이어령이 몸담고 있는 출판사 사장의 보증을 받아 다음날 내기로 하고 나왔으니, 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나는 너무 미안하여 그 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은 남달랐다. 그의 글은 빼놓지 않고 읽고, 그의 책도 거의 다 샀다. 특히 그의 딸이 병들어 죽어가며 아빠에게 자기 위해 기도해 달라 했을 때 딸 바보 이어령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뉴스를 듣고 나도 기뻐하며 그를 위해 기도도 했다.

 

그는 생각하는 게 출중했다. 창의성이 기발하여 『縮指向の日本人』이란 그의 책은 일본인들을 경악하게 한 밀리언셀러였다. 일본인들은 그를 ‘稀代の 天才’라며 신문 잡지에 연재를 시키고 책을 내주기도 했다.

 

아래에 올린 글은 2008년 7월 17일부터 9월 1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뒤뜰에서 진행된 〈60일 연속 국민대강좌〉를 책으로 만든 『역사, 미래와 만나다』의 첫번째 강연자 이어령 교수의 강연요지다.

 

(2)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DNA

 

이어령 교수는「한국은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특이한 DNA가 있는 나라」라며 쓰레기 매립장에서 생태공원으로 바뀐 난지도(蘭芝島) 이야기를 한 후, 물건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점점 세계가 환경문제로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대한민국만큼 자연을 사랑하는 나라는 없었다는 것이다.

 

━ 여러분, 우리나라 짚신 아시죠?

우리 조상들은 짚신을 만들 때 절대 튼튼하게 만들지 않았어요. 왜냐구요? 혹시 밟아도 벌레가 죽지 않게 만드는 것이지요. 세상에 그 만큼 자연을 사랑한 민족이 있었을까요?

[고수레]란 것도 있지요.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세 끼 밥도 챙겨 먹기 어렵던 시절에도 조선 사람들은 벌레랑 같이 먹고 살자고 음식을 조금씩 던집니다.

[까치밥]은 어떻습니까? 시골에서 아이들이 감을 따면 우리네 할머니들은 말합니다.

“까치도 먹고 살아야제. 하나 내비두야 된다이.”

우리는 그런 민족입니다.

 

어디를 파 봐도 젊은이들의 피가 스미어 있는 나라. 하지만 지금은 그 위에 젊은이들의 웃음과 노래가 있는 나라.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기 전, 세계는 한국을 일본의 속국이었던 나라, 그 전에는 차이나의 속국쯤으로 생각하던 나라였다. 하지만 어땠습니까?

 

외국 사람들은 한국의 올림픽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독일의 조직력, 일본의 단결력, 할리우드의 화려함, 러시아의 집단력이 모두 한데 모여져 있었다고.”

그리고 우리가 잘 몰랐던 올림픽 비화도 슬며시 말해 주었습니다.

 

서울올림픽의 개회식은 한국민과 하나님의 합작품이었다고.

올림픽 하루 전날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개회식의 프로그램은 3분의 2가 비가 오면 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요. 위원장도, 올림픽을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도 마음이 아팠답니다. 비가 오면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직 가난하기에 비가 내리면 비를 대비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결국 그 날은 보란 듯이 햇볕이 쨍쨍거리며 공중에 한국의 상징을 그릴 수 있었지요.

 

(3) 88올림픽 때 전국 소매치기들의 단합대회

 

그리고 유명한 소매치기 이야기를 꺼냈다.

직전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올림픽을 할 때는 전국의 소매치기와 홈리스(homeless, 노숙자)들이 모여들어 물 호스를 대고 쫓아내느라 난리를 쳤는데 한국에는 정반대의 일이 있었지요. 1988년, 인천에서 소매치기들이 전부 모인다는 연락을 듣고 경찰서에는 비상이 났답니다.

“아, 얘네들이 서울에서 모이면 잡히니까 인천에서 모여서 작전을 짜는구나.”

그래서 그 정보를 듣고 경찰이 몰래 잠입했더니 뜻밖의 소리가 나왔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소매치기지만 대한민국이 겨우 여기까지 와서 올림픽을 하게 됐는데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꺼다. 이번에 외국인 관광객의 주머니를 터는 녀석은 영원히 소매치기 업계에서 매장시키자.”

 

예전 명동에는 유명한 걸인 한 분이 있었어요. 속된 말을 쓰자면 앉은뱅이였지요. 명동에서 그 걸인을 못 만나면 명동을 간 게 아니라고 할 정도로, 예술가나 문인들 사이에선 유명했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지나칠 때는 한두 푼을 보태 드리곤 했지요.

 

어느 날, 4·19 때문에 의연금을 모으고 있을 때에 저 멀리서 그 분이 또 돈을 달라고 열심히 이곳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걸인이라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구걸하러 오다니 역시 걸인은 걸인이구나 하며 실망하여 돈을 주려던 찰나, 그 걸인이 의연금 통 속에 모아온 돈을 집어넣었습니다. 평생 구걸만 하던 사람에게 그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통속에 돈을 넣게 했나….

나는 그 때 생각했습니다. 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절대로 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저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버티고 있다. 잘난 사람, 지식인들이 아니라 바로 저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진정으로 버티고 있다.

 

저는 대한민국을 마냥 자랑하기 위해서도 자위하기 위해서도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역사인 폭력과 무력으로 점철된 욕망의 시대도 지났고 이성의 시대, 합리주의 시대도 이제 지나가려 하며 마지막 시대인 자기실현의 시대, 남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마저 걸고 노력하는 이 시대야 말로 대한민국의 모든 단점이 장점이 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4) 쓰레기와 시래기

 

마지막으로 단점을 장점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한국인의 지혜를 말씀 드리며 이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한국어는 모음 하나만 바꾸면 부정이 긍정이 되지요. 씨레기(표준어는 시래기) 국이 그렇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비틀어 말라빠진 채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그냥 버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한국은 그 [쓰]레기를 [씨]레기로 만듭니다. 부정을 긍정으로 바꿔 그 어떤 음식보다 비타민이 풍부한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누룽지도 마찬가지지요. 밥이 타버렸다는 그 '부정'을 누룽지라는 '긍정'의 문화로 만들어 냅니다.

 

6·25 때 미군이 들어왔을 때도. 무질서한 한국인을 보며 미군은 경멸을 던졌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그 경멸은 존경으로 바뀌었지요. 자기들이 버린 맥주병을 재활용해서 집을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포탄 통을 녹여 사랑의 종을 만들어 교회로 가져가고 총알자국이 남은 헬멧을 두레박으로 바꿔 생명수를 길어 나릅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이요. 그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2. 성웅(聖雄) 이순신

 

지난 4월 순천향대학교에서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에서 이순신은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1위(43.8%)로 선정되었다. 이는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 속에 수많은 위인들이 있지만 1592년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조선을 왜국의 침략으로부터 구해낸 구국명장 이순신은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살아있음을 확인시켰다.

 

1) 세계 최고의 명장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세계 역사상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전과(戰果)를 기록했다. 칭기스칸은 20번의 전투에서 2번 패했고, 나폴레옹은 23번의 전투에서 4번을 패했으며, 프레드릭 대제(Frederick the Great)는 12번의 전투에서 3번을 패했고 한니발은 5번의 전투에서 한 번을 패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23번 싸워서 23번 모두 이겼다. 절대 열세의 병력과 함대 수로 7년간 23번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 단 한 번의 패함 없이 승리를 이끌어 냈으며 그러면서도 왜군의 공격을 받아 잃은 전선(戰船)은 단 두 척뿐이었다.

 

영국의 해군중장 발라드(G. A. Ballard, 1862―1948)는 그의 저서 〈바다가 일본 정치역사에 미친 영향〉에서 이순신의 삶과 공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영국인들에게 그 공적에 있어 넬슨과 필적할 만한 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항상 힘들다. 하지만 만약 그런 영예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적군 속에서 싸우다 죽은 이 동방의 해군사령관일 것이다. 그가 출전할 때마다 한반도 연안 바다 밑에는 용감한 병사들과 함께 묻힌 수백 척의 일본 전선의 잔해가 쌓여갔다. 그리고 진실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결코 실수 한 적이 없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다양한 각 상황에서 완전무결하게 일을 처리해 나감에 나무랄 데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전 업적을 요약하자면 과거의 역사 속에서 지침으로 삼을 만한 가르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다에서 싸워야 할 때 싸웠으며 언제나 승리를 이끌어냈고 그의 조국을 수호하는 최상의 희생으로 삶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