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

댓글 0

한국찬송가연구원

2019. 3. 26.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선교사列傳] 칼 귀츨라

 

보헤미안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Jan Hus)

 

1517년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102년 전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며 종교개혁의 횃불이 된 사람이 있다. 바로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1369-1415)이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타락한 교황이 아닌 그리스도의 신실한 백성들만이 교회의 몸을 이룰 수 있다. 범죄 한 교황은 결코 교회의 머리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지체도 될 수 없는 마귀의 무리, 머리일 뿐이다.' 얀 후스는 스스로 횃불이 되어 거대한 부패 권력에 저항하였다. 프라하 대학의 신학 교수, 총장을 역임한 당대의 망명가, 위대한 신학자이자 실천주의자인 얀 후스는 결국 로마 가톨릭에 의해 화형 당했다.

 

 

@프라하 - 얀 후스 동상 (구글 갈무리)

 

헤른후트 (Herrnhut), 얀 후스의 후예들

 

얀 후스를 따르던 후예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는 종교적 난민이 되었다. 그런 얀 후스의 후예들에게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고 정착에 힘쓴 인물이 바로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개혁자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1700-1760)로써, 그는 새롭게 정착하는 곳을 'Herrnhut(헤른후트)'라고 칭하였다. 현재까지 독일 작센 지방에는 헤른 후트의 후예들이 세운 교회, 헤른 후트 교회가 있다. 교회의 내부 모습은 모두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헤른 후트 교회 내에 강단은 없고 말씀 앞에 모두 평등한 존재로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모라비안 신앙을 계승해가고 있다. 헤른 후트 교회는 지금도 매일 성경을 성도들에게 제공하며 오직 성경 중심의 교회, 신앙의 경건함을 유지하게 위해 힘쓰고 있다.

 

 

얀 후스의 개혁주의와 친첸도르프의 경건주의의 연합은 이내 강력한 선교 의식으로 표출되었다. 아래 글은 헤른 후트의 슬로건이다. Von Herrnhut in die welt (From Herrnhut into the world) 즉 '헤른후트로부터 세계 속으로'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난민이 되었지만 경건한 거룩함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은 경건함과 더불어 세계 선교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리는 왜 얀 후스, 그리고 헤른 후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인가? 얀 후스, 친첸도르프 백작, 헤른 후투의 영향을 받아 187년 전 (2019년 기준) 미지의 조선 땅을 찾아온 선교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이다.

 

 

@칼 귀츨라프 (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구글 갈무리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동인도회사의 로드앰허스트(LordAmherst)에 몸을 싣고 서해안 일대, 백령도를 거쳐 7월 21일 군산만 창선도에 도착하였고, 7월 25일 충청도 홍주만의 고대도에 도착한다.

 

 

귀츨라프 선교사와 조선인들의 만남은 순탄하지 않았다. 1832년대 (순조 32년) 조선 조정은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여 금령, 탄압의 시기였고 조선인들이 외인들과 접촉만 하여도 처형시키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계하던 조선인들은 이내 시들해졌으며 로드앰허스트(LordAmherst)는 고대도에 정박하여 약 한 달간 섬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조선 선교 역사상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와 조선인들의 첫 만남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구글 갈무리 - 고대도 지도

 

귀츨라프는 약 한 달간 고대도에 머물렀던 기억을 이렇게 회상한다. '조선인들은 가난하고 비참하다. 토지와 옥토가 매우 비옥하지만 조선인들은 노동에 게으르다. 이유는 조선의 조정이 노동의 댓가를 조선인들과 향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귀츨라프는 조선인들의 빈곤한 삶이 조선인 노동의 댓가를 수탈하는 조선 조정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귀츨라프의 위와 같은 관점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에 있어 언어, 문화 정보에 매우 많은 공을 들였다. 그리고 정치 사회적인 입장에서도 성경적인 기준과 가치들을 중요한 선교적 목표로 여겼다. 귀츨라프는 조선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인 삶에 깊숙이 들어와있는 가난과 게으름의 문제를 파악하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조선이 은둔의 나라에 머무는 것이 아닌 수많은 나라와 교역하며 통상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귀츨라프는 탁월한 언어학습능력을 통해 약 한 달간의 시간 동안 조선어를 학습하게 되었고, 홍주 목사의 서생 양씨 청년을 통해 한글 자모표를 얻게 된다. 이 자모표로 인해 귀츨라프는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이후 유럽 사회에 조선과 조선의 언어를 소개하게 된다.

 

 

@구글갈무리 - 귀츨라프가 홍주 목사 서생 양씨 청년을 통해 얻게 된 한글 자모표, 귀츨라프는 선교사로서 한글을 유럽 사회에 소개한 첫 번째 인물이다.

 

귀츨라프의 선교사역은 특정 교회와 교단의 선교사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교학자, 역사학자들은 귀츨라프를 전문직을 겸비한 자비량 전문인 선교사, 혹은 Faith Mission 믿음 선교의 선구자로 정의한다. 귀츨라프는 마카오, 홍콩 대사관 등에서 일하며 '내 평생 중국을 복음화하자'라는 목표로 믿음의 선교를 이뤄간 믿음의 선교사이다.

 

 

초라한 선교사, 귀츨라프

 

사실 귀츨라프의 선교사역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크랜턴과 같은 선교사들 사역에 비해 매우 초라하다. 귀츨라프는 약 한 달간 조선 땅에 머물렀던 것이 그의 조선 선교 사역의 전부이다. 그의 시신은 조선을 사랑한 수많은 조선 선교사들처럼 현재 한국에 안장되어 있지 않고 홍콩에 안장되어 있다. 귀츨라프 일평생 목표는 '중국의 복음화'였으며, 이를 추모한 중국 사회는 중국 사회 곳곳에 귀츨라프 거리, 귀츨라프 등대, 귀츨라프 섬이라고 명명하며 그의 업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강제 통상을 목적으로 한 무역선을 타고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외세, 침략자였다. 귀츨라프는 조선 정부를 비판하며 유럽 사회에 조선의 미개함을 알린 조선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귀츨라프는 조선인들에게는 약을 주기도 하고, 감자 재배법을 통해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안내도 해주었지만 그와 함께 찾아온 유럽의 문명과 서구의 힘은 순수한 선교사로 그를 바라보지만은 못하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수많은 선교사들은 통상을 요구하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함선을 타고 조선을 찾아왔고, 유럽을 혼란 속에 몰아넣었던 아편선을 타고 선교지를 향하기도 하였다. 미개한 문명을 개화시킨다는 목적 아래 수천 년 동안 지나온 수많은 역사들이 하찮은 미개 문화로 천대를 받았던가? 그들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칼 귀츨라프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가 개신교 최초로 조선의 언어를 사용한 선교사, 조선의 언어를 유럽과 세계에 알린 선교사, 조선의 언어로 주기도문을 번역한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는 귀츨라프의 사역 중 그가 언어, 말씀의 씨앗을 조선 땅에 심어준 것이 가장 놀라운 선교의 열매라고 믿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시매 ...

 

그는 헤른 후터의 슬로건처럼 얀 후스의 개혁주의와 더불어 친첸도르프의 경건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베를린 신학교에 그는 무엇을 배웠을까? 화형대에 오르기까지 하나님 말씀의 숭고한 소명을 버리지 않았던 얀 후스의 개혁주의와 말씀에 사로잡힌 경건주의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뜨거운 말씀은 강력한 선교 의식으로 폭발하여 칼 귀츨라프와 같은 선교사들을 미지의 나라로 생명을 걸고 떠나게 한 것 아닐까?

 

 

칼 귀츨라프는 경건한 말씀을 따르는 개혁주의자였으며, 경건주의자였고 교단과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독립 선교사였다. 그리고 그의 선교 철학은 살아있는 신학, 행동하는 신학이었으며 복지와 의료 복음을 실천적으로 실행하는 탁월한 선교사였다. 그는 선교지의 문화를 학습하며 유럽의 문화를 심는 것이 아닌, 토착화 선교를 갈망하는 믿음의 선교사(Faith Mission)였다.

 

 

하나님께서 칼 귀츨라프를 조선 땅으로 인도하시며 그를 통해 조선의 언어로 주기도문을 번역한 것은 하나님께서 조선 땅에 베푸실 놀라운 은혜의 초석이 되었다. 칼 귀츨라프의 길을 따라가보면 우리가 익숙히 아는 선교사들을 만나게 된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 고려문에서 최초로 마가복음을 조선어로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 등 귀츨라프의 선교사역의 길에는 선교 역사의 기류를 바꿔놓았던 하나님의 사람들, 선교사들이 있다.

 

 

칼 귀츨라프의 선교 보고처럼 미개했던 조선이었지만 이후 조선의 선교역사, 하나님의 섭리를 돌아보자. 그가 번역한 주기도문의 짧은 한글 성경 기도문은 조선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된 것 아닐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씀처럼, 귀츨라프를 통해 187년 전 조선 땅에는 예수님의 기도문이 뿌려지게 된 것이다. 그 이후 하나님은 조선 땅에 어떠한 일들을 보여주셨는가?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예배, 기도, 선교 수많은 복음의 물결이 한반도를 덮지 않았던가? 이것을 부정할 신학자가 누구이며, 이것을 부정하는 역사학자가 누가 있겠는가? 단지 이것은 우연으로 이뤄진 역사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속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들로 인해 선포되고 열매 맺힌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조선 땅을 향한 그 첫 번째 발걸음, 온전한 밀알을 뿌려준 선교사가 바로 칼 귀츨라프 조선 개신교 선교 역사상 첫 번째 선교사인 것이다.

 

 

말씀의 부재(不在), 슬픈 우리의 자화상(自畵像)

 

요한계시록 3장 1절은 사데 교회를 이렇게 고발한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 3:1) 살았다고 하지만 너희는 죽은 자로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좀비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나 그 속은 죽어 썩은 좀비, 바로 우리의 슬픈 자화상 아닌가?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치부 아닌가? 하나님께 187년 전 잠들어 있던 조선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심으시고, 수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찾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조선어로 번역하여 준비해두셨고, 수많은 믿음의 열매들을 맺게 하셨다.

 

 

우리의 착각, 치명적인 착각이다. 187년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부어진 수많은 은혜의 열매들이 우리의 노력이라는 치명적인 착각이다. 우리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는 그 말씀의 부재로부터였다. 교회의 몰락은 말씀의 타협이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말씀을 심으셨다. 그리고 그 말씀의 능력으로 가늠할 수 없는 복음의 은혜가 이 땅에 쏟아부어졌다.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 폭발적인 부흥의 시작은 사람도 아니요, 건물도 아니요, 운동도 아니요, 이념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칼 귀츨라프가 약 한 달 동안 조선 고대도에 머물고 떠나며 그의 선교 일기에 기록한 문구로 칼럼을 마친다.

 

 

 

@ 참고문헌 : 초대한국교회사 (옥성득) 

@ 참고논문 : 한국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의 전문인 선교 (김수정) 

@ 공감과 댓글은 포스팅에 큰 힘이 됩니다 

@ 인스타그램 _ 말씀그리고사진 유찬호 목사 

@ 네이버블로그 _ biblestorys (말씀그리고사진) 

@ 모든 사진은 [말씀그리고사진] 유목민이 촬영한 개인촬영본으로 모든 일체 사용을 금합니다.

 에 글 25

확인 취소
닫기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는 개신교의 귀츨라프 (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 입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이미 임진왜란 때 천주교의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군 군종사제로 조선에 들어오긴 했습니다)

 

극동아시아와의 통상 및 시장 개척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 동인도회사의 군함 로드암허스트(Sir. S. Lord Amherst) 호에 중국어 통역관 겸 의사로 함께 승선하여 1832년 7월 18일 장산곶을 지나 남하하다가 짙은 안개로 백령도 중화포구에 정선하여 한 노인에게 책 몇 권과 단추를 전해 주고 그 섬에서 쫓겨났습니다.

1832년 7월 26일에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있는 고대도에 정박하였는데, 이곳에서 정식으로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한문 성경을 비롯한 26종의 책자와 망원경 등을 국왕에게 선물로 진상하도록 전달하고, 회답을 기다리며 20일 동안 성경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8월 7일 야간에 조선의 관리들 몰래 태안의 주사창리 앞바다까지 접근하여 책자 4권을 주고 배로 돌아왔는데 이 사실을 조선 관리들이 알고는 이후 주민 접촉을 금하고 조선인들에게도 귀츨라프 일행에게 무엇이든지 받는 자는 엄히 다스린다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더 이상의 전도활동 및 대민 접촉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는 최초의 카톨릭 선교사인 프랑스인 신부 모방(Pierre Maubant)의 내한(1836)보다 빠른 것이었습니다만, 조선을 목표로 한 항해가 아니라 일본을 목표로 한 항해 중 배가 좌초된 것이기에 성격이 조금 애매할 수 있습니다.

 

조선을 명확히 목표로 한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는 카톨릭의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입니다.

한국명으로는 나백다록(羅伯多祿). 나주 나씨에, 세례명인 베드로를 음차하여 백다록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삿갓에 상복 차림을 하고 1836년 1월 12일 조신철, 정하상 등의 인도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와서 조선어를 공부하며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촌을 방문하여 200여 명에게 영세를 주었고, 전국에 걸쳐 6,000명의 신도를 9,000명으로 증가시켰으며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을 뽑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학생으로 마카오의 신학교로 보내는 등 교세 확장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1839년 9월 6일 홍주 근처에서 대기 중인 포졸들에게 자수한 다음, 9월 21일 새남터에서 앵베르 주교·샤스탕 신부와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어 복자위에 올랐습니다.

 

개신교 선교사로써, 두 번째의 방문자이자

개신교로써는 처음으로 조선을 목표로 해서 방문한 선교사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Thomas, Robert Jermain :1840-1866) 입니다.

 

1866년 8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푸지부의 후원을 받아 통역사 자격으로 미국 국적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하여 조선을 방문하였습니다. 처음 조선의 군민들은 제너럴 셔먼 호를 우호적으로 대했습니다. 통역자 토머스 목사의 요청에 따라 쌀 1섬과 쇠고기 50근, 닭 25마리, 달걀 50개, 땔감 20다발을 주었고,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쌀 2섬과 쇠고기 50근, 돼지 1마리, 닭 20마리, 달걀 50개, 땔감 20다발을 추가로 제공습니다.

하지만 8월27일 평양의 한 포구에 정박한 셔먼호는 조선을 향해 강력하게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군인 이현익을 억류하고 총과 포를 쏘아 사상자를 내며, 급기야 31일 셔먼호 선원들은 지나가는 상선을 약탈하고 대포와 총을 마구 쏴 평양군민 7명이 죽고 5명이 다치는 등 강압적인 행동을 거듭했습니다.

9월2일에 양각도의 모래톱에 배가 좌초되었는데, 이 때 격분한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하여 제너럴 셔먼 호의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덧붙임

:OD 님, '흥선한테' 죽어요?

당신 식으로 높임법을 꼴리는대로 사용해서 말씀드립죠.

 

(카톨릭이 아니라) 개신교 선교사 중 최초의 '순교자' 께서는

위에 보듯이 제너럴 셔면호의 토마스 목사로, '노략질하다 뒈졌습니다'.


[선교사列傳] 칼 귀츨라프 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프로파일 유목민 2019. 2. 18. 21:39
URL 복사 이웃추가

Von Herrnhut in die welt,

From Herrnhut into the world

Herrnhut Church

보헤미안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Jan Hus)

1517년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102년 전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며 종교개혁의 횃불이 된 사람이 있다. 바로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1369-1415)이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타락한 교황이 아닌 그리스도의 신실한 백성들만이 교회의 몸을 이룰 수 있다. 범죄 한 교황은 결코 교회의 머리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지체도 될 수 없는 마귀의 무리, 머리일 뿐이다.' 얀 후스는 스스로 횃불이 되어 거대한 부패 권력에 저항하였다. 프라하 대학의 신학 교수, 총장을 역임한 당대의 망명가, 위대한 신학자이자 실천주의자인 얀 후스는 결국 로마 가톨릭에 의해 화형 당했다.

@프라하 - 얀 후스 동상 (구글 갈무리)

헤른후트 (Herrnhut), 얀 후스의 후예들

얀 후스를 따르던 후예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는 종교적 난민이 되었다. 그런 얀 후스의 후예들에게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고 정착에 힘쓴 인물이 바로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개혁자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1700-1760)로써, 그는 새롭게 정착하는 곳을 'Herrnhut(헤른후트)'라고 칭하였다. 현재까지 독일 작센 지방에는 헤른 후트의 후예들이 세운 교회, 헤른 후트 교회가 있다. 교회의 내부 모습은 모두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헤른 후트 교회 내에 강단은 없고 말씀 앞에 모두 평등한 존재로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모라비안 신앙을 계승해가고 있다. 헤른 후트 교회는 지금도 매일 성경을 성도들에게 제공하며 오직 성경 중심의 교회, 신앙의 경건함을 유지하게 위해 힘쓰고 있다.

얀 후스의 개혁주의와 친첸도르프의 경건주의의 연합은 이내 강력한 선교 의식으로 표출되었다. 아래 글은 헤른 후트의 슬로건이다. Von Herrnhut in die welt (From Herrnhut into the world) 즉 '헤른후트로부터 세계 속으로'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난민이 되었지만 경건한 거룩함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은 경건함과 더불어 세계 선교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리는 왜 얀 후스, 그리고 헤른 후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인가? 얀 후스, 친첸도르프 백작, 헤른 후투의 영향을 받아 187년 전 (2019년 기준) 미지의 조선 땅을 찾아온 선교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이다.

@칼 귀츨라프 (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구글 갈무리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동인도회사의 로드앰허스트(LordAmherst)에 몸을 싣고 서해안 일대, 백령도를 거쳐 7월 21일 군산만 창선도에 도착하였고, 7월 25일 충청도 홍주만의 고대도에 도착한다.

귀츨라프 선교사와 조선인들의 만남은 순탄하지 않았다. 1832년대 (순조 32년) 조선 조정은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여 금령, 탄압의 시기였고 조선인들이 외인들과 접촉만 하여도 처형시키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계하던 조선인들은 이내 시들해졌으며 로드앰허스트(LordAmherst)는 고대도에 정박하여 약 한 달간 섬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조선 선교 역사상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와 조선인들의 첫 만남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구글 갈무리 - 고대도 지도

귀츨라프는 약 한 달간 고대도에 머물렀던 기억을 이렇게 회상한다. '조선인들은 가난하고 비참하다. 토지와 옥토가 매우 비옥하지만 조선인들은 노동에 게으르다. 이유는 조선의 조정이 노동의 댓가를 조선인들과 향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귀츨라프는 조선인들의 빈곤한 삶이 조선인 노동의 댓가를 수탈하는 조선 조정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귀츨라프의 위와 같은 관점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에 있어 언어, 문화 정보에 매우 많은 공을 들였다. 그리고 정치 사회적인 입장에서도 성경적인 기준과 가치들을 중요한 선교적 목표로 여겼다. 귀츨라프는 조선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인 삶에 깊숙이 들어와있는 가난과 게으름의 문제를 파악하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조선이 은둔의 나라에 머무는 것이 아닌 수많은 나라와 교역하며 통상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귀츨라프는 탁월한 언어학습능력을 통해 약 한 달간의 시간 동안 조선어를 학습하게 되었고, 홍주 목사의 서생 양씨 청년을 통해 한글 자모표를 얻게 된다. 이 자모표로 인해 귀츨라프는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이후 유럽 사회에 조선과 조선의 언어를 소개하게 된다.

@구글갈무리 - 귀츨라프가 홍주 목사 서생 양씨 청년을 통해 얻게 된 한글 자모표, 귀츨라프는 선교사로서 한글을 유럽 사회에 소개한 첫 번째 인물이다.

귀츨라프의 선교사역은 특정 교회와 교단의 선교사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교학자, 역사학자들은 귀츨라프를 전문직을 겸비한 자비량 전문인 선교사, 혹은 Faith Mission 믿음 선교의 선구자로 정의한다. 귀츨라프는 마카오, 홍콩 대사관 등에서 일하며 '내 평생 중국을 복음화하자'라는 목표로 믿음의 선교를 이뤄간 믿음의 선교사이다.

초라한 선교사, 귀츨라프

사실 귀츨라프의 선교사역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크랜턴과 같은 선교사들 사역에 비해 매우 초라하다. 귀츨라프는 약 한 달간 조선 땅에 머물렀던 것이 그의 조선 선교 사역의 전부이다. 그의 시신은 조선을 사랑한 수많은 조선 선교사들처럼 현재 한국에 안장되어 있지 않고 홍콩에 안장되어 있다. 귀츨라프 일평생 목표는 '중국의 복음화'였으며, 이를 추모한 중국 사회는 중국 사회 곳곳에 귀츨라프 거리, 귀츨라프 등대, 귀츨라프 섬이라고 명명하며 그의 업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강제 통상을 목적으로 한 무역선을 타고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외세, 침략자였다. 귀츨라프는 조선 정부를 비판하며 유럽 사회에 조선의 미개함을 알린 조선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귀츨라프는 조선인들에게는 약을 주기도 하고, 감자 재배법을 통해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안내도 해주었지만 그와 함께 찾아온 유럽의 문명과 서구의 힘은 순수한 선교사로 그를 바라보지만은 못하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수많은 선교사들은 통상을 요구하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함선을 타고 조선을 찾아왔고, 유럽을 혼란 속에 몰아넣었던 아편선을 타고 선교지를 향하기도 하였다. 미개한 문명을 개화시킨다는 목적 아래 수천 년 동안 지나온 수많은 역사들이 하찮은 미개 문화로 천대를 받았던가? 그들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칼 귀츨라프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가 개신교 최초로 조선의 언어를 사용한 선교사, 조선의 언어를 유럽과 세계에 알린 선교사, 조선의 언어로 주기도문을 번역한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는 귀츨라프의 사역 중 그가 언어, 말씀의 씨앗을 조선 땅에 심어준 것이 가장 놀라운 선교의 열매라고 믿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시매 ...

그는 헤른 후터의 슬로건처럼 얀 후스의 개혁주의와 더불어 친첸도르프의 경건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베를린 신학교에 그는 무엇을 배웠을까? 화형대에 오르기까지 하나님 말씀의 숭고한 소명을 버리지 않았던 얀 후스의 개혁주의와 말씀에 사로잡힌 경건주의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뜨거운 말씀은 강력한 선교 의식으로 폭발하여 칼 귀츨라프와 같은 선교사들을 미지의 나라로 생명을 걸고 떠나게 한 것 아닐까?

칼 귀츨라프는 경건한 말씀을 따르는 개혁주의자였으며, 경건주의자였고 교단과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독립 선교사였다. 그리고 그의 선교 철학은 살아있는 신학, 행동하는 신학이었으며 복지와 의료 복음을 실천적으로 실행하는 탁월한 선교사였다. 그는 선교지의 문화를 학습하며 유럽의 문화를 심는 것이 아닌, 토착화 선교를 갈망하는 믿음의 선교사(Faith Mission)였다.

하나님께서 칼 귀츨라프를 조선 땅으로 인도하시며 그를 통해 조선의 언어로 주기도문을 번역한 것은 하나님께서 조선 땅에 베푸실 놀라운 은혜의 초석이 되었다. 칼 귀츨라프의 길을 따라가보면 우리가 익숙히 아는 선교사들을 만나게 된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 고려문에서 최초로 마가복음을 조선어로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 등 귀츨라프의 선교사역의 길에는 선교 역사의 기류를 바꿔놓았던 하나님의 사람들, 선교사들이 있다.

칼 귀츨라프의 선교 보고처럼 미개했던 조선이었지만 이후 조선의 선교역사, 하나님의 섭리를 돌아보자. 그가 번역한 주기도문의 짧은 한글 성경 기도문은 조선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된 것 아닐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씀처럼, 귀츨라프를 통해 187년 전 조선 땅에는 예수님의 기도문이 뿌려지게 된 것이다. 그 이후 하나님은 조선 땅에 어떠한 일들을 보여주셨는가?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예배, 기도, 선교 수많은 복음의 물결이 한반도를 덮지 않았던가? 이것을 부정할 신학자가 누구이며, 이것을 부정하는 역사학자가 누가 있겠는가? 단지 이것은 우연으로 이뤄진 역사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속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들로 인해 선포되고 열매 맺힌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조선 땅을 향한 그 첫 번째 발걸음, 온전한 밀알을 뿌려준 선교사가 바로 칼 귀츨라프 조선 개신교 선교 역사상 첫 번째 선교사인 것이다.

말씀의 부재(不在), 슬픈 우리의 자화상(自畵像)

요한계시록 3장 1절은 사데 교회를 이렇게 고발한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 3:1) 살았다고 하지만 너희는 죽은 자로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좀비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나 그 속은 죽어 썩은 좀비, 바로 우리의 슬픈 자화상 아닌가?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치부 아닌가? 하나님께 187년 전 잠들어 있던 조선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심으시고, 수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찾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조선어로 번역하여 준비해두셨고, 수많은 믿음의 열매들을 맺게 하셨다.

우리의 착각, 치명적인 착각이다. 187년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부어진 수많은 은혜의 열매들이 우리의 노력이라는 치명적인 착각이다. 우리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는 그 말씀의 부재로부터였다. 교회의 몰락은 말씀의 타협이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말씀을 심으셨다. 그리고 그 말씀의 능력으로 가늠할 수 없는 복음의 은혜가 이 땅에 쏟아부어졌다.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 폭발적인 부흥의 시작은 사람도 아니요, 건물도 아니요, 운동도 아니요, 이념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칼 귀츨라프가 약 한 달 동안 조선 고대도에 머물고 떠나며 그의 선교 일기에 기록한 문구로 칼럼을 마친다.

나의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조선 최초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

@ 참고문헌 : 초대한국교회사 (옥성득)

@ 참고논문 :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