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최용신과 관련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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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4.


최용신과 관련한 논란

 - 남겨진 과제 7 장. 최용신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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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최용신의 사후 그의 일기장이나 강습소에 관련된 기록들, 유품과 자료등은 얼마간 보관되다가 모두 사라졌다. 주인 없는 유품들이 흩어져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혹시 일기장이나 편지등 일제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언급된 여러사람이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강습소 자체가 유지되지 못하였고 일제말기 혹독한 전시체제하에서 사람들은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학원과 강습소도 폐쇄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일체의 사립교육을 허용하지 않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일본어 사용만을 강요하는 악랄한 황국신민화 교육정책을 시행하였으므로 이 때쯤으로 추정된다. 어렵지만 언니의 뜻을 이어 나가고자 마을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샘골에 왔던 최용경도 손들고 떠나 버린 뒤였다.

 

다만 1939년 여름, 최용신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개성 호수돈여학교의 교사 류달영이 샘골을 방문하고 언니 대신 강습소를 맡아 가르치던 동생 최용경을 만났으니, 그 때까지는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을 것이다. 유달영은 최용경으로부터 집필을 위한 여러 자료를 건네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최용신에 관해 가장 정확히 알고, 근거에 의해 연구고 기록한 사람은 유달영으로 귀결된다. 최용신소전은 사실에 입각하여 쓰여진 것이다. 그 이전에 심훈도 샘골을 방문하여 샘골에 있었던 일들을 수첩에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으나, 소설은 실화와 실제인물을 기반으로 썼다 하더라도 역시 소설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최용신의 활동과 업적을 격하하고 냉소적으로 본 첫 번째 사람들은 농촌진흥회 소속의 인근 조선인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지도자였던 일본인 오야마의 지침에 따라 최용신의 정신을 비방하고 깎아 내렸다. 그렇게 해야 자신들이 속한 관제조직의 농촌활동과 농민교육 봉사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당성과 우위성을 가지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 말기의 가혹한 탄압과 해방 후의 혼란, 이어진 전쟁등으로 최용신은 잊혀질 수 밖에 없었고 왜곡된 사실, 혹은 진실들이 나돌 법도 했던 것이다.

농촌진흥회 활동을 했던 청년들 중에는 살아남아 지역유지로 행세하면서 1980년대 최용신유적지의 발굴과 선양에 적극 반대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최용신에 관련된 몇가지 논란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반월신도시 개발과정에서의 최용신 논란

 

오늘날 최용신부활하여 우리 곁에 있으면서 그의 삶과 정신이 재조명되고, 후세들에게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통하여 교육되고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향토사적으로 지정되고 상록수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남게된 최용신 관련 유적이나 기념물들은 신도시개발이라는 국가정책과 몰지각한 사업주체와 지역인사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뻔 하였다.

천곡학원 강습소 자리는 물론이요 최용신묘와 샘골교회까지도 도자의 캐터필러와 포클레인의 삽질에 의해 간선도로가 될 운명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개발독재시대에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과 의지로 반월공단의 배후도시로 조성되면서, 중앙에 있는 공무원들과 설계자들이 지도위에 마음대로 선을 그어 당시로서는 반듯반듯한 꿈의 공업도시를 그렸기때문이다.

또한 샘골교회와 강습소 터에 자리잡았던 루씨유아원등이 보상금을 받고 이전을 기정사실화한 측면도 있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일 계획대로 밀어붙이고 또 이를 받아들였다면 최용신 유적을 비롯한 관계시설등은 흩어져 버리거나 전혀 관계없는 위치에 옮겨질뻔 하였으니 그나마 옹색하지만 원래의 위치를 지켜낸 것은 큰 다행이라 하겠다.

이것은 최용신의 제자들과 정신을 계승해온 후배들과 역사인식이 있는 인사들의 간절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1978년 12월 경기도의 위촉에 따라 문화재 관리국, 서울대, 경희대 등의 6개 조사팀으로 구성된 반월지구유적발굴조사팀이 구역별로 9-10월에 걸쳐 조사 사업을 실시해 작성한 보고서에 최용신 유적지가 제외됨으로써 논란과 반전 시작된다. 깍아지른 절개지 위에 위태롭게 얹혀져 있는 최용신 묘역. 아예 없어질뻔 했으니 이나마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른지 모르겠으나 지각없이 밀어부친 도시개발의 결과는 지각있는 사람에게는 가슴아프게 생각된다. 최근의 학술세미나에서 최용신의 헌신과 리더쉽이 아시안 청년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최용신이 가진 문화 역사 관광 컨텐츠가 이 도시의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음에도 그 가치를 묻어두고 있는 현실이 아쉽다.

반월출장소에 의해 1984년 4월 13일 [반월문화재발굴위원회]가 설치돼 상록수 유적화 문제가 제기됐을 때 잘 드러난다. 최용신의 평가에 대한 위원들간의 의견이 분분했고,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인사들이 지역유지로 위원회에 참가하면서 반성은 커녕 오히려 목소리를 높야 최용신을 무시하고 그 정신을 격하시켰으며 심지어는 개통되는 전철역사의 '상록수역' 지정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일부 그들의 논리는 `젊은 여선생이 판자집같은 건물을 짓고 아이들 몇십명을 모아 잠깐 가르친 것일뿐'이라는 참으로 그 시대의 상황과 현실에 대한 몰지각으로부터 비롯된 황당하고 편협한 주장이었다.시대정신은 물론이요 역사인식이 없는 무지에 더하여 자신들의 부끄러운 젊은날에 대한 변명이고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일제의 관제 농촌진흥정책과 그에 동조하여 일본인 오야마의 지도아래 조직된 부락진흥회 소속의 나름 똑똑했던 청년들이 지역에 남아 후에 힘있는 유지 행세를 했기 때문이다. 이 조차도 민족의 비극이요 간악한 일제의 분열조장 행위에 의한 조선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애국지사 염석주같은 이는 독립운동이 발각되어 비참하게 고문사 당한 다음 가족들도 흩어지고 그 많던 재산도 잃었지만, 일제에 협력하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지역에서 목소리를 낼 만큼 세상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최용신 추모사업을 하고 있는 김명옥씨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분은 임종을 앞두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때 최용신유적지를 지키고자 애쓴 이들은 누구보다 최용신을 잘 알고 있으면서 나라의 어른이 된 류달영선생과 김우경을 비롯한 샘골교회 교인들과 초대 법정 안산시 문화원장을 지낸 류천형선생등이었다.

 

일본인 오야마의 정체

 

당시 샘골 주변에 존재했던 일본인 오야마의 정체에 대한 연구도 세심하게 살펴야 할 과제이다.

 

최용신유훈비 논란

 

상록수공원에는 돌에 새겨진 여러 개의 기념물이 세워져 있는데 유훈비도 논란의 와중에 있는 그 중 하나이다. 제자들의 증언이 있을뿐만 아니라 직접 성금을 모아 돌에 새겨 세우기도 한 유훈비의 내용이 실제 최용신이 남긴 유훈이 맞는가 하는 것이 쟁점이다.

 


 

  

 

최용신선생님의 남긴 말씀

 

겨레의 후손들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네가지 요소가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함이라

위의 유훈이 정말로 최용신선생이 남기신 말씀이 맞느냐 하는 부질없는 논란으로 보인다.​ 이 비는 문화관광부 2001년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여 문화관광부,안산시,안산문화원,샘골교회가 세운 것으로 되어있고 원산 루씨고녀동창회와 감리교 신학대학교 및 안산시 기독교연합회가 협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등 책임있는 기관들이 공동으로 건립한 것이므로 전혀 근거없이 없는 유훈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것이나, 제자들이 이와같이 가르침을 받았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최용신소전(류달영 성서조선 1939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위대한 사람을 만드는데는 네 가지의 소유가 있는데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대한 사람의 전기를 읽고 많이 분발함이라"

 

이렇게 말한 옛 사람이 있었소

 

빈곤은 확실히 위대한 사람을 만드는 장인의 구실을 하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웅변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소』

 

유달영은 최용신을 위대한 인물의 반열까지 높여 이르고 싶어 하면서, 이것은 옛 사람의 말이라고 하였다. 최용신이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사실과, 역경을 극복하고 그로 인해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만한 업적과 정신을 남기었노라고 강조한 듯 싶다.

 

제자들 중에는 이 글귀를 벽에 걸어놓고 여러번 말씀하였다고 증언하는 이도 있다. 안산시의 관계자는 최용신이 가르쳤다고 하고 실제로 유훈의 내용을 실천하고 사신 분이니 문제가 없지 않느냐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말씀하고 가르친 내용과 기록이나 근거가 남지 않은 상태에서 진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유훈이었다고 하기에는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남겼는가 하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유훈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다. 70여년 뒤의 후손들이 이 달의 문화인물로 최용신을 선정하고 추모하면서, 교훈적 내용을 강조하고 전파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좋을 듯 싶다.

  

샘골강습소 교가 진위

 

2007년 11월 최용신기념관이 완성되어 개관식을 할 때에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식중에 울려 퍼졌다. 안산시가 발굴했다는 샘골강습소의 교가를 시립합창단이 부른 것이었다. 가사는 최용신이 가사를 개작하여 지었다는 설명이고 샘골의 박춘자라는 분이 어렸을 때 불렀던 것을 채록하였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곧 바로 진위 논란에 휩싸였다.

샘골강습소 교가

1절
반월성 황무지 골짜기로
따뜻한 햇빛이 찾아오네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빚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빚​ 

2절
오늘은 이땅에 씨 뿌리고 
내일은 이땅에 향내 뻗쳐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싹
우리의 강습소는 조선의 싹 

3절  

황해의 깊은 물 다마르고
백두산 철봉이 무너져도
우리의 강습소는 영원무궁
우리의 강습소는 영원무궁 

​교가의 원곡이리고 하는 월북작곡가 안기영이 작곡한 동요 `조선의 꽃'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꽃 (작사 리은상 작곡 안기영 노래 김현선) 가사


1절                                       노래듣기  김현순이 부른 꽃밭에 이어 두번째 곡이다       http://blog.daum.net/bansong0729/7349

거친산 등성이 골짜기로             

봄빛은 우리를 찾아오네
아가는 움트는 조선의 꽃 

아가는 음트는 조선의 꽃

 

『최용신선생과 같이 가르쳤던 보조교사 황종우는 ‘조선의 꽃’ 이란 노래를 많이 가르쳤지만 ‘교가’라고 하지 않았으며 현재의 교가 가사(안산시 발표)가 아닌 본래 그대로의 가사였다고 했다. (2013. 6. 16 황종우 증언)  최용신이 살았을 때 배운 제자 홍석필이나 이덕선도 교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볼 때 최용신이 살았을 때는 교가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제1회 최용신 학술 심포지움 자료집 p.79 (홍석창목사 발표문 중에서)

 

『 ‘조선의 꽃’ 1930년대에 전국적으로 애창되던 동요로 샘골강습소에서도 물론 불리워졌을 것이다. 안산시가 발표한 샘골강습소 교가는 최용신선생이 직접 작사 작곡하여 생전에 샘골강습소에서 불리어지지 않았다.』고 홍석창 목사는 결론지었다.

 

위 유성기를 통해 들을 수 있는 노래는 샘골강습소 교가라고 하는 노래 조선의 꽃 원곡이다. 이 동요는 오빠생각,퐁당퐁당 등 당대의 유명한 동요들과 함께 1924년부터 해방 때까지 널리 불려졌다. 노래는 자못 씩씩하고 비장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독립군가로도 불리웠다는 설도 있다. 독립군가의 가사는 아직 발굴하지 못하였다. 

 

원곡 가사에는 `봄빛은 찾아오네' `아가는 조선의 꽃'이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조선에 봄빛처럼 광복이 올 것임을 암시하고, 아가들이 조선을 꽃피울 것이라는 독립의 염원이 담겨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하는 가사가 조선의 암울한 처지를 빗대어 불려졌 듯이 말이다.

 

1920년데 후반 발표되어 1931년에 김현순이라는 이화여전 출신의 가수가 LP판을 내었다. 한참 때인 20대 초반의 인텔리여성이었던 최용신은 이 노래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아침 저녁으로 불렀다는 증언이 있다.

 

다만, 최용신이 가사를 개사하여 교가로 불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안산시에 의하면 이 노래는 고등농립학원 교사였던 김우경이 생전에 증언하였다고 하고, 제자였던 박석원이 자녀들에게 받아쓰게 하고 부르게 하였으며, 박석원의 딸 박춘자 할머니가 구술하여 시립합창단에서 채보하였다고 한다.

 

<용신은 천곡학원 교가가 없다는게 늘 맘에 걸렷다. 교가가 없어 찬송가로 대신해 왔던 것이다. 고심끝에 '아가는 꽃' 이란 조선독립군가에 직접 지은 가사를 붙여 학생들에게 부르게 했다. 천곡학원 교가였다.>                                             (어리석은 선구자 최용신. 173페이지 ,2010년 안산시, 서병욱)

안산시가 펴낸 평전 형식의 책 `어리석은 선구자 최용신'에 나오는 대목이지만, 천곡학원 교가라고 단정지은 것은 저자의 오류이거나 완전 허구라고 생각된다.​ 소설 상록수에나 묘사될 수 있는 근거없는 기술인 것이다.

이 노래는 결론적으로 조선의 꽃이라는 곡에 가사를 개사하여 교가로 부른 것은 최용신 사후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1960년대 들어 샘골강습소 자리에 최용신의 유지를 이어받아 설립한 샘골농민학원의 교가인 듯 싶다.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부터 많이 불리웠기 때문에 곡조가 친근하고, 단조로운 후렴의 반복등 교가로 개사해 부르기 쉬웠을 듯 하다.

`조선의 꽃'은 꽃밭'이라는 노래 다음에 두 번째 곡이다.

 


- 상록수 최용신을 찾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