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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악한 왜놈들의 농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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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대한민국

2019. 5. 30.

간악한 왜놈들의 농간






일본학 박사인 미국인 코벨 박사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연구하고 폭로한 서양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이며 일본학 박사인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존 카터 코벨, 앨런 코벨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1978~86년엔 한국에 머물며 한국미술, 한국불교, 한일 고대사, 도자기 등에 대한 1000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 ‘조선호텔 70년사’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저서를 펴냈다. 그의 아들, 앨런 코벨 박사 역시 부여족을 연구하며 한일관계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다음의 글은 1982~83년 존 카터 코벨과 앨런 코벨이 한국과 일본 역사적 진실에 대해 쓴 칼럼을 요약한 것이다. 

     

①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 신라의 천마도.

    (일본의 스사노오노 역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② 백제 근초고왕 때 왕세자가 왜왕에게 하사한, 7개 곁가지가 있는 칼 ‘칠지도’.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졌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쓰여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거꾸로)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에서 와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왜를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중국 통제(Control), 한국 무심(Casual), 일본 작의(Contrived)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인정해서) 과도하게 발전(변형)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한국도자기의 고도의 자연미를 제대로 흉내 내지 못했다는 말인 듯.)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

서예에서도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은 차이가 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유명한 선승들의 붓글씨 어느 것이나 그러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한국의 서예는 글씨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무심한 경지를 보인다. 일본 서예에서는 작의성이 엿보인다. 영국에서 일본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조지 샘슨 경은 컬럼비아대학 재학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내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한 9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살아온 조지 샘슨은 저서 ‘1334년까지의 일본사’에 ‘이즈모 후도키(出雲 風土記)에 전해지는 일본 고대사의 흥미로운 전설’에 대해 썼다. ‘이즈모 후도키’는 713년에 나온 책이다. 당시 겐메이(元明) 여왕은 각 현에 그 지방의 역사와 지리, 희귀한 일 등을 기록해놓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3군데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라에서 온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던 이즈모(出雲)에 관한 것이다. 이즈모는 적어도 2~4세기 당시에는 일본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샘슨이 후도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신이 어느 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가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 ‘땅 끌어가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빙하시대의 지표이동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샘슨 경은 “이것은 남아돈 땅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주한 것을 민간 설화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침입한 것이 아니라 이주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신라 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오빠이며 일본의 역사서에 ‘맹렬한 남성’으로 기록된 스사노오노는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운데서도 아주 정력적인 남자였던 듯하다. ‘그는 김해에서 바다 건너로 금과 은을 보냈다’고 한다. 또 신라지역인들의 무속적 지도자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1973∼74년 천마총 고분에서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경 신라의 천마도가 발굴됐다.

 

판소리를 말살하려던 이유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 중 어떤 부분은 지금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아 출판된 역사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샘슨 경이 예술문화사 분야의 스승으로 여기던 사람이 바로 도호쿠(東北)대학의 후쿠이 리키치로(深井陸次郞) 교수다. 후쿠이 교수는 “15세기 아시카가 막부시대의 뛰어난 수묵화가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그들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으로 절이 핍박받자 더 이상 절에 의탁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의 불교미술가들”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편 학자다. 712년에 씌어진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는 과거 문자기록이 불가능하던 때 역사 속 왕의 치적과 영웅담을 자자손손 내려가며 노래처럼 외워 부르던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한국의 판소리와 같은 유형이다. 일본이 과거 왜 한국의 판소리를 말살하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고사기)은 한눈에도 엉성해 보인다. (조작이 너무 많이 되었다는 뜻인 듯.) 그럼에도 이 책에서 한국인들의 놀라운 위력을 입증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것이기에 이를 완전히 감춰버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좋은 것은 무조건 일본 것이란 일본인의 하차원 사고

일본 내엔 ‘좋은 것은 무조건 일본 것’이라는 사고가 아직(1982년)도 팽배해 있다. 일례로 그들은 진위 여부는 가리지 않고, 7세기 아스카 불교 미술품들도 단지 일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것이 아닌 일본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나는 법륭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아스카시대 불교예술품이 한국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다. 예술사가인 나는 거만한 일본 미술사가들이 7세기 일본의 중요한 국보급 미술품들이 한국적 진수가 담긴, 한국인 손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솔직히 나는 중동이 세계문제의 중심이라고 보지 않는다. 석유는 중요한 것이지만 세계는 지난 수 천 년 간 석유 없이도 지내왔고 앞으로 대체연료를 찾아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극동문제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한국은 거기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상 일본 천황 혈통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 역사교과서에 써놓은 것처럼 일본왕통이 서기전 660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4세기 들어 처음 생겨난 일본왕가는 바로 우수한 무기와 기마병을 이끌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한국 부여족이다. 505년에 일시적으로 교체됐으나 부여족은 계속 중요한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다가 6세기 후반에 가서는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사실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가. 아니다. 절대 그렇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

역사왜곡이 문제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 일본은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일본)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사실상 왜인들은 오직 백제(한국)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의 일기-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신라방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임진왜란 때)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키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난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적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 순수한 일본 고유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수준 높은) 노동력이 일본의 예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나카소네 총리는 한국계?

1983년 2월 신문은 전두환 대통령과 나란히, 한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일본 총리의 사진을 실어 보여주기 바빴다. 나는 수년간 한일 양국에서 생활하며 전형적인 한국인과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을 구별해 알아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전 대통령과 나카소네 총리의 사진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나카소네 총리의 얼굴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다케오 후쿠다 전 일본총리는 대중 앞에서 그의 조상이 15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규슈로 이주해온 도래인(渡來人) 혈통임을 공표했다고 들었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가계 또한 후쿠다 전 총리처럼 먼 조상이 한반도에서 이민 온 집안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문화사를 공부하는 내가 들은 나카소네의 만찬 연설 중 핵심은 “6, 7세기 일본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해준 기술과 문화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 부분이다. 이제 일본의 지도자들이 그들이 진 빚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할 때다. 나카소네 총리는 그들이 (한국에) 진 문화적·기술적 빚이 6, 7세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 이전인 5세기 전체, 부여족의 혈통으로 일본 천황자리가 채워졌던 시대까지 걸쳐 있다고 언급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우호적인 말들이 새로 씌어질 일본 교과서에 반영됐으면 한다. (이상 존 카터 코벨 박사와 앨런 코벨 박사의 글 번역이다.)

 

일본이 두려워한 여인 존 카터 코벨

미국 서구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일본미술사와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78년 하와이 대학을 정년퇴임할 때까지만 해도 동양미술사의 권위자로서 학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던 그녀에게 한국에서 예정한 6개월이라는 체류시간이 9년으로 늘어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180도 달리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1978년부터 체류하는 동안 그녀는 '일본 것' 혹은 '중국 것' 으로 알아왔던 수많은 미술품들이 사실은 한국땅서 건너갔거나 한국인 예술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1981년 <코리아타임스>에 쓴 글 "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는 가짜였다 "를 시작으로 아들과 함께 쓴 관련 글들은 모두 7권의 책과 1400 편이 넘는다. 978~1986년까지 체류하며 그녀가 쓴 글은 당시 한국대중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앞서간 내용이 많아 그런지 한글번역 소개는 1982년 ' 경향신문' 에서만 가능했다.

 

일본역사 날조의 역사

한국의 문화재가 일본에 많이 가 있는 것처럼 이집트의 문화재는 런던에, 일본의 문화재는 보스턴에 많이 가 있는데, 런던에 있는 이집트 문화재는 처음부터 이집트 것으로, 일본 것은 일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해 일본에 가 있는 한국 문화재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완전한 일본작품 혹은 중국 것으로 왜곡되어 있어서 이제 와서 한국이란 근원을 찾는 작업은 지극히 어렵고도 미묘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날조의 한 예로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 문화적으로 일본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린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크면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쉽다고 했다. 그렇게 역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주장을 하며 우리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받아 들여왔다. 이런 식의 수많은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목격한 코벨박사는 이 어려운 작업에 도전장을 내밀고 남들은 은퇴하고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보낼 시간에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녀가 무턱대고 한국미술이 우월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님을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특히 쉬운 언어로 난해한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단순해 보여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맨 처음에 출간된 ' 한국문화의 뿌리' 는 일반인도 부담없이 슬슬 읽혀내려 간다.

 

당사자인 대한민국은 왜 소극적일까? 진실을 밝혀야!

코벨박사는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 까닭에 처음에는 한국미술을 일본식 눈으로 보았지만, 점차 한국식으로 바뀐 눈으로 일본에 보존되어 있는 한국미술을 보게 되면서 어째서 일본은 그들이 한국문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그토록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라는 기본적은 질문을 가지게 된다. 일본 내의 박물관장들은 아무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유교가 지배적인 일본에서 그 누구도 오래전부터 일본적으로 치부해놓은 예술품의 분류가 부정확할 뿐 아니라 국수주의적 행태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서 일본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반면, 코벨박사를 내내 괴롭혔던 생각은 왜 당사자인 한국(당시 1981년 하지만 지금도 분위기상 큰 차이는 없고, 오직 자기 나라 선배학자들만 공격하거나 패배적인 시각으로만 견지하는 것 같이 보인다.)은 이토록 소극적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 해법으로 나이든 학자들은 일본사람 밑에서 공부했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젊은 학자들,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은 이들은 박차고 일어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했다.

 

부여 기만민족의 에너지가 한류의 원동력

부여 기마족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시작으로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관계의 흐름은 99%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일방적 흐름이 지속되었고, 그 영향은 그림, 건축, 도자기 등 수많은 미술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실제로 책속의 많은 사진과 그림을 통해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나머지 1%는 20세기 초 동경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많은 한국화가들이 일본식 구도에 일본식 채색을 사용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것도 당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코벨박사의 생전에 하던 말씀 중에 "한국인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에너지는 부여 기마족이라는 한민족의 조상을 이해하는 데서 수수께끼가 풀릴 것. 한국인의 조상 부여족의 실체를 파헤쳐 그들의 에너지를 이어받는 것이야말로, 오랜 기간 지속된 유교의 침체적 분위기보다 한국의 미래를 확실하게 할 힘의 원천이 될 것 "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서 이 주장이 피부에 와닿고 있다. '부여 기마족과 왜' 라는 그녀의 책에서 '바위의 아이들' 이란 단어로 한국의 민족적 기질을 정의했는데, 일본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한류를 보며 고대부터 외부에 긍정적 영향을 끼쳐왔던 우리민족의 문화적 힘을 새삼 느끼고 있다.

 

코벨의 업적을 외면하는 한국사학계의 자학사관

1996년 코벨박사가 미국에서 작고한 뒤 그의 유해 일부가 일본 교토 다이토쿠지 신주안에 안장되었는데, 그녀의 생전에 한국의 해인사 등 몇 군데 절에서도 그녀의 묘자리를 약속했는데, 그의 사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한국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코벨박사가 더 이상 일본의 편에서 얘기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아니 가차없는 지적과 신랄한 비판에 대해 오랜 기간 그녀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일본학계는 섭섭함과 상당한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그녀를 받아준 건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저 학자로서 역사적 사실규명에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자기 나라도 아닌 일에 이토록 열정적일 수 있을까? 한국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고 받는 것도 없이, 이만한 학문을 이룬 그녀의 업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서양학자가 던지는 신랄한 비판과 의문에 대해 생각이나 가지고 있었을까? 한심한 일이다. 친일사관을 탈색시킨다는 틈을 비집고 자학사관과 함께 좌파논리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진흑탕에 빠뜨리는 반국가적인 이념주의자들만 양산해 냈던 현대 한국역사학계가 아니었는지? 그러니 말도 안되는 독도논쟁에 쳐해 있는 한심한 국가가 되었으니 답답할 뿐이다.

 

출처 : 심온세상  |  글쓴이 : 심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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